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철학2021. 1. 30. 19:36

생각과 토론의 자유에 대해서


고전적 자유주의자였던 존 스튜어트 밀은 '생각과 토론의 자유'를 인간의 정신적 행복이라고 했다.  아래와 같은 네 가지 이유에서  의견의 자유, 의견을 표현할 자유는 인류의 정신적 행복이다.  

 

 첫째는, 어떤 주장이나 의견이 있으면, 말하게 하라. "어떤 주장이나 의견이 표출되지 못하고 침묵을 당했을 때도, 우리는 그 주장이 '참'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만일 이런 사실 조차 부정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무오류성을 외치고 있는 셈이다." 


 둘째는, "침묵당한 의견이 설령 '참(진리)'와 거리가 있을지라도, 그 의견은 일말의 진리라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주제에 대한 지배적인 혹은 다수의 의견이, 완벽한 참(전체 진리)은 아니기 때문에, 그 완벽한 참은 어떤 반대 주장과의 충돌을 통해서 성립될 수 있을 것이다." 


 셋째는, "이미 확고하게 받아들여진 의견이 참일 뿐만 아니라, 전체 진리일지라도, 만약에 우리가  그 의견을 격렬하고 진지하게 조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의견의 합리적인 논거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은 채, 어떠한 편견들에 사로잡히게 된다." 


 넷째는, " 지식체계나 믿음체계 (doctrine) 자체는 효력을 상실하거나 약화될 수 있고, 사람들의 행위나 성향에도 강하게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권위-교조적 교리(dogma)는 단지 형식적인 공언에 지나지 않고, 효력도 없다. 도그마는 우리의 이성이 근거를 제시하는 것을 방해하고, 개인의 체험이 진지하고 참된 신념으로 발전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 1859  (역, NJ 원시) 2004


- John Stuart Mill, On Liberty 1859 ,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1989, p.53 



 

존 스튜어트 밀의 핵심적인 생각.

우리의 주장이나 의견이 충분히, 자주, 두려움없이 토론될 때만이 그것은 '죽은 도그마'가 아니라 '살아 숨쉬는 진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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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철학2021. 1. 9. 22:37

인간 본성 논쟁은 늘 흥미롭고, 계속해서 문제제기를 해야 한다. 영원히 얻을 수 없는 답이지만.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한 사람이 태어나서 살아가면서 몇 가지 행동들과 몇 가지 사회적 관계들을 맺으며 살아갈까? 

시간적 공간적 제약조건들을 풀어버린다면, 최대한 만들어 낼 수 있는 장면들은 무엇인가?

선한 존재다, 악한 존재다, 협동이 먼저다, 경쟁이 선차적이다, 존재가 본질에 앞선다 등은 한 가지를 먼저 정해놓고 그것을 제 1원리로 삼을려고 하는데,

문제가 늘 발생하는 건, 시간의 흐름 속에서 굴곡과 변화가 생긴다는 것이다. 좋은 쪽이건, 진보하는 방향이건, 퇴보하는 쪽을 선택하든지 간에, 

그래서 제 1원리를 강조하거나 전제할 때도, 주의할 점은 여러가지가 있다.

인생살이는 늘 경쟁도 있고, 협동도 있고, 선도 있고 악도 혼재해있다. 

정치도 마찬가지고, 인간활동 전반이 그러하다. 여기에서 사람들이 쓸 수 있는 단어는 정치적 지혜의 발동인데, 이것 역시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체현하기 때문에, 누가 하느냐에 따라 '작품의 결과'가 달라진다.



협동 가능 조건들_버스를 미는 사람들_빙판_왜_2021_01_07.mp4


맹자는 방심 (放心)하지 말라고 말했는데, 그 말은 4단의 마음을 '버리지 말라. 잃어버리지 말라'는 뜻이다. 맹자도 마르크스도 이분법과 대조법에 능한 저자인데, 사람들에게 하나와 둘, 두개, 두 개 쌍으로 보여주는 이 단순한 화법은 눈이 두개, 귀가 두개, 두 파편의 조합과 균형 자체가 인간의 모습이기 때문에, 두 가지 비교는 늘 극적인 효과를 낳는다. 


맹자의 화법은, 사람들이 닭과 개를  기르다가, 이것들을 잃어버리면 울고불고 하는데, 자기 마음, 인,의,예,지를 기르지 않는 것은 부끄러워하지 않음을 극명하게 대조적으로 보여준다.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과 세계관을 거부한 현대 과학과 우리들은 대부분 목적론을 다 수용하지 않는다. 다만 아직도 굉장히 강력한 세계관으로 우리들 곁에 남아있다.

목적론이 정치적으로 위험할 때도 있고, 또 행동의 동력이 되기도 했다. 


<참고> 세계관. 목적론.


이런 맹자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의 본질에 대한 이해와 지식, 즉 4가지 원인들은 다 일종의 '목적론 teleology' 세계관이다. 사람과 자연, 이 모든 우주질서를 설명할 때, 그것의 궁극적인 '목적'과 '기능'이 뭔가를 규명하고 정의하려는 세계관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들, ( material, form, efficient, final ) cause, 이렇게 영어번역어를 보면 (고대 그리스어에서 영어로), 물질, 형식, 효과(실제 효력), 최종 원인 이렇게 되는데, 예전에는 물질을 질료 hyle, 형식을 형상 eidos, 작용 (kinoun), 목적 (telos) 이라고 한국어로 번역했던 거 같다. 지금은 고대 그리스어 배우고 가르치는 학동들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이러한 목적론, 틸리오로지가 맞건 틀렸건, 좋은 설명이건 아니건간에, 이러한 사고방식이 몇 천년 전부터, 수백만년 전부터 인간 생존기로부터, 실천들로부터 배운 게 아닐까 한다. 


이러한 맹자나 아리스토텔레스의 강의 대상은 '왕의 후보, 군주'인데, 결국 왕이 되려면 왕이 가져야할 덕목들은, 맹자의 4단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가로서 탁월함 arete)  이나, 다 각고의 연습과 훈련을 통해서 현실화된다. 



아리스토텔레스 '피식스' 설명은 아직도 흥미롭다. 불분명하기도 하고. 

(1) 물질: 물질적 원인. 청동. 청동으로 만든 동상. 


(2) 형식, 형태: 형식적 원인. 형식 (형태). 사물이나 인간이 '바로 그것' '바로 그 사람임'을 설명할 때, 동상의 '형태' '형식'


eidos 이 말은 플라톤의 이데아 idea, 즉 모든 존재의 실체를 뜻하는 것인데, 삼각형의 '이데아'는 참된 지식, 참된 앎인다. 삼각형에 대한 정의이기도 하다.


삼각형은 3개의 변과 3개의 꼭지점으로 이뤄진 다각형이다. (A triangle is a polygon with three edges and three vertices) 

형태,형식을 뜻하는 에이도스가 뭔지는 아직도 불분명하지만, 이러한 어떤 '존재' '실체'에 대한 참된 앎,지식, 그것에 대한 '정의'와 연관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사물의 기능, 책상의 기능, 말의 기능 (이동 수단, 전쟁용 말), 도공의 기능은 그것들을 정의할 때도 필수적인 요소들이다. 그렇다면 '목적인 final cause,텔로스'와 에이도스 차이점과 공통점이 생기게 마련이다. 


(3) 효력 결과 발생자. 행동자. kinoun 키눈.  원하는 결과를 발생시키는 원인. 변화 혹은 쉼의 제 1차적 발생자. (the primary generative cause) 청동 동상을 만들어내는 장인. 조언을 해주는 사람. 아이의 아빠. 


(4) 목적인. 텔로스. 최종적 원인 (목적인) 뭔가 행동을 할 때 세우는 목적. 걷기의 목적은 건강. 정치의 최종목적. 인생의 텔로스. 강아지의 텔로스. 


In Physics II 3 and Metaphysics V 2, Aristotle offers his general account of the four causes. 


This account is general in the sense that it applies to everything that requires an explanation, including artistic production and human action. Here Aristotle recognizes four kinds of things that can be given in answer to a why-question:


The material cause: “that out of which”, e.g., the bronze of a statue.


The formal cause: “the form”, “the account of what-it-is-to-be”, e.g., the shape of a statue.


The efficient cause: “the primary source of the change or rest”, e.g., the artisan, the art of bronze-casting the statue, the man who gives advice, the father of the child.


The final cause: “the end, that for the sake of which a thing is done”, e.g., health is the end of walking, losing weight, purging, drugs, and surgical tools.

   

https://plato.stanford.edu/entries/aristotle-causality/


Posted by NJ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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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철학2020. 12. 13. 10:58

노동시간과 행복, 노동시간 단축과 자유,

노동시간과 정치참여


 https://bit.ly/3qPV4i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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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철학2020. 12. 6. 17:10

2014.Aug.25.

· 

돌이켜보니, 벗을 사귀는 것을 참 등한시 했다. 더군다나 벗의 '덕'을 벗삼기는 더더욱 제대로 실천하지도 못했다. 사람은 자기가 말해놓고도, 자기가 글을 써놓고도, 그것도 지키지 못하면서 살 때가 많다.


 너무 바깥으로 돈 것 같다. 사람은 스스로 안으로 도는 시간이 많아야 하는데.  최근 취직을 준비하는 졸업반 어느 한 분과 대화를 했다. 


그에게 정치정당이란, 조직이란, 정치적 벗이란 무엇일까? 20년 전 난 또 무슨 생각을 했을까? 돌이켜보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또다른 미래를 준비하면서 쓴 글이다. 


<나를 안다는 것, 그리고 조직의 존재 이유> NJ 





Wonshe

Comments

조찬형

어디를 가면

글 자세히 볼수 있을까요~?



