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history)2020. 11. 30. 0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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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2020년 동원 정치 - 민주주의 토론은 축소되고 '동원'과 '푸닥거리'만 남았다. '엄청난 환골탈태 Great Transformation' . MBC ,경향신문 전 사장 이진희와 전두환의 담배 대화.  


헬리콥터로 흥한 자, 헬리콥터로 망하기도 한다. 머리로 흥한 자 그 머리로 망하기도 한다. 몸으로 흥한 자 그 몸으로 망하기도 한다. 대부분 저점에서 망한 게 아니라 최고점에서 망한다. 


1980년 8월 11일 전두환과 MBC 경향신문 사장 이진희와 대화는 한국 민주주의와 '언론' 역사에서 아주 중요하다. 그들은 무슨 대화를 나눴는가? 


정식 인터뷰 전에 전두환이 이진희에게 담배 한대 피우자고 제안한다. 그 이후 대화 주제는 전두환 고향 경남 합천을 MBC 취재팀이 방문해 '전두환 장군 일대기, 어린시절부터 장군까지' 이런 주제로 특집 방송을 만들자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이진희 아부는 이미 518 광주항쟁 진압 이후, 조선일보가 가장 먼저 '전두환 장군 일대기'를 기사화했고, MBC 이진희는 한발 늦은 셈이었다. 

좀 늦었다 싶은 자들의 아부는 '더 깊고 더 급하고 더 아련한 셈'이다. 


전두환이 1979년 1212 군사쿠데타를 일으키고, 1980년 518 광주항쟁을 진압하고 난 후, 체육관 선거를 통해 대통령직을 찬탈하기 직전인 8월 11일에 MBC와 한 인터뷰이다. 당시 KBS, MBC는 물론, 조선, 동아일보, 경향신문 등을 비롯 대부분 언론사는 전두환의 돈다발과 협박 수중에 들어갔다.  


흥미롭게도 전두환이 1980년 광주 518 항쟁을 진압하고 나서 내세운 기치가 '민주복지'였다. 이것은 주로 서울대 출신 행정관료와 경제학과 교수들이 자문해 준 것을 전두환이 그대로 베낀 것이다. 


당시 만 49세였던 전두환을 이순신 장군수준으로 격상시키는 MBC 이진희 사장의 아부 발언은 "사회개혁"이었다. 1212 군사반란과 518 광주민주화 운동을 짓밟은 것을 '사회개혁'이라고 이름을 바꿨다. 


'국가 보위 비상 대책 위원회 (국보위)를 만드시느라 노고가 많으셨다. 전두환 장군님께서. 그런데 이것은 마치 전장군의 개인적인 뜻이 아니라 기독교의 신, 철학자 헤겔의 범신론의 신처럼 새 시대를 영도하기 불가피한 하늘의 뜻'이였다고 이진희는 전두환을 '영웅화'했다.



전두환은 흐뭇해 하면서, 공식 인터뷰 전에 담배나 한 대 피우자고 이진희에게 권유하고, 이 둘은 최민식과 하정우가 출연했던 범죄와의 전쟁-나쁜 놈들 전성시대의 주인공처럼 동네 양아치들처럼 담배를 피워대기 시작했다. 



이진희 MBC사장이 "전두환 장군님 어린시절 부터 일대기를 (전두환의 고향 경남 합천에서) 취재하고 있습니다"라고 아부를 떨기 시작한다.



전두환 장군은 이에 호응해, "촌놈이라 사진이 있어야지 ~"라고 농을 건넨다.



이진희는 글로벌 단독 뉴스, 마치 존 에프 케네디라도 저격당한 현장에 MBC 기자를 특파하는 듯한 심각한 표정으로 "(MBC 기자 팀)을 일제히 보내 빨리 전두환 장군 일대기 특집을 준비하도록 !" 명령을 내린다. 



박정희에게 알랑방구를 뀌던 솜씨로, 실제 전두환은 군인시절 박정희를 방문해 양아들을 자처하며 스포츠 경기를 같이 보면서 박정희에게 중계쇼도 하고, 군대 내부 반-박정희 쿠데타 움직임이 없음을 알리고, 충성을 맹세하고 박정희로부터 금일봉을 받아와 영남출신 육사출신 장교들의 모임인 '하나회'에게 술값을 뿌리며 군인정치인 연습을 길게는 18년 해왔다. 


전두환 살인마라는 별칭, 무식한 대머리라는 시민들의 비아냥이 있었지만, 스네이크 박 이라고 불렸던 박정희만큼 전두환 역시 '강자에게 아부하고, 적들과 정적들은 이간질해 소탕해버리는' 군사 전략 전술 기술을 발휘해 박정희 수하에서 18년간 생존해왔다. 



전두환이 한 마디 거든다. "경남 합천 고향은 시골이라 찻길이 별로 없다. 헬리콥터를 빌려줄테니 그거 타고 가서 일대기를  빨리 제작하라"는 명령아닌 명령을 이진희 사장에게 내린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헬기가 1980년 9월 5일 전두환의 고향, 경남 합천 한 운동장에 착륙했다. 애궂은 죄없는 학생들이 공부도 못한 채 동원되었다. 이 학생들은 헬기에서 내리는 전두환과 이순자에게 박수를 쳤다. 


MBC,경향신문 이진희 사장이 당시 49세 전두환에게 '장군님'이라고 부르고 새 시대를 불가피하게 신의 지령처럼 영도해 나가셔야 하는 '역사적 책무'를 짊어졌다고 했고, 그 결과 학생들이 동원되어 도열해 박수를 쳤던 것이다. 



2020년 한국 정치.


이러한 동원 정치는 그 형태만 바꿔, 기술만 모양새가 바뀌어 다시 우리 일상에서 벌어지고 있다. 


지금도 이러한 '박수 동원'은 온라인에서, 스마폰에서, 페이스북에서, 팀장님 카톡방, 텔레그램 방에서 일사천리로 마치 전두환이 '1212 군사 쿠데타'를 '미드나잇 익스프레스'하듯이 분초를 다퉈가며 수행하고 있다. 


이명박 박근혜는 경찰, 군인, 국정원, 민간인 등을 직접적으로 고용해 '댓글 공작 부대'를 만들어, 온라인 민주주의를 파괴했다. 


이명박 박근혜식은 노골적으로 등장하지 않지만, 이러한 '온라인 민주주의' 파괴 행동은 사설 민간화되고, 드루킹의 기술을 다양한 방식으로 빌어와 전 소셜 미디어 공간에서 작전이 수행되고 있다. 


MBC 이진희 사장이 '팀장님의 이름'으로 '환골탈태'했다. 이게 바로 '그레잇 트랜스포메이션 Great Transformation (엄청난 환골탈태)의 의미이다. 


(동영상 사진 설명) 


동영상 출처: https://vimeo.com/413094148




전두환 장군을 칭송하는 이진희 MBC, 경향신문 사장. 1980년 8월 11일 전두환과 이진희와 대화. 정식 인터뷰 전에 전두환이 이진희에게 담배 한대 피우자고 제안한다. 그 이후 대화 주제는 전두환 고향 경남 합천을 MBC 취재팀이 방문해 '전두환 장군 일대기, 어린시절부터 장군까지' 이런 주제로 특집 방송을 만들자는 것이다. 



전두환이 1979년 1212 군사쿠데타를 일으키고, 1980년 518 광주항쟁을 진압하고 난 후, 체육관 선거를 통해 대통령직을 찬탈하기 직전인 8월 11일에 MBC와 한 인터뷰이다. 당시 KBS, MBC는 물론, 조선, 동아일보, 경향신문 등을 비롯 대부분 언론사는 전두환의 수중에 들어갔다.  



전두환이 1980년 광주 518 항쟁을 진압하고 나서 내세운 기치가 '민주복지'였다. 



당시 만 49세였던 전두환을 이순신 장군수준으로 격상시키는 MBC 이진희 사장의 아부 발언은 "사회개혁"이었다. 1212 군사반란과 518 광주민주화 운동을 짓밟은 것을 '사회개혁'이라고 이름을 바꿨다. 

'국가 보위 비상 대책 위원회 (국보위)를 만드시느라 노고가 많으셨다. 전두환 장군님께서. 그런데 이것은 마치 전장군의 개인적인 뜻이 아니라 기독교의 신, 철학자 헤겔의 범신론의 신처럼 새 시대를 영도하기 불가피한 하늘의 뜻'이였다고 이진희는 전두환을 '영웅화'했다.








전두환은 흐뭇해 하면서, 공식 인터뷰 전에 담배나 한 대 피우자고 이진희에게 권유하고, 이 둘은 최민식과 하정우가 출연했던 범죄와의 전쟁-나쁜 놈들 전성시대의 주인공처럼 동네 양아치들처럼 담배를 피워대기 시작했다. 



이진희 MBC사장이 "전두환 장군님 어린시절 부터 일대기를 (전두환의 고향 경남 합천에서) 취재하고 있습니다"라고 아부를 떨기 시작한다.




