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철학2020. 10. 27. 21:23

생물학에서 '진화론'은 삶의 진.선.미와 달리 그 뱡향이 없다는 게 특징적이다. 정치와 문화적 삶에서, '진화론'은 굉장히 신중하고 비판적으로 다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배자와 가해자의 범죄가 침팬지 힘자랑 게임으로 퇴락하고 만다. 


생물학적 사회진화론, 사회적 다윈주의 용어 "우월한 유전자" 보도, 조선일보, 이건희 손녀 보도, "이건희 장례식장서 가장 주목받은 사람은..." 기사를 보다가.


'우월한 유전자' 라는 단어는 인종차별주의다. '엄친아' 라는 말도 은폐된 생물학적 사회진화론 용어이기 때문에, '우월한 유전자'라는 단어와 함께 사용해서는 안된다. 타고 태어날 때부터 사회적 지위와 개인적 능력이 탁월하다는 '결정론'을 내포하고 있는 단어가 '우월한 유전자' 이다. 


경제적 부, 정치적 권력, 사회적 신분이 중산층 이상인 자를 가리키는 '엄친아'라는 단어도 이와 유사하다. 


'돈 없는 너희 부모를 탓해라. 부자 부모를 가진 것도 개인 능력'으로 치부된다.


TV 광고나 일상 생활에서, 친구와 연인끼리도 '우월한 유전자'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 현실을 보면, 1997년 IMF 긴축독재 이후, 한국 일상 생활에서 얼마나 신자유주의 논리가 삶 그 자체가 되었는가를 보여준다.


이재용 딸, 이씨, 인터넷 반응을 차용, '우월한 유전자'

초웃 로즈메리 홀 (Choate Rosemary Hall) 이라는 비싼 사립 고등학교를 다녔다고 소개. 생활비를 제외하고 1년 학비가 6만 달러가 넘는다 (6천 800만원).

전 세계에서 교육 차별이 심한 나라가 미국이다.  


한국의 교육 개혁의 모델이 전혀 될 수 없는 것 중에 하나다. 우리는 1년 학비가 6천 800만원인 고등학교가 아니라, '0원'인 공교육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100세 시대에 최소한 대학 4년까지는 무료 자유 교육 시스템을 형성해야 하는게 시대정신이다. 


또래 아이들이나 국민들이 이런 특권층을 부러워하는 것으로 보도하는 조선일보의 기사를 보면, 기자 정신은 실종되고, 사장님 회장님의 '종'으로 전락해버렸다.


세습 신분을 고착화하는 한국 자본주의의 씁쓸한 단면이다.


21세기에 다시 타고 태어난 '신분을 타파하라'고 외쳐야 하다니.


 


 





이건희 장례식장서 가장 주목받는 사람은…

김강한 기자


입력 2020.10.26 10:15



지난 25일 별세한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빈소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함께 온 이 부회장의 딸 이원주양이 주목을 받고 있다. 마스크를 써 얼굴을 반쯤 가린 상태였지만 또렷한


눈매와 오뚝한 콧날이 드러나면서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우월한 유전자가 입증됐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이원주양은 2004년 생으로 올해 16세다. 미국 뉴욕에서 태어난 것으로 전해졌다.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 있는 용산국제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코네티컷 주에 있는 명문 보딩스쿨 ‘초트 로즈메리 홀’에 진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원주양은 과거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올린 사진이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공개되면서 관심을 모았었다.


사진 속에는 이양이 다른 10대 청소년들처럼 친구들과 어울리며 즐거운 일상을 보내는 모습이 담겨 있다. 그러나 이들 사진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현재는 계정을 탈퇴한 상태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양은 어릴 때부터 발레를 배웠다. 국립발레단 부설 아카데미에 다니면서 ‘호두까기 인형’ 무대에서 역대 최연소로 호두까기 인형 역을 맡기도 했다. 그는 초등학교 5학년때는 한국발레연구학회 콩쿠르에서 동상, 6학년때 한음무용콩쿠르에서 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빈소에 들어가는 이양의 모습을 본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아버지인 이재용 부회장과 어머니인 임세령 대상그룹 전무의 장점만을 섞어 놓은 얼굴” “연예인급 외모” “성인이 되면 어떻게 성장할지 벌써부터 기대된다” “장례식장에 신고온 힐은 어느 브랜드 제품인지 궁금하다" 등의 반응이 나오고 있다. 이 부회장과 임 전무는 2009년 이혼했다.




Posted by NJ원시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자연과사람

    포스팅 잘 보고 갑니다^^
    저희 블로그도 들러 주세요 ^^
    오늘하루도 행복한 하루 되세요 ^^

    2020.10.29 12:10 [ ADDR : EDIT/ DEL : REPLY ]

정치철학2020. 9. 29. 22:20

김종철 후보와 배진교 후보의 생산적 토론을 위해 (2) 

정당과 정치활동에서 이념 (이데올로기)을 나쁜 의미로만 국한해서 사용해서는 안된다. 누구의, 누구를 위한, 누구에 의한 '이데올로기 , 이념'인가를 우리는 더 중요하게 따져 묻고, 그 이념을 창조, 실천, 가치평가해야 한다.

탈이념 주장도 하나의 이데올로기 (이념)이다. 오히려 이런 이념의 종언이나 이념 무용론은 정치적 냉소와 진보정치에 대한 패배주의를 불러일으킨다. 

민주당도 민주당 '이념'이 있고, 국민의힘도 국힘의 '이념'이 있다. 그들의 이념, 이데올로기를 창조하고 강화하고 선전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따라서 민주당과 국민의힘은 '이데올로기 (이념)'이 없는 대중정당이라고 말하는 것도 잘못된 주장이다. 

이데올로기 (이념)는 사람들이 집합적으로 만들어 내기도 하고, 그것을 부정하고 파괴하기도 하며, 생성-성장-쇠퇴-소멸, 혹은 변형의 전개과정을 겪기도 한다. 

수령 1인, 독재자 1인, 특정 정당이나 천재 1명이 이데올로기(이념)를 창조해내는 경우는 드물다. 시대정신과 사람들의 물질적 지적 요구를 '이념, 이데올로기'로 주조해내는 것은 집합적인 실천과 공동 지적 작업인 경우가 역사적으로 많았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한국전쟁과 같은 국제적-국내적인 이데올로기(이념) 전쟁을 겪었고, 박정희 유신헌법의 국가주의 이데올로기 하에서 시민의 자유를 박탈당한 경험 때문에,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한국인들의 역사적인 경험은 이념에 대한 트라우마를 형성했다. 

하지만 1987년 유월항쟁 이후 민간 정부의 탄생과 리버럴 민주주의의 형식 절차성 강조, 의회 내에서 다당제, 다원주의적 민주주의 개념 허용으로 인해, 정치와 정당활동에서 다양한 이데올로기들 (이념들)의 경쟁은 이제 한국 정치의 상식이 되었다.


---정치학자들이 다양하게 이데올로기(이념)을 개념 정의하고 있는데, 그 중 하나를 소개한다. 


정치학에서 이데올로기란 무엇인가?


지난 2세기 동안 이데올로기 뜻이 상당한 변화를 겪었다. 믿음체계,주장,생각에 대한 학문적 연구라기 보다는, '생각'과 '행동'을 서로 연결시키려는 믿음 체계, 주장, 생각들의 집합을 뜻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데올로기는 사람들의 사고 방식과 행동 양식을 형성하려고 한다. (이데올로기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가,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의미임)


이데올로기 (이념)이란 상당히 일관적이고 포괄적인 믿음,주장, 생각들의 집합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사회적 조건들을 설명하고 평가한다. 또한 우리는 이데올로기 도움을 받아 우리가 한 사회 안에서 어떤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가를 파악할 수 있고, 사회적 정치적 행동을 하는데 필요한 프로그램을 기획하기도 한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이데올로기(이념)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기능을 수행한다.


