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정치/민주당2020. 3. 18. 06:33

갈취 정당 미래한국당을 갈취하기 위해 만든 새로운 당명은 “더 불어난 민주당”이다.위성정당 자매정당 위장정당은 피튀기게 아름다운 이름이다. 왜 ‘더 불어난 민주당’인가?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도 목표는 다원주의적 민주주의를 가능케하는 소수정당의 국회진출이다. 그러나 더불어민주당은 ‘더 불어난 민주당’을 꿈꿔왔다. 민주당 속뜻은 진보적 소수당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 이 정당들을 길들여, 말 잘듣는 ‘푸들 민주당’으로 탈바꿈시키려는 것이다. 415 총선 이전, 이후에도 이 ‘푸들 민주당’ 프로젝트는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또다른 전투가 발생할 것이다. 정치적으로 더 비참한 사태는 ‘기생충’ 집 반지하, 제 3열에서 벌어지는 사다리 걷어차기 아귀다툼이다. 블랙홀 민주당을 제외한 소수 정당들은 사다리 걷어차기 늪에 빠지게끔 설계되어 있다. 벌써 최배근 천사, 우희종 앤젤 ‘플랫폼 정당’과 하승수 사무총장이 있는 정치개혁연합간 사실상 권력투쟁은 천당과 지옥을 오가고 있다.


왜 이런 정치적 오류가 반복되는 것일까? 그것은 한국 정치사의 교훈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리버럴 민주당 586, 1987년 유월항쟁 이후, “호헌철폐,독재타도” “제헌의회 소집”만 외쳤다. 87년 10월 헌법 개정 국민투표까지, 김대중과 김영삼은 프랑스 헌법에 명기된 “대통령 결선투표제도”를 알면서도 일부러 침묵했고, 리버럴 민주당 586 전대협 리더들과 그 배후 조종 멘토들은, 프랑스 우파 드골 대통령이 만든 “결선투표제도” 자체를 언급하지도, 이를 대중화시키지도 못했다.


결선투표를 헌법에 명기했으면, 김영삼 혹은 김대중 둘 중에 한 사람이 노태우를 결선에서 꺾고 대통령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90년 김영삼-김종필-노태우 민자당 3당 보수통합은 없었을 것이고, 부산-울산-경남 영토 박탈도 없었을 것이다. 대통령선거제도, 국회의원선거제도 하나 바꾸는 게 한국의 30년을 좌지우지한다.


2016년 촛불 항쟁, “박근혜-최순실 탄핵”에 5천만 시민이 참여했다. 87년 6월 항쟁보다 더 큰 규모의 참여민주주의 실천이었다. 87년 10월에 “결선투표제도” “총선제도 개혁”이 빠졌지만, 개헌이라도 해서 현재 ‘제 6공화국 헌법’이라도 만들었다. 2017년,2018년,2019년,2020년 4년 동안 겨우 만든게 10%짜리 연동형 비례대표제도이다. 그것도 이제 ‘도로묵’ 되어, 과거로 돌아갔다. 역사적 반동이다.


부끄럽다. 한국 민주주의의 수치다. 지금 미래한국당, 비례민주당-선거연합당 모두 반칙이다. 월드컵 축구에서 골키퍼 2명인 경기다. 야구에서 투수 2명이 올라가서 1타자 상대하는 야구를 본 적이 있는가? 우희종 앤젤 말씀처럼, 미래한국당이 왜적이고 외계인이고 괴물인가? 그들은 대한민국 시민아닌가? 아무리 그들이 정치적으로 반동적이고 수구꼴통이어도 전두환-노태우 학살자 집단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실제 이인영 민주당 원내대표는 미래통합당 나경원을 ‘밥 잘 사주는 누나’로 부르지 않은가?


미래한국당, 중앙선관위, 비례용민주당 모두 세계정치사의 수치다. 리버럴 민주당 586, 미국 좋아한다. 특히 미국 대학들을 좋아한다. 자녀들도 거기 간다. 자식사랑에 비난할 일 절대 아니다. 필자는 5천만 국민 모두 적어도 10개 국가 넘는 세계여행하는 나라를 만드는 게 정치적 꿈이다.


미국,유럽,캐나다 대학 정치학 개론서에, 한국은 일본과 더불어,아시아의 '우등생' 민주주의 국가라고 적혀져있다. 이것도 일종의 정치적 오리엔탈리즘이라고 할 수 있겠다. 좋다. 뭐라고 이름붙이건 간에, 그러나 서유럽과 미국-캐나다 북미 국가들이 한국과 일본은 자기네들과 유사한 동종 ‘민주주의’ 국가로 인정해주는 것이다. ‘엄지 척’이다.


봉준호 기생충 아카데미 작품상도 칭송했던 문재인 대통령과 민주당, 유럽과 미국 캐나다 국가 총선에서 2개 정당이 한 조로 나온 사례를 본 적이 있는가? 플랫폼정당 최배근, 우희종 앤젤, 정치개혁연합 하승수 비례전문가는 정당을 2주만에 창조하시는 고려청자굽는 ‘정당’ 장인인가?


한 시민으로서 정치참여는 독려해야 한다. 그러나 “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 굿은 무당에게”라는 명문이 있지 아니한가? 선한 동기가 최악의 결과를 잉태하는 선무당이 되지 않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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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철학2020. 1. 1. 05:37


December 31, 2014 at 7:31 AM · 


민족-민중 집단적 의지 형성과 조직화 (1) 문제 중요성



1987년 대통령 선거 이후, 노태우가 합법적으로 당선되었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1980년 광주 학살자와 1212 군사반란 범죄자였지만, 1987년 대선을 통해서 노태우는 ‘합법성’을 취득하고, 도덕적 ‘정당성’은 결여되었지만 6공화국이라는 정치적 ‘정당성’의 운신의 폭을 넓힐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당시 소위 민민(민족민중)세력은 정치적 도덕적 정당성 모두 결여한 전두환 5공화국과 노태우 6공화국 동일성과 차이을 어떻게 설명하고 어떻게 정치 투쟁을 이끌어 나갈 것인가? 다시 말하면, 전두환 5공화국의 ‘폭력과 강압’, 그리고 본질적으로는 큰 차이는 없지만 유사-파시즘 요소가 가미된 그러나 5공의 무지막지한 ‘폭력과 강압’이 아닌 ‘법적 질서 (김기춘 검사/법무장관)’ 강조와 이데올로기 투쟁을 결합한 노태우 6공화국의 차이을 어떻게 해명하고 이에 대응할 것인가? 이게 큰 문제였다.



80년대 그람시에 대한 개설서들이 몇 권 번역되어 한국에 소개되었다.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은 위 문제들을 푸는데 어느정도 실마리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나는 보았다.


당시 내 생각을 간단히 요약하면, 노태우 6공화국이 87년 합법적인 대선을 통해 당선되었지만, 정치적 도덕적 정당성은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이데올로기 담론 (여론전)을 잘 수행하면서 그 6공 체제의 약점을 파고들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그렇다면 학생운동은 어떻게 변해야 하는가? 중앙집중적 데모 위주가 아니라, 각 학과로 정치,계급 투쟁의 깃발이 이동해야 해야 한다. 이 둘은 병존,공존도 해야 하지만, 공간의 이동, 방점의 이동 필요성이 생긴 것이다.







