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정치 노트 Notes on the Politics of Korea

최태민은 박근혜가 박정희 후계자가 되길 바랬을 것이다. 최태민에게 김재규의 10.26 반란은 최악의 적이었다. 최태민의 구국선교단이 1975년 세상 바깥으로 나올 수 있었던 계기는 당연히 민주적 정통성이 없는 박정희 유신체제였다. 


따라서 당시 최태민과 박근혜의 정치는 어떤 독립적인 세력이라기 보다는 박정희 체제의 혹과 같은 조직이었다. 차지철 박정희 비서실장이 독일 나치 SS 근위대 흉내를 낸 것과 또 다른 종류의 정신넋나간 정치 행태가 바로 최태민의 구국선교단이었다. 


물론 최태민의 꿈은 박근혜를 근혜양 퍼스트 레이디 대행에서 대통령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최태민의 딸 최순실은 박근혜 정부 출범 전부터 정치,외교, 국방, 경제, 문화, 행정부 인사까지 깊숙이 개입했다. 이러한 최순실의 정치 행태의 '기원'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최순실은 최태민을, 박근혜는 박정희를 흉내냈다.  과연 최태민은 포괄적인 정치 기획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최태민의 구국선교단이 내세운 공식적인 정치 입장들을 당시 신문을 통해 알아보자.


1. 1975년 4월 23일자 동아일보 7면, 조그마한 기사. 


최태민은 박근혜를 앞세워, 구국선교단 총재가 되었다. 박근혜 당시 나이는 23세 (만)였다. 구국선교단 선언문에서는 냉전 체제 하에서 북한과 중국을 주적을 내세웠다. "김일성의 중국 방문은 전쟁을 도발하기 위한 노골적인 행위이니, 일부 정치인 재야인사 종교인 학생들은 극한 투쟁이나 정치 혼란만을 꾀할 것이 아니라, 반공 기치 아래 뭉치자"고 말했다.


- 최태민 구국 선교단에서 지목한 내부 적들은 바로 박정희 유신독재에 저항했던 대학생, 재야인사, 야당, 민주화 운동을 하던 종교인이었다. 

- 반 유신독재 , 반 박정희 세력이 북한과 중국 편이라고 최태민은 주장했다.

 




2. 1975년 5월 12일자, 경향신문, 


최태민의 구국선교단이 임진각에서 기독교 초교파 구국 기도회를 개최했다. 5천명이 참가했고, 박근혜도 참석했다. 


당시 대학가는 박정희 유신체제 반대로 휴강하고 있었고, 이에 대한 신문기사가 박근혜 사진 옆에 실렸다. 


최태민은 "승리를 위해 경제력 배양과 아울러 사상적 무장이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기독교인들이 십자가를 짊어지고 총화단결해 하나가 되자"고 했다. 

- 자유와 양심을 사랑하는 정의사회 구현 

- 공포의식과 사회불안감을 타파하고 사회윤리의식을 정화하여 '명랑사회 건설'

- 조국의 통일과 복음국가 건설 등 5개 항이었다.



(정의사회 구현은 제 5공화국 전두환 기치,

명랑사회 건설은 독특하다. 딴지일보도 아니고.

복음국가 건설은 이명박 정권과 유사하다)


- 당시 박정희 정권은 기독교는 물론이고, 불교 세력까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안보 기원 법회"를 개최하게 했다.







3. (국방 외교 정치 개입) 


1975년 5월 22일, 최태민은 그의 부하들을 이끌고 병영 생활 체험을 한다.





4. 1975년 6월 15일. 최태민 구국선교단, 전국 조직화 박차를 가하다. 인천 2000명 


"나의 행복, 내 가족만의 행복을 위한 기도는 진정한 기도가 아니다"  "기독교인들이 민족과 조국을 위해 " 기도해야 한다고 주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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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6월 22일, 40만명이 박정희 유신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동원되었다.


대한 기독교 장로회 등 18개 개신교가 참가했다.


"온 국민이 방황, 허용, 부정의 잠에서 깨어나라고" 기도했다.


"자유 위해 나라 지키자" 




5.  구국 선교단 군사 조직을 표방하다. 


1975년 6월 23일, 최태민 구국선교단 자신감 보여주다.

20만 구국십자군 목표로 설정하다.


구국선교단 십자군 창설하다.


서울에 사령부를 두고, 각 시도 단위로 군단, 각 개체, 회단위로 분단을 조직, 매주 토요일 정기적으로 기본군사 훈련을 실시한다.





6.  1975년 8월 8일자 신문, 


최태민 구국선교단 강화 특수 군단 발단.

멸공대, 기동대, 전도대 각각 500명씩 1천 500명 군단 대원 발족식을 하다.


-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하자 (*이는 박정희 유신 독재가 저항에 부딪히고 있는 것을 '위기'라고 함)


- 기독교인들이 순국하는 자세로 조국을 지키자


- 기독교의 선과 미로써 조국 성업에 총매진하자.








7.  1975년 10월 31일자, 최태민 구국선교단, 통일 표방, 학계를 조직화하다


최태민은 형식적으로 대한구국선교단 부설 조국 통일 문제 연구원을 만들었다. 

통일문제연구소 원장에 한태수 박사 (한양대 정법대학장)가 임명되었다. 







8.  1975년 12월 10일자 , 동아일보.


최태민 구국선교단과 서울시 의사회가 "야간 무료 진료 센터"를 열었다. 그러나 실제 의료 혜택을 볼 수 있으려면, 최태민의 구국선교단 소속 목사의 추천을 받아야 한다.

영세민 대상은 새마을 취로 사업 대상자이고, 구국 선교단에서 지정한 교회의 목사가 그 영세자를 추천해야만 야간 무료 진료 센터에서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구국선교단의 조직을 확대하고, 조직원의 정체성을 강화하기 위해서 "야간 무료 진료 센터"를 만든 것이다.


- 시민사회에서 의사회를 조직하고, 간호사등 노동력을 동원해냈던 구국선교단, 최태민.

박근혜와 박정희 지원과 허가없이 서울시 의사회를 움직일 수 있었겠는가?






사진 자료: 부산 (멸공이라는 단어가 보인다) : 친절, 청결 


야간무료진센터, 1976년 5월 15일 개원

부산시 의사회

부산시 본부

부산직할시 십자군 부산 ...

차량: 대한 구국 선교단 야간 무료 진료 센타 

차량 번호는 : 가 7528 


부산: 무슨 동? 인지는 모름. 




8.

1976년 박정희와 최태민, 박근혜


구국선교단 야간 진료 센터를 방문했다던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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