(1) 설명 기능, (2) 가치 평가 기능 (3) 태도와 믿음체계의 방향 설정 기능 (4) 행동과 실천 프로그램 기능


정치적 이데올로기들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발전되어 왔는가? 그 예시들


(1) 리버럴리즘 (*일본식 번역 자유주의는 잘못된 번역어이기 때문에 우선 영어 단어 그대로 씀: 자유라는 단어는 진보,좌파,사회주의의 최고 목표 단어임)


(2) 보수주의 (conservatism)


(3) 사회주의와 코뮤니즘 (공산주의 번역어도 생산에만 촛점을 맞춘 번역어이기 때문에 잘못된 번역어임. communism 이란 생산과 노동 과정 뿐만 아니라  비생산,비노동 인간행위들에서 '자유'와 '자신의 잠재력의 실현'을 추구하는 이념임)


(4) 파시즘 (Fascism)


(5) 해방 이데올로기와 정체성 정치학 (Liberation ideologies and the politics of identity)


흑인 해방, 여성 해방, 동성애 해방, 해방 신학, (아메리카 대륙 ) 원주민 해방


(6) 녹색 정치: 이데올로기로서 생태주의


(7) 이슬람과 급진 이슬람


제목: 정치적 이데올로기들 (이념들)과 민주주의 이상 (2006) , p.5


저자: 테렌스 볼, 리처드 대거


Terrence Ball & Richard Dagger, Political Ideologies and the democratic ideal. (New York: Pearson Longman). 2006. p.5




samsung | SM-A520W | Normal program | Center-weighted average | 1/33sec | F/1.9 | 0.00 EV | 3.6mm | ISO-100 | Flash did not fire | 2020:09:28 19:57:27



samsung | SM-A520W | Normal program | Center-weighted average | 1/33sec | F/1.9 | 0.00 EV | 3.6mm | ISO-100 | Flash did not fire | 2020:09:28 19:57:27

samsung | SM-A520W | Normal program | Center-weighted average | 1/33sec | F/1.9 | 0.00 EV | 3.6mm | ISO-100 | Flash did not fire | 2020:09:28 19:57:27

samsung | SM-A520W | Normal program | Center-weighted average | 1/33sec | F/1.9 | 0.00 EV | 3.6mm | ISO-100 | Flash did not fire | 2020:09:28 19:57:27

samsung | SM-A520W | Normal program | Center-weighted average | 1/33sec | F/1.9 | 0.00 EV | 3.6mm | ISO-100 | Flash did not fire | 2020:09:28 19:57:27

samsung | SM-A520W | Normal program | Center-weighted average | 1/33sec | F/1.9 | 0.00 EV | 3.6mm | ISO-100 | Flash did not fire | 2020:09:28 19:57:27


Posted by NJ원시

댓글을 달아 주세요

정치철학2020. 9. 21. 16:04

이데올로기 뜻을 설명하는 이유. 캐나다 고등학교 3학년, 대학교 1학년 정치학 교과서에 나오는 이데올로기 개념을 언급하는 배경.

사람마다 서로 달리 이데올로기 뜻을 결정하기도 한다. 심지어 안철수 같은 정치가, '진보'를 자처하는 학자,언론인,컬럼니스트들도 '이데올로기'를 '양심'이나 '상식'과 대조시키는 실수를 범한다. 역설적이게도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외치는 것도 또 다른 이데올로기다. 왜냐하면 이데올로기는 인간,사회,자연 현상을 설명하고 해석하는 세계관이기 때문에, 그것 없이는 인간이 그것들에 대한 자기 생각을 발표할 수 없기 때문이다. 


1. 이데올로기란 무엇인가?

우리 신념, 믿음체계는 우리 모든 활동의 영향을 받는다. 인생살이에서 가족, 선생님, 친구들은 우리의 삶의 어떤 선택 방향에 영향을 행사한다. 우리는 서로 경쟁하는 종교,과학,사회,정치적 생각들을 비교하면서 어떤 선택을 내릴 때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 경우 의식적인 선택을 하지 않고 어떤 신념을 단순히 수용할 때가 많다.  

점차 우리는 가치 체계들을 채택하게 되고, 그것들과 함께 일상생활을 영위하고, '아 그게 참이야 하고, '진리'로 수용한다. 이데올로기란 세계에 대한 이러한 신념 체계들, 믿음들의 집합을 의미한다. 

그런데 개인의 신념들과 이데올로기는 서로 다르다.   이데올로기는 세계에 대한 상당히 포괄적인 그림을 우리들에게 제공해주고, 특정 집단들에게 '참' '진리'로 받아들여진다. 

2.이데올로기의 구성 요소들을 통해  본, 이데올로기 개념들 

이데올로기의 개념 정의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보통 다음과 같은 의미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데올로기는 인간 본성과 사회에 대한 기초적인 전제들을 내포하고 있다.

이데올로기는 과거의 해석하고, 현재를 설명하고, 미래의 전망을 의미한다.

이데올로기는 애써 노력해서 획득하고자 하는 '목표'이자, 그 목표를 달성하는 전략을 의미한다.

이데올로기는 순교자, 건국의 아버지 어머니, 지도자와 같은 영웅들, 그리고 서약, 애국가,존경을 표시하는 (정치적) 의식들을 의미한다. 또한 이데올로기는 성경, 선언, 헌법과 같은 신성한 공식 문서들이다.

이데올로기는 정치적 신념이나 종교 등을 바꾸거나 행동에 나서게 만드는 아주 강력한 감정적 호소이기도 하다.

이데올로기는 '진리'라고 주장되는, 아주 간단하고 쉽게 이해되는 세계관,세계상이다.  

3. 이데올로기의 정치 사회적 역할은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기초적인 신념들을 의식하지 않지만, 모든 현대 사회들은  이데올로기들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다른 대안적인 이데올로기를 접촉할 수 없고,  하나의 이데올로기만이 지배적인 그런 사회는 드물다.

각각의 이데올로기는 사실들과 가치들의 혼합이고, 감정적인 호소력을 얻어내려고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종종 이데올로기를 흑백논리로 선악의 관점으로 파악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이유로 인해, 보통 사람들이 민주주의, 코뮤니즘(공산주의), 사회주의, 민족주의, 자본주의, 파시즘, 아나키즘(무정부주의),기독교 카톨릭, 기독교 신교(프로테스탄티즘) 이라는 단어가 정확히 무슨 뜻인가를 알려고 노력하지 않는 경향도 있다. 


이런 태도를 취하는 이유는 그 사람들이 이러한 이데올로기들 중에 하나, 혹은 두 개 이상을 무의식적으로 부지불식간에 이미 자신들 마음 속에 채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는 사람들이 자기 환경을 이해하고 생활을 영위하는데 도움을 주기 때문에 중요하다. 이데올로기는 아주 혼동스러운 정치 사회 경제 현안들과 세계 사건들을 판단하고 평가할 수 있는 방법들을 제공해준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미래를 어느정도 예측할 수도 있고, 마음의 안전을 획득하고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다.  


이데올로기는 사람들에게 세계를 바라보는 공통적인 가치와 방식을 제공함으로써,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한다. 사람들이 이데올로기를 통해서 소속감을 가진다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이데올로기는 사람들에게 '좋은 삶'을 약속해주고, 그 좋은 삶을 실현할 방법을 제공해준다. 



출처: 

Baldwin,Douglas & Calder,William. Ideologies. (New York:McGraw-Hill Ryerson Limited). 1982. p.8


원시 번역 

samsung | SM-A520W | Normal program | Center-weighted average | 1/33sec | F/1.9 | 0.00 EV | 3.6mm | ISO-125 | Flash did not fire | 2020:09:20 01:23:38



samsung | SM-A520W | Normal program | Center-weighted average | 1/33sec | F/1.9 | 0.00 EV | 3.6mm | ISO-125 | Flash did not fire | 2020:09:20 01:23:54




 

Posted by NJ원시

댓글을 달아 주세요

정치철학2020. 8. 7. 09:37

제목: 에로스와 문명 - 프로이트에 대한 철학적 탐구 

(* 에로스 사전적 의미 : 에로스란 생명을 보존하려는 모든 본능을 의미한다. 이는 기초적인 필요를 충족시키려는 추진력으로 표출된다. 정신과 육체를 보존하고 보호하려는 승화된 추진력과 충동이다. )


저자:  Herbert Marcuse (1898-1979) 마르쿠제 

번역: 원시. 