민족-민중 집단적 의지 형성과 조직 (2)



그람시의 고민은 이탈리아에서 어떻게 민족-민중의 집단적 의지를 형성하고 조직화할 것인가였다. 그람시는 이 역할을 이탈리아 공산당 PCI 가 해야 한다고 봤고, 이탈리아 근대사에서 결핍된 자코뱅 세력이 되어야 한다고 봤다. 


프랑스 혁명에서 빌어온 자코뱅 노선이란, 20세기 초반 이탈리아에서 농민들을 프롤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 하에 묶어두고 동시에 모든 종류의 경제주의, 생디컬리즘, 자생(자발)주의를 거부하는 것이었다. 이 민족-인민(민중) 집단적 정치의지야말로 이태리 국가의 기초라는 게 그람시의 생각이다.



그람시가 이 민민(민족-민중)의지를 강조한 배경에는, 유럽의 국제정치가 있다. 1815년에서 1870년 이 시기는 유럽의 보수세력과 지배계급들이 유럽 전역의 자코뱅 세력들을 필사적으로 깨부수고 탄압하려고 했다. 그람시를 이러한 보수적 정치 지형을 ‘국제적 수동적 균형체제’라고 불렀는데, 이 체제 하에서 지배계급들은 경제적 기업의 권력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그람시는 이러한 국내외 정치현상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이탈리아 지식인들이 민민(민족-민중/인민) 정치의지를 발현하는데 공헌해야 한다고 보고, 이탈리아 자코뱅 세력들 (근대 군주= 정당)이 지적 도덕적 개혁 조직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지적 도덕적 개혁이 경제-사회적 개혁과 연결되어야 한다는 게 그람시의 생각이다. 왜냐하면 경제 사회의 개혁(변혁) 역시 지적 도덕적 개혁을 수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람시가 근대 군주로서 ‘정당(자코뱅)’을 강조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민족-민중 집합적 정치 의지 형성과 조직화를 그 정당의 책무로 설정한 배경은 무엇인가? 그의 리소르지멘토(이태리 통일운동)에 대한 평가와 더불어, 그것은 당시 이탈리아 노동자 계급의 상황, 그 고향 사르디니아 남부 농민과 투린과 같은 북부 산업 노동자 관계, 지역 갈등, 사르디니아 민족주의 문제, 반동적인 지주 계급, 위계서열 권위주의 문화가 강한 이탈리아 생활세계 등과 연결되어 있다.



1906년 남부 사르디니아 농민들의 '독립운동'은 북부에서 파견된 군대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당하고, 반대로 북부 투린 지방 노동자들을 탄압하는데는 남부 사르디니아 군대가 동원되었다. 이러한 복잡한 정치 상황, 특히 노동자 계급의식의 성장이 더딘 상황을 돌파하기 위한 그람시의 대안은 민족-민중 집합적 의지 형성과 조직화였고, 그 주체로 정당를 설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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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3월 12일 박근혜가 파면 이후 삼성동 집 앞에서 보여준 '웃음'은 1995년 12월 2일 전두환 골목성명과 비슷했다. 박근혜와 전두환 둘 다 국민의 뜻과 헌법을 무시해버렸다. 어떠한 죄의식도 없었다. 


박근혜 공식 논평 "삼성동 골목 성명"은 촛불시위와 헌법재판소 파면 결정은 '진실'이 아니라, 거짓이고 사기이다. 이것이 박근혜 공식 입장이다. 


"제게 주어졌던 대통령으로서의 소명을 끝까지 마무리하지 못해 죄송스럽게 생각한다. 저를 믿고 성원해준 국민 여러분께 감사한다. 이 모든 결과에 대해 제가 안고 가겠다.시간이 걸리겠지만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고 믿고 있다 (박근혜 탄핵 이후 공식 발표.3월 12일.) ”


향후 어떻게 될 것인가? 


박근혜 역시 전두환처럼 구속될 것으로 보인다. 전두환은 12월 2일 1212 쿠데타 범죄 조직원들과 연희동에서 골목성명을 발표하고 검찰 수사에 협조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전두환은 강제 구속당했다. 박근혜도 검찰 수사를 거부하고 있고, 삼성동 집 앞에 박사모와 관제데모단이 앞으로 검찰 수사를 방해하겠지만, 결국 구속될 것이다.


다시 읽어보는 전두환 구속영장. 1212 쿠데타 음모, 정승화 참모총장과 전두환 일당 '하나회'와 갈등, 김오랑 소령 등 군인들 사살, 군 병력 이동 등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다. 



(*출처 경향신문) 



1995년 12월 2일 전두환 쿠데타 세력들의 골목 성명서 "검찰 수사에 협조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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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정치2016. 2. 13. 14:29

박근혜 통치스타일은 박정희의 '군사작전'을 흉내낼 뿐이다. 전두환-노태우는 스네이크 박정희의 '변신술'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다. 최근 현대사 책들을 다시 검토하면서, 50년대~70년대 선배들의 투쟁에, 그들 중 일부는 이후에 변절했다할지라도, 총에 맞고 죽어간 감옥에 투옥된 선배들을 다시 생각해 보고 있다. 2016. January 20 at 12:27pm · 

박정희는 그 '동지들(육사 5기, 육사 8기)'도 집권연장의 '폭죽'으로 사용해 하늘에 아름답게 날려버렸다. 결국 그 동지들 총 맞고 박통이 박살나버렸지만. 그야말로 배우 황정민 50배를 능가하는 변신의 귀재, 스네이크 박정희의 '화해의 죽음'은 '죽음의 전설'이었다.

역사 책 속에서 다시 깨닫는다. 박근혜 덕택에 말이다. 전두환-노태우는 박정희 체제 하에서 18년간 '군사작전 (블리츠-크리크 Blitzkrieg)식 적군 및 경쟁자들 섬멸작전을 배웠다. 전두환-노태우가 박정희에 비해 소심했던 것은, 동지들의 총 맞고 죽지 않기 위해 '돈다발'을 동지들에게 자주 자주 찔러주면서 박정희처럼 '직접적 섬멸'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일전에 난 미 노스캐롤라이나 미 해병대 라이언 상사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중동에 대 테러전쟁에 참여한 전쟁 베테랑이다. "(전쟁터에서 죽음에 대한 공포) 무섭진 않냐?" 는 질문에 "적을 꼭 죽여야겠다고 쏘는 건 아니다.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 쏘는 거다"

군사작전식 정치라는 것은 '먼저 쏘기다'.

 두 박통들은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 적을 섬멸하고 블리츠클리크로 집중포화해서 콕 꼬집어 죽이는 것일 뿐', 꼭 그들이 인간적으로 미워서 그러는 건 아니다. '내가 이 전쟁터에서 총을 먼저 쏘지 않으면 적의 총탄에 내가 죽기 때문이다' 그게 박정희식 정치였다. 적도 동지도 1초, 3초, 2년, 10년 가는 것일뿐, '내가 살기 위한 군사작전'만 있을 뿐이다.