Nakjung Kim

조찬형/ 아이쿠 아름이 아부지..ㅋㅋ 아니 책은 아니고요, 제 메모입니다. 아마 제가 학생운동하는 후배들을 위해서 쓴 메모였습니다. 몇 페이지 안되요. 제 블로그에 전문을 올려놓을게요.



Yongsun Ryu

강호의 도리가 땅에 완전히 쳐박힌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보통 감정의 병폐 속에서 살기에도 바쁜, 그런 지겨운 시대에 살고 있어요...



Joohyun Yoon

취직하게요?ㅎㅎ


Nakjung Kim

Joohyun Yoon it was written in 1994.



아라으르

왜 이건 블로그에 안올려줘요?



정영운


천하(사람들)"이", 병폐(인정통환)"을"...오타(?)인 듯 합니다. ㅎㅎ, 제가 사는 세상은 벗들을 그리워하며 가끔 만나는 세상이라 이런 글월을 보노라면 가끔 미안합니다.



Nakjung Kim


정영운/하하...꼼꼼히 읽으셨네요. 인정통환이라는 단어를 쉽게 풀어서 설명한 단어가 병폐입니다.

어디로 이사가셨나요? 산골로 아예 들어가셨나?



정영운

음...저는 창원 진해 용원에 그대로 살아요. 원시님의 우회적 비꼼을 겸허히 받아들입니다. 다만 자유주의적인 삶을 살고 있고 내 공동체에만 의미 부여를 해서요.



Nakjung Kim

정영운/ 자유주의적이라는 말이...liberalist 인데요, 원래 그 말은 tolerant 종교적으로 타 종교에 대해서 관용을 베푸는, 정치적으로도 다른 견해를 가진 이들에 대해서 시민내전을 벌이지 않고, 인정해주는 그런 의미도 ...영국역사에서 기원해서...



Nakjung Kim

liberalist 지금이야, 한국의 민주당 정치적 입장 정도로 좁게 쓸 수 있거나, 혹은 일상에서 자본주의 체제를 인정하고 ? 산다? 그 정도로 좁게 쓸 수도 ...

근데 기본적인 가치관과 정치적 입장표명 혹은 표현은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정영운


원래 영국에서의 리버럴은 재산권 가진 사람들이 자기 재산 마음대로 쓰는 , 자본가들의 경제적 자유를 중시하는 이들을 말하고 미국의 자유주의는 조금 진보적인 사람들, 폴 크루그먼이나 케네디 같은 사람들을 말한다고 하는데, 제가 쓰는 자유주의는 말 그대로 자유롭게 산다는 뜻입니다. 음...용어를 조심해서 써야 겠네요. : )



정영운

정치적으로 지지하는 정당은 원시님 계신 정당이었는데 지금은...글쎄요 입니다. 정치적 입장에 대하여 원시님처럼 일관적이지 않아요.



Nakjung Kim


정영운/ 많은 분들이 탈당도 하고, 지지를 철회했다고 들었습니다. 2011년 노회찬 심상정 탈당이후에는 탈당자가 적었는데, 오히려 그 이후에 보여준 모습들 때문에 많이들 탈당했다고 들었습니다. 자세한 건 조사를 해봐야죠...


Nakjung Kim


정영운.그래도 궁금하네요. "글쎄요?" 이렇게 말씀하신데는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요? 문제점이나 어떤 실망 요소같은거요?



정영운

멋지고 당당하게 사시는 분들에게 폐가 되지나 않을까 우려되어 조심스럽네요. 노동당으로 바뀐 이후는 문제점이나 실망를 지적할 정도로 들여다 보지 않았어요. 내 삶에 와 닿지 않는다고 할까요 그게 가장 큰 것 같네요. : )

Posted by NJ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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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철학2020. 12. 6. 17:01


2013.Sep.23


신자유주의에 대한 한 문화(철학적?) 비평, 그리고 문제점.


류용선님이 메모를 해서 읽어봤는데요, 


1. 한병철 노동자 개념은 모호하고 자의적일 수 있다.


한병철 글쓴이 주장은 <신자유주의> 하에서는 착취당하는 노동자가 있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 스스로를 자기가 알아서 죽이는 노동자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노동자는 자유로운 고용주나 자영업자인 셈이다. 


한병철의 노동자 개념은 (자기 스스로를 착취하는/이 자본주의 체제나 신자유주의 체제가 요구하는 가치와 기준들을 달성하기 위해서) 자기를 착취하는 selbstausbeutender Arbeiter 이다. 


그런데 같은 자동차를 생산하는 공장 라인에서 오른쪽 바퀴 조립하는 정규직은 100을 받고, 왼쪽 바퀴 조립하는 비정규직은 50을 받는다는 현실을 고려하면, 한병철 노동자개념이 독일에 국한된다고 해도 여전히 문제가 남지만, 한국 현실을 고려하면 '착취' 개념 자체가 자의적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크다. 


2. 한병철의 대안과 진단은 '마음'을 다스려라는 종교적 가르침일 가능성이 크다. 


다음은 한병철 주장이다. 


누가 시켰건, 자기가 선택했던, 신자유주의 체제가 강요했던, 그걸 자기가 내면화했던, 나는, 우리는, 노동자는 자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강구하는 '자기 사장님,  리틀 이건희이다 (자유로운 경영자 freier Unternehmer)' 누가 나를 고용하게 강제로 야간작업 시키고 임금 떼먹고 덜 주고 그러는 게 아니라, 내 스스로가 고용하고 내 스스로를 달달볶는 주인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전통적인 계급이해 관계 대립도 없고, 계급투쟁도 생겨나지 않는다. 내가 알아서 잔업하고 내가 알아서 6시에 일어나서 영어학원 다니고, 내가 알아서 전세금 빼서 뉴욕으로 시카고로 자격증 따러 유학간다는 것이다.


 내가 알아서 오후 10시까지 잔업하고 내가 알아서 내 딸 아들 학원비 벌러 잔업한다는 것이다. 모든 게 내가 다 알아서 내가 다 스스로 고용주이고 기획자이고 경영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Burnt-OUT 될 때까지 일도 하고... 


[소결] 한병철 논리에 따르면, 자기 자아를 갉아먹는 자기 착취가 있을 뿐이다. 이제 해결책은 내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는 ... 그런 방향일 가능성이 크다. 이것은 내가 한병철의 기사를 보고 든 주관적인 '추측'이다. 


3. 사고방식의 뿌리는 어디일까? 추측해본다.


이런 한병철의 기본적인 생각은,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 그리고 이들보다 선행적으로 이 문제들을 진단한 에드문트 훗설 Husserl, 혹은 그 제자 Heidegger 에서 비롯될 확률이 아주 크다.


 한병철의 생각은 간단한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주조해낸 개념 '도구적 이성 (instrumental reason)'의 내면화이다. 


우리 모두가 계산적이고 합리적이고 목표 달성을 위한 '도구적 이성'을 철저하게 내면화시킨 것이다. 자기 자신, 사랑, 형제애, 자매애, 연대정신, 친구와의 우정, 동료를 위한 희생, 측은지심, 정의감 등 도구적 이성이 작동하지 않는 모든 인생 영역까지 완전히 균질적으로 '도구적 이성'이 점령했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Edmund Husserl 이, 1차 세계대전을 보고, 서유럽 문명이 가진 참사, 고대 아테네부터 내려온 진,선,미라는 '덕 virtue' 중에, 자본주의 사회 이후 서유럽 문명이 오로지 기술적 합리성 (데카르트, 갈릴레이, 뉴튼의 세계관이 가지고 있는 기술적 합리성)이 그 3가지의 균형적 발달을 깨뜨려 버렸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자연지배와 정복 논리를 인간사회에 적용시켜버린 그 세계관 자체를 반성하고 있는 것이다. 


4. 한국 사회에 대한 한병철의 오진단:  한병철은 97년 신자유주의적 IMF 통치 (긴축 통치) 이후, 한국 사람들이 체제순응주의 (Konformismus)에 빠져서, 우울증과 burn-out (지쳐빠짐, 진이 빠짐)을 동반한 순응주의와 사회적 합의 때문에, 저항이 일어나지 않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97년 이후 한국 정치적 상황에 대한 잘못된 진단이다. 


한병철은 혁명, 자기-공격성 (Selbstaggression)등 정치적 용어와 심리적 용어를 동시에 쓰지만, 그것들 사이에 어떠한 연관이 있고, 실제 사회적 세력이 어떻게 어떠한 정치적 문화적 경제적 심리적 자원들을 동원하고 있는지에 대한 분석이 결여되어 있다. 


5.한병철이 진단 문제점: 


한병철은 신자유주의는 '억압적'인 게 아니라, 'verführend' = seductive ( 단순 번역은 '유혹하는', 그 의미는

 1) 사람을 비이성적인 일이나 사물에 관심을 가지도록 한다 

2) 원래 의도와는 다르게 사람을 유도하다 ; 못된 길로 빠지게 만들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의 역사적 현실을 고찰해보면, 영국 Thatcher (대처) 광산노조 파괴, 미국 Reagan 미 항공관제사 노조 파괴 등, 그리고 아르헨티나, 칠레, 한국 등에서 벌어진 군사, 경찰력을 동반한 노조 탄압, 시민운동 탄압, 96년 노동악법 날치기 통과와 같은 법률 도입, 그리고 복지국가 모범 국가라고 하는 스웨덴에서도 세금 제도를 두고 우파와 좌파간의 싸움이 30년 넘게 계속되었다는 역사적 사실들을 고려해 보면, 한병철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이해는 '몰' 역사적이다. 


5. '전체 자본주의화' 용어의 문제점 


공유와 공동체 sharing und community 에 대한 한병철의 비판은, 공유 경제도 내가 돈을 가지고 있어야 남들과 바꾸는 것 아니냐? 돈이 없으면, 즉 남에게 줄 것, 교환할 것이 없으면 '공유'도 못한다는 역설을 꼬집고 있다. 