전두환 장군은 이에 호응해, "촌놈이라 사진이 있어야지 ~"라고 농을 건넨다.




이진희는 글로벌 단독 뉴스, 마치 존 에프 케네디라도 저격당한 현장에 MBC 기자를 특파하는 듯한 심각한 표정으로 "(MBC 기자 팀)을 일제히 보내 빨리 전두환 장군 일대기 특집을 준비하도록 !" 명령을 내린다. 




박정희에게 알랑방구를 뀌던 솜씨로, 실제 전두환은 군인시절 박정희를 방문해 양아들을 자처하며 스포츠 경기를 같이 보면서 박정희에게 중계쇼도 하고, 군대 내부 반-박정희 쿠데타 움직임이 없음을 알리고, 충성을 맹세하고 박정희로부터 금일봉을 받아와 영남출신 육사출신 장교들의 모임인 '하나회'에게 술값을 뿌리며 군인정치인 연습을 길게는 18년 해왔다. 


전두환 살인마라는 별칭, 무식한 대머리라는 시민들의 비아냥이 있었지만, 스네이크 박 이라고 불렸던 박정희만큼 전두환 역시 '강자에게 아부하고, 적들과 정적들은 이간질해 소탕해버리는' 군사 전략 전술 기술을 발휘해 박정희 수하에서 18년간 생존해왔다. 




전두환이 한 마디 거든다. "경남 합천 고향은 시골이라 찻길이 별로 없다. 헬리콥터를 빌려줄테니 그거 타고 가서 일대기를  빨리 제작하라"는 명령아닌 명령을 이진희 사장에게 내린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헬기가 1980년 9월 5일 전두환의 고향, 경남 합천 한 운동장에 착륙했다. 애궂은 죄없는 학생들이 공부도 못한 채 동원되었다. 이 학생들은 헬기에서 내리는 전두환과 이순자에게 박수를 쳤다. 


MBC,경향신문 이진희 사장이 당시 49세 전두환에게 '장군님'이라고 부르고 새 시대를 불가피하게 신의 지령처럼 영도해 나가셔야 하는 '역사적 책무'를 짊어졌다고 했고, 그 결과 학생들이 동원되어 도열해 박수를 쳤던 것이다. 


이러한 동원 정치는 그 형태만 바꿔, 기술만 모양새가 바뀌어 다시 우리 일상에서 벌어지고 있다. 


지금도 이러한 '박수 동원'은 온라인에서, 스마폰에서, 페이스북에서, 팀장님 카톡방, 텔레그램 방에서 일사천리로 마치 전두환이 '1212 군사 쿠데타'를 '미드나잇 익스프레스'하듯이 분초를 다퉈가며 수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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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정치/정의당2020. 3. 21.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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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진형도 문제지만, 더 중요한 건 대중적 진보정당을 표방한 정의당의 리더십이다.


민주당의 기생 정당인 열린민주당은 3월 8일에 급조되어, 2주만에 당원 2만 4444명의 선거인단을 모았다. 정의당을 민주당의 기생정당이라고 비난했던 주진형은 민주당의 기생정당이자 비례용정당인 열린민주당에 '열린' 마음으로 국회의원에 입후보했다. 한겨레 신문과 자신의 페이스북에, '선거법 개정'에 대한 컬럼을 쓰곤 했는데, 그 내용은 비전문적이며 너무 부실했다. 식칼 들고 히토오 히로부미 처단하러 나가는 단타 의병의 행색이었다.  

한국의 대중적 진보정당 중에 가장 규모가 큰 정의당의 당권자 숫자는 3만 5960명이다. 정의당 이외에 녹색당, 노동당, 민중당 등 진보정당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진보정당원 숫자는 최소한 5만명은 넘을 것이다. 

비참한 힘관계를 드러내준다. 민주당 기생정당인 열린민주당은 2주만에 당원을 2만 4444명을 동원했다. 그 속도가 박정희와 전두환의 '통일주체국민회의' 소집 속도와 똑같다. '모여 !' 그러면, 전국에서 버스타고 왔고, 이제 휴대전화 앱이면 정당 뚝딱 제조할 수 있다.

정의당의 주축들 중에 한 조류는 2000년에 창당한 민주노동당이다. 20년 걸려 만든 진보정당원 숫자가 3만 5969명인데 비해, 리버럴 민주당의 기생정당인 열린 민주당은 2주만에 2만 4444명을 만들어냈다. 엄청난 조직력인가? 아니면 성수대교, 삼풍백화점 붕괴와 같은 부실정당인가?

정의당 역시 안타깝게도 선거법 개정에 적극적이었지만, 비례대표 후보 선출과정에서 유권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겨주지 못했다. 미래통합당과 민주당이 비례용 갈취정당을 만들어 한국 민주주의를 훼손할 때, 정의당이 대안으로 우뚝서고 범진보정당들의 구심이 될 기회를 조금 놓친 거 같아 안타깝다.

정의당을 민주당의 기생정당이라 비난했던 주진형과 그 행보는 부차적이다.

정의당은 리버럴 민주당과 보수파 미통당이 아닌 제 3의 진보정당이 한국 민주주의의 대안이라고 생각하는 유권자들에게 더욱더 적극적으로 손을 내밀어야 한다. 비판을 회피하고 안으로 위축되지 말고, 자기가 편한 사람들 위주로 정치하는 좁쌀 리더십을 탈피해야 한다. 

 







그림 1


그림 2. 정의당 당권자 숫자가 3만 5960명이다.



김의겸-최강욱, 열린민주당 비례후보로

윤다빈 기자입력 2020-03-21 03:00-

20명 발표, 온라인투표로 순번 정해

주진형-황희석-김진애 등 포함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전북 군산 총선에 출마하려다 무산됐던 김의겸 전 청와대 대변인이 민주당 출신 손혜원 의원과 정봉주 전 의원이 이끄는 열린민주당의 비례대표 국회의원 후보 명단에 포함됐다.


열린민주당은 20일 김 전 대변인을 포함한 남성 9명, 여성 11명 등 비례대표 후보 20명의 명단을 공개했다. 이들의 비례대표 순번은 22∼23일 온라인 투표를 거쳐 확정된다. 열린민주당은 당원 1000명으로부터 비례대표 후보로 3명씩 추천받았다. 이 중 일정 이상의 추천을 받은 인물을 대상으로 개별 접촉하고 공천 참여 의사를 타진해 명단을 선정했다.


부동산 투기 논란에 휘말려 대변인직에서 물러난 김 전 대변인은 지난해 12월 민주당 예비후보로 전북 군산 출마를 선언했으나 민주당 지도부의 만류로 불출마하게 됐다.



남성 후보로는 최강욱 전 대통령공직기강비서관, 주진형 전 한화투자증권 사장, 황희석 전 법무부 인권국장(검찰개혁추진지원단장), 안원구 전 대구국세청장, 서정성 광주시 남구의사회 회장, 방송인 김성회 씨, 조대진 변호사, 황명필 울산 지역 노사모 활동가 등이 포함됐다. 최 전 비서관의 경우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자녀 입시 비리에 연루된 혐의로 기소된 상태다.


주요기사

역성장, 퍼주기, 무소속…총선 판세 흔들 3大 이슈

양당 현역의원 90명 물갈이…與 친문독주-野 공천불복 변수


여성 후보에는 김진애 전 의원, 조혜영 전 여성신문 편집국장, 정윤희 도서관위원회 위원, 국령애 사회적기업 다산명가 대표, 허숙정 전 육군 중위, 이지윤 전 서울시설공단 이사장, 피아니스트 김정선 씨, 교육 전문가인 변옥경 씨, 교사 출신 강민정 씨, 김종숙 사회복지법인 곰두리재단 용인시 대표, 한지양 노무사 등이 이름을 올렸다.


윤다빈 기자 empt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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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J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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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ㅇㅇ

    여당의 당원수가 수백만인데 겨우 2만명을 모은 기생정당으로 자뻑하는건 너무 악의적이네요.

    2020.03.21 22:56 [ ADDR : EDIT/ DEL : REPLY ]

한국정치/민주당2020. 3. 18. 0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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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취 정당 미래한국당을 갈취하기 위해 만든 새로운 당명은 “더 불어난 민주당”이다.위성정당 자매정당 위장정당은 피튀기게 아름다운 이름이다. 왜 ‘더 불어난 민주당’인가?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도 목표는 다원주의적 민주주의를 가능케하는 소수정당의 국회진출이다. 그러나 더불어민주당은 ‘더 불어난 민주당’을 꿈꿔왔다. 민주당 속뜻은 진보적 소수당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 이 정당들을 길들여, 말 잘듣는 ‘푸들 민주당’으로 탈바꿈시키려는 것이다. 415 총선 이전, 이후에도 이 ‘푸들 민주당’ 프로젝트는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또다른 전투가 발생할 것이다. 정치적으로 더 비참한 사태는 ‘기생충’ 집 반지하, 제 3열에서 벌어지는 사다리 걷어차기 아귀다툼이다. 블랙홀 민주당을 제외한 소수 정당들은 사다리 걷어차기 늪에 빠지게끔 설계되어 있다. 벌써 최배근 천사, 우희종 앤젤 ‘플랫폼 정당’과 하승수 사무총장이 있는 정치개혁연합간 사실상 권력투쟁은 천당과 지옥을 오가고 있다.


