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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history)384

1962년 2월 2일~4일, 박정희 울산공업 쎈터 기공, 516 쿠데타 정당화 시작 박정희는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후, 군대로 복귀한다고 국민들에게 발표했다. 그러나 그의 실제 행보는 1963년 대통령 선거 출마에 맞춰져 있었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박정희는 1962년 정초에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하고, 울산공업 쎈터 시공식을 했다. 연설 제목이 "빈곤에 허덕이는 겨레 여러분"이었다. 울산공업쎈터는 민족의 빈부의 판가름이 날 것이라며, 서독 라인강의 기적인 '루르의 기적'을 초월해 신라의 영성을 재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516 군사쿠데타를 한 목적은 정권야욕이 아니라 빈곤을 추방하고, 번영과 복지를 마련하기 위해 필요한 경제재건을 위함이라고 밝혔다. 울산공업도시 건설은 516세력의 상징적 웅도이며, 국민은 이를 위해 각성,분발,협동하라고 주장했다. 울산공업도시에는 석유.. 2018. 11. 14.
박근혜와 김기춘이 양승태에게 지시해, 일제 강제징용 조선인 피해자 권리를 박탈했다. 삼권 분립 포기, 대법원과 법관이 박근혜와 김기춘의 시녀로 전락, 한국외교부의 굴욕, 강제 징용 피해자 인권 말살이다. 박근혜와 김기춘이 양승태와 차한성에게 지시해서, 일제 강제 징용 피해자들의 판결을 지연시키고 추가소송을 막아라고 했다. 양승태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장 차한성은 김기춘의 지시대로 행동했다.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에게 배상을 하라고 주장했는데, 박근혜와 양승태는 이를 차단하고, 한국과 일본이 '재단'을 만들어서, 배상액을 축소해 수백만원 정도를 지급하려는 작전을 짰다.--------------- 강제징용 '푼돈 배상' 시나리오까지…"박근혜 지시"임찬종 기자 cjyim@sbs.co.kr 작성 2018.11.07 21:28 -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강제징용 피해자들에 대해 배상 .. 2018. 11. 12.
2017년 김종필 "당선되면 김정은을 만나러 간다고, 빌어먹을 자식"이라고 문재인을 비난했다. "영원한 제 2인자" "임자", 당신들이 말한 "풍운아" 김종필이 "빌어먹을 자식"으로부터 받은 무궁화장 훈장, 한국정치의 현주소다. 박정희와 같이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를 자행한 김종필의 판단은 시대착오였다. 1960년 이승만 독재자의 부정선거에 항거한 한국 시민들의 항쟁 정신을 무시하는 시대착오적인 반동정치였다. 2017년 냉전의 섬을 해체하자던 문재인의 발언을 '빌어먹을 자식'이라고 욕한 김종필의 발언 역시 시대착오였다. 김종필의 정치 시작과 끝은 시종일관 시대착오적이었다. 평범한 외국 시민들도 '넌센스'라고 말하는 70년 남북 분단과 냉전의 섬을 해체하는 것을 지지하고 있다. 제 2의 박정희, 박근혜, 김종필이 코리아 정치의 주인공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한국 시민들이 모두다 시험공부.. 2018. 6. 26.
정치적 비유법의 달인 김종필이 남긴 폐해 - 거짓말과 정치적 은유 정치적 비유법의 달인 김종필이 남긴 폐해 - 거짓말과 정치적 은유, 훈장 추서 반대 - 난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는 공약실천과 무관하게 "아버지가 이룩한 경제성장, 이 근혜가 복지로 되돌려 드립니다"는 슬로건을 들고 나올 것이라고 보았다. 2010년 경 진보정당은 불필요하다고 하면서 민주당으로 다 모여라는 주장에 대해 비판하면서, 그런 생각은 박근혜에게도 질 수 있다는 평가를 한 적이 있다. 아니다 다를까 실제로 박근혜는 박정희 하에서 일한 바 있는 김종인을 내세워 마치 민주노동당 정책집을 베낀 것 같은 복지정책을 들고 나왔다. 새로울 거 하나도 없다.20세기 사회복지국가를 이룩한 유럽,캐나다에서는 보수당이 모조리 전부 '사회복지 국가론'을 당론으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당선이후, 또 아니다 다를까.. 2018. 6. 25.
