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7. 20. 16:45

1992년 4월 25일 한겨레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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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J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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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정치/정의당2020. 5. 1. 01:14

‘소명’ 이라는 단어의 역사성에 대한 메모. 


페이스북에 보면 정의당 당원들 중 일부가 ‘소명으로서 정치’, 확신(신념) 정치와 책임 정치를 구분하는 막스 베버 이야기를 올린다. 처음에는 칼 마르크스와 막스 베버를 연계시켜 이해하려는 제 2의 칼 뢰비트나 루카치,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시도인 줄 알았다. 


요새는 한국이나 미국 유럽 학계가 ‘철지난 지식 상품’으로 간주해서 잘 다루지 않지만, 위르겐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 이론” 1권 4부 제목이 “루카치에서 아도르노: 사물화로서 합리화”, 1장 제목은 ‘서구 마르크주의 전통에서 막스 베버’이다. 


하버마스가 베버의 합리화 이론을 공부한 것은, 사적 소유에 기초한 자본주의 시장체제는 근본적으로 혹은 급진적으로 개혁될 수 있다는 믿음을 폐기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97년 IMF ,2008년 미국 금융공황,  2020년 한국 자본주의 금융 시장은 라임 등 각종 사모펀드 범죄 혐의로 8개월째 난리인 상황을 고려하면, 자본주의 시장을 ‘합리화 과정’이라는 탐침으로 설명할 수 없음은 너무나 자명하다. 


잉글랜드 자본주의 탄생을 막스 베버는 사회진화론적 ‘합리화’ 과정으로, 칼 마르크스는 ‘노동자의 착취와 소외’가 산출한 잉여가치의 자본으로 환골탈태의 과정으로 설명했고, 이 둘 간의 간극은 아직도 너무 크다. 둘 중에 하나 선택 문제가 아니라, 현실 설명과 비판의 구체성이 더 중요하다.


막스 베버는 마르크스의 ‘자본’이 출간되기 3년 전에 태어났고, 독일 패망 후 2년 후, 지금으로부터 100년전 1920년에 별세했다. 베버는 노동자의 소외나 자본주의 착취구조를 주로 탐구하지 않았고, 당시 유럽 국가들에 노동자들이 정당을 만들 때도, ‘그런 교회는 가담하지 않겠다’고 할 정도로 냉랭한 태도를 취했다. 왜 그랬을까? 막스 베버에게는 다른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막스 베버의 정치적 목표는 동쪽의 러시아의 팽창으로부터 독일 독립을 사수하는 것이고, 프랑스와 영국, 특히 영국에 뒤처진 독일 자본주의화를 가속화하고 리버럴 민주주의 체제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막스 베버에게 독일 산업화와 리버럴 민주주의 전차는 독일 중상층 리버럴,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국가 공무원들이다. 헤겔이 ‘법철학’에서 밝힌 신 독일 입헌공화국의 주체로 ‘교양있는 공무원’을 설정한 것과 거의 유사하다. 막스 베버는 잉글랜드의 자본주의 발달과 달리, 독일에서는 국가가 직접나서서 산업자본주의를 키워야 한다고 봤다. 독일이 산업자본주의를 잘 발전시킨다면 부르조아와 노동자 계급의 이익-이해관계는 서로 어긋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막스 베버는 독일 노동자와 사민당에 대해 불신했는데,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사민당이 집권하게 되면, 경제가 중앙집중적으로 통제되고 관리되기 떄문에 거대한 관료주의 체제가 발생할 것이라고 내다봤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 유럽과 러시아 지식인들과 노동자들 사이에 퍼진 ‘혁명적 열정’을 위험하다고 비판했다. 1907년 미헬스 (Michels)에게 보낸 편지에서, 막스 베버는 “사민당 (에스페데)에 가담할 생각은 없고, 어떤 당에도 가입하지 않았지만, 부르주아 정당에 가까운 입장을 표명했다”고 썼다.


1919년 1월 28일, “소명으로서 정치” 강연에서 그는 자긍심으로 가득찬 혁명이라는 대의에 들뜬 러시아 인텔리겐차들은 책임감이 없는, 목표도 없고, 불명료한 지적으로 흥미로운 로맨티시즘에 빠져있다고 비판했다.


이러한 막스 베버의 공산당 관료독재 체제가 러시아 등 사회주의에 탄생할 것이라는 예언을 두고, ‘거 봐라 막스 베버가 옳았다’는 찬사가 반공주의자와 리버럴리스트 사이에서 쏟아지기도 했다. 그런데 필자가 보기에는, 칼 마르크스와 그 친구 프리드리히 엥엘스 (엥겔스는 일본인들이 잘못 들어서 엥겔스로 적은 것으로 보임)는 ‘소련에 가서 우리 동상 다 치워, 이것은 우리가 말한 게 아니다’라고 데모했을 것이다.


베버의 ‘소명으로서 정치’를 읽고 취할 점은 배우고, 비판적인 태도도 취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역사적 맥락’ 속에서 ‘소명으로서 정치’를 독해해야지, 이 내용을 한국 진보정당의 ‘정치 윤리’로 승격시켜서는 곤란하다. 독일은 1차 세계대전 전범자 국가이고, 그 ‘책임정치’의 주체들은 누구여야 하는가를 물어야 한다. 당시 조선은 1919년 31독립운동할 때였다.


아울러 ‘소명’이라는 단어도, 막스 베버가 1904~5년에 쓴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말했듯이, 서구 기독교, 카톨릭으로부터 신교의 분리과정, 루터, 칼뱅, 리처드 박스터 등이 ‘소명’을 어떻게 사용했는가를 살펴야 한다.


사실 이러한 ‘소명’ 개념은, 근래 한국 정치에서도 있었다. 이명박이 하느님의 소명에 따라 ‘서울시’를 하느님의 나라로 봉헌한 적이 있다. ‘소명’ 단어는 우파도, 좌파도, 리버럴도 다 쓸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야기가 너무 번져서, ‘소명’이라는 단어의 역사성만 간략히 설명하자.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읽은 진보정당 독자라면, 딱 한 줄 감상평을 남길 것 같다. 그것은 바로, 저임금 노동자의 일도 그 노동력을 착취하는 고용자의 ‘일과 직업’ 모두 ‘소명’에 속한다면, 그 ‘소명’을 명한 신은 누구 편을 들겠는가?


