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철학2020. 5. 7. 17:47

노회찬 "6411버스 노동자"와  베버 "노동자" 관점 차이: 베버가 본 독일 노동자 계급 - 정치적 리더십 소명의식과  권력본능 결여  


1. 몇 년간 정의당의 어떤 모순을 관찰해오고 있다.  노회찬은 " 6411번 노동자 정당이 정의당이다"라고 했지만, 막스 베버는  "독일 노동자들은 정치적으로 미성숙하고, 정치적인 변화를 꺼려하고 인습에 안주하기 때문에, 독일 정치의 미래가 될 수 없다"고 1919년에 주창했다. 


정의당 전체는 아니지만, 일부 당원들과 진보비즈니스 단체의 막스 베버  '책임정치' 바겐세일이 놓치고 있는 것은, 노회찬의 "6411번 버스 노동자"가 투명인간이 아니라 한국 참여민주주의의 주체, 노동해방의 주인이라는 것이다. 

 

정의당이 2020 총선에서 거의 모든 후보들이 '노회찬의 6411 버스'를 자신의 정치노선으로 한번 이상씩은 언급했다. 이런 사실을 감안하면, 형식 논리적으로보면, 정의당은 '노회찬의 6411번 버스 노동자' 관점을 버리던가, 막스 베버의 부정적이고 비관주의적 '노동자 관점'을 버리던가 해야 한다.


막스 베버는 독일 노동자들을 자신이 주장하는 독일 리버럴 민주주의 주체로도 간주한 적도, 그런 정치적 구상을 한 적도 없다. 독일 노동자 계급의 현 상태 (존재: Sein)가 이러하니, 정치적으로 각성된 정치 주체로 되어야 한다( 당위 Sollen)는 것도 연구하지 않았다. 


 한국 노동자들, 모든 비정규직도, 아니 비정규직 50%도 정의당에 투표하지 않는다. 정의당이 그들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정책을 발표해도 투표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현 상태와 정치의식 사이에 존재하는 커다란 간극을 좁히기 위해 연구하고 학습하고 토론하고 실천하고 조직하는 것이다. 그게 진보정당으로서 정의당이 해야할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월급받는 노동자들을 '정의당 한번 찍어주는 팬'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당의 주체가 될 수 있는 정당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야말로 정의당의 '정치 신념이자 확신'이 되어야 한다.


2.  1895년 막스 베버가 프라이부르그 대학교수 취임 연설에서 나타난 "노동자"에 대한 태도와 관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막스 베버가 31세되던 1895년 5월 프라이부르그 대학에 교수가 되어 취임강연을 했는데, 그 제목이 “민족국가와 민족경제정책“이다. 연설 말미에, 베버는 독일 노동자 계급이 독일 미래의 주체가 될 수 없다고 진단했다. 왜냐하면 독일 노동자계급은 경제적 이득을 위해서는 조직적인 투쟁을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독일 노동자들을 좌지우지 하는 저널리스트 집단보다 훨씬 더 미성숙하기 때문이다.


 베버는 로마 역사와 프랑스 혁명 시기 1792-5년 국민공회의 분위기와 독일 노동자 계급을 비교한다. 독일 노동자계급에게는 로마 귀족 카틸리나의 반역 에너지의 불꽃도 없고, 프랑스 국민공회에 불었던 강력한 민족적 열정의 기미도 없다. 독일 노동자들은 정치적 거장의 덕목이나 능력은 없고, 정치적 소-장인(Kleinmeister)에 불과하다. 


정치적 지도력이라는 소명을 부여받은 계급에게 볼 수 있는 위대한 권력 본능이 독일 노동자계급에게는 결여되어 있다. 또한 독일 노동자계급은 정치적인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정치적인 변화를 별로 희구하지도 않고, 인습과 관습에 순치되어 있다고 봤다. 


독일 노동자처럼 정치적인 학습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정치리더가 되면, 가장 파괴적인 집단이고, 따라서 우리들의 정치적 적이라고 막스 베버는 진단했다. 독일 노동자계급이 정치적으로 성숙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부하기 좋아하는 사람이고 인기의 왕관을 쓰고자 하는 안달복달하는 자일 뿐이다. 


3. 정의당 노회찬의 대표 수락 연설에 나타난 "6411번 버스 노동자" 관점


"새벽 4시 5분에 출발하는 6411번 버스타고 강남으로 출근하는 비정규직 청소노동자, 이분들은 태어날 때부터 이름이 있었지만, 그 이름으로 불리지 않습니다. 그냥 아주머니입니다. 그냥 청소하는 미화원일 뿐입니다. 한 달에 85만원 받는 이분들이야말로 투명인간입니다. 존재하되, 그 존재를 우리가 느끼지 못하고 함께 살아가는 분들입니다 (......)


그 누구 탓도 하지 않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만들어 나가는 이 진보정당, 대한민국을 실제로 움직여온 수많은 투명인간들을 위해 존재할 때, 그 일말의 의의를 우리는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상 그동안 이런 분들에게 우리는 투명정당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정치한다고 목소리 높여 외치지만 이분들이 필요로 할 때, 이분들이 손에 닿는 거리에 우리는 없었습니다. 존재했지만 보이지 않는 정당, 투명정당, 그것이 이제까지 대한민국 진보정당의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이제 이분들이 냄새 맡을 수 있고, 손에 잡을 수 있는 곳으로, 이 당을 여러분과 함께 가져가고자 합니다. 여러분 준비되었습니까?"



4.  정의당의 '노동자 관점' - 직장인, 월급쟁이에 대한 관점은 무엇인가,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


노동자, 월급쟁이, 학생, 비정규직, 주부, 노인은 현금이나 쥐어주는 단순한 복지시혜 대상이나 불우이웃이 아니다. 선거 때 정의당 찍어주는 팬클럽 회원에 그쳐서도 안된다. 


그들의 일터에서, 휴식터에서, 놀이터에서, 노동의 현장과 노동의 바깥 공간에서 그들의 희로애락이 담긴 말, 글, 행동이 정의당으로 흘러 들어와야 한다. 











참고 자료




1895년 막스 베버, 프라이부르그 대학 취임 강연 - (번역 요약) 원시 


민족국가와 민족경제정책 (Der Nationalstaat und die Volkswirtschaftspolitik) 

뒷부분 pp.30-32 


막스 베버는 비르마르크 체제 하에서 독일 부르주아 계급이 정치적으로 미성숙해서 경제적인 대의도 가지고 있지 않고, 정치적으로도 교육받지 못했다고 진단했다. 어떠한 경제적 요소가 그러한 정치교육을 대체할 수 없다.


그렇다면 부르조아 계급도, 대토지 지주인 융커 계급도 아닌, 어떤 다른 계급이 정치적으로 더 위대한 미래의 주체가 될 수 있는가? 


현대 노동자가 자신있게 부르주아 계급의 이상의 상속자라고 선언하다.

노동자 계급이 독일 정치의 지도자가 될 전망은 있는가? 


오늘날 독일 노동자계급이 정치적으로 성숙하거나, 정치적 성숙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고 누군가 말한다면, 그 사람은 아부쟁이 (쉬마이쉴러)이고, 수상쩍은 인기의 왕관을 쓰고 싶어하는 자일 것이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독일 노동자계급의 최상층은 자기중심적인 자산가계급이 인정하는 것보다 훨씬 더 성숙했다. 독일 노동자 계급은 또한 공개적이고 조직적인 경제적 권력투쟁이라는 방식을 통해 그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할 자유를 정당하게 요구한다. 


그러나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독일 노동자계급은 저널리스트-패거리들보다 훨씬 더 미성숙하다. 그 일단의 패거리들은 리더십을 독점하고 싶어하고 노동자계급에게 그것을 믿게 만들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지위가 강등당한 부르주아들의 영토 안에 머무르면서, 독일 노동자들은 100년 전 추억놀이에 빠진다. 그들의 불안한 정서 때문에, 그들 마음 속에서는, 1792-5년 프랑스 혁명 국민공회 (National Convention) 대표자의 정신적 후계자들이라는 생각이 자리잡기도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독일 노동자들은 그들이 스스로 현실에서 보여주는 것보다 더 위험하지도 위협적이지도 않다. 그들에게는 로마 귀족 카틸리나의 반역 에너지의 불꽃도 없고, 프랑스 국민공회에 불었던 강력한 민족적 열정의 기미도 없다. 


독일 노동자들은 정치적 거장이 아니라 능력이 모자란 정치적 소장인에 불과하다. 정치적 지도력이라는 소명을 부여받은 계급에게 볼 수 있는 위대한 권력 본능이 독일 노동자계급에게는 결여되어 있다. 



노동자들이 정부 공동 운영의 한 축으로서 참여할 때, 자본에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만이 그들의 정치적 적들이 아니다.  독일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노동자들이 자본과의 공통적인 이해관계 공동체를 형성한 흔적들이 거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노동자들의 정치적 성숙함에 대해 묻는다, 왜냐하면 

정치적인 교육을 받지 않고, 사회가 이미 옳다고 정해놓은 것만 하고, 정치적인 변화를 원치 않은 인습에 순치된 사람들이 한 나라를 지도하게 내버려 두는 것이야말로 가장 파괴적인 일이기 때문이고, 독일 노동자들은 이러한 성격을 아직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의 정치적 적이다.  