518 광주도청 진압명령자는 전두환이었다 - 80년 미국무장관 머스키 문서 공개 1. 머스키 미 국무장관의 비밀전문이 지니는 의미는 무엇인가?(sbs 뉴스 보도를 보고 난 소감) 1980년 5월 21일 광주 도청앞에서 벌어진 계엄군의 집단 발포 명령자는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5월 27일 광주 도청를 사수하던 시민군 진압 명령자는 전두환이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머스키 비밀전문 공개로 인해, 1997년 한국 법정이 전두환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을 때, 그 논거는 바로 전두환이 5월 25일 광주도청 최종진압 작전 결정 회의에 이희성 계엄사령관과 주영복 국방부장관 등과 같이 참여했다는 사실이었다. 97년 대법원 논거에 따르면, 전두환은 내란목적 살인의 공동책임자들 중에 한 명에 불과하고, 전두환이 단독 '명령 책임자'는 아닌 셈이었다. 이번 머스키 미국무장관의 비밀전문 공개로 5월 2.. 2018. 5. 15.
전두환 광주 학살 자료 - 미국 Seeing human rights in the "proper manner" The Reagan-Chun Summit of February 1981National Security Archive Electronic Briefing Book No. 306 Edited by Robert WamplerPosted - February 2, 2010For more information: 202/994-7000 or wampler@gwu.edu Related PostingsNorth Korea's Collapse? The End Is Near -- MaybeNorth Korea and the United States Declassified Documents from the Bush I and Clinton Admin.. 2018. 5. 15.
전두환 518 헬기 발포 지시, 전두환 다시 법정에 세워야 한다 May 5 at 2:16am · 아직 1980년 518 광주 발포 책임자는 전두환이라고 확정되지 않았다. 임진왜란 침략자 이름은 확정되었는데, 518 시민 학살자 이름은 아직도 모른다. 전두환이 국민의 군대를 이용해 시민을 학살했다는 혐의만 있지, 아직 전두환은 도요테미 히데요시가 아니다. 전두환이 헬기에서 기관총으로 광주 시민들을 초기에 박살해라는 '대명 Grand Order'를 내렸다는 문서가 발견되었다. 그런데 전두환은 아직도 발포 책임자로 확정 판결되지 않았다. 전두환 재판은 반드시 다시 열려야 한다. PD 수첩 송일준 피디가 광주 MBC 사장이다. 두 편의 광주 다큐멘타리 제작은 우리들에게 새로운 역사 정치 공부가 될 것이다. #전두환_발포책임_재판_다시하자_문재인_국민청원_필요하다_끝까지_전두.. 2018. 5. 10.
근대화 과정, 계몽주의와 꼰대, 막스 베버와 분화 differentiation 신문 기사: "막스 베버 전공자인 김 교수에게 있어 근대의 핵심은 종교와 정치의 분화, 학문의 분화, 개인의 분화(개인화) 등 ‘분화’이다. 이런 시각을 갖고 있는 그에게 한국 사회는 여전히 근대적 의미의 분화가 덜된 사회다." 몇 가지 주제들 (1) 종교와 정치는 서로 분리되기도 한다. 특히 1647년~1688년 영국 제 1차 혁명, 2차 혁명(명예혁명) 주제들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종교의 다원성 인정, 그리고 종교와 정치 (행정)의 분리, 의회 권력의 분화 (왕권과 땅 토지 대지주들의 의회 권력분화 및 경쟁) 였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서유럽 국가들은 '정치' 권력과 '종교(기독교)'의 분화 및 분리를 경험했다. 엄청난 피의 댓가로. (2) 그런데 현재 독일 수상은 기독교-민주주의-연합(기민련).. 2018. 1. 23.
중일 전쟁 (1937~1945년) 전승 기념일을 9월 3일로 제정 고려 중국은 왜 역사를 강조하는가, . . . . . 2018. 1. 22.
