역사(history)2021. 5. 8. 14:00

 

출처 기사 https://bit.ly/3xTHUVF

 

 

 

5·18 '북한군 개입설' 거짓의 뿌리…북 특수군 김명국 추적

 

[JTBC] 입력 2021-05-06 20:45 /

[앵커]

 

지금부터는 41년 전 5월의 광주에 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뉴스룸은 그날의 진실을 가리려고 하는, 이른바 '북한군 개입설'의 뿌리를 추적해 왔습니다. 북한군이 광주에 침투해서 사실상 5.18을 기획하고, 또 시민군을 조종했다는 이 거짓말의 출발점을 확인해 온 겁니다. 그 중심엔 북한 특수군 출신으로, 2006년에 탈북한 김명국이 있었습니다. 2013년엔 방송에 나와서 자신이 직접 광주에 갔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잠적한 뒤에도 이 주장은 북한군 개입설에 이용돼 왔습니다. 저희 취재진은 석 달에 걸친 추적 끝에 김명국을 찾아냈습니다. 끈질긴 질문에 결국, 그는 사실이 무엇인지 털어놨습니다.

 

우선 북한군 개입설이 그동안 어떻게 퍼져왔는지부터 송우영 기자가 정리했습니다.

 

[기자]

 

북한군 개입설을 처음 주장한 건 탈북자 임천용 씨입니다.

 

임씨는 2006년 북한군이 땅굴을 통해 광주에 잠입했다고 주장했습니다.

 

2008년 자신이 바로 광주에 왔던 북한군이라 주장하는 인물이 나옵니다.

 

김명국, 2013년 한 방송에 등장해 사회적 물의를 빚은 인물입니다.

 

[김명국(가명)/5·18 당시 광주에 있던 북한군 : 우리 나이 되는 사람들은 복무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어요. 광주 폭동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조장, 부조장들은 군단 사령관도 되고 그랬어요.]

 

김씨의 증언은 2017년 책으로 나왔습니다.

 

공교롭게도 이때쯤 전두환 씨 회고록에도 북한군 개입설이 언급됩니다.

 

[전두환 회고록 (1권 406쪽) : 무기고 탈취는 군대에서도 고도로 훈련된 병사들만이 할 수 있는 것으로…(중략)…지금까지 꾸준히 제기되고 있는 북한 특수군의 개입 정황이라는 의심을 낳고 있는 것이다.]

 

김명국의 증언을 토대로 한 논픽션 책 '보랏빛 호수' 줄거리입니다.

 

1980년 5월 19일 황해남도 장산곶 바다에서 두 척의 배를 타고 북한특수군 50명이 내려왔다.

 

 

 

20m길이의 남한 고기잡이배 모양, 유사 시 자폭도 가능한 특수간첩선이다.

 

5월 21일 새벽 2시쯤 서해안에 상륙했는데, 해변 여기저기 돌들이 널려 있었다.

 

19살이었던 나는 특수군 대장 문제심의 호위병, 5시간 정도를 행군해 광주에 도착했다.

 

23일 오전 바리케이드가 놓인 광주의 큰 건물 안에 들어갔고, 우릴 기다리던 시민군을 만났다.

 

27일 임무를 마친 우리는 휴전선을 넘어 북한으로 돌아갔다.

 

북한군 개입설은 당시 북한이 시민군을 지원했고, 계엄군에도 잠입해 서로 총을 쏘게 했단 내용입니다.

 

적화 통일을 위해 북한이 5·18을 기획하고 조종했단 겁니다.

 

지만원 씨는 "5·18이 북한 특수군들이 일으킨 게릴라 전쟁"이라고 주장해왔습니다.

 

가장 강력한 증거로 주장한 것이 바로 '김명국'의 존재였습니다.

 

최근엔 대학 교수가 교단에서 북한군 개입설을 가르쳐 큰 논란이 됐습니다.

 

유튜브 등 온라인에서도 북한군 개입설을 손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2.

 

https://bit.ly/3b9y8EU

 

단독] 5·18 '논픽션'?…탈북작가 "만든 이야기" 실토

[JTBC] 입력 2021-05-06 20:30 /

 

 

[앵커]

 

이 책을 쓴 탈북 작가 이주성 씨도 직접 찾아갔습니다. 이씨는 그동안 사실만을 담았다고 주장해왔습니다. 그런데 취재진이 만나보니, 본인이 지어낸 이야기를 담거나 관련 없는 일을 5.18에 끼워 넣기도 했습니다.

 

채승기 기자입니다.

 

[기자]

 

광주에 남파됐던 한 탈북군인의 5·18 체험담.

 

탈북작가 이주성 씨는 내용은 전부 사실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일부는 자신이 창작했다고도 말합니다.

 

[이주성/'보랏빛 호수' 저자 : (김명국이 이야기한 적이 없대요.) 맞아요. 그건 맞다고. 그건 내가 만들어냈는데 왜 그걸 넣었냐면. (작가님이 만들었다고요?)]

 

남파된 북한군이 고정간첩을 만난 장소로 묘사됐던 광주 무등산의 사찰 증심사.

 

책에는 북한군을 조직, 지휘한 스님 손성모가 증심사에서 이들을 맞이했다고 나옵니다.

 

[이주성/'보랏빛 호수' 저자 : (그러니까 어떤 근거 자료를 갖고 계세요?) 난 이북에서 그걸 듣고 내려왔거든요. (이북에서 들으신 내용이다?) 네.]

 

손성모는 실존했던 남파 간첩인데, 5·18에 끼워넣었단 겁니다.

 

증거는 "내가 북한에서 듣고 왔다"뿐이었습니다.

 

창작은 더 있었습니다.

 

북한특수군이 작전 중 민간인을 살해했다는 내용도 만들어진 이야기였습니다.

 

[이주성/'보랏빛 호수' 저자 : (북한에서) 5·18을 딱 짚지는 않았는데 북한의 남파된 사람들이 이제 간첩 활동을 하잖아요. 하다가 이제 한국 사람들한테 걸리게 되면 무조건 죽여야 된다. (김명국씨 사건이랑 관계는 없네요?) 관계는 없어요.]

 

결국 논픽션이 아닌 이야기에 또 다른 이야기를 섞은 소설이었습니다.

 

 

 

 

https://bit.ly/2SEA7el

 

단독] 북한군 김명국 "5·18 광주침투설은 내가 지어낸 것"

[JTBC] 입력 2021-05-06 20:26

북 특수군 출신 '김명국'…석 달 추적 끝 '진실 고백'

김명국 "5·18 광주 간 적 없다…논란 커져 겁났다"

 

 

 

[앵커]

 

직접 광주에 갔다는 북한 특수군 출신, 김명국은 2013년 방송에 등장한 이후에 사라졌습니다. 취재진은 석 달에 걸친 추적 끝에 김씨를 어렵게 만났습니다. 처음엔 광주에 갔던 북한 특수군이 맞다고 주장하더니, 이후 계속된 만남에서 그동안의 말을 완전히 뒤집었습니다. 5.18 당시 광주에 간 적이 없다고 말한 겁니다. 그동안 논란이 너무 커져서 뒤늦게 말을 바꾸기가 겁이 났다고 했습니다.