왜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노동자들은 독일 노동자들과 부분적으로 다른가?  

잉글랜드 노동자들이 이해관계를 관철시키기 위해 조직적으로 투쟁하면서 완성시킨 더 오래된 경제교육 때문만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한 정치적 계기가 있었기 때문에 그게 가능했다. 그것은 바로 잉글랜드의 세계 강대국의 지위에 대한 노동자들의 공감 때문이었다.  


이것은 잉글랜드가 지속적으로 정치적 강대국의 과제를 해결하게 만들고,   개인들이 끊임없이 정치적인 학습을 받게 만들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우리 독일인들은 국경선이 위험에 빠질 때나 긴급하게 그 정치적인 학습을 받는다.


큰 정치가 강력한 정치적 권력문제의 중요성을 우리들에게 똑똑히 보여줄 것인가라는 문제는 우리 독일 발전에서도 또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우리는 독일의 통일은 옛날에 저질러버린 유년시절 장난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통일이 독일 세계권력정치의 출발이 아니라 종지부라면, 그 값비싼 비용 때문에 중도포기가 더 나았을 것이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독일의 위험한 상황이란, 국가의 권력이해관계의 담지자로서 부르주아 계급이 힘이 없어 보이고, 노동자계급이 부르주아 계급의 지위를 떠맡을 정도로 성숙해질 징조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회의 깊이에 최면걸려 거기에 빨려 들어간 것처럼 바라보는 사람들이 믿는 것처럼, 위험은 대중에 있지 않다.피지배자의 경제적 상태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위로 성장하는 지배계급의 정치적 자격조건에 대한 질문이 사회정치적 문제의 궁극적인 내용이다. 


우리의 사회정치적 활동 목표는 세상사람들의 행복이 아니라, 험난한 미래의 투쟁을 위해 민족국가의 사회적 통합을 달성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통합은 근대 경제발전 과정에서 해체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오늘날 노동운동에 결여된 정치적 의미를 갖게 될 “노동귀족”을 성공적으로 탄생시킨다면, 부르주아의 팔이 아직은 창을 던질 만큼 충분히 강하지 않아 보이지만, 그것은 최초로 더 넓은 어깨 위에 놓여지게 될 것이다. 그 날이 오려면 한참 더 가야겠지만.



Werden andere Klassen die Träger einer politisch größeren

Zukunft sein? Selbstbewußt meldet sich das moderne Proletariat

als Erbe der bürgerlichen Jdeale. Wie steht es mit seiner

Anwartschaft auf die politische Leitung der Nation?


Wer heute der deutschen Arbeiterklasse sagen würde, sie se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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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litisch reif oder auf dem Weg zur politischen Reife, der

wäre ein Schmeichler und strebte nach der fragwürdigen Krone

der Popularität.


Oekonomisch sind die höchsten Schichten der deutschen

Arbeiterklasse weit reifer, als der Egoismus der besitzenden Klassen

zugeben möchte, und mit Recht fordert sie die Freiheit, auch in der

Form des offenen organisierten ökonomischen Machtkampfes ihre

Jnteressen zu vertreten. Politisch ist sie unendlich unreifer, als

eine Journalistenclique, welche ihre Führung monopolisieren

möchte, sie glauben machen will. 


Gern spielt man in den Kreisen

dieser deklassierten Bourgeois mit den Reminiscenzen aus der

Zeit vor 100 Jahren - man hat damit in der That erreicht,

daß hier und da ängstliche Gemüter in ihnen die geistigen Nach-

kommen der Männer des Konvents erblicken. 


Allein sie sind

unendlich harmloser, als sie selbst sich erscheinen, es lebt in ihnen

kein Funke jener katilinarischen Energie der That, aber freilich

auch kein Hauch der gewaltigen nationalen Leidenschaft, die

in den Räumen des Konventes wehten.


 Kümmerliche politische

Kleinmeister sind sie, - es fehlen ihnen die großen Macht-

instinkte einer zur politischen Führung berufenen Klasse. 


Nicht

nur die Jnteressenten des Kapitals, wie man die Arbeiter glauben

macht, sind heute politische Gegner ihrer Mitherrschaft im Staate.

Wenig Spuren der Jnteressengemeinschaft mit dem Kapital

fänden sie bei Durchforschung der deutschen Gelehrtenstuben. 


Aber:

wir fragen auch sie nach ihrer politischen Reife, und weil

es für eine große Nation nichts Vernichtenderes giebt, als die

Leitung durch ein politisch unerzogenes Spießbürgertum, und

weil das deutsche Proletariat diesen Charakter noch nicht ver-

loren hat, deshalb sind wir seine politischen Gegner. Und weshalb


ist das Proletariat Englands und Frankreichs zum Teil anders

geartet?


Nicht nur die ältere ökonomische Erziehungsarbeit,

welche der organisierte Jnteressenkampf der englischen Arbeiter-

schaft an ihr vollzogen hat, ist der Grund:


 es ist vor allem

wiederum ein politisches Moment: die Resonanz der

Weltmachtstellung, welche den Staat stetig vor große macht-

politische Aufgaben stellt und den einzelnen in eine chronische

politische Schulung nimmt, die er bei uns nur, wenn die Grenzen

bedroht sind, akut empfängt.


 - Entscheidend ist auch für unsere

Entwicklung, ob eine große Politik uns wieder die Bedeutung

der großen politischen Machtfragen vor Augen zu stellen ver-

mag. 


Wir müssen begreifen, daß die Einigung Deutschlands ein

Jugendstreich war, den die Nation auf ihre alten Tage beging

und seiner Kostspieligkeit halber besser unterlassen hätte, wenn

sie der Abschluß und nicht der Ausgangspunkt einer deutschen

Weltmachtpolitik sein sollte.


Das Drohende unserer Situation aber ist: daß die bür-

gerlichen Klassen als Träger der Machtinteressen der Nation

zu verwelken scheinen und noch keine Anzeichen dafür vorhanden

sind, daß die Arbeiterschaft reif zu werden beginnt, an ihre

Stelle zu treten.


Nicht - wie diejenigen glauben, welche hypnotisiert in die

Tiefen der Gesellschaft starren, - bei den Massen liegt die Gefahr.

Nicht eine Frage nach der ökonomischen Lage der Be-

herrschten, sondern die vielmehr nach der politischen Quali-

fikation der herrschenden und aufsteigenden Klassen ist

auch der letzte Jnhalt des sozialpolitischen Problems. 


Nicht

Weltbeglückung ist der Zweck unserer sozialpolitischen Arbeit,

sondern die soziale Einigung der Nation, welche die moderne

ökonomische Entwicklung sprengte, für die schweren Kämpfe der

Zukunft. Gelänge es in der That, eine "Arbeiteraristokratie" zu

schaffen, welche Trägerin des politischen Sinnes wäre, den wir heute

an der Arbeiterbewegung vermissen, dann erst möge der Speer,

für welchen der Arm des Bürgertums noch immer nicht stark

genug zu werden scheint, auf jene breiteren Schultern abgelegt

werden. 


Bis dahin scheint es noch ein weiter Weg.










Posted by NJ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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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후후히히하하호호흐흐허허

    이런 컨텐츠를 무료로 몰래 염탐해서 볼 수 있다는 게 충격적입니다. 기자들보다 깊이 있고 학자들보다 열정적인 필진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세계에 대한 해석에 깊이가 있고 열정이 있고 진득한 호기심과 문제의식이 있는 분을 못내 뒤지고 있었어요. 저는 맑스 베버의 대표작만을 읽었고 루카치부터 하버마스까지 역시 대표저작을 한 개씩 일독한 정도입니다. 공부할 때 생각이 나고 그때 그들의 문장을 읽으며 느꼈던 기묘한 열정과 당혹감이 다시 떠오르네요. 감사합니다.

    2020.06.19 18:22 [ ADDR : EDIT/ DEL : REPLY ]
    • 지루한 글일 수 있는데, 읽어주시고 댓글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베버, 루카치 책 읽으신 거 메모도 남겨주시고 그러세요....

      2020.07.02 16:05 신고 [ ADDR : EDIT/ DEL ]

정치철학2020. 4. 28. 01:29
April 27, 2019 at 9:33 PM · 

"우리가 잘못 믿고 있는 신화가 하나 있다. 자본주의를 자라나게 하고 번창하게 만들었던 것이 ‘근면’과 ‘희생’를 강조하는 프로테스탄트 윤리라는 잘못된 신화이다. 역사적 사실을 보자면, 자본주의는 흑인 노예들의 착취와 고통의 기초 위에서 성장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흑인이건 백인이건 미국이건 다른 나라건 가난한 사람들의 노동력 착취를 통해 그 자본주의가 번성하고 있다. - 마틴 루터 킹 (미국 민권 운동 목사)"

[소감] 마틴 루터 킹이 막스 베버의 저서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주장을 이렇게 비판했다.

유럽 좌파들과 사회주의자들이야 당연히 막스 베버가 설명한 ‘자본주의의 기원과 칼뱅니즘 Calvinism 과 같은 프로테스탄트 윤리 (금욕 절제 근면노동 강조) 사이 관련성을 설득력있거나 역사적으로 타당하다고 보지 않았다.