1789년 8월, 프랑스 혁명 인간과 시민의 권린 선언 1항 Men are born and remain free and equal in rights. Social distinctions can be founded only on the common utility. 인간은 태어날때부터 살아가는 동안 자유롭고 평등하게 권리를 누려야 한다. 사회적 차이들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오직 전 사회 구성원들의 이익에 부합할 때만 그래야 한다.(사회적 차이들은 오직 공동선 위에서 기초될 수 있다.) Social distinctions can be founded only on the common utility.: social distinctions 은 좋은 의미건 나쁜 의미건, 사회적 구별짓기, 사회적 차이점들로 봐야할 것이다. : 사회 구성원 모두의 이익이라는 토대 위에서 사회적 차.. 2018. 1. 5.
518 광주항쟁 당시, 미국 백악관 전두환 지원 결정 메모 닉 플랫 메모 518 광주항쟁 당시, 미국 백악관 전두환 지원 결정 메모 닉 플랫 메모 [사회] [5.18] 1980년 5월 22일 백악관 정책검토회의 '닉 플랫 메모' 전문 공개날짜 : 2017-06-19, 조회 : 2,060 *본 회의록은 2017년 5월 5일, 광주MBC 김인정 기자*강성우 기자가 1980년 5월 22일 백악관 정책검토회의 참석자인 니콜라스 플랫 당시 미국 국제안보담당 부차관보를 만나 인터뷰한 내용과 인터뷰 현장에서 취재진이 확보한 10 페이지 분량의 수기 메모를 토대로 취재진이 전문가들과 함께 복구한 것으로 당사자의 확인을 거쳤습니다. 이에 광주MBC는 시민의 알 권리를 위해 전문을 공개합니다. 번역본 파일다운로드 : 다운로드 바로가기 원문 파일다운로드 : 다운로드 바로가기 [번역] / 원문은 .. 2017. 6. 23.
최악의 날, 1997년 12월 22일 전두환 노태우 사면되고, IMF 긴축 통치 시작하던 날 살면서, 다들 최악의 날이라고 기억하는 그런 날이 있을 것 같다. 나에게는 아직까지는 1997년 12월 22일이다. 벌써 20년 전이다. 1997년 12월 22일은 전두환 노태우가 사면되던 날이었고, IMF 긴축통치를 굴욕적으로 수용하던 시절이었다. 설상가상이었다. 앞으로 더 나쁜 날도 있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는 12월 22일이 최악의 날이다. 김영삼은 1996년 신한국당 총선 승리를 위해, 전두환 노태우를 구속시켰고, 언젠가는 석방시키려고 했다. 언론에서는 역사바로잡기, 1212군사 쿠데타 세력 척결이라고 찬양했고 대다수 국민들도 찬성했다. 그러나 1997년 12월 대선 이후, 김영삼과 김대중은 전두환 노태우를 사면 복권시켜버렸다. 1945년 이후 친일반역자 부역자를 청산하지 못한 역사적 과오를 두.. 2017. 3. 24.
1943년에서 1953년까지 분단과정의 교훈- 외교 철학의 중요성과 국제 정치 능력 이명박-박근혜 한국 보수파의 외교 실패를 관찰하면서 1945년을 새롭게 다시 해석하다 1943년에서 1945년까지 분단 과정의 교훈 : 외교 철학의 중요성과 국제 정치 능력 다른 나라들이 코리아를 어떻게 해석하는가? 그게 중요하다. 코리아는 '일본 점령지'로 해석되었다. 한국인들은 1945년 8월 15일을 광복절 (해방일)로 기념하지만, 당시에는 그것은 국제 정치와 외교에서는 진실의 전체가 아니었다. 미국과 소련 영국 등에게는 코리아란 일본 패방 이후 새로 생긴 '전승국의 전리품' 영토였다. 큰 그림을 그리자면, 미국과 소련은 2차 세계 대전 과정에서 협조하기도 하고 새로운 경쟁을 시작했다. 그 무대는 유럽이었고 새로운 지도 그리기였다. 발틱, 발칸반도와 독일 (동독과 서독의 불균형 분할: 동독은 서독의.. 2016. 3. 31.