 

봉지욱 기자입니다.

 

[기자]

 

탈북 군인 김명국의 실명과 인상 착의부터 파악한 취재진, 수소문 끝에 김씨를 찾았습니다.

 

[김명국 선생님이시죠?]

 

김씨는 자신이 5·18 때 광주에 갔던 북한특수군이 맞다고 말합니다.

 

당시 19살로 북한군 대장을 호위했다고 합니다.

 

[김명국/북한군 출신 탈북민 : (전남도청)지하에다가 큰 전투를 벌일 수 있는 게 있다고 그러더라고. 그게 그니까 다이너마이트 그다음에 무기 몇 정 뭐 이런 걸 가지고 조장이 말한 것 같아. 우린 들어가지 않았어. 우린 안 들어가고. (1층에 계셨어요?) 아니 우린 바깥에 경계를 섰지. 책에 그렇게 돼 있을 건데, 우린 경계를 섰어.]

 

광주에서 철수하며 한국군과 교전도 했다고 주장합니다.

 

[김명국/북한군 출신 탈북민 : 나는 맞아 철수할 때 그 국군 애들이 막 그래서 총을 쏠 적에 한두 놈 나가 맞아서 나가 자빠지는 건 봤어. 근데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겠어.]

 

취재진은 석 달 동안 4차례 걸쳐 김명국을 찾아갔습니다.

 

[김명국/북한군 출신 탈북민 : 아, 좀 오지 말라니까. 자꾸 이렇게 오겠어요? 진짜?]

 

실랑이 끝에 뜻밖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김명국/북한군 출신 탈북민 : (그럼 제가, 저희가 다신 안 올테니까. 광주에 오신 적이 있으세요?) 없어요. (오신 적 없으세요?) 예. 나는 5.18 (조사위)에 가서 우리 조장한테서 들은 얘기를 했어요. 들었고. 들은 걸 그대로 전달했다고 그랬어요. (그럼 광주에 오신 적은 전혀 없다) 예.]

 

김씨는 최근 518 진상조사위원회에 찾아가 진실을 털어놨다고 합니다.

 

자신은 광주에 간 적이 없단 겁니다.

 

남파 간첩을 키우는 대남연락소 소속 전투원이었던 김씨.

 

진위 파악조차 안 되는 조장의 얘기를 듣고, 자신도 함께 간 걸로 이야기를 만들었습니다.

 

[김명국/북한군 출신 탈북민 : (조원들이) 조장이랑 같이 내려왔고. 그 얘기를 우리한테 해줬고. (그게 50명인가요?) 50명인지는 모르겠어. 조가 그러니깐은. 그렇게 조가 나왔다니까 그 인원이 그렇게 된 거야. 그거에 대한 걸 얘기하는 과정에 살이 붙어진 거야.]

 

모든 게 전해 듣거나 지어낸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지만원 등 일부 세력이 자신을 이용했다며 억울해합니다.

 

[김명국/북한군 출신 탈북민 : 솔직히 (내가) 이용당한 거는 맞지 않는가? 나는 뭐 그거로 인해서 일전 한 푼 받은 거 없는데. 내가 무슨 도움받고 한 것도 아니잖아.]

 

2013년 방송 출연도 촬영하는 줄 몰랐다고 해명했습니다.

 

이후 논란이 너무 커져, 뒤늦게 말을 바꾸는 게 겁이 났다고 합니다.

 

[김명국/북한군 출신 탈북민 : 그래서 나도 좀 솔직히 말하면 많이 끌려다녔어요. 내 하나의 결심이 이 나라를 바로 세울수 있다면 내 망신스러워도 내 길을 내가 갈 것이다.]

 

김씨는 조만간 얼굴을 공개하고, 광주 시민에게 사죄하겠단 뜻을 밝혔습니다.

 

[앵커]

 

김명국 씨는 내일 저희 취재진과 단독으로 인터뷰를 진행합니다. 얼굴을 공개하고 그동안 감춰온 진실을 말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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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history)2021. 4. 21. 18:50

1995년 고소영 기사를 보며. 소비생활이라는 측면에서.  40~50과 20~30 세대 차이보다는 공통점이 더 많다. 그리고 차이점은 20~30세대는 노골적인 '자본주의 이윤추구' 논리가 판치던 시대에 청소년기를 보냈다는 것이다.

 

40~50세대는 제한속도 60km 도로에서 자동차를 운전했다면, 20~30세대는 제한속도 150km라는 자본주의 고속도로에서 '대형 사고' 위험을 안고 인생주행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 캐나다, 독일, 영국이 1975년~1995년 사이에 겪었던 세대간 '행복 역전'을 한국은 1997년 이후 지금까지 '동일성'과 '차이성'을 껴안고 있지만, 저 나라들과 유사한 방식으로 '행복 역전' 시기를 경험하고 있다.

26년전, 지금 돌이켜보면, 1995년 당시 서울 생활도, 한국 사람들에게 20세기 들어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가장 풍족한 해였을 것이다. 1997년 외환 위기와 그 이후 '복지 삭감, 노동자 해고 자유, 초국적 자본 투자'라는 IMF 긴축통치는 한국인들에게 '자본주의의 이윤추구 논리'가 얼마나 살벌하고 무서운지를 보여줬다.

 

미 클린턴 행정부 재무부 장관, 전 골드만삭스 회장 출신인 로버트 루빈이 한국인들도, 97년 외환위기 이후, '합리적 소비자,경제인'이 되어야 한다고 했는데, 정작에 2008년 로버트 루빈 류의 미국 금융자본주의는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 이후, 금융공황에 빠졌다. 

 

고소영이 외친 슬로건 "평범한 건, 딸 질색이예요", 좋은 의미로 해석하면, '나만의 고유한 개성'을 가진 독립된 인격체가 되겠다는 소망과 다짐이다. 비판적으로 보자면, '내 돈, 실력, 명성으로, 남이 소유하지 못한  명품 브랜드를 소비할 수 있는 화폐 크기'를 보여주겠다는 결의이기도 하다.

 

1970년 이후 세대는, 1960년 중반 세대부터, 소위 '문화 세대'이다. 그 이전 세대와 달리, 활자에서 '영상' 세대로 넘어가는 세대이자, 한국 전쟁 이후, 최초로 '정착 문화'가 본격화되던 세대이기도 하다.  박찬욱, 봉준호 감독이 이 세대에 속한다. 

