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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history)/1공화국17

1948년 제주43항쟁 기념 걸상, "제주 몽돌"을 광주 광산구에 설치. 몽돌의 뜻 "꺽인 총알을 형상화한 의자 아래 민중의 힘을 상징하는 제주 몽돌" 1948년 제주43항쟁 기념 걸상, "제주 몽돌"을 광주 광산구에 설치. 몽돌의 뜻 "꺽인 총알을 형상화한 의자 아래 민중의 힘을 상징하는 제주 몽돌" 1. 작품명은 '민중의 힘'으로, 꺾인 총알을 형상화한 의자 아래에 민중의 힘을 상징하는 제주 몽돌 2. 민중의힘 사월 걸상 작가. 강문석. "거칠고 큰 바위가 구르고 굴러 바다에 이르렀을 때는 둥글고 매끈한 몽돌로 변하듯, 민중의 힘이 모여 폭력을 견디고 이겨낸다는 의미" 의자 단면 위에는 제주 4·3의 상징인 동백꽃을 각인했다. 3. 사월 걸상의 의미. 폭력 고리를 끊으려면 피해 기억을 되살리고, 증폭시켜야 한다. 4. 연대 발언. 강우일 (전 천주교 제주교구장) "우리 역사 안에 자라온 폭력의 확산과 승계를 차단하고, 인간 존중과 평화의 연대를 강화.. 2024. 4. 3.
윤석열과 한동훈이 모르는 대구 역사. 독재자 이승만이 가장 무서워했던 도시가 대구였다. 독재자 이승만이 가장 무서워했던 도시가 대구였다.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대구고등학교 학생들의 60년 2월 28일~29일 데모를 뒤돌아본다. 역사의 상처는 회복되듯이, 대구-안동의 저항정신은 회복력을 가질 것이다. 앞산공원 회전 레스토랑처럼 민심은 돌고 다시 돈다. 대구보수도 잇몸으로 버티고 있다. 이빨은 앞니 2개만 남았다. 그 징표는 경북대의 위상을 보면 알 수 있다. 1963년부터 1992년 육사 파워엘리트 시기 경북대의 위상과 그 이후 30년 지난 현재 경북대를 바라보는 대구 청년들과 학부모를 보면, 대구가 인천과 서울에 비해 얼마나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지난 5년간 경북대생들 4~5천명이 자퇴했다. 일제시대 해방운동의 첨병이었던 좌익의 근거지가 대구 안동 청송 라.. 2024. 3. 7.
1960년 2월 28일. 이승만 독재에 저항했던 경북고, 대구고, 경북사대부고, 경북여고.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경북고 학생들이 당시 외쳤던 구호. '민주주의를 살리자' '학원의 자유를 달라' '학생들을 정치도구로 이용하지 말라' , 그들은 대구시내 중심가로 행진했다. 관련글. https://bit.ly/3wzLo3v 이승만 독재자는 대구를 가장 무서워했다. 2016년 대구는 새누리당(박근혜) 지지율이 77% 정도이지만, 언젠가는 대구 민심도 변할 것이다. 한국 현대사를 보면 그 대구 민심 변화의 역동성이 보인다. 일제시대에는 말할 것도 없이 이승만 정 futureplan.tistory.com 자료. 1960년 4대 대통령 선거인 3·15 선거를 앞두고, 자유당 경북도당은 2월 28일로 예정된 민주당 부통령 후보 장면의 선거 유세에 학생들이 참가하는 것을 막기 위해 각급 학교장을 소집, ‘일요 등교 계획’ 이라는 .. 2024. 2. 28.
독재자 이승만의 80회 생일에 동원된 사람들. 1955년. 동대문 운동장. 경향신문, 조선일보 보도 독재자 이승만이 80회 생일에 대중들을 동원했다. 1955년 3월 26일. 성동원두 (동대문 운동장) Seoul Stadium, Seoul, Korea. 1955 Photographer Unidentified 1955년 3월 26일. 성동원두 (동대문 운동장) 경향신문 1955.3.26일자. 조선일보 . 1955년. 3월 27일자 1면. 2023. 1. 26.
