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정치 노트 Notes on the Politics of Korea

이진경 논리전개의 결함들 . 이진경의 주장은 아주 간단하다. "조국이 장관 자격이 있고, 문재인의 장관임명이 국민에게 좋은 것이기 때문에, 그를 지지한다"이다. 주장은 명료한데, 가져다 대는 논거들은 개념들이 불명확하고 자의적이고, 앞뒤가 맞지 않다.  



(1) 이진경은 도덕(morality)와 윤리(ethic)을 구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서양철학 윤리학이나 일상생활에서는 '도덕'과 '윤리'는 동의어로 쓰인다. 헤겔이 칸트의 의무론적 윤리학을  '순수 테러주의(나만 옳다는 신념)' '비역사적' '비현실적 무능력'이라고 비판하면서  근대 개인의 '도덕 Moralität'와 사회 '윤리 Sittlichkeit'를 구별하기는 했다.


 이진경이 이런 칸트와 헤겔 차이점을 설명하기 위해서 도덕과 윤리를 구별하자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니, 굳이 '도덕'과 '윤리'를 구별할 필요없다. 


(이런 흥미로운  칸트-헤겔 논쟁을 아주 긴장감없게 발전시킨 것이 미국 롤즈의 입장인 political liberalism과 communitarianism 간의 논쟁이다. 한국에서 마이클 샌델 '정의론'이 100만부 팔렸는데, 후자 범주에 속함. 샌델보다 더 심오한 사람이 그 스승인 알스데이르 맥킨타이어이다. 스코트랜드 사회주의자였으나 소련에 실망해 미국으로 넘어가 헤겔 윤리학을 발전시켰다. ) 


(2) 이진경은 도덕의 범주는 '선과 악'이고, 윤리는 '좋음'과 '나쁨'이라는 범주를 쓴다고 주장했는데,이것도 별로 정확하지 않다. 그러한 구분을 하지 않고, 도덕과 윤리는 '옳음'과 '그름', '좋음'과 '나쁨'의 판단 기준이다. 


우리가 '행위'의 옳고, 그름 (시비지심 right or wrong), 좋고 나쁨(good or bad)를 판단할 때, 도덕과 윤리는 필요하다. 윤리학자나 철학자가 아니더라도, 보틍 사람들이 다 아는 내용이다. 


어원만 보더라도, '도덕'과 '윤리'는 동일하다. morality 모랄리티를 '도덕'으로 번역했는데, 이것의 어원인 라틴어 moralis는 '우리의 행동 방식이나 태도, 관행과 관습을 뜻하는 매너 manner, 커스텀 custom'이라는 뜻이다.


'윤리'로 번역한 ethics 의 그리스어는 에토스 ethos 이다. 이는 character, custom 기질 특질, 관행과 관습을 의미한다. 실제 영어화된 단어 에토스는 '한 개인이나 집단이 공유하는 행위 원리와 믿음 체계'를 뜻한다. 


(3) 이진경은 조국 법무장관을 옹호하기 위해서 윤리주의적 전환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조국에 대한 '도덕' 과잉을 버리고, 조국이 국민과 민중에게 '공익'을 주는 능력, 정치가로서 탁월함 (excellence) 이 있다고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그런데 이 주장도 정치적 행위와 도덕-윤리와의 관계가 뗄래야 뗄 수 없기 때문에, 이진경의 주장은 지극히 개인이 고안한 이론이거나, 누구나 보편타당하다고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4) 이진경은 조국비판론자들의 논거들을 회피해버렸다. 혹은 '도덕 과잉론자' '현실 정치를 모르는자'로 비난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조국 장관 자격없거나 부족하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은 '도덕 과잉'에 빠져서, 윤리학자이기 때문에 조국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조국의 의혹들(자녀 특권층 논란, 웅동학원 재산 투명성, 재산 증식과정과 사모펀드 투자 문제점)의 정치학에 대해서 비판하고 있는 것이고, 조국이 그 동안 주창한 정치적 주장들과 상충하기 때문에, 그 충돌을 조국이 '정치적으로 ' 해명하고 책임져라는 것이다. 이것을 '도덕 과잉'에 빠졌다고 비난하는 것은 잘못이다.


(5) 조국의 사회주의론과 민주주의론은 '연대와 협동'에 기반한 것이고, 그러한 연대와 협동이라는 '행위'가 좋고, 옳은 이유는 조국의 '윤리학' '도덕'에 기초하고 있다. 


조국의 정치적 발언들과 책들 안에는, "당신들이 이기적으로 자기 이익만을 열심히 추구하라.그렇게하면 당신들이 의도하지 않은 행동의 결과들이 산출되어, 개인들의 총체적인 합인 사회에 좋은 결과를 낳을 것이다"라는 아담 스미스 전제가 나오지 않는다. 


나경원과 황교안의 정치행위는 그들의 '도덕과 윤리'체계에 기초하고 있다.  도덕-윤리와 정치를 분리시키는 이진경의 논리는 실제 정치 전투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6) 이진경의 주장은, 조국 장관이 장관직을 수행하면 '조국의 능력 증진'에 좋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너무나 많은 '증거들'이 필요로 하기 때문에, 입증 부담이 너무 크다. 이러한 이진경의 개인적인 '소망' 때문에, 만약 수천만명 국민들이 조국 장관이 '훌륭한 탁월한 정치가'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가? 


사실 거창한 '윤리주의적 전환'이라는 말도 필요하지는 않다. 이미 아테네 소크라테스,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중세와 근대 교량 시대 사람인 마키아벨리 공통적으로 강조한 것이 정치 지도자의 '탁월함' '정치가로서 덕목들 virtues ' 개념이 있었다. 


이진경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아마 '정치가의 덕목과 능력'이었을 터인데, arete 아레테 (덕성, 덕목, 능력, 기능) 도덕과 정치학이다.이것은 공자 맹자가 강조한 '군군 신신 자자' 군자는 군자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 것과 내용상 동일하다. 


그런데 국민 60%가 지금 조국 장관의 탁월함, 덕목들 (arete, virtue)에 대해서 확신이 없는 상태이다. 


이진경의 마지막 문장 '나는 지지하는 것이 바르다 right (도덕적으로 옳다)'고 했는데, 정작에 자기 자신은 '도덕'과 '윤리'에서 사용하는 '옳음, 바름 righteous'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조국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도덕 과잉'이라고 비판하면서, 자기 주장은 '도덕적 단어'에 갇혀 있다. 


(7) 정치학은 윤리학과 도덕에 기초해있고, 정치적 행위들은 우리 모두 윤리와 도덕에 기초해있고, 행동 결과도 도덕과 윤리 척도들에 따라 평가받는다. 


윤리학 도덕 없는 계급투쟁은 개 돼지 먹이 다툼에 지나지 않는다. 


조국 논란에서 '신분제 자본주의'와 '교육 차별'이 가장 큰 주제로 대두된 것은, 조국 장관이 평소 주장한 '연대와 협력'의 사회주의 원리와 정면으로 충돌하기 때문이다. 


행동은 하나이다. 이론은 여러가지다. 머리가 복잡한 이유다. 하지만 행동과 이론은 수미일관해야 하고, 일이관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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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bit.ly/2o7cdct


(10월 6일, 한겨레 21 ) 이진경


조국에 대해 사람들이 지지를 주저하는 이유 가운데 큰 것이 도덕적 판단인 것 같다. ‘(자신이) 한 말과 다르게 어떻게 그렇게 살았냐’고 하는데 그런 평가를 할 만한 여지도 있다. 다만 모럴(Moral·도덕)과 에시크(Ethic·윤리)는 구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도덕의 범주는 선과 악이고, 윤리는 좋음과 나쁨이라는 범주를 쓴다. 지금 많은 경우 선악으로 평가하는 것 같은데, 나는 윤리주의적 전환이 필요하다고 본다. 


예를 들어 일반 국민, 민중의 관점에서 어느 것이 좋은가 나쁜가 하는 관점에 서야 한다. 누군가의 능력을 증진하는 게 좋고 감소시키는 게 나쁘다고 본다면, 조국을 버려야 할까 지지해야 할까. 나는 지지하는 것이 바르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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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학적 피나 정신적 피를 흘리지 않는 자유 실현이란 있을 수 없다. 




2014년 조사라서 2019년 현재와는 조금 다를 수 있지만, 정치 의식적 측면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아래 기사를 보더라도, 진정한 '자유'란 얼마나 실현하기가 힘든가를 알 수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왜 자유한국당과 같은 보수당을 더 많이 지지하는가?
자발적인 노예의식을 '애국주의'로 승화시켜 자기 개인 가치관으로까지 신념화시키고 내재화하는 그 현상은 왜 발생하는가? 


경향신문 강진구 기사는 좋은 글이다. 난제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치학과 철학에서 고전적인 주제이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정치적 동물'이 마치 '폴리스'를 벗어날 수 없듯이, 우리가 떼지어 집단으로 폴리스에서 사는 한 이 주제는 풀기 힘든 난제이다.


물론 사람들이 많이 쓰는 '계급적 존재를 배반하는 허위의식'이라는 정치적 난제는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유럽 지식인들 사이에 연구 대상이 되었다. 이탈리아 그람시, 독일의 프랑크후르트 학파 등의 연구주제들이다. 또한 제국주의 지배를 받았던 비참한 식민지 국가들에서 왜 '제국주의 세력과 결탁한, 제국주의자들보다 더 악날하고 지독한 자국 협력자들 collaborators'이 발생했는가를 두고 민족해방론자들 사이에 주된 관심사이기도 했다.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 혹은 규정한다는 조악한 마르크스에 대한 이해는 폐기해야 한다. 소련 스탈린이 통치 이데올로기 수준으로 전락시킨 이런 조악한 유물론, 혹은 변증법적 유물론을 마르크스의 핵심이라고 하는 것은 오해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는 무능과 무반성을 낳을 뿐이다. 