왜 이런 정치적 오류가 반복되는 것일까? 그것은 한국 정치사의 교훈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리버럴 민주당 586, 1987년 유월항쟁 이후, “호헌철폐,독재타도” “제헌의회 소집”만 외쳤다. 87년 10월 헌법 개정 국민투표까지, 김대중과 김영삼은 프랑스 헌법에 명기된 “대통령 결선투표제도”를 알면서도 일부러 침묵했고, 리버럴 민주당 586 전대협 리더들과 그 배후 조종 멘토들은, 프랑스 우파 드골 대통령이 만든 “결선투표제도” 자체를 언급하지도, 이를 대중화시키지도 못했다.


결선투표를 헌법에 명기했으면, 김영삼 혹은 김대중 둘 중에 한 사람이 노태우를 결선에서 꺾고 대통령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90년 김영삼-김종필-노태우 민자당 3당 보수통합은 없었을 것이고, 부산-울산-경남 영토 박탈도 없었을 것이다. 대통령선거제도, 국회의원선거제도 하나 바꾸는 게 한국의 30년을 좌지우지한다.


2016년 촛불 항쟁, “박근혜-최순실 탄핵”에 5천만 시민이 참여했다. 87년 6월 항쟁보다 더 큰 규모의 참여민주주의 실천이었다. 87년 10월에 “결선투표제도” “총선제도 개혁”이 빠졌지만, 개헌이라도 해서 현재 ‘제 6공화국 헌법’이라도 만들었다. 2017년,2018년,2019년,2020년 4년 동안 겨우 만든게 10%짜리 연동형 비례대표제도이다. 그것도 이제 ‘도로묵’ 되어, 과거로 돌아갔다. 역사적 반동이다.


부끄럽다. 한국 민주주의의 수치다. 지금 미래한국당, 비례민주당-선거연합당 모두 반칙이다. 월드컵 축구에서 골키퍼 2명인 경기다. 야구에서 투수 2명이 올라가서 1타자 상대하는 야구를 본 적이 있는가? 우희종 앤젤 말씀처럼, 미래한국당이 왜적이고 외계인이고 괴물인가? 그들은 대한민국 시민아닌가? 아무리 그들이 정치적으로 반동적이고 수구꼴통이어도 전두환-노태우 학살자 집단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실제 이인영 민주당 원내대표는 미래통합당 나경원을 ‘밥 잘 사주는 누나’로 부르지 않은가?


미래한국당, 중앙선관위, 비례용민주당 모두 세계정치사의 수치다. 리버럴 민주당 586, 미국 좋아한다. 특히 미국 대학들을 좋아한다. 자녀들도 거기 간다. 자식사랑에 비난할 일 절대 아니다. 필자는 5천만 국민 모두 적어도 10개 국가 넘는 세계여행하는 나라를 만드는 게 정치적 꿈이다.


미국,유럽,캐나다 대학 정치학 개론서에, 한국은 일본과 더불어,아시아의 '우등생' 민주주의 국가라고 적혀져있다. 이것도 일종의 정치적 오리엔탈리즘이라고 할 수 있겠다. 좋다. 뭐라고 이름붙이건 간에, 그러나 서유럽과 미국-캐나다 북미 국가들이 한국과 일본은 자기네들과 유사한 동종 ‘민주주의’ 국가로 인정해주는 것이다. ‘엄지 척’이다.


봉준호 기생충 아카데미 작품상도 칭송했던 문재인 대통령과 민주당, 유럽과 미국 캐나다 국가 총선에서 2개 정당이 한 조로 나온 사례를 본 적이 있는가? 플랫폼정당 최배근, 우희종 앤젤, 정치개혁연합 하승수 비례전문가는 정당을 2주만에 창조하시는 고려청자굽는 ‘정당’ 장인인가?


한 시민으로서 정치참여는 독려해야 한다. 그러나 “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 굿은 무당에게”라는 명문이 있지 아니한가? 선한 동기가 최악의 결과를 잉태하는 선무당이 되지 않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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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정치/정의당2020. 1. 17.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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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한솔 정의당 부대표 징계사태는 한 여름에 ‘우박’이고, 한 겨울에 ‘열대성 스콜’이었다. 이상 기후난동이었다. 전두환을 잡기위해 기초의원직을 주민 동의없이 버리고, 국회의원이 되겠다고 심상정 대표에게 ‘재가’를 받으려다 실패했다. 2000년 민주노동당 출범 이후, 처음으로 목격한 정치적 과대망상쇼였다. 

 

적어도 정의당은 두 가지를 속히 뒤돌아봐야 한다. 첫번째는 당의 민주적 원리를 너무 쉽게 짓밟은 임한솔의 망상쇼를 가능케 했던 정의당의 토양은 무엇인가? 두번째는 임한솔에 대한 징계와 당으로부터 퇴출을 정의당의 전체 모습으로 과장할 필요는 없다. 한국당,민주당 어느 정당이나 ‘정치 룸펜 군단’이 있고, 돌출적 과잉 자아의식을 가진 자들이 존재한다. 


현재 심상정 대표를 비롯 당 대표단은 임한솔을 길러낸 정의당의 ‘토양’에 어떤 문제점들이 있었는가를 시급히 진단하고 당원들의 지혜를 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표단 전체 신뢰도가 415총선을 앞두고 붕괴될 것이다. 


‘누더기 개혁 선거법’의 최대 수혜자가 정의당이라고 과대선전하는 모든 언론의 예측과 달리, 415 총선은 정의당에게 엄청난 난관을 제공할 것이다. 조국 논란 이후 정의당 지지율은 당대표단의 오판으로 체계적으로 하락하고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또한 임한솔 개인의 과대망상과 특이점도 눈여겨 봐야 한다. 좌파,진보정치가가 ‘욕망’이 없다고? 편견일 뿐이고 이중잣대이다. 한국당 민주당과는 질적으로 다른 ‘삶의 질’에 대한 철학과 정책에 대한 ‘욕망’이 있다. 진보정당만의 ‘정치적 욕망과 욕구’ 자체를 탓하는 건, 손흥민에게 슛하지 말고 패스만 하라는 말과 같다. 


하지만 임한솔씨가 구의원 찢어버리고, 정의당 비례대표 후보로 출마 ‘재가’를 받기 위해 심상정 대표와 담판지으려 했다는 그의 발언은 무엇인가?


‘재가’라는 단어는 전두환이 1979년 1212 군사쿠데타를 일으키기 전, 그 상관인 정승화 참모총장을 반란죄로 몰아 체포하기 위해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를 받으려고 했을 때 쓰던 말 아닌가?


심상정 정의당 대표가 1979년 최규하 대통령이라고 간주한 임한솔의 두뇌 속 망상 회로를 보통 정의당 정치가들은 흉내조차도 낼 수 없다. 전두환 추적하다가 전대갈을  닮아간 건 아닌가?

임한솔씨의 의도와 달리, '중앙정보부장'직으로는 김대중,학생들의 민주화  데모를 진압하지 못하니까 '대통령'이 되어야겠다는 전두환 결단과 형식논리적으로는 동일하다. 


임한솔의  ‘정의당 탈당’ 선언문 중에, ‘심상정 대표에게 재가를 받으러 갔으나’ 라는 문장을 보면서, 이것은 보통 과대망상 증세가 아니라는 생각이 저절로 든 이유다.  


임한솔이 전두환 골프치는 장면, 저녁식사 잔치 급습 촬영과 같은 언론활동은 이미 독립언론 뉴스타파가 전두환 일당이라는 제목으로 시리즈를 만들면서, 민주언론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기도 하다. 


임한솔이 심상정의 ‘재가’를 받으러 가는 게, 영화 [26년]이나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러 간 안중근 의사의 결단이었다면, 우리 두 손 모아 기도하고 그의 선택을 존중했을 것이다.


현실은 임한솔의 과대망상 회로의 오작동이다. 전두환이 원래 14년 집권하려던 것을 막았던 힘은 1980년 광주 시민들이 죽음으로써 항거했기 때문이고, 80년부터 87년까지 비타협적으로 투쟁했던 학생들, 시민들의 노력이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전두환을 법정에 세워 단죄할 주체는 임한솔 개인만은 아니다. 수많은 시민들이 나서야 할 것이다. 


1980년부터 1987년까지 국회의원들은 많았다. 국회의원이 되어야 전두환을 잡을 수 있다는 임한솔의 생각 자체는 비역사적이고 비현실적인 과대망상에 불과하다. 