박근혜 말대로 '저런 건 슬픔도 아니다'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벌꿀 (꿀벌)처럼 열심히 매일 매일 적들과 경쟁자들을 섬멸하기 위해서 벌꿀 벌꿀을 따야 한다. 쉴 새가 없는 것이다. 유병언 죽음의 쇼도 해야 하고, 정보기관 '손발'도 필요하면 천국 지옥으로 파견보내고, 온라인에서도 'Blitzkrieg' 팀을 만들어서, 혼외 자식이 있는지 없는지, 적을 섬멸 타격할 모든 자원을 가동해서, 화염방사로 자존심과 자긍심을 불태워 씨를 말려야 한다.

꼭 그들이 인간적으로 미워서가 아니다. 그들의 정치적 이념은 이렇다. "산다는 게 다 전쟁터이고, 내가 배반하지 않으면, 내가 먼저 쏘지 않으면 내가 죽기때문이다." 이런 정치적 가치와 이념으로 똘똘 뭉친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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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1961년 516 군사쿠데타 당시, 장도영 참모총장을 앞장 세웠으나, 3개월 후 반혁명분자로 실각시키고, 미국으로 망명보냈다.





박정희는 516 군사쿠데타 주력 군대였던 육사 5기 (오른쪽 김재춘)와 육사 8기 (왼쪽 김종필)를 서로 충성 경쟁시키면서, 처음에는 김종필을 중앙정보부 창설 책임자로 내세우다가, 그 다음에는 육사 5기 대표격인 김재춘에게 자유민주당 창설을 맡기고, 김종필의 '공화당'과 경쟁을 부추긴 후에, 최종적으로 김재춘을 내쫓고 김종필을 등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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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 왼쪽, 김형욱: 가운데 ) 



박정희는 육사 5기 김재춘 등을 권력에서 배제한 이후, 육사 8기인 김종필과 8기생 김형욱을 다시 등용하고 서로 경쟁시킨다. 이북 출신이자 반공반북주의자였던 김형욱은 중앙정보부장을 6년간 재임하면서 동백림 사건, 인혁당 사건, 통혁당 사건 등을 발표했고, 심지어 박정희와 김종필의 좌익 경력을 문제삼고 이를 세탁하기 위해 노력할 정도였다. 그러나 박정희는 김종필과 김형욱 어느 누구 편도 들지 않고, 둘 다 견제하고 둘 다 용도 폐기했다. 
이후 김형욱은 미국에서 유신독재 박정희 타도를 외치다가, 1979년 10월 살해당했다. 
군사 쿠데타 주역들 내부에서 서로 매도하고 서로 죽이는 결과를 낳고, 참혹한 배신과 배반의 역사를 남겼다.





박정희는 1961년 516 군사쿠데타 당시 육사생도였던 전두환과 노태우 (육사 11기)를 집권 내내 지원했고, 이들은 영남 출신 육사 장교 모임인 '하나회'를 윤필용과 더불어 만들었다. 

박정희는 군사쿠데타 주역이었던 육사 5기와 육사 8기를 견제할 차세대 육사 11기를 내부에서 키웠다. 전두환은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친위 시가지 행진을 벌였고, 그 이후 박정희에 대항하는 육사출신 선배들 (육사 5기, 육사 8기)과 경쟁하면서 자파인 '하나회'를 키워나갔다. 이로써 1979년 박정희의 사망 이후, 1212 군사쿠데타를 감행할 물리적 군사력을 전두환은 보유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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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history)2016. 2. 6. 21:06

위르겐 힌츠페터,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그리고 명복을 빕니다. 우리에게 너무나 고마운 분이 돌아가셨다. 뭐라고 감사의 말을 전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고마운 분이다.


위르겐 힌츠페터가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80년 광주 항쟁의 진실의 절반은 기록으로 갖고 있지 못할 것이다. 1980년 광주항쟁의 참상과 시민들의 저항을 촬영해 진실을 독일과 세계에 알렸던 독일 언론인 위르겐 힌쯔페터가 자신의 고향인 라쩨부르크에서 79세의 나이로 지난 1월 25일 별세했다. (1937년~2016.1월 25일) 1980년 5월 당시 위르겐 힌쯔페터는 독일 방송 아.에르.데(ARD) 일본 됴쿄 지부에서 카메라맨으로 일하고 있었다. 5월 19일 일본에서 광주 소식을 듣고, 5월 20일 새벽에 광주에 도착했다. 


http://bit.ly/1L4ZupQ  (80년 5월 푸른 눈의 목격자 - 힌츠페터 : kbs 제작) 


- 5월 20일 광주에서 계엄군의 몽둥이 맞고 사망한 광주시민들을 촬영,

- 5월 21일 도청앞 계엄군 최초 집단 발포 이후, 시민군들이 계엄군과 싸우기 위해 무장하는 장면을 촬영

- 5월 22일 일본으로 돌아가, 공항에서 위르겐 힌츠페터는 광주에서 촬영한 10개의 필름을 독일로 보냈다.

- ( 당시 전두환 계엄군은 한국에서 외국으로, 외국에서 한국으로 들어오는 모든 전화선을 차단해버렸다.)

- 5월 22일 독일 텔레비젼 타게스샤우에서 광주 항쟁 장면이 전 세계로 보도되었다.

2003년에 위르겐 힌츠페터는 광주항쟁의 진실을 전 세계에 알려, 민주화 운동에 기여했기 때문에, 그는 한겨레 신문 송건호 언론인상 수상했다. 


- 1980년 9월 17일 위르겐 힌츠페터와 그 동료 위르겐 베트람은 광주항쟁의 진실과 전두환-노태우 신군부의 학살을 다룬  <기로에 선 한국>이라는 45분짜리 다큐멘타리를 만들어 독일에서 방송했다. 


Jürgen Hinzpeter und Jürgen Bertram 2003년 송건호 언론인상 수상 광주항쟁 진실보도.





(2003년 KBS와 인터뷰 : 위르겐 힌츠페터 Jürgen Hinzpeter ) 



1980년 5월 20일 오후, 광주에 도착한 위르겐 힌츠페터와 그 동료, 헤닝 




위르겐 힌츠페터가 촬영한 광주 시민 희생자. 5월 20일~21일. 




우리가 광주항쟁의 진실을 알 수 있게끔 위르겐 힌츠페터는 광주 시민군들을 아래와같이 촬영했다. 






위르겐 힌츠페터는 광중에 5월 20일, 그리고 5월 21일 (부처님 오신날, 수요일) 광주 도청앞에서 계엄군이 집단발포를 한 이후 사상자가 발생한 이후, 시민들이 무장하고 있는 장면들을 촬영했다.


위르겐 힌츠페터는 일본에서 가져온 10개의 필름을 다 촬영했다. 그는 독일과 일본으로 전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직접 이 필름 10통을 들고 일본으로 5월 21일 들어간다. 공항에 도착하자 마자, 위르겐 힌츠페터는 광주에서 촬영한 필름들을 독일로 보내고, 5월 22일 마침내 독일 텔레비젼 뉴스, 타게스샤우 (Tagesschau)에 광주 참상과 시민군들이 보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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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22일 다시 일본에서 한국으로 돌아와, 위르겐 힌츠페터는 서울 김영삼 자택 앞에서 촬영을 강행하려다 계엄군에 의해 저지당한다. 




(출처: 80년 5월 푸른 눈의 목격자, 2003년 KBS) 

- 위르겐 힌츠페터는 다시 5월 23일 광주로 들어간다.




5월 23일부터 5월 27일까지 광주 시민들의 저항, 도청앞 분수대 광장에서 시민들의 집회 등을 위르겐 힌츠페터는 촬영했고, 우리가 지금도 보는 대부분 중요한 장면들이다.