마르크스 뿐만 아니라 인류 정치사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인 '자유', 진정한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자발적 노예의식'과 끊임없이 싸워야 한다. 한번 득도하거나 '하느님을 영접'했다는 식은 자유 실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자발적인 복종의식과 자기 기만은 끊임없이 매일 매일 발생하기 때문이고, 그것을 '조장 (助長)'하는 정치 경제 문화 종교 지배자들이 우리들보다 늘 한 걸음 앞서 뛰고 있기 때문이다. CDs 와 같은 금융 상품의 형태로, 신무기 개발, 삼성 바이오로직스 회계 범죄 등으로 늘 다기한 전술로 노예들을 놀라게 만들고 충격받게 만든다.


생물학적 피나 정신적 피를 흘리지 않는 자유 실현이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자주하게 된다. 


자유를 추상적으로 '자기 스스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자기 결정권'으로 정의한다고 해서, 공동체의 독립 (independence=freedom 어원은 같다)이나 일터, 가정, 쉼터, 놀이터에서 자기 자유는 곧장 보장받지 못한다.왜냐하면 자유라는 것도 아주 구체적인 경제활동, 정치 문화 종교 활동들과 연계되어 있기 때문에, 심지어 같은 노동자들이라고 해도, 같은 직장에서 동일한 일을 하더라도 이해관계는 서로 충돌할 가능성이 커진 복잡한 일상 세계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온 가족이 논과 밭에서 일하는 농경제 사회에 사는 것도 아니고, 수렵 채취 공동체에 사는 것도 아니다. 매일 매일 끊임없이 형태와 내용이 변화하는 유동사회 (fluid society)가 우리 일상이 되었다는 뜻이다.  이렇게 되면 자기 스스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자기 결정권을 한 개인이 충분히 실현한다고 해도, 자기가 속한 수많은 집단들과 공동체의 '자유'와는 충돌하게 되어 있다.


공동체의 자유가 개인의 자유에 우선한다 이런 말에 앞서, 이러한 우리들의 현대적 삶의 조건 하에서는, 시민들 노동자들 학생들 모두 다 자기 이해관계들을 정치적으로 분출하고, 자기들끼리 스스로 조율하고 합의를 해 나가야 한다. 정치적 민주주의 실천이 과거 어느 때보다 더 중요하게 된 이유가 경제활동 양식들의 변화 때문이다. 경제와 정치, 경제와 문화적 삶이 분리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제는 자발적 노예의식과 복종을 가르치는 정치 경제 권력자 집단에 비해서, 일반 평민들 노동자 시민들은 '정치 참여' 시간이 없거나 부족하다. '자유 시간'이 생기면 자야 한다. 노동에 지치고 직장에서 받은 스트레스 때문에 그걸 잊기 위해서 뇌 세포를 재생시키기 위해서 자야 한다. 비판의 무기를 벼리는 데 필요한 책이나 지식 습득은 잠 앞에 다 굴종한다. 


진정한 좋은 정치가는 이제 우리들에게 노동시간을 가급적 줄이고, 정치적 의사 결정과정, 법률 제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자유 시간'을 시민들과 노동자들에게 내어주는 사람이다.


진정한 자유란, 스스로 직접 참여해서 피를 흘리지 않는 한, 어떠한 그 누구도 대신 해결해 줄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푸닥거리 동원식 정치, 정치적 참여를 단순한 대중동원으로 전락시키고 있는 '정당 테크노크라트'와 '정치 기술자들'은 이제 청산 대상이다. 선거에서 이기는 승리자는 될 지언정, 진정한 자유를 꽃피우는 민주주의 경작자들은 절대 될 수 없다. 


한국의 비정규직들의 정치 의식 대다수는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지배자들의 '말과 문장'을 자신의 신념 체계로 만들고 있다. 법률적 지식도, 계산적 수학 능력도, 자신이 믿는 종교적 교리들도, 윤리학도 다 무용지물이다. 현실에 남는 것은 '강자에 복종하면서 걍 살어'가 되어 버렸다.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문장을 반대로 뒤집어 엎는 그런 실천들을 스스로 해보고, 피부로 '아 다른 삶의 양식, 타인과 다른 언어들을 주고 받아도 이 사회가 무너지지 않고, 경제도 붕괴되지 않는다는 자신감'이 생길 때, 진정한 자유를 향한 한 걸음을 비로소 떼는 것이다.



[신문 기사 요약]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지배자 신념을 자기 믿음으로 둔갑시킨 비정규직 정치의식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노동자 권익을 대변하는 진보정당인 정의당보다, 심지어 민주당보다 새누리당을 더 많이 지지하는 층이 비정규직이다.


사실 조사: "2014년 1월 한국노동사회연구소가 서울에 사는 비정규직 2344명에 대한 생활·의식 실태조사"


(1) 비정규직들은 노후 불안과 고용 불안정을 호소하지만,  민주당(16.6%)보다 새누리당(24.4%)에 더 높은 지지를 보였다. 


(2) 18대 대선에서 이들의 67%가 투표를 했고 박근혜 후보(36.4%)가 문재인 후보(22.3%)보다 14.1%포인트 더 표를 받았다. 


-> 박근혜 정권과 새누리당은 비정규직의 권익을 박탈하는  "파견 확대, 쉬운 해고, 기간제 사용기간 연장" 입법을 만들었다.  


(3) 비정규직 조사 대상들은 누구인가? 평균연령은 52세 ,  법정노동시간보다 5시간 많은 주당 45시간 노동, 월급여 133만원.


 (4) 강진구 기자의 주장은 보수파를 지지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사회적, 경제적 지위는 별 볼 것 없지만 "대부분 산전수전 다 겪은 아Q처럼 세상물정에 환한 다변가들"로 진단하고 있다. 그러니까 자기 신념이 확실하다는 것이다.


 (5) 왜 이렇게 자기 권익을 뺏어가는 보수당을 비정규직 노동자들 상당수가 지지하는가? 그 의식구조는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으로

 박정희식 개발독재에 대한 추억이  국가주의와 애국주의로 남아있다. 


노동조합이나 민노총에 대한 매도.  정규직 비난 등이 이들에게 공통적인 신념이다.  




강진구의 고전으로 보는 노동이야기](11)노동현실 망각 재벌 편들기, 아Q의 ‘허위의식’이 드리워져 있다

강진구 노동전문기자 kangjk@kyunghyang.com 2019.01.04 17:08:57 

루쉰 ‘아Q정전’



루쉰의 소설 <아Q정전>의 시대 배경인 1911년 신해혁명 당시 봉건착취와 외세침략에 시달리던 중국 사회의 모습(위)과 2016년 5월 서울 현대차 사옥 앞에서 영정을 들고 원청인 현대차의 노조파괴 행위를 규탄하는 금속노조 유성기업 지회 조합원들. 김정근 기자 jeongk@kyunghyang.com


재발에 관대·노조엔 가혹한 태도는 아Q의 ‘강한 사람 추종’ 연상


재계 최저임금 깎기 시도, 일부 비정규직 애국심·반노조정서 이용


중국 작가 루쉰의 <아Q정전>(1921)에 등장하는 주인공 아Q는 날품팔이 노동자다. 온갖 차별과 멸시를 받으며 살지만 자존심이 강해 절대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실 그의 자존심은 불굴의 용기가 아닌 허위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Q는 현실의 승리보다는 자기기만과 환상을 통해 정신승리에 안주한다. 그러다 보니 억압적 권력에 직접 저항하는 대신 자신보다 힘이 약한 사람을 괴롭히거나 엉뚱한 곳에 화풀이하며 자신의 우월성을 확인받고 싶어 한다.


 이 점에서 아Q정신은 봉건적 착취와 외세의 침략에 시달리면서도 현실 개선에 관심이 없었던 약 100년 전 무기력한 중국인에게만 있었던 게 아니다. 부당한 차별과 모욕의 피해자이면서도 이를 애써 외면하거나 문제로 느끼지 못한다면 누구나 아Q정신을 의심해볼 만하다.


루쉰의 작품 속에서 아Q는 인격을 가진 노동자가 아니라 노동력을 가진 상품으로 거래될 뿐이다. 그는 웨이짱이라는 시골 마을에서 일정한 직업 없이 보리 벨 때가 되면 보리를 베어주고 벼를 찧을 때면 남의 벼를 찧어주며, 어떤 때는 배의 노를 젓기도 했다. 일거리가 좀 오래 있을 때면 주인의 집에 기거하다가 일이 끝나면 가버렸기 때문에 사람들은 바쁠 때나 그를 기억해내곤 했다. 


아Q의 과거 행적에 대해 아는 사람도 없었지만 굳이 관심을 가질 이유도 없었다. 심지어 그의 본명을 아는 사람도 없다. 아Q는 집도 없어 토지신을 모신 사당인 토곡사에서 살았다. 