 

2021년 서울시장 보궐 선거 이후, 20대~30대 (1990~2000년 태생)에 대한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면서, 20대 남자가 보수화되고, 20대 남자들이 전부 반-여성주의인 것처럼, 혹은 20대~30대가 40-50세대와 달리 '주식시장 투자' '영끌 모아 부동산 투자' '비트코인 열풍'에 휩쓸려 나간, 마치 '정신 넋나간 , 영혼없는 수전노'로 묘사를 하고 있다.

 

1960년대~1970년대 세대는 '돈 없이는' 살기 힘든 세대다. 그들 부모는 일제 치하~ 한국 전쟁을 겪어, '주먹밥' '소나무 껍질' 파먹고 살았다고 말해도, 60~70년대 세대는 '어머니 아버지, 한번만 더 하시면, 100번째입니다'라고 심리적 전투를 밥상에서 벌였던 세대이다. 

 

그리고 그들 부모세대와 더불어 1990년대, 97년 IMF 신자유주의 독재치하가 오기 전까지는, 20세기 조선과 한국을 통틀어 최고의 소비시대, 풍요시대를 잠시나마 풍미할 수 있었다. 

그러나 20-30 세대는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부터 자본주의 '경쟁' 논리와, '부자 아빠 되세요' 타령을 보면서 자라났다. '내가 실력없으면, 내 부모라도 재산이 없으면, 패배자가 된다'는 불안감을 전 사회적으로 부추켰다. 

독일 히틀러 나치즘의 이데올로기인 '적자 생존'의 논리를 일상생활에서 20-30세대는 당연시 받아들였고, 이러한 나치즘의 생활용어, '엄친아 DNA, 재벌 3세를 부러워하거나 특권을 자연법 사상으로 승격화시키는 미디어' 등은 '나는 애초에 너희들과 달라' '너는 애초에 나와는 달라'라는 식의 태생적인 신분계급사회 이데올로기를 정당화시켰다.

20-30세대가 이런 나치즘 생활철학을 만들었는가? 아니다. 현재 50-60-70세대가 만들어내고 실천한 것이다. 20-30세대의 부모세대인 50~70세대는 1988년~1997년 10년간 한국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소비생활을 경험한 세대이다. 중하층까지 '전세집에 살아도 자동차'를 소유할 수 있는 세대였다. 

 

이 50~70세대의 특징은 자기 부모세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고학력이었기 때문에, 자기 자녀 세대 (20-30세대)에게 가치관, 세계관, 행복관을 더 철저하게 더 일관되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자본주의 '브랜드'와, 사회적 권력의 '브랜드'에 사족을 못쓴다는 점이다. 

20~30세대의 온라인 놀이를 보면 알 수 있다. 서울대 철학과 대 부산 고신대 의대, 이 둘 중에 무엇을 택할 것인가? 이런 '선택 놀이'를 하는데, 이들 놀이 밑에는, '가성비'라는 투하 자본과 산출 사이, 투자와 이윤량 차이의 차이를 '산수적'으로 계산하는 능력을 극대화하는 사고가 자리잡고 있다. 

 

20-30세대가 다 획일적인 등질적인 집단인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20세대도 30세대와 다르고, 그 내부 계급 계층적 균열과 갈등 역시 심각하다. 조잡하게 갈등을 조장하는 '성 대결' 역시 마찬가지이다. 서로 다르다.

 

다만 40~50세대와 그들 자식,조카 세대인 20~30세대가, 소비 생활, 가치관이라는 측면에서 '질적으로 다른' 것처럼, 그리고 공통점보다는, 차이점만 부각시키는 관점은 오류라는 점을 말하고 싶다.

 

 

 

 

 

Posted by NJ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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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history)2021. 3. 7. 20:43

조봉암 진보당 조작 사건 증언.

 

1999년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한승격 당시 수사관

 

https://bit.ly/2Oy3sER

 

[의혹과 진실 - 한승헌의 재판으로 본 현대사](9) 진보당 사건과 조봉암 (下)

■ 재심 기각 18시간 만의 사형 집행 재심이 기각된 다음날(1959년 7월31일), 변호인단이 다시 한번 재심청...

news.khan.co.kr

 

진보당 사건은 조작됐다"…당시 조사요원 本報에 증언

입력 1999-08-17 23:49수정 2009-09-23 20:22

 

 

59년 죽산 조봉암(竹山 曺奉岩)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했던 ‘진보당 사건’은 당국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는 증언이 당시 수사에 참여했던 수사관으로부터 나왔다.

 

그동안 ‘진보당 사건’의 피해자와 학자들로부터 ‘진보당 사건’이 조작됐다는 주장은 여러차례 제기됐지만 이 사건을 직접 조사했던 수사관이 조작사실을 털어놓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당시 서울시 경찰국 조사요원으로 진보당 조직부장 전세룡(全世龍·82·서예가)씨를 조사했던 한승격(韓承格·89)씨는 15일 전씨와 함께 동아일보 기자와 만나 “당시 경무대로부터 조봉암을 잡아넣지 않으면 이승만(李承晩)대통령의 재당선이 불가능하니 어떤 수를 쓰더라도 잡아넣으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한씨는 조사과정에서 “당시 상부로부터 ‘진보당을 없애고 죽산을 죽일 수 있을 만큼 사건을 엮지 않으면 네가 죽을 것’이라는 협박도 받았다”고 말했다.

 

한씨가 진보당 사건의 조작 지시를 처음 받은 것은 사건이 터지기 직전인 57년 말.

 

당시 이승만 정부는 56년 5월 제3대 대통령선거에서 엄청난 선거부정을 저질렀음에도 이대통령과 대결한 죽산 조봉암이 260여만표(전체 유효투표의 30%)를 얻은데 대해 심한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

 

한씨에 따르면 “당시 경찰고위인사가 간부 몇 명과 한씨를 불러놓고 ‘경무대에서 조봉암을 그대로 두어서는 이대통령의 재선이 불가능하니 치안국이 책임지고 대책을 강구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며 “우리가 살 길은 이것밖에 없으니 당신들이 책임지고 조봉암을 잡아넣을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라”고 말했다는 것.

 

한씨 등은 이 때부터 시경찰국 분실(일명 남일사)에서 진보당의 강령과 정책, 포고문 등을 수집한 뒤 이를 공산당 이론이나 북한 노동당 강령 등과 연계시키는 작업에 착수했다.

 

58년 1월 이승만정부는 진보당의 강령이 국시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죽산을 비롯한 진보당 간부들을 구속하고 그해 2월 정당등록을 말소한 뒤 이듬해 죽산을 사형에 처했다.