총선 역사. 배우 김혜자 아버지, 미 군정 재무부 차관(次官)이었던 김용택과 고건 아버지가 군산 총선에서 격돌했다. 1960년 총선 일제시대와 그 이후 한국 여자들에 대한 관찰. 2020년,2021년 경, 가수 혜은이, 박완서, 박경리, 김혜자, 김수미, 김영옥 등. 봉준호 감독의 '마더'에서 김혜자 연기는 정말 한국의 어머니의 어떤 한 '단편'을 미친듯이 보여줬다. TV 드라마에서 고정된 '국민 엄마'와 다른 김혜자여서 더 좋았다. 배우 김혜자의 부친 김용택에 대한 이야기는 잘 알려지지는 않았다. 김용택은 한국 현대사의 굴곡과 비극의 한 일원임을 알 수 있다. ... 배우 김혜자의 부친은 김용택이다. 그는 미국 시카고 북쪽에 위치한 에반스튼에 있는 노스웨스턴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를 받았다. 김혜자와 그 언니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이유는, 김용택이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 김혜자를 낳았기 때문이다. 김혜자의 부친과 고건 전 총리.. 2023. 1. 18.
한국 전쟁 당시, 한강 다리. Korean War, Korea, May 12-July 1, 1951. Photographer Everett Collection A company of the 9th Engineer Battalion, X Corps, construct a pontoon bridge over the Han River at the crossing point, seven miles south of Chunju, Korea . 피난민 행렬 한 초소 1951. 3. 1. 전주, 한 소녀가 전란으로 허물어진 집 섬돌에 앉아서 배고픔과 추위에 떨고 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Korean War, Korea, 1950-1953 photographer Major C.B. White HoengSong, Korea 1951 .. 2022. 12. 8.
담배값이 제일 비쌀 때. 1952년 공무원 월급의 7 % . 3만 4천원 월급에 백구 담배값 2500원 손정목 "나는 1952년 9월에 수습사무관 (당시 5급,현 9급) 으로 임명되어 한 달에 3만 4천원의 봉급을 받고 있었는데 당시 금 한 돈쭝(3.75g)이 16만 6천원, 백구 담배 한 갑이 2500원이었다" (손정목 지음.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1, p.104) 2022. 8. 7.
한국전쟁 사진. 존 도미니스 (John Dominis) A rifleman dashed uphill to take cover from enemy fire, Korea, 1951. John Dominis/Life Pictures/Shutterstock 2022. 7. 30.
한국 전쟁 당시, 서울 남대문 동대문 시장 - 물건을 사는 시민들 중요한 사진 자료들이다. (1953년 동대문 시장 거리) Seoul, Korea, 1953 photographs of war-torn Korea taken by two British officers in 1953. Anthony Younger, an artillery officer, and Keith Glennie-Smith, a medical officer, took dozens of snapshots while serving in the Korean War. A mother shops in Dongdaemun Market in Seoul while breastfeeding her child. 동대문 시장, 아이에게 젖을 주면서, 물건을 팔고 있다. 서울 남대문 시장. Seoul, Korea, 1953.. 2022. 7. 28.
최초의 대통령 직선제 선거였던 1952년 8월 5일 정부통령 선거. 당시 선거운동. 최초의 대통령 직선제 선거였던 1952년 8월 5일 정부통령 선거에 사람들이 모여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이 선거에서 다수의 국민이 잘 알지도 못했던 함태영이라는 노인이 부통령에 당선된다. 2022. 7. 28.
1953년 6월. 이승만 정부가 서울 시내 고등학생들을 동원해 휴전 반대 시위를 벌였다. 서울 진명여고 등. 휴전반대 시위 , Seoul, Korea, 1953 photographer Michael Rougier 1953년 6월 유엔군과 북한,중공군과의 협상이 무르익어 7월에 휴전협정이 임박했다는 소식에 진명여고 학생들이 용산 미군사령부앞에서 휴전반대 시위를 벌이는 모습. 한국 평화 회담 재개 반대 시위, Seoul, Korea, 1953 Photographer Unidentified Civilians and soldiers stood beneath a banner during a demonstration in Seoul in April 1953 against resumption of the Korean peace talks. Associated Press 1953년 4월 서울에서 열린 한국 평화 회담 재개 반.. 2022. 7. 28.
3 영수, 이승만, 김구, 김규식 .1947년 12월, 좌우합작 위원회 해산 사진 당시 정치 인식과 실천. 이승만, 김구, 김규식 신탁 반탁 대립 상황. 반탁 시위 1946년 좌우합작 위원회. 덕수궁 남측 3영수라 불리운, 김규식, 이승만, 김구 김규식과 하지는 친분, 하지와 김구-이승만은 자주 의견대립을 보였다. 김원봉 사진. 이승만과 김규식 김규식. 파리강화회담 참가. 김규식. 언더우드 학당 시절. 김규식. 1946년. 엄항섭. 여운형. 엄항섭. 가운데. 1947년 12월, 좌우합작 위원회 해산 사진 2022. 6. 19.