원제:  Eros and Civilization - A philosophical Inquiry into Freud 

출판 시기: 1955 


 소피 마르쿠제 (1901-1955)를 기념하며 


서설


‘인류 문명이 인간 본능을 끊임없이 억압하면서 건설되었다’는 프로이트 명제는 사람들에게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이런 문명 건설과정에서 개개인이 짊어져야 하는 고통이 따른다. 그러나 이 고통이 그 문명의 혜택과 동일한 가치를 지니는가라는 프로이트의 문제제기는 그렇게 심각한 고려대상은 아니었다. 


프로이트 자신조차도 이러한 문명 건설과정이 불가피하고 되돌릴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더욱더 사람들은 그의 문제제기를 심각하게 다루지 않았다. 인간의 본능적 필요를 개인이 자유롭게 충족시키는 것은 문명사회와 양립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본능 충족을 거부하고 그것을 뒤로 미루는 지연 행위야말로 문명 진보의 선결조건이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행복이란 결코 문화적 가치가 아니다.”  행복이란 ‘정규 직업으로서 노동’의 원칙에 종속되어야 하고, 일부일처제의 ‘통제와 처벌’ 원칙에 종속되어야 하고, 법과 질서의 기득권 체제에 종속되어야 한다. 리비도에 대한 체계적인 희생, 리비도를 사회적으로 유용한 활동과 표현에 강압적으로 굴절시킨 것이 바로 ‘문화 (문명)’이다. 


(*리비도: 사전적 의미- 리비도란 성적 쾌락이나 자기 생명 보존을 위해 원시적 생물학적 충동에서 발생한 본능적이고 심리적인 에너지임.)



그런데 이런 희생의 대가로 인해 되돌아오는 혜택은 상당히 컸다. 인간의 자연 정복은 기술적으로 진보한 문명 영역들에서 완결되었고, 이로 인해 인류 역사 어느 때보다도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의 필요가 충족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삶의 기계화와 표준화, 정신의 빈곤화, 현재 진보의 점진적인 파괴가 발생했다. 그러나 이것들은 서구유럽 문명과정을 지배해온 원칙들을 반성하고 문제로 삼을 만한 충분한 근거는 되지 못했다. 생산성의 지속적인 증가는 끊임없이 더욱더 현실적인 ‘모두를 위한 보다 나은 삶’에 대한 확실한 약속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진보가 거듭되면 거듭될수록, 부자유와 구속의 강도는 더 거세어질 것으로 보인다.  산업화 문명의 세계를 거치면서,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범위는 더 넓어졌고, 그 지배 효율성의 강도는 훨씬 더 커졌다. 이런 경향은 진보를 향한 여정에서 우연적이고 일시적인 퇴행이 결코 아니다. 


강제 수용소, 대량 학살, 세계 대전, 핵폭탄 투하는 야만주의 (barbarism)라는 잘못된 습관으로 다시 한번 복귀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 과학, 기술, 정치권력 행사의 성공을 전 사회영역에 제어장치 없이 전일적으로 적용시킨 것이다. 


인류의 물질적이고 지적인 성과물들이 이제 막 진정한 자유 세계를 창출할 때, 인간에 대한 인간의 가장 효과적인 종속과 파괴는 이런 문명의 정점에서 발생하고 말았다. 우리의 현재 문화의 이러한 부정적인 측면들은 기성제도들의 낡음과 시대착오성을 잘 보여주고, 새로운 형태의 문명의 출현을 의미한다. 


아마도 ‘억압’이 가장 강력하게 유지되면 될수록, 그것은 점점 더 불필요한 것이 될 것이다. 만약 ‘억압’이 문명의 본질에 속해야 한다면, 문명에 대한 프로이트의 문제제기는 무의미한 것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억압 이외에 별 다른 대안이 없을 테니까. 


그러나 프로이트의 이론은 ‘문명’과 ‘억압’이 동일하다는 생각을 폐기할 근거들을 제공해준다. 프로이트의 이론적 성과를 고려해 본다면, 이 주제에 대한 토론은 다시 열려야 한다. ‘자유’와 ‘억압’, 생산성과 파괴, 지배와 진보의 상호관계는 필수 불가결한 문명의 원칙인가? 그게 아니라면, 이러한 관계는 단지 인류의 특정한 역사적 조직화의 결과일 뿐인가? 


프로이트 용어를 쓰자면, ‘쾌락 원칙’과 ‘현실 원칙’ 사이 갈등은 서로 화해 불가능해서, 그 갈등이 인간의 본능 구조 자체를 억압적으로 탈바꿈시켜야만 했는가? 이게 아니라면, 이 둘 간의 갈등이 근본적으로 다른 삶과 존재양식의 체험, 근본적으로 다른 인간과 자연의 관계,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 양식의 관계 기초 위에서 건설된 ‘비 억압적’ 문명 개념을 새롭게 가능케 하는가? 


나는 ‘비억압적 문명’ 개념을 토론할 때, 그것을 한갓 추상적이고 유토피아적인 이론화 작업으로만 제시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주제 토론은 두 가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근거 위에서 정당화될 것이다. 



첫번째, 프로이트는 ‘비 억압적 문명’의 역사적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부정했다. 그런데 프로이트의 이론적 개념은 오히려 프로이트의 이러한 부정을 논박하는 것처럼 보인다. 


두번째, 억압적 문명의 성과 그 자체가 억압의 점진적 폐지의 선결조건들을 창출해 낸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근거들을 명료하게 설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프로이트의 이론적 개념들을 그것의 사회-역사적인 맥락과 내용이라는 측면에서 재해석할 것이다.



 이러한 재해석 절차는 수정주의적 신-프로이트 학파를 부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수정주의자와 대조적으로, 나는 프로이트 이론 자체가 “사회역사적”이라고 해석하고, 이러한 실체를 드러내기 위해서 어떠한 새로운 문화적 혹은 사회학적 나침반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사실 알고보면, 프로이트의 “생물학주의 (biologism:인간을 생물학적 관점에서만 해석함”는 심층적인 측면에서 보면 사회 이론이다. 그런데 신-프로이트 학파는 이런 해석을 지속적으로 애써 거부해왔다.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생물학적인 요소에서 문화적 요소로 강조점을 변환시킴으로써, 신 프로이트 학파는 오히려 인간의 본능 안에 자리잡은 사회의 뿌리들을 잘라내 버렸다. 



그 대신 개인을 설명할 때, 그 개인이란 사회가 이미 만들어놓은 ‘환경’이라고 간주해버렸고, 사회와 개인을 대립시키는 방식으로 사회를 위치 지운다. 신 프로이트 학파는 이렇게 개인과 사회 관계를 설정함으로써, 사회의 기원과 정당성을 따져 묻지 않는다. 이러한 ‘환경’에 대한 신 프로이트 학파의 분석은 사회적 관계의 신비화에 저항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에 굴종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들의 비판 역시 아주 보호벽으로 잘 둘러싸인 기성제도의 영역 안에서만 작동한다. 


결과적으로 신 프로이트 학파의 비판은 엄밀한 의미에서 보자면 이데올로기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기성 체제 바깥에 있을 수 있는 어떠한 개념적 토대를 제공하지 않았고, 그 비판적 생각과 가치 대부분은 그 체제 안에서 제공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주의적 도덕과 종교는 그들의 부활을 축하한다. 도덕과 종교의 주장을 ‘병든 것’이라고 애초부터 반박했던 바로 그 심리학의 용어들로 이 도덕과 종교가 치장을 했다는 사실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실은 이상주의적 도덕과 종교가 바로 공식적으로 대중들에게 널리 수용되고 선전된 태도들과 동일한데도, 그것들이 이 사실을 은폐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군다나 문명의 역사적 구조에 대한 가장 구체적인 통찰은 그 수정주의자들이 거부했던 바로 그 개념들 안에 들어있다고 우리는 믿는다. 프로이트의 메타 심리학, 그의 후기 본능 이론, 인류의 이전-역사의 재구성이 이러한 ‘개념들’에 속한다. 