 

한씨는 “당시 조직부장 전씨로부터 ‘북한 김일성의 지령에 따라 대한민국의 전복을 획책했다’ ‘죽산은 빨갱이 간첩이다’는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3주 가량 혹독하게 신문했으나 자백을 받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한씨는 “수사 관계자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사실대로 밝힐 경우 보복당할 수도 있어 진실을 털어놓지 못했다”며 “희생된 이들에게 사죄하고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데 뒤늦게나마 일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함경북도 정평이 고향인 한씨는 북한에서 함경남도 노동당 부위원장을 지내다 56년 남파됐으며 남파 직후 자수해 서울시 경찰국 분실에서 비공식 대공수사요원으로 3년간 근무하다 사표를 냈다.

 

동국대 사회학과 강정구(姜禎求)교수는 “그동안 역사학계에서는 진보당사건이 이승만정권에 의한 법살(法殺)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지만 구체적인 증거가 없어 정황으로만 추론해왔다”며 “당시 수사관의 이같은 증언은 물증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밝혔다.

 

 

〈이헌진·박윤철기자〉mungchi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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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history)2021. 2. 17. 11:11

전옥주 여사

 

 

기사 출처

 

 

https://bit.ly/3as6T8C

 

‘5·18 항쟁의 목소리’ 전옥주씨, 오월 영령 곁에 잠들다

시민참가 호소 ‘거리방송’ 전옥주씨 별세고문·간첩조작·옥살이 후유증 시달려

www.hani.co.kr

출처 : 

https://bit.ly/3pvQN2a

 

“광주 시민 여러분…” 5·18 가두방송의 주인공 전옥주씨 세상 떠나

16일 급성질환으로 사망

www.hani.co.kr

 

 

Posted by NJ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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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history)2021. 2. 17. 08:59

 

 

'YWCA 위장결혼 사건 재심 무죄' 백기완에 5천만원 형사보상

송고시간2020-03-30 10:15

 

 

https://bit.ly/3as7Td3

 

'YWCA 위장결혼 사건 재심 무죄' 백기완에 5천만원 형사보상 | 연합뉴스

'YWCA 위장결혼 사건 재심 무죄' 백기완에 5천만원 형사보상, 고동욱기자, 사회뉴스 (송고시간 2020-03-30 10:15)

www.yna.co.kr

(서울=연합뉴스) 고동욱 기자 = 민주화 운동의 상징적 인물인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1970년대 겪은 'YWCA 위장결혼 사건'에 대해 재심 무죄를 받은 데 이어 5천여만원의 형사보상을 받게 됐다.

 

30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고법 형사6(오석준 이정환 정수진 부장판사)는 계엄법 위반 혐의에 대해 재심을 거쳐 무죄가 확정된 백 소장에게 구금에 대한 보상으로 5143만원을, 비용 보상으로 200만원을 지급하는 형사보상 결정을 내렸다.

 

'YWCA 위장결혼 사건' 1979 10월 박정희 대통령 사망 후 간접선거로 대통령을 선출하려는 신군부 세력에 반발해 윤보선, 함석헌 등의 주도로 같은해 11월 서울 YWCA 회관에서 결혼식을 가장해 펼쳐진 대통령 직선제 요구 시위를 말한다.

 

이는 신군부 세력에 반기를 든 첫 군중 집회로 평가받는다.

 

백 소장 등 시위를 주도한 핵심 인물 14명은 당시 용산구 국군보안사령부 서빙고 분실로 끌려가서 모진 고문을 당했다.

 

백 소장은 계엄법 위반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1980년 징역 1 6개월을 선고받은 뒤 1981년 사면을 받아 풀려났다.

 

지난해 서울고법은 "계엄 포고가 당초부터 위헌·무효인 이상, 계엄 포고 1항을 위반했음을 전제로 한 이 사건 공소사실은 범죄가 되지 않는 경우에 해당한다"며 백 소장에게 39년 만에 무죄를 선고했다.

 

한편 법원은 백 소장과 함께 재심 무죄를 선고받은 10명에 대해서도 3천만원∼15천만원의 형사보상 결정을 했다.

 

sncwook@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020/03/30 10:15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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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history)2021. 2. 17. 08:51

백기완 선생과 한국 현대 정치사 .

 

백기완의 길 (2), 1979년 YWCA 직선제 실시 데모, 고문 후유증 ~ 1987년 대선 후보와 김대중 김영삼 단일화를 위한 사퇴.

 

 

백기완 선생과 한국 현대 정치사 .

 

백기완의 길 (2), 1979년 YWCA 직선제 실시 데모, 고문 후유증 ~ 1987년 대선 후보와 김대중 김영삼 단일화를 위한 사퇴.

 

1.     1979년 YWCA 위장 결혼 집회 사건. 정치적 주장

 

1979년 12월 24일. 유신체제 철폐, 통일주체회의 대통령 선거 반대, 직선제 실시, 긴급조치 피해자 복직 복교 복권 조치

 

집회 주체: 양순직, 박종태, 백기완, 이우회, 김정택, 함석헌, 윤보선 등, 당시 재야인사, 기독교 종교계, 구 공화당 국회의원, 전 민주당 대통령 등 다양한 민주화운동 세력이었음.

 

 

 백기완 선생은 1980년 5월 13일, 병 보석으로 출감했으나, 고문 후유증이 엄청났다고 한다.

후배 최열이 백기완을 강원도로 데리고 가 요양시켰고, 뱀을 사다가 먹였다고 증언했다.

 

 

1981년 3월 2일자. 전두환이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정치범들을 사면했다. 백기완 사면.

 

 

1984년 10월 9일자. 백기완 선생이 통일문제 연구소를 개설. 은평구 진관외동.

 

1985년 4월 18일자. 백기완은 사면 이후, 가택 연금을 자주 당했다.

1984년 속칭 학원자유화 이후, 대학가에 총학생회가 학생운동의 거점이 되기 시작했고, 백기완은 초청 연설자들 중 한 명이었으나, 전두환 정권이 이를 막았다.

 

 

1985년 10월 4일자.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민통련) 의장이 당시 문익환 목사였고, 서울지부장이 백기완이었다.

백기완 선생은 가택연금, 연행, 석방을 반복했다.

 

 

1986년 12월 8일자.

 

민통련 부의장이 된 백기완 다시 연행. 연행 이유는 문귀동이 부천에서 서울대 학생운동가 권인숙 양을 성추행한 이후,

이를 규탄하는 집회가 명동 성당에서 열렸는데, 백기완이 당시 집회 격려사를 했기 때문이다.

 

 

1987년 5월 20일. 명동 성당 집회로 구속된 백기완은 징역 8개월, 집행 유예 2년 선고를 받고 구치소에서 풀려났다.