‘니가 가라 하얼삔’ 영화를 찍을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임한솔의 과대망상 쇼는 분명히 정의당의 현 주소이다. 그 토양을 갈아엎어야 한다. 다른 한편 임한솔 개인 특이성과 캐릭터도 분석대상이고 설명되어야 한다. 






(임한솔 씨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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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철학2020. 1. 1. 0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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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cember 31, 2014 at 7:31 AM · 


민족-민중 집단적 의지 형성과 조직화 (1) 문제 중요성



1987년 대통령 선거 이후, 노태우가 합법적으로 당선되었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1980년 광주 학살자와 1212 군사반란 범죄자였지만, 1987년 대선을 통해서 노태우는 ‘합법성’을 취득하고, 도덕적 ‘정당성’은 결여되었지만 6공화국이라는 정치적 ‘정당성’의 운신의 폭을 넓힐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당시 소위 민민(민족민중)세력은 정치적 도덕적 정당성 모두 결여한 전두환 5공화국과 노태우 6공화국 동일성과 차이을 어떻게 설명하고 어떻게 정치 투쟁을 이끌어 나갈 것인가? 다시 말하면, 전두환 5공화국의 ‘폭력과 강압’, 그리고 본질적으로는 큰 차이는 없지만 유사-파시즘 요소가 가미된 그러나 5공의 무지막지한 ‘폭력과 강압’이 아닌 ‘법적 질서 (김기춘 검사/법무장관)’ 강조와 이데올로기 투쟁을 결합한 노태우 6공화국의 차이을 어떻게 해명하고 이에 대응할 것인가? 이게 큰 문제였다.



80년대 그람시에 대한 개설서들이 몇 권 번역되어 한국에 소개되었다.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은 위 문제들을 푸는데 어느정도 실마리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나는 보았다.


당시 내 생각을 간단히 요약하면, 노태우 6공화국이 87년 합법적인 대선을 통해 당선되었지만, 정치적 도덕적 정당성은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이데올로기 담론 (여론전)을 잘 수행하면서 그 6공 체제의 약점을 파고들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그렇다면 학생운동은 어떻게 변해야 하는가? 중앙집중적 데모 위주가 아니라, 각 학과로 정치,계급 투쟁의 깃발이 이동해야 해야 한다. 이 둘은 병존,공존도 해야 하지만, 공간의 이동, 방점의 이동 필요성이 생긴 것이다.







민족-민중 집단적 의지 형성과 조직 (2)



그람시의 고민은 이탈리아에서 어떻게 민족-민중의 집단적 의지를 형성하고 조직화할 것인가였다. 그람시는 이 역할을 이탈리아 공산당 PCI 가 해야 한다고 봤고, 이탈리아 근대사에서 결핍된 자코뱅 세력이 되어야 한다고 봤다. 


프랑스 혁명에서 빌어온 자코뱅 노선이란, 20세기 초반 이탈리아에서 농민들을 프롤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 하에 묶어두고 동시에 모든 종류의 경제주의, 생디컬리즘, 자생(자발)주의를 거부하는 것이었다. 이 민족-인민(민중) 집단적 정치의지야말로 이태리 국가의 기초라는 게 그람시의 생각이다.



그람시가 이 민민(민족-민중)의지를 강조한 배경에는, 유럽의 국제정치가 있다. 1815년에서 1870년 이 시기는 유럽의 보수세력과 지배계급들이 유럽 전역의 자코뱅 세력들을 필사적으로 깨부수고 탄압하려고 했다. 그람시를 이러한 보수적 정치 지형을 ‘국제적 수동적 균형체제’라고 불렀는데, 이 체제 하에서 지배계급들은 경제적 기업의 권력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그람시는 이러한 국내외 정치현상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이탈리아 지식인들이 민민(민족-민중/인민) 정치의지를 발현하는데 공헌해야 한다고 보고, 이탈리아 자코뱅 세력들 (근대 군주= 정당)이 지적 도덕적 개혁 조직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지적 도덕적 개혁이 경제-사회적 개혁과 연결되어야 한다는 게 그람시의 생각이다. 왜냐하면 경제 사회의 개혁(변혁) 역시 지적 도덕적 개혁을 수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람시가 근대 군주로서 ‘정당(자코뱅)’을 강조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민족-민중 집합적 정치 의지 형성과 조직화를 그 정당의 책무로 설정한 배경은 무엇인가? 그의 리소르지멘토(이태리 통일운동)에 대한 평가와 더불어, 그것은 당시 이탈리아 노동자 계급의 상황, 그 고향 사르디니아 남부 농민과 투린과 같은 북부 산업 노동자 관계, 지역 갈등, 사르디니아 민족주의 문제, 반동적인 지주 계급, 위계서열 권위주의 문화가 강한 이탈리아 생활세계 등과 연결되어 있다.



1906년 남부 사르디니아 농민들의 '독립운동'은 북부에서 파견된 군대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당하고, 반대로 북부 투린 지방 노동자들을 탄압하는데는 남부 사르디니아 군대가 동원되었다. 이러한 복잡한 정치 상황, 특히 노동자 계급의식의 성장이 더딘 상황을 돌파하기 위한 그람시의 대안은 민족-민중 집합적 의지 형성과 조직화였고, 그 주체로 정당를 설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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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586운동권 출신 왜 변절, 아니 그냥 생계형 정치업자로 돌아가는가?

원희룡은 보수를 바꾸기 위해 한나라당에 입당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리고 원희룡은 '1980년 518 광주에 진 빚' 때문에 학생운동에 참여했다고도 말했다.그런데 2007년 원희룡은 경악시킬 사진 한 장의 주인공이 되었다.


 학생운동 당시 타도 대상이었던 518 광주학살 주범인 전두환에게 세배를 올렸다.


 국회의원 원희룡과 보좌관들은 '한 건' 하기 위해 전두환을 찾아가, 업죽 엎드려 세배를 했던 것이다. 


30.9% 여론은 '전임 대통령'에게 원희룡이 절한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답했다.


30.9%라는 건, 우리 국민들 10명 중 3명 정도는, 80년 광주학살자 전두환 잘못을 '범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줬다.


이와 관련한 다른 사례는 1987년 대선 결과다. 당시 노태우의 당선율이 36.6%였는데, 87년 대선은 광주항쟁 발발 7년 후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학살 2인자 노태우에 투표한 수치는 가히 충격적이다. 



2017년 박근혜 탄핵 퇴진 이후, 보수 지지자들은 흩어지고 결집하지 못했지만, 문재인 정부의 개혁 성과가 미진하자, 다시 30%까지 결집했다. 


공식적인 정당정치에서 보수 (합리적 보수+수구 퇴행적 보수 다 합쳐서)의 핵심은 대략 30~35% 핵심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정치적 보수주의'에 그치지 않는다. 민주당의 경제정책과 '경제 민주화'에 대한 태도가 자유한국당과 큰 차이가 없기 때문에, 또 말로는 다르다고 했지만, 실제 실천은 유사하기 때문에, 한국의 시민사회의 보수성과 민주당+자유한국당이 거대한 동질의식으로 뭉쳐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사회복지국가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IMF 긴축독재를 수용한 현 민주당 586과 원희룡 등 보수파 586들은, 국제 정치 흐름을 읽지 못하고 국내 토호 지배세력들을 대변했다.


 이 두 집단은 공통적으로 2008년에 공황으로 붕괴될 체제였던 미국 월스트리트 금융자본을 세련된 선진자본주의로 선전했고, 심지어 골드만삭스, 리먼 브라더스, 모건 스탠리 투자기법을 배우자고 주창했다. 또한 칼라일 그룹 (Carlyle Group)과 같은 투기적 사모펀드를 한국에 이식수술했다. 


그 결과 민주당 정권 하에서 미국의 사모펀드 론스타는 적대적 인수합병으로 외환은행을 매각하고 4조가 넘는 차액을 챙겨 달아났고, 지금까지도 법률 소송 중이다. 



민주당 586 국회의원 파워 엘리트 집단과 원희룡-나경원-김진태-우병우 등 자유한국당 586 보수 엘리트는 한국전쟁 이후 사라져버렸던 '민중' '노동해방'과 같은 단어들이 복원된 1980년대를 살았다. 


민주화 운동경험이 전혀 없던 나경원-우병우-김진태 등은 자발적 맹목적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했지만, 민주당 586들은 '민중' '노동해방' '민족해방'과 같은 단어들이 어떻게 시대적 변천을 거치면서 심화발전되는지, 창조적 변형을 겪으면서 '한국형 민주주의' 모델로 발전할 수 있는지에 대해 전혀 묻지 않았고, 실천하지도 않았다. 


민주당 586 주류들은, 자신들이 학생 때 외쳤던 급진적 구호들을 '현실적 생존'을 위해서 급격하게 버렸고, 뉴요커 금융자본주의 모델을 선진 문물이라 하여 얼굴에 '분칠'하기 바빴다. 


