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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실28

최태민, 박근혜가 발족한 1977년 새마음갖기 운동본부란 무엇인가 1977년 10월 28일 박근혜 어록, 2016년 10월 최순실 국정 농단 및 부정 축재 예언하다. 1977년 10월 28일, 충청도 청주에서 열린 새마음갖기 운동 충북도민 궐기대회에서, 박근혜는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흐르는 물은 부패하지 않지만, 아무리 맑은 물도 한 곳에 정지해 있으면 상하고 (부패) 만다" 1. 구국선교단과 새마음갖기 운동본부의 차이점은 ? 1977년 1월 21일. 최태민은 새마음갖기 국민운동 본부를 발족한다. 대한 구국선교단에 이은 두번째 최태민과 박근혜의 공동 정치 작업이었다. 최태민의 새마음갖기 국민운동 본부의 목표는 국민의 도의심을 고취시켜 국민들의 정신을 개혁시키는 것이었다.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다. 1975년 박근혜의 정치적 데뷔 시절 최태민이 구국선교단의 정치적 .. 2016. 10. 30.
박근혜, 국민들의 물질만능주의 비난해놓고, 최태민-최순실 수천억원 재산 보유 최순실의 재산은 서울 강남, 강원도, 독일에 있는 회사,빌딜, 땅 등 200억원~300억원 규모로 추정되고 있고, 이를 훨씬 초과할 것이고 보고 있다. 최태민의 자녀들의 총 자산 규모는 2800억로 추정되고 있다. 신문 기사: http://www.hankookilbo.com/v/b37f0bbc45c74b0684919055716fbbba 최순실의 아버지 최태민과 박근혜는 1977년 새마음갖기 운동본부를 창설하고, 그해 10월에 전국 조직을 완료하게 된다. 박근혜는 1977년 10월 18일 강원도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재물과 명예의 노예가 되어 인간의 존엄성을 스스로 포기하지 말라"고 역설하고, 이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반성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며, 비로서 그 때야 맑고 고운 심성을 가.. 2016. 10. 30.
박근혜는 최순실의 꼭두각시가 아니다. 박근혜 최순실 동맹 관계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심리학자 김태형은 "극우 보수와 최순실이 박근혜를 사육해서 대통령을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태형의 주장은 박근혜의 적극적인 역할을 놓치고 있다. "꼭두각시 박근혜" 진단은 정치적 권력을 실질적으로 행사해온 박근혜의 몸통을 발가락 손가락으로 축소시킬 우려가 있다. 박근혜식 정치권력은 온 국민들 앞에 두 가지로 나타났다. 제 1기 (육영수 대신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했던 1975년부터 1979년까지)와 1998년 4월 보궐선거부터 시작되어 2012년 대통령이 된 제 2기까지이다. 첫번째는 박근혜의 정치적 권력 형성을 1975년 이후 역사적으로 검토해야 하며, 두번째 최태민-최순실과 박근혜의 정치행위 특성은 '정치적 동맹'세력으로 봐야지 그렇지 않고,.. 2016. 10. 28.
최순실은 최태민 구국선교단으로부터 무엇을 배웠는가? 최태민은 박근혜가 박정희 후계자가 되길 바랬을 것이다. 최태민에게 김재규의 10.26 반란은 최악의 적이었다. 최태민의 구국선교단이 1975년 세상 바깥으로 나올 수 있었던 계기는 당연히 민주적 정통성이 없는 박정희 유신체제였다. 따라서 당시 최태민과 박근혜의 정치는 어떤 독립적인 세력이라기 보다는 박정희 체제의 혹과 같은 조직이었다. 차지철 박정희 비서실장이 독일 나치 SS 근위대 흉내를 낸 것과 또 다른 종류의 정신넋나간 정치 행태가 바로 최태민의 구국선교단이었다. 물론 최태민의 꿈은 박근혜를 근혜양 퍼스트 레이디 대행에서 대통령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최태민의 딸 최순실은 박근혜 정부 출범 전부터 정치,외교, 국방, 경제, 문화, 행정부 인사까지 깊숙이 개입했다. 이러한 최순실의 정치 행태의 '기원'.. 2016. 10. 26.
413 총선 특이한 선거운동, 조응천 당선의 경우, 남양주 청와대-유령의 집에서 탈출한 한 사나이 사진을 보며, 지천명 사나이 겨우내 한강 홀로 건너니위에는 다얼어도 아래는 흐르니진실도 살짝 얼었다 응천(應天)따라 해빙(解氷) 413총선 결과는 유령의 집-청와대에 대한 원한들의 반란표였다. 이런 문학적 수사 아니고서는 설명할 길이 없다. 세월호의 원한이건, 정윤회 비선 실세 연루 원한들이건. 조응천은 유령의 집을 빠져나왔다. 조응천은 자신이 몸담았던 검찰에서, 그러니까 자신이 수사를 하던 그 직장에 불려가 수사를 받고 집으로 돌아올 때가 가장 인생에서 기가 막혔다고 했다. “죽어야 사는 여자”의 유령의 집에서 그는 치약 칫솔만 챙겨서 탈출했다고 했다. 남양주인지 가평인지 양평인지 모르겠다. 그게 총선인지 지역공약인지 모르겠다.총선 한 달 전에 낙하산 공천되었다... 2016. 4. 18.
박의 최후의 보디가드는 누구인가? 지록위마에서 지견위정 指犬爲鄭 으로 박근혜 대통령의 최후의 보디가드는 누구인가? . 진돗개를 가리켜 정씨라고 불러다 !박근혜 대통령은 7일 정윤회씨 등 비선개입 논란을 두고 “실세는 없다. 실세는 청와대 진돗개”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조고 (진시황제 시절 환관) 지록위마 조고는 진시황의 적자 '부소'를 이사 등과 모의해 자결하게 만들고 서자 '호해'를 얼굴마담으로 황제로 앉힌다. 당시 조고 벼슬은 환관으로서 '낭중령'이었다. 이사는 '승상 (총리)'이 되었다. 그 이후 이사는 조고의 무소불위 권력을 비난하는 글을 호해 황제에게 올리자, 조고는 이사를 역모죄로 몰아 세우는데 성공해, 이사의 3족 (부호, 형제자매,처자)를 멸하고, 다섯가지 형벌(오형: 얼굴에다 글씨를 쓴대로 찢고 먹무을 칠하고, 코를 베고, 다리를 절단하고, 생식기를 .. 2014. 12. 8.
박근혜 통치, 정윤회는 정말 최후의 보디가드일까? 박근혜식 보수 정치 철학을 수립하지도 못하고, 심리적 보디가드 영화 찍다 임기를 마치다. 박근혜 정치관은 1974년 8월 15일 육영수 총격 사망,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총격 사망에서 비롯된다. 박근혜 정치 심리학의 최고 목표는 무한한 안전지대를 만드는 것이다. 심지어는 박근혜의 정치적 기반인 영남이나 대구 구미도 믿지 않는다. 박정희의 고향 후배 제자인 김재규의 총에 아버지가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박근혜는 22세 어머니를 잃고, 27세에 아버지를 잃었다. 보통 여느 20대 여성이면 연애, 직장, 친구들과의 희로애락을 체험했을 것이다.그러나 박근혜는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20대를 보냈고, 그 상처는 세상 어떤 슬픔도 그 상처의 깊이를 초월하지 못한다. 박근혜는 2014년 평화롭고 제도.. 2014. 1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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