영국에서 자본주의 생성과 발전은 농촌에서 자기 토지를 박탈당한 영국농민들이 도시 공장에서 임금노동자가 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물론 자본주의의 맹아들은 농업에서 생산력과 기술의 향상 때문에 생겨났고 농업분야에서 임금노동자가 생겨나기도 했다.

유럽과 달리 미국 자본주의의 발전 과정은 400년간 흑인노예노동을 제외하고는 설명할 수 없다. 1862년 미국 노예해방 선언 역시, 미국이 산업자본주의로 한 단계 발전해 나가는데 값싼 노동력이 필요했다. 그 노동력 공급원들 중에 하나가 흑인 노예들이었다.

미국 남부 대토지 소유자들도 아프리카에서 값싸고 육체노동력에 유리한 흑인들을 구매해서 토지경작에 투입했듯이, 미국 산업자본가들 역시 값싼 양질의 흑인노예들을 노동자들로 고용할 필요성이 있었다.

미국 아프리카 출신 흑인들이 지난 400년간 미국 문명, 50개주로 구성된 미 연방국가에 기여한 것을 어떻게 화폐량으로 환산해낼 수 있을까?

Image may contain: possible text that says

 '"We have deluded ourselves into believing the myth that capitalism grew and prospered out of the Protestant ethic of hard work and sacrifice.

 The fact is that capitalism was built on the exploitation and suffering of black slaves and continues to thrive on the exploitation of the poor both black and white, here and abroad." and and white, here and abroad." 

Martin Luther King,Jr. 7Rmed'

United Morality

April 26, 2019 at 12:37 PM · 




Posted by NJ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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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철학2020. 4. 9. 07:59

대구, 1960년 419 민주항쟁의 출발을 만들었던 도시, 그 부활을 기대하며.

코로나 19 위기시대, 다원주의적 민주주의와 관용정신이 절실한 415 총선이 되어야 한다. 


'우리'라는 말은 참 좋은데, 폭력이 될 수도 있다. 1989년 동유럽 시민들이 "우리가 인민이다 Wir sind das Volks"라는 구호를 외치며 민주주의 회복을 외쳤을 때는 진보적인 의미의 '우리'였다. 그러나 "우리 지역, 우리 나라를 떠나라"는 비관용적 혐오정치적 구호는 반민주적이며 반인륜적인 '우리'가 된다. 조폭 '영토'전쟁과 차이가 없게 된다.  영국 런던에서 성은 목씨,이름은 조나단인, 한 싱가포르 (중국계) 학생이 폭행을 당했다. "너네 나라 코로나 바이러스를 내 나라에 왜 가져왔어"라는 욕을 들으며 길거리에서 폭행을 당했다. 몇 사람이 목씨를 집단 구타했다.


다른 한편, 대구시에서 박근혜 지지자가 정의당 조명래 후보 청년 선거운동원을 때렸다.  "여기는 박근혜야" 외치며, 조명래 후보가 연설하는 연단에 올라가 하트 모양을 그리고 조롱한 후, 단상을 내려와 한 청년을 때리며 행패를 부렸다.


지금 해외에서는 트럼프가 'COVID-19'를 '중국 바이러스'라고 한 이후, 한국인, 중국인, 아시아인들에 대한 폭행과 공격이 이어지고 있다. 한국인인 나 역시 캐나다 미국에서 잉글랜드계와 스코트랜드계인을 구별하지 못했듯이, 미국 캐나다 유럽 사람들은 중국인과 한국인을, 한국인과 일본인을 구별하지 못한다. 

중국인 한국인 모두 다 폭력 위협과 협박에 직면해 있다. 


박근혜 지지자의 폭력을 비판하는 글을 쓰면서, 한편으로는 이 말을 첨언해야겠다. '대구는 원래 보수야' '대구는 버려'라는 정치적 발언을 한 김어준식은 잘못되었다. 대구 폭행현장을 비판하는 것은 '대구시와 대구시민 전체'를 비난하기 위함이 아니라, 인권유린 현장을 비판하고자 함이다. 


"여기는 정의당 영토야, 민주당 영토야, 박근혜 영토니까, 너는 맞아도 된다"는 식은 "코로나 바이러스 몰고 온 중국인처럼 생긴 사람들은 맞아도 된다" 식 사고와 똑같다.


대구가 원래 보수적인 도시가 아니었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대구는 수구적이고 저렇게 폭력적인 비-관용의 도시가 아니었다. 1960년 315 선거에서 이승만 독재자를 가장 극렬하게 반대한 도시, 이승만 자유당 표가 제일 적게 나온 도시가 바로 '대구'였기 때문이다.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도시가 바로 대구였다. 


역사는 돌 뿐만 아니라, 변화한다. 한 때 대구는 "여긴 이승만 독재자 땅이 아니야, 독재자 OUT, 이기붕 깡패정치 아웃"을 외치던 가장 민주적인 도시들에 하나였음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그럼에도, 저 폭행현장을 방치한 대구시에 항의전화는 할 필요는 있다.




https://bit.ly/2RobZJ9






기사 출처: 


https://www.theguardian.com/uk-news/2020/mar/03/police-investigate-alleged-coronavirus-linked-attack-on-london-student-jonathan-mok





Posted by NJ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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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철학2020. 3. 28. 04:37


70년 전에도, 80년 전에도 지금과 유사한 고민을 하다.

Nakjung Kim

March 24, 2013 at 1:43 PM · 


요새 잠시 쉬는시간에 아시아 도서관(중,일,한국책 취급)에 가는데, 신청한 책들이 태평양을 건너오고, 박치우 관련 책도 2권이나 비치가 되었다. 

덕분에 일제시대 경성제국대학이 1926년에 일본의 아시아 지배책의 일환으로 설립되었다는 것도, 대만보다 1년 먼저 설립되었다는 것, 독일대학처럼 예과 2년, 그 다음 3년, 즉 학부가 5년제로 운영되었다는 것도 확인하게 되었다.


 (동경대학은 1886년에, 교토대학은 1897년) 

경성제대 조선인 합격비율 28% (정원 160명 중, 45명: 법 의학은 일본인이 대부분, 문학쪽에 조선인)


처음에는 정치학과도 법문학부(법학,철학,문학)에 있었으나 2년 정도 유지되고, 폐지시켜버렸다고 한다. 식민지에 정치학과는 불필요하다고 봄. 


철학과는 주로 일본 교수들이 당시 독일에서 수입한 하이데거,칸트,헤겔, 그리스 철학 등이 주류를 이룬다. 박치우도 학부졸업논문으로 하르트만에 대해서 썼다고 한다. 

마르크스에 대한 소개는 미야케 교수와 스즈키 일본 교수가 열정적으로 소개했다고 한다. 

<경제연구회>라는 학생모임에서 유진오 (법학과),김계숙,조용욱(철학과) 등을 중심으로 마르크스주의 서적들을 공부했다고 한다.

 (*당시 마르크스주의 서적은 당시 20년대 독일에서 수입된 것). 그런데 당시 논의되던 주제들은 지금도 다른 형태로 다시 등장하고 있다.


박치우 이야기는 다시 또 하기로 하고,


.... 당시 상황이 궁금하여, 1920년대 동아일보를 보니, 1924년 제 1면 (민족의 100년 대계를 수립하고 단결하자...이런 주장임)에 세계사의 주체를 정신을 본 헤겔 Hegel파, 이 헤겔파를 유심론으로 보고, 유심론과 대조적인 유물론 양자 모두를 비판하고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동아일보가 이해가 유물론 (마르크스주의)은 거의 엉터리 수준이고 철저히 왜곡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동아일보: 유물론은 사회현상을 자연현상과 똑같이,자연법칙의 정명론적인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미신적인 자유의지론자가 말하는 인격적인 의지로 좌지우지하지 못한다 => 이것이 유물론의 주장이라고 동아일보 사설이 말하고 있다.)


<소감> 1) 1924년 동아일보 제 1면 독자가 누구였는가? 

상당히 어려운 말들이 많이 등장 

2) 그러나 용어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아님 

3) 그 책임은 물론 동아일보사에 있기 보다는 1920년대 독일 카우츠키 등이 마르크스를 이해한 방식를 그냥 그대로 따름.

: 자연법칙처럼 인류역사에도 법칙이 있고, 헤겔 관념론이 아니라 마르크스 유물론적 역사사관이 진리임 등이 더 큰 문제임 


4) 당시 마르크스에 대한 연구 수준은 그렇게 심층적이지 않고 <독일 이데올로기>책이나, 1844년 경제 철학수고 등도 발견 및 연구가 되지 않던 상황임.


1924년 1월 2일자 동아일보 1면 신문기사...


USA 미국을, 아름다울 미가 아니라, 쌀 미 자라고 표기한 것도 흥미롭다.











Posted by NJ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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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철학2020. 2. 12. 23:29

Nakjung Kim

November 25, 2015 · 

(1) 마르크스 <#자본론>이 수정-번역되어 출판되었다는 뉴스이다. 김수행 선생님의 <자본> 번역은 영어번역본을 위주로 했다. 한국에도 자본론은 여러 번역본들이 있다. 난 번역에 관해서는 ‘다다익선’,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입장이다. 독어본,영어본, 일어본,중국어본, 러시아, 프랑스본이건 간에. 그리고 우리말 입장에서 보면, 우리할아버지 세대 우리말과 현재 우리말은 내용과 숫자 면에서 너무 다르기 때문에, 20-30년에 한번씩 다시 번역될 필요도 있다.