사회적 공론화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IMF 긴축통치 체제를 수용해버렸기 때문에, 그것이 가져올 '시민 내전 효과', 계급 차별의 가속화, 상대적 절대적 빈곤의 이중구조, 서울과 지방 격차 심화, 일상에서 '경쟁 요소들' 증가와 민심 피폐화 등에 대해서 민주당 586들은 전혀 예측하지도 못했고, 이에 대한 해법도 제시하지 못했다. 



2000년 출범한 민주노동당이 위 두 정당들의 신자유주의적 경제 정책들을 비판하면서 대중화되었다. 특히 2002년 6월 지방선거, 12월 대선, 2004년 총선을 거치면서 민주노동당은 민주당=리버럴, 한나라당=보수, 민주노동당=진보(좌파) 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2007년 권영길 대선 후보의 저조한 성적 이후, 내부 정파 갈등을 해결하지 못한 채, 세력이 약화되었다. 이는 2012년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부정 투표 사건으로 이어졌다. 


진보정당의 슬럼프는 2016년 총선까지 이어지다, 2016년 말 최순실-박근혜 퇴진운동 이후, 정의당 등이 진보 유권자들의 지지를 다시 모아내고 있다.


하지만 정책정당을 표방한 진보정당 이미지는 아직도 뚜렷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배경에는 싱크탱크의 재원 부족과 한국 지식인 사회의 보수성도 한 몫을 하고 있고, 구체적인 지방행정 경험을 정책으로 생산하지 못했던 지난 20년간 진보정당의 자기 실수도 그 원인들 중 하나다. 


또한 정의당 등도 노회찬 심상정 등 대중적인 리더십은 자리를 잡았지만, 당내 정치가 활성 프로그램이 안착되지 못했기 때문에, 여러 신진세력들이 투명하고 긴장감넘치는 당활동을 못하고 있다.



 




[신문자료]







한나라당 원희룡 의원이 신년을 맞아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자택을 방문해 큰절을 한 것과 관련, 과반이 넘는 국민들이 이를 두고 ‘적절치 못한 행동’ 이었다고 응답했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대표: 이택수)가 조사한 결과, 원희룡 의원의 행동이 ‘적절치 못했다’ 는 의견은 56.7%였으며, ‘전임 대통령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예의를 표한 것이므로 문제되지 않는다’ 는 의견은 30.9%에 그쳤다.



지역별로는 특히 서울(63.2%), 인천/경기(62.0%) 등 수도권이 타지역에 비해 비판적 입장을 많이 나타냈다. 연령별로는 20~40대의 60% 이상이 적절치 못한 행동이라고 응답한 데 반해, 50대 이상은 전임 대통령으로서의 예우를 갖춘 것이므로 문제되지 않는다는 의견이 오히려 45.0%로, 문제된다(41.0%)는 응답에 비해 높은 것으로 나타나, 연령별로 차이를 나타냈다.





이 조사는 1월 4일 전국 19세 이상 남녀 640명을 대상으로 전화로 조사했고,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 3.87%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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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history)2018. 5. 15.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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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eing human rights in the "proper manner"
The Reagan-Chun Summit of February 1981

National Security Archive Electronic Briefing Book No. 306
Edited by Robert Wampler

Posted - February 2, 2010

For more information:
202/994-7000 or wampler@gwu.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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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shington, D.C., February 2, 2010 - Twenty-nine years ago today, less than two weeks after his inauguration, President Ronald Reagan rolled out the welcome mat at the White House for South Korean president and strongman Chun Doo Hwan, despite internal U.S. government concerns about Chun's poor human rights record. 


Over the previous year, Chun's regime had brutally suppressed the Kwangju student protests and thrown dissident leader Kim Dae Jung into prison. Nevertheless, the new administration, keen to send a strong signal of support for key anti-Communist allies, decided to reverse the previous U.S. policy of voicing public criticism of South Korean repression of its domestic opposition. 


Today, the National Security Archive is posting a set of formerly classified documents that provide a revealing window into this pivotal moment in U.S.-South Korean relations. The materials include the memorandum of conversation of Reagan's meeting with Chun on February 2, 1981, Reagan's State Department briefing book, as well as White House memos and State Department cables. 


The records illuminate the delicate balancing act Reagan's advisers chose to follow in squaring the White House's eagerness to reinvigorate the security relationship with Seoul with the need to avoid the impression of uncritical approval of Chun's repressive human rights policies.

Among other insights into the risky new policy, the documents (acquired through the Freedom of Information Act and from presidential libraries) describe:

  • Secretary of State Alexander Haig's acknowledgement that Reagan's invitation to Chun "spoke louder than words" about the administration's desire to strengthen ties to South Korea. (Document No. 4)
  • National Security Advisor Richard V. Allen's euphemistic take on the state of play in South Korea: "Human rights survives as a concept, but in a broadened context." (Document No. 5)
  • Chun's response to Reagan's assurance about potential U.S. approaches to Pyongyang: "I take your words as a gift, and they will allow me to return home with an easy mind." (Document No. 5)
  • U.S. assurances that South Korea can rely on it for supplies and technology for its nuclear power program. (Document No. 6a-b)

Reagan's warm reception of Chun was the public side of a strategy that favored handling human rights concerns behind closed doors. In the short term, the new U.S. approach engendered deep mistrust and suspicion of the U.S. for its role in legitimizing the South Korean government. Over the longer term, the combination of public political support and private encouragement of reform yielded mixed results. 

This year, the National Security Archive will publish through ProQuest a major document collection, U.S.-Korean Relations, 1969-2000, which explores the complex history of the two countries' ties.

 


Seeing human rights in the "proper manner"
The Reagan-Chun Summit of February 1981

By Robert Wampler

President Reagan toasting President Chun, Seoul, Korea, November 1983 [Photo courtesy Reagan Presidential Library]

Over the nearly sixty years since the outbreak of the Korean War, the United States has confronted two challenges on the peninsula. The security threat posed by an often erratic and unpredictable North Korea, centered over the past two decades on Pyongyang's nuclear ambitions, has taken center stage often.


 But just as serious has been the challenge posed by South Korea's troubled political history, as the country struggled to move beyond military-backed authoritarian regimes characterized by the often brutal repression of political opposition, to a democracy backed by popular support enjoying peaceful transfers of power.

 This tension between security and democratization has colored the history of the relationship and public perceptions in South Korea of America's role in their country's political evolution. It has also at times led to interesting and important contrasts between public and private diplomacy, often driven by the differing perspectives on goals and means held by presidents and their advisors.

A fascinating window on the ways in which public and quiet diplomacy can move on different tracks is provided by the meeting that took place on February 2, 1981, when newly-elected President Ronald Reagan hosted South Korea President Chun Doo Hwan to an official visit at the White House. 


To mark the anniversary of this pivotal moment in U.S.-South Korea relations, the National Security Archive is posting today a collection of declassified documents obtained by its Korea Project dealing with the Reagan-Chun meeting. In addition to the memorandum of conversation recording the meeting, these documents provide insight into how Reagan was briefed for his meeting with Chun, as well as reports on meetings that Secretary of State Alexander Haig held with Chun's advisors and with Chun during the visit. Finally, two cables from the State Department later in 1981 summarize assessments made by the State Department's Office of Intelligence and Research of Chun's policies and actions in dealing with continued student protests and his goals for political reform.

The Reagan-Chun meeting needs to be seen against the backdrop of the Carter years, when U.S.-South Korean relations were at possibly their lowest point since the Korean War. Here again public and private diplomacy worked on different tracks, in this case president's advisors working behind the scenes to bridge what was a widening chasm between the two nations created by the president's strong views. 


President Carter's criticisms of human rights abuses in South Korea, joined with his push to withdraw U.S. forces from South Korea, although ultimately thwarted, had created deep divisions in the bilateral relationship. The assassination of President Park Chung Hee in 1979 was followed by a military-backed coup that brought Chun Doo Hwan, one of the coup co-conspirators, into the Blue House. Under his leadership occurred the brutal repression of political protests in Kwangju, and the trial and conviction of leading dissident leader Kim Dae Jung for sedition, who was in jail facing execution. (Note 1)

Following Reagan's election in November 1980, Chun started pressing the U.S. for an official invitation to meet with Reagan, looking to use such a visit to bolster his political legitimacy and place bilateral relations on a new and more positive course. Reagan, who had campaigned on a platform of revitalizing America's Cold War alliances against the global communist threat, was open to such a meeting.


 Inviting Chun to Washington turned, however, on the outcome of behind the scenes negotiations conducted by Reagan's National Security Advisor Richard Allen, who had taken a personal interest in the fate of Kim Dae Jung. As recounted by Don Oberdorfer, the Carter administration had sought to place pressure on the Chun government to spare Kim, but had little leverage to use. Chun's deep desire for a meeting with Reagan provided this leverage. 