그래서 이것을 '공동체의 전체-자본주의화 total-kapitalisierung'이라고 명명한다. 이러한 사고 방식은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말한 <the eclipse of reason: 이성의 일식/사라짐) 이런 진단과 유사하다. 


지금 사회적 경제나 협동조합, 그리고 공유경제 선전, 어떤 측면에서 자본주의 체제의 강화나 보충 역할도 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돈'은 순수 악마도 아니고, '돈'은 사람이 스스로 만들어낸 '힘'이다. 한병철은 '돈'과 '자본'이 어떻게 구별되는지 설명하고 있지 않다. 


사고 방식은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 식의 '계몽의 변증법'에서 비롯되지만, 출구와 대안은 흐릿하다. 마르쿠제의 '부정적 비판의식 Negative Critical Thought' 을 되살리자는 방향은 아니다. 


마르쿠제 Marcuse 가 제시한 대안, 자본주의 논리가 경제, 정치, 생활문화, 대중문화까지 완전히 침식하려고 기를 쓰고 달려들 때, 이러한 자본의 총체적 지배에 저항하는 우리들의 힘은 어디서 오는가? 


그것은 자본의 총체적인 사물화와 지배 안에서 '사적인 나 개인의 공간'에 머무르지 말고, 기술합리성이 아닌 다차원적 이성능력을 발굴하고, 1차원적 사회를 강요하는 현 체제에 '위대한 거부' 선언을 하는 것이다. 


한병철의 대안은 이러한 사회적 실천과 집단적 자각을 전제로 하는 마르쿠제 식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6. 어떤 고리가 빠졌는가? 


 한병철의 인간, 사회에 대한 설명에서, 개인과 사회의 연결지점, 정치,경제,사회적 존재로서 인간과 사회에 대한 관계, 그 설명들이 많이 빠져있다. 


그리고 Total-Kapitalisierung 전체-자본주의화 개념처럼, 잘못 사용된 경우도 정정되어야 한다. 자본주의 이윤추구의 논리가 이 사회 모든 영역을 우리 마음 모두들 다 침략하고 정복할 수는 없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비관'의 재탕이 아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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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oliberales Herrschaftssystem:Warum heute keine Revolution möglich ist


Der Kapitalismus vollendet sich in dem Moment, in dem er den Kommunismus als Ware verkauft. Der Kommunismus als Ware, das ist das Ende der Revolution.

 (Foto: dpa)

Warum ist das neoliberale Herrschaftssystem so stabil? Warum gibt es kaum Widerstand dagegen? Trotz einer immer größer werdenden Schere zwischen Reich und Arm? Für eine Erklärung ist es wichtig zu verstehen, wie die unterwerfende Macht heute funktioniert.

Gastbeitrag von Byung-Chul Han

Als es vor einem Jahr in der Berliner Schaubühne zu einer Debatte zwischen Antonio Negri und mir kam, stießen zwei Kapitalismuskritiken frontal aufeinander. Negri schwärmte für Möglichkeiten des globalen Widerstandes gegen das "Empire", das neoliberale Herrschaftssystem. Er präsentierte sich als kommunistischer Revolutionär und bezeichnete mich als skeptischen Professor. Emphatisch beschwor er die "Multitude", die vernetzte Protest- und Revolutionsmasse, der er es offenbar zutraute, das Empire zu Fall zu bringen. Mir erschien die Position des kommunistischen Revolutionärs zu naiv und realitätsfern. So versuchte ich, Negri zu erklären, warum heute keine Revolution mehr möglich ist.

Warum ist das neoliberale Herrschaftssystem so stabil? Warum gibt es so wenig Widerstände dagegen? Warum werden sie alle so schnell ins Leere geführt? Warum ist heute keine Revolution mehr möglich trotz immer größer werdender Schere zwischen Reichen und Armen? Für eine Erklärung ist ein genaues Verständnis notwendig, wie die Macht und Herrschaft heute funktioniert.

Wer ein neues Herrschaftssystem installieren will, muss Widerstand beseitigen. Das gilt auch für das neoliberale Herrschaftssystem. Zur Einsetzung eines neuen Herrschaftssystems ist eine setzende Macht notwendig, die oft mit Gewalt einhergeht. Aber diese setzende Macht ist nicht identisch mit der das System nach innen hin stabilisierenden Macht. Es ist bekannt, dass Margaret Thatcher als Vorkämpferin des Neoliberalismus die Gewerkschaften als "Feind im Inneren" behandelte und sie gewaltsam bekämpfte. Gewaltsamer Eingriff zur Durchsetzung der neoliberalen Agenda ist jedoch nicht jene systemerhaltende Macht.

Die systemerhaltende Macht ist nicht mehr repressiv, sondern verführend

Die systemerhaltende Macht der Disziplinar- und Industriegesellschaft war repressiv. Fabrikarbeiter wurden durch Fabrikeigentümer brutal ausgebeutet. So führte die gewaltsame Fremd-Ausbeutung der Fabrikarbeiter zu Protesten und Widerständen. Möglich war hier eine Revolution, die das herrschende Produktionsverhältnis umstürzen würde. In diesem repressiven System sind sowohl die Unterdrückung als auch die Unterdrücker sichtbar. Es gibt ein konkretes Gegenüber, einen sichtbaren Feind, dem der Widerstand gilt.

Das neoliberale Herrschaftssystem ist ganz anders strukturiert. Hier ist die systemerhaltende Macht nicht mehr repressiv, sondern seduktiv, das heißt, verführend. Sie ist nicht mehr so sichtbar wie in dem disziplinarischen Regime. Es gibt kein konkretes Gegenüber mehr, keinen Feind, der die Freiheit unterdrückt und gegen den ein Widerstand möglich wäre.

Der Neoliberalismus formt aus dem unterdrückten Arbeiter einen freien Unternehmer, einen Unternehmer seiner selbst. Jeder ist heute ein selbstausbeutender Arbeiter seines eigenen Unternehmers. Jeder ist Herr und Knecht in einer Person. Auch der Klassenkampf verwandelt sich in einen inneren Kampf mit sich selbst. Wer heute scheitert, beschuldigt sich selbst und schämt sich. Man problematisiert sich selbst statt der Gesellschaft.

Das unterworfene Subjekt ist sich nicht einmal seiner Unterworfenheit bewusst

Ineffizient ist jene disziplinarische Macht, die mit einem großen Kraftaufwand Menschen gewaltsam in ein Korsett von Geboten und Verboten einzwängt. Wesentlich effizienter ist die Machttechnik, die dafür sorgt, dass sich Menschen von sich aus dem Herrschaftszusammenhang unterordnen. Ihre besondere Effizienz rührt daher, dass sie nicht durch Verbot und Entzug, sondern durch Gefallen und Erfüllen wirkt. Statt Menschen gefügig zu machen, versucht sie, sie abhängig zu machen. Diese Effizienzlogik des Neoliberalismus gilt auch der Überwachung. In den 1980er-Jahren hat man heftigst gegen die Volkszählung protestiert. Sogar die Schüler gingen auf die Straße.



Kommunismus als Ware, das ist das Ende der Revolution

Byung Chul Han

Byung-Chul Han, geboren 1959 in Seoul, lehrt Philosophie und Kulturwissenschaft an der Universität der Künste Berlin.

 (Foto: Merve-Verlag)

Aus heutiger Sicht wirken die notwendigen Angaben wie Beruf, Schulabschluss oder Entfernung zum Arbeitsplatz fast lächerlich. Es war eine Zeit, in der man glaubte, dem Staat als Herrschaftsinstanz gegenüberzustehen, der den Bürgern gegen deren Willen Informationen entreißt. Diese Zeit ist längst vorbei. Heute entblößen wir uns aus freien Stücken. Es ist gerade diese gefühlte Freiheit, die Proteste unmöglich macht. Im Gegensatz zur Zeit der Volkszählung protestieren wir kaum gegen die Überwachung. Freie Selbstausleuchtung und -entblößung folgt derselben Effizienzlogik wie die freie Selbstausbeutung. Wogegen protestieren? Gegen sich selbst? Diese paradoxe Situation bringt die amerikanische Konzeptkünstlerin Jenny Holzer mit ihrem "truism" zum Ausdruck: "Protect me from what I want."

Es ist wichtig, zwischen setzender und erhaltender Macht zu unterscheiden. Die systemerhaltende Macht nimmt heute eine smarte, freundliche Form an und macht sich dadurch unsichtbar und unangreifbar. Das unterworfene Subjekt ist sich hier nicht einmal seiner Unterworfenheit bewusst. Es wähnt sich in Freiheit. Diese Herrschaftstechnik neutralisiert den Widerstand auf eine sehr effektive Art und Weise. Die Herrschaft, die Freiheit unterdrückt und angreift, ist nicht stabil. Das neoliberale Regime ist deshalb so stabil, immunisiert sich gegen jeden Widerstand, weil es von der Freiheit Gebrauch macht, statt sie zu unterdrücken. Die Unterdrückung der Freiheit provoziert schnell Widerstand. Die Ausbeutung der Freiheit dagegen nicht.

Nach der Asienkrise war Südkorea gelähmt und geschockt. Da kam der IWF und gab den Koreanern Kredite. Dafür musste die Regierung die neoliberale Agenda gewaltsam gegen Proteste durchsetzen. Diese repressive Macht ist die setzende Macht, die häufig auf Gewalt zurückgreift. Aber diese setzende Macht unterscheidet sich von der systemerhaltenden Macht, die im neoliberalen Regime sich sogar als Freiheit gibt. Für Naomi Klein ist der gesellschaftliche Schockzustand nach Katastrophen wie der Finanzkrise in Südkorea oder Griechenland die Gelegenheit, die Gesellschaft gewaltsam einer radikalen Neuprogrammierung zu unterwerfen. Heute gibt es in Südkorea kaum Widerstände. Es herrscht dagegen ein großer Konformismus und Konsens mit Depression und Burn-out. Südkorea hat heute weltweit die höchste Suizidrate. Man wendet Gewalt gegen sich selbst an, statt die Gesellschaft verändern zu wollen. Die Aggression nach außen, die eine Revolution zur Folge hätte, weicht einer Selbstaggression.