마르크스 책에 국한해서 말하자면, 마르크스는 현재 대학 학과편재로, 철학,정치,경제 (주로 3개 학과에서 텍스트를 주로 다룬다.), 혹은 사회학과에서 다 다뤄지지만, 전체적으로 다루고 있는 사람이나 대학은 많지 않다. (독일,미국,캐나다,영국, 프랑스,한국,일본 다 마찬가지이다) 마르크스는 어느 특정 학과나 그 연구자의 배타적 독점물이 되는 순간 현재 대학제도 하에서는 ‘오해’와 ‘왜곡’이 될 것이다. 서구 마르크스 학계가 다른 학파들에 뒤처진 이유이기도 하다.


따라서 한 연구자가 칸트-헤겔-마르크스의 지적 전통 (독일 이상주의 /이념.관념Idealismus), 유럽 혁명사들과 반혁명사들, 영국 정치경제학파들 등을 통달하거나, 아니면 3~4학과 사람들이 협업을 해야 한다. 언젠가 북한에서 번역한 마르크스의 ‘잉여가치설사’(소위 자본론 4권이라고 하는)를 잠시 훑어 봤는데, 번역 자체도 정확하지 않는 곳이 많고, 누락되기도 했다. 남북한 ‘자본론’ 번역 역사와 수용 및 창조적 재해석을 비교하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다.


살아생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편지 교환에서, “왜 우리들은 당시 사회주의자들에게 인기가 없을까?” 한탄과 비탄을 자주했다. 하지만 적어도 서유럽 학계와 전 세계 학계 밥그릇들과 일자리는 당시에는 별 인기없었고 실제 주류도 아니었던 마르크스 엥겔스가 창출해냈다.


‘문자’는 죽은 후에 승부가 난다. 흥미로운 생명체, 인간이고 인류사의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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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철학2020. 1. 1. 05:37


December 31, 2014 at 7:31 AM · 


민족-민중 집단적 의지 형성과 조직화 (1) 문제 중요성



1987년 대통령 선거 이후, 노태우가 합법적으로 당선되었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1980년 광주 학살자와 1212 군사반란 범죄자였지만, 1987년 대선을 통해서 노태우는 ‘합법성’을 취득하고, 도덕적 ‘정당성’은 결여되었지만 6공화국이라는 정치적 ‘정당성’의 운신의 폭을 넓힐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당시 소위 민민(민족민중)세력은 정치적 도덕적 정당성 모두 결여한 전두환 5공화국과 노태우 6공화국 동일성과 차이을 어떻게 설명하고 어떻게 정치 투쟁을 이끌어 나갈 것인가? 다시 말하면, 전두환 5공화국의 ‘폭력과 강압’, 그리고 본질적으로는 큰 차이는 없지만 유사-파시즘 요소가 가미된 그러나 5공의 무지막지한 ‘폭력과 강압’이 아닌 ‘법적 질서 (김기춘 검사/법무장관)’ 강조와 이데올로기 투쟁을 결합한 노태우 6공화국의 차이을 어떻게 해명하고 이에 대응할 것인가? 이게 큰 문제였다.



80년대 그람시에 대한 개설서들이 몇 권 번역되어 한국에 소개되었다.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은 위 문제들을 푸는데 어느정도 실마리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나는 보았다.


당시 내 생각을 간단히 요약하면, 노태우 6공화국이 87년 합법적인 대선을 통해 당선되었지만, 정치적 도덕적 정당성은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이데올로기 담론 (여론전)을 잘 수행하면서 그 6공 체제의 약점을 파고들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그렇다면 학생운동은 어떻게 변해야 하는가? 중앙집중적 데모 위주가 아니라, 각 학과로 정치,계급 투쟁의 깃발이 이동해야 해야 한다. 이 둘은 병존,공존도 해야 하지만, 공간의 이동, 방점의 이동 필요성이 생긴 것이다.







민족-민중 집단적 의지 형성과 조직 (2)



그람시의 고민은 이탈리아에서 어떻게 민족-민중의 집단적 의지를 형성하고 조직화할 것인가였다. 그람시는 이 역할을 이탈리아 공산당 PCI 가 해야 한다고 봤고, 이탈리아 근대사에서 결핍된 자코뱅 세력이 되어야 한다고 봤다. 


프랑스 혁명에서 빌어온 자코뱅 노선이란, 20세기 초반 이탈리아에서 농민들을 프롤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 하에 묶어두고 동시에 모든 종류의 경제주의, 생디컬리즘, 자생(자발)주의를 거부하는 것이었다. 이 민족-인민(민중) 집단적 정치의지야말로 이태리 국가의 기초라는 게 그람시의 생각이다.



그람시가 이 민민(민족-민중)의지를 강조한 배경에는, 유럽의 국제정치가 있다. 1815년에서 1870년 이 시기는 유럽의 보수세력과 지배계급들이 유럽 전역의 자코뱅 세력들을 필사적으로 깨부수고 탄압하려고 했다. 그람시를 이러한 보수적 정치 지형을 ‘국제적 수동적 균형체제’라고 불렀는데, 이 체제 하에서 지배계급들은 경제적 기업의 권력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그람시는 이러한 국내외 정치현상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이탈리아 지식인들이 민민(민족-민중/인민) 정치의지를 발현하는데 공헌해야 한다고 보고, 이탈리아 자코뱅 세력들 (근대 군주= 정당)이 지적 도덕적 개혁 조직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지적 도덕적 개혁이 경제-사회적 개혁과 연결되어야 한다는 게 그람시의 생각이다. 왜냐하면 경제 사회의 개혁(변혁) 역시 지적 도덕적 개혁을 수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람시가 근대 군주로서 ‘정당(자코뱅)’을 강조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민족-민중 집합적 정치 의지 형성과 조직화를 그 정당의 책무로 설정한 배경은 무엇인가? 그의 리소르지멘토(이태리 통일운동)에 대한 평가와 더불어, 그것은 당시 이탈리아 노동자 계급의 상황, 그 고향 사르디니아 남부 농민과 투린과 같은 북부 산업 노동자 관계, 지역 갈등, 사르디니아 민족주의 문제, 반동적인 지주 계급, 위계서열 권위주의 문화가 강한 이탈리아 생활세계 등과 연결되어 있다.



1906년 남부 사르디니아 농민들의 '독립운동'은 북부에서 파견된 군대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당하고, 반대로 북부 투린 지방 노동자들을 탄압하는데는 남부 사르디니아 군대가 동원되었다. 이러한 복잡한 정치 상황, 특히 노동자 계급의식의 성장이 더딘 상황을 돌파하기 위한 그람시의 대안은 민족-민중 집합적 의지 형성과 조직화였고, 그 주체로 정당를 설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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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철학2019. 12. 20. 16:13
여의도 국회 지붕 뚜껑 열고, '인민'을 넣는 게 민주주의다. 

근대 의회는 개밥그릇 싸움을 통해 탄생했다. 선거법 개혁을 개밥그릇 싸움이라 하는 건, 개밥그릇을 신성모독하는 행위다. 속보이는 정치냉소주의 조장 말라.

개밥그릇 싸움으로 몰고 가는 자유한국당, 결국 선거법 개혁 ‘도로묵’ 만들기 전술. 이에 편승하고 싶은 민주당, 불량식품 먹고 싶어 안달난 경우. 오늘 정봉주 전 의원은 야당 주장에 불만을 터뜨리면서, '이번 선거법 개정은 하지 말자'고 주장했다. 정봉주의 반동적 퇴락에 불과하고 자유한국당 도와주는 꼴이다. 

민주당에 바란다. 

민주당은 야당들과 티격태격할 수는 있지만, 현행 선거법은 1 mm 라도 바꿔야 한다. 연동률100%까지 갈 때까지, 국회를 정책정당들간 경쟁의 장으로 만들기 위해서 ! 

인류 역사에서 개밥그릇 싸움이 아닌 정치개혁은 하나도 없었다.

근대 의회의 탄생지는 영국이다. 세계사 책에 나오는 1688년 제2차 영국혁명, 이름하여 ‘명예혁명’이 근대 의회의 아메바 원형이다. 

1688년 전후로 영국에서는  입법 행정 사법을 장악한 왕과 영국 대지주 잉글리쉬 젠틀맨과 개밥그릇 싸움을 살벌하게 벌였다. 찰스 왕을 처형했다가, 다시 제임스 왕을 모셔왔다, 혁명-> 복고, 왕권유지, 다시 혁명을 반복했다. 

1647~49년 찰스 왕을 처형시킨 영국 1차 혁명부터 41년간 영국 왕권파와 대지주파 (올드 휘그파) 간에 전투가 벌어졌는데,이것 자체가  지배계급간 개밥 그릇 싸움이었다. 이 밥그릇 싸움 때문에 ‘의회 제도’가 탄생했다.

정치학 민주주의 교과서에서는 이러한 영국 왕과 영국 대지주들 사이 개밥그릇 싸움과 그 규칙 제정을 ‘근대 의회’의 탄생이자, 근대 민주주의 원형이라 칭송한다. 영국 의회 첫 출발점 자체가 대지주계급을 대변하는 올드 휘그파(Old Whigs)가 왕권에 대항해 자기 계급적 이해, 밥그릇을 챙기려 했던 것이다. 