In talks with Lt. General Chung Ho Yong (commander of Korean special forces who played a role in the brutal Kwangju massacre) that lasted until January 2, 1981, just weeks before Reagan's inauguration, Allen was able to secure an agreement under which Kim's life would be spared in return for the invitation to Chun and a new start to bilateral relations. Chun carried out his part of the deal on January 21, releasing Kim and lifting martial law. (Note 2)

These documents, when viewed in conjunction with what is now known about the quiet diplomacy that set the stage for this meeting, reveal the delicate balancing act Reagan's advisors were following in seeking to square Reagan's eagerness to reinvigorate the security relationship with Seoul with the need to avoid giving the impression that the administration uncritically approved all of Chun's repressive policies and actions over the past year. 


While Reagan rolled out the welcome mat to Chun, his advisors then and later were well aware of the danger that without some progress on human rights and political liberalization in South Korean, there was a real risk of the country falling once more into turmoil. The briefing papers prepared for Reagan portray Chun in a positive light as a forceful leader who has brought stability to South Korea, glossing over the repressive actions taken by his government, and as someone who is willing and able to learn from the U.S. Chun's desire for reassurances from Reagan that the security alliance remains strong and that U.S. forces will not be withdrawn from the peninsula mirror the administration's security objectives for the talks.

Regarding political liberalization and improving human rights, the stress is on offering advice on these topics in private, and avoiding "less gratuitous public advice on internal affairs." 

This approach might be summed up in Reagan's comment to Chun during their meeting: Expressing his appreciation of all that Chun had done, Reagan said that "together the ROK and the United States must consider the question of human rights in the proper manner." However, this could also mean avoiding any appearance of praising Chun too much in public, as seen in Haig's objection to a "political" section in the communiqué issued after the meeting and drafted by Chun's advisors endorsing Chun's actions to restore political stability in Korea. 

Showing that quiet diplomacy can work both ways, Haig argued that Reagan's action in inviting Chun "spoke louder than words," and that the administration wanted to refrain from public comment on Korea's internal affairs.

The public face of the Reagan administration's policy pointed to communism and radicalism as the real enemy, arguing that where such regimes exist – behind "the bamboo and iron curtains," as Reagan put it to Chun -  the worst human rights abuses occur. Furthermore, Reagan and his advisors believed that support and engagement were much more likely to result in advancing human rights in authoritarian regimes than public criticism. 

Examples of this approach, and efforts by the State Department to bring some nuance into the administration's foreign policy, can be seen in other places, such as the Philippines, where Secretary of State George P. Shultz played a key role in moderating Reagan's support for Marcos.

As these documents reveal, there was awareness at least within the State Department that the U.S. had to follow a careful path in publicly reinvigorating the bilateral political and security relationship with South Korea while keeping a close eye on Chun's domestic policies and their impact on political stability and liberalization. 

There were also U.S. domestic pressures to deal with, as Chun's repressive policies had a fair share of critics in Congress and the public. At the time and later, Reagan's warm public welcome of Chun engendered deep mistrust and suspicion of the U.S. for its role in legitimizing the government that carried out the Kwangju massacre and threatened the execution of Kim Dae Jung, and so feeding anti-Americanism among those struggling for political reform in Korea. 

In the end, this mixture of strong public support joined with private encouragement for political liberalization brought mixed results. Before leaving office in 1987, Chun would support direct presidential elections, and his government reached agreement with the opposition on a new constitution to enact this, with a term limit of five years.

 However, Chun also worked to secure the election of his hand-picked successor, Roh Tae Woo. The Korean courts gave their judgment on the Reagan policy in 1996 when Chun was sentenced to death (later pardoned by Kim Dae Jung) for his role in the coup and Kwangju massacre.

 


Documents

Document 1: Memorandum, Richard Allen to President Reagan, January 29, 1981, Subject: President Chun of Korea, with attached cover memorandum, Donald Gregg to Allen, same date. [MDR Reagan Library]

This document provides a two-page overview of the Chun visit to brief Reagan on the political situation in Korea and Chun's background. The tone is set with the first sentence: "Your meeting with President Chun is an important milestone in American relations with the Republic of Korea." 

Allen stresses that the meeting will validate and legitimize Chun's leadership in a way no other event could do, and will usher in a less contentious era of U.S.-South Korean relations, compared to the past decade.

 The military coup that brought Chun to power following the assassination of Park Chung Hee is somewhat glossed over, as Allen notes that Chun had "quickly and forcefully move to establish himself as Korea's leader," bringing South Korea a new constitution, a new political system and a new sense of morality grounded in Chun's military background. 

Still, Chun can "learn a great deal" from meeting with Reagan and other U.S. leaders, Allen believes. After sketching in Chun's military background, Allen observes that the Korean leader seems "at ease with the power he wields," is a quick learner and seemed to be quickly developing a "deft political touch."

 As evidence of the latter, Allen notes the unconditional invitation Chun issued on January 12 to North Korean leader Kim Il Sung to visit South Korea. Allen believes that Chun will try to broaden his base of support beyond the military, a goal that his meeting with Reagan will help advance. Allen lays out the following key points that Reagan needs to stress to Chun: 

1) that Reagan has no intention of withdrawing U.S. forces from Korea; 2) that the U.S. will do all it can to help South Korea manage its current economic downturn; 3) that the U.S. will not make any unilateral moves towards Pyongyang; and 4) that the U.S.-South Korean relations is of "personal interest and importance" to Reagan.

Document 2: Briefing Book: The Official Visit of Korean President Chun, February 1-3, 1981 [FOIA - State]


These selections from the State Department's briefing book for President Reagan provide Secretary of State Alexander Haig's Scope Paper summarizing the key objectives and policy issues surrounding the meeting, a "Talking Paper for Conduct of the Summit Meeting," and briefing papers on the Korean Economic Outlook and U.S. nuclear power cooperation with Seoul. 

The scope paper repeats points made by Allen regarding Chun's key objectives of normalizing bilateral relations, consolidating and legitimizing his new government, reassurance that the U.S. security guarantee remains strong, defusing criticism about recent South Korean political developments, and reviving investor confidence in the South Korean economy.

 As laid out by Haig, Reagan's objectives were essentially to give Chun the reassurances and support he needs. Haig's memorandum also echoes the largely positive evaluation of Chun as a leader. Regarding Korea's future political development, Haig notes that key military officers, business men and other leaders expect the U.S. "to play a quiet but firm role in working for political stability." Chun himself is portrayed as being ready to consider U.S. advice "when it is offered privately," but Haig also notes that the Koreans expect that the Reagan administration "will offer less gratuitous public advice on internal affairs."

Document 3: Talking Paper for the Conduct of the Summit Meeting, ca January 1981 [MDR Reagan Library]

This is a full version of a document that is redacted in the briefing book found at document 2. The redaction, on page 2 of the document, addresses the need to brief Chun on U.S. nuclear deployments and non-proliferation concerns, noting that the U.S. "had clear understandings with President Park in this regard;" i.e., South Korea's agreement to abandon its nuclear weapons program.

Document 4: Cable, SecState to Amembassy Seoul, February 5, 1981, Subject: Korea President Chun's Visit – The Secretary's Meeting at Blair House [FOIA-State]

Though redacted, this cable reporting on Secretary of State Haig's meeting with South Korean Foreign Minister Shin Yong Lho on February 1st at Blair House reveals the careful balancing act the Reagan administration was carrying out in trying to put relations with Seoul back on a firmer footing while not making any public statements that could be seen as too fulsome in praise of Chun.

 This is seen in the brief exchange (partially redacted) about the draft joint communiqué to be issued following the Reagan-Chun meeting. The original Korean draft had contained a "political" (quotation marks in the original) section endorsing Chun's actions to restore political stability in Korea. Apparently Haig had objected to this, arguing that Reagan's action in inviting Chun "spoke louder than words," and that the administration wanted to refrain from public comment on Korea's internal affairs. 

Turning to security issues, Haig assured the South Koreans that the U.S. would maintain and improve its forces in Korea, including its nuclear weapons stationed there, but (picking up on a theme Haig had apparently raised earlier with Chun on the ride from Andrews AFB), South Korea had to grasp the importance of continued cooperation with America's non-proliferation policies (i.e., refrain from seeking a South Korean nuclear capability).

Haig completed his remarks by seeking to reassure the South Koreans about the administration's desire to work with Seoul on addressing its economic ills, including providing assistance through foreign military sales credits and weapons supply, and that the U.S. .in pursuing its common strategic concerns with China over the "polar bear" (likely a cryptic reference to Russia), would take Korean views into account.

Document 5: Memorandum of Conversation, Subject: Summary of the President's Meeting with President Chun Doo Hwan of the Republic of Korea, February 2, 1981, 11:20 – 12:05 P.M., Cabinet Room, with Cover Memorandum, Richard V. Allen to President Reagan, February 6, 1981, Subject: Your Meeting with President Chun of Korea.[MDR-Reagan Library]


This memorandum of conversation, prepared by NSC staffer Donald Gregg, summarizes the meeting between Reagan and Chun on February 2nd, a meeting that Allen believed was very successful. In an interesting aside, Allen notes that "Human rights survives as a concept, but in a broadened context." 

