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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철학

2008년 6월 17일: 최장집 촛불데모 진단 비판 : 새로운 술은 새로운 잔에 마셔야 할 때이다

by 원시 2011. 9. 27.

최장집 촛불데모 진단 비판 : 새로운 술은 새로운 잔에 마셔야 할 때이다

원시

 

2008.06.17 11:51:404222

 

 

 

제도의 오작동(최장집)이 아니라, 부패하고 무능한 제도(정당,의회,대통령제)를 바꾸는 게 촛불데모이다

 

최장집(존칭 생략) 레디앙 기사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0111)를 읽고 스쳐가는 몇가지 생각들을 아래에 쓴다. (이외에도 여러가지 논점들이 있으나 시간나는대로 다시 언급하겠음)

 

최장집은 촛불데모는 현존 한국 민주주의제도의 오작동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촛불데모는 기성 정당정치, 사회제도가 사회갈등, 이해관계 대립, 혹은 긴급한 사회현안들(쇠고기 광우병 문제)을 적시에 해결하지 못함으로써 발생했다. 다시말해서, 권위주의적 이명박 대통령제도, 허약한 의회 (한나라당, 민주당, 야 3당 + 원외정당 진보신당) 제도들이 기능적으로 원활하게 작동되지 않았기 때문에 촛불데모는 낭만적인 ‘직접민주주의’로 발전되고 있다.

 

최장집의 해법은, 이 촛불데모의 에너지가 현존하는 정당정치, 의회, 대통령제도 등을 발전 강화시키게 만드는 일이다. 이러한 과정이야말로 87년 민주화 이후, 한국의 민주주의를 공고하게 만드는 것이다 (the consolidation of Korean democracy)

 

 

최장집의 이러한 촛불데모의 원인과 문제해법은 그의 민주주의 이론관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내가 보기에는 최장집의 민주주의 정의는, 로버트 달의 민주주의 정의와 비슷하다. 로버트 달(Robert Dahl)은 미국의 대표적인 다원주의적 민주주의 옹호론자이다.  로버트 달에게서 민주주의란, 폴리아키 다원주의이다.

 

다시말해서, 민주주의는 투표권을 지닌 성인남녀들의 공개 경쟁체제이고, 이것만이 다양한 이익집단들의 경쟁을 보장한다. 이러한 여러이익집단들의 공개 경쟁만이 민주주의를 옹호하고 지켜낼 수 있다.

 

이를 가로막는 것이 민주주의 적이다. 이러한 로버트 달의 민주주의 정의에 따르면, 이익집단들의 자유경쟁과 규칙준수가 발생하는 공간이 정당정치, 대통령제도,국회 등인 것이다.

 

최장집이 명료하게 자신의 민주주의 이론의 틀을 밝히지 않았지만, 그의 글속에서 발견되는 민주주의의 개념적 정의는 로버트 달의 폴리아키 다원주의를 전제하고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사실, 시민사회의 촛불데모 에너지를 민주주의 제도를 확대, 발전, 강화시키고, 정당정치를 공정한 게임의 공간으로 발전시키자는 최장집의 주장과 문제 해법을 부정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아니 당연히 진보신당이나 민주노동당도 이러한 촛불데모를 자기 정당의 에너지로, 제도적으로, 법률적으로 ‘폴리아키 다원주의적’으로 끌어들이려고 하지 않겠는가?

 

 

여기에서 직접 민주주의와 포률리즘에 대한 논의는 생략하겠다. 최장집의 협소한 어느 한 특정 민주주의관 (로버트 달의 폴리아키 다원주의를 최적 모델로 바라보는 것)으로는 한국 촛불데모의 성격, 발전, 진보정치로 확대 등을 설명할 수 없다고 본다.

 

 

첫번째 이유는, 87년 이후에 한국에 존재하는 보수 한나라당, 자유주의 민주당, 그리고 진보정당 (민노당, 진보신당), 대통령제도, 의회제도 등 현존하는 제도질서 자체와 시민사회에 우열을 둬서는 안된다. 둘 필요도 없다.

 

그리고 실천적으로 촛불데모에서 고민해야 할 것은, 시민들이 왜 직접민주주의를 외치고 ‘이명박 소환’까지 외치게 되었는가, 이 힘을 어떻게 현행 정치질서들과 제도들을 급진적으로 개혁할 것인가, 또한 한국 민주주의 발전사에서, 촛불데모 참여자들의 정치의지, 참여방식, 조직화 방식들이 어떻게 기존 정치질서를 바꿀 것인가 (대통령제도, 정치 정당 행동 양식, 의회 구조 등) 등이다.

 

 

두번째, 지금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 자유주의 ‘통합’ 민주당은, 진보정치의 관점에서 보면, 해체되어야 할 대상들이다. 이명박 보수정권이 분명히 신권위주의적인 것은 일면 맞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의 특성은, 다른 여러가지 특질들을 지닌다.

 

소수부자 자본주의 체계(oligarch capitalist system)를 만들려는 보수적 정치기획 (MB노믹스, 파탄난 747 경제정책), 친미-사대주의적 생활 습성과 굴욕외교, 근본주의적 기독교 질서 추구 등이 대표적인 이명박 정권의 본질들이다.

 

통합 민주당 자체는 호남의 토호들과 수도권의 중도 자유주의 우익들의 패권싸움의 당으로 전락했기 때문에, 이명박과 한나라당의 대항마로 서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최장집의 민주주의론에 입각해서, 직접민주주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기성 정당질서의 기능을 회복하자고 주창하는 것은, 한국 민주주의의 새로운 가능성과 진보정치의 싹에 서리를 뿌리는 것이다.