(당시 조선대 3학년 김종배, 도청앞 분수대 광장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 1980년 5월 18일부터 1980년 5월 27일 새벽 5시 10분 광주 도청 내부 시민군들에 대한 무참한 학살이 끝나기까지, 국내 언론들은 전두환 노태우 등 신군부에 의해서 완전히 통제당했다. 
- 5월 21일 도청앞 계엄군의 집단 발포로 최대 사상자들이 발생했는데도, 국내 신문들은 이를 전혀 보도하지 않았다.


독일 언론인 위르겐 힌츠페터와 그 동료 헤닝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 동아일보는 5월 21일에서야 1면에 처음으로 광주 소식을 다뤘다. 그러나 계엄사 이희성의 발표만 간단히 실었다. "소요 사태가 아직 수습되지 않고 있다" 








동아일보. 1980년. 5월 22일 사회면 보도.


광주 시외 전화 불통, 교통 두절.

소년 체전 연기

그리고 물놀이 사진만 내보냈다.





- 경향신문, 1980년 5월 22일, 사회면. 모내기 한창 사진 보도.








1980년 5월 22일. 경향신문 1면 기사.

이희성 당시 계엄사령관 발표, 광주는 지금 외부인과 고정간첩들이 폭력사태를 일으키고 있다고 발표.







1980년 5월 27일자. 경향신문 1면. 계엄군 광주 장악




1980년 5월 28일자, 조선일보 사설 "악몽을 씻고 일어서 "





계엄군이 신중하게 광주 문제를 해결했다.


"우리는 군의 노고를 잊지 않는다....

계엄군은 일반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극소화한 희생만으로 사태를 진정시키는데 성공했다. 계엄군은 계엄사령관이 지시했듯이, 계속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국민의 군대로서의 사명을 다해줄 것을 우리는 거듭거듭 당부해 마지 않는다 (조선일보 5월 28일자 사설)







1980. 5월 24일, 경향신문 사회면. "극렬분자와 일부 폭도들이 탈취한 시내버스에 올라타고 중심가를 누비고 있다"고

광주 시민들의 항쟁을 왜곡보도 했다.

경향신문 뿐만 아니라, KBS, MBC TV 등 방송국과 모든 신문들을 신군부가 장악하고 광주시민들의 저항을 '폭도'로 매도했다. 







2003년 위르겐 힌츠페터는 광주의 진실을 알렸다는 공로로 송건호 언론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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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르겐 힌츠페터는 자신을 광주에 묻어달라고 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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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정치/민주당2016. 1. 27. 10:53

김종인 (민주당 선대위, 비대위 위원장) 인터뷰 - 김주하 아나운서


이 인터뷰 도중에, 시청율을 의식해서였는지, 김주하 아나운서는 "전두환 국보위에 참여한 분이 호남 민심을 얻을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이 질문은 두가지 점에서 잘못되었다. 첫번째는 전두환 국보위 (국가보위 비상 대책위원회, 1980년 5월 창설) 참여 문제는, 호남 사람들 뿐만 아니라, 전 국민이 문제 삼고 비판해야 할 성질의 것이다. 왜냐하면 전두환 노태우 육군 소장들이 79년 1212 쿠데타를 일으키고, 1980년 518 광주학살을 저지르면서 정권 찬탈을 위해 국보위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두번째 김종인이 5공화국 민정당 국회의원으로 정치활동을 시작한 것은 찬/반 논란이 있다. 그러나 독재정권 하에서 경제 테크니션으로 활동한 김종인에게 1212 쿠데타나 518 광주학살의 책임까지 물을 순 없다. 전두환 노태우 독재 정권에 맞서 싸운 사람들이나 민주화운동 참여시민들은 당연히 전두환과 민정당, 그리고 당시 민정당 전국구 국회의원이었던 김종인에 대해서 비판적일 것이고, 또 비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종인은 공식적으로 '국보위 참여'를 사과했는가? 아직 한 적은 없다.

김종인은 공식적으로 6공화국 노태우 정부시절 뇌물수수에 대해서 사과한 적이 있는가? 있다. 집행유예로 풀려났지만 6개월 정도 교도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민주당은 안철수-김한길-박지원 등 중도보수파들의 탈당 이후, 김종인을 영입함으로써 당의 분열을 막고 있다.

그만큼 민주당 정당의 기초와 주춧돌이 허약하다는 것을 반증한다. 총선 이후 설사 민주당이 좋은 성적이나 '방어전'을 치르더라도

민주당의 기본적인 문제들은 해결되지 않을 수 있다. 


제 4공화국 박정희 시절부터 정계에 등장해, 제 5공화국 전두환, 제 6공화국 노태우, 그리고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로부터 러브콜을 받았고, 박근혜 정부, 안철수까지 김종인을 끌어들이거나 이용해먹었다. 이승만 정권 당시 초대 대법원장 가인 김병로의 손자, 김종인은 집안 대대로 국가의 '공인'으로서 좌우를 막론하고, 군사 파쇼와 민간 정부를 넘나들며, 박정희와 그 딸 박근혜까지 두루 거치면서 40년 정치활동을 하고 있다. 이게 가능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김종인이 독일 뮌스터 대학시절 공부하고, 당시 서독에서 배운 '복지국가' 정책들 때문이다. 서구 유럽은 1,2차 세계대전 범죄국가들로서, 내부로는 계급투쟁과 빈부격차로 인한 사회갈등을 가라앉히고, 국제적으로는 상호파괴적인 제국주의 전쟁을 중단하자는 사회적 정치적 외교적 군사적 합의를 이뤄냈다. 그 시기가 1945년에서 1973년 정도 30년간 사회복지 황금기 시절이었다. 


당시 후진국이었고 가난했던 한국에서 서독으로 유학간 김종인이 몸소 체험한 것은 교육, 의료, 실업 보험, 노인 연금 등을 보장한 '가족중심형' 서독 복지국가 체제였다. 김종인은 박정희 군사독재건 유신체제건 간에, <재정학> 전문가로서 욕심이 있었고, 국가정부가 재정 투입을 통해서 교육,의료,주택,고용,연금,국방 등은 물론이고 공공투자까지 책임을 져야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러한 김종인의 정부의 '경제' 참여와 큰 정부론은 1997년 이후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IMF의 신자유주의적 긴축통치에 굴복한 것과는 결이 다르고,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친 재벌' '선 성장 후 분배' '노골적인 노동조합 탄압'과 '해고의 자유' 노선과도 다르다.


그렇다고 해서 김종인은 사회주의자는 아니다.왜냐하면 김종인의 '복지'정책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원활한 작동을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고 그는 믿기 때문이다. 

참고: 한상진 "김종인 영입은 독약"이다. 2016.01.26 (한겨레)  -> 한상진은 위와 같은 배경을 모르거나 알면서도 모른 척 하는 것이다. 


http://www.hani.co.kr/arti/politics/assembly/727946.html




1월 20일, 2016 


김종인은 항간에서 말하는 안철수 멘토설을 부정했다. 

안철수는 대선 후보가 되기 위해서 민주당을 탈당했다. 그러나 그것은 현명한 결정이 아니다.

명분도 없고, 정당 정치도 아니다.