그러나 청교도 금욕주의를 강조했던 사람들의 논리는, ‘그것이 바로 신의 소명’이라는 동어반복을 할 것이다. 사실 이 점은 막스 베버도 책 말미에 지적한다. 가난한 저임금 노동자의 ‘소명’도 신을 기쁘게 하고, 그들을 착취하는 자본가의 ‘소명’도 신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막스 베버는 이 주제를 깊게 탐구하지 않는다. 그의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막스 베버는 왜 ‘소명’을 강조했는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 밝히고자 한 것은, 중국과 인도에도 없고, 이집트와 이슬람 문명권도 없는, 서구 문화의 고유고 특수한 합리주의는 무엇이길래, 자본주의가 잉글랜드와 서구에서 발달되었는가이다.


막스 베버의 주장은 청교도 금욕주의가 서구 자본주의의 탄생을 가능하게 했던 ‘부르주아 행동’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중국, 인도, 이슬람 문명권에는 없는, 서구에서만 경제 기술 과학 군사 법 행정의 ‘합리화’ 과정이 있었다. 도대체 이것을 무슨 단어로 설명을 해야 하는가?


 막스 베버에 따르면, 서구 경제적 합리주의 발달이 부분적으로는 합리적 기술과 법 때문에 가능했지만, 어떤 종류의 실천적이고 합리적인 행동을 채택하느냐는, 행위 주체의 능력과 성향에 따라 결정된다. 그렇다면 그 행위 주체의 성향과 능력을 결정짓는 게 무엇인가? 막스 베버는 경제적 합리적 행위를 기초하는 주술적이고 종교적인 힘, 의무에 대한 윤리적 생각 등이 ‘행동’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결정요소라 주장했다. 


따라서, 중국, 인도, 이집트에는 없는 그 무엇, 서구에서만 가능했던, 자본주의의 탄생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자본주의) 경제 체제 속에 사는 집단의 신념과 태도(에토스),  특정 종교적 사상이다.  그것이 바로 청교도의 ‘금욕주의’이다. 


청교도 금욕주의란 무엇인가?


잉글랜드 청교도 지도자 리차드 박스터의 ‘종교적 금욕주의(절제주의)’는 다음과 같다.신의 의지가 명령한 삶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신의 은총을 받기 위해서, 인간은 자기 맡은 바 ‘일’, 그 ‘노동’을 신이 준 ‘소명’으로 간주하고, 성심성의껏, 양심껏, 아주 근면한 태도로 그 일을 해야 한다. 이것을 가능하게 만든 것이 바로 ‘종교적 금욕주의’다.


프로테스트탄의 윤리 – 절제주의적 삶과 ‘소명’의식이 자본주의 경제 질서 체제를 탄생시키는 과정을 베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청교도는 ‘소명’을 따르며 노동했다. 우리는 마땅히 그래야 한다. 수도원의 금욕적 삶이 우리 일상에서 관철될 때, 우리 현실 생활에서 지배적인 도덕이 되었을 때, 그 금욕주의는 근대적 경제 질서라는 어마어마한 우주를 창조해내는 역할을 했다” 


진보적인 정치 이론과 담론에 조금이라도 익숙한 사람이라면, 이러한 막스 베버의 자본주의 탄생의 원동력이 ‘청교도의 금욕주의적 삶’과 ‘소명으로서 노동과 직업’의 실천이라면, 임금 노동자와 그들의 삶은 어떻게 설명하느냐라는 질문을 바로 던질 것이다.


그러나 막스 베버는 ‘노동자의 소외와 착취’는 탐사 주제와 또 연구방법론으로도 채택하지 않았다. 


사회과학 연구자들 역시 명료한 자기 정치적 목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특히 막스 베버는 독일 대토지 계급인 융커 (Junker)도 산업 노동자들도 독일 국가 건설의 기관차로 간주하지 않았다. 


막스 베버의 초점은 “근대 서구 정치 경제 기술을 만든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국가 공무원들이었다. 이것은 중국 인도에도 없고, 이집트 등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었다는 게 베버 연구 결론이다.


 


그는 기술, 상업과 무역, 법률 국가공무원들이 한 사회의 일상 생활의 가장 중요한 기능들을 수행했다고 설명하고, 3가지 서구 자본주의의 특질을 1) 회사와 개인 재산의 분리, 2) 합리적인 비즈니스 회계장부 작성, 3) 자본주의적 노동 조직화 (*막스 베버는 노예 노동의 비효율성 지적)로 서술했다. 서구에만 부르주아와 근대 시민 개념이 있었다. 노동자 계급도 서구에만 있었다. 왜냐하면 서구에만 법적인 ‘통제와 처벌 discipline’ 을 통해서 자유로운 노동을 합리적으로 조직화했기 때문이다.  


물론 서구 자본주의 탄생과 정신을 프로테스탄트 윤리, 청교도 금욕주의에서 찾는 베버의 주장과 진단은 많은 비판에 노출되었다. 


왜 한국, 홍콩, 싱가폴, 타이완이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 비해, 자본주의 산업화와 경제성장이 가장 빨랐는가? 그 이유를 베버처럼 “유교의 근면성 강조와 가족주의’에서 찾으면 될 것이라고 했지만, 막상 한국에 와보니, 인구 30% 가량이 기독교 신자여서 ‘도로 프로테스탄트 금욕주의로’ 였다는 농담이 있다.


사실 책 서두에서도 베버가 직접 밝히지만, 이러한 베버의 자본주의 정신과 기원에 대한 탐구 방법이 나오게 된 것은 몽테스키외 발언 때문이었다. 조선으로 치면 숙종, 장희빈 그 즈음인데, ‘법의 정신’을 쓴 프랑스 계몽주의 시대 사상가 몽테스키외가 잉글랜드 사람들이 세계 어느 나라 사람들보다 가장 잘 만들어놓은 3가지를 언급했다. 그 세가지는 1) 독실한 종교적 믿음과 행동, 2) 상업과 무역, 3) (시민) 자유이다.