6월 항쟁 이후 김대중 , 백기완 등은 정치적 사면을 받게 된다.

 

 

1987년 11월 23일, 백기완은 김대중 김영삼의 분열을 막고, 후보 단일화를 위해, 무소속으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게 되었다.  김대중 김영삼 후보가 정당이라는 '도당' 중심에서 벗어나, '민중'에 기초해 야권 후보 단일화를 이뤄야 한다고, 백후보는 주장했다.

 

 

1987년 11월 25일자. 동아일보.

 

민통련 부의장이었던 백기완이 무소속 후보로 출마선언을 하자, 당시 분열되었던 재야의 속사정을 반영하듯이, 민통련은 "백선생의 출마는 민통련 의결 기구의 결정과는 무관한 개인적 결정일 뿐이다"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민통련 의장이었던 문익환은 김대중 후보를 비판적으로 지지했다.

 

 

프랑스 대선에서 채택하고 있는 '결선 투표제도'를 제 6공화국 헌법과 선거법에 삽입하지 않았던 김대중과 김영삼은 자신들이 1위를 할 수 있다는 근거없는 자신감에 들떠있었다.

 

  

결선 투표 제도도 없고, 아무런 제도적 장치도 마련하지 못한 독재타도 운동과 민주화운동 세력은, 무소속 백기완의 양김씨 후보 단일화 논의를 이끌어 갔다. 그러나 이것마저도 김대중 김영삼의 근시안적 탐욕으로 무산되었다.

백기완 후보의 눈물 호소도 소용이 없었다.

 

  

1987년 12월 14일자. 백기완 후보는 사퇴하면서, 노태우를 제외하고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당당히 투표하라는 입장을 밝혔다.  항간에 떠돌던 김영삼 지지설은 부정했다. 후보직 사퇴 이유는 "민주 세력의 대연대를 이룩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후보직을 사퇴한다"였다. "민주세력의 후보 단일화안이 보수야권의 오랜 분열주의로 인해 산산히 깨진데 대해 한없이 안타깝게 생각한다. 표를 흩뜨리지 않게 하는 것이 애국자의 길이라 믿기에 여러분 곁을 떠난다"고 눈물을 흘렸다.

  

 1987년 12월 16일. 대선에서 1212 군사쿠데타, 80년 5월 광주 학살자 주역 중에 한 명인 노태우가, 김대중-김영삼의 분열 속에 1위로 당선되었다.

김영삼과 김대중이 얻은 득표율 합산은 53.1%로, 노태우 36.6%보다 훨씬 더 많았다.

독일 사회학자 겸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는 이런 대선 결과를 보고, '넌센스 Unsinn' 이라고 평가했다.

 

 

 

 

 

 

 

정치적 주장

 

1979년 12월 24일. 유신체제 철폐, 통일주체회의 대통령 선거 반대, 직선제 실시, 긴급조치 피해자 복직 복교 복권 조치

 

집회 주체: 양순직, 박종태, 백기완, 이우회, 김정택, 함석헌, 윤보선 등, 당시 재야인사, 기독교 종교계, 구 공화당 국회의원, 전 민주당 대통령 등 다양한 민주화운동 세력이었음.

 

 

 

 

 

 

 

 

 

 

 

 

백기완 선생은 1980년 5월 13일, 병 보석으로 출감했으나, 고문 후유증이 엄청났다고 한다. 

후배 최열이 백기완을 강원도로 데리고 가 요양시켰고, 뱀을 사다가 먹였다고 증언했다.

 

 

 

 

1981년 3월 2일자. 전두환이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정치범들을 사면했다. 백기완 사면.

 

 

 

1984년 10월 9일자. 백기완 선생이 통일문제 연구소를 개설. 은평구 진관외동.

 

 

 

 

 

1985년 4월 18일자. 백기완은 사면 이후, 가택 연금을 자주 당했다. 

1984년 속칭 학원자유화 이후, 대학가에 총학생회가 학생운동의 거점이 되기 시작했고, 백기완은 초청 연설자들 중 한 명이었으나, 전두환 정권이 이를 막았다.

 

 

 

 

 

 

1985년 10월 4일자.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민통련) 의장이 당시 문익환 목사였고, 서울지부장이 백기완이었다.

백기완 선생은 가택연금, 연행, 석방을 반복했다.

 

 

 

 

1986년 12월 8일자.

 

민통련 부의장이 된 백기완 다시 연행. 연행 이유는 문귀동이 부천에서 서울대 학생운동가 권인숙 양을 성추행한 이후,

이를 규탄하는 집회가 명동 성당에서 열렸는데, 백기완이 당시 집회 격려사를 했기 때문이다.

 

 

 

 

 

1987년 5월 20일. 명동 성당 집회로 구속된 백기완은 징역 8개월, 집행 유예 2년 선고를 받고 구치소에서 풀려났다.

6월 항쟁 이후 김대중 , 백기완 등은 정치적 사면을 받게 된다.

 

 

 

 

 

1987년 11월 23일, 백기완은 김대중 김영삼의 분열을 막고, 후보 단일화를 위해, 무소속으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게 되었다.  김대중 김영삼 후보가 정당이라는 '도당' 중심에서 벗어나, '민중'에 기초해 야권 후보 단일화를 이뤄야 한다고, 백후보는 주장했다.

 

 

 

 

1987년 11월 25일자. 동아일보.

 

민통련 부의장이었던 백기완이 무소속 후보로 출마선언을 하자, 당시 분열되었던 재야의 속사정을 반영하듯이, 민통련은 "백선생의 출마는 민통련 의결 기구의 결정과는 무관한 개인적 결정일 뿐이다"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민통련 의장이었던 문익환은 김대중 후보를 비판적으로 지지했다.

 

 

 

 

프랑스 대선에서 채택하고 있는 '결선 투표제도'를 제 6공화국 헌법과 선거법에 삽입하지 않았던 김대중과 김영삼은 자신들이 1위를 할 수 있다는 근거없는 자신감에 들떠있었다.

 

 

 

 

 

결선 투표 제도도 없고, 아무런 제도적 장치도 마련하지 못한 독재타도 운동과 민주화운동 세력은, 무소속 백기완의 양김씨 후보 단일화 논의를 이끌어 갔다. 그러나 이것마저도 김대중 김영삼의 근시안적 탐욕으로 무산되었다.

백기완 후보의 눈물 호소도 소용이 없었다.

 

 

 

 

 

 

 

 

 

1987년 12월 14일자. 백기완 후보는 사퇴하면서, 노태우를 제외하고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당당히 투표하라는 입장을 밝혔다.  항간에 떠돌던 김영삼 지지설은 부정했다. 후보직 사퇴 이유는 "민주 세력의 대연대를 이룩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후보직을 사퇴한다"였다. "민주세력의 후보 단일화안이 보수야권의 오랜 분열주의로 인해 산산히 깨진데 대해 한없이 안타깝게 생각한다. 표를 흩뜨리지 않게 하는 것이 애국자의 길이라 믿기에 여러분 곁을 떠난다"고 눈물을 흘렸다.