노무현 정부로부터 김종인은 러브콜을 받은 적도 있다.

전두환 국보위에 참여한 것은, 부가가치세 폐지를 방지하기 위해서였다고 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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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인은 부가가치세 폐지 방지를 위해서 전두환의 '국보위'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측에서 김종인을 영입하려고 했다. 



김종인은 6공화국 노태우 정부시절 3년간 청와대 경제수석이었다.

두 차례 뇌물 수수 혐의와 공모로 검찰 수사를 받았다.

아래 사건은 그에 대한 그의 답변이다.






민주당 선거대책위원장으로서 공천 룰을 지킬 것인가?


20% 공천 물갈이는 예정대로 하겠다.






총선 전 야권 통합은 불가능하다.








안철수의 목표는 2017년 대선이 목표다.





민주당으로부터 토사구팽 당하는 게 두렵지 않느냐?

김종인은 그런 것에 신경쓰지 않는다고 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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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종인 이분 쎄다는 느낌이 팍. . .잘할것같습니다.

    2016.02.06 12:04 [ ADDR : EDIT/ DEL : REPLY ]
  2. 생각없다는 말 진짜일거라 믿는 내가 바보다.

    2016.05.16 15:37 [ ADDR : EDIT/ DEL : REPLY ]

도시계획2015. 12. 6. 18:50

1987년 민정당 대통령 후보, 노태우가 내걸었던 선거 공약이다. 2016년 총선과 2017년 대통령 선거에서도 "평생 벌어도 내 집 마련하겠는가?" " 1년에 두번씩 10번만 옮겨봐 !" 


출처: 1987년 11월 13일자 동아일보 광고. 






2016년 총선과 2017년 대선 주제


서울, 대구, 울산을 제외하고는 주택 보급율은 남는다.

왜 그렇다면 전세가는 솟구치고 있는가?

IMF 이후, 긴축통치 이후, 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로 이어지는 '부동산 정책', 경제성장 지표를 끌어올리는 방안으로서

속칭 부동산 '자율화'조치의 뿌리부터, 글로벌 슬럼프 시기에서 한국 경제 활성화 방책으로서 부동산 거래 조장책을 쓴 박근혜 정책까지, 그 문제점들을 파헤치고,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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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현재 


고분양가로 웃돈 적어 실제계약 포기 잇따라
한 가구 여러 개 청약 수요에 비해 부풀려져..건설사, 계약률 공개해야


최근 높은 청약률을 기록했어도 미분양 되는 단지들이 늘어나고 있다. 지난 10월 개관한 '반포 푸르지오 써밋' 견본주택에 관람객들이 청약 상담을 받기 위해 대기하고 있다.

신규 분양시장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가운데 서울 수도권에서 수십대일의 청약경쟁률에도 미계약을 기록하는 단지가 늘고 있다. 특히 오피스텔의 경우 견본주택에 엄청난 인파가 몰리고 있지만 실제 계약은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어 업계에서 발표하는 청약경쟁률에 허수가 많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업계에서는 이에 대해 최근 분양시장이 활기를 띠자 고분양가 단지가 늘고, 이로 인해 예상보다 웃돈(프리미엄)이 낮게 형성되자 투자자들이 계약을 포기하고 빠져나가고 있기 때문으로 분석했다.

6일 업계에 따르면 2015년 1월부터 10월까지 전국에서 공급된 26만507가구에 1순위 청약자가 291만645명 몰리면서 청약경쟁률이 평균 11.17대 1에 달한 것으로 조사됐다.

■수십대일 청약률에도 몇 달째 미분양

지난 10월 서울 서초구 반포동에서 공급된 '반포 푸르지오 써밋'은 3.3㎡당 4040만원의 고분양가에도 불구하고 1순위 청약에서 평균 21대 1의 높은 경쟁률을 기록했다. 그러나 며칠 뒤 진행된 당첨자 계약과 예비당첨자 계약 후에도 실제 계약률은 90%를 밑돌았다.

반포동 D공인중개사무소 관계자는 "청약률이 높았지만 입지에 비해 분양가가 너무 비싸다며 계약을 포기하는 당첨자들이 있었다"며 "또 투자자들은 고분양가 때문에 기대만큼 웃돈이 형성되지 않자 계약을 포기하고 빠져나간 경우도 많았다"고 설명했다.

경기 용인에서 미니신도시급 아파트로 주목받았던 'e편한세상 용인 한숲시티'도 총 6658가구 모집(특별공급 제외)에서 1만3058명이 청약해 평균 경쟁률 2대 1, 최고 126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지만 아직도 미계약분이 절반 가까이 남은 것으로 알려졌다. 분양 관계자는 "현재 미분양 물량이 3000가구 정도 남았다"며 "지난주부터 선착순 분양을 시작해 하루에 100가구 정도 계약되고 있지만 위치나 면적에 따라 소진 속도에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방도 마찬가지였다. 지난 8월 부산 동래구에서 분양한 '동일 스위트'는 평균 45.8대 1의 높은 경쟁률로 1순위에서 청약을 마감했지만 실제 계약률은 70%에 그쳤고 석달여가 지난 최근에서야 계약을 완료할 수 있었다. 역대 전국 최고 분양가 아파트로 전국적인 관심을 끈 '해운대 엘시티 더샵'의 초기 계약률도 70%였고, 지난달까지 계약률이 90%대에 머무르며 초기 완판에는 실패한 것으로 전해졌다.

■오피스텔 청약 부풀리기 더 심각

오피스텔 시장은 상황이 더욱 심각하다. 지난 10월 최고 경쟁률 57대 1을 기록하며 전 타입 순위 내 마감을 기록했다고 발표한 미사강변도시의 '미사역 효성 해링턴 타워 더 퍼스트' 오피스텔은 한달여가 지난 지금까지 선착순 분양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에 대해 분양 관계자는 "1420실 중에 물량이 30% 정도 남았다"며 "한 사람이 3실까지 신청할 수 있었고 부적격자를 제외하면서 청약률에 비해 계약률이 낮게 나왔다"고 설명했다.

지난달 하남에서 분양한 '힐스테이트 에코 미사'도 총 650실 모집에 5395명이 몰리며 평균 8.3대 1, 최고 51.2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지만 정당계약에서 100실 정도가 계약되지 못해 지난 주말부터 선착순 분양을 진행하고 있다.

■'한 가구 여러 개 청약' 바꿔야

전문가들은 이 같은 미계약 사태에 대해 1순위 청약통장이 많아진 데다 한 가구에서 여러 개를 동시에 청약할 수 있게 되면서 청약률이 실제 수요에 비해 부풀려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미사강변도시의 G공인중개사무소 관계자는 "예전보다 1순위 청약통장의 조건이 낮아진 데다 한 가구가 여러 개의 통장을 넣을 수 있어 계약률이 낮아질 수밖에 없다"며 "청약률이 흥행의 전부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런 이유로 계약률을 공개해야 한다는 여론도 있지만 건설사들은 실제 계약률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심교언 건국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지난해부터 주택도시보증공사가 계약률 일부를 공개하고는 있지만 지역 단위로 집계돼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공개되는 자료도 편차가 심해 시장에서 참고하기엔 아직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fair@fnnews.com 한영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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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선 정치의 문제점과 교훈


 

1. 안철수-박경철(시골의사)-금태섭 실패한 정치들 특징 : '자기 돈' 내고, 자기 비지니스하듯이 정치했다. 정치와 비지니스의 차이 부재


2. 대중적인 정치가=공적 서비스 이미지를 가진 동네 일꾼 스타일을 만들어내지 못한 좌파, 정당과 행정업무능력 부재의 틈을 타서, 자기돈 내고 '진보 상품' 만들어 정치하려는 자들은 앞으로도 늘어날 것이다. 지금도 하고 있고, 특히 386세대들 중에 그럴 확률이 높음.