여기에 착안해서, 막스 베버는 그렇다면 잉글랜드 사람들이 가장 우월한 무역과 상업, 자유로운 정치 제도를 채택했다는 사실과 ‘독실한 종교적 믿음과 행동’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지 않겠는가라는 가설을 세운 것이다. 그 서술 결과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다. 


물론 자본주의가 발달해 기계 생산 체제로 되자, 이러한 ‘금욕주의’는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게 되어 사람들에게 무시당했다. 그 책에서는 간략하게 몇 페이지 나온다. ‘청교도 금욕주의’는 서구 자본주의 정신이었지만, 자본주의 생산력이 최고조에 달하자, 자본주의는 ‘금욕주의’를 사다리로 쓰고나서, 걷어차 버렸다. 


잉글랜드 청교도 지도자 리처드 박스터는 물질적인 재화나 상품은 마치 아기 천사가 입은 가볍고 얇은 망토처럼, 그 천사의 어깨 위에만 놓여져 있어야 하고, 어떤 시점에는 그 망토는 벗어 던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가혹한 운명의 명령으로 그 가벼운 망토는 쇠로 만든 새장(새 철장)이 되어야 했다.


 자본주의 생산력이 급격히 성장하자, 물질적 재화는 인간을 거꾸로 지배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그 자본주의를 형성한 종교적 금욕주의는 이제 새 철장을 탈출하고 말았다.‘소명’ 의식이라는 의무감도 이제 죽은 종교적 신념이라는 귀신이 되어 승리한 자본주의 거리를 배회할 뿐이다. 


막스 베버는 책 끝에 새로운 시대의 가치를 갈구하면서, “정신없는 전문가들, 심장없는 감각적 쾌락추구자”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 삶의 목표, 행위 동기, 의미의 상실을 지속적으로 구조적으로 체계적으로 만드는 자, 만드는 경제 사회 체제에 대한 탐구와 물음은 없었다. 이것이 칼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적 시장이란 ‘소외와 착취’ ‘물신숭배’ ‘목적과 수단의 가치전도’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공간이라는 진단과 비판을 내린 것과 베버의 차이다. 


막스 베버 역시 칼 마르크스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합리화의 역설 (가벼운 천사의 망토가 쇠철장이 되고, 그 쇠철장을 탈출해야 하는 인간의 새옹지마, 사회구조의 변증법적 운동) 과정을 설명했다. 


다만 막스 베버는 ‘청교도의 금욕주의’가 서구 자본주의 정신이고, 그 탄생의 원동력이라고 봤고, 칼 마르크스는 베버가 말한 서구 자본주의의 합리화 과정에는 토지를 박탈당한 잉글랜드 도시 노동자들의 피와 땀, 그들의 잉여노동이 베어 있다고 본 것이다.




Weber, Max. (trans.Talcott Parsons) The Protestant Ethic and the Spirit of Capitalism.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1958. 


Max Weber: The Vocation Lectures "Science as a Vocation" "Politics as a Vocation" (trans. Rodnedy Livingstone). (Indianapolis: Hackett Publishing Company). 2004. 


Habermas, Jürgen. Theorie des Kommunikatives Handelns, Band I. (Frankfurt: Suhrkamp) 1981. 





Posted by NJ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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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후후히히하하호호흐흐허허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생각이 많이지는데 정리가 안되네요.

    2020.06.19 18:02 [ ADDR : EDIT/ DEL : REPLY ]
    • 생각나는대로 적으셔도 되요. 그래야 좋은 대화가 되니까요, 저에게도 공부가 됩니다.

      2020.07.02 16:06 신고 [ ADDR : EDIT/ DEL ]

글 창고/20152020. 2. 12. 23:27

Nakjung Kim

December 3, 2015 · 

송호근(서울대 사회학과 교수)은 한국이 '미래담론'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의 4대강 같은 엉터리 지리학에 기초한 토목공사가 20-30년 가는 미래담론의 가로막았다. 그 이명박 교수 밑에서 송교수가 브레인역할을 하려다가 실패했지 않았던가?


송교수의 허공에 붕뜬, 빈껍데기 '시민성' 으로 흐를 가능성이 크다. 첫번째 지금은 구한말도 아니다. 비유라고 해도 시대착오적 발상이다. 누구의 잘못으로 구한말, 조선말기라는 것인가에 대한 설명과 분석이 없다. 정치적 책임성에 대한 논의가 빠지면 송교수의 글은 그냥 국민들 야단치기 종아리 걷어라는 것에 불과하다.


- 두번째, 노동자들이 자기 임금만 올리려고 하니까 '시민성'을 학습할 겨늘이 없다고 송교수는 말한다. 사회학 자체가 '열린 주제 분과 학문'이라는 무궁무궁한 장점이 있지만, 구체성에 근거하지 못하면 '붕 뜬 시인'이 되기 십상이다. 서울에서 자기 집이 없는 시민들은 점점 핵심부에서 주변부로 그 다음에 서울 경계선을 넘어 외곽으로 밀려난다. 노동소득이 부족하면 삶의 근거지가 박탈당하는 게 사회학적 현실이다. 


서울은 3층, 5층 연립주택, 상가 빌딩을 소유해서 '집세, 빌딩 임대세'를 받는 계층이 아니면, 월 400만원 이상의 고소득 노동소득자가 아니면 인간답게 살기 힘들다. 물질적 기초적인 삶의 토대가 무너지거나 그 방어선이 뚫리면, 공동체의 미래를 토론하는 '공적 담론 공간 (동네 카페, 뮤지컬, 도서관, 랑랑 카바레, 노래방, 정당 토론회, 김제동의 톡투유 등)' 참여는 힘들다.


- 송교수 주장이 엄청나게 라디컬한 입장이어서, 비정규직이나 치킨집 짜장면집 자영업자를 비판하는 게 아니라, 민주노총 대기업 노동자들의 집단 이기성을 비판하는 것이라고 하면 저 '시민성'은 달라지는가? 그러나 이들도 노동강도 노동시간을 고려하면 '시민성'을 실천할 비-노동, 비-생산 시간은 많지 않다.