그런데 정작 프로이트 자신은 이러한 개념들을 단지 ‘연구 가정들 working hypotheses’으로만 간주해버렸다. 이러한 가정들의 기능이란 불분명한 것을 해명하는 것이고, 이론적으로 분리된 통찰들 사이에 임시 가교를 설치하는 것이었다. 프로이트에게 그러한 통찰은 물론 늘 교정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가정들이 더 이상 심리분석적 이론과 실천을 발전시키지 않으면, 그것들은 폐기될 운명에 처한다. 



프로이트 이후 심리분석의 발달 과정에서 이러한 메타 심리학은 거의 다 절멸되었다. 심리분석이 사회적으로도 과학적으로도 사람들 사이에 존경을 받게되자, 어떤 사건의 원인들에 대한 추측들(이론화 :speculations)을 서로 맞춰보고 타협하는 작업으로부터 심리분석은 점점 더 멀어져갔다. 


그러한 추측들의 조율과 타협의 의미는 한 가지 이상이었다. 그 추측들은 임상 관찰 영역과 치료적 유용함을 뛰어넘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추측들의 인간 해석에 따르면, 인간이 프로이트 초기 “범 성욕주의” 보다 사회적 금기 (taboo)에 대해 더 공격적인 태도를 취했다는 것이다. 프로이트 초기 “범 성욕주의”는 문명의 폭발적이고 강력한 토대로 밝혀졌다. 



향후 진행될 토론은 심리분석의 금기시된 통찰을 문명의 기본적인 변화 발달 과정을 해석하는데 적용시켜보도록 할 것이다. (심리 분석 그 자체에서도 금기시된 통찰) 이번 에세이의 목적은 심리분석의 철학에 기여하는 것이지, 심리 분석 그 자체에 기여하고자 함은 아니다. 이 책은 이론 영역 안에만 머무를 것이다. 또한 심리 분석이 발달해서 점차 기술적인 분과 학문으로 분화되었는데, 이 책은 그런 기술적인 분과 과학 영역 바깥에 머무를 것이다. 



프로이트는 엄밀한 의미에서, 인간에 대한 이론, 즉 “심리(정신)-학”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이론으로써, 프로이트는 그 자신의 위치를 철학의 위대한 전통 위에 올려놓았을 뿐만 아니라 철학적 기준들에 부합한 작업을 수행했다. 



우리의 관심사는 프로이트 개념들의 해석을 올바로 가다듬거나 향상시키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그 개념들이 보유하고 있는 철학적이고 사회학적 의미가 무엇인가를 해명하는데 있다. 프로이트는 그의 철학과 그의 과학을 구별하는데 엄청난 노력을 쏟아 부었다. 그런데 신 프로이트 학파는 프로이트의 철학을 대부분 부정해버렸다. 치료라는 이유로, 그러한 부정은 완벽하게 정당화되었다. 


그렇지만 어떠한 치료적인 논거도 이론적 구성의 발달을 막아서는 안된다. 이러한 이론적 구성의 목표는 개인의 질병을 치료하는데 있지 않고, 일반적인 신체 이상이나 병을 진단하는데 있다. 





보충: 


몇 가지 용어들에 대한 예비 설명 문명 (civilization) 은 ‘문화 culture’와 교환가능한 의미이다. 프로이트의 “문명과 그 불만 civilization and its discontent”에서 처럼. 


억압 repression, 그리고 억압적 repressive 는 비-기술적인 의미로 사용했다. 이는 의식적이고 무의식적인, 외적인 그리고 내적인 ‘자제, 구속, ( restraint ) 통제, 제약 (constraint), 진압, 억제 (suppression)을 뜻한다. 


본능 (instinct)은 프로이트의 ‘본능,충동:트리프Trieb’ 개념에 따라, 인간 생명체 (organism) 의 기본적인 “욕구 drive, 추동력”을 지시한다. 이러한 욕구들은 역사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 그 욕구들은 정신적인 상징과 육체적인 상징 (대변)을 알아나간다. 






참고 기사:



김인환 선생 번역 출판


당시 동아일보 신간 소개가 흥미롭다.


김인환 역. 에로스와 문명 (왕문사 256면. 550원. 60년대 구미 젊은이들에게 현대문명의 저항의 원리를 제공한 후기 마르쿠제의 대표작으로 국내 초역. 문명 과잉이 제기하는 억압의 사회를 극복, 에로스적인 노동에 의해 인간을 해방시키는 사회로 변혁할 것을 역설한다.



Posted by NJ원시

댓글을 달아 주세요

정치철학2020. 5. 7. 17:47

노회찬 "6411버스 노동자"와  베버 "노동자" 관점 차이: 베버가 본 독일 노동자 계급 - 정치적 리더십 소명의식과  권력본능 결여  


1. 몇 년간 정의당의 어떤 모순을 관찰해오고 있다.  노회찬은 " 6411번 노동자 정당이 정의당이다"라고 했지만, 막스 베버는  "독일 노동자들은 정치적으로 미성숙하고, 정치적인 변화를 꺼려하고 인습에 안주하기 때문에, 독일 정치의 미래가 될 수 없다"고 1919년에 주창했다. 


정의당 전체는 아니지만, 일부 당원들과 진보비즈니스 단체의 막스 베버  '책임정치' 바겐세일이 놓치고 있는 것은, 노회찬의 "6411번 버스 노동자"가 투명인간이 아니라 한국 참여민주주의의 주체, 노동해방의 주인이라는 것이다. 

 

정의당이 2020 총선에서 거의 모든 후보들이 '노회찬의 6411 버스'를 자신의 정치노선으로 한번 이상씩은 언급했다. 이런 사실을 감안하면, 형식 논리적으로보면, 정의당은 '노회찬의 6411번 버스 노동자' 관점을 버리던가, 막스 베버의 부정적이고 비관주의적 '노동자 관점'을 버리던가 해야 한다.


막스 베버는 독일 노동자들을 자신이 주장하는 독일 리버럴 민주주의 주체로도 간주한 적도, 그런 정치적 구상을 한 적도 없다. 독일 노동자 계급의 현 상태 (존재: Sein)가 이러하니, 정치적으로 각성된 정치 주체로 되어야 한다( 당위 Sollen)는 것도 연구하지 않았다. 


 한국 노동자들, 모든 비정규직도, 아니 비정규직 50%도 정의당에 투표하지 않는다. 정의당이 그들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정책을 발표해도 투표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현 상태와 정치의식 사이에 존재하는 커다란 간극을 좁히기 위해 연구하고 학습하고 토론하고 실천하고 조직하는 것이다. 그게 진보정당으로서 정의당이 해야할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월급받는 노동자들을 '정의당 한번 찍어주는 팬'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당의 주체가 될 수 있는 정당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야말로 정의당의 '정치 신념이자 확신'이 되어야 한다.


2.  1895년 막스 베버가 프라이부르그 대학교수 취임 연설에서 나타난 "노동자"에 대한 태도와 관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막스 베버가 31세되던 1895년 5월 프라이부르그 대학에 교수가 되어 취임강연을 했는데, 그 제목이 “민족국가와 민족경제정책“이다. 연설 말미에, 베버는 독일 노동자 계급이 독일 미래의 주체가 될 수 없다고 진단했다. 왜냐하면 독일 노동자계급은 경제적 이득을 위해서는 조직적인 투쟁을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독일 노동자들을 좌지우지 하는 저널리스트 집단보다 훨씬 더 미성숙하기 때문이다.