3. 한국이라는 고립된 섬에서, 영남 (대)패권이나 호남,충청(소)패권이 통할지 모르지만, 1945년 광복, 1950년 한국전쟁, 1980년 광주, 1997년 외환위기와 IMF 긴축통치 등 국제적 세력들과의 전투에서는, 패배할 가능성이 높다. (대안 생산 창조적 진보세력으로 발전하기는 힘들다)


4. 1987년 전두환이 7년(80-87) + 7년(87~93) 14년 장기독재를 위해 대통령 간접선거 호헌을 선언했다. 그 호헌 철폐 "직선제 쟁취 독재타도" 이후, 이제는 87 헌법체제에 대한 대안이 필요하다. 정치 이념(철학)과 이데올로기가 필요없다던 정치무지의 안철수 사건은 5년 단임제 대통령 정치상품의 극명한 한계를 드러냈다.


현행 대통령 제도의 '권력' 특성은 이제 어떤 식으로든 바뀌어야 한다. 중장기적 국가 계획과 한국 주변 아시아 국가들과의 '공동체'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정치 체제와 그 권력형태, 행정부 형식들은 만들어야 할 때다.


5. 금태섭 증언이 사실이라면, 박경철-안철수 비선이 성공했다면, 다른 식으로 '선전, 미화'되었을 것이다. 박경철 시골의사의 주식성공에 이은 정치 대박 비법은, 국회의원 정수 200명으로 확 줄여, 국민들에게 '정치혁명'을 안겨다 줬다. '맨날 싸움질만 하는 개잡려 사기꾼 정치꾼들 소탕작전' '아휴 시원해' 정치 교과서 모범이었다라고 선전했을 것이다.


6. 박경철-안철수 비선 정치와 진보정당의 차이? 진짜 차이, 질적인 차이가 있는가? 2000년 민주노동당 등 진보정당 내부, 중앙위원회 정치토론, 최고의원 정치토론, 당 대의원 대회 토론, 아테네 아고라 정치를 100배 능가하는 형식적 절차는 갖췄으되, 내놓는 정치 결과는 특정 개인들과 인맥으로 엮인 몇몇 사람들의 '주장'이 관철되었다.


'이념'과 '정책', 철학과 행정권력 내용을 생산하고, 대중들과의 교감을 만들어내는 각종 회의보다는, 당장 필요한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상대 그룹을 압박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 진보정당 내부 회의구조들, 이 조악한 수준의 박경철-안철수 비선라인과 질적인 차이가 무엇인지, 또 당원들과 대중들에 미치는 영향력은 도대체 무엇인가? 대중들에게 '검증'받는 정치는 실종되고, 대중들과의 접촉면이 줄어들었다.


7. 박경철, 개인적으로 참 사람좋게 보인다. 페친 말대로 안철수가 되었다면 박근혜보다 더 잘 했을 수도 있겠다. 국.정.원 온라인 조작사건, 문재인과의 단일화 과정 잡음과 미숙함, 안철수 멘토 스님 법륜이 가장 많이 강조한 '마음 비우기', 그들 스스로 주장해놓고 그들 스스로 비우지 못했다.


박경철 트위터, 첫 문장이 자체 모순이다. '건강한 시민'은, 자기 정치 공동체에서 의무와 권리가 무엇인가를 늘 파악하려고 노력하고 실천하며 학습하는 자율적인 사람이다. 정치는 '더러운 것'이고 '남을 지배하는 정치조폭들 사시미 회합'이 아니다. 정치는 이제, 아주 거칠게 말하면, 영어 단어 그대로 public service 서비스는 서비스인데, 자기 치킨 짜장면 빵집 개인 비지니스가 아니라, 동네 전체를 아우르는 공적인 행복을 위한 서비스이다.


새누리당과 영남패권에 저항한다고 해서, 정치철학의 부재, 행정 실무 능력 부족이 다 정당화될 수 없다.


안철수-박경철-금태섭-법륜 스타일 포퓰리즘 정치, 그 이후에 청년들의 삶은 얼마나 변화되었는가? 진보좌파에게도 동일한 물음과 책임을 그들보다 10배, 100배는 더 물어야겠지만.




시골의사를 자임하는 박경철에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첫 장에 나오는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고, 아테네 도시국가 폴리스를 떠날 수 없다. 오직 폴리스를 떠날 수 있는 자는 신과 동물 뿐이다' 이 문장을 말해야 하나? 그런 정치학 개론은 박경철에게 필요없다. 이미 다 알고 있고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다.


새누리당의 악마화, 혹은 진보좌파세력의 무능에 대한 과장, '모든 정치권은 더러워서 난 발 담그지 않고 아침이슬 마시겠다'는 정치광고, 이런 자기모순적인 발언은 수준 낮은 광고에 불과하다.

강남에 잘 나가는 상업적으로 성공한 성형외과 의사들이 신상품과 새기술 세미나 가장 열성적으로 잘 참여한다. 무식할 정도로 열심히 성실히 뭐든지 성공을 위해 뛰는, 새누리당 정치인들이 현실정치에 살아남는 이유와 비슷하다.


게임을 할 때는, 새누리당이 입은 운동복 유니폼 디자인 욕을 많이 하면서 '내가 더 깨끗하고, 너는 나보다 더 더럽다'는 식은, 이미 조직화된 유권자들의 마음을 뒤바꿀 수도 뒤흔들어버릴 수도 없다.

가장 실용주의적인 공부인 의학과 가장 경제현실에 민감한 주식에 성공한 박경철은 왜 정치를 가장 '실용주의적인 프라그마티즘'으로 하지 않고, "건강한 시민" "정치는 절대 발 담그지 않겠다"고 해놓고, 언더그라운드 사령관을 자처했던가?


16세기 왕권 탄압과 견제를 뚫는 사림파 비선정치도 아니고.


그럴 필요없었다. 정면 승부했어야 했다. 한국 제도권 정치 수준은 박경철이 생각한 것보다 더 높을 수도 있다. 대중들의 눈 높이라는 측면에서 말이다.


정치는 스포츠와 성형외과 수술과 달리, 정치 시민들을 '대상화'시키는 게 아니라, 정치 과정에 참여시키는, 그들을 주인공으로 만드는 예술이다. 무슨 토크니, 쇼니 하면서 관중들을 동원하는 데 그쳐서는 안된다. 건강한 시민은 관중이 아니다.


실천의 차이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사유와 철학의 차이가 존재한다. 정치의 말과 행동 자체는 철학을 동반한다. 정치의 테크닉도 거기에서 비롯된다. 갈고 닦을 것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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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말대로, '원본'은 찾을 필요가 있다. 맞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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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jur

    올소 ㅋ

    사형

    2015.09.15 19:20 [ ADDR : EDIT/ DEL : REPLY ]

시대정신을 포착하라: 기술자 시대, 지루한 정치 서비스 시대에, 진보정당은 무엇을 할 것이고, 어떤 기술자들이 필요한가?