이 올드 휘그파의 이론가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존 로크, 제임스 티렐이고 정치가는 쉐입스베리였다. 

당시 영국 의회에는 소작농, 중상공인, 도시 하층민, 여성, 외국인 등은 아예 의원이 되지 못했다. 99% 인민이 영국 의회에서 배제되었다. 시대적 한계가 너무나 명백했다. 

근대 민주주의는 수십, 수백, 수천, 수만가지 서로 다른 직업을 가진, 서로 다른 사회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밥그릇’ 크기를 조정하는 정치적 역할을 맡고 있다. 싸움도 ‘밥그릇’ 크기와 그 내용에 따라 수십,수백,수천,수만가지이다.

현재 한국 국회의원 300명은 특권층 직업 10개가 대부분이고, 그들을 위한 법률을 제정하고 있을 뿐이다. 1만 6천여 개 직종에서 일하는 한국 시민들과 노동자들은 투표 들러리로 전락했다. 김용균법도 알맹이(중대기업 재해 처벌법)는 빼버려 재발방지에 기여하지 못한다. 

선거법을 바꾸려는 근본적인 목표는 왕, 대지주, 대자본가, 건물주, 아파트 왕이 아닌 사람들의 밥통을 의회에 전달하려고 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인 ‘개밥그릇’ 싸움의 신성함을 자유한국당 황교안, 심재철은 모독하지 마라. 정봉주 등 민주당 의원들도 황교안에 부화뇌동하지 말아야 한다. 석패율제와 같은 적은 차이점들은 충분히 극복 가능하다. 

철저히 기득권 편을 드는 법률만을 제정해온 자유한국당이야말로 ‘진심’ 충직 ‘개밥그릇’이 아니던가? 문제는 개밥그릇 싸움이 아니라, 어떤 게임규칙으로 싸움을 하느냐이다.

총선에서 정당투표율이 가장 중요한 의석배분 기준이 되게 하라 ! 그것이 민주주의 진화 발전 수준에 맞는 것이다. 이것이 겨우 직접 민주주의로 가는 하나의 씨앗이자 출발점이다. 아직 멀었다.

여의도 국회 지붕 뚜겅이 열리는 그 날까지. 


(정치 냉소주의를 조장하면서, 결국 자유한국당의 기득권을 수호하고자 하는 황교안) 


(연동형 비례대표제 핵심인 연동률을 낮추려는 민주당, 정봉주는 '이번 선거법 하지 말자'고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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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철학2019. 10. 6. 23:30

이진경 논리전개의 결함들 . 이진경의 주장은 아주 간단하다. "조국이 장관 자격이 있고, 문재인의 장관임명이 국민에게 좋은 것이기 때문에, 그를 지지한다"이다. 주장은 명료한데, 가져다 대는 논거들은 개념들이 불명확하고 자의적이고, 앞뒤가 맞지 않다.  



(1) 이진경은 도덕(morality)와 윤리(ethic)을 구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서양철학 윤리학이나 일상생활에서는 '도덕'과 '윤리'는 동의어로 쓰인다. 헤겔이 칸트의 의무론적 윤리학을  '순수 테러주의(나만 옳다는 신념)' '비역사적' '비현실적 무능력'이라고 비판하면서  근대 개인의 '도덕 Moralität'와 사회 '윤리 Sittlichkeit'를 구별하기는 했다.


 이진경이 이런 칸트와 헤겔 차이점을 설명하기 위해서 도덕과 윤리를 구별하자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니, 굳이 '도덕'과 '윤리'를 구별할 필요없다. 


(이런 흥미로운  칸트-헤겔 논쟁을 아주 긴장감없게 발전시킨 것이 미국 롤즈의 입장인 political liberalism과 communitarianism 간의 논쟁이다. 한국에서 마이클 샌델 '정의론'이 100만부 팔렸는데, 후자 범주에 속함. 샌델보다 더 심오한 사람이 그 스승인 알스데이르 맥킨타이어이다. 스코트랜드 사회주의자였으나 소련에 실망해 미국으로 넘어가 헤겔 윤리학을 발전시켰다. ) 


(2) 이진경은 도덕의 범주는 '선과 악'이고, 윤리는 '좋음'과 '나쁨'이라는 범주를 쓴다고 주장했는데,이것도 별로 정확하지 않다. 그러한 구분을 하지 않고, 도덕과 윤리는 '옳음'과 '그름', '좋음'과 '나쁨'의 판단 기준이다. 


우리가 '행위'의 옳고, 그름 (시비지심 right or wrong), 좋고 나쁨(good or bad)를 판단할 때, 도덕과 윤리는 필요하다. 윤리학자나 철학자가 아니더라도, 보틍 사람들이 다 아는 내용이다. 


어원만 보더라도, '도덕'과 '윤리'는 동일하다. morality 모랄리티를 '도덕'으로 번역했는데, 이것의 어원인 라틴어 moralis는 '우리의 행동 방식이나 태도, 관행과 관습을 뜻하는 매너 manner, 커스텀 custom'이라는 뜻이다.


'윤리'로 번역한 ethics 의 그리스어는 에토스 ethos 이다. 이는 character, custom 기질 특질, 관행과 관습을 의미한다. 실제 영어화된 단어 에토스는 '한 개인이나 집단이 공유하는 행위 원리와 믿음 체계'를 뜻한다. 


(3) 이진경은 조국 법무장관을 옹호하기 위해서 윤리주의적 전환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조국에 대한 '도덕' 과잉을 버리고, 조국이 국민과 민중에게 '공익'을 주는 능력, 정치가로서 탁월함 (excellence) 이 있다고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그런데 이 주장도 정치적 행위와 도덕-윤리와의 관계가 뗄래야 뗄 수 없기 때문에, 이진경의 주장은 지극히 개인이 고안한 이론이거나, 누구나 보편타당하다고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4) 이진경은 조국비판론자들의 논거들을 회피해버렸다. 혹은 '도덕 과잉론자' '현실 정치를 모르는자'로 비난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조국 장관 자격없거나 부족하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은 '도덕 과잉'에 빠져서, 윤리학자이기 때문에 조국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조국의 의혹들(자녀 특권층 논란, 웅동학원 재산 투명성, 재산 증식과정과 사모펀드 투자 문제점)의 정치학에 대해서 비판하고 있는 것이고, 조국이 그 동안 주창한 정치적 주장들과 상충하기 때문에, 그 충돌을 조국이 '정치적으로 ' 해명하고 책임져라는 것이다. 이것을 '도덕 과잉'에 빠졌다고 비난하는 것은 잘못이다.


(5) 조국의 사회주의론과 민주주의론은 '연대와 협동'에 기반한 것이고, 그러한 연대와 협동이라는 '행위'가 좋고, 옳은 이유는 조국의 '윤리학' '도덕'에 기초하고 있다. 


조국의 정치적 발언들과 책들 안에는, "당신들이 이기적으로 자기 이익만을 열심히 추구하라.그렇게하면 당신들이 의도하지 않은 행동의 결과들이 산출되어, 개인들의 총체적인 합인 사회에 좋은 결과를 낳을 것이다"라는 아담 스미스 전제가 나오지 않는다. 


나경원과 황교안의 정치행위는 그들의 '도덕과 윤리'체계에 기초하고 있다.  도덕-윤리와 정치를 분리시키는 이진경의 논리는 실제 정치 전투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6) 이진경의 주장은, 조국 장관이 장관직을 수행하면 '조국의 능력 증진'에 좋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너무나 많은 '증거들'이 필요로 하기 때문에, 입증 부담이 너무 크다. 이러한 이진경의 개인적인 '소망' 때문에, 만약 수천만명 국민들이 조국 장관이 '훌륭한 탁월한 정치가'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가? 


사실 거창한 '윤리주의적 전환'이라는 말도 필요하지는 않다. 이미 아테네 소크라테스,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중세와 근대 교량 시대 사람인 마키아벨리 공통적으로 강조한 것이 정치 지도자의 '탁월함' '정치가로서 덕목들 virtues ' 개념이 있었다. 


이진경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아마 '정치가의 덕목과 능력'이었을 터인데, arete 아레테 (덕성, 덕목, 능력, 기능) 도덕과 정치학이다.이것은 공자 맹자가 강조한 '군군 신신 자자' 군자는 군자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 것과 내용상 동일하다. 


그런데 국민 60%가 지금 조국 장관의 탁월함, 덕목들 (arete, virtue)에 대해서 확신이 없는 상태이다. 


이진경의 마지막 문장 '나는 지지하는 것이 바르다 right (도덕적으로 옳다)'고 했는데, 정작에 자기 자신은 '도덕'과 '윤리'에서 사용하는 '옳음, 바름 righteous'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조국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도덕 과잉'이라고 비판하면서, 자기 주장은 '도덕적 단어'에 갇혀 있다. 


(7) 정치학은 윤리학과 도덕에 기초해있고, 정치적 행위들은 우리 모두 윤리와 도덕에 기초해있고, 행동 결과도 도덕과 윤리 척도들에 따라 평가받는다. 


윤리학 도덕 없는 계급투쟁은 개 돼지 먹이 다툼에 지나지 않는다. 