 베버는 로마 역사와 프랑스 혁명 시기 1792-5년 국민공회의 분위기와 독일 노동자 계급을 비교한다. 독일 노동자계급에게는 로마 귀족 카틸리나의 반역 에너지의 불꽃도 없고, 프랑스 국민공회에 불었던 강력한 민족적 열정의 기미도 없다. 독일 노동자들은 정치적 거장의 덕목이나 능력은 없고, 정치적 소-장인(Kleinmeister)에 불과하다. 


정치적 지도력이라는 소명을 부여받은 계급에게 볼 수 있는 위대한 권력 본능이 독일 노동자계급에게는 결여되어 있다. 또한 독일 노동자계급은 정치적인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정치적인 변화를 별로 희구하지도 않고, 인습과 관습에 순치되어 있다고 봤다. 


독일 노동자처럼 정치적인 학습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정치리더가 되면, 가장 파괴적인 집단이고, 따라서 우리들의 정치적 적이라고 막스 베버는 진단했다. 독일 노동자계급이 정치적으로 성숙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부하기 좋아하는 사람이고 인기의 왕관을 쓰고자 하는 안달복달하는 자일 뿐이다. 


3. 정의당 노회찬의 대표 수락 연설에 나타난 "6411번 버스 노동자" 관점


"새벽 4시 5분에 출발하는 6411번 버스타고 강남으로 출근하는 비정규직 청소노동자, 이분들은 태어날 때부터 이름이 있었지만, 그 이름으로 불리지 않습니다. 그냥 아주머니입니다. 그냥 청소하는 미화원일 뿐입니다. 한 달에 85만원 받는 이분들이야말로 투명인간입니다. 존재하되, 그 존재를 우리가 느끼지 못하고 함께 살아가는 분들입니다 (......)


그 누구 탓도 하지 않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만들어 나가는 이 진보정당, 대한민국을 실제로 움직여온 수많은 투명인간들을 위해 존재할 때, 그 일말의 의의를 우리는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상 그동안 이런 분들에게 우리는 투명정당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정치한다고 목소리 높여 외치지만 이분들이 필요로 할 때, 이분들이 손에 닿는 거리에 우리는 없었습니다. 존재했지만 보이지 않는 정당, 투명정당, 그것이 이제까지 대한민국 진보정당의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이제 이분들이 냄새 맡을 수 있고, 손에 잡을 수 있는 곳으로, 이 당을 여러분과 함께 가져가고자 합니다. 여러분 준비되었습니까?"



4.  정의당의 '노동자 관점' - 직장인, 월급쟁이에 대한 관점은 무엇인가,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


노동자, 월급쟁이, 학생, 비정규직, 주부, 노인은 현금이나 쥐어주는 단순한 복지시혜 대상이나 불우이웃이 아니다. 선거 때 정의당 찍어주는 팬클럽 회원에 그쳐서도 안된다. 


그들의 일터에서, 휴식터에서, 놀이터에서, 노동의 현장과 노동의 바깥 공간에서 그들의 희로애락이 담긴 말, 글, 행동이 정의당으로 흘러 들어와야 한다. 











참고 자료




1895년 막스 베버, 프라이부르그 대학 취임 강연 - (번역 요약) 원시 


민족국가와 민족경제정책 (Der Nationalstaat und die Volkswirtschaftspolitik) 

뒷부분 pp.30-32 


막스 베버는 비르마르크 체제 하에서 독일 부르주아 계급이 정치적으로 미성숙해서 경제적인 대의도 가지고 있지 않고, 정치적으로도 교육받지 못했다고 진단했다. 어떠한 경제적 요소가 그러한 정치교육을 대체할 수 없다.


그렇다면 부르조아 계급도, 대토지 지주인 융커 계급도 아닌, 어떤 다른 계급이 정치적으로 더 위대한 미래의 주체가 될 수 있는가? 


현대 노동자가 자신있게 부르주아 계급의 이상의 상속자라고 선언하다.

노동자 계급이 독일 정치의 지도자가 될 전망은 있는가? 


오늘날 독일 노동자계급이 정치적으로 성숙하거나, 정치적 성숙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고 누군가 말한다면, 그 사람은 아부쟁이 (쉬마이쉴러)이고, 수상쩍은 인기의 왕관을 쓰고 싶어하는 자일 것이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독일 노동자계급의 최상층은 자기중심적인 자산가계급이 인정하는 것보다 훨씬 더 성숙했다. 독일 노동자 계급은 또한 공개적이고 조직적인 경제적 권력투쟁이라는 방식을 통해 그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할 자유를 정당하게 요구한다. 


그러나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독일 노동자계급은 저널리스트-패거리들보다 훨씬 더 미성숙하다. 그 일단의 패거리들은 리더십을 독점하고 싶어하고 노동자계급에게 그것을 믿게 만들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지위가 강등당한 부르주아들의 영토 안에 머무르면서, 독일 노동자들은 100년 전 추억놀이에 빠진다. 그들의 불안한 정서 때문에, 그들 마음 속에서는, 1792-5년 프랑스 혁명 국민공회 (National Convention) 대표자의 정신적 후계자들이라는 생각이 자리잡기도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독일 노동자들은 그들이 스스로 현실에서 보여주는 것보다 더 위험하지도 위협적이지도 않다. 그들에게는 로마 귀족 카틸리나의 반역 에너지의 불꽃도 없고, 프랑스 국민공회에 불었던 강력한 민족적 열정의 기미도 없다. 


독일 노동자들은 정치적 거장이 아니라 능력이 모자란 정치적 소장인에 불과하다. 정치적 지도력이라는 소명을 부여받은 계급에게 볼 수 있는 위대한 권력 본능이 독일 노동자계급에게는 결여되어 있다. 



노동자들이 정부 공동 운영의 한 축으로서 참여할 때, 자본에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만이 그들의 정치적 적들이 아니다.  독일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노동자들이 자본과의 공통적인 이해관계 공동체를 형성한 흔적들이 거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노동자들의 정치적 성숙함에 대해 묻는다, 왜냐하면 

정치적인 교육을 받지 않고, 사회가 이미 옳다고 정해놓은 것만 하고, 정치적인 변화를 원치 않은 인습에 순치된 사람들이 한 나라를 지도하게 내버려 두는 것이야말로 가장 파괴적인 일이기 때문이고, 독일 노동자들은 이러한 성격을 아직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의 정치적 적이다.  



왜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노동자들은 독일 노동자들과 부분적으로 다른가?  

잉글랜드 노동자들이 이해관계를 관철시키기 위해 조직적으로 투쟁하면서 완성시킨 더 오래된 경제교육 때문만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한 정치적 계기가 있었기 때문에 그게 가능했다. 그것은 바로 잉글랜드의 세계 강대국의 지위에 대한 노동자들의 공감 때문이었다.  


이것은 잉글랜드가 지속적으로 정치적 강대국의 과제를 해결하게 만들고,   개인들이 끊임없이 정치적인 학습을 받게 만들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우리 독일인들은 국경선이 위험에 빠질 때나 긴급하게 그 정치적인 학습을 받는다.


큰 정치가 강력한 정치적 권력문제의 중요성을 우리들에게 똑똑히 보여줄 것인가라는 문제는 우리 독일 발전에서도 또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우리는 독일의 통일은 옛날에 저질러버린 유년시절 장난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통일이 독일 세계권력정치의 출발이 아니라 종지부라면, 그 값비싼 비용 때문에 중도포기가 더 나았을 것이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독일의 위험한 상황이란, 국가의 권력이해관계의 담지자로서 부르주아 계급이 힘이 없어 보이고, 노동자계급이 부르주아 계급의 지위를 떠맡을 정도로 성숙해질 징조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회의 깊이에 최면걸려 거기에 빨려 들어간 것처럼 바라보는 사람들이 믿는 것처럼, 위험은 대중에 있지 않다.피지배자의 경제적 상태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위로 성장하는 지배계급의 정치적 자격조건에 대한 질문이 사회정치적 문제의 궁극적인 내용이다. 