특별한 근력도 기술도 없는 그는 일손이 부족할 때 언제든 불러서 허드렛일을 시킬 수 있는 존재에 불과했다. 아Q의 나이는 서른 살이다. 지금의 노동현실에 비춰보면 취업이나 결혼은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고시촌 등 열악한 주거환경 속에 아무런 희망도 없이 불안정 노동시장을 떠도는 청년 비정규직 노동자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루쉰의 작품 속에서는 아Q에 대한 동정이나 연민의 시선을 찾아보기 어렵다. 루쉰은 아Q를 통해 자신의 계급적 이해관계를 망각한 채 부정확한 현실인식에다 부와 권력을 가진 사람과 자신을 동일시하려는 민초들의 허위의식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아Q는 자신에게 허드렛일을 시키는 웨이짱 사람들을 ‘시골 촌뜨기’라고 얕잡아 본다. 반면 자신은 세상물정에 밝아 성내에서 일어나는 일을 속속 꿰뚫고 있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그가 알고 있는 세상물정이란 기껏해야 웨이짱 사람들이 튀긴 생선에 듬성듬성 썬 파를 얹는 데 반해 성내 사람들은 잘게 썬 실파를 얹어 놓는다는 것 정도다. 현실인식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지식일 뿐이지만 아Q에게는 자신이 우월하다고 믿게 만드는 최면제로 사용된다.


아Q는 또 웨이짱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지역의 세도가이자 부와 권력을 가진 ‘짜오(趙) 타이예(지방현관의 존칭)’와 자신이 같은 성씨라고 자랑하고 다닌다. 


심지어 짜오 타이예의 아들이 ‘수재(秀才)’에 급제하자 “촌수를 따지면 내가 수재보다 3대나 위이니 이번 일은 나에게도 기쁜 일”이라며 거들먹거리기도 한다. 웨이짱의 보통 사람들이 주는 일거리로 살아가면서도 짜오가와의 동일시를 통해 일종의 정신승리를 추구한 것이다.


부정확한 현실인식에다 부와 권력을 가진 사람과 동일시하는 허위의식을 통해 대리만족을 추구하는 아Q는 우리의 노동현실에도 낯설지 않은 모습이다.


2014년 1월 한국노동사회연구소가 서울에 사는 비정규직 2344명에 대한 생활·의식 실태조사를 벌인 적이 있다. 

그 결과 비정규직들은 노후 불안과 함께 고용 불안정을 호소하면서도 민주당(16.6%)보다 새누리당(24.4%)에 더 높은 지지를 보였다. 


18대 대선에서 이들의 67%가 투표를 했고 박근혜 후보(36.4%)가 문재인 후보(22.3%)보다 14.1%포인트 더 표를 받았다. 


파견 확대, 쉬운 해고, 기간제 사용기간 연장 등 고용 불안정을 심화시키는 입법을 추진한 정치세력이 더 높은 지지를 받은 것이다. 

조사 대상 비정규직들의 평균연령은 52세로 법정노동시간보다 5시간 많은 주당 45시간을 일하면서도 급여는 월 133만원에 불과했다.

 이들은 사회적·경제적 지위는 별 볼 것 없지만 대부분 산전수전 다 겪은 아Q처럼 세상물정에 환한 다변가들이다. 


[이유 분석]  (1) 개발 독재 잔재 (2) 국가주의 애국주의 (3) 노동조합 매도 (4) 정규직 비난 

하지만 이들의 기억은 1970~1980년대 개발독재시대 고도성장의 기억에 멈춰져 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그들의 기억처럼 기업의 성장은 노동자들의 숙련과 소득 증가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들은 외환위기 이후 자동화에 기초한 수출형 조립산업이나 단순 서비스 위주로 산업이 재편되면서 비정규직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숙련이나 소득 증가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쉽사리 인정하지 않는다. 

여전히 이들에겐 수출 대기업을 위해 노동자들은 희생해야 하고 기업들은 일자리 창출과 임금 증가로 보답하리라는 믿음이 있다. 자연스럽게 파업은 매국이고, 고분고분하지 않은 노조들은 국가 발전의 최대 걸림돌로 생각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우리 사회 가장 밑바닥에서 생활하는 일부 비정규직들이 자신의 계급이해에 배반하는 정치성향을 보인 것은 자신의 안정적 일자리를 철밥통 정규직 노조가 빼앗고 있다는 생각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양대 노총의 거센 반발을 무릅쓰고 고용 유연화 정책을 밀어붙인 박 전 대통령과 새누리당을 통해 이들은 일종의 정신승리를 추구했다고 볼 수 있다.


재계와 자유한국당, 친재벌 보수언론들이 지난해 마지막 날까지 대놓고 최저임금법 시행령 개정안에 반대하는 여론몰이에 나설 수 있었던 것도 같은 배경이다. 

자영업자와 중장년 비정규직들의 애국심과 반노조 정서를 등에 업고 ‘일 안 하고 노는 유급휴일에도 최저임금을 줘야 하느냐’는 가짜뉴스로 월 174만원의 최저임금을 148만원으로 깎으려는 시도를 했던 것이다.


 최저임금 논쟁은 이 점에서 현실인식을 바로 하지 않으면 누구나 아Q가 될 수 있다는 교훈을 준다.


루쉰의 작품에서 아Q는 봉건적 착취를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한 짜오가로부터 온갖 굴욕을 당하면서도 단 한번도 저항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아Q는 자신의 성이 짜오라고 자랑하고 다니다 짜오 타이예에게 불려가 따귀를 맞고 띠빠오(하급관리)로부터 일장 훈시를 들은 뒤 술값으로 200문(文)을 물어줬다.

 또 짜오가에 일을 하러 갔다가 젊은 과부 우마에게 무릎을 꿇고 구애를 하다 성추행범으로 몰려 노임을 받기는커녕 막대한 손해배상에 입고 있던 옷과 털모자, 이불까지 전당 잡히고 알거지가 되기도 했다.


아Q는 이 일이 있은 뒤로 웨이짱 마을 어디에서도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다. 일종의 블랙리스트에 오른 셈이다. 

반면 짜오가는 악행을 정화하기 위한 푸닥거리 명목으로 아Q로부터 받아낸 향이나 초를 고스란히 쌓아뒀다. 아Q의 해진 옷은 장차 태어날 아기의 기저귀감으로 사용됐다. 

막대한 이익잉여금을 투자 대신 사내유보금으로 쌓아두고 계열사 일감 몰아주기를 통한 편법상속에 열을 올리는 한국의 재벌들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하지만 한국의 아Q들이 그렇듯이 루쉰의 아Q 역시 짜오가가 아니라 자신의 일자리를 빼앗은 샤오D를 보고 눈이 뒤집힌다. 아Q는 “쇠사슬로 네 놈을 후려치리라”고 소리치며 샤오D와 멱살잡이를 벌이지만 싸움은 쉽게 끝나지 않고, 웨이짱 사람들은 “거 참 꼴 보기 좋구나”라며 한마디씩 거든다.


이처럼 짜오가에 말 한마디 못하면서 웨이짱의 가장 밑바닥에서 생활하는 샤오D와 드잡이를 하는 아Q의 모습은 재벌들의 편법적인 부의 축적과 상속에 무관심하면서 민주노총 얘기만 나오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악성 댓글러들과 모습이 겹쳐 있다.


2011년부터 무려 8년간의 부당노동행위에 시달리다 지난해 9월 퇴사한 유성기업의 한 50대 퇴직자가 자살한 사건을 다룬 기사에는 ‘한국의 아Q’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댓글들이 달렸다. 


이들은 벌써 2명의 목숨을 앗아간 유성기업 부당노동행위에 현대자동차가 개입돼 있지만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고 있다는 사실엔 관심도 없다. 오직 민주노총만이 문제다. 


“민노총아 고인에게 부끄럽지 않나. 얼마를 받고 싶은 건지. 벌써 8년이 되어가는구나. 기륭전자 생각나네. 기업도 망하고, 노동자도 망했네.” “문 닫으면. 노사 모두 조용하겠네요. 공장, 대지 팔고 재고품도 팔아 퇴직금 주고 손 터는 게 사업주 만수무강 비결.”



4조5000억원대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사건에 대해서도 한국의 아Q들은 엉뚱한 곳으로 분노를 표출시키고 있다. 


이들은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의 편법 경영승계와 수천억원의 국민연금 손실 사태에 대한 진상규명보다 주가 폭락 방지와 경제 안정을 위해 적당히 넘어가길 바라는 ‘노예근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아주 나라 말아먹네. 검찰이 삼성 건들면 코스피 1500은 따놓은 당상이네.” “그만 좀 물고 뜯어라. 경제 40%를 벌어들이는 기업 자꾸 잡으면 결국 누구 손해냐.”


2016년 1월16일 뉴욕타임스는 ‘<아Q정전>을 차용한 중국 엘리트들에 대한 비판’이란 기사에서 “중국 공산당이 관리하는 ‘50센트당’(유급 댓글부대) 이외에도 아Q와 같은 자발적 댓글부대들이 중국의 엘리트 권력을 지탱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재벌들에 관대하면서 노조에 가혹한 한국적 아Q는 뉴욕타임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한국의 재벌권력들을 지탱하는 자발적 댓글부대들이라 할 수 있다. 

새로운 변화를 거부하고 자신의 계급적 이해 대신에 강한 사람과 동일시하려는 한국의 아Q들이 내세우는 애국심은 루쉰의 ‘아Q정신’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아Q정전’을 쓴 중국 작가 루쉰.




루쉰의 작품에서 아Q는 짜오 타이예 치하의 가장 큰 피해자라 할 수 있지만 외세나 혁명에 의해 봉건질서가 무너지면 더 큰 혼란이 올 것을 우려해 전통적 질서에 안주한다.