지루한 진보정치 시대 개막되다. 2008.07.10 07:49:43



이런 생각이 잠시 스치고 지나가다.


시청소감: 진보정치도 지루한 '부품갈기' '톱니갈기' '썩은 이 치료하는' 그런 시대를 맞이했다. 사회 제도 곳곳에 있는 사람들을, 대.한.민.국 공화국이라는 부품들을 점검하고 일일이 떼 내어서 검사해야 하고, 좀먹은 것들은 빼내고, 갈아끼우고, 이 지루하고 땀 삐질삐질나는 일들을 과연 누가 할 것인가?


주제 (KBS 시사기획 쌈, 아래 기사 참고)야 간단하지만 말이다.


주제: 인사는 만사이다. KBS "국가와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사람들이 일할 수 있도록 공평하고 차별없는 인사정책이야말로 대통령이 할 일이다 (고소영과 같은 특정 대학, 특정 종교, 특정 지역에 편중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정치와 기술자 (artist)


"20대에 마르크스주의자가 못되본 사람은 가슴이 없는 사람이고, 40대에도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자이면 머리가 부족한 사람이다"는 말이 있다. 그럼 "20대에 마르크스주의자도 안되본 넘들은 뭐냐? " 이런 말도 있다. 촛불데모 형국에 맞게 고치면 "10대에 촛불소녀 소년, 20대에 좌빨도 못된 사람은 가슴이 시린 넘들이고, 40대에도 87년 유월항쟁 하는 줄 알고, 촛불들고 나오는 넘들은 머리가 빈 사람들이다." 이렇게 해석될 수 있겠다.


그런데 정치는 '열정' 그리고 '머리' 둘 다 필요하다. 그 정치의 속성 자체는 그러나 참으로 지루한 연습과 실천의 반복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조선시대 세자 교육 체계만 해도 그렇고 (kbs 세종대왕 프로그램 같은 거), 고대 아테네 도시국가 시절 소크라테스, 플라톤 역시 정치를 특정 기능을 지닌 사람이다. 어원을 잠시보면, artist 아티스트는 요새 예술가로 이해되지만, 어원을 따지면 ar- 이 의미하는 바가 결합하다/부분부분 조각을 하나로 합쳐 만들다 (fit together, join)이다. 우리 신체로 치면 팔 (arm)과 같은 어원을 지닌다. 신발, 그릇, 무기 등을 만드는 장인 (우리말로 -쟁이)을 의미하는 말이 아트 art 이다.


소크라테스 역시, 정치가도 일종의 정치를 다루는 '특정' 기술자로 간주했다. 훌륭한 정치가가 되기 위해서는 기능적 능력, "탁월하다. 뛰어나다 (excellence)" 이런 소리들을 사람들로부터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요새 유행하는 정치 공학(engineering)과는 다르다. 사실 플라톤의 [공화국 Republic] 책은 철학자 왕/왕비 자격조건을 다루는 책이다. 고대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맹자나 공자는 군주의 '탁월함' 군주조건을 아래와 같이 말한다. "군주는 모름지기, 소인들처럼 배고프다고 마음 (인.의.예.지라는 4단)을 잃어버려서는 안된다" 이런 말들은 강력한 윤리적 요청을 필요로 하지 않는 '정치공학'과는 거리가 있는 말이다.


시대는 너무나 다르고, 2천 500년전 이야기들이고, '민중이 주인이고, 국민이 국가주권이다'라는 민주주의 시대와는 다른 이야기이다. 소크라테스나 공자 맹자에게는 '노동하는 민'이 정치 주체는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정치 본성과 특정 기술, 기능, 기예 (art)에 대해서 생각해 본 것이다.


내가 아래 kbs 시사기획 쌈 (MB식 인사제도)을 보고 드는 생각은, 진보정치 역시 참 지루한 기예, 기술, 기능 (art)을 가져야겠다라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 대한민국 공화국이라는 기계의 부품 관리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 대한민국 공화국 기계 부품 관리사가 되어야 하는가? 그 시대적 요청을 한번 생각해보았다.




(도덕시대 -> 정치시대 부르조아 민주주의 시대 -> 기술자 시대 실용주의 이데올로기 시대)라는 3가지 개념틀을 가지고 지난 30년간 정치를 내 주관적으로 파악해 보았다.


(1) 도덕시대 가고, 정치 시대 오다 (80년 전두환 폭정과 파쇼통치에서 필요한 것은 도덕적 울분이었다. 광주항쟁, 아니 광주사태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물러설 수 없는 도덕적 참회야말로 사회연대와 정치참여의 밑거름이 되었다)


(2) 도덕시대와 정치 시대의 간빙기는 1988-1992, 노태우 6공화국이다. 왜냐하면 노태우가 합법적인 대통령 선거를 통해서 당선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태우가 80년 광주학살의 주범이었기 때문에, 정치시대는 도덕시대의 구름에 가리워져 있었다.


(3) 정치 시대의 도래 : 김영삼이 민자당 후보로 대통령에 당선된 1992년, 1993년부터이다. 이제는 도덕적 정당성으로만 정치를 할 수 없는 시대가 온 것이다.


(4) 정치 시대에서 '기술자 (부품 관리사, 소위 말하는 일상 생활 정치니, 전문가 시대니 하는 말들)' 시대로 오다. (실용주의라는 말은 90년대, 현실사회주의 붕괴와 더불어, 한국 사회에 아주 발빠르게 뿌리를 내렸다)


김대중, 노무현은 운이 좋았다. 시대 흐름은 '도덕시대'도 '정치시대'도 아닌 '기술자 시대'인데, 이회창은 라는 보수적 '정당성 (아들 군문제 - 우익 보수의 핵심 코어를 상실한) 과 '보수적' 도덕성 결여라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던 것이다.


(5) 다시 반전, 노무현 정부의 청와대 386은 '기술자 시대'를 맞이하기에는 (좌파건 우파건, 중도좌파건 간에, 그 시대적 흐름으로서 자리잡은 정치조건으로서 기술자 시대) '준비되지 않은 오발탄들' 이었다.


(6) 국민들이 이명박을 선택한 것은, 부패한 '보수'가 아니라, '부패하더라도' 기술자가 정치하면, 삽질을 하건 불도저질을 하건, '기술자'로 자기 역할은 할 것 아니냐. 삼시 세끼 밥은 안 굶겨 죽일 것 아니냐는 심정이었다.


(7) 이제 빈곤의 쓰나미가 몰려오고 있다. 절대적 빈곤과 상대적 박탈감이 몰려오고 있는 것이다. 한국 사회는 빙산의 일각 사회이다. 양극화, 20:80이라는 말도 정확한 묘사가 아니다. 빙산 위로 수면에 떠 있는 사람들은 '명품' 차, 옷, 유기농 한우 쇠고기, 자율교육, 의료상품 서비스 등을 돈으로 펑펑 구매할 수 있다. 이명박이 할 수 있는 경제정책은 거의 없다. 아무 것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8) 기술자 시대에서 진보정치의 역할,빙산의 일각, 상대적 빈곤감, 절대적 빈곤의 쓰나미가 몰려있고, '사회연대'와 '돌봄', 그리고 구체적으로 사회연대 네트워크 (충격 완화 장치 + 근본적인 자활능력을 제공)를 어떻게 창출할 것인가?