1951 6.16. 북한 인민군과 유엔사려오간 매튜 리지웨이. 사진. Time 자료. 한국전쟁사진중에 인민군과 미군이 함께 Time지를 읽고 있는 모습.. 사진속 타임지- 1951년 6월16일자로 표지인물은 당시 유엔군사령관이던 매튜 리지웨이 장군 1951년 7월8일 휴전회담이 이루어지고 있던 개성에서 촬영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이 수집한 한국전쟁중 사진을 2018. 6 국가기록원이 공개 2022. 3. 21.
[위헌, 독재 단어 오용] 나경원 의원~ 이것이 진짜 위헌이다.1954년 이승만 식 위헌 Nakjung Kim March 16 · 나경원 의원~ 이것이 진짜 위헌이다. 시민이 판사 출신 나경원 의원에게 헌법을 강의해야 하는 '웃도 울도 못할 일(1954년 12월자 경향신문 사설 제목)' 자유한국당 정치 스타일- 이승만 시절 '난투극' 정치가 되돌아 온 것 같다. 나경원 자유한국당 새구호 "#위헌,위헌,위헌" 그 위헌의 유래. 이승만 사사오입, 사람 엉덩이를 잘라내 반올림해버리다. 기가 막힌 수학자들. 양승태의 정신적 지주는 위헌을 직접 행동과 테러로 몸소 보여준 이승만과 박정희다. 이승만은 1954년, 박정희는 1969년과 1972년 위헌을 자행했다. 나경원은 이승만과 박정희가 어떻게 위헌을 교묘하게 했는가를 더 배워야 한다. - 최근 온라인은 이미 백색테러 수준이고, 광장에서 거의 365일.. 2019. 5. 2.
1925년 3월 18일 임시정부 이승만 대통령 면직, 호외 신문 발견 - 홍재하 보관 사료. 참고. 이승만 임시정부 대통령 탄핵 알린 '독립신문' 호외 최초 발견 송고시간 | 2018-12-13 05:45 페이스북트위터카카오스토리 더보기 인쇄 확대 축소 재불독립운동가 홍재하 유품서 나와…차남이 佛 브르타뉴지방 자택서 보관국사편찬위, 조사팀 프랑스에 급파…국내로 가져와 보존처리해 공개 예정"학계에 알려지지 않은 미보고 사료…임시정부 연구에 의미 커" "이승만 탄핵" 독립신문 호외(파리·생브리외[프랑스]=연합뉴스) 김용래 특파원 = 1925년 3월 이승만의 임시정부 대통령 탄핵 사실을 알린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의 호외가 최초로 확인됐다. 학계에도 알려지지 않은 미발굴 사료다. [장자크 홍 푸안 씨 소장자료/촬영=국사편찬위원회] (파리·생브리외[프랑스]=연합뉴스) 김용래 특파원 = 이승.. 2018. 12. 13.
한상진 (국민의당)의 이승만 평가 문제점, 1954년 11월 29일 사사오입 개헌안 안철수가 말한 '국민의당'의 최고인재들은 누구인가? 그 중에 한 명은 한상진 전 교수다. 11일 이승만 박정희 묘소에 참배한 후에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이 땅에 도입하고 굳게 세우신 분"이라고 이승만 대통령 (1대~3대)을 평가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1954년 11월 27일에 제헌헌법 (1948년 헌법)을 억지로 뜯어고쳐서 장기집권을 하고자 했다. 원래 헌법에 따르면 이승만은 이미 48년~52년 (1대 대통령), 52년~56년 (2대 대통령) 두 번을 했기 때문에, 56년~60년 3대 대통령은 출마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기붕을 비롯한 자유당과 이승만 대통령은 54년 11월 27일에, 초대 대통령에게 국한해서 대통령 중임안을 폐지하자는 내용을 골짜로 한 '개헌'을 국회에서 표결했다. 개헌안 통과는.. 2016. 1. 12.
이승만 독재자는 대구를 가장 무서워했다. 2016년 대구는 새누리당(박근혜) 지지율이 77% 정도이지만, 언젠가는 대구 민심도 변할 것이다. 한국 현대사를 보면 그 대구 민심 변화의 역동성이 보인다. 일제시대에는 말할 것도 없이 이승만 정권 하에서는 이승만과 이기붕이 가장 두려워했던 도시가 바로 대구였다.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강한 도시에서 보수적으로 변화된 시점은 박정희가 처음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1963년 대선), 울산 부산 대구 지역에 집중적으로 '공업화' 투자를 하고 나서였다. 그게 정치적으로 결실을 본 것은 1967년 대선이었다. 거칠게 말해, 세대로 치면, 대구는 3세대가 60년 동안 그 주류 투표 행태가 변화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구의 이러한 정치의식과 민심은 고정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변화의 조건들이 물론 필요하다. 첫번째,.. 2016. 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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