Heute gibt es keine kooperierende, vernetzte Multitude, die sich zu einer globalen Protest- und Revolutionsmasse erheben würde. Vielmehr macht die Solitude des für sich isolierten, vereinzelten Selbst-Unternehmers die gegenwärtige Produktionsweise aus. Früher standen Unternehmen miteinander in Konkurrenz. Innerhalb des Unternehmens war dagegen eine Solidarität möglich. Heute konkurriert jeder mit jedem, auch innerhalb eines Unternehmens. Diese absolute Konkurrenz erhöht zwar die Produktivität enorm, aber sie zerstört Solidarität und Gemeinsinn. Aus erschöpften, depressiven, vereinzelten Individuen lässt sich keine Revolutionsmasse formen.

Man kann den Neoliberalismus nicht marxistisch erklären. In ihm findet nicht einmal die berühmte "Entfremdung" von der Arbeit statt. Heute stürzen wir uns mit Euphorie in die Arbeit bis zum Burn-out. Die erste Stufe des Burn-out-Syndroms ist eben die Euphorie. Burn-out und Revolution schließen sich aus. So ist es ein Irrtum zu glauben, dass die Multitude das parasitäre Empire abwirft und eine kommunistische Gesellschaft installiert.

Die Ökonomie des Teilens führt zu einer Totalkommerzialisierung des Lebens

Über den Autor

Byung-Chul Han lehrt Philosophie und Kulturwissenschaft an der Universität der Künste Berlin. Zuletzt erschien von ihm: "Psychopolitik. Neoliberalismus und die neuen Machttechniken".

Wie steht es heute mit dem Kommunismus? Überall wird Sharing und Community beschworen. Die Sharing-Ökonomie soll die Ökonomie des Eigentums und des Besitzes ablösen. "Sharing is Caring", "Teilen ist Heilen", so heißt eine Maxime der "Circler" im neuen Roman von Dave Eggers, "The Circle". Die Pflastersteine, die den Fußweg zur Firmenzentrale von Circle bilden, sind durchsetzt mit Sprüchen wie "Sucht Gemeinschaft" oder "Bringt euch ein". Caring is Killing, sollte es aber eigentlich heißen. Auch die digitale Mitfahrzentrale "Wunder Car", die jeden von uns zum Taxi-Fahrer macht, wirbt mit der Idee der Community. Es ist aber ein Irrtum zu glauben, dass die Sharing-Ökonomie, wie Jeremy Rifkin in seinem jüngsten Buch "Die Null-Grenzkosten-Gesellschaft" behauptet, ein Ende des Kapitalismus, eine globale, gemeinschaftlich orientierte Gesellschaft einläutet, in der Teilen mehr Wert hätte als Besitzen. Im Gegenteil: Die Sharing-Ökonomie führt letzten Endes zu einer Totalkommerzialisierung des Lebens.

Der von Jeremy Rifkin gefeierte Wechsel vom Besitz zum "Zugang" befreit uns nicht vom Kapitalismus. Wer kein Geld besitzt, hat eben auch keinen Zugang zum Sharing. Auch im Zeitalter des Zugangs leben wir weiterhin im "Bannoptikum", in dem diejenigen, die kein Geld haben, ausgeschlossen bleiben. "Airbnb", der Community Marktplatz, der jedes Zuhause in ein Hotel verwandelt, ökonomisiert sogar die Gastfreundschaft. Die Ideologie der Community oder der kollaborativen Commons führt zur Totalkapitalisierung der Gemeinschaft. Es ist keine zweckfreie Freundlichkeit mehr möglich. In einer Gesellschaft wechselseitiger Bewertung wird auch die Freundlichkeit kommerzialisiert. Man wird freundlich, um bessere Bewertungen zu erhalten. Auch mitten in der kollaborativen Ökonomie herrscht die harte Logik des Kapitalismus. Bei diesem schönen "Teilen" gibt paradoxerweise niemand etwas freiwillig ab. Der Kapitalismus vollendet sich in dem Moment, in dem er den Kommunismus als Ware verkauft. Der Kommunismus als Ware, das ist das Ende der Revolution.

© SZ vom 01.09.2014/mike



기사 출처 https://bit.ly/33OKsa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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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철학2020. 10. 27. 21:23

생물학에서 '진화론'은 삶의 진.선.미와 달리 그 뱡향이 없다는 게 특징적이다. 정치와 문화적 삶에서, '진화론'은 굉장히 신중하고 비판적으로 다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배자와 가해자의 범죄가 침팬지 힘자랑 게임으로 퇴락하고 만다. 


생물학적 사회진화론, 사회적 다윈주의 용어 "우월한 유전자" 보도, 조선일보, 이건희 손녀 보도, "이건희 장례식장서 가장 주목받은 사람은..." 기사를 보다가.


'우월한 유전자' 라는 단어는 인종차별주의다. '엄친아' 라는 말도 은폐된 생물학적 사회진화론 용어이기 때문에, '우월한 유전자'라는 단어와 함께 사용해서는 안된다. 타고 태어날 때부터 사회적 지위와 개인적 능력이 탁월하다는 '결정론'을 내포하고 있는 단어가 '우월한 유전자' 이다. 


경제적 부, 정치적 권력, 사회적 신분이 중산층 이상인 자를 가리키는 '엄친아'라는 단어도 이와 유사하다. 


'돈 없는 너희 부모를 탓해라. 부자 부모를 가진 것도 개인 능력'으로 치부된다.


TV 광고나 일상 생활에서, 친구와 연인끼리도 '우월한 유전자'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 현실을 보면, 1997년 IMF 긴축독재 이후, 한국 일상 생활에서 얼마나 신자유주의 논리가 삶 그 자체가 되었는가를 보여준다.


이재용 딸, 이씨, 인터넷 반응을 차용, '우월한 유전자'

초웃 로즈메리 홀 (Choate Rosemary Hall) 이라는 비싼 사립 고등학교를 다녔다고 소개. 생활비를 제외하고 1년 학비가 6만 달러가 넘는다 (6천 800만원).

전 세계에서 교육 차별이 심한 나라가 미국이다.  


한국의 교육 개혁의 모델이 전혀 될 수 없는 것 중에 하나다. 우리는 1년 학비가 6천 800만원인 고등학교가 아니라, '0원'인 공교육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100세 시대에 최소한 대학 4년까지는 무료 자유 교육 시스템을 형성해야 하는게 시대정신이다. 


또래 아이들이나 국민들이 이런 특권층을 부러워하는 것으로 보도하는 조선일보의 기사를 보면, 기자 정신은 실종되고, 사장님 회장님의 '종'으로 전락해버렸다.


세습 신분을 고착화하는 한국 자본주의의 씁쓸한 단면이다.


21세기에 다시 타고 태어난 '신분을 타파하라'고 외쳐야 하다니.


 


 





이건희 장례식장서 가장 주목받는 사람은…

김강한 기자


입력 2020.10.26 10:15



지난 25일 별세한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빈소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함께 온 이 부회장의 딸 이원주양이 주목을 받고 있다. 마스크를 써 얼굴을 반쯤 가린 상태였지만 또렷한


눈매와 오뚝한 콧날이 드러나면서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우월한 유전자가 입증됐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이원주양은 2004년 생으로 올해 16세다. 미국 뉴욕에서 태어난 것으로 전해졌다.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 있는 용산국제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코네티컷 주에 있는 명문 보딩스쿨 ‘초트 로즈메리 홀’에 진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원주양은 과거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올린 사진이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공개되면서 관심을 모았었다.


사진 속에는 이양이 다른 10대 청소년들처럼 친구들과 어울리며 즐거운 일상을 보내는 모습이 담겨 있다. 그러나 이들 사진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현재는 계정을 탈퇴한 상태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양은 어릴 때부터 발레를 배웠다. 국립발레단 부설 아카데미에 다니면서 ‘호두까기 인형’ 무대에서 역대 최연소로 호두까기 인형 역을 맡기도 했다. 그는 초등학교 5학년때는 한국발레연구학회 콩쿠르에서 동상, 6학년때 한음무용콩쿠르에서 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빈소에 들어가는 이양의 모습을 본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아버지인 이재용 부회장과 어머니인 임세령 대상그룹 전무의 장점만을 섞어 놓은 얼굴” “연예인급 외모” “성인이 되면 어떻게 성장할지 벌써부터 기대된다” “장례식장에 신고온 힐은 어느 브랜드 제품인지 궁금하다" 등의 반응이 나오고 있다. 이 부회장과 임 전무는 2009년 이혼했다.




Posted by NJ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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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자연과사람

    포스팅 잘 보고 갑니다^^
    저희 블로그도 들러 주세요 ^^
    오늘하루도 행복한 하루 되세요 ^^

    2020.10.29 12:10 [ ADDR : EDIT/ DEL : REPLY ]

정치철학2020. 9. 29. 22:20

김종철 후보와 배진교 후보의 생산적 토론을 위해 (2) 

정당과 정치활동에서 이념 (이데올로기)을 나쁜 의미로만 국한해서 사용해서는 안된다. 누구의, 누구를 위한, 누구에 의한 '이데올로기 , 이념'인가를 우리는 더 중요하게 따져 묻고, 그 이념을 창조, 실천, 가치평가해야 한다.