 이 때문에 아Q는 일본에서 공부하다 변발을 자른 채 나타난 ‘치엔(錢)가’의 큰아들을 ‘가짜 양귀신’이라고 부르며 경멸한다. 하지만 혁명당이 상륙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Q는 양귀신을 찾아가 혁명당에 가입하려다 거절당하고 결국은 도적떼로 몰려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아Q는 형장으로 끌려가면서도 누구를 원망하기보다 제대로 된 장송곡 하나 불러보지 못하고 죽는 것이 억울할 뿐이다. 제대로 된 현실인식 없이 자존심만 센 채 저항할 생각 한번 못해보고 비굴한 삶을 살다 최후를 맞은 아Q의 죽음은 딱히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없다. 그래서 아Q의 죽음엔 애도도 분노도 하기 힘들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901041701005#csidx67d2e0703f8f33a8c08a2c6de062ea8



루쉰의 본명은 '주수인'씨이다. 

30년 전에 읽은 루쉰의 '고향'이라는 소설은  '아큐정전'과 더불어 지금도 인상깊게 남아있다. 

'고향'이 얼마나 어떻게 변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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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kjung Kim

August 29, 2014 · Edited ·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비판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주류 경제학에서는, 효용성, 유용함, 유용성= 유틸리티 단어에 대해서 왜 무반성적으로 쓰냐고 정운영 선생에게 물은 적이 있다. 마르크스의 가치 Wert 개념을, 사용가치 단어를 꼭 쓰자는 게 아니다. 적어도 utility 개념이 가지는 한계는 계속해서 물어야 할 것 아니냐 ? 고 물었다. 16년 전 대화다. 정선생님의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 "밥그릇 때문에 그렇지 " 조금 학술적 답변을 바랬던 나로서는 약간 충격적이었다. 선생 청바지차림 파격처럼. 


토마스 쿤의 연구자 패러다임에 의해 연구주제와 명제, 주장이 달라진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밥그릇"이라는 막말을 해버린 것 같지만, 그 속내는 똑같다. 경제학 주류가 맞다, 틀리다, 마르크스 가치 개념이 맞다 틀리다 이것보다 적어도 그 전제들에 대해서 칼날을 갈아 도전해야 한다. 이게 도그마와 싸움이고, 그 전제들에 기초해 있는 정치 경제 문화적 주장들과 다른 대안과 창조적 아이디어를 내는 방법이다.

당연히 옳다고 믿는 것, 혹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늘 도전할 필요가 있다.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 답변을 할 시간이 점점 더 가까와지는데 해는 서산에 걸렸다. 내 마음이 더 바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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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kjung Kim

October 26, 2012 · 




관중 이야기 - 관중의 정치관은 근대의 칼 마르크스와 유사한 점이 있다. 



물론 관중은 통치자 입장에서 마르크스는 피지배 노동자 관점에 서 있다는 것은 서로 다르다. 마르크스가 <독일 이데올로기>라는 책에서 인간의 새로운 욕구는 기본적인 생활과 물질적인 기초요소들 (의식주)이 해결되어야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플라톤 Platon 의 <공화국 Republic>, 고대 아테네의 도시국가의 이상적 모델을 그린 책에서도 동일한 이야기가 나온다. 



마르크스는 유물론자고 플라톤은 관념론/이상주의자라는 구분은 틀린 이야기이다. 이건 정치의 기본이다.



관포지교 성어로 유명한 관중의 정치 철학 (당시는 제나라 인민을 다스리는 통치자로서 관점, 요새 유행하는 governance의 기조)은 의식족, 지예절. 창름실,지영욕이다. 



관중은 정치하는 군주가 백성들더러 예의가 없다고 (무식하다고) 비하하지 말고, 군주가 할 일은 인민의 창고에 쌀을 채워주라고 말했다. 



먹을 음식, 입을 옷이 충분히 있어야만 주민들이 그들이 속해 있는 사회체제의 법률,제도를 존중하게 된다.(개인적인 예의범절만을 이야기한 게 아니라, 예를 안다는 것은 그 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문화 체제를 안다는 것임)



그리고 창고 (원래는 창름)에 곡식이 차야 있어야 주민들이 공동체 속에 살면서 명예가 뭔지, 부끄러운 행동이 뭔지를 알게 된다는 것이다. 


현대적으로 풀이하자면, 예절에서 예는 사회경제 체제이고, 절은 사회적 풍습/관행 등에 해당한다. 영욕도 역시 단순히 개인윤리가 아니라, 공동체 주민, 시민으로서 갖춰야 할 덕목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관중이 살았던 중국 춘추전국시대 (전쟁 와중)에는 지금처럼 시민의 덕목이라고 할 수는 없고, 피지배계층의 의무가 더 많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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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개념은 역사적으로 늘 변화 진화 투쟁해 오고 있다. 좌파는 우파보다 자유주의를 더 알아야한다.


맑스 이야기만 하면 식상하고, 맑스에 대한 재평가를 해야 하고, 현대적 해석을 해야할 때, 구절이나 소개시켜주고 그러면 재미도 떨어지고 해서, 유럽에서 원형 자유주의자라고 일컫는 존 로크의 사례를 들고 마칠까 한다.

 

한국 좌익이나 공산주의자들이 영국 의회의 발생과 역사를 모르면, 왜 서구좌파들이 의회주의에 당하고 있고, 그 제도와 법률투쟁에서 얼마나 힘겨워하고 있는가를 이해할 수 없다 본다. 의회주의 비난하고 도망간다고 해결될 일은 이제 없다고 본다. 


존 로크는 세계사에서 등장하는 (유럽 중심으로 씌여진 이 모든 세계사 교과서) 1688년 제 2차 영국혁명 (소위 명예혁명)을 가능케 한, the Old Whig (올드 휘그당) 당의 정치 수장 쉐입즈베리 (Shaftesbury) 의 정치적 이론가들 중에 한 명이었다. 제임스 티렐 (Tyrrell)이라는 이론가와 더불어 소위 옥스포드 출신의 당대 내노라하는 엘리뜨였다.  이 세 사람이, 당시 왕정복고를 외치는 보수당 (the Tory)과 맞서서 정치 투쟁을 벌였다. 이 올드 휘그당의 정치적 목표는 영국 의회의 권한을 왕실보다 더 크게 하는 것이었다. 


1669년 경, 존 로크가 쓴 카롤리나의 기본헌법 (The Fundamental Constitutions of Carolina)에 보면, 존 로크가 영국 국회의원의 자격조건을 명시했는데, 500 에이커(Acre: 1 acre는 1227평) 이상 토지(61만 3천 500평)를 소유한 영국 중농 신사 (the English Gentry 계급)로 제한합니다. 그리고 투표 권한이 있는 자는 50 에이커 이상의 토지(6만 1350평)를 소유한자로 국한시킨다. (1 에이커는 소 한마리가 해 떠서 질 때까지 경작할 수 있는 넓이의 땅이다)


초창기 근대 유럽에서 (정치적) 자유 개념은 '토지 소유'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따라서 정치적 자유를 논할 때는 반드시 '민사' 소유권과 결부시킬 필요가 있다. 


영국을 포함한 유럽에서, 소위 여러가지 시민혁명이라고 기술되는 영국혁명, 프랑스 혁명, 미국 시민 혁명 등에서, 자유개념이란, 그리고 의회의 형성과정은, 이렇게 철저히 토지 등 자산을 얼마나 소유하고 있느냐와 아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사회과학적 자료를 무시하고, 아주 거칠게 말해서, 아주 근본적 입장 취하자면, 2007년 지금 한국이나 미국, 영국, 17세기와 무슨 큰 차이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회에 입성하는 자들의 계급 계층적 성격을 보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한국 정치사에 국회는 미국이나 유럽, 일본에서 본 떠 이식된 제도이다. 앞으로 아마 100년은 이 의회라는 귀신과 물귀신 작전을 써가면서, 좌익이 악몽을 꾸어가면서 '자유'의 그 내용을 채워나가는 게임을 벌여야 할 것이다.

 

왜? 누구를 위해서? 이 물음에 대답하면서, 그 자유의 내용과 함의를 다르게 다른 모양으로 만들어 나가야 하는 싸움이야 말로 바로 진보와 좌파를 자처하는 자들에게 놓인 지겨운 싸움인 것이다.



2008.07.07 12:53

"자유" 는 "좌빨"의 엑기스!... "촛불데모"가 준 자유는?

원시 조회 수 952 댓글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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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데모는 우리에게 무슨 자유를 가져다 주었는가?

(자유는 정치적 좌파에게 가장 고귀한 이념)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단어, 인생 끝나도 개념정의 못하고 갈 단어 "자유"에 대한 메모


1. 자유는 무엇인가? 누구의 자유인가? 자유의 주체를 밝히는 게 현대 정치 좌파가 할 일!


자유는 '스스로 말미암다' '스스로 자기 삶의 출발점과 여정 그 결과를 책임지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사실 새롭지 않다. 누구나 "난 자유인이다. 난 자유롭고 싶다"고 일상에서 외치지 아니한가? "명바귀가 퇴진해야 내가 자유롭다. 안전한 쇠고기, 광우병 위험이 없는 쇠고기를 먹고 싶다. 이런 마음의 자유 (권리를 포함하는)도 있다. 어쩌면 자유는 궁극적으로 좌파가 실현해야 하고 발전시켜야 할 정치적 목표이고 가치이기도 하다. 