우리의 사회정치적 활동 목표는 세상사람들의 행복이 아니라, 험난한 미래의 투쟁을 위해 민족국가의 사회적 통합을 달성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통합은 근대 경제발전 과정에서 해체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오늘날 노동운동에 결여된 정치적 의미를 갖게 될 “노동귀족”을 성공적으로 탄생시킨다면, 부르주아의 팔이 아직은 창을 던질 만큼 충분히 강하지 않아 보이지만, 그것은 최초로 더 넓은 어깨 위에 놓여지게 될 것이다. 그 날이 오려면 한참 더 가야겠지만.



Werden andere Klassen die Träger einer politisch größeren

Zukunft sein? Selbstbewußt meldet sich das moderne Proletariat

als Erbe der bürgerlichen Jdeale. Wie steht es mit seiner

Anwartschaft auf die politische Leitung der Nation?


Wer heute der deutschen Arbeiterklasse sagen würde, sie sei


  


31


politisch reif oder auf dem Weg zur politischen Reife, der

wäre ein Schmeichler und strebte nach der fragwürdigen Krone

der Popularität.


Oekonomisch sind die höchsten Schichten der deutschen

Arbeiterklasse weit reifer, als der Egoismus der besitzenden Klassen

zugeben möchte, und mit Recht fordert sie die Freiheit, auch in der

Form des offenen organisierten ökonomischen Machtkampfes ihre

Jnteressen zu vertreten. Politisch ist sie unendlich unreifer, als

eine Journalistenclique, welche ihre Führung monopolisieren

möchte, sie glauben machen will. 


Gern spielt man in den Kreisen

dieser deklassierten Bourgeois mit den Reminiscenzen aus der

Zeit vor 100 Jahren - man hat damit in der That erreicht,

daß hier und da ängstliche Gemüter in ihnen die geistigen Nach-

kommen der Männer des Konvents erblicken. 


Allein sie sind

unendlich harmloser, als sie selbst sich erscheinen, es lebt in ihnen

kein Funke jener katilinarischen Energie der That, aber freilich

auch kein Hauch der gewaltigen nationalen Leidenschaft, die

in den Räumen des Konventes wehten.


 Kümmerliche politische

Kleinmeister sind sie, - es fehlen ihnen die großen Macht-

instinkte einer zur politischen Führung berufenen Klasse. 


Nicht

nur die Jnteressenten des Kapitals, wie man die Arbeiter glauben

macht, sind heute politische Gegner ihrer Mitherrschaft im Staate.

Wenig Spuren der Jnteressengemeinschaft mit dem Kapital

fänden sie bei Durchforschung der deutschen Gelehrtenstuben. 


Aber:

wir fragen auch sie nach ihrer politischen Reife, und weil

es für eine große Nation nichts Vernichtenderes giebt, als die

Leitung durch ein politisch unerzogenes Spießbürgertum, und

weil das deutsche Proletariat diesen Charakter noch nicht ver-

loren hat, deshalb sind wir seine politischen Gegner. Und weshalb


ist das Proletariat Englands und Frankreichs zum Teil anders

geartet?


Nicht nur die ältere ökonomische Erziehungsarbeit,

welche der organisierte Jnteressenkampf der englischen Arbeiter-

schaft an ihr vollzogen hat, ist der Grund:


 es ist vor allem

wiederum ein politisches Moment: die Resonanz der

Weltmachtstellung, welche den Staat stetig vor große macht-

politische Aufgaben stellt und den einzelnen in eine chronische

politische Schulung nimmt, die er bei uns nur, wenn die Grenzen

bedroht sind, akut empfängt.


 - Entscheidend ist auch für unsere

Entwicklung, ob eine große Politik uns wieder die Bedeutung

der großen politischen Machtfragen vor Augen zu stellen ver-

mag. 


Wir müssen begreifen, daß die Einigung Deutschlands ein

Jugendstreich war, den die Nation auf ihre alten Tage beging

und seiner Kostspieligkeit halber besser unterlassen hätte, wenn

sie der Abschluß und nicht der Ausgangspunkt einer deutschen

Weltmachtpolitik sein sollte.


Das Drohende unserer Situation aber ist: daß die bür-

gerlichen Klassen als Träger der Machtinteressen der Nation

zu verwelken scheinen und noch keine Anzeichen dafür vorhanden

sind, daß die Arbeiterschaft reif zu werden beginnt, an ihre

Stelle zu treten.


Nicht - wie diejenigen glauben, welche hypnotisiert in die

Tiefen der Gesellschaft starren, - bei den Massen liegt die Gefahr.

Nicht eine Frage nach der ökonomischen Lage der Be-

herrschten, sondern die vielmehr nach der politischen Quali-

fikation der herrschenden und aufsteigenden Klassen ist

auch der letzte Jnhalt des sozialpolitischen Problems. 


Nicht

Weltbeglückung ist der Zweck unserer sozialpolitischen Arbeit,

sondern die soziale Einigung der Nation, welche die moderne

ökonomische Entwicklung sprengte, für die schweren Kämpfe der

Zukunft. Gelänge es in der That, eine "Arbeiteraristokratie" zu

schaffen, welche Trägerin des politischen Sinnes wäre, den wir heute

an der Arbeiterbewegung vermissen, dann erst möge der Speer,

für welchen der Arm des Bürgertums noch immer nicht stark

genug zu werden scheint, auf jene breiteren Schultern abgelegt

werden. 


Bis dahin scheint es noch ein weiter Weg.










Posted by NJ원시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후후히히하하호호흐흐허허

    이런 컨텐츠를 무료로 몰래 염탐해서 볼 수 있다는 게 충격적입니다. 기자들보다 깊이 있고 학자들보다 열정적인 필진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세계에 대한 해석에 깊이가 있고 열정이 있고 진득한 호기심과 문제의식이 있는 분을 못내 뒤지고 있었어요. 저는 맑스 베버의 대표작만을 읽었고 루카치부터 하버마스까지 역시 대표저작을 한 개씩 일독한 정도입니다. 공부할 때 생각이 나고 그때 그들의 문장을 읽으며 느꼈던 기묘한 열정과 당혹감이 다시 떠오르네요. 감사합니다.

    2020.06.19 18:22 [ ADDR : EDIT/ DEL : REPLY ]
    • 지루한 글일 수 있는데, 읽어주시고 댓글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베버, 루카치 책 읽으신 거 메모도 남겨주시고 그러세요....

      2020.07.02 16:05 신고 [ ADDR : EDIT/ DEL ]

정치철학2020. 4. 28. 01:29
April 27, 2019 at 9:33 PM · 

"우리가 잘못 믿고 있는 신화가 하나 있다. 자본주의를 자라나게 하고 번창하게 만들었던 것이 ‘근면’과 ‘희생’를 강조하는 프로테스탄트 윤리라는 잘못된 신화이다. 역사적 사실을 보자면, 자본주의는 흑인 노예들의 착취와 고통의 기초 위에서 성장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흑인이건 백인이건 미국이건 다른 나라건 가난한 사람들의 노동력 착취를 통해 그 자본주의가 번성하고 있다. - 마틴 루터 킹 (미국 민권 운동 목사)"

[소감] 마틴 루터 킹이 막스 베버의 저서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주장을 이렇게 비판했다.

유럽 좌파들과 사회주의자들이야 당연히 막스 베버가 설명한 ‘자본주의의 기원과 칼뱅니즘 Calvinism 과 같은 프로테스탄트 윤리 (금욕 절제 근면노동 강조) 사이 관련성을 설득력있거나 역사적으로 타당하다고 보지 않았다.

영국에서 자본주의 생성과 발전은 농촌에서 자기 토지를 박탈당한 영국농민들이 도시 공장에서 임금노동자가 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물론 자본주의의 맹아들은 농업에서 생산력과 기술의 향상 때문에 생겨났고 농업분야에서 임금노동자가 생겨나기도 했다.