(평등, 생태, 평화, 연대라는 가치들의 관계는 어떠한가?)


(9) 기술자 시대, 지루한 정치 서비스 시대에, 진보정당은 무엇을 할 것이고, 어떤 기술자들이 필요한가? 비유하자면 그렇다. 이명박이 아주 말 잘했다. "저 1만개 초 누가 만들었고,누가 대줬냐?" 진보정당은 촛불제조공장, 생산자들이다. 공급자인 것이다. 촛불을 들 사람들은 시민이다. 조금 더 악날하고 지루하게 말하면, 촛불 시민들 버리고 간 쓰레기 컵, 먹다 남은 음식 찌거기 수거하는 사람들이 바로 진보정당 사람들 역할인지도 모른다.


혁명의 낭만, 우아한 백조의 로망의 밑바닥에는, 삐질삐질 땀나면서 돌리는 '물갈퀴들'의 노고가 있는 것이다.

Posted by NJ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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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정치/민주당2014. 8. 9. 15:43

한홍구 강연이 놓치고 있는 역사적 사실


1. 민주당 투쟁근육을 좀 먹었는가를 설명하지 못했다. 역사적으로 투쟁하는 야당의 성공담을 흑백 다큐멘타리로 틀어주었으나, 민주당(새정련)이 그 투쟁하는 야당 근육을 만들어낼 지는 의문이다. 8월 5일 강연회 직후, 세월호 진상 규명 특별법을 서둘러서 새누리당에 헌납한 것은 불길한 징조이다.


무엇을 놓치고 있는가? 한홍구 <어제의 야당>은 민주당(새정련)과 민주당 의원들이 왜 박정희 전두환 독재시절에 가지고 있었던 투쟁근육을 다 잃어버렸는지 그 원인들을 ‘역사적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하에서, 그리고 이명박 박근혜 정부 하에서도 민주당 대다수 의원들이 새누리당 의원들이 누리는 기득권을 동일하게 누린 사실들을 빠뜨리고 있다. 박정희 전두환-노태우 독재에 저항하는 야당 투쟁근육이,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어떤 정치적 측면과 저항해야 하는가?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박정희-전두환과 동일한 군사파쇼 정부가 아니지 않는가?


특히 한국정치사 경제사에서 1997년, 전세계적으로 가장 혹독한 IMF 긴축 정책을 수용했던 김대중 정부 이후, 2014년 지금까지 소위 민주당 야당의원들은 과거 신민당-평민당과 달리, 한나라당-새누리당 의원들이 누린, 다시 말해서 박정희-전두환 시절보다 더 혹독해진 한국 자본주의 성과를 그들의 정치 경쟁자 새누리당과 같이 향유했다.


박정희-전두환 독재 하에서 상층 20%가 소유한 재산보다 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를 거치면서 상층 20%가 소유한 재산이 차지하는 비중은 4배,5배까지 증가했다. 그만큼 상대적으로 하층, 중산층은 붕괴되거나 상대적 박탈감에 빠지고 말았다. 


OECD 각종 소득 통계나 세금 이후 가처분소득 통계를 봐도 상위층과 하위층의 격차는 박정희-전두환 독재 치하보다 5배~7배 이상 벌어졌다. 심지어 2014년 통계를 보면, 한국 소득 상위 1%가 전체 소득의 16.6%를 차지할 정도가 되었다. 전체 국민 소득 구간를 5개로 나눴을 때, 최상 20%가 최하 20%의 소득 격차가 2.5배 이상 발생해서는 안된다. 진보좌파야 소득격차를 1에 가깝게 하기 위해서 노력하겠지만, 최소한 민주당과 같은 리버럴 정당 (liberalist ) 에서는 2~3배 사이로 막아야 한다.


민주당의 투쟁 근육이 좀먹거나, 그 근육이 주근깨, 혹, 반점, 지방덩어리로 변질된 이유는, 박정희-전두환 군부독재와 싸웠던 그 치열한 투쟁정신만큼, 1997년 이후 한국 사람들을 병들게 만든, 노동의욕을 감퇴시키고, 살 맛 떨어지게 만들었던, 이 소득 격차, 일해도 가난해지고 상대적 박탈감만 생기는, 한국 자본주의 병폐와 투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자본주의 병폐와는 좌파만 투쟁하는 게 아니라, 전 세계 각국 리버럴리스트 정당들도 어느 정도 (타협적으로 하더라도) 실제 사회복지 정책들을 도입한다.


한홍구 <어제의 야당> 강연이 시사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왜 민주당 의원들이 97년 이후 새누리당 (한나라당) 의원들과 별반 차이가 없는가? 과거 386-486 학생회장 민주당표 국회의원들이 실제로는 한나라당-새누리당 의원들과 일상 생활에서 향유하는 경제적 성과물, 다시말해서 절대적 상대적으로 박탈당한 노동소득의 격차 그 기반 위에 서 있다는 역사적 사실을 <어제의 강연>이 말했어야 했다.


인간은 당연히 경제적 동물만은 아니다. 월급 총량이 정치적 의식을 100% 규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 배가 부르는데 배고픈 자의 심정을 알기 역시 쉽지 않다. 박정희-전두환 고문정치, 최루탄 정치, 중앙정보부-안기부 정보정치, 반공-반북 사상 이데올로기 정치에 맞서는 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어려운 정치가 바로, 자본주의의 소득 격차 문제이고, 그것을 가능한 법률적 사회적 교육 문화 제도 장치이다. 





한홍구 교수 강연 내용 요약: by 원시


제목: 어제의 야당

글쓴이: 한홍구(성공회대학교)

발표 시간 및 장소: 2014년 8월 5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제1세미나실)

주제: 야당 어디로 가야 하는가

http://www.polinews.co.kr/news/article.html?no=211559


1. 핵심 주장:

헐거워진 허벅지 투쟁근육을 튼실하게 하라. 투쟁하는 야당 (투야)가 되어라.


2. 한홍구의 진보정당 인식: 2004년 총선과 노무현 탄핵 국면에서 야당지지자들이 열린우리당을 제 1당으로 만들어주고 그에 덤으로 민주노동당에 10석을 준 것이다.


3. 투쟁하는 야당 강연 역사적 논거:


1971년 8대 선거에서 신민당 의석수를 그 이전 40석에서 89석으로 늘려줌 (투쟁 대상은 박정희 영구집권 획책인 유신헌법 반대)

1985년 신민당 제 1야당 전격 진격 (사쿠라 야당인 민한당을 대체할 반-전두환 독재 투쟁 야당 신민당 승리)

1992년 총선에서 공룡보수-민자당 (김영삼+노태우+김종필) 221석을 149석으로 만들고,

김대중 평민당과 꼬마민주당에 97석을 주었다.

그 이후 총선과 대선에서도 마찬가지로 투쟁하는 야당을 유권자들이 지지했다.


4.대안

정치 주체 386-486들이 각성하라. 비육지탄(髀肉之嘆)

30년간 학생회장이지 정치적 ‘성인’이 되지 못했고, 애늙이로 전락했다.

광주 정신과 DJ 김대중 정신을 계승하고, 호남 정치를 복원하라




Posted by NJ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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