자유는 어떤 고정된 달이나 해가 아니라,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별, 우리의 정치적 욕구 (Desire)이다. 이 욕구는 말 정의가 재미있다. 욕구는 De (떨어지다 멀리) + Sire (star: 별)로 구성되어 있다.  [요새 욕망정치라는 말을 자주 쓰던데, 정확한 단어 사용은 아니다. 새로운 욕구의 발견이라는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해석되는게 맞다고 본다] 영어 단어의 어원을 언급한 이유는, 욕구란 저 멀리 떨어진 별처럼 저기 반짝여 우리에게 보이지만, 다가갈 수 없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과 같다는 뜻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일단 이렇게 정의하고자 한다. 자유는 수많은 별이며, 자유는 우리의 정치적 욕구이다.


2. 자유를 만끽하는 주인공은 누구인가?


정치적 자유주의(Liberalism, 최근의 Neo-Liberalism)에서 '자유' 개념은 이윤추구를 자기 운동의 목적으로 하는 자본의 자유와 연결될 때가 많다. (물론 후기 자본주의나, 사회복지국가 체제에서는 부분적으로 또 제도적으로 자본과 정치적 자유 사이에 여러가지 매개 장치들이 있다) 이러한 자본의 자유는 일하는 사람의 정신적 육체적 자유정신의 발현을 목적으로 하는 운동이 아니라, 일하는 맨 정신의 노동자의 그 정신을 피폐해 왔고, 하고 있고, 앞으로 그럴 확률이나 개연성도 높다. 이러한 자본이 생활하는 장소, 촛불시민의 광장이 아니라, 자본의 자유를 허용하는 시공간이 바로 "시장" (한국의 5일 장터의 의미가 아닌) 의 자유이다. 그 이윤 마진 크기의 최대화 극대화라는 시장원리를 자유 정신으로 삼고, 그것을 사회구성원리, 다시말해서 전체 사회구성원의 삶의 원칙으로서 수용하게끔 만드는 것이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결합이다. 

3. 자유와 평등에 대한 오해


자유도 평등도 순수한 개념어는 아니다. 역사적 맥락에서 형성된 한정된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동일한 단어 자유, 평등을 쓰더라도 '시 공간이 다른 주체들의 역사적 경험을 담고 있는 자유, 평등' 개념을 지시할 때가 많이 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에서, 자유, 평등, 우애(연대)의 구호는, 당대 프랑스 부르조아 (영국과 프랑스 사례는 다르다. 프랑스 경우, 영국과 같은 18 ~19세기 산업 자본가 계급보다는, 도시 상공인, 변호사, 언론인, 고등교육을 받은 지식인 등을 지칭)의 자기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계를 표출했다. 그 자유, 평등, 박애라는 구호가 프랑스의 전 여성, 노동자, 소농, 비-프랑스인, 유색인종, 소작인 등의 자유, 평등, 박애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

 

자유와 평등은 대립항이 아니다.


우리는 자유와 평등이 서로 대립된다고 배웠다. 그러나 이 말은 누구의 자유인가, 어떤 평등인가라는 질문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빠뜨리고 있다. 혹은 그 자유와 평등을 대립항으로 놓고, 자유주의 (+자본주의)는 자유를 더 강조하고, 공산주의는 평등을 자유보다 더 중시한다고 주창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질문을 정확하게 던져야 하고, 누가 그 질문을 어떤 사유틀로 던지가를 따져 물어야 한다. 


이러한 자유와 평등의 대립은 부르조아 민주주의론자들이 만들어 낸 것이다. 맑스가 초지일관, <자본>에서 비판한 것은 부르조아 '자유, 평등, 박애' 개념이 '공허하다' '비어있다' 혹은 '허구 (등가교환이 아니라 부등가 교환이 발생하는 게 노동력 판매 시장이기 때문에)'라는 것을 비판한 것이다. 그러나 자유와 평등이 대립된다고 주창한 적은 없다. 


4. 소극적 형식적 자유 개념도 '투쟁'과 '살벌한 전투'를 통해서 성취되었다.


자유와 평등의 대립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초기 맹아 자유주의의 이론가 존 로크(Locke)로부터 최근 자유민주주의 (Liberal Democracy) 를 주창하는 사람들까지 다 자유와 평등을 대립시키곤 한다. 이러한 자유-평등 대립항 만들기는 공산주의자나 사회주의가 만든 게 아니라, 그 자유주의자들의 이론틀에서 유래한다. (신)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자유는, 사회로부터 고립된 추상적인 개인의 자유, 다시말해서 사회, 법, 국가, 관행 등 개인의 사유재산, 신체, 시민권리를 박탈할 가능성이 있는 것들로부터 (벗어나는) 자유이다. 이게 소극적인 의미에서 형식적 자유개념이다.  봉건제 왕권 타도 (전국의 토지는 왕실과 왕의 사유재산이다라는 명제)할 때는, 이 소극적 자유주의자 자유개념이 라디컬하고 진보적인 성격을 띤다. 물론 한국 87년 항쟁처럼 절차적 민주주의 (직선제 쟁취 등) 가치들과 소극적인 자유개념도 역사적 정치상황 하에서는 유의미한 정치적 자유개념이 되지만.


한나라당이 TV 토론회 (MBC 손석희 100분 토론, KBS 생방송 토론 등)에서 나와서 하는 경제관련 정책을 보면 "국가가 시장에 개입하면 안된다. 불가피한 예외 빼고. 혹은 국유화나 공공서비스는 효율성이 떨어진다. 그래서 사유화시키자. 경쟁을 강화시키자"는 논리 역시, (신) 자유주의자들의 '자유' 개념에서 나온 것이다. 이러한 한나라당식 '자유' 개념은 고전적 의미에서 '자유' 개념의 역사적 맥락과 투쟁은 다 제거하고, '자본가'와 '시장'의 자유만을 노래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권력내부에서 '국가'와 '자본'의 관계 형성은 이보다는 더 복잡하다. 

 

5. 소위 실질적 자유 개념은 다양하고, 채굴되지 않거나 가동되지 않은 원석. 새로운 자유 개념을 만들어 정치적 상식으로 만드는 것이야말로 정치적 좌파의 임무!


보다 적극적인 의미에서, 자유란, 일하는 사람들이, 자기네들이 생산해놓고도, 자기네들이 집을 지어 놓고도, 자기 집도 못가지고, 하루 8시간도 부족해서, 3시간씩 잔업하고, 그렇게 15년을 살아야 대도시에서 15평, 20평 아파트 하나 겨우 장만할 수 있는 게, 진정한 자유인가? 아 내가 자유롭게 일하고, 자유롭게 결정해서, 내 자유정신을 믿고 실천해서, 우리 공동 자산(생산수단이든지 1차 원료든지, 자연이나, 도로 등)을 특정 5%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90% 이상 되는 사람들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서, 집단적인 이성을 발휘하는 것이, 바로 자본의 자유보다 훨씬 더 나을 있지 않겠는가?


이외에도 자유는 여러가지로 규정될 수 있다. 길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본다면, "야 이세상에서 정말 자유롭고 싶다면?" "자유를 만끽한다면?" "네가 진정으로 자유롭게 된다는 의미는?" 이런 포괄적인 철학적인, 그렇지만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물음이 정치적 좌파에게는 중요하다는 것이다. 하루 7시간만 일하고, 1시간은 새로운 진보정당 정치에 참여할 자유, 주말은 일하지 않고, 자기 계발 시간을 확보할 자유, 자기가 일해 놓은 것을 반성하고, 남이 뭐라고 간섭하고 더 일해라 너는 이모양이야 이것 밖에 안되느냐는 식의 핀잔만 듣고 사는 노예가 아니라, 진정으로 자기 삶의 자기 결정권을 가질 자유 등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2008년 정치적 시민의 자유를 획득하고 지키기 위해서 밤 7시부터 새벽 5시까지 새벽별, 달님보기 운동, 비맞기, 물대포 끌어안기, 각종 다종 다양한 난이도의 '허들'을 뛰어넘는 시험을 보고 있는 게 현실이다. 노동시간보다 데모하는 시간이 길어진 것도 사실이다. 이것은 불가피한 비상시국이기 때문에 할 수 없다. 


6. 자유, 우리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이 문제와 결부된다.

그리고 지난 30년 동안, 자유를 외치다가 산하한 분들이 많다. 열린우리당 386처럼, 원희룡처럼 그 자유는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 의 자유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이명박처럼 한미간의 '자유 무역'이 자유의 핵심이다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자유 개념 정의가 다르기 때문에 투쟁하는 것이다. 촛불 국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현실 정치 투쟁은 정치적 개념 투쟁을 동반한다. 왜냐하면 이 촛불데모는 단지 개싸움이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떤 개념 벽돌로 우리 집을 지을 것인가라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현재 투쟁은 과거 미래 투쟁과 동시에, 3차원으로 펼쳐지고 있기도 하다. 인간의 투쟁은 동물이 밥 놓고 싸우는 밥그릇 투쟁만은 아니고, 과거 현재 미래 3차원의 투쟁을 동반한다. 우리는 통합민주당 386들과 한나라당내 차기를 노리는 소장파 원희룡처럼, 과거에 한 때, "자유여, 민주여 만세"를 외친 사람들을 그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침팬지, 오랑우탄, 원숭이 아기들은 다들 비스무리하게 보인다. 그와 같은 이치이다. 그들도 한 때 분명 '자유'를 외쳤다. 독재에 맞서는. 그러나 지금 그들은 자본주의적 시장의 '자유'를 흔쾌히 박수치고 있는 것이다.


7. 자유 개념은 역사적으로 늘 변화 진화 투쟁해 오고 있다. 좌파는 우파보다 자유주의를 더 알아야한다.