유럽과 달리 미국 자본주의의 발전 과정은 400년간 흑인노예노동을 제외하고는 설명할 수 없다. 1862년 미국 노예해방 선언 역시, 미국이 산업자본주의로 한 단계 발전해 나가는데 값싼 노동력이 필요했다. 그 노동력 공급원들 중에 하나가 흑인 노예들이었다.

미국 남부 대토지 소유자들도 아프리카에서 값싸고 육체노동력에 유리한 흑인들을 구매해서 토지경작에 투입했듯이, 미국 산업자본가들 역시 값싼 양질의 흑인노예들을 노동자들로 고용할 필요성이 있었다.

미국 아프리카 출신 흑인들이 지난 400년간 미국 문명, 50개주로 구성된 미 연방국가에 기여한 것을 어떻게 화폐량으로 환산해낼 수 있을까?

Image may contain: possible text that says

 '"We have deluded ourselves into believing the myth that capitalism grew and prospered out of the Protestant ethic of hard work and sacrifice.

 The fact is that capitalism was built on the exploitation and suffering of black slaves and continues to thrive on the exploitation of the poor both black and white, here and abroad." and and white, here and abroad." 

Martin Luther King,Jr. 7Rmed'

United Morality

April 26, 2019 at 12:37 PM · 




Posted by NJ원시

댓글을 달아 주세요

정치철학2020. 4. 9. 07:59

대구, 1960년 419 민주항쟁의 출발을 만들었던 도시, 그 부활을 기대하며.

코로나 19 위기시대, 다원주의적 민주주의와 관용정신이 절실한 415 총선이 되어야 한다. 


'우리'라는 말은 참 좋은데, 폭력이 될 수도 있다. 1989년 동유럽 시민들이 "우리가 인민이다 Wir sind das Volks"라는 구호를 외치며 민주주의 회복을 외쳤을 때는 진보적인 의미의 '우리'였다. 그러나 "우리 지역, 우리 나라를 떠나라"는 비관용적 혐오정치적 구호는 반민주적이며 반인륜적인 '우리'가 된다. 조폭 '영토'전쟁과 차이가 없게 된다.  영국 런던에서 성은 목씨,이름은 조나단인, 한 싱가포르 (중국계) 학생이 폭행을 당했다. "너네 나라 코로나 바이러스를 내 나라에 왜 가져왔어"라는 욕을 들으며 길거리에서 폭행을 당했다. 몇 사람이 목씨를 집단 구타했다.


다른 한편, 대구시에서 박근혜 지지자가 정의당 조명래 후보 청년 선거운동원을 때렸다.  "여기는 박근혜야" 외치며, 조명래 후보가 연설하는 연단에 올라가 하트 모양을 그리고 조롱한 후, 단상을 내려와 한 청년을 때리며 행패를 부렸다.


지금 해외에서는 트럼프가 'COVID-19'를 '중국 바이러스'라고 한 이후, 한국인, 중국인, 아시아인들에 대한 폭행과 공격이 이어지고 있다. 한국인인 나 역시 캐나다 미국에서 잉글랜드계와 스코트랜드계인을 구별하지 못했듯이, 미국 캐나다 유럽 사람들은 중국인과 한국인을, 한국인과 일본인을 구별하지 못한다. 

중국인 한국인 모두 다 폭력 위협과 협박에 직면해 있다. 


박근혜 지지자의 폭력을 비판하는 글을 쓰면서, 한편으로는 이 말을 첨언해야겠다. '대구는 원래 보수야' '대구는 버려'라는 정치적 발언을 한 김어준식은 잘못되었다. 대구 폭행현장을 비판하는 것은 '대구시와 대구시민 전체'를 비난하기 위함이 아니라, 인권유린 현장을 비판하고자 함이다. 


"여기는 정의당 영토야, 민주당 영토야, 박근혜 영토니까, 너는 맞아도 된다"는 식은 "코로나 바이러스 몰고 온 중국인처럼 생긴 사람들은 맞아도 된다" 식 사고와 똑같다.


대구가 원래 보수적인 도시가 아니었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대구는 수구적이고 저렇게 폭력적인 비-관용의 도시가 아니었다. 1960년 315 선거에서 이승만 독재자를 가장 극렬하게 반대한 도시, 이승만 자유당 표가 제일 적게 나온 도시가 바로 '대구'였기 때문이다.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도시가 바로 대구였다. 


역사는 돌 뿐만 아니라, 변화한다. 한 때 대구는 "여긴 이승만 독재자 땅이 아니야, 독재자 OUT, 이기붕 깡패정치 아웃"을 외치던 가장 민주적인 도시들에 하나였음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그럼에도, 저 폭행현장을 방치한 대구시에 항의전화는 할 필요는 있다.




https://bit.ly/2RobZJ9






기사 출처: 


https://www.theguardian.com/uk-news/2020/mar/03/police-investigate-alleged-coronavirus-linked-attack-on-london-student-jonathan-mok





Posted by NJ원시

댓글을 달아 주세요

정치철학2020. 3. 28. 04:37


70년 전에도, 80년 전에도 지금과 유사한 고민을 하다.

Nakjung Kim

March 24, 2013 at 1:43 PM · 


요새 잠시 쉬는시간에 아시아 도서관(중,일,한국책 취급)에 가는데, 신청한 책들이 태평양을 건너오고, 박치우 관련 책도 2권이나 비치가 되었다. 

덕분에 일제시대 경성제국대학이 1926년에 일본의 아시아 지배책의 일환으로 설립되었다는 것도, 대만보다 1년 먼저 설립되었다는 것, 독일대학처럼 예과 2년, 그 다음 3년, 즉 학부가 5년제로 운영되었다는 것도 확인하게 되었다.


 (동경대학은 1886년에, 교토대학은 1897년) 

경성제대 조선인 합격비율 28% (정원 160명 중, 45명: 법 의학은 일본인이 대부분, 문학쪽에 조선인)


처음에는 정치학과도 법문학부(법학,철학,문학)에 있었으나 2년 정도 유지되고, 폐지시켜버렸다고 한다. 식민지에 정치학과는 불필요하다고 봄. 


철학과는 주로 일본 교수들이 당시 독일에서 수입한 하이데거,칸트,헤겔, 그리스 철학 등이 주류를 이룬다. 박치우도 학부졸업논문으로 하르트만에 대해서 썼다고 한다. 

마르크스에 대한 소개는 미야케 교수와 스즈키 일본 교수가 열정적으로 소개했다고 한다. 

<경제연구회>라는 학생모임에서 유진오 (법학과),김계숙,조용욱(철학과) 등을 중심으로 마르크스주의 서적들을 공부했다고 한다.

 (*당시 마르크스주의 서적은 당시 20년대 독일에서 수입된 것). 그런데 당시 논의되던 주제들은 지금도 다른 형태로 다시 등장하고 있다.


박치우 이야기는 다시 또 하기로 하고,


.... 당시 상황이 궁금하여, 1920년대 동아일보를 보니, 1924년 제 1면 (민족의 100년 대계를 수립하고 단결하자...이런 주장임)에 세계사의 주체를 정신을 본 헤겔 Hegel파, 이 헤겔파를 유심론으로 보고, 유심론과 대조적인 유물론 양자 모두를 비판하고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동아일보가 이해가 유물론 (마르크스주의)은 거의 엉터리 수준이고 철저히 왜곡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동아일보: 유물론은 사회현상을 자연현상과 똑같이,자연법칙의 정명론적인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미신적인 자유의지론자가 말하는 인격적인 의지로 좌지우지하지 못한다 => 이것이 유물론의 주장이라고 동아일보 사설이 말하고 있다.)


<소감> 1) 1924년 동아일보 제 1면 독자가 누구였는가? 

상당히 어려운 말들이 많이 등장 

2) 그러나 용어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아님 

3) 그 책임은 물론 동아일보사에 있기 보다는 1920년대 독일 카우츠키 등이 마르크스를 이해한 방식를 그냥 그대로 따름.