탈이념 주장도 하나의 이데올로기 (이념)이다. 오히려 이런 이념의 종언이나 이념 무용론은 정치적 냉소와 진보정치에 대한 패배주의를 불러일으킨다. 

민주당도 민주당 '이념'이 있고, 국민의힘도 국힘의 '이념'이 있다. 그들의 이념, 이데올로기를 창조하고 강화하고 선전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따라서 민주당과 국민의힘은 '이데올로기 (이념)'이 없는 대중정당이라고 말하는 것도 잘못된 주장이다. 

이데올로기 (이념)는 사람들이 집합적으로 만들어 내기도 하고, 그것을 부정하고 파괴하기도 하며, 생성-성장-쇠퇴-소멸, 혹은 변형의 전개과정을 겪기도 한다. 

수령 1인, 독재자 1인, 특정 정당이나 천재 1명이 이데올로기(이념)를 창조해내는 경우는 드물다. 시대정신과 사람들의 물질적 지적 요구를 '이념, 이데올로기'로 주조해내는 것은 집합적인 실천과 공동 지적 작업인 경우가 역사적으로 많았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한국전쟁과 같은 국제적-국내적인 이데올로기(이념) 전쟁을 겪었고, 박정희 유신헌법의 국가주의 이데올로기 하에서 시민의 자유를 박탈당한 경험 때문에,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한국인들의 역사적인 경험은 이념에 대한 트라우마를 형성했다. 

하지만 1987년 유월항쟁 이후 민간 정부의 탄생과 리버럴 민주주의의 형식 절차성 강조, 의회 내에서 다당제, 다원주의적 민주주의 개념 허용으로 인해, 정치와 정당활동에서 다양한 이데올로기들 (이념들)의 경쟁은 이제 한국 정치의 상식이 되었다.


---정치학자들이 다양하게 이데올로기(이념)을 개념 정의하고 있는데, 그 중 하나를 소개한다. 


정치학에서 이데올로기란 무엇인가?


지난 2세기 동안 이데올로기 뜻이 상당한 변화를 겪었다. 믿음체계,주장,생각에 대한 학문적 연구라기 보다는, '생각'과 '행동'을 서로 연결시키려는 믿음 체계, 주장, 생각들의 집합을 뜻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데올로기는 사람들의 사고 방식과 행동 양식을 형성하려고 한다. (이데올로기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가,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의미임)


이데올로기 (이념)이란 상당히 일관적이고 포괄적인 믿음,주장, 생각들의 집합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사회적 조건들을 설명하고 평가한다. 또한 우리는 이데올로기 도움을 받아 우리가 한 사회 안에서 어떤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가를 파악할 수 있고, 사회적 정치적 행동을 하는데 필요한 프로그램을 기획하기도 한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이데올로기(이념)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기능을 수행한다.


(1) 설명 기능, (2) 가치 평가 기능 (3) 태도와 믿음체계의 방향 설정 기능 (4) 행동과 실천 프로그램 기능


정치적 이데올로기들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발전되어 왔는가? 그 예시들


(1) 리버럴리즘 (*일본식 번역 자유주의는 잘못된 번역어이기 때문에 우선 영어 단어 그대로 씀: 자유라는 단어는 진보,좌파,사회주의의 최고 목표 단어임)


(2) 보수주의 (conservatism)


(3) 사회주의와 코뮤니즘 (공산주의 번역어도 생산에만 촛점을 맞춘 번역어이기 때문에 잘못된 번역어임. communism 이란 생산과 노동 과정 뿐만 아니라  비생산,비노동 인간행위들에서 '자유'와 '자신의 잠재력의 실현'을 추구하는 이념임)


(4) 파시즘 (Fascism)


(5) 해방 이데올로기와 정체성 정치학 (Liberation ideologies and the politics of identity)


흑인 해방, 여성 해방, 동성애 해방, 해방 신학, (아메리카 대륙 ) 원주민 해방


(6) 녹색 정치: 이데올로기로서 생태주의


(7) 이슬람과 급진 이슬람


제목: 정치적 이데올로기들 (이념들)과 민주주의 이상 (2006) , p.5


저자: 테렌스 볼, 리처드 대거


Terrence Ball & Richard Dagger, Political Ideologies and the democratic ideal. (New York: Pearson Longman). 2006. p.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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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철학2020. 9. 21. 16:04

이데올로기 뜻을 설명하는 이유. 캐나다 고등학교 3학년, 대학교 1학년 정치학 교과서에 나오는 이데올로기 개념을 언급하는 배경.

사람마다 서로 달리 이데올로기 뜻을 결정하기도 한다. 심지어 안철수 같은 정치가, '진보'를 자처하는 학자,언론인,컬럼니스트들도 '이데올로기'를 '양심'이나 '상식'과 대조시키는 실수를 범한다. 역설적이게도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외치는 것도 또 다른 이데올로기다. 왜냐하면 이데올로기는 인간,사회,자연 현상을 설명하고 해석하는 세계관이기 때문에, 그것 없이는 인간이 그것들에 대한 자기 생각을 발표할 수 없기 때문이다. 


1. 이데올로기란 무엇인가?

우리 신념, 믿음체계는 우리 모든 활동의 영향을 받는다. 인생살이에서 가족, 선생님, 친구들은 우리의 삶의 어떤 선택 방향에 영향을 행사한다. 우리는 서로 경쟁하는 종교,과학,사회,정치적 생각들을 비교하면서 어떤 선택을 내릴 때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 경우 의식적인 선택을 하지 않고 어떤 신념을 단순히 수용할 때가 많다.  

점차 우리는 가치 체계들을 채택하게 되고, 그것들과 함께 일상생활을 영위하고, '아 그게 참이야 하고, '진리'로 수용한다. 이데올로기란 세계에 대한 이러한 신념 체계들, 믿음들의 집합을 의미한다. 

그런데 개인의 신념들과 이데올로기는 서로 다르다.   이데올로기는 세계에 대한 상당히 포괄적인 그림을 우리들에게 제공해주고, 특정 집단들에게 '참' '진리'로 받아들여진다. 

2.이데올로기의 구성 요소들을 통해  본, 이데올로기 개념들 

이데올로기의 개념 정의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보통 다음과 같은 의미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데올로기는 인간 본성과 사회에 대한 기초적인 전제들을 내포하고 있다.

이데올로기는 과거의 해석하고, 현재를 설명하고, 미래의 전망을 의미한다.

이데올로기는 애써 노력해서 획득하고자 하는 '목표'이자, 그 목표를 달성하는 전략을 의미한다.

이데올로기는 순교자, 건국의 아버지 어머니, 지도자와 같은 영웅들, 그리고 서약, 애국가,존경을 표시하는 (정치적) 의식들을 의미한다. 또한 이데올로기는 성경, 선언, 헌법과 같은 신성한 공식 문서들이다.

이데올로기는 정치적 신념이나 종교 등을 바꾸거나 행동에 나서게 만드는 아주 강력한 감정적 호소이기도 하다.

이데올로기는 '진리'라고 주장되는, 아주 간단하고 쉽게 이해되는 세계관,세계상이다.  

3. 이데올로기의 정치 사회적 역할은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기초적인 신념들을 의식하지 않지만, 모든 현대 사회들은  이데올로기들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다른 대안적인 이데올로기를 접촉할 수 없고,  하나의 이데올로기만이 지배적인 그런 사회는 드물다.

각각의 이데올로기는 사실들과 가치들의 혼합이고, 감정적인 호소력을 얻어내려고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종종 이데올로기를 흑백논리로 선악의 관점으로 파악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이유로 인해, 보통 사람들이 민주주의, 코뮤니즘(공산주의), 사회주의, 민족주의, 자본주의, 파시즘, 아나키즘(무정부주의),기독교 카톨릭, 기독교 신교(프로테스탄티즘) 이라는 단어가 정확히 무슨 뜻인가를 알려고 노력하지 않는 경향도 있다. 


이런 태도를 취하는 이유는 그 사람들이 이러한 이데올로기들 중에 하나, 혹은 두 개 이상을 무의식적으로 부지불식간에 이미 자신들 마음 속에 채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는 사람들이 자기 환경을 이해하고 생활을 영위하는데 도움을 주기 때문에 중요하다. 이데올로기는 아주 혼동스러운 정치 사회 경제 현안들과 세계 사건들을 판단하고 평가할 수 있는 방법들을 제공해준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미래를 어느정도 예측할 수도 있고, 마음의 안전을 획득하고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다.  


이데올로기는 사람들에게 세계를 바라보는 공통적인 가치와 방식을 제공함으로써,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한다. 사람들이 이데올로기를 통해서 소속감을 가진다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이데올로기는 사람들에게 '좋은 삶'을 약속해주고, 그 좋은 삶을 실현할 방법을 제공해준다. 



출처: 

Baldwin,Douglas & Calder,William. Ideologies. (New York:McGraw-Hill Ryerson Limited). 1982. p.8


원시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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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철학2020. 8. 7. 09:37

제목: 에로스와 문명 - 프로이트에 대한 철학적 탐구 

(* 에로스 사전적 의미 : 에로스란 생명을 보존하려는 모든 본능을 의미한다. 이는 기초적인 필요를 충족시키려는 추진력으로 표출된다. 정신과 육체를 보존하고 보호하려는 승화된 추진력과 충동이다. )


저자:  Herbert Marcuse (1898-1979) 마르쿠제 

번역: 원시. 

원제:  Eros and Civilization - A philosophical Inquiry into Freud 

출판 시기: 1955 


 소피 마르쿠제 (1901-1955)를 기념하며 


서설


‘인류 문명이 인간 본능을 끊임없이 억압하면서 건설되었다’는 프로이트 명제는 사람들에게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이런 문명 건설과정에서 개개인이 짊어져야 하는 고통이 따른다. 그러나 이 고통이 그 문명의 혜택과 동일한 가치를 지니는가라는 프로이트의 문제제기는 그렇게 심각한 고려대상은 아니었다. 