맑스 이야기만 하면 식상하고, 맑스에 대한 재평가를 해야 하고, 현대적 해석을 해야할 때, 구절이나 소개시켜주고 그러면 재미도 떨어지고 해서, 유럽에서 원형 자유주의자라고 일컫는 존 로크의 사례를 들고 마칠까 한다.

 

한국 좌익이나 공산주의자들이 영국 의회의 발생과 역사를 모르면, 왜 서구좌파들이 의회주의에 당하고 있고, 그 제도와 법률투쟁에서 얼마나 힘겨워하고 있는가를 이해할 수 없다 본다. 의회주의 비난하고 도망간다고 해결될 일은 이제 없다고 본다. 


존 로크는 세계사에서 등장하는 (유럽 중심으로 씌여진 이 모든 세계사 교과서) 1688년 제 2차 영국혁명 (소위 명예혁명)을 가능케 한, the Old Whig (올드 휘그당) 당의 정치 수장 쉐입즈베리 (Shaftesbury) 의 정치적 이론가들 중에 한 명이었다. 제임스 티렐 (Tyrrell)이라는 이론가와 더불어 소위 옥스포드 출신의 당대 내노라하는 엘리뜨였다.  이 세 사람이, 당시 왕정복고를 외치는 보수당 (the Tory)과 맞서서 정치 투쟁을 벌였다. 이 올드 휘그당의 정치적 목표는 영국 의회의 권한을 왕실보다 더 크게 하는 것이었다. 


1669년 경, 존 로크가 쓴 카롤리나의 기본헌법 (The Fundamental Constitutions of Carolina)에 보면, 존 로크가 영국 국회의원의 자격조건을 명시했는데, 500 에이커(Acre: 1 acre는 1227평) 이상 토지(61만 3천 500평)를 소유한 영국 중농 신사 (the English Gentry 계급)로 제한합니다. 그리고 투표 권한이 있는 자는 50 에이커 이상의 토지(6만 1350평)를 소유한자로 국한시킨다. (1 에이커는 소 한마리가 해 떠서 질 때까지 경작할 수 있는 넓이의 땅이다)


8. 초창기 근대 유럽에서 (정치적) 자유 개념은 '토지 소유'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따라서 정치적 자유를 논할 때는 반드시 '민사' 소유권과 결부시킬 필요가 있다. 


영국을 포함한 유럽에서, 소위 여러가지 시민혁명이라고 기술되는 영국혁명, 프랑스 혁명, 미국 시민 혁명 등에서, 자유개념이란, 그리고 의회의 형성과정은, 이렇게 철저히 토지 등 자산을 얼마나 소유하고 있느냐와 아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사회과학적 자료를 무시하고, 아주 거칠게 말해서, 아주 근본적 입장 취하자면, 2007년 지금 한국이나 미국, 영국, 17세기와 무슨 큰 차이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회에 입성하는 자들의 계급 계층적 성격을 보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한국 정치사에 국회는 미국이나 유럽, 일본에서 본 떠 이식된 제도이다. 앞으로 아마 100년은 이 의회라는 귀신과 물귀신 작전을 써가면서, 좌익이 악몽을 꾸어가면서 '자유'의 그 내용을 채워나가는 게임을 벌여야 할 것이다.

 

왜? 누구를 위해서? 이 물음에 대답하면서, 그 자유의 내용과 함의를 다르게 다른 모양으로 만들어 나가야 하는 싸움이야 말로 바로 진보와 좌파를 자처하는 자들에게 놓인 지겨운 싸움인 것이다.


9. 촛불 데모에서 왜 대의제 '의회정치'나 '대통령제도'가 작동되지 않고 무기력한가? 


 답은 복잡하지 않다. 국회의원들이 다수 '평민'의 '시민자유'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고소영, 강부자, 3% 땅부자들이 더욱더 부자가 될 '자유'를 보장해 주기 때문에, 시민들이 '의회'도 '대통령제도'도 신뢰하지 않는 것이다. 


민주주의도 그렇지만, 자유도 역시 피를 먹고 자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촛불데모는 '무슨 내용의 자유'를 만들어내고 획득하고 있을까? 



 

최한솔 1.00.00 00:00

공력이 대단하십니다 ;_; 저는 단순히 '내가 나일 수 있는 권리'로 정의합니다. 호혜적 이유로 타인의 자유를 증진하고자 노력하고요. 결국, 미친듯이 주변과 싸워대는 결말이 기다리더군요 -_- 왜이리 내 삶의 주도권을 가져가고 싶어하는 남들이 많은지.

 댓글

원시 1.00.00 00:00

TJL 님이 쓴 <'자유'에 대한 착각과 '분배'란 말에 대한 거부감에 대하여 [3] TJL > 글 보고 답 글 형식으로... 또, 촛불데모에 참가하신 분들...그냥 맘 편히 촛불데모가 가져다 준 <자유>가 뭘까요? 위에 제 글과 상관없이요. 걍 아무렇게나 붓가는 대로 마음 가는대로 답 좀 주세요~

 댓글

ochlos 1.00.00 00:00

긴 글...싫습니다. 글이든 말이든 ...짧게...!

 댓글

노엣지 1.00.00 00:00

원시님 요즘삘받으신듯.잘 읽었습니다.갑자기 유투노래 듣고싶어지네요.디 자 아 아아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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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이꾸! 1.00.00 00:00

원시 님.. 생각좀 해보고요... 사무실에서 눈치! 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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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K 1.00.00 00:00

원시님 도배금지~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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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 1.00.00 00:00

여러분 도와주세요 "촛불데모가 준 자유" 머예요? 한 줄로 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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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서민 1.00.00 00:00

차도는 '차만'다니는 길이 아님, 광장은 시민들이 모이는 곳임. 촛불은 밤에 켜야 멋짐. 야참은 삼각김밥이 괜찮음. 밧줄만 있으면 버스도 끌고다님. 막으면 돌아가면 됨. 음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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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JL 1.00.00 00:00

잘 읽었습니다. 전 그저 그들이 말하는 '자유'가 시장의 자유와 개인의 자유를 혼동되게 마케팅(?)되고 있다고 여겨져서 써본 글이었습니다만, 이렇게 또 길게 썰을 풀어주시네요. 촛불데모가 준 자유라면, '정치적 무지 강요'에 대한 자유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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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애 1.00.00 00:00

비판할 자유. 제가 정말 평범한 언니야들이 많이 모이는 사이트에 자주 들락거리는데, 대개가 그렇거든요. 대통령이나 정부가 하는 일을 그냥 믿고 따라야 하는 줄 알았다고들 얘기해요. 비판하거나 이의를 제기하거나 불신하는게 국민으로서 해서는 안되는 일이고 국익에 큰 해가 된다고 은연중에 믿어온 거 같다고. 비판할 자유, 믿지않을 자유, 불복종할 자유. 어느 정도였냐면 처음 가두집회한 다음날 왜 시민들이 청계광장 뒤로 나와서 경복궁역 앞 점거한 적 있죠. 그날 전경들이 총을 탕탕 쏠 거 같아서 무서웠대요. 거리로 나가본게 처음이라고..^^ 그렇게 하라는 대로 하는게 익숙했던 사람들이 이제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았다는게 무서워요. 진보신당 진짜 잘해야 할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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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한솔 1.00.00 00:00

너무 모호할지 모르겠지만 개인으로 존재할 자유를 찾아가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등떠밀어서 나온게 아닌, 자기 발로 걸어나왔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나요? 대책위가 '지도'하고자 했을때 사람들의 반응이 기억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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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 1.00.00 00:00

파애님과 한솔님 공통얘기가, 비판의 자유, 자기 목소리를 낼 공간을 찾는다. 외부 지시나 동원보다는 스스로, 혹은 커뮤니티와 더불어, 친숙한 집단과 같이 일체감을 느끼고 싶다. 이거네요?   내 목소리! 를 찾아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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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진보를 말하기 전에 "진보"라는 말의 의미를 한번 다시 생각해보자는 취지에서,


[진보개념] 손석희-노회찬 인터뷰 중에서


 글쓴이 : 원시 등록일 : 2004-04-20 21:13:07 조회 : 801 


진보라는 말이 나왔길래 잠시 생각해봅니다. 


⊙ 노회찬 / 민주노동당 사무총장 : 진보라는 말은 상대적 개념입니다. 

그래서 우리 시대, 이 시대 진보는 무엇인가 이런 점에서 봐야된다고 보는데 민주노동당이 추구하고 있는 진보적 가치라는 것은 민족 문제에 있어서 그리고 분단문제 해결에 있어서 평화, 절대적 평화적 방식과 또 이 평화를 조속히 실현하는 문제, 그리고 우리 사회의 구조 문제에 있어서 평등을 지향하는 것, 특히 사회적 재분배를 통한 평등의 실현을 중시하고 그리고 더 많은 민주주의, 민주화의 진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국가보안법이나 여러 가지 반인권적인 제도와 관행들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에 보다 더 많은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것, 이 세 가지가 진보정당으로서 민주노동당이 지향하는 가치다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손석희 시선집중 프로그램> 



 노회찬 사무총장님이 쓰고 있는 <진보>라는 것은, 정치적 가치로 좁게 쓰였다. 


우리는 진보라는 말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 것이고, 어떠한 고민을 더 해야 하며, 어떻게 발전시켜야 하는가,잠시 생각해 봅니다. 