: 자연법칙처럼 인류역사에도 법칙이 있고, 헤겔 관념론이 아니라 마르크스 유물론적 역사사관이 진리임 등이 더 큰 문제임 


4) 당시 마르크스에 대한 연구 수준은 그렇게 심층적이지 않고 <독일 이데올로기>책이나, 1844년 경제 철학수고 등도 발견 및 연구가 되지 않던 상황임.


1924년 1월 2일자 동아일보 1면 신문기사...


USA 미국을, 아름다울 미가 아니라, 쌀 미 자라고 표기한 것도 흥미롭다.











Posted by NJ원시

댓글을 달아 주세요

정치철학2020. 2. 12. 23:29

Nakjung Kim

November 25, 2015 · 

(1) 마르크스 <#자본론>이 수정-번역되어 출판되었다는 뉴스이다. 김수행 선생님의 <자본> 번역은 영어번역본을 위주로 했다. 한국에도 자본론은 여러 번역본들이 있다. 난 번역에 관해서는 ‘다다익선’,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입장이다. 독어본,영어본, 일어본,중국어본, 러시아, 프랑스본이건 간에. 그리고 우리말 입장에서 보면, 우리할아버지 세대 우리말과 현재 우리말은 내용과 숫자 면에서 너무 다르기 때문에, 20-30년에 한번씩 다시 번역될 필요도 있다.


마르크스 책에 국한해서 말하자면, 마르크스는 현재 대학 학과편재로, 철학,정치,경제 (주로 3개 학과에서 텍스트를 주로 다룬다.), 혹은 사회학과에서 다 다뤄지지만, 전체적으로 다루고 있는 사람이나 대학은 많지 않다. (독일,미국,캐나다,영국, 프랑스,한국,일본 다 마찬가지이다) 마르크스는 어느 특정 학과나 그 연구자의 배타적 독점물이 되는 순간 현재 대학제도 하에서는 ‘오해’와 ‘왜곡’이 될 것이다. 서구 마르크스 학계가 다른 학파들에 뒤처진 이유이기도 하다.


따라서 한 연구자가 칸트-헤겔-마르크스의 지적 전통 (독일 이상주의 /이념.관념Idealismus), 유럽 혁명사들과 반혁명사들, 영국 정치경제학파들 등을 통달하거나, 아니면 3~4학과 사람들이 협업을 해야 한다. 언젠가 북한에서 번역한 마르크스의 ‘잉여가치설사’(소위 자본론 4권이라고 하는)를 잠시 훑어 봤는데, 번역 자체도 정확하지 않는 곳이 많고, 누락되기도 했다. 남북한 ‘자본론’ 번역 역사와 수용 및 창조적 재해석을 비교하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다.


살아생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편지 교환에서, “왜 우리들은 당시 사회주의자들에게 인기가 없을까?” 한탄과 비탄을 자주했다. 하지만 적어도 서유럽 학계와 전 세계 학계 밥그릇들과 일자리는 당시에는 별 인기없었고 실제 주류도 아니었던 마르크스 엥겔스가 창출해냈다.


‘문자’는 죽은 후에 승부가 난다. 흥미로운 생명체, 인간이고 인류사의 특징이다

Posted by NJ원시

댓글을 달아 주세요

정치철학2020. 1. 1. 05:37


December 31, 2014 at 7:31 AM · 


민족-민중 집단적 의지 형성과 조직화 (1) 문제 중요성



1987년 대통령 선거 이후, 노태우가 합법적으로 당선되었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1980년 광주 학살자와 1212 군사반란 범죄자였지만, 1987년 대선을 통해서 노태우는 ‘합법성’을 취득하고, 도덕적 ‘정당성’은 결여되었지만 6공화국이라는 정치적 ‘정당성’의 운신의 폭을 넓힐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당시 소위 민민(민족민중)세력은 정치적 도덕적 정당성 모두 결여한 전두환 5공화국과 노태우 6공화국 동일성과 차이을 어떻게 설명하고 어떻게 정치 투쟁을 이끌어 나갈 것인가? 다시 말하면, 전두환 5공화국의 ‘폭력과 강압’, 그리고 본질적으로는 큰 차이는 없지만 유사-파시즘 요소가 가미된 그러나 5공의 무지막지한 ‘폭력과 강압’이 아닌 ‘법적 질서 (김기춘 검사/법무장관)’ 강조와 이데올로기 투쟁을 결합한 노태우 6공화국의 차이을 어떻게 해명하고 이에 대응할 것인가? 이게 큰 문제였다.



80년대 그람시에 대한 개설서들이 몇 권 번역되어 한국에 소개되었다.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은 위 문제들을 푸는데 어느정도 실마리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나는 보았다.


당시 내 생각을 간단히 요약하면, 노태우 6공화국이 87년 합법적인 대선을 통해 당선되었지만, 정치적 도덕적 정당성은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이데올로기 담론 (여론전)을 잘 수행하면서 그 6공 체제의 약점을 파고들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그렇다면 학생운동은 어떻게 변해야 하는가? 중앙집중적 데모 위주가 아니라, 각 학과로 정치,계급 투쟁의 깃발이 이동해야 해야 한다. 이 둘은 병존,공존도 해야 하지만, 공간의 이동, 방점의 이동 필요성이 생긴 것이다.







민족-민중 집단적 의지 형성과 조직 (2)



그람시의 고민은 이탈리아에서 어떻게 민족-민중의 집단적 의지를 형성하고 조직화할 것인가였다. 그람시는 이 역할을 이탈리아 공산당 PCI 가 해야 한다고 봤고, 이탈리아 근대사에서 결핍된 자코뱅 세력이 되어야 한다고 봤다. 


프랑스 혁명에서 빌어온 자코뱅 노선이란, 20세기 초반 이탈리아에서 농민들을 프롤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 하에 묶어두고 동시에 모든 종류의 경제주의, 생디컬리즘, 자생(자발)주의를 거부하는 것이었다. 이 민족-인민(민중) 집단적 정치의지야말로 이태리 국가의 기초라는 게 그람시의 생각이다.



그람시가 이 민민(민족-민중)의지를 강조한 배경에는, 유럽의 국제정치가 있다. 1815년에서 1870년 이 시기는 유럽의 보수세력과 지배계급들이 유럽 전역의 자코뱅 세력들을 필사적으로 깨부수고 탄압하려고 했다. 그람시를 이러한 보수적 정치 지형을 ‘국제적 수동적 균형체제’라고 불렀는데, 이 체제 하에서 지배계급들은 경제적 기업의 권력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그람시는 이러한 국내외 정치현상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이탈리아 지식인들이 민민(민족-민중/인민) 정치의지를 발현하는데 공헌해야 한다고 보고, 이탈리아 자코뱅 세력들 (근대 군주= 정당)이 지적 도덕적 개혁 조직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지적 도덕적 개혁이 경제-사회적 개혁과 연결되어야 한다는 게 그람시의 생각이다. 왜냐하면 경제 사회의 개혁(변혁) 역시 지적 도덕적 개혁을 수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람시가 근대 군주로서 ‘정당(자코뱅)’을 강조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민족-민중 집합적 정치 의지 형성과 조직화를 그 정당의 책무로 설정한 배경은 무엇인가? 그의 리소르지멘토(이태리 통일운동)에 대한 평가와 더불어, 그것은 당시 이탈리아 노동자 계급의 상황, 그 고향 사르디니아 남부 농민과 투린과 같은 북부 산업 노동자 관계, 지역 갈등, 사르디니아 민족주의 문제, 반동적인 지주 계급, 위계서열 권위주의 문화가 강한 이탈리아 생활세계 등과 연결되어 있다.



1906년 남부 사르디니아 농민들의 '독립운동'은 북부에서 파견된 군대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당하고, 반대로 북부 투린 지방 노동자들을 탄압하는데는 남부 사르디니아 군대가 동원되었다. 이러한 복잡한 정치 상황, 특히 노동자 계급의식의 성장이 더딘 상황을 돌파하기 위한 그람시의 대안은 민족-민중 집합적 의지 형성과 조직화였고, 그 주체로 정당를 설정했다.




Posted by NJ원시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