- 세번째, 범주 오류, 그리고 구체성의 상실, 서유럽 역사와 중국-한국사 차이에 대한 설명력 결여. 이 기사에 나타난 송교수의 서양역사에 대한 인식은 오류다.


서구 시민은 '국가'와 대결 속에서 시민성을 획득했는데, 한국(북한)은 국가를 구제하느라 '민족주의'에 처 박혔다고 그는 진단한다.


팍스브리태니카, 팍스아메리카나로 대표되는, 또는 1차, 2차 세계대전의 원인들은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로 대표되는 서유럽국가들의 자본주의, 제국주의, 그리고 '팽창적 민족주의'에서 찾을 수 있다. 이건 역사가들의 공통적 견해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중국을 포함한 조선은 그 서구열강의 '민족주의' 요소가 결핍되어 오히려 주권을 상실하는 '패전국'이 되었다. 35년간 일제 해방운동을 해야하는 게 조선이었고, 가장 큰 과제는 '주권 회복'과 '봉건적 질서 타파'였지 않나?


- 네번째, 하버마스의 '공론 토론 영역 (공론장:Öffentlichkeit )에 대한 기계적 대응과 도식들의 오류: 시민사회의 담론 공간의 발생, 성장, 쇠퇴를 논한 독일 사회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가 말한 것을 송교수는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 하버마스의 교수자격 논문이 '공론장의 축소와 파괴'에 대한 것이다. 


17~18세기 절대왕정 군주에 맞서 칸트 (프러시아) 루소(프랑스) 존 로크 (영국), 토마스 페인 (영국) 등이 '공적인 토론의 중요성과 출판,표현의 자유를 획득'이야말로 계몽주의 정신의 기초라고 역설했다. 이러한 자유로운 이성의 놀이공간, 지적 공간, 공부 공간, 정치적 문화적 공간을 파괴하고 축소시키는 게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하게 말하면 자본주의 이윤추구와 국가권력의 폭력이다.


- 그렇다면 한국 현대사에서 파쇼적 권력과 무자비한 자본의 이윤추구 세력들과 저항하며 계몽주의의 기초인 '이성의 자유로운 토론' 공간을 확대하려고 노력한 집단은 누구인가?


4대강 만들었던 이명박인가, 아니면 시위 복면자를 테러리스트라고 한 박근혜인가, 대학생들 데모하면 위수령 발동해서 경찰도 아닌 군인들 투하해 총기로 위협했던 박정희인가? 박정희 퍼핏급에 해당하는 전두환 노태우는 생략하자.


- 송호근 교수의 글과 기사에는 '주어'가 명료하지 않다.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하는 지배층의 자기 반성과 정치적 퇴각, 양보 없이 중간층의 '정신'만 회초리로 갈긴다고 해서, 한국의 미래 비전과 담론이 생겨나지 않는다. 잘 해야, 중산층, 교양층들을 시민으로 간주하고, 그들이 '재산축적만 하지말고' 시민사회를 이끌어 달라는 윤리교과서적 주문이다.


- 마치며, 우리는 계몽의 삽을 들어야 한다. 송교수의 말을 듣지 않았던 이명박인지는 모르겠지만, 독일 지형과 강의 구조가 다른, 너무나 다른, (독일은 스위스 알프스가 고지대이고, 북쪽이 저지대이지만, 중앙은 평평한 편이고 경사가 없어 완만하다.그래서 강에 배가 많이 다닌다) 한국 강에 보를 설치하고 운하를 만들어놓고 물을 다 썩게 만들어 버렸다.


다시 계몽의 삽을 들고, 4대강의 썩은 물을 다시 흐르게하자.


뉴스기사: 송호근 교수 "한국 현실, 구한말 패망 직전과 흡사"(종합)

"내부의 분열과 갈등에 밀려 미래 비전 논의 없어"

연합뉴스|입력 13.11.29



Posted by NJ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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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정치/민주당2018. 11. 15. 17:04

헤겔리안 '이념 Idee' 문파, 세계사의 보편 이념인 문재인 절대정신을 현실 정치 RealPolitik 에서 실천하는 문파와 현실에서 트위터 낙엽 속에서 낭만적으로 아래와 같이 나뒹굴었다. 


문파, 새로운 주권자의 이상한 출현 이라는 책을 보다. 정확히는 온라인 서점에 맛보기로 소개된 30페이지를 읽다.박구용 교수의 이러한 시도는 정치학적으로 유의미하다. 도그마와 확증편향에 빠져 새로운 변화를 놓치기 쉬운 선무당 전문가들에게. 그러나 박구용 교수 시도가 남긴 아쉬운 점은, 집단 이성을 발휘하여 진리를 추구하는 '여론장- 공적 토론 공간 Öffentlichkeit'이라는 이념과 이상을 먼저 설정한 다음, 그 현실적인 주체가 바로 '문파, 새로운 주권자의 이상한' 실천이라고 규정해 버린 점이다.


그러니까 글쓴이의 정치적 희망사항을 전제한 다음, 그 실천 주체를 곧바로 대입해 버린 듯한, 그래서 책의 그물망이 너무 헐겁고 튼튼하지 못했다.


현실에서 온라인 공간에서 박구용 교수가 말한 문파들이 실제 사용하는 말이나 주장들, 그리고 대화를 하는 방식, 특히 개혁의 동반자인 진보정당, 정의당에 대한 태도는, 문재인을 '빨갱이'라고 폄훼해버리는 태극기 부대원들과 질적 차이가 없다.

 '문파'를 새로운 주권자로 격상시키고 '민주주의 정신'으로 승격시키기에는 그 반대 사례들이 너무 많아 보인다.

 


NJ(원시)Tweet text
 
 


인터넷 좀비? 정치 팬덤? ‘문빠’는 누구인가



입력 : 2018-11-08 17:50 ㅣ-

문파, 새로운 주권자의 이상한 출현/박구용 지음/메디치미디어/276쪽/1만 4000원


文대통령 지지자들 정치·철학적 접근 

촛불혁명 ‘과정’에서 생성 규정 

부작용 등 분석 없어 아쉬워


지난해 5월 9일 당시 문재인 제19대 대통령 당선자가 대선 승리 직후 서울 광화문 세종로 소공원에서 열린 대국민 인사에서 환호하는 지지자들의 손을 잡고 있다. ‘문파, 새로운 주권자의 이상한 출현’은 문 대통령을 지지하는 ‘문파’를 정치 철학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서울신문 DB클릭하시면 원본 보기가 가능합니다.