 

 

세번째, 최장집이 말한 사회운동의 5가지 한계들 (사회운동은 사회갈등과 이해간계 조정역할을 할 수 없다. 사회운동은 정책추구를 목표로 하지 않는다. 사회운동은 국가와 운동간의 충돌을 조장한다. 사회운동은 지속성을 띨 수 없다.

 

사회운동은 좌-우익 갈등과 같은 시민사회 분열을 가져온다)은, 그의 민주주의 이론틀인 로버트 달의 폴리아키 다원주의에서 지적하는 직접민주주의 문제점들을 나열해놓은 것에 불과하다.

 

현재 한국의 사회운동은 제도, 법률, 의회, 청와대 등을 개혁하려는 것을 지향하고 있는 권력쟁탈형 운동이다. 한국의 학생운동, 노동운동, 시민운동 등은 생디칼리스트나 아나키스트 형 운동이 지배한 적이 거의 없다.

 

왜냐하면, 한국의 파쇼와 민간자본주의, 관료자본주의는 워낙 중앙집권적이기 때문에, 대항 세력 자체가 생디칼리스타 아나키스트 사회운동 노선을 띨 수가 없었다.

 

그리고, 위에서 최장집이 나열한 사회운동의 한계들은, 자칫 잘못하면, 이론적으로 사회위기는 하나의 기존질서에 적응하지 못하는 ‘변이’ ‘변종’ ‘문제아’ 정도로 간주하는 기능주의적인 태도로 빠질 수 있다.

 

 

 

최장집의 이론틀과 촛불데모에 대한 이해, 문제 해법을, 여러가지 다른 이론적 각도에서 분석할 수 있겠지만, 가장 부족한 점은, 촛불데모 참여자들이 스스로 조직하고 스스로 구호를 만들면서, 스스로를 표현하면서, 이 사회의 주체가 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단순히 참여민주주의를 강조하고자 함이 아니다.

 

이번 촛불데모는, 미국식 민주주의이론(로버트 달의 폴리아키 다원주의는 실은 미국 정치에도 적용될 수도 없다. 왜냐하면 미국은 다원주의를 진정으로 허용치 않고 별로 다르지 않은 2당 독점체제이기 때문에, 다원주의라고 보기도 힘들다)이나, 유럽의 사민주의 형태들 (행정, 자본주의 시장, 시민사회의 균형을 이야기하는 하버마스 등), 혹은 그람시를 약간 발전시킨 시민사회론으로 설명하는데 한계가 있다고 본다.

 

 

지금 한국의 촛불데모는, 한국의 민주공화국을 라디컬하게 그 내용을 채워나가는 과정이다.

 

공화주의 민주주의 모델들 중에 하나로, 도시국가나 공동체, 민족단위 국가의 주권(sovereignty)를 강조하는 흐름과, 공화주의 핵심은 공동체 구성원들의 정치참여, 시민으로서 정치에 직접 참여하는 것을 강조하는 흐름이 있다.

 

굳이 사회주의자의 관점이나 직접 민주주의 이론을 끌여들이지 않더라도, 공화주의적 민주주의 이론의 관점에 따르더라도 (아주 교과적으로), 현재 촛불데모는 공화주의의 두가지 흐름들을 보여주고 있다.

 

이명박의 권위주의에 반항하고 울분을 터뜨리는 것도 있지만, '검역주권'과 주체적인 유능한 외교를 주창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미 FTA에 대한 비판적 경계와 재검토를 요구하는 것을 보면, 국가의 주권을 아직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다양한 계급 계층들의 데모 참여는, 한국의 민주주의 정도가 이미 성숙된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 적어도 '절차적 민주주의'에 어긋나면, 직접 행동하는 시민들이 바로 한국사람들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열린 참여 공간에서, 정치적 좌파가 해야 할 일은, 무진장 열려져 있다고 본다. 

 

 

개념이나 특정 이론들은 현실에 부딛혀 깨지는 맥주병이다. 개념의 테이블의 만찬은 즐길 수 있지만, 촛불데모는 희로애락애오욕의 정치적 분출이지, 단순히 즐거움 기쁨 그 자체만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촛불데모, 세계사에서 찾아볼 수 있는가? 프랑스 68, 프랑스 1879년 혁명, 독일 1848년 혁명, 동학혁명, 87년 6월 항쟁, 80년 광주 시민군 등 무엇으로 해석하겠는가? 좌파라고 해서 이태리 그람시, 서독.독일의 하버마스, 잉글하트, 로버트 달, 위험사회 강조했다 하여 울리히 벡, 인정투쟁 찾았다 하여 악셀 호네트까지 동원한다.

 

아마 그들이 한국에 오면, 새로운 개념들을 찾아갈 터인데. 오래 묵은 습관은 참으로 오래간다. 이러한 각 나라들의 사회운동 경험들과 대화하는 게 오히려 필요한 시점이다. 조금 더 수평하게 대등하게 말이다. 그래야 유의미한 '소통'이 되는 것이다. 이론적으로도 실천적으로도.

 

아직 촛불데모가 진행중이지만, 몇가지 촛불데모의 성격과 진보정치의 착안점에 대한, 글쓴이의 생각은 아래와 같다.

 

 

 

311      좌빨 촛불소녀의 배후, 그 실체 드러나 ( 진보신당에 주는 정치적 의미 ) [11]    원시

 

 

309      촛불데모 밤 지새우는 이유: 2008년 한국의 촛불데모는 '정치적 휴가'이다. [6]

 

 

291      [촛불데모 성격1] 87년 6월 항쟁, 유럽 북미 68혁명 잊어버려야 [9]      원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