첫번째, '진보'라고 했을 때는, __________보다 낫다 _________보다 향상되었다. 라는 말로도 쓰이고, 예를 들어서 낫보다는 트랙터가 벼베기를 더 빨리 할 수 있고 많이 할 수 있다. 생산성의 향상을 가져온 기술의 발달 결과로, '진보'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석유를 써야 하는 트랙터 도입으로 엔트로피와 공기 오염은 증가함으로 뭐 그게 '진보'냐? 라고 다른 각도의 '진보' 기준을 가져다 댈 수도 있습니다. 이 논의는 다른 논의이므로 여기서 배제하고요. 


진보는 '역사적으로 ____________발전했다."라는 개념으로 사용되는데, 그럼 '진보'의 반대말이 무엇인가? 지금 세계 역사의 방향은 어디를 향해 가는데 (종착역) 그런데, 이런 진보의 방향과 역행하는 사회 세력은 누구냐? 이런 부분을 염두해 둬야 한다고 봅니다. 한국에서 '진보'의 반대 세력은 누구입니까? 라고 물을 수 있겠지요? <문제> 진보의 기준이 뭐냐는 것이 우선 문제가 될 것 같습니다. 


엄밀하게 정의하고 '진보'를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은 아닙니다. 단지 문제가 되는 것은, 역사 발전기준이 뭐냐? 이런 질문에 답변을 해야 하는 부담은 분명히 있는 것이고, '진보'라는 말은 '역사적으로 실현되는 이성'이라는 강한 전제 위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부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이성>이라는 주제 자체가 무의미한 논쟁은 아니라고 봅니다. 적어도 어떤 시대정신에 대한 통찰은 할 수 있으니까요. 두번째 노선으로 갈 수 있습니다. 역사적 이성이나 어떤 역사 진보의 '기준'을 제시하지 않고도, 사회정의나 자유/평등/자립/통일 등 사회정치 운동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도 그 운동의 기본적 이념은 윤리적 전제들을 깔고 있기 때문에, '진보'와는 다른 형태로 이념에 대한 정당화 연습도 해야 한다고 봅니다. 여기서 윤리라는 것은, 고정화된 삼강오륜과 같은 어떤 도그마가 아니라, 물질적-정치적 구조 변동이나 문화적 의식의 변화와 동시에 움직이는 인간의 판단의 기초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대안> 잠정적으로 전 '진보'라는 말을 가급적 구체적인 정치 용어로 바꿔서 사용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러한 정치적 주장과 정치적 서술들에 대한 윤리적 정당화 작업 역시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과학 science >에 대해서 간단히 언급합니다. 독일 말 번역어 Wissenschaft (인문과학, 자연과학 다 합친 말, political science 이런 것도 다 그런 맥락입니다) 


그런데, '민중적 입장'을 대변한다는 것이 '과학적'인가? 그럼 산수나 '자연과학'과는 어떻게 다른 '과학'인지를 말해줘야 합니다. 안 그러면, '과학'이라는 이름 하에 맑스-레닌주의 연구소 만들어 놓고 저질러진 실책을 다시 범할 수 있다고 봅니다. 물론 요새는 그 '과학 과학 하시던' 분들이 다 어찌된 게 한나라당 가 있고 (김문수 일당) 그 보좌관에다, 또 반대로 __대장님을 외치던 분들은 '열린 우리당 꼬마 수령님들'이 되어있더군요. 


그 과학의 결과 자칫잘못하면, 80년대 자칭 '과학적 사회주의'이름하에 지난 소련사회주의가 범했던 정치적 범죄 (특히 외교나 유 에스 알 내 소수민족 탄압은 거의 사회주의 이념과 정반대로 실천함...그 증거는 도서관 1 트럭분 책도 넘음)을 묵과하는 무기로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이미 사회과학에서는 과학이라는 말보다는, '증거' '논거' '통계' '사회적 필드 조사', 그리고 그 전제들을 문제삼는 '윤리학' '관점' '직관'등으로 대체되어 있고, 이런 주제들을 더 자세히 다루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80년대는 데모하느라고, 소련이나 중국 북한에서 수입된 것, 혹은 일본 공산당원들이 보던 책 번역해서 봐서 정신없이 무반성적으로 거기 씌여진 '단어'를 외웠지만, 이미 그런 단어들은 지난 100년간 세계사와 국제 정치사를 반영하기에는 너무 그릇이 적고 개념들은 폭발되었다고 봅니다.


 아직도 과학 외치시고, 그 과학이라는 형용사를 '사회주의'와 결합시키려는 분들은 오히려 '생물학' '천문학' '물리학' '지구과학' 등이나 '수학'을 배우셔가지고, 수학적 사회주의, 혹은 생물학적 사회주의 이런 단어를 쓰는게 낫다고 봅니다. 아예 정확하게 '예측'을 해버려야지요. 공리를 사용해서, 순서도로 알고리듬 만들어서, 답이 똑 떨어지게끔 말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의식과 동기, 규범을 수반하는 사회적 현상을 다루는 사회과학에서 '연역적 가설모델'은 분명 한계를 지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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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즘음 좌파와 우파의 기원부터 변화에 대한 성찰이 없습니다.
    진보와 보수도 어떻게 생겼고 변화해왔는지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러다 보니 정당마저 정체성이 없는 것을 추구하고 정치철학에는 나오지 않는 중도라는 말을 당연하게 씁니다.
    더 큰 문제는 자유와 자유방임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 그래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이해가 턱없이 부족한 것입니다.

    또한 근대국가의 출발에 대해서도 전혀 인지하지 못합니다.
    국가라는 것을 빼고 정치철학과 이념을 뺄 수 없는데 그것에 대해서도 너무 무지합니다.

    과학에 대한 공부는 마르크스의 한계와 오류를 뛰어넘어 그의 성찰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해줍니다.
    양자역학을 경험해보지 못했고, 진화론의 한계도 경험해보지 못했기에 마르크스의 성찰은 오히려 진보좌파를 진부한 집단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세상이 변하고 과학기술이 변했고, 신자유주의도 좌파와 우파적 기원이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 자연과학 (양자역학, 진화론 한계와 의미) 등과 마르크스 성찰과의 관계는 어떤 의미로 말씀하시는것인가요?

저 이딸리아 플로렌스(Florence) 지방에 살던 마키아벨리는,조선 성종이 죽은 해인 1494년, 프랑스 군대가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을 침략한 이후, "강성 이딸리아 " 구호를 외치고 <군주론>과 <리비에 대한 긴 강의 Discourses on Livy: 리비는 로마 제국 역사 연구가>를 썼다. 


많은 사람들이 마키아벨리즘을 피도 눈물도 없는 사악하고 비정한 정치행태라고 오해한다. 또는 마키아벨리즘을 권모술수 정도로 단순화시켜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마키아벨리에 대한 해석은 파편적일 뿐만 아니라 잘못되었다. 


역사가 리비 Livy 에 대한 긴 강의라는 책 "Discourse on Livy"에서 마키아벨리는 "머리가 하나인 군주보다, 머리 숫자가 여러개인 민중 people 이 더 현명하다"고 말한다. 보통 사람들에게 알려진 <권모술수 군주론>이 마키아벨리 사상의 핵심이 아니라,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보존과 번성을 위해서는 보다 많은 도시국가 시민들의 힘이 필요하다는 게 그의 정치적 제안이다. 민주주의 이론사에서 마키아벨리는 이태리 도시국가 수공업 장인들과 상인들을 정치 주체로 포함시킨 정치사상가로 파악한다. 15세기 근대 민주주의 이론의 원형이라고 보는 게 바람직하다. 


마키아벨리는 왕, 귀족, 상업 자본을 가진 자들만이 아니라 중산층 장인들과 상업에 종사하는 소자영업자들을 이태리 도시국가 시민 주체로 간주했던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이러한 여러 머리들이 한 개 머리를 지닌 군주보다 더 현명하다는 생각을 현대에 발전시킨다면 어떻게 될까? 흩어진 시민들의 정치적 지혜들을 하나로 모아내는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민주적 리더십'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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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03. 11. npp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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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동아일보 1월 2일자 신문인데. 헤겔을 유심론, 그와 반대되는 것을 유물론으로 대립시키고 (*사실 이 둘은 긴밀한 연관관계가 있는데, 저렇게 둘을 대립시키는 것은 그냥 조야한 이해임. 호남 영남 가르는 것처럼, 남한 북한 가르는 것처럼) 


동아일보 사설은 민족정신을 실현할 방법으로서 '사회진화'를 주장하는데, 그 사회진화의 밑바탕이 '인간의 인격'이라고 보고, 이러한 전제 하에서, 민족들하 '단결하라' '응집하라' 100년의 대계를 세워라. 이렇게 나아갔다는 것인데요. 사실 이러한 이야기는 헤겔(특히 우파적 해석, 독일 민족 정신을 강조한 보수 우파의 논리)와 유사합니다. 


미디어나 뉴스가, 철학,사회학,정치학,경제학 연구서는 아니지만, 주요한 개념어들을 나열하면서 '민족정신'을 강조한 대목이 굉장히 흥미롭습니다. 사회진화론까지 나오고. 이걸 누가 썼는지 궁금한데, 필자가 나와있지는 않네요.


동아일보가 '유물론'을 곡해했다는 것보다는, 당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이해, 보통 유물론이나 유물사관(역사관)이라고 했는데, 당시 독일에서 마르크스 해석의 권위자인 엥겔스와, 그 엥겔스 이후 카우츠키가 해석한 유물론이 아마도 일본이나 조선에서도 그대로 수용되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위에 제가 쓴 게, 동아일보가 유물론을 잘못 이해했다는 말의 취지는, 동아일보 사설이 그랬다는 게 아니라, 당시 여론에 인식된 '유물론' 자체와, (제가 생각하는) 마르크스 생각이나 실제 그의 주장이나 방법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사회현상이 마치 자연현상처럼 어떤 '철칙'이 있는 것처럼 서술한 것은, 마르크스에 대한 잘못된 이해라는 것입니다. 