프로이트 자신조차도 이러한 문명 건설과정이 불가피하고 되돌릴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더욱더 사람들은 그의 문제제기를 심각하게 다루지 않았다. 인간의 본능적 필요를 개인이 자유롭게 충족시키는 것은 문명사회와 양립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본능 충족을 거부하고 그것을 뒤로 미루는 지연 행위야말로 문명 진보의 선결조건이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행복이란 결코 문화적 가치가 아니다.”  행복이란 ‘정규 직업으로서 노동’의 원칙에 종속되어야 하고, 일부일처제의 ‘통제와 처벌’ 원칙에 종속되어야 하고, 법과 질서의 기득권 체제에 종속되어야 한다. 리비도에 대한 체계적인 희생, 리비도를 사회적으로 유용한 활동과 표현에 강압적으로 굴절시킨 것이 바로 ‘문화 (문명)’이다. 


(*리비도: 사전적 의미- 리비도란 성적 쾌락이나 자기 생명 보존을 위해 원시적 생물학적 충동에서 발생한 본능적이고 심리적인 에너지임.)



그런데 이런 희생의 대가로 인해 되돌아오는 혜택은 상당히 컸다. 인간의 자연 정복은 기술적으로 진보한 문명 영역들에서 완결되었고, 이로 인해 인류 역사 어느 때보다도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의 필요가 충족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삶의 기계화와 표준화, 정신의 빈곤화, 현재 진보의 점진적인 파괴가 발생했다. 그러나 이것들은 서구유럽 문명과정을 지배해온 원칙들을 반성하고 문제로 삼을 만한 충분한 근거는 되지 못했다. 생산성의 지속적인 증가는 끊임없이 더욱더 현실적인 ‘모두를 위한 보다 나은 삶’에 대한 확실한 약속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진보가 거듭되면 거듭될수록, 부자유와 구속의 강도는 더 거세어질 것으로 보인다.  산업화 문명의 세계를 거치면서,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범위는 더 넓어졌고, 그 지배 효율성의 강도는 훨씬 더 커졌다. 이런 경향은 진보를 향한 여정에서 우연적이고 일시적인 퇴행이 결코 아니다. 


강제 수용소, 대량 학살, 세계 대전, 핵폭탄 투하는 야만주의 (barbarism)라는 잘못된 습관으로 다시 한번 복귀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 과학, 기술, 정치권력 행사의 성공을 전 사회영역에 제어장치 없이 전일적으로 적용시킨 것이다. 


인류의 물질적이고 지적인 성과물들이 이제 막 진정한 자유 세계를 창출할 때, 인간에 대한 인간의 가장 효과적인 종속과 파괴는 이런 문명의 정점에서 발생하고 말았다. 우리의 현재 문화의 이러한 부정적인 측면들은 기성제도들의 낡음과 시대착오성을 잘 보여주고, 새로운 형태의 문명의 출현을 의미한다. 


아마도 ‘억압’이 가장 강력하게 유지되면 될수록, 그것은 점점 더 불필요한 것이 될 것이다. 만약 ‘억압’이 문명의 본질에 속해야 한다면, 문명에 대한 프로이트의 문제제기는 무의미한 것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억압 이외에 별 다른 대안이 없을 테니까. 


그러나 프로이트의 이론은 ‘문명’과 ‘억압’이 동일하다는 생각을 폐기할 근거들을 제공해준다. 프로이트의 이론적 성과를 고려해 본다면, 이 주제에 대한 토론은 다시 열려야 한다. ‘자유’와 ‘억압’, 생산성과 파괴, 지배와 진보의 상호관계는 필수 불가결한 문명의 원칙인가? 그게 아니라면, 이러한 관계는 단지 인류의 특정한 역사적 조직화의 결과일 뿐인가? 


프로이트 용어를 쓰자면, ‘쾌락 원칙’과 ‘현실 원칙’ 사이 갈등은 서로 화해 불가능해서, 그 갈등이 인간의 본능 구조 자체를 억압적으로 탈바꿈시켜야만 했는가? 이게 아니라면, 이 둘 간의 갈등이 근본적으로 다른 삶과 존재양식의 체험, 근본적으로 다른 인간과 자연의 관계,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 양식의 관계 기초 위에서 건설된 ‘비 억압적’ 문명 개념을 새롭게 가능케 하는가? 


나는 ‘비억압적 문명’ 개념을 토론할 때, 그것을 한갓 추상적이고 유토피아적인 이론화 작업으로만 제시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주제 토론은 두 가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근거 위에서 정당화될 것이다. 



첫번째, 프로이트는 ‘비 억압적 문명’의 역사적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부정했다. 그런데 프로이트의 이론적 개념은 오히려 프로이트의 이러한 부정을 논박하는 것처럼 보인다. 


두번째, 억압적 문명의 성과 그 자체가 억압의 점진적 폐지의 선결조건들을 창출해 낸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근거들을 명료하게 설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프로이트의 이론적 개념들을 그것의 사회-역사적인 맥락과 내용이라는 측면에서 재해석할 것이다.



 이러한 재해석 절차는 수정주의적 신-프로이트 학파를 부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수정주의자와 대조적으로, 나는 프로이트 이론 자체가 “사회역사적”이라고 해석하고, 이러한 실체를 드러내기 위해서 어떠한 새로운 문화적 혹은 사회학적 나침반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사실 알고보면, 프로이트의 “생물학주의 (biologism:인간을 생물학적 관점에서만 해석함”는 심층적인 측면에서 보면 사회 이론이다. 그런데 신-프로이트 학파는 이런 해석을 지속적으로 애써 거부해왔다.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생물학적인 요소에서 문화적 요소로 강조점을 변환시킴으로써, 신 프로이트 학파는 오히려 인간의 본능 안에 자리잡은 사회의 뿌리들을 잘라내 버렸다. 



그 대신 개인을 설명할 때, 그 개인이란 사회가 이미 만들어놓은 ‘환경’이라고 간주해버렸고, 사회와 개인을 대립시키는 방식으로 사회를 위치 지운다. 신 프로이트 학파는 이렇게 개인과 사회 관계를 설정함으로써, 사회의 기원과 정당성을 따져 묻지 않는다. 이러한 ‘환경’에 대한 신 프로이트 학파의 분석은 사회적 관계의 신비화에 저항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에 굴종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들의 비판 역시 아주 보호벽으로 잘 둘러싸인 기성제도의 영역 안에서만 작동한다. 


결과적으로 신 프로이트 학파의 비판은 엄밀한 의미에서 보자면 이데올로기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기성 체제 바깥에 있을 수 있는 어떠한 개념적 토대를 제공하지 않았고, 그 비판적 생각과 가치 대부분은 그 체제 안에서 제공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주의적 도덕과 종교는 그들의 부활을 축하한다. 도덕과 종교의 주장을 ‘병든 것’이라고 애초부터 반박했던 바로 그 심리학의 용어들로 이 도덕과 종교가 치장을 했다는 사실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실은 이상주의적 도덕과 종교가 바로 공식적으로 대중들에게 널리 수용되고 선전된 태도들과 동일한데도, 그것들이 이 사실을 은폐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군다나 문명의 역사적 구조에 대한 가장 구체적인 통찰은 그 수정주의자들이 거부했던 바로 그 개념들 안에 들어있다고 우리는 믿는다. 프로이트의 메타 심리학, 그의 후기 본능 이론, 인류의 이전-역사의 재구성이 이러한 ‘개념들’에 속한다. 



그런데 정작 프로이트 자신은 이러한 개념들을 단지 ‘연구 가정들 working hypotheses’으로만 간주해버렸다. 이러한 가정들의 기능이란 불분명한 것을 해명하는 것이고, 이론적으로 분리된 통찰들 사이에 임시 가교를 설치하는 것이었다. 프로이트에게 그러한 통찰은 물론 늘 교정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가정들이 더 이상 심리분석적 이론과 실천을 발전시키지 않으면, 그것들은 폐기될 운명에 처한다. 



프로이트 이후 심리분석의 발달 과정에서 이러한 메타 심리학은 거의 다 절멸되었다. 심리분석이 사회적으로도 과학적으로도 사람들 사이에 존경을 받게되자, 어떤 사건의 원인들에 대한 추측들(이론화 :speculations)을 서로 맞춰보고 타협하는 작업으로부터 심리분석은 점점 더 멀어져갔다. 


그러한 추측들의 조율과 타협의 의미는 한 가지 이상이었다. 그 추측들은 임상 관찰 영역과 치료적 유용함을 뛰어넘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추측들의 인간 해석에 따르면, 인간이 프로이트 초기 “범 성욕주의” 보다 사회적 금기 (taboo)에 대해 더 공격적인 태도를 취했다는 것이다. 프로이트 초기 “범 성욕주의”는 문명의 폭발적이고 강력한 토대로 밝혀졌다. 



향후 진행될 토론은 심리분석의 금기시된 통찰을 문명의 기본적인 변화 발달 과정을 해석하는데 적용시켜보도록 할 것이다. (심리 분석 그 자체에서도 금기시된 통찰) 이번 에세이의 목적은 심리분석의 철학에 기여하는 것이지, 심리 분석 그 자체에 기여하고자 함은 아니다. 이 책은 이론 영역 안에만 머무를 것이다. 또한 심리 분석이 발달해서 점차 기술적인 분과 학문으로 분화되었는데, 이 책은 그런 기술적인 분과 과학 영역 바깥에 머무를 것이다. 



프로이트는 엄밀한 의미에서, 인간에 대한 이론, 즉 “심리(정신)-학”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이론으로써, 프로이트는 그 자신의 위치를 철학의 위대한 전통 위에 올려놓았을 뿐만 아니라 철학적 기준들에 부합한 작업을 수행했다. 



