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사망과 역사적 교훈. 1212군사쿠데타,광주학살자 진실 규명, 전두환 살아 생전 완수하지 못했음을 반성하게 된다.
1212 군사쿠데타와 광주학살 범죄자와 동조자들을 처벌하지 못한 살아남은 자들, 우리들을 부끄럽게 하고 전두환은 죽었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저항자들을 전기고문, 물고문했지만, 우리는 민심의 재판에 그 범죄자들을 세우고자 했으나, 결과적으로 지금까지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전두환은 지옥에 입장하기 전에, 1212 군사쿠데타 희생자들과 광주영령들, 그리고 '전두환 독재 타도'를 외치며 청년의 나이로 죽어간 민주열사들에게 사죄하라. 후세 사람들은 전두환과 노태우를 자기 개인 권력으로 사면해준, 김대중, 김영삼 대통령의 오류를 되풀이해서는 안된다. 유권자의 표를 더 얻겠다고 쿠데타와 학살자를 사면해준 것은 역사적인 오점으로 영원히 기록되어야 한다. 1980년 광주 시민 발포자 진실 규명은 계속되어야 하고, 80..
2021. 11. 23.
1987년 10월 26일자, 김영삼과 김대중은 민주당 경선협상에 실패, 각자 대선 후보로 출마하기로. 6공화국 헌법과 법률에 '대통령 선거 결선투표제'를 누락했고, 정당 이념과 정책 중심이 아니라, ..
1. 역사에서 가정. 박정희가 1963년 대선, 1967년 재선 이후, 1969년에 삼선개헌을 하지 않고, 1971년에 대통령에서 물러났다면, 김대중-김영삼은 각각 2번 임기 (총 8년)을 두 사람이 돌아가면서 채웠다고 해도, 1987년 대통령 선거에는 김대중과 김영삼이 더 이상 출마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역사에서 가정은 없다 하지만, 박정희 -전두환 군사반란과 군사독재의 폐해는 고스란히 야당 지도자, 김영삼과 김대중의 한계로 이어졌다. 2022년 대선을 앞두고, 대통령 후보들의 자질이 떨어진 이유는, 김영삼 김대중도 정당의 이념과 정책노선을 내세워 정치를 한 게 아니라, 박정희-전두환 (총통 개념의 독재자)는 아니지만, 권력을 독점했었다. 당내 민주주의나 절차는 부차시 되었고, 당 권력 상층 몇몇 인..
2021. 10. 26.
1995년 한국 소비의 절정시대, 1972년 고소영 세대 "평범한 건, 딱 질색이예요" - 2021년 49세
1995년 고소영 기사를 보며. 소비생활이라는 측면에서. 40~50과 20~30 세대 차이보다는 공통점이 더 많다. 그리고 차이점은 20~30세대는 노골적인 '자본주의 이윤추구' 논리가 판치던 시대에 청소년기를 보냈다는 것이다. 40~50세대는 제한속도 60km 도로에서 자동차를 운전했다면, 20~30세대는 제한속도 150km라는 자본주의 고속도로에서 '대형 사고' 위험을 안고 인생주행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 캐나다, 독일, 영국이 1975년~1995년 사이에 겪었던 세대간 '행복 역전'을 한국은 1997년 이후 지금까지 '동일성'과 '차이성'을 껴안고 있지만, 저 나라들과 유사한 방식으로 '행복 역전' 시기를 경험하고 있다. 26년전, 지금 돌이켜보면, 1995년 당시 서울 생활도, 한국 사람들..
2021. 4. 21.
백기완의 길 (2), 1979년 YWCA 직선제 실시 데모, 고문 후유증 ~ 1987년 대선 후보와 김대중 김영삼 단일화를 위한 사퇴.
백기완 선생과 한국 현대 정치사 . 백기완의 길 (2), 1979년 YWCA 직선제 실시 데모, 고문 후유증 ~ 1987년 대선 후보와 김대중 김영삼 단일화를 위한 사퇴. 백기완 선생과 한국 현대 정치사 . 백기완의 길 (2), 1979년 YWCA 직선제 실시 데모, 고문 후유증 ~ 1987년 대선 후보와 김대중 김영삼 단일화를 위한 사퇴. 1. 1979년 YWCA 위장 결혼 집회 사건. 정치적 주장 1979년 12월 24일. 유신체제 철폐, 통일주체회의 대통령 선거 반대, 직선제 실시, 긴급조치 피해자 복직 복교 복권 조치 집회 주체: 양순직, 박종태, 백기완, 이우회, 김정택, 함석헌, 윤보선 등, 당시 재야인사, 기독교 종교계, 구 공화당 국회의원, 전 민주당 대통령 등 다양한 민주화운동 세력이었음..
2021. 2.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