 

 

 

 

 

1987년 12월 16일. 대선에서 1212 군사쿠데타, 80년 5월 광주 학살자 주역 중에 한 명인 노태우가, 김대중-김영삼의 분열 속에 1위로 당선되었다.

김영삼과 김대중이 얻은 득표율 합산은 53.1%로, 노태우 36.6%보다 훨씬 더 많았다.

독일 사회학자 겸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는 이런 대선 결과를 보고, '넌센스 Unsinn' 이라고 평가했다.

 

 

 

 

Posted by NJ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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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history)2021. 2. 15. 23:28

설 이후, 백기완 선생의 별세 소식이다. 고인의 명복을 빌며, 백선생이 걸어온 현대 정치사의 길은 어떠했을까? 잠시 신문을 찾아본다.

 

1955년 (23세)부터 백기완 선생은 일간지에 등장했다. 

1975년 2월 긴급조치 구속자 석방까지, 백기완 선생 관련 신문 기사들이다. 

 

 

1955년, 7월 19일자 동아일보.

 

 신흥(新興: 경희대 전신)대 백기완 군 외 31명 학생들이 여름방학을 맞이하여 2주간 강원도 벽촌지방을 순회하면서 문맹퇴치 운동을 벌인다는 기사. (* 동명이인인지 확인 필요)

 

 

1963년 2월 28일자. 백기완 (31세), 박정희 군사 쿠데타 이후 시국 수습안 강연회, 자유대중당을 대표해서 백기완 선생이 발표를 하다.

 

 

1965년 8월 14일자. 박정희의 한일 협정 비준안이 통과.

 

1965년 8월 14일, 함석헌, 백기완 등이 한일협정은 매국적이라고 비판, 즉각 무효화를 주장했다.

 

1966년11월 7일자. 백기완 (34세) 자유대중당 대표.

 

1967년 6월 10일자. 7대 총선 참가. 백기완 (민주당) 서울시 영등포 갑 출마. 신민주당 유진산이 1위, 6만 6227표. 백기완은 당시 35세로 당명을 '민주당'으로 짓고, 출마해서 2천 234표를 얻었다.

6대 총선에 비해, 67년 7대 총선에서는 공화당이 후퇴하고, 신민주당이 약진했다.

 

 

1972년 2월 2일자, 조선일보, 주필 선우휘씨가 백기완의 저서 "항일민족론"을 칭찬하다. 채신머리없이 친일하는 자들이 꼭 읽어야 할 책이라고 소개. 선우휘 주필이 '사이다나 맥주를 마신 때 상쾌감을 느낄 수 있는 책'이라고 칭찬한 점이 흥미롭다.

 

 

1974년 1월 16일자. 장준하, 백기완 등 긴급조치 1호 위반 구속.

 

구속 사유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비방 선전"

1974년 2월 2일. 비상보통 군법회의, 박희동 중장이 장준화, 백기완 피고에 징역 15년 선고.

 

박희동 중장의 선고 내용. "헌법 개정을 빙자, 국론을 분열시키고 사회적 불안을 조성함으로써 국가의 안전보장과 공공의 안녕질서에 중대한 위협을 준 사실은 추호도 용서할 수 없다"

 

 

1975년 2월 17일자 경향신문.

 

긴급조치 관련 일지.

 

1974년 8월 29일. 대법원은 장준하, 백기완 포고인에 대한 상고를 기각, 원심을 확정 (15년 징역)

 

1974년 12월 3일, 장준하씨가 형집행 정지 결정으로 출감. 조광현 내과에 입원.

 

(박정희가 장준하를 석방하기로 결정함)

 

1975년 2월 15일 박정희가 인혁당 관련자를 제외한 긴급조치 위반자를 석방하기로 결정.

 

 

1975년 2월 17일자 동아일보. 당시 43세였던 백기완 선생은, 석방 결정에 대해 '소감옥'에서 '대감옥'으로 이감되었을 뿐, 민주주의를 배반한 유신체제 하에서는 감옥 안과 바깥이 구분이 없음을 선언.

 

유신체제 철폐가 한국 민주주의 당면 과제임을 역설했다.

 

1975년 2월 15일자 경향신문.  긴급조치 위반자 석방 소식이 알려지자, "긴긴 겨울은 걷히고, 봄은 오는지"라는 제목을 달았던 경향신문.

 

1975년 2월 18일자 조선일보.

 

긴급조치 석방자들에 대한 소식. "백기완씨는 오랜만에 대하는 흰쌀밥, 불고기의 아침상을 대하고 목이 메였다. 백씨는 외출하려다가 '다시는 아빠를 뺏기지 않겠다'며 붙드는 딸들의 강권에 못이겨 눌러앉고, 찾아오는 사람들과 돼지고기찌개에 소주잔을 기울였다.

 

그러나 석방되고 나서 1개월 후, 1975년 3월 29일자, 중앙정보부는 백기완 선생을 다시 연행했다.

 

 

 

 

1975년 2월 17일 동아일보 인터뷰 백기완 

 

 신흥대 백기완군 외 31명 학생들이 여름방학을 맞이하여 2주간 강원도 벽촌지방을 순회하면서 문맹퇴치 운동을 벌인다는 기사.

 

 

 

1963년 2월 28일자. 백기완 (31세), 박정희 군사 쿠데타 이후 시국 수습안 강연회, 자유대중당을 대표해서 백기완 선생이 발표를 하다. 

 

 

 

1965년 8월 14일자. 박정희의 한일 협정 비준안  통과.

 

1965년 8월 14일, 함석헌, 백기완 등이 한일협정은 매국적이라고 비판, 즉각 무효화를 주장했다.

 

 

 

 

1966년11월 7일자. 백기완 (34세) 자유대중당 대표.

 

 

 

 

 

 

1967년 6-8 총선, 5월 18일자 조선일보 보도.

그 해 6대 대통령 선거 결과, 서울시에서  유일하게 박정희가 윤보선을 앞선 선거구가 영등포 (갑)이었다. 공화당 윤주영 후보와 신민당 유진산, 민주당 백기완 후보 등이 맞섰다.

 

 

 

 

 

 

1967년 6월 10일자. 7대 총선 참가. 백기완 (민주당) 서울시 영등포 갑 출마. 신민주당 유진산이 1위, 6만 6227표. 백기완은 당시 35세로 당명을 '민주당'으로 짓고, 출마해서 2천 234표를 얻었다.