조국 논란에서 '신분제 자본주의'와 '교육 차별'이 가장 큰 주제로 대두된 것은, 조국 장관이 평소 주장한 '연대와 협력'의 사회주의 원리와 정면으로 충돌하기 때문이다. 


행동은 하나이다. 이론은 여러가지다. 머리가 복잡한 이유다. 하지만 행동과 이론은 수미일관해야 하고, 일이관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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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bit.ly/2o7cdct


(10월 6일, 한겨레 21 ) 이진경


조국에 대해 사람들이 지지를 주저하는 이유 가운데 큰 것이 도덕적 판단인 것 같다. ‘(자신이) 한 말과 다르게 어떻게 그렇게 살았냐’고 하는데 그런 평가를 할 만한 여지도 있다. 다만 모럴(Moral·도덕)과 에시크(Ethic·윤리)는 구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도덕의 범주는 선과 악이고, 윤리는 좋음과 나쁨이라는 범주를 쓴다. 지금 많은 경우 선악으로 평가하는 것 같은데, 나는 윤리주의적 전환이 필요하다고 본다. 


예를 들어 일반 국민, 민중의 관점에서 어느 것이 좋은가 나쁜가 하는 관점에 서야 한다. 누군가의 능력을 증진하는 게 좋고 감소시키는 게 나쁘다고 본다면, 조국을 버려야 할까 지지해야 할까. 나는 지지하는 것이 바르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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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철학2019. 3. 11. 12:41

김대중과 김영삼의 합의로, 전두환과 노태우는 1997년 12월 20일 사면되었다. 이러한 두 김 대통령의 판단은 역사적 오류다. 1945년 일본제국주의 잔재청산에 실패한 한국 정치사의 오욕을 되풀이했고, 한국 정치사에서 민주당의 뿌리깊은 문제점들이 드러난 사건이다. 


1995년 12월 2일 그 유명한 전두환 연희동 골목 성명을 보라. 조폭 두목처럼 나와서 뻔뻔하게 '니들이 뭔데 나를 잡아가. 나를 잡아가려면 김영삼이도 잡아가라'고 선언하지 않았던가? 전두환 논리는 이것이었다. "전두환이 국가 헌정질서를 깬 범죄자라면, 전두환과 노태우와 야합했던 김영삼 당신도 응분의 책임을 져라" 


전두환과 노태우에 대한 사면 결정은 김대중 대통령만 한 게 아니라, 김영삼도 처음부터 이런 구속-> 실형선고 -> 사면 시나리오를 구상했었다. 1996년 총선에서 신한국당의 압승을 위해 전두환-노태우 구속 카드를 정치승부수로 던졌던 것이다. 


전두환-노태우 1212 군사쿠데타 반란 수괴자들과 518 광주학살자에 대한 사면은 결국 12월 2일 전두환 골목성명을 인정해준 꼴이다. 김영삼은 1990년 노태우와 3당 합당을 했고, 1992년 민주자유당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김대중 역시 노태우로부터 정치 자금을 받은 적이 있다.


다시 전두환 골목 성명을 읽어보자 " 제가 국가의 헌정 질서를 문란케 한 범죄자라면 이러한 내란 세력과 야합해 온 김 대통령 자신도 이에 대한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순리가 아니겠는가 생각합니다."


2019년 3월 11일, 지금도 전두환은 가장 건강하게 멀쩡하게 살아남아서 골프를 즐기러 다니고, 그 부인 이순자는 "전두환이 한국 정치사에서 대통령도 직접 국민들이 뽑게 만들어준 민주주의 아버지"라고 칭송하고 다닌다.


박근혜 사면 주장은 다음 총선까지 줄기차게 자유한국당과 수구보수 시민사회에서 터져 나올 것이다. 한번 잘못된 정치판단을 내린 김대중 김영산 전 대통령의 업보가 2019년~2020년 다시 재현될 것이다.








[전두환,노태우사면]구속에서 사면까지[박준우]


앵커: 권재홍,박나림 기사입력 1997-12-20  최종수정 1997-12-20




● 앵커: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은 구속 수감된 지 2년1개월여 만에 풀려나게 됐습니다.


처음에는 노태우 씨 비자금 사건으로 시작됐다가 결국 12.12와 5.18 사건에 대한 사법적인 책임으로 두 사람 모두 교도소 독방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박준우 기자입니다.




● 박계동 의원 폭로(95년 10월): 1백억 원짜리 수표 40장으로 인출되어 당일 즉시 동화은행, 신한은행 등 각 시중 은행에 40개 계좌에 일제히 동시 분산 예치되었던 것입니다.



● 기자: 폭로 나흘 뒤 이현우 前청와대 경호실장이 검찰에 소환되면서 비자금 수사가 급진전됐습니다.



노태우 씨에게 돈을 건넨 30대 재벌 총수들이 줄줄이 소환됐고, 노태우 씨도 2천6백억 원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끝내 구속됐습니다.





● 노태우씨 전격 수감(95년11월16일): 불신, 그리고 갈등 이 모든 것을 내가 안고 가겠습니다.



● 기자: 수천억 원의 비자금 조성 사실이 밝혀지면서 여론이 악화되자 김영삼 대통령의 역사 바로 세우기 지시로 12.12와 5.18에 대한 특별법 제정이 정치권에서 논의됐고, 검찰은 기소 유예와 공소권 없음 결정을 뒤집어 서둘러 단죄에 나섰지만 반발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 전두환씨 골목 성명(95년12월2일): 제가 국가의 헌정 질서를 문란케 한 범죄자라면 이러한 내란 세력과 야합해 온 김 대통령 자신도 이에 대한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순리가 아니겠는가 생각합니다.





● 기자: 골목길 성명을 발표하고 합천으로 내려갔던 전두환 씨는 다음날 새벽 서울로 압송됐고, 반란과 수괴와 내란 등의 혐의로 안양 교도소에 구속 수감됐습니다.




정호용, 장세동씨 등 신군부 핵심 16명도 잇따라 구속됐습니다.



1심 재판부는 전두환 씨에게 사형, 노태우 씨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했지만, 두 사람은 2심에서 각각 무기와 징역 17년으로 감형됐고, 대법원에서도 2심 형량이 확정됐습니다.



그러나 올 들어 선거바람과 함께 전, 노 씨의 사면이 자주 거론됐고, 선거가 끝나자마자 오늘 두 사람의 특별사면이 결정됐습니다.


MBC뉴스 박준우입니다.


(박준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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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철학2019. 3. 8. 20:17

생물학적 피나 정신적 피를 흘리지 않는 자유 실현이란 있을 수 없다. 




2014년 조사라서 2019년 현재와는 조금 다를 수 있지만, 정치 의식적 측면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아래 기사를 보더라도, 진정한 '자유'란 얼마나 실현하기가 힘든가를 알 수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왜 자유한국당과 같은 보수당을 더 많이 지지하는가?
자발적인 노예의식을 '애국주의'로 승화시켜 자기 개인 가치관으로까지 신념화시키고 내재화하는 그 현상은 왜 발생하는가? 


경향신문 강진구 기사는 좋은 글이다. 난제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치학과 철학에서 고전적인 주제이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정치적 동물'이 마치 '폴리스'를 벗어날 수 없듯이, 우리가 떼지어 집단으로 폴리스에서 사는 한 이 주제는 풀기 힘든 난제이다.


물론 사람들이 많이 쓰는 '계급적 존재를 배반하는 허위의식'이라는 정치적 난제는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유럽 지식인들 사이에 연구 대상이 되었다. 이탈리아 그람시, 독일의 프랑크후르트 학파 등의 연구주제들이다.


또한 제국주의 지배를 받았던 비참한 식민지 국가들에서 왜 '제국주의 세력과 결탁한, 제국주의자들보다 더 악날하고 지독한 자국 협력자들 collaborators'이 발생했는가를 두고 민족해방론자 사이에 주된 관심사이기도 했다.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 혹은 규정한다는 조악한 마르크스에 대한 이해는 폐기해야 한다. 소련 스탈린이 통치 이데올로기 수준으로 전락시킨 이런 조악한 유물론, 혹은 변증법적 유물론을 마르크스의 핵심이라고 하는 것은 오해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는 무능과 무반성을 낳을 뿐이다. 


마르크스 뿐만 아니라 인류 정치사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인 '자유', 진정한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자발적 노예의식'과 끊임없이 싸워야 한다. 한번 득도하거나 '하느님을 영접'했다는 식은 자유 실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자발적인 복종의식과 자기 기만은 끊임없이 매일 매일 발생하기 때문이고, 그것을 '조장 (助長)'하는 정치 경제 문화 종교 지배자들이 우리들보다 늘 한 걸음 앞서 뛰고 있기 때문이다. CDs 와 같은 금융 상품의 형태로, 신무기 개발, 삼성 바이오로직스 회계 범죄 등으로 늘 다기한 전술로 노예들을 놀라게 만들고 충격받게 만든다.


생물학적 피나 정신적 피를 흘리지 않는 자유 실현이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자주하게 된다. 