The meeting itself, following a brief gathering in the Oval Office, included Vice President Bush, Secretary of State Haig, Secretary of Defense Weinberger, Chief of Staff James Baker, and Ambassador to Korea William Gleysteen, while Chun's advisors included Deputy Prime Minister and Minister of Economic Planning Byong Hyun Shin, Foreign Minister Shin Yong Lho and Korean ambassador Yong Shik Kim. Reagan began the meeting by basically giving Chun most of what he hoped to secure from the meeting, calling the visit the opportunity to reaffirm the bilateral relationship, restore the alliance, and stating that his administration would not withdraw any forces from South Korea. 

Reagan further announced that he wanted to resume the Security Consultative meetings between the two nations that had been postponed due to the political situation in Korea, and stated his support for Chun's recent invitation to Kim Il Sung to visit Seoul. Hitting another talking point, Reagan assured Chun that the U.S. would only deal with North Korea in coordination with South Korea. 

Thanking Reagan, Chun said "I take your words as a gift, and they will allow me to return home with an easy mind." Chun then began a detailed analysis of the military situation in Asia and on the peninsula, arguing for the need for continued U.S. support and assistance to South Korea both militarily and economically. Reagan expressed his understanding of the burden South Korea was bearing and promised to work to increase U.S. military aid to the country, including the sale of F-16 fighters.

Turning to Korea's political situation, Chun laid out in essence the defense for his policies and actions over the past year. Noting that Korea had experienced "only varying degrees of success" in transplanting American democracy, Chun expressed his appreciation for Reagan's view that each nation "exists under special circumstances." In a thinly-veiled criticism of the Carter presidency, Chun noted that in the 1970s several countries close to the U.S. had succumbed to communism, due in part he felt to inconsistency in U.S. foreign policy, but that U.S. policy was now much clearer under Reagan. 

Turning to human rights, Chun asserted that Korea "highly valued" these and morality, but also argued that in Korea's precarious military situation, with North Korea forces "as close to Seoul as Andrews Air Force Base is to Washington," and the tense situation along the DMZ, past American comments (i.e., Carter's) had caused confusion in Korea. 

Chun asserted that peace and order had been restored in South Korea, and that his government had taken effective steps in response to the Korean people's desire for "an end to turbulence." For his part, Reagan expressed his appreciation of all that Chun had done, stating that "together the ROK and the United States must consider the question of human rights in the proper manner." Suggesting the viewpoint that should guide this "proper manner," Reagan noted that in the past the U.S. has seemed to ignore the worse violators of human rights, "most of whom are to be found behind the bamboo and iron curtains."

Document 6a and Document 6b: Cable, SecState to Amembassy Seoul, February 6, 1981, Subject: ROK President Chun's Meeting with the Secretary at the State Department [Two versions of this document are provided. The second document, while released in full, has some illegible segments. A transcription of the illegible sections is attached to the document. Both FOIA-State]


This cable reports on Secretary of State Haig's discussions with President Chun and his foreign Minister at the State Department on the afternoon of February 2, following the meeting between Reagan and Chun recorded in document 4 above. For Haig, the meeting provided an opportunity to make sure any of Chun's concerns that had not be adequately discussed in the meeting with Reagan be addressed.

 The bulk of the meeting was devoted to discussion of Seoul's economic problems and common security concerns. For example, Chun suggested Tokyo should bear a greater share of the security burden in Asia, one way being for Tokyo to extend up to a billion dollars in loans to Seoul. Stressing again one of the administration's key concerns, Haig assured Chun that Seoul could count on the U.S. as a source of nuclear supplies and technology for its nuclear power program, and expressed America's appreciation for Korea's adherence to a non-proliferation policy.

 While discussing the Reagan administration's goal of reinvigorating its alliances against the global communist threat, Haig also sought to ease any concerns Chun may harbor about how far the U.S. was willing to go in pursuing a strategic engagement with Beijing aimed at containing the Soviet threat. 

(These are the sections deleted from the first document.) Finally, Haig reassured Chun that the U.S. would not engage in any direct official talks with North Korea without the participation of Seoul, and commiserated with the Korean leader about the difficulties in controlling the actions of private citizens in this regard, or other allies. In this connection, Chun hoped that the U.S. would urge Japan (in connection with recent visits by Japanese politicians to North Korea)  to "refrain from encouraging North Korean ambitions."

Document 7: Cable, SecState to Amembassy Seoul, September 3, 1981, Subject: South Korea: President Chun's "Democratic Welfare" Society and Prospects for Stability [FOIA-State]


This summary of a recent INR study analyzes Chun's reform policies and their prospects for success. Chun's goal is a "democratic welfare" society that would adapt selected western democratic practices to Korea's authoritarian political system, with its roots in the Confucian tradition, and to lay the basis for a durable political order led by a strong president who is responsive to public needs and hopes. Positive steps in this direction include progress in reforming the electoral process, working toward a more cooperative National Assembly, and creating new political parties. 

Ultimate success, however, will depend on reviving the South Korean economy and arranging for the peaceful transfer of power at the end of Chun's administration. "Failure in either regard could lead to serious instability and give North Korea an opportunity to invade the South."


Document 8: Cable, SecState to Amembassy Seoul, September 4, 1981, Subject: South Korea: Government Response to Student Opposition Role [FOIA – State] 

This cable summarizes an INR assessment of the role being played by the student opposition to Chun's government and how Chun plans to respond to this challenge. The INR study concluded that student opposition to Chun's government "remains the greatest immediate threat to political stability in the Republic of Korea."

 Having served as the catalyst for the overthrow of the Korean government twice in the past 20 years, student dissidents were seen as being the "least amenable" to Chun's efforts to secure cooperation with his "New Era" policy. One of Chun's key political goals is to create an "atmosphere" of dialogue and responsiveness to replace the more confrontational stance marking the last years of Park Chung Hee's rule and the interim military government following the 1979 coup. 

INR sees Chun's strategy for doing this as two-pronged: a reform program geared to defuse and resolve contentious issues before they become unmanageable, combined with tight control over opposition activities. So far, this approach seemed to be working in limiting student protests and stopping the development of bread-based support for student causes. However, economic problems or any move by Chun's regime to a more restrictive and dictatorial approach could foster a "destabilizing" coalition between students and other parts of the opposition. For the near term, this is not viewed as a likely threat.

 


Notes

1. For a good narrative analysis of these events, see Don Oberdorfer, The Two Koreas: A Contemporary History (Basic Books, 1997, 2001), Chapters 4 and 5, passim.

2. See Oberdorfer, op. cit., pp. 135-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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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3월 12일 박근혜가 파면 이후 삼성동 집 앞에서 보여준 '웃음'은 1995년 12월 2일 전두환 골목성명과 비슷했다. 박근혜와 전두환 둘 다 국민의 뜻과 헌법을 무시해버렸다. 어떠한 죄의식도 없었다. 


박근혜 공식 논평 "삼성동 골목 성명"은 촛불시위와 헌법재판소 파면 결정은 '진실'이 아니라, 거짓이고 사기이다. 이것이 박근혜 공식 입장이다. 


"제게 주어졌던 대통령으로서의 소명을 끝까지 마무리하지 못해 죄송스럽게 생각한다. 저를 믿고 성원해준 국민 여러분께 감사한다. 이 모든 결과에 대해 제가 안고 가겠다.시간이 걸리겠지만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고 믿고 있다 (박근혜 탄핵 이후 공식 발표.3월 12일.) ”


향후 어떻게 될 것인가? 


박근혜 역시 전두환처럼 구속될 것으로 보인다. 전두환은 12월 2일 1212 쿠데타 범죄 조직원들과 연희동에서 골목성명을 발표하고 검찰 수사에 협조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전두환은 강제 구속당했다. 박근혜도 검찰 수사를 거부하고 있고, 삼성동 집 앞에 박사모와 관제데모단이 앞으로 검찰 수사를 방해하겠지만, 결국 구속될 것이다.


다시 읽어보는 전두환 구속영장. 1212 쿠데타 음모, 정승화 참모총장과 전두환 일당 '하나회'와 갈등, 김오랑 소령 등 군인들 사살, 군 병력 이동 등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다. 



(*출처 경향신문) 



1995년 12월 2일 전두환 쿠데타 세력들의 골목 성명서 "검찰 수사에 협조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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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정치2016. 2. 13.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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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통치스타일은 박정희의 '군사작전'을 흉내낼 뿐이다. 전두환-노태우는 스네이크 박정희의 '변신술'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다. 최근 현대사 책들을 다시 검토하면서, 50년대~70년대 선배들의 투쟁에, 그들 중 일부는 이후에 변절했다할지라도, 총에 맞고 죽어간 감옥에 투옥된 선배들을 다시 생각해 보고 있다. 2016. January 20 at 12:27pm · 

박정희는 그 '동지들(육사 5기, 육사 8기)'도 집권연장의 '폭죽'으로 사용해 하늘에 아름답게 날려버렸다. 결국 그 동지들 총 맞고 박통이 박살나버렸지만. 그야말로 배우 황정민 50배를 능가하는 변신의 귀재, 스네이크 박정희의 '화해의 죽음'은 '죽음의 전설'이었다.