 

 

6대 총선에 비해, 67년 7대 총선에서는 공화당이 후퇴하고, 신민주당이 약진했다.

 

 

 

 

1972년 2월 2일자, 조선일보, 주필 선우휘씨가 백기완의 저서 "항일민족론"을 칭찬하다. 채신머리없이 친일하는 자들이 꼭 읽어야 할 책이라고 소개. 선우휘 주필이 '사이다나 맥주를 마신 때 상쾌감을 느낄 수 있는 책'이라고 칭찬한 점이 흥미롭다.

 

 

 

  

1974년 1월 16일자. 장준하, 백기완 등 긴급조치 1호 위반 구속.

 

구속 사유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비방 선전"

 

 

 

 

1974년 2월 2일. 비상보통 군법회의, 박희동 중장이 장준화, 백기완 피고에 징역 15년 선고. 

 

박희동 중장의 선고 내용. "헌법 개정을 빙자, 국론을 분열시키고 사회적 불안을 조성함으로써 국가의 안전보장과 공공의 안녕질서에 중대한 위협을 준 사실은 추호도 용서할 수 없다"

 

 

 

 

 

1975년 2월 17일자 경향신문.

긴급조치 관련 일지. 

1974년 8월 29일. 대법원은 장준하, 백기완 포고인에 대한 상고를 기각, 원심을 확정 (15년 징역)

1974년 12월 3일, 장준하씨가 형집행 정지 결정으로 출감. 조광현 내과에 입원. 

(박정희가 장준하를 석방하기로 결정함)

1975년 2월 15일 박정희가 인혁당 관련자를 제외한 긴급조치 위반자를 석방하기로 결정.

 

 

 

 

1975년 2월 17일자 동아일보. 당시 43세였던 백기완 선생은, 석방 결정에 대해 '소감옥'에서 '대감옥'으로 이감되었을 뿐, 민주주의를 배반한 유신체제 하에서는 감옥 안과 바깥이 구분이 없음을 선언.

유신체제 철폐가 한국 민주주의 당면 과제임을 역설했다.

 

 

 

 

1975년 2월 15일자 경향신문.  긴급조치 위반자 석방 소식이 알려지자, "긴긴 겨울은 걷히고, 봄은 오는지"라는 제목을 달았던 경향신문.

 

 

 

1975년 2월 18일자 조선일보.

 

긴급조치 석방자들에 대한 소식. "백기완씨는 오랜만에 대하는 흰쌀밥, 불고기의 아침상을 대하고 목이 메였다. 백씨는 외출하려다가 '다시는 아빠를 뺏기지 않겠다'며 붙드는 딸들의 강권에 못이겨 눌러앉고, 찾아오는 사람들과 돼지고기찌개에 소주잔을 기울였다.

 

 

 

 

 

그러나 석방되고 나서 1개월 후, 1975년 3월 29일자, 중앙정보부는 백기완 선생을 다시 연행했다.

 

 

Posted by NJ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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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history)2021. 2. 15. 18:05

메모. 옛 신문을 읽다가.

 

2021년 2월 15일. 35년 전 신문. 동아일보 1면.

 

전두환 노태우 정권 하에서 대학은 늘 감시자가들이 있었다. 학교 교직원들 자의반 타의반으로 전두환 노태우 검찰,경찰의 협조자들이었다. 잘못된 줄 알면서도 학교 직원들은 전노 독재정권에 협력했다. 

 

압수 수색 용품들이 흥미롭다. 이화여대 모의 수류탄 2개. 서울대 상복 10벌. 

 

35년이 지난 지금, 대학은 어떤 진리와 진실을 추구하고 있어야하는가? 그런 질문을 던지다.

 

 

 

 

Posted by NJ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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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history)2020. 11. 30. 15:48


재판 결과: 광주 법원에서 전두환이 유죄를 선고받았다.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이다. 





광주 518 항쟁에 대한 전두환의 태도는 지금까지 '왜 이래?' 이다. 언젠가 헬기 조종사, 기관총 사격자들의 양심고백이 나오리라. 


광주 도청앞 전일빌딩에 남겨진 헬기 총탄 193발이 전두환을 심판할 것이다.


전두환이 2020년 11월 30일 오후 2시, 광주에서 법원 재판을 받는다. 조비오 신부에 대한 '죽은 자 명예훼손' 혐의다. 검찰은 전두환에게 1년 6개월 형을 구형했다. 조비오 신부에게 상처를 준 죄를 인정했다. 


전두환이 왜 다시 광주 법정에 서는가? 518 광주항쟁 당시 고 조비오 신부가 계엄군의 헬기 사격이 있었다고 증언했는데, 이를 두고 전두환이 회고록에서 '신부라는 말이 무색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적었다.

이에 대해 광주 518 단체와 조신부의 조카인 조영대 신부가 전두환을 '사자 명예훼손죄'로 법정에 세웠다. 


11월 30일 광주 법원에서 가장 중요한 증거자료는, 전일빌딩이 간직하고 있는 헬기 총탄 흔적이다. 


전두환과 같은 특전단, 베트남 밀림 실전 경험이 있는 특공대는 헬리콥터를 선호한다. '헬기 한대 내줘' 이게 군인 권력의 상징이다. 1980년 518광주항쟁을 진압하고 나서 전두환이 MBC 이진희 사장에게 '헬기 한대 내줄테니 그거 타고 합천에 가서 전두환 장군 일대기 특집 촬영하시라' 호언했다.  


전일빌딩에 270발의 헬기 총탄


2017년 광주 전일빌딩 내부 총탄 흔적을 조사한 김동환(국과수 연구원)은 518 당시 계엄군의 헬기 기종이 UH-1 500MD이고, 이 헬기가 사용하는 총탄은 7.62㎜ 크기로, 엠 식시티 ( M60 ) 계열의 기관총이나 M134 미니건 계열의 기관총을 사용한다고 했다. 


당시 계엄군의 헬기는 공중에서 사격 개시를 위해  '하버링 포지션 hovering position' 을 취하고, 전남도청 쪽에서 금남로 방향으로 회전하면서 사격했다. 전일빌딩은 10층인데, 총탄이 박힌 자국을 보면, 10층 보다 더 높은 위치에서 사격했다. 당시 도청 주변에는 전일빌딩 10층보다 더 높은 건물이 없기 때문에, 10층 보다 높은 '위치'에서사격을 가할 수 있는 건, '헬기 사격'이었다고 김동환 연구원은 설명했다.

김 연구원에 따르면 193개 총탄이 헬기에서 쏜 것이다.


전두환 변호사 정주교는 헬기 사격을 본 광주시민들 숫자가 적기 때문에, '헬기 사격'을 입증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저번에는 전일빌딩 내부 총탄 흔적이 상향 사격이라고 우기기도 했다. 