당시 시대상은, 다윈 Darwin 의 <진화론>을 수용해서, 마르크스 자신도 물론 자본주의 사회 형성과정을 '진화'라는 개념틀로써 설명하고자 했지만, 이를두고 자연의 법칙과 사회의 법칙의 공통점이 '변증법 dialectics 인것처럼 해석하는 것은 오류라는 것입니다. 자연이나 자연과학에서 '법칙'개념과 사회나 사회현상, 혹은역사에서 '법칙' 개념은 서로 다르게 설명되어야 하니까요. 


그리고 마르크스나 사회주의자들의 '유물론'(materialism 이라는 단어를 마르크스는 실제 자주 쓰지는 않았지만)이 마치 정신이나 도덕이나 정서 이런 것들을 다 하이타이나 비누로 다 세척해버린 것처럼 이해하는 것도 마르크스에 대한 잘못된 독해입니다. 


유물론이야 요새는 그냥 일상 생활의 상식이고, 아이들도, 생물학, 지구과학, 화학, 물리학 배우고 그러니까요. (미국처럼 창조론이 과학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지만요).




(민족적 경륜 제 1 - 민족 백년대계의 요 )


하나의 민족의 계획이 필요하다는 주장. 그런데 1924년 조선은 무계획 상태다고 진단. <조선민족의 장래에 대한 계획이 무엇이냐?>고 누가 우리에게 물을 때에...교육과 산업의 진흥으로써 우리의 목적을 삼노라...라고 대답한다면...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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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전체의 의견이 하나의 행위 혹은 운동으로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응집해서 하나의 몸체(유기체로서 하나)가 되어야한다고 주장. 단결하라는 주장임. 이게 가장 오래된 진리 (낡은->이라고 씀)이고, 이 진리는 영원히 새로운 것이다. 


동아일보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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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맞춤법은 "우리는 이러고잇슬수업는" 소리나는대로 적었음을 알 수 있다. 한글 발음 및 표준화 작업의 역사...





당시 동아일보 주장은 1) 유물론자 비판 2) 헤겔 유심론 비판 3) 사회진화에서 (심리적 원인이 중요), 사회진화의 정도가 유고할수록, 인격적 이상의 세력이 사회의 진화의 도정을 결정하는 힘이다...


그렇다면 "인격적 이상" 이 무엇인가? ...를 <동아일보>가 말해야 하는데, 그게 뭐인지 애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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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다큐멘타리를 보다가. 내가 살았던 공간의 과거 역사에 대해서 참 모르는 것도 많고 새로 공부해야할 주제들도 많다. 조선시대 정치의 특성, 왕권과 신권과의 관계, 조선 왕조 관료제 사회의 특성에 대해서. 윤휴의 사형집행. 주자학에 대한 비판. 


윤휴는 양명학의 테제였던 "다른 일을 하더라도 가는 길이 같다, 이업이동도 (異業而同道 )"를 조선에서 실천했다면, 노론과는 다른 질서를 만들고, 조선군주제 사회에 또다른 정치체제 (Regime)를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한국 자본주의 하에서 정치적 상대자들은 다양해졌고, 내부적으로 다양한 직업들은 노동자 의식들을 더 분화시켰다. 그래서 주체적 조건을 고려한 정치적 조직양식은 '직업 동맹'의 성격을 띠어야 한다고 주장해오고 있다. 그런데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더니, 윤휴가 공부한 양명학 테제에 이런 말이 있었다. 그러니까 이미 15세기에 우리들의 정치적 지향점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는 정치적 선언이 있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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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한병철의 글처럼, '자본 capital' 혹은 '자본주의 capitalism'을 악마화하거나, '이성'을 갉아먹는 뛰어넘을 수 없는, 채찍을 든 '수퍼맨 사탄'으로 개념 정의하거나 전제하는 것은, 정치적으로도 철학적으로도 역사적으로 무의미하다. 특히 현실 인류의 삶에 대한 진단 도구로서는 무능하다.

- 1차,2차 세계대전을 경험하고, 서유럽 이성의 파탄 선언을 하고, 그 위기의 근본 원인이 데카르트,갈릴레이,뉴튼의 세계관에 있다고 판단한 에드문트 훗설 Husserl 보다 라디컬하지 못하다. 이 기사만 봐서는 그렇다.

- 그리고 시대적 배경은 다르지만, 자본이 주인이고 소비자는 노예가 된다는 이러한 한병철의 진단은, 세상을 바라보는 '급진적 뿌리'에서는 노자, 장자의 통찰력에 비해서는 무디고, 다이나믹 (기성 전통적 사고방식을 파괴하는 dialectics)이 약하다.

- 독일 학계의 어떤 계보, 예를들어 호르크하이머(Horkheimer)와 아도르노(Ardorno)의 <계몽의 변증법 >이라고 어렵게 번역된 "(서구 유럽의) 계몽주의의 역설적 대화와 운동" 이런 내용이나, 68세대 3 M (Marx, Mao, Marcuse) 중에 하나인, 허버트 마르쿠제가, 유럽과 미국-캐나다에서 노동자가 이제 더 이상 자본주의를 거부하는 대안의 혁명세력이 아니라고 선언하면서, 외부인 (국외자: outsiders)가 '부정적인 (비판적인) 사유'와 행동을 할 수 있는 새로운 주체들, 즉 대학생, 외국인 노동자, 가정 주부, 도시 빈민, 흑인 등이야말로 '반란'과 '혁명'의 새로운 주체들이라고 했다. 기존 공산당과 사회주의의 고루함과 45년 이후~70년대 초반까지 보여준 소련 사회주의의 '패권주의'와 '교조주의'에 염증을 느낀, 신 사회운동가들은 그 마르쿠제의 신-주체들에 대해 자연스럽게 공감했다.

한병철에게서는 이러한 신-주체, 그가 진단한 '자본'은 너무나 추상적이고 정치적 함의가 빈곤하고, 비역사적이긴 하지만, 만약 그 윤리적 도덕적 진단이 옳다고 하더라도, 마르크스가 했던 작업처럼, '자본주의'의 진화적 전개 과정에서 발생하는 신-주체들에 대한 탐구는 아직 빈곤하다.

- 아울러 인간의 '욕구'나 '열정 passion' 은 부정적이거나, 한병철처럼 수동적이거나 극복되고 윤리학이나 철학으로 세탁되어야 할, 정화되어야 할 "문제아" 단어들이 아니다.

자본이 내놓은 상품들, 그거 다 불량식품들이고, 먹지 말고, 소비하지도 말 것인가? 난 인간에게는 이러한 자본주의와 혹은 특정 생산양식의 진화발전 과정에서, 부단한 비판 능력을 기르고 있다고 본다.

그의 글에서는 선과 악의 이분법적 사유, 비-역사적 사유가 엿보인다. 이건 학계와 대학교 학문 분과의 전문화에 따른, 종합능력의 결여와 연결되어 있어 보인다. 




기사출처: 

http://www.hankookilbo.com/m/v/9caf4328030645898d3861ebb773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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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logIcon 2016.03.20 15:03

    비판을 했으면 그에 따른 근거를 제시하셈. 자기 주관대로 쓰지 마시공

  • 피로사회> 저자 한병철 교수, 이해할 수 없는 기행으로 논란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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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쇄글자 작게글자 크게입력 : 2017.03.21 20:23:00
    <피로사회> 저자 한병철 교수, 이해할 수 없는 기행으로 논란
    <피로사회> 등 현대 사회에 대한 철학적 에세이로 유명한 독일 거주 철학자 한병철 교수(베를린예술대)가 독자 강연에서 막말과 기행을 한 것으로 알려져 뒤늦게 논란이 일고 있다.

    한병철 교수의 책을 내온 문학과지성사와 강연 참석자들에 따르면, 한 교수는 지난 15일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열린 <타자의 추방> 출간 기념강연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주최측이 준비한 야마하 피아노의 소리에 깊이가 없다며 수시로 연주를 중단하고 불만을 표시하는가 하면 질문하는 독자에게 “입을 다물라”거나 “참가비 1000원을 줄 테니 나가라”는 등 막말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불편함을 느낀 일부 독자는 강연 도중 자리를 떴으며 한 교수는 강연 중 편두통이 심하다는 등 건강 이상을 호소했다고 한 참석자는 전했다.

    문학과지성사 홈페이지에는 “그날 강연회장에서의 일은 거의 폭력 수준이었다. 저자가 명성이 있다거나 외국의 철학자라거나 하는 것은 그의 언행에 어떠한 면책 사유도 되지 못할 것이다” “끝까지 앉아있으면 뭔가 다른 마무리가 있기를 기대했다” 등의 반응이 올라와 있다.

    <피로사회> 저자 한병철 교수, 이해할 수 없는 기행으로 논란
    문학과지성사는 지난 17일 공식 사과문을 내고 “강연자의 여러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출판사의 크나큰 과실”이라고 밝혔다. 처음부터 한 교수의 건강 문제를 파악했어야 하는 게 아니냐는 부분에 대해서는 “강연회는 강연자의 제안으로 시작해 합의하에 진행된 것”이라고 밝혔다.

    한 교수는 2010년 <피로사회>가 한국에 번역 출간된 후 크게 주목받았다. 이후에 내놓은 <투명사회>, <에로스의 종말>, <아름다움의 구원> 등의 책들도 독자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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