우리의 관심사는 프로이트 개념들의 해석을 올바로 가다듬거나 향상시키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그 개념들이 보유하고 있는 철학적이고 사회학적 의미가 무엇인가를 해명하는데 있다. 프로이트는 그의 철학과 그의 과학을 구별하는데 엄청난 노력을 쏟아 부었다. 그런데 신 프로이트 학파는 프로이트의 철학을 대부분 부정해버렸다. 치료라는 이유로, 그러한 부정은 완벽하게 정당화되었다. 


그렇지만 어떠한 치료적인 논거도 이론적 구성의 발달을 막아서는 안된다. 이러한 이론적 구성의 목표는 개인의 질병을 치료하는데 있지 않고, 일반적인 신체 이상이나 병을 진단하는데 있다. 





보충: 


몇 가지 용어들에 대한 예비 설명 문명 (civilization) 은 ‘문화 culture’와 교환가능한 의미이다. 프로이트의 “문명과 그 불만 civilization and its discontent”에서 처럼. 


억압 repression, 그리고 억압적 repressive 는 비-기술적인 의미로 사용했다. 이는 의식적이고 무의식적인, 외적인 그리고 내적인 ‘자제, 구속, ( restraint ) 통제, 제약 (constraint), 진압, 억제 (suppression)을 뜻한다. 


본능 (instinct)은 프로이트의 ‘본능,충동:트리프Trieb’ 개념에 따라, 인간 생명체 (organism) 의 기본적인 “욕구 drive, 추동력”을 지시한다. 이러한 욕구들은 역사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 그 욕구들은 정신적인 상징과 육체적인 상징 (대변)을 알아나간다. 






참고 기사:



김인환 선생 번역 출판


당시 동아일보 신간 소개가 흥미롭다.


김인환 역. 에로스와 문명 (왕문사 256면. 550원. 60년대 구미 젊은이들에게 현대문명의 저항의 원리를 제공한 후기 마르쿠제의 대표작으로 국내 초역. 문명 과잉이 제기하는 억압의 사회를 극복, 에로스적인 노동에 의해 인간을 해방시키는 사회로 변혁할 것을 역설한다.



Posted by NJ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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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철학2020. 5. 7. 17:47

노회찬 "6411버스 노동자"와  베버 "노동자" 관점 차이: 베버가 본 독일 노동자 계급 - 정치적 리더십 소명의식과  권력본능 결여  


1. 몇 년간 정의당의 어떤 모순을 관찰해오고 있다.  노회찬은 " 6411번 노동자 정당이 정의당이다"라고 했지만, 막스 베버는  "독일 노동자들은 정치적으로 미성숙하고, 정치적인 변화를 꺼려하고 인습에 안주하기 때문에, 독일 정치의 미래가 될 수 없다"고 1919년에 주창했다. 


정의당 전체는 아니지만, 일부 당원들과 진보비즈니스 단체의 막스 베버  '책임정치' 바겐세일이 놓치고 있는 것은, 노회찬의 "6411번 버스 노동자"가 투명인간이 아니라 한국 참여민주주의의 주체, 노동해방의 주인이라는 것이다. 

 

정의당이 2020 총선에서 거의 모든 후보들이 '노회찬의 6411 버스'를 자신의 정치노선으로 한번 이상씩은 언급했다. 이런 사실을 감안하면, 형식 논리적으로보면, 정의당은 '노회찬의 6411번 버스 노동자' 관점을 버리던가, 막스 베버의 부정적이고 비관주의적 '노동자 관점'을 버리던가 해야 한다.


막스 베버는 독일 노동자들을 자신이 주장하는 독일 리버럴 민주주의 주체로도 간주한 적도, 그런 정치적 구상을 한 적도 없다. 독일 노동자 계급의 현 상태 (존재: Sein)가 이러하니, 정치적으로 각성된 정치 주체로 되어야 한다( 당위 Sollen)는 것도 연구하지 않았다. 


 한국 노동자들, 모든 비정규직도, 아니 비정규직 50%도 정의당에 투표하지 않는다. 정의당이 그들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정책을 발표해도 투표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현 상태와 정치의식 사이에 존재하는 커다란 간극을 좁히기 위해 연구하고 학습하고 토론하고 실천하고 조직하는 것이다. 그게 진보정당으로서 정의당이 해야할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월급받는 노동자들을 '정의당 한번 찍어주는 팬'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당의 주체가 될 수 있는 정당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야말로 정의당의 '정치 신념이자 확신'이 되어야 한다.


2.  1895년 막스 베버가 프라이부르그 대학교수 취임 연설에서 나타난 "노동자"에 대한 태도와 관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막스 베버가 31세되던 1895년 5월 프라이부르그 대학에 교수가 되어 취임강연을 했는데, 그 제목이 “민족국가와 민족경제정책“이다. 연설 말미에, 베버는 독일 노동자 계급이 독일 미래의 주체가 될 수 없다고 진단했다. 왜냐하면 독일 노동자계급은 경제적 이득을 위해서는 조직적인 투쟁을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독일 노동자들을 좌지우지 하는 저널리스트 집단보다 훨씬 더 미성숙하기 때문이다.


 베버는 로마 역사와 프랑스 혁명 시기 1792-5년 국민공회의 분위기와 독일 노동자 계급을 비교한다. 독일 노동자계급에게는 로마 귀족 카틸리나의 반역 에너지의 불꽃도 없고, 프랑스 국민공회에 불었던 강력한 민족적 열정의 기미도 없다. 독일 노동자들은 정치적 거장의 덕목이나 능력은 없고, 정치적 소-장인(Kleinmeister)에 불과하다. 


정치적 지도력이라는 소명을 부여받은 계급에게 볼 수 있는 위대한 권력 본능이 독일 노동자계급에게는 결여되어 있다. 또한 독일 노동자계급은 정치적인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정치적인 변화를 별로 희구하지도 않고, 인습과 관습에 순치되어 있다고 봤다. 


독일 노동자처럼 정치적인 학습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정치리더가 되면, 가장 파괴적인 집단이고, 따라서 우리들의 정치적 적이라고 막스 베버는 진단했다. 독일 노동자계급이 정치적으로 성숙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부하기 좋아하는 사람이고 인기의 왕관을 쓰고자 하는 안달복달하는 자일 뿐이다. 


3. 정의당 노회찬의 대표 수락 연설에 나타난 "6411번 버스 노동자" 관점


"새벽 4시 5분에 출발하는 6411번 버스타고 강남으로 출근하는 비정규직 청소노동자, 이분들은 태어날 때부터 이름이 있었지만, 그 이름으로 불리지 않습니다. 그냥 아주머니입니다. 그냥 청소하는 미화원일 뿐입니다. 한 달에 85만원 받는 이분들이야말로 투명인간입니다. 존재하되, 그 존재를 우리가 느끼지 못하고 함께 살아가는 분들입니다 (......)


그 누구 탓도 하지 않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만들어 나가는 이 진보정당, 대한민국을 실제로 움직여온 수많은 투명인간들을 위해 존재할 때, 그 일말의 의의를 우리는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상 그동안 이런 분들에게 우리는 투명정당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정치한다고 목소리 높여 외치지만 이분들이 필요로 할 때, 이분들이 손에 닿는 거리에 우리는 없었습니다. 존재했지만 보이지 않는 정당, 투명정당, 그것이 이제까지 대한민국 진보정당의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이제 이분들이 냄새 맡을 수 있고, 손에 잡을 수 있는 곳으로, 이 당을 여러분과 함께 가져가고자 합니다. 여러분 준비되었습니까?"



4.  정의당의 '노동자 관점' - 직장인, 월급쟁이에 대한 관점은 무엇인가,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


노동자, 월급쟁이, 학생, 비정규직, 주부, 노인은 현금이나 쥐어주는 단순한 복지시혜 대상이나 불우이웃이 아니다. 선거 때 정의당 찍어주는 팬클럽 회원에 그쳐서도 안된다. 


그들의 일터에서, 휴식터에서, 놀이터에서, 노동의 현장과 노동의 바깥 공간에서 그들의 희로애락이 담긴 말, 글, 행동이 정의당으로 흘러 들어와야 한다. 











참고 자료




1895년 막스 베버, 프라이부르그 대학 취임 강연 - (번역 요약) 원시 


민족국가와 민족경제정책 (Der Nationalstaat und die Volkswirtschaftspolitik) 

뒷부분 pp.30-32 


막스 베버는 비르마르크 체제 하에서 독일 부르주아 계급이 정치적으로 미성숙해서 경제적인 대의도 가지고 있지 않고, 정치적으로도 교육받지 못했다고 진단했다. 어떠한 경제적 요소가 그러한 정치교육을 대체할 수 없다.


그렇다면 부르조아 계급도, 대토지 지주인 융커 계급도 아닌, 어떤 다른 계급이 정치적으로 더 위대한 미래의 주체가 될 수 있는가? 


현대 노동자가 자신있게 부르주아 계급의 이상의 상속자라고 선언하다.

노동자 계급이 독일 정치의 지도자가 될 전망은 있는가? 


오늘날 독일 노동자계급이 정치적으로 성숙하거나, 정치적 성숙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고 누군가 말한다면, 그 사람은 아부쟁이 (쉬마이쉴러)이고, 수상쩍은 인기의 왕관을 쓰고 싶어하는 자일 것이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독일 노동자계급의 최상층은 자기중심적인 자산가계급이 인정하는 것보다 훨씬 더 성숙했다. 독일 노동자 계급은 또한 공개적이고 조직적인 경제적 권력투쟁이라는 방식을 통해 그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할 자유를 정당하게 요구한다. 