전일빌딩은 당시 광주 사람들에게는 아주 잘 알려진, 금남로 충장로에서 가장 높고 큰 빌딩이었다. 전두환과 당시 계엄군은 이 빌딩이 그들의 범죄사실을 간직하고 있으리라곤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11월 30일 전두환 1심 재판, 헬기로 흥해 대통령직을 찬탈한 자, 헬기의 증언으로 사멸하기 바란다. 


전두환과 같은 역사적 중대 살해 범죄는 김대중 개인 정치가의 이름으로 '용서'와 '화해'가 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님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Posted by NJ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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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history)2020. 11. 30. 09:12



광주 518 항쟁에 대한 전두환의 태도는 지금까지 '왜 이래?' 이다. 언젠가 헬기 조종사, 기관총 사격자들의 양심고백이 나오리라. 


광주 도청앞 전일빌딩에 남겨진 헬기 총탄 193발이 전두환을 심판할 것이다.


전두환이 2020년 11월 30일 오후 2시, 광주에서 법원 재판을 받는다. 조비오 신부에 대한 '죽은 자 명예훼손' 혐의다. 검찰은 전두환에게 1년 6개월 형을 구형했다. 조비오 신부에게 상처를 준 죄를 인정했다. 


전두환이 왜 다시 광주 법정에 서는가? 518 광주항쟁 당시 고 조비오 신부가 계엄군의 헬기 사격이 있었다고 증언했는데, 이를 두고 전두환이 회고록에서 '신부라는 말이 무색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적었다.

이에 대해 광주 518 단체와 조신부의 조카인 조영대 신부가 전두환을 '사자 명예훼손죄'로 법정에 세웠다. 


11월 30일 광주 법원에서 가장 중요한 증거자료는, 전일빌딩이 간직하고 있는 헬기 총탄 흔적이다. 


전두환과 같은 특전단, 베트남 밀림 실전 경험이 있는 특공대는 헬리콥터를 선호한다. '헬기 한대 내줘' 이게 군인 권력의 상징이다. 1980년 518광주항쟁을 진압하고 나서 전두환이 MBC 이진희 사장에게 '헬기 한대 내줄테니 그거 타고 합천에 가서 전두환 장군 일대기 특집 촬영하시라' 호언했다.  


전일빌딩에 270발의 헬기 총탄


2017년 광주 전일빌딩 내부 총탄 흔적을 조사한 김동환(국과수 연구원)은 518 당시 계엄군의 헬기 기종이 UH-1 500MD이고, 이 헬기가 사용하는 총탄은 7.62㎜ 크기로, 엠 식시티 ( M60 ) 계열의 기관총이나 M134 미니건 계열의 기관총을 사용한다고 했다. 


당시 계엄군의 헬기는 공중에서 사격 개시를 위해  '하버링 포지션 hovering position' 을 취하고, 전남도청 쪽에서 금남로 방향으로 회전하면서 사격했다. 전일빌딩은 10층인데, 총탄이 박힌 자국을 보면, 10층 보다 더 높은 위치에서 사격했다. 당시 도청 주변에는 전일빌딩 10층보다 더 높은 건물이 없기 때문에, 10층 보다 높은 '위치'에서사격을 가할 수 있는 건, '헬기 사격'이었다고 김동환 연구원은 설명했다.

김 연구원에 따르면 193개 총탄이 헬기에서 쏜 것이다.


전두환 변호사 정주교는 헬기 사격을 본 광주시민들 숫자가 적기 때문에, '헬기 사격'을 입증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저번에는 전일빌딩 내부 총탄 흔적이 상향 사격이라고 우기기도 했다. 


전일빌딩은 당시 광주 사람들에게는 아주 잘 알려진, 금남로 충장로에서 가장 높고 큰 빌딩이었다. 전두환과 당시 계엄군은 이 빌딩이 그들의 범죄사실을 간직하고 있으리라곤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11월 30일 전두환 1심 재판, 헬기로 흥해 대통령직을 찬탈한 자, 헬기의 증언으로 사멸하기 바란다. 


전두환과 같은 역사적 중대 살해 범죄는 김대중 개인 정치가의 이름으로 '용서'와 '화해'가 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님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518 광주 항쟁 당시, 계엄군이 헬기에서 광주 시민들을 향해 쏜 기관총 이름, M 60 machine gun 엠 식스티 머신 건) 





































기사 출처: https://bit.ly/3ljRLfV



'5·18 피고인' 전두환 심판의 날…헬기 사격 인정될까


김관진 기자 spirit@sbs.co.kr 작성 2020.11.29 20:35 






'5·18 피고인' 전두환 심판의 날…헬기 사격 인정될까



<앵커>


고 조비오 신부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를 받고 있는 전두환 씨의 1심 선고가 내일(30일) 내려집니다. 


이번 재판의 핵심은 5·18 민주화운동 당시 민간인을 향한 헬기 사격이 있었는지 그 실재 여부에 달렸는데요, 내일 이 재판에 전두환 씨가 참석할 걸로 보입니다.



김관진 기자의 보도입니다.



<기자>



전두환 씨는 지난 2017년 회고록에서 5·18 민주화운동 당시 헬기 사격 목격 증언을 한 고 조비오 신부를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조 신부의 유족이 전 씨를 고소하면서 전 씨는 이듬해 5월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전두환 (지난해 3월) : (발포 명령 부인합니까?) 왜 이래.]



2년 6개월의 법정 공방 끝에 검찰은 5·18 희생자에게 또다시 상처를 줬다며 전 씨에게 징역 1년 6개월을 구형했습니다.



사자명예훼손죄는 허위사실인 줄 알면서도 고의로 고인의 명예를 훼손해야 성립합니다.



이 때문에 5·18 당시 실제 헬기 사격이 있었는지에 대한 재판부의 판단이 전 씨의 유무죄를 가를 전망입니다.



검찰은 전일빌딩 10층의 탄흔에 대한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감정 결과 등을 헬기 사격의 근거로 삼고 있습니다.



반면에 전 씨 측은 목격자가 더 많아야 한다며 헬기 사격의 존재를 부인하고 있습니다.



5·18 단체 등은 역사의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한 단죄를 요구합니다.



[조영대/고 조비오 신부 조카 : 저들은 끝까지 항소하고 버티리라고 예상됩니다만 일단 1심 재판의 결론이 유죄로 나오는 것이 역사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것인데요.]



1심 선고는 내일 오후 2시 광주지법 열리는데 전 씨는 서울 연희동 자택에서 승용차 편으로 이동할 예정입니다.





(영상취재 : 김영휘 KBC, 영상편집 : 유미라) 


출처 : SBS 뉴스 


원본 링크 : https://bit.ly/3ljRLfV

Posted by NJ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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