▲ 지난해 5월 9일 당시 문재인 제19대 대통령 당선자가 대선 승리 직후 서울 광화문 세종로 소공원에서 열린 대국민 인사에서 환호하는 지지자들의 손을 잡고 있다. ‘문파, 새로운 주권자의 이상한 출현’은 문 대통령을 지지하는 ‘문파’를 정치 철학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서울신문 DB


문베충, 문각기동대, 문위병, 문슬림…. 문재인 대통령을 막무가내로 추종하는 집단을 낮춰 부르는 명칭이다. 이를 대표하는 말로 ‘문빠’가 가장 적합해 보인다. ‘~빠’가 주는 어감이 그리 좋지는 않다. 그러나 ‘이니(문재인 대통령의 애칭) 마음대로 해’ 하는 식의 행태를 꼬집는 단어로 이 말만큼 어울리는 말이 없어 보인다. 


누군가는 이런 ‘문빠’를 ‘인터넷 좀비’쯤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문 대통령에 관한 일시적인 정치 팬덤 정도로 취급하는 이들도 있다. ‘전임 대통령을 맹목적으로 뒤따랐던 이들과 문빠가 뭐가 다르냐?’고 비판하거나, 특정 정치인의 카리스마에 도취해 떼로 몰려다니면서 정치 지형을 파괴하는 괴물, 심지어 애써 찾은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세력으로 여기는 이들도 적지 않다.



신간 ‘문파, 새로운 주권자의 이상한 출현’은 문 대통령을 지지하는 ‘문빠’를 정치 철학적으로 접근한 책이다. 


저자 박구용 전남대 철학과 교수는 문 대통령에 관한 정치 팬덤만을 ‘문빠’로 규정한다. 문 대통령의 정치를 지지·지원하면서 시민 주권과 민주주의의 복원을 지향하는 공론과 공감의 상호 주체, 그리고 이들의 활동 및 효과를 총괄하는 개념으로 ‘문파’를 따로 떼어낸다. 쉽게 말해 ‘문빠’는 그저 단순한 정치 팬덤이지만, 이 가운데 새로운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시대를 압축적으로 표현한 일종의 정치 현상으로서 ‘문파’를 보자는 이야기다.



저자는 우선 문파를 ‘실체’가 아니라 ‘과정’으로 규정한다. 문파는 새로운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담은 촛불혁명 과정에서 생성된 이들이다. 의회, 광장에서 온·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전방위적으로 나선 이들은 한국 정치의 새판을 짜야 한다고 강조한다. 특정 지역을 기반으로 정당이 권력을 나눠 먹는 지금까지의 정치 지형을 위협하고 나선 것이다. 시민들을 계몽하는 역할을 했던 미디어 권력 역시 인터넷, 팟캐스트 등을 기반으로 나서는 문파의 위협을 받고 있다.



권력은 추종을 부르고, 포퓰리즘을 수반한다. 과거에도 그랬다. 그러나 저자는 문파가 이른바 ‘박사모’(박근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뿐 아니라, ‘안철수 현상’과도 다르다고 강조한다. 박사모나 안철수 현상은 포퓰리즘으로 생겨난 권력을 박근혜, 안철수 개인이 소유하려 들자 사라졌다고 분석한다. 그렇다면 문파와 가장 유사한 이들은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라 할 수 있다.



한데 생성 과정은 비슷했지만 여러 면에서 차이점이 있다. 노사모는 권력을 추동했던 386이 권력의 중심에 서서 노무현 전 대통령과 대립하면서 소멸했다. 


노 전 대통령이 대북송금 특검 수용, 이라크 파병 수용, 대연정 제안,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등으로 대립각을 세우면서 사라진 것이다. 


여기에 영남패권주의가 끼어들면서 많이 퇴색하기도 했다. 그러나 저자는 “문파는 아직 누구의 소유도 아니고, 정치적 권력을 소유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자신들의 의견과 의지를 스스로 대변한다는 점에서 다르다”고 강조한다. 

386을 위주로 한, 이른바 ‘입진보’(행동 없이 말만 앞세우는 진보)가 했던 비판적 지지에서 벗어나 당파적 지지로 해석할 것을 주문하는 점, 정치적 현실 속에서 민주주의를 찾아가는 과정, 그리고 노 전 대통령 때와 달리 영남패권주의를 극복하는 과정을 읽으라고 강조한다.


저자는 문파를 분석하고자 9개월 동안 문파, 혹은 문빠와 만나 ‘당신은 문빠인가’, ‘조직이 있고 소통 하나’, ‘문재인이 잘못을 저질러도 지지할 것인가’ 등 모두 28개의 질문을 던졌다. 


이런 과정을 거쳐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만난 문파들은 괴물도, 요물도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의 생각을 대변하려는 시민 주권자들일 뿐이었다. 내가 만난 문파는 각자 자기 생각을 말하지만, 서로 다른 말을 하는 다양한 얼굴의 시민들이었다”고.



자신을 ‘입진보’라고 고백하면서까지 문파를 추적한 저자는 그러나 문파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구현해 내지는 못했다. 전반적으로 문파를 우호적으로 보는 점, 특히 문파의 부작용에 관해 크게 다루지 않고 ‘문빠의 탓’으로만 치부한 점도 이 책의 큰 단점이다.


 그러나 문파를 단순한 팬덤 집단인 문빠에서 떼내어 하나의 정치 현상으로 파악한 시도는 높게 살 만하다. 지금의 정당과 의회가 시민 주권자들의 의견과 의지를 제대로 대변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정당과 의회의 출현이 지체될 것이라는 경고 역시 귀 기울일 만하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2018-11-09 36면



[출처: 서울신문에서 제공하는 기사입니다.]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81109036005#csidxf55d650749d8dfbab33472f3d0603b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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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계획2015. 12. 15. 18:57

송호근(서울대 사회학과 교수)은 한국이 '미래담론'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의 4대강 같은 엉터리 지리학에 기초한 토목공사가 20-30년 가는 미래담론의 가로막았다. 그 이명박 교수 밑에서 송교수가 브레인역할을 하려다가 실패했지 않았던가?