독일 언론인, 위르겐 힌츠페터, 고맙습니다. 그리고 명복을 빕니다 위르겐 힌츠페터,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그리고 명복을 빕니다. 우리에게 너무나 고마운 분이 돌아가셨다. 뭐라고 감사의 말을 전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고마운 분이다. 위르겐 힌츠페터가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80년 광주 항쟁의 진실의 절반은 기록으로 갖고 있지 못할 것이다. 1980년 광주항쟁의 참상과 시민들의 저항을 촬영해 진실을 독일과 세계에 알렸던 독일 언론인 위르겐 힌쯔페터가 자신의 고향인 라쩨부르크에서 79세의 나이로 지난 1월 25일 별세했다. (1937년~2016.1월 25일) 1980년 5월 당시 위르겐 힌쯔페터는 독일 방송 아.에르.데(ARD) 일본 됴쿄 지부에서 카메라맨으로 일하고 있었다. 5월 19일 일본에서 광주 소식을 듣고, 5월 20일 새벽에 광주에 도착했다. http://bit.ly.. 2016. 2. 6.
신영복 붓글씨, 당무유용(當無有用), 없음 때문에 쓸모가 생겨나다 신영복 선생 붓글씨가 방 벽에 숨어있었다.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당무유용 종이 쪽지가 반듯하지 않고 기울어질 정도로 오래 되었다. 몇 년 전에 벽에 붙여 놓은 지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신영복 선생은 원래 경제학자였는데, 왜 노자 '도덕경' 구절을 붓글씨로 썼을까? 그 이유도 신선생의 노자 해석도 다 모른다. 붓글씨 서체, 서화집을 남겼지만, 이것 역시 자기자신과의 화해의 한 수단에 불과했을 것이다. 며칠 전 신영복의 "엽서"를 읽었다. 신영복이 감옥에서 아버지, 어머니, 형수, 계수 등에게 쓴 편지들 모음이다. 여러 편지 엽서들 중에, 신영복이 71년부터 86년까지 감옥살이를 했던 대전 교도소에서 전주 교도소로 이감하면서 아버지께 쓴 엽서를 읽을 때, 목이 뜨거워졌다. '자유'의 이동이 아니라, 또.. 2016. 1. 22.
신영복에 대한 부당한 평가 좀 고약하고 부당한 동아일보 송평인의 신영복 평가:동아일보 댓글부대는 송평인의 글에서 '맑은 생각 신영복'이라는 단어 때문인지 반공반북 저주의 알바성 댓글을 달았다. 하지만 송평인의 신영복 평가 글은 좀 고약하고 부당한 측면도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신영복이 경제학자로서 정치경제학 용어를 가지고 '신영복 이상사회'를 설명하도록 애초에 사형구형이나 '무기징역'을 선고하지 말던가, 20년간 신영복이 대학에서 자유롭게 연구했으면, 당시 박정희 경제정책의 기초를 만들어주고 간 로스토우 (W.W.Rostow)의 "경제성장단계들: 반-공산주의자 선언(1960)"보다 더 나은 경제대안을 신영복이 만들었을 수도 있다. - 2) 20년간 그를 감옥에 처넣었으면, 적어도 감옥 안에서 '경제학 강사'를 해왔.. 2016. 1. 20.
박유하 재판 결과 보도한 뉴욕 타임즈 기사를 읽고 몇가지 소감 박유하의 를 읽고, 그리고 최근 벌어진 박유하의 피소 기사를 듣고 드는 생각은 다음과 같다. 첫번째 박유하 책과 그의 활동에 대해서 평가하자면, 박유하는 폐암 수술하는데 수술칼을 들고 온 게 아니라 한-일 화해를 위해 부엌 식칼을 들고 온 셈이다. 순수하고 진정성 어린 한-일 화해에 대한 간절한 염원은 박유하의 부엌식칼 때문에 오히려 수술 와중에 '감염' 증세가 더해서 환자 자체 건강이 더 위태롭게 되었다. 역사 문제는 역사 교수만이 법률 문제는 법대 교수나 법조인들만 해결할 수 있는 건 절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문학 전공자인 박유하가 역사적 사료를 검증하고 역사적 방법론까지 검토하는데, 그 는 별로 성공하지 못했다. 박유하 사건을 전환점으로 삼아서, 성노예 여성들의 해당 10여개국 역사가들이.. 2016. 1. 15.