그러나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독일 노동자계급은 저널리스트-패거리들보다 훨씬 더 미성숙하다. 그 일단의 패거리들은 리더십을 독점하고 싶어하고 노동자계급에게 그것을 믿게 만들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지위가 강등당한 부르주아들의 영토 안에 머무르면서, 독일 노동자들은 100년 전 추억놀이에 빠진다. 그들의 불안한 정서 때문에, 그들 마음 속에서는, 1792-5년 프랑스 혁명 국민공회 (National Convention) 대표자의 정신적 후계자들이라는 생각이 자리잡기도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독일 노동자들은 그들이 스스로 현실에서 보여주는 것보다 더 위험하지도 위협적이지도 않다. 그들에게는 로마 귀족 카틸리나의 반역 에너지의 불꽃도 없고, 프랑스 국민공회에 불었던 강력한 민족적 열정의 기미도 없다. 


독일 노동자들은 정치적 거장이 아니라 능력이 모자란 정치적 소장인에 불과하다. 정치적 지도력이라는 소명을 부여받은 계급에게 볼 수 있는 위대한 권력 본능이 독일 노동자계급에게는 결여되어 있다. 



노동자들이 정부 공동 운영의 한 축으로서 참여할 때, 자본에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만이 그들의 정치적 적들이 아니다.  독일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노동자들이 자본과의 공통적인 이해관계 공동체를 형성한 흔적들이 거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노동자들의 정치적 성숙함에 대해 묻는다, 왜냐하면 

정치적인 교육을 받지 않고, 사회가 이미 옳다고 정해놓은 것만 하고, 정치적인 변화를 원치 않은 인습에 순치된 사람들이 한 나라를 지도하게 내버려 두는 것이야말로 가장 파괴적인 일이기 때문이고, 독일 노동자들은 이러한 성격을 아직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의 정치적 적이다.  



왜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노동자들은 독일 노동자들과 부분적으로 다른가?  

잉글랜드 노동자들이 이해관계를 관철시키기 위해 조직적으로 투쟁하면서 완성시킨 더 오래된 경제교육 때문만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한 정치적 계기가 있었기 때문에 그게 가능했다. 그것은 바로 잉글랜드의 세계 강대국의 지위에 대한 노동자들의 공감 때문이었다.  


이것은 잉글랜드가 지속적으로 정치적 강대국의 과제를 해결하게 만들고,   개인들이 끊임없이 정치적인 학습을 받게 만들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우리 독일인들은 국경선이 위험에 빠질 때나 긴급하게 그 정치적인 학습을 받는다.


큰 정치가 강력한 정치적 권력문제의 중요성을 우리들에게 똑똑히 보여줄 것인가라는 문제는 우리 독일 발전에서도 또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우리는 독일의 통일은 옛날에 저질러버린 유년시절 장난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통일이 독일 세계권력정치의 출발이 아니라 종지부라면, 그 값비싼 비용 때문에 중도포기가 더 나았을 것이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독일의 위험한 상황이란, 국가의 권력이해관계의 담지자로서 부르주아 계급이 힘이 없어 보이고, 노동자계급이 부르주아 계급의 지위를 떠맡을 정도로 성숙해질 징조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회의 깊이에 최면걸려 거기에 빨려 들어간 것처럼 바라보는 사람들이 믿는 것처럼, 위험은 대중에 있지 않다.피지배자의 경제적 상태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위로 성장하는 지배계급의 정치적 자격조건에 대한 질문이 사회정치적 문제의 궁극적인 내용이다. 


우리의 사회정치적 활동 목표는 세상사람들의 행복이 아니라, 험난한 미래의 투쟁을 위해 민족국가의 사회적 통합을 달성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통합은 근대 경제발전 과정에서 해체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오늘날 노동운동에 결여된 정치적 의미를 갖게 될 “노동귀족”을 성공적으로 탄생시킨다면, 부르주아의 팔이 아직은 창을 던질 만큼 충분히 강하지 않아 보이지만, 그것은 최초로 더 넓은 어깨 위에 놓여지게 될 것이다. 그 날이 오려면 한참 더 가야겠지만.



Werden andere Klassen die Träger einer politisch größeren

Zukunft sein? Selbstbewußt meldet sich das moderne Proletariat

als Erbe der bürgerlichen Jdeale. Wie steht es mit seiner

Anwartschaft auf die politische Leitung der Nation?


Wer heute der deutschen Arbeiterklasse sagen würde, sie se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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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litisch reif oder auf dem Weg zur politischen Reife, der

wäre ein Schmeichler und strebte nach der fragwürdigen Krone

der Popularität.


Oekonomisch sind die höchsten Schichten der deutschen

Arbeiterklasse weit reifer, als der Egoismus der besitzenden Klassen

zugeben möchte, und mit Recht fordert sie die Freiheit, auch in der

Form des offenen organisierten ökonomischen Machtkampfes ihre

Jnteressen zu vertreten. Politisch ist sie unendlich unreifer, als

eine Journalistenclique, welche ihre Führung monopolisieren

möchte, sie glauben machen will. 


Gern spielt man in den Kreisen

dieser deklassierten Bourgeois mit den Reminiscenzen aus der

Zeit vor 100 Jahren - man hat damit in der That erreicht,

daß hier und da ängstliche Gemüter in ihnen die geistigen Nach-

kommen der Männer des Konvents erblicken. 


Allein sie sind

unendlich harmloser, als sie selbst sich erscheinen, es lebt in ihnen

kein Funke jener katilinarischen Energie der That, aber freilich

auch kein Hauch der gewaltigen nationalen Leidenschaft, die

in den Räumen des Konventes wehten.


 Kümmerliche politische

Kleinmeister sind sie, - es fehlen ihnen die großen Macht-

instinkte einer zur politischen Führung berufenen Klasse. 


Nicht

nur die Jnteressenten des Kapitals, wie man die Arbeiter glauben

macht, sind heute politische Gegner ihrer Mitherrschaft im Staate.

Wenig Spuren der Jnteressengemeinschaft mit dem Kapital

fänden sie bei Durchforschung der deutschen Gelehrtenstuben. 


Aber:

wir fragen auch sie nach ihrer politischen Reife, und weil

es für eine große Nation nichts Vernichtenderes giebt, als die

Leitung durch ein politisch unerzogenes Spießbürgertum, und

weil das deutsche Proletariat diesen Charakter noch nicht ver-

loren hat, deshalb sind wir seine politischen Gegner. Und weshalb


ist das Proletariat Englands und Frankreichs zum Teil anders

geartet?


Nicht nur die ältere ökonomische Erziehungsarbeit,

welche der organisierte Jnteressenkampf der englischen Arbeiter-

schaft an ihr vollzogen hat, ist der Grund:


 es ist vor allem

wiederum ein politisches Moment: die Resonanz der

Weltmachtstellung, welche den Staat stetig vor große macht-

politische Aufgaben stellt und den einzelnen in eine chronische

politische Schulung nimmt, die er bei uns nur, wenn die Grenzen

bedroht sind, akut empfängt.


 - Entscheidend ist auch für unsere

Entwicklung, ob eine große Politik uns wieder die Bedeutung

der großen politischen Machtfragen vor Augen zu stellen ver-

mag. 


Wir müssen begreifen, daß die Einigung Deutschlands ein

Jugendstreich war, den die Nation auf ihre alten Tage beging

und seiner Kostspieligkeit halber besser unterlassen hätte, wenn

sie der Abschluß und nicht der Ausgangspunkt einer deutschen

Weltmachtpolitik sein sollte.


Das Drohende unserer Situation aber ist: daß die bür-

gerlichen Klassen als Träger der Machtinteressen der Nation

zu verwelken scheinen und noch keine Anzeichen dafür vorhanden

sind, daß die Arbeiterschaft reif zu werden beginnt, an ihre

Stelle zu treten.


Nicht - wie diejenigen glauben, welche hypnotisiert in die

Tiefen der Gesellschaft starren, - bei den Massen liegt die Gefahr.

Nicht eine Frage nach der ökonomischen Lage der Be-

herrschten, sondern die vielmehr nach der politischen Quali-

fikation der herrschenden und aufsteigenden Klassen ist

auch der letzte Jnhalt des sozialpolitischen Problems. 


Nicht

Weltbeglückung ist der Zweck unserer sozialpolitischen Arbeit,

sondern die soziale Einigung der Nation, welche die moderne

ökonomische Entwicklung sprengte, für die schweren Kämpfe der

Zukunft. Gelänge es in der That, eine "Arbeiteraristokratie" zu

schaffen, welche Trägerin des politischen Sinnes wäre, den wir heute

an der Arbeiterbewegung vermissen, dann erst möge der Speer,

für welchen der Arm des Bürgertums noch immer nicht stark

genug zu werden scheint, auf jene breiteren Schultern abgelegt

werden. 


Bis dahin scheint es noch ein weiter Weg.










Posted by NJ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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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후후히히하하호호흐흐허허

    이런 컨텐츠를 무료로 몰래 염탐해서 볼 수 있다는 게 충격적입니다. 기자들보다 깊이 있고 학자들보다 열정적인 필진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세계에 대한 해석에 깊이가 있고 열정이 있고 진득한 호기심과 문제의식이 있는 분을 못내 뒤지고 있었어요. 저는 맑스 베버의 대표작만을 읽었고 루카치부터 하버마스까지 역시 대표저작을 한 개씩 일독한 정도입니다. 공부할 때 생각이 나고 그때 그들의 문장을 읽으며 느꼈던 기묘한 열정과 당혹감이 다시 떠오르네요. 감사합니다.

    2020.06.19 18:22 [ ADDR : EDIT/ DEL : REPLY ]
    • 지루한 글일 수 있는데, 읽어주시고 댓글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베버, 루카치 책 읽으신 거 메모도 남겨주시고 그러세요....

      2020.07.02 16:05 신고 [ ADDR : EDIT/ DE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