송교수의 허공에 붕뜬, 빈껍데기 '시민성' 으로 흐를 가능성이 크다. 첫번째 지금은 구한말도 아니다. 비유라고 해도 시대착오적 발상이다. 누구의 잘못으로 구한말, 조선말기라는 것인가에 대한 설명과 분석이 없다. 정치적 책임성에 대한 논의가 빠지면 송교수의 글은 그냥 국민들 야단치기 종아리 걷어라는 것에 불과하다.


- 두번째, 노동자들이 자기 임금만 올리려고 하니까 '시민성'을 학습할 겨늘이 없다고 송교수는 말한다. 사회학 자체가 '열린 주제 분과 학문'이라는 무궁무궁한 장점이 있지만, 구체성에 근거하지 못하면 '붕 뜬 시인'이 되기 십상이다. 서울에서 자기 집이 없는 시민들은 점점 핵심부에서 주변부로 그 다음에 서울 경계선을 넘어 외곽으로 밀려난다. 노동소득이 부족하면 삶의 근거지가 박탈당하는 게 사회학적 현실이다. 


서울은 3층, 5층 연립주택, 상가 빌딩을 소유해서 '집세, 빌딩 임대세'를 받는 계층이 아니면, 월 400만원 이상의 고소득 노동소득자가 아니면 인간답게 살기 힘들다. 물질적 기초적인 삶의 토대가 무너지거나 그 방어선이 뚫리면, 공동체의 미래를 토론하는 '공적 담론 공간 (동네 카페, 뮤지컬, 도서관, 랑랑 카바레, 노래방, 정당 토론회, 김제동의 톡투유 등)' 참여는 힘들다.

- 송교수 주장이 엄청나게 라디컬한 입장이어서, 비정규직이나 치킨집 짜장면집 자영업자를 비판하는 게 아니라, 민주노총 대기업 노동자들의 집단 이기성을 비판하는 것이라고 하면 저 '시민성'은 달라지는가? 그러나 이들도 노동강도 노동시간을 고려하면 '시민성'을 실천할 비-노동, 비-생산 시간은 많지 않다.

- 세번째, 범주 오류, 그리고 구체성의 상실, 서유럽 역사와 중국-한국사 차이에 대한 설명력 결여. 이 기사에 나타난 송교수의 서양역사에 대한 인식은 오류다.


서구 시민은 '국가'와 대결 속에서 시민성을 획득했는데, 한국(북한)은 국가를 구제하느라 '민족주의'에 처 박혔다고 그는 진단한다.


팍스브리태니카, 팍스아메리카나로 대표되는, 또는 1차, 2차 세계대전의 원인들은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로 대표되는 서유럽국가들의 자본주의, 제국주의, 그리고 '팽창적 민족주의'에서 찾을 수 있다. 이건 역사가들의 공통적 견해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중국을 포함한 조선은 그 서구열강의 '민족주의' 요소가 결핍되어 오히려 주권을 상실하는 '패전국'이 되었다. 35년간 일제 해방운동을 해야하는 게 조선이었고, 가장 큰 과제는 '주권 회복'과 '봉건적 질서 타파'였지 않나?


- 네번째, 하버마스의 '공론 토론 영역 (공론장:Öffentlichkeit )에 대한 기계적 대응과 도식들의 오류: 시민사회의 담론 공간의 발생, 성장, 쇠퇴를 논한 독일 사회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가 말한 것을 송교수는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 


하버마스의 교수자격 논문이 '공론장의 축소와 파괴'에 대한 것이다. 17~18세기 절대왕정 군주에 맞서 칸트 (프러시아) 루소(프랑스) 존 로크 (영국), 토마스 페인 (영국) 등이 '공적인 토론의 중요성과 출판,표현의 자유를 획득'이야말로 계몽주의 정신의 기초라고 역설했다. 이러한 자유로운 이성의 놀이공간, 지적 공간, 공부 공간, 정치적 문화적 공간을 파괴하고 축소시키는 게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하게 말하면 자본주의 이윤추구와 국가권력의 폭력이다.

- 그렇다면 한국 현대사에서 파쇼적 권력과 무자비한 자본의 이윤추구 세력들과 저항하며 계몽주의의 기초인 '이성의 자유로운 토론' 공간을 확대하려고 노력한 집단은 누구인가?


4대강 만들었던 이명박인가, 아니면 시위 복면자를 테러리스트라고 한 박근혜인가, 대학생들 데모하면 위수령 발동해서 경찰도 아닌 군인들 투하해 총기로 위협했던 박정희인가? 박정희 퍼핏급에 해당하는 전두환 노태우는 생략하자.


- 송호근 교수의 글과 기사에는 '주어'가 명료하지 않다.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하는 지배층의 자기 반성과 정치적 퇴각, 양보 없이 중간층의 '정신'만 회초리로 갈긴다고 해서, 한국의 미래 비전과 담론이 생겨나지 않는다. 잘 해야, 중산층, 교양층들을 시민으로 간주하고, 그들이 '재산축적만 하지말고' 시민사회를 이끌어 달라는 윤리교과서적 주문이다.


- 마치며, 우리는 계몽의 삽을 들어야 한다. 송교수의 말을 듣지 않았던 이명박인지는 모르겠지만, 독일 지형과 강의 구조가 다른, 너무나 다른, (독일은 스위스 알프스가 고지대이고, 북쪽이 저지대이지만, 중앙은 평평한 편이고 경사가 없어 완만하다.그래서 강에 배가 많이 다닌다) 한국 강에 보를 설치하고 운하를 만들어놓고 물을 다 썩게 만들어 버렸다.

다시 계몽의 삽을 들고, 4대강의 썩은 물을 다시 흐르게하자.