역사 책 속에서 다시 깨닫는다. 박근혜 덕택에 말이다. 전두환-노태우는 박정희 체제 하에서 18년간 '군사작전 (블리츠-크리크 Blitzkrieg)식 적군 및 경쟁자들 섬멸작전을 배웠다. 전두환-노태우가 박정희에 비해 소심했던 것은, 동지들의 총 맞고 죽지 않기 위해 '돈다발'을 동지들에게 자주 자주 찔러주면서 박정희처럼 '직접적 섬멸'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일전에 난 미 노스캐롤라이나 미 해병대 라이언 상사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중동에 대 테러전쟁에 참여한 전쟁 베테랑이다. "(전쟁터에서 죽음에 대한 공포) 무섭진 않냐?" 는 질문에 "적을 꼭 죽여야겠다고 쏘는 건 아니다.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 쏘는 거다"

군사작전식 정치라는 것은 '먼저 쏘기다'.

 두 박통들은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 적을 섬멸하고 블리츠클리크로 집중포화해서 콕 꼬집어 죽이는 것일 뿐', 꼭 그들이 인간적으로 미워서 그러는 건 아니다. '내가 이 전쟁터에서 총을 먼저 쏘지 않으면 적의 총탄에 내가 죽기 때문이다' 그게 박정희식 정치였다. 적도 동지도 1초, 3초, 2년, 10년 가는 것일뿐, '내가 살기 위한 군사작전'만 있을 뿐이다.

박근혜 말대로 '저런 건 슬픔도 아니다'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벌꿀 (꿀벌)처럼 열심히 매일 매일 적들과 경쟁자들을 섬멸하기 위해서 벌꿀 벌꿀을 따야 한다. 쉴 새가 없는 것이다. 유병언 죽음의 쇼도 해야 하고, 정보기관 '손발'도 필요하면 천국 지옥으로 파견보내고, 온라인에서도 'Blitzkrieg' 팀을 만들어서, 혼외 자식이 있는지 없는지, 적을 섬멸 타격할 모든 자원을 가동해서, 화염방사로 자존심과 자긍심을 불태워 씨를 말려야 한다.

꼭 그들이 인간적으로 미워서가 아니다. 그들의 정치적 이념은 이렇다. "산다는 게 다 전쟁터이고, 내가 배반하지 않으면, 내가 먼저 쏘지 않으면 내가 죽기때문이다." 이런 정치적 가치와 이념으로 똘똘 뭉친 사람들이다.






박정희는 1961년 516 군사쿠데타 당시, 장도영 참모총장을 앞장 세웠으나, 3개월 후 반혁명분자로 실각시키고, 미국으로 망명보냈다.





박정희는 516 군사쿠데타 주력 군대였던 육사 5기 (오른쪽 김재춘)와 육사 8기 (왼쪽 김종필)를 서로 충성 경쟁시키면서, 처음에는 김종필을 중앙정보부 창설 책임자로 내세우다가, 그 다음에는 육사 5기 대표격인 김재춘에게 자유민주당 창설을 맡기고, 김종필의 '공화당'과 경쟁을 부추긴 후에, 최종적으로 김재춘을 내쫓고 김종필을 등용했다. 


(김종필 : 왼쪽, 김형욱: 가운데 ) 



박정희는 육사 5기 김재춘 등을 권력에서 배제한 이후, 육사 8기인 김종필과 8기생 김형욱을 다시 등용하고 서로 경쟁시킨다. 이북 출신이자 반공반북주의자였던 김형욱은 중앙정보부장을 6년간 재임하면서 동백림 사건, 인혁당 사건, 통혁당 사건 등을 발표했고, 심지어 박정희와 김종필의 좌익 경력을 문제삼고 이를 세탁하기 위해 노력할 정도였다. 그러나 박정희는 김종필과 김형욱 어느 누구 편도 들지 않고, 둘 다 견제하고 둘 다 용도 폐기했다. 
이후 김형욱은 미국에서 유신독재 박정희 타도를 외치다가, 1979년 10월 살해당했다. 
군사 쿠데타 주역들 내부에서 서로 매도하고 서로 죽이는 결과를 낳고, 참혹한 배신과 배반의 역사를 남겼다.





박정희는 1961년 516 군사쿠데타 당시 육사생도였던 전두환과 노태우 (육사 11기)를 집권 내내 지원했고, 이들은 영남 출신 육사 장교 모임인 '하나회'를 윤필용과 더불어 만들었다. 

박정희는 군사쿠데타 주역이었던 육사 5기와 육사 8기를 견제할 차세대 육사 11기를 내부에서 키웠다. 전두환은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친위 시가지 행진을 벌였고, 그 이후 박정희에 대항하는 육사출신 선배들 (육사 5기, 육사 8기)과 경쟁하면서 자파인 '하나회'를 키워나갔다. 이로써 1979년 박정희의 사망 이후, 1212 군사쿠데타를 감행할 물리적 군사력을 전두환은 보유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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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2016. 2. 12.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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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종문 mbc 본부장의 파렴치한 동료 해고 사건을 보며: 


방향타없는 권력아부형 거삐딴 리


MBC PD수첩 진행자, 최승호 PD와 박성제 기자가 해고당한 이유는 어떤 현행법 위반도 아니었음이 밝혀졌다. '특정 이유 없이 MBC 노조 파업을 지지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최승호 PD를 해고시킨 백종문 본부장은 최승호PD와 더불어 <MBC PD수첩>을 제작했던, 3년 먼저 MBC에 입사한 언론인이자 같은 노조원이었다. 파업에도 참여했던 노조 부위원장 출신이었다.


전광용 소설 <꺼삐딴 리> 의 주인공 이인국 의사가 바로 현대판 백종문이다. 친일파로 살다가 소련군이 주둔하자 "꺼삐딴 captain Lee"로 살다가,다시 남쪽으로 와 친미파로 살아가는 이인국, 권력자에 재빠르게 기대어 살아가는 성실파 그 자체 꺼삐딴 리가 바로 MBC 백종문이다. 같은 후배 PD를 "일단 자르고 나서, 쟤네들이 억울하면 법률소송해서 승소하면 되는거고" 그런식으로 20년 넘게 같이 일해온 동료를 해고시킬 수 있는가?


이게 과연 MBC백종문 개인만의 문제인가? 어쩌다가 이렇게 같은 직장내에서도 인간성이 파탄나고, 우리 일상에서 필요한 측은지심, 동료에 대한 애정 이런 기초적인 인생살이도 다 사라져간단 말이냐? 최근에 알게된 MBC ‪#‎최승호‬ PD, ‪#‎박성제‬ 기자에 대한 부당한 해고 사건은, 언론인들의 '일상 일터', 즉 미시적 노동 공간에서 '민주화'가 1980년 전두환 군사독재 타도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고 있다.


직장이라는 일터에서, 우리 동네 일상 생활 공간에서 '민주화'를 달성하지 못하면, 제 2의 제 3의 백종문과 같은 자발적인 '노예,' 자기 직장 동료들을 자기권력의 상승을 위해 가차없이 망난이처럼 자르는 그러한 자발적인 노예가 탄생할 것이다. 80년 허문도의 '보도지침'과 언론통폐합보다 더 무서운 심리전 저강도 전쟁이 바로, 언론인 직장내 '민주화'이다.



(2012년 MBC 노조 파업으로 부당하게 불법으로 해고당한 MBC 기자 PD 언론인들 : http://www.journalist.or.kr/news/article.html?no=35606   ) 






“PD수첩이 황금기였다”는 이 PD는 누구일까요

[카드뉴스] “소외된 사람들 편에서 방송, 시청자들 박수 쳐줄 때 제일 행복했다”던 그 PD의 변신

김도연·이우림 기자 riverskim@mediatoday.co.kr 2016년 02월 12일 금요일

       


http://www.mediatoday.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127979


1990년대 종교 문제를 고발했던 30대 MBC PD가 있습니다. 할렐루야 기도원, 영생교 등 광기의 현장을 카메라로 파헤친 것이죠. 40대가 된 그는 PD수첩 PD로서의 시간을 ‘내 인생의 황금기’라고 했습니다. “PD수첩을 맡았을 때, 사회적 약자, 즉 소외된 사람들의 편에서 방송하며 많은 시청자들이 박수를 쳐줄 때 제일 행복했다.” MBC 노동조합 활동에도 열성적이었다고 합니다. 세월이 흘러 50대 후반이 됐지만 여전히 그는 사회적으로 조명을 받고 있습니다. 이 PD는 누구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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