자유를 추상적으로 '자기 스스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자기 결정권'으로 정의한다고 해서, 공동체의 독립 (independence = freedom 어원은 같다)이나 일터, 가정, 쉼터, 놀이터에서 자기 자유는 곧장 보장받지 못한다.왜냐하면 자유라는 것도 아주 구체적인 경제활동, 정치 문화 종교 활동과 연계되어 있기 때문에, 심지어 같은 노동자들이라고 해도, 같은 직장에서 동일한 일을 하더라도 이해관계는 서로 충돌할 가능성이 커진 복잡한 일상 세계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온 가족이 논과 밭에서 일했던 농경제 사회에 사는 것도 아니고, 수렵 채취 공동체에 사는 것도 아니다. 매일 매일 끊임없이 형태와 내용이 변화하는 유동사회 (fluid society)가 우리 일상이 되었다는 뜻이다.  이렇게 되면 자기 스스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자기 결정권을 한 개인이 충분히 실현한다고 해도, 자기가 속한 수많은 집단들과 공동체의 '자유'와는 충돌하게 되어 있다.


공동체의 자유가 개인의 자유에 우선한다 이런 말에 앞서, 이러한 우리들의 현대적 삶의 조건 하에서는, 시민들 노동자들 학생들 모두 다 자기 이해관계들을 정치적으로 분출하고, 자기들끼리 스스로 조율하고 합의를 해 나가야 한다. 정치적 민주주의 실천이 과거 어느 때보다 더 중요하게 된 이유가 경제활동 양식의 변화 때문이다. 경제와 정치, 경제와 문화적 삶이 분리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제는 자발적 노예의식과 복종을 가르치는 정치 경제 권력자 집단에 비해서, 일반 평민들 노동자 시민들은 '정치 참여' 시간이 없거나 부족하다. '자유 시간'이 생기면 자야 한다. 노동에 지치고 직장에서 받은 스트레스 때문에 그걸 잊기 위해서 뇌 세포를 재생시키기 위해서 자야 한다. 비판의 무기를 벼리는 데 필요한 책이나 지식 습득은 잠 앞에 다 굴종한다. 


진정한 좋은 정치가는 이제 우리들에게 노동시간을 가급적 줄이고, 정치적 의사 결정과정, 법률 제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자유 시간'을 시민들과 노동자들에게 내어주는 사람이다.


진정한 자유란, 스스로 직접 참여해서 피를 흘리지 않는 한, 어떠한 그 누구도 대신 해결해 줄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푸닥거리 동원식 정치, 정치적 참여를 단순한 대중동원으로 전락시키고 있는 '정당 테크노크라트'와 '정치 기술자들'은 이제 청산 대상이다. 선거에서 이기는 승리자는 될 지언정, 진정한 자유를 꽃피우는 민주주의 경작자는 절대 될 수 없다. 


한국의 비정규직들의 정치 의식 대다수는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지배자들의 '말과 문장'을 자신의 신념 체계로 만들고 있다. 법률적 지식도, 계산적 수학 능력도, 자신이 믿는 종교적 교리도, 윤리학도 다 무용지물이다. 현실에 남는 것은 '강자에 복종하면서 걍 살어'가 되어 버렸다.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문장을 반대로 뒤집어 엎는 그런 실천을 스스로 해보고, 피부로 '아 다른 삶의 양식, 타인과 다른 언어들을 주고 받아도 이 사회가 무너지지 않고, 경제도 붕괴되지 않는다는 자신감'이 생길 때, 진정한 자유를 향한 한 걸음을 비로소 떼는 것이다.



[신문 기사 요약]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지배자 신념을 자기 믿음으로 둔갑시킨 비정규직 정치의식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노동자 권익을 대변하는 진보정당인 정의당보다, 심지어 민주당보다 새누리당을 더 많이 지지하는 층이 비정규직이다.


사실 조사: "2014년 1월 한국노동사회연구소가 서울에 사는 비정규직 2344명에 대한 생활·의식 실태조사"


(1) 비정규직들은 노후 불안과 고용 불안정을 호소하지만,  민주당(16.6%)보다 새누리당(24.4%)에 더 높은 지지를 보였다. 


(2) 18대 대선에서 이들의 67%가 투표를 했고 박근혜 후보(36.4%)가 문재인 후보(22.3%)보다 14.1%포인트 더 표를 받았다. 


-> 박근혜 정권과 새누리당은 비정규직의 권익을 박탈하는  "파견 확대, 쉬운 해고, 기간제 사용기간 연장" 입법을 만들었다.  


(3) 비정규직 조사 대상들은 누구인가? 평균연령은 52세 ,  법정노동시간보다 5시간 많은 주당 45시간 노동, 월급여 133만원.


 (4) 강진구 기자의 주장은 보수파를 지지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사회적, 경제적 지위는 별 볼 것 없지만 "대부분 산전수전 다 겪은 아Q처럼 세상물정에 환한 다변가들"로 진단하고 있다. 그러니까 자기 신념이 확실하다는 것이다.


 (5) 왜 이렇게 자기 권익을 뺏어가는 보수당을 비정규직 노동자들 상당수가 지지하는가? 그 의식구조는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으로

 박정희식 개발독재에 대한 추억이  국가주의와 애국주의로 남아있다. 


노동조합이나 민노총에 대한 매도.  정규직 비난 등이 이들에게 공통적인 신념이다.  




강진구의 고전으로 보는 노동이야기](11)노동현실 망각 재벌 편들기, 아Q의 ‘허위의식’이 드리워져 있다

강진구 노동전문기자 kangjk@kyunghyang.com 2019.01.04 17:08:57 

루쉰 ‘아Q정전’



루쉰의 소설 <아Q정전>의 시대 배경인 1911년 신해혁명 당시 봉건착취와 외세침략에 시달리던 중국 사회의 모습(위)과 2016년 5월 서울 현대차 사옥 앞에서 영정을 들고 원청인 현대차의 노조파괴 행위를 규탄하는 금속노조 유성기업 지회 조합원들. 김정근 기자 jeongk@kyunghyang.com


재발에 관대·노조엔 가혹한 태도는 아Q의 ‘강한 사람 추종’ 연상


재계 최저임금 깎기 시도, 일부 비정규직 애국심·반노조정서 이용


중국 작가 루쉰의 <아Q정전>(1921)에 등장하는 주인공 아Q는 날품팔이 노동자다. 온갖 차별과 멸시를 받으며 살지만 자존심이 강해 절대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실 그의 자존심은 불굴의 용기가 아닌 허위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Q는 현실의 승리보다는 자기기만과 환상을 통해 정신승리에 안주한다. 그러다 보니 억압적 권력에 직접 저항하는 대신 자신보다 힘이 약한 사람을 괴롭히거나 엉뚱한 곳에 화풀이하며 자신의 우월성을 확인받고 싶어 한다.


 이 점에서 아Q정신은 봉건적 착취와 외세의 침략에 시달리면서도 현실 개선에 관심이 없었던 약 100년 전 무기력한 중국인에게만 있었던 게 아니다. 부당한 차별과 모욕의 피해자이면서도 이를 애써 외면하거나 문제로 느끼지 못한다면 누구나 아Q정신을 의심해볼 만하다.


루쉰의 작품 속에서 아Q는 인격을 가진 노동자가 아니라 노동력을 가진 상품으로 거래될 뿐이다. 그는 웨이짱이라는 시골 마을에서 일정한 직업 없이 보리 벨 때가 되면 보리를 베어주고 벼를 찧을 때면 남의 벼를 찧어주며, 어떤 때는 배의 노를 젓기도 했다. 일거리가 좀 오래 있을 때면 주인의 집에 기거하다가 일이 끝나면 가버렸기 때문에 사람들은 바쁠 때나 그를 기억해내곤 했다. 


아Q의 과거 행적에 대해 아는 사람도 없었지만 굳이 관심을 가질 이유도 없었다. 심지어 그의 본명을 아는 사람도 없다. 아Q는 집도 없어 토지신을 모신 사당인 토곡사에서 살았다. 


특별한 근력도 기술도 없는 그는 일손이 부족할 때 언제든 불러서 허드렛일을 시킬 수 있는 존재에 불과했다. 아Q의 나이는 서른 살이다. 지금의 노동현실에 비춰보면 취업이나 결혼은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고시촌 등 열악한 주거환경 속에 아무런 희망도 없이 불안정 노동시장을 떠도는 청년 비정규직 노동자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루쉰의 작품 속에서는 아Q에 대한 동정이나 연민의 시선을 찾아보기 어렵다. 루쉰은 아Q를 통해 자신의 계급적 이해관계를 망각한 채 부정확한 현실인식에다 부와 권력을 가진 사람과 자신을 동일시하려는 민초들의 허위의식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아Q는 자신에게 허드렛일을 시키는 웨이짱 사람들을 ‘시골 촌뜨기’라고 얕잡아 본다. 반면 자신은 세상물정에 밝아 성내에서 일어나는 일을 속속 꿰뚫고 있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그가 알고 있는 세상물정이란 기껏해야 웨이짱 사람들이 튀긴 생선에 듬성듬성 썬 파를 얹는 데 반해 성내 사람들은 잘게 썬 실파를 얹어 놓는다는 것 정도다. 현실인식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지식일 뿐이지만 아Q에게는 자신이 우월하다고 믿게 만드는 최면제로 사용된다.


아Q는 또 웨이짱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지역의 세도가이자 부와 권력을 가진 ‘짜오(趙) 타이예(지방현관의 존칭)’와 자신이 같은 성씨라고 자랑하고 다닌다. 