박유하 [제국의 위안부] 문제점 (1) 일본제국주의자의 전쟁 범죄를 부차시하다 결론부터 말하면 박유하의 책은 현재 아베-박근혜 합의 논란에 해결책이 될 수 없다. 그리고 와싱턴 심포지엄에 박유하가 발표한 글 역시, 전쟁 성노예 근절과 한-일 및 아시아-일본 화해의 대안이 될 수 없다. 일본제국주의 군대에서 성노예 및 성노동 착취를 당한 여성들은 조선을 비롯한 아시아 10여개 국가의 문제이기 때문에, 중국 대만 필리핀 등을 포함한 모든 해당 국가들과 일본이 를 만들어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우선 박유하의 ‘와싱턴 심포지움’의 기초가 된 그의 의 주장과 결론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축약될 수 있다. (1)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제국주의 국가(일본 천왕)나 군부가 공식적으로 매춘부를 군대로 차출하라는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 혹은 역사적인 고증 자체가 어렵다. (2) 전쟁 성노예 .. 2016. 1. 14.
1987년 1월 14일, 박종철의 죽음, 그 아부지는 왜 할 말이 없다고 했을까? 그 아부지는 왜 할 말이 없다고 했을까? 언젠가부터, 먼저 간 사람들이 더 행복한 삶을 살다가 갔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든다. 그렇게 현실을 오래 산다거나, 또 주어진 생명의 시간을 다 채운다거나 하는 게 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 때 데모가 값싼 경력 한 줄이 되고, 고귀하게 팔려 나가지 못했다. 한국의 독특한 정서, 구속된 자식들의 부모들이 가 된다는 것이다. 난 그걸 보면 이 지구상에서 가장 보기 힘든 어떤 어떤 접착제의 원형질을 보는 것 같다. 가족의 소소한 나들이 사진, 그 속 주인공들, 선하게 생긴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다. 그리고 그것들은 2012년 이 나침반 상실, 어처구니없는 정치판과는 대조가 된다. 세월이 흘러 우파는 전 세계적으로 되는데, 오히려 개혁이니 진보니 자유주의 외치는 .. 2016. 1. 14.
한상진 (국민의당)의 이승만 평가 문제점, 1954년 11월 29일 사사오입 개헌안 안철수가 말한 '국민의당'의 최고인재들은 누구인가? 그 중에 한 명은 한상진 전 교수다. 11일 이승만 박정희 묘소에 참배한 후에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이 땅에 도입하고 굳게 세우신 분"이라고 이승만 대통령 (1대~3대)을 평가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1954년 11월 27일에 제헌헌법 (1948년 헌법)을 억지로 뜯어고쳐서 장기집권을 하고자 했다. 원래 헌법에 따르면 이승만은 이미 48년~52년 (1대 대통령), 52년~56년 (2대 대통령) 두 번을 했기 때문에, 56년~60년 3대 대통령은 출마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기붕을 비롯한 자유당과 이승만 대통령은 54년 11월 27일에, 초대 대통령에게 국한해서 대통령 중임안을 폐지하자는 내용을 골짜로 한 '개헌'을 국회에서 표결했다. 개헌안 통과는.. 2016. 1. 12.
종이학 천마리, 히로시마 사다코 추모비와 서울 평화비 소녀상 히로시마 사다코 추모비와 서울 평화비 소녀상 종이학 천마리를 접으려다 644마리에 그친 못다한 꿈이 있었다. 1946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 미국 원자폭탄 투하 당시,원자폭탄이 떨어진 그라운드제로와 사사키 사다코 (1943년 생, 당시 만 2세)의 집은 1.6km 정도 떨어졌다고 한다. 사다코 어머니 말에 따르면, 원자폭탄 폭발 당시 사다코는 집에 있었는데, 그 폭발로 집 바깥으로 날아가 버렸고, 죽은 줄 알았는데, 한참 만에 산 채로 발견되었다.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fABpssKWCoE 1943년 사사키 사다코 양 태어나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 공격 이후, 폐허가 되었다. 사다코 양은 당시 2세였고, 원자폭탄은 사다코 집 근처 미사사.. 2016. 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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