기사 출처 : 

http://m.media.daum.net/m/media/hotnews/rankingnews/popular/newsview/20131129135509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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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철학2012. 7. 16. 16:36



잘살자/ 평등, 생태, 평화, 연대라는 가치와, 사민주의자의 사회복지 체제 비판


원시


2008.10.13 21:26:452912

잘살자님/ 한국이 97년 IMF이후에, 절대적 빈곤이 늘어나고, 상대적 빈곤감 역시 늘어났습니다. 그래서 사회복지나 사회안전망, 실험보험 등과 같은 문제나,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는 중요한 사회적 진보운동 주제입니다. 그래서, 사회복지는 97년 이후, 한국에서 좌파적 정치와 연결이 됩니다. 그러나, 사회복지 정책은, 정치적으로 보수, 자유, 진보(좌파) 당이 다같이 쓸 수 있는 정책입니다. 물론 현재 이명박 정권은 감세 정책등에서 보여지듯이, 서유럽 사회복지 정책과는 동떨어진, 미국 공화당 정책과 유사합니다만. 


제가 말한 사회복지라는 말이 무조건 절대적인 선 (good !)은 아니고, 정치맥락을 고려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한가지 사례로, 사민주의자였던 하버마스의 "사회복지 체제"에 대한 비판도 아니러니하지만 참고할 만하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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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평등, 생태, 평화, 연대 등에 새로운 가치들을 고정시킬 필요는 없다. 이는 자주 평등이라는 민주노동당식 슬로건의 양적 확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아니 왜 자유는 들어가지 않은가? 그게 자유주의자건 마르크스주의자건 자유는 중요하다. 따라서 열린 가치 쳬계, 다양한 실천에 근거한 가치 개념들을 더욱더 개방할 필요가 있다.


두번째, 1) 이명박 정부의 실정, 오륀지 사건, 법학전문대학원, 대학 등록금 인상 등 교육, 2) 국토해양 장관 이명박 운하 프로젝트, 신도시 건설 계획, 도시,건설,교통 부서


 3) 대안적 경제체제에 대한 고민과 노동자의 경영참여를 가능하게 할 노동부 


4) 서민과 노동자, 중산층의 의료비 부담은 소득에 비해 늘어나는 현실, 의료혜택의 양극화 (특히 노인 어린이 여성 노동자 등은 심각한 편차 발생), 병원이 비지니스로 변질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예비내각과 진보행정부를 대표할 비례대표명부는 반드시 이러한 과제들을 실천할 수 있는 대표성, 진지구축성 책임성 내구성을 갖춘 인물들을 뽑아야 한다.


새로운 진보정당이, 신 정치 (교육, 가족, 생태, 소수자 권리, 여성 등)와 구 정치 (경제 성장, 고용정책, 노동,안보, 군사 등)를 창의적으로 결합시킬 필요가 있다. 물론 외국의 사례들은 하나의 참고자료이고, 우리 상황을 더욱더 구체적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정치 실천 영역에서는, 다양한 정치적 실천들 (그게 구정치 구좌파의 내용이건, 신정치 신좌파의 내용이건)을 적극적으로 새로운 진보정당으로 흘러 들어오게 해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진보정당에서는 그런 정치적 공간과 일자리를 만들어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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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가치 개념들과 정치적 이념 (구좌파 내용과 신좌파의 내용들의 사례)



2007년도 한국정치판에 등장한 단어, 가치 (value) 개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심상정도 3가지 혁신을 이야기하면서, 가치와 주체 혁신을 언급한 적이 있다. 왜 이념이나 정치노선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가치라는 말을 사용했는가? 심상정 뿐만 아니라, 권영길도 통합민주당 등 자유주의자들도 가치연정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이데올로기의 종언의 시대에 살고 있어서 그런가? 아니면 한국이 서구 유럽과 북미에서 이룩한 사회복지국가를 어느정도 달성했기 때문인가? 



가치(value) 개념은,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친숙한 용어이다. 마르크스의 노동 가치론 때문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가치 개념은 그의 상품 분석에서 비롯되는 가치와 사용가치를 지시하지 않는다. 1970년대 사회복지국가를 논의하면서, 서구 정치 정당들의 이념적 지형 변화, 신사회운동 (NSM) 을 설명하면서 등장한 용어가 바로 가치 개념이다. 소위 말해서 정통적인 계급 정치 (class-based politics)에서 가치 정치(value-based politics)로 이전을 설명하면서 등장한 용어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서유럽 사회민주주의 정당과 자유주의 정당, 보수주의 정당, 종교 및 군소 민족주의 정당들이 다같이 합의한 게 사회복지국가 모델이다. 이 사회복지 국가 모델 (코포라티즘) 하에서는, 계급갈등이 더 이상 사회 문제의 전면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탈- 산업, 후기자본주의, 사회복지국가 하에서 사회 문제는 가치들 (즉 여성, 문화, 심리 동기, 가족, 환경, 인종, 이민 노동자, 신지역주의 갈등)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96년 한국에도 잠시 다녀온 독일의 대표적인 개혁주의 사회민주주의자라고 볼 수 있는 위르겐 하버마스 책을 한 구절 보자. 의사소통 행위론이라는 책, (1982) ,  2권 맨 뒤에 뒤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참고로 하버마스는 신좌파이지만, 독일 사민당 (SPD)에 투표한 소위 개혁주의자이다. 


구-정치와 신정치를 구별 분리한 사람들은 힐데브란트(Hildebrandt), 달튼(Dalton), 반즈(Barnes), 카세(Kaase) 등이 1977년에서 1979 년 사이에 사용한 용어이다. 이것을 하버마스가 인용했다. 구(old) 정치란 경제, 정치, 사회, 안보, 군사 분야를 가리키고, 신(new) 정치 주제란 삶의질, 평등권, 자아실현, 참여, 인권과 관련된 주제들이다. 