심지어 짜오 타이예의 아들이 ‘수재(秀才)’에 급제하자 “촌수를 따지면 내가 수재보다 3대나 위이니 이번 일은 나에게도 기쁜 일”이라며 거들먹거리기도 한다. 웨이짱의 보통 사람들이 주는 일거리로 살아가면서도 짜오가와의 동일시를 통해 일종의 정신승리를 추구한 것이다.


부정확한 현실인식에다 부와 권력을 가진 사람과 동일시하는 허위의식을 통해 대리만족을 추구하는 아Q는 우리의 노동현실에도 낯설지 않은 모습이다.


2014년 1월 한국노동사회연구소가 서울에 사는 비정규직 2344명에 대한 생활·의식 실태조사를 벌인 적이 있다. 

그 결과 비정규직들은 노후 불안과 함께 고용 불안정을 호소하면서도 민주당(16.6%)보다 새누리당(24.4%)에 더 높은 지지를 보였다. 


18대 대선에서 이들의 67%가 투표를 했고 박근혜 후보(36.4%)가 문재인 후보(22.3%)보다 14.1%포인트 더 표를 받았다. 


파견 확대, 쉬운 해고, 기간제 사용기간 연장 등 고용 불안정을 심화시키는 입법을 추진한 정치세력이 더 높은 지지를 받은 것이다. 

조사 대상 비정규직들의 평균연령은 52세로 법정노동시간보다 5시간 많은 주당 45시간을 일하면서도 급여는 월 133만원에 불과했다.

 이들은 사회적·경제적 지위는 별 볼 것 없지만 대부분 산전수전 다 겪은 아Q처럼 세상물정에 환한 다변가들이다. 


[이유 분석]  (1) 개발 독재 잔재 (2) 국가주의 애국주의 (3) 노동조합 매도 (4) 정규직 비난 

하지만 이들의 기억은 1970~1980년대 개발독재시대 고도성장의 기억에 멈춰져 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그들의 기억처럼 기업의 성장은 노동자들의 숙련과 소득 증가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들은 외환위기 이후 자동화에 기초한 수출형 조립산업이나 단순 서비스 위주로 산업이 재편되면서 비정규직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숙련이나 소득 증가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쉽사리 인정하지 않는다. 

여전히 이들에겐 수출 대기업을 위해 노동자들은 희생해야 하고 기업들은 일자리 창출과 임금 증가로 보답하리라는 믿음이 있다. 자연스럽게 파업은 매국이고, 고분고분하지 않은 노조들은 국가 발전의 최대 걸림돌로 생각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우리 사회 가장 밑바닥에서 생활하는 일부 비정규직들이 자신의 계급이해에 배반하는 정치성향을 보인 것은 자신의 안정적 일자리를 철밥통 정규직 노조가 빼앗고 있다는 생각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양대 노총의 거센 반발을 무릅쓰고 고용 유연화 정책을 밀어붙인 박 전 대통령과 새누리당을 통해 이들은 일종의 정신승리를 추구했다고 볼 수 있다.


재계와 자유한국당, 친재벌 보수언론들이 지난해 마지막 날까지 대놓고 최저임금법 시행령 개정안에 반대하는 여론몰이에 나설 수 있었던 것도 같은 배경이다. 

자영업자와 중장년 비정규직들의 애국심과 반노조 정서를 등에 업고 ‘일 안 하고 노는 유급휴일에도 최저임금을 줘야 하느냐’는 가짜뉴스로 월 174만원의 최저임금을 148만원으로 깎으려는 시도를 했던 것이다.


 최저임금 논쟁은 이 점에서 현실인식을 바로 하지 않으면 누구나 아Q가 될 수 있다는 교훈을 준다.


루쉰의 작품에서 아Q는 봉건적 착취를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한 짜오가로부터 온갖 굴욕을 당하면서도 단 한번도 저항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아Q는 자신의 성이 짜오라고 자랑하고 다니다 짜오 타이예에게 불려가 따귀를 맞고 띠빠오(하급관리)로부터 일장 훈시를 들은 뒤 술값으로 200문(文)을 물어줬다.

 또 짜오가에 일을 하러 갔다가 젊은 과부 우마에게 무릎을 꿇고 구애를 하다 성추행범으로 몰려 노임을 받기는커녕 막대한 손해배상에 입고 있던 옷과 털모자, 이불까지 전당 잡히고 알거지가 되기도 했다.


아Q는 이 일이 있은 뒤로 웨이짱 마을 어디에서도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다. 일종의 블랙리스트에 오른 셈이다. 

반면 짜오가는 악행을 정화하기 위한 푸닥거리 명목으로 아Q로부터 받아낸 향이나 초를 고스란히 쌓아뒀다. 아Q의 해진 옷은 장차 태어날 아기의 기저귀감으로 사용됐다. 

막대한 이익잉여금을 투자 대신 사내유보금으로 쌓아두고 계열사 일감 몰아주기를 통한 편법상속에 열을 올리는 한국의 재벌들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하지만 한국의 아Q들이 그렇듯이 루쉰의 아Q 역시 짜오가가 아니라 자신의 일자리를 빼앗은 샤오D를 보고 눈이 뒤집힌다. 아Q는 “쇠사슬로 네 놈을 후려치리라”고 소리치며 샤오D와 멱살잡이를 벌이지만 싸움은 쉽게 끝나지 않고, 웨이짱 사람들은 “거 참 꼴 보기 좋구나”라며 한마디씩 거든다.


이처럼 짜오가에 말 한마디 못하면서 웨이짱의 가장 밑바닥에서 생활하는 샤오D와 드잡이를 하는 아Q의 모습은 재벌들의 편법적인 부의 축적과 상속에 무관심하면서 민주노총 얘기만 나오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악성 댓글러들과 모습이 겹쳐 있다.


2011년부터 무려 8년간의 부당노동행위에 시달리다 지난해 9월 퇴사한 유성기업의 한 50대 퇴직자가 자살한 사건을 다룬 기사에는 ‘한국의 아Q’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댓글들이 달렸다. 


이들은 벌써 2명의 목숨을 앗아간 유성기업 부당노동행위에 현대자동차가 개입돼 있지만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고 있다는 사실엔 관심도 없다. 오직 민주노총만이 문제다. 


“민노총아 고인에게 부끄럽지 않나. 얼마를 받고 싶은 건지. 벌써 8년이 되어가는구나. 기륭전자 생각나네. 기업도 망하고, 노동자도 망했네.” “문 닫으면. 노사 모두 조용하겠네요. 공장, 대지 팔고 재고품도 팔아 퇴직금 주고 손 터는 게 사업주 만수무강 비결.”



4조5000억원대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사건에 대해서도 한국의 아Q들은 엉뚱한 곳으로 분노를 표출시키고 있다. 


이들은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의 편법 경영승계와 수천억원의 국민연금 손실 사태에 대한 진상규명보다 주가 폭락 방지와 경제 안정을 위해 적당히 넘어가길 바라는 ‘노예근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아주 나라 말아먹네. 검찰이 삼성 건들면 코스피 1500은 따놓은 당상이네.” “그만 좀 물고 뜯어라. 경제 40%를 벌어들이는 기업 자꾸 잡으면 결국 누구 손해냐.”


2016년 1월16일 뉴욕타임스는 ‘<아Q정전>을 차용한 중국 엘리트들에 대한 비판’이란 기사에서 “중국 공산당이 관리하는 ‘50센트당’(유급 댓글부대) 이외에도 아Q와 같은 자발적 댓글부대들이 중국의 엘리트 권력을 지탱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재벌들에 관대하면서 노조에 가혹한 한국적 아Q는 뉴욕타임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한국의 재벌권력들을 지탱하는 자발적 댓글부대들이라 할 수 있다. 

새로운 변화를 거부하고 자신의 계급적 이해 대신에 강한 사람과 동일시하려는 한국의 아Q들이 내세우는 애국심은 루쉰의 ‘아Q정신’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아Q정전’을 쓴 중국 작가 루쉰.




루쉰의 작품에서 아Q는 짜오 타이예 치하의 가장 큰 피해자라 할 수 있지만 외세나 혁명에 의해 봉건질서가 무너지면 더 큰 혼란이 올 것을 우려해 전통적 질서에 안주한다.


 이 때문에 아Q는 일본에서 공부하다 변발을 자른 채 나타난 ‘치엔(錢)가’의 큰아들을 ‘가짜 양귀신’이라고 부르며 경멸한다. 하지만 혁명당이 상륙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Q는 양귀신을 찾아가 혁명당에 가입하려다 거절당하고 결국은 도적떼로 몰려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아Q는 형장으로 끌려가면서도 누구를 원망하기보다 제대로 된 장송곡 하나 불러보지 못하고 죽는 것이 억울할 뿐이다. 제대로 된 현실인식 없이 자존심만 센 채 저항할 생각 한번 못해보고 비굴한 삶을 살다 최후를 맞은 아Q의 죽음은 딱히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없다. 그래서 아Q의 죽음엔 애도도 분노도 하기 힘들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901041701005#csidx67d2e0703f8f33a8c08a2c6de062ea8



루쉰의 본명은 '주수인'씨이다. 

30년 전에 읽은 루쉰의 '고향'이라는 소설은  '아큐정전'과 더불어 지금도 인상깊게 남아있다. 

'고향'이 얼마나 어떻게 변했을까?  

Posted by NJ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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