(1960년대 후반 2차 세계대전 이후 사회복지 국가 체제 하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서구 유럽과 북아메리카 청년들이 새로운 사회운동의 주체로 떠올랐다. 사진: 미국의 베트남 침략을 반대하는 데모 ) 


그렇다면 하버마스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가? 신사회운동의 이론적 정리 논평이 하버마스 의사소통행위 이론 핵심이다. 사회복지 국가에서 사회비판의 잠재력은 어디에 있는가를 해명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서, 신사회 운동 (같은책 578) - 반핵, 환경운동, 평화, 지역 풀뿌리, 농촌으로 내려가 살기 운동, 노인, 게이, 청소년, 장애인 권익 운동, 종교 근본주의, 세금 저항 운동, 학부모협회 운동, 여성해방운동, 모더니즘 반대 운동 등 - 이런 모든 새로운 형식의 사회 저항 형태들을 사회이론적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이렇게 새롭게 독일에서 발생한 사회운동은, 과거 사회주의자들(구좌파)의 주제였던 경제, 경제성장, 분배를 둘러싼 계급폭발이 아니라는 것이다. (1960-1980년까지)


 이제 새로운 운동은, 문화적 재생산, 사회통합, 개인의 삶의 영역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삶의 영역, 즉 생활세계가 식민화되는 것에 사람들이 저항한다는 것이다. 이제 분배문제 아니라, 삶의 형식의 문법에서 새로운 갈등은 폭발한다는 것이 하버마스의 생각의 핵심이다.



우리가 귀닮아 들을 필요가 있는 하버마스가 지적한 정치적 의견은 무엇인가? 


노동자들에게 실업 보험에 들게 하고, 일자리를 마련해주지 않고, 행정부에서 돈으로, 노동부에서 그 실업급여로 때우려고 한 것을, 하버마스가 '자활력'을 상실하게 만드는 비인간적인 처사라고 비판했다. 하버마스가 독일식 “사회경제 시장”에 근거한 사회복지국가를 행정가 치료주의라고 비판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다시 말해서, 실업보험금이나 타먹는 천덕꾸러기로 노동자가 전락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노동조합이 임금인상, 고용안정 등과 같은 경제투쟁을 뛰어넘어서, 참여경영, 자주관리등 공장 평의회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기존 사회주의자들 외침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정치, 구정치 분류법 말고도, 물질주의적 가치와 탈-물질주의적 가치로 구분한 경우도 있다.


 로날드 잉글하트 (Ronald Inglehart)가 1977년에 발표한 책, “조용한 혁명: 서방 대중들 사이에서 변하고 있는 가치와 정치 스타일” 에서, 1945년에서 1975년 “황금기 시대(the golden age)” 에서 나타난 두가지 가치들, 하나는 물질주의적 가치들 (구정치 주제들: 경제, 정치적 성장과 안정), 다른 하나는 탈-물질주의적 가치, 즉 표현적 가치 (신정치 주제들)이다. 



아주 대표적인 정치적 표출이, 유럽 전역에 펼쳐진 68혁명시, 프랑스 공산당의 초기 입장은 그야말로 구정치영역에 머물렀고, 프랑스 학생들은 후자 신정치 주제들을 전면에 내걸고 나왔다. 한편 동유럽에서는 68년 프라하의 봄이 발생했고, ‘인간적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전면에 내걸고 소련 패권주의와 제국주의적 외교방침에 일격을 가했다. 



가치 개념은, 이러한 서유럽과 동유럽에서 발생한 정치 현실과 계급투쟁, 사회운동의 변동사를 담고 있다. 사회주의자들 내부나 정통맑스주의자들 내부에서도 논란은 심심치 않았다. (알려졌다시피, 구좌파와 신좌파 논쟁 등) 



2004년 경, 유시민 정치 비판시, 한번 언급한 적이 있지만, 한국은 구 정치 주제들과 신 정치 주제들, 다시 말해서, 정치 경제 안보 민족과 같은 구정치 영역들과, 신정치 주제들, 환경, 학생운동, 성소수자, 여성운동, 이주민 노동자, 인종주의 반대 투쟁, 일상정치, 시민운동 활성화 등, 이 두가지들이 다 같이 착종되어 있다.


 2007년 대통령 선거는 압도적으로 구 정치 영역들이 전면에 나왔다. 이것은 구정치 신정치 가치 개념들 구분이 의미가 없다는 게 아니라, 80년대 후반부터 공격적으로 변한 전 지구적 차원의 자본주의 체계 자체가 가져온 경제적 불안이 가중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97년 IMF 긴축 독재 이후 한국은 자본에 노골적으로 노출된 무방비 도시였다. 



그렇다면, 신 진보당이 말하는 가치 개념은 무엇인가? 가치의 혁신을 이야기할 때는, 과거의 이념적 지형과 정치 노선, 그리고 정치적 활동 주체들이 어떤 조건 하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변화되는가를 말해줘야 한다. 이런 가치 개념을 두고, 한국 노동운동은 과연 어떻게 변화 혁신되어야 하는가를 논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 노동운동은, 정규직 비정규직 간의 노동자 노동자 갈등을 과연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이에 대한 실천적 해답을 내놓으면서 ‘가치 (value)’ 혁신을 말해야 할 것이다. 물론 더 나아가서, 한국 좌익은 이념, 가치, 정치노선, 대중정당 등에 대해서 보다더 주체적으로 자신감을 가지고 그 내용들을 채워나갔으면 한다. 남의 나라들 경험과 경험정리 등은 물론 폭넓고 개방적으로 공부해야겠지만 말이다. 심상정이 말한 푸른 진보, 젊고 역동적 (green, young, and dynamic progressive) 진보의 함의는 이해는 가나, 다른 말로 대체될 필요가 있다. 


푸른진보라는 말을 쓴 이유는 아마도,지역공동체 풀뿌리 공동체 건설이라는 정치적 목표와 관련되어 있다. 하지만 90년대 초반 환경 생태운동에서도 많이 지적되었듯이'그린 녹색 푸른' 단어들을 남발하는 것도 공해다. 


참고: 글쓴이는 위에 등장하는 저자들의 정치적 입장과는 다릅니다. 참고사항으로 하버마스나 잉글하트를 가져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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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살자


원시님 고맙습니다. 이렇게까지 수고를 해주시니 저, 감동먹었습니다. 사회복지가 '선'까진 아니지만 '악'도 아니니 다행이다 싶습니다.ㅎㅎ 잘은 모르지만, '복지'를 이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제가 알기론 복지를 먼저 써먹은 건 보수쪽에서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혁명에 위협을 느낀 보수쪽에서 복지를 실시했지만, 이 복지를 확장하고 정착시킨 건 사민주의라고 생각합니다.


 '복지분야'에선 사민주의가 독점적지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