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자료.
사업주가 돼 버린 노동자-민주노총 법률원의 노동자이야기
사업주가 돼 버린 노동자
박현익 변호사(서비스연맹 법률원)
기자명박현익 입력 2022.03.16 07:30
▲ 박현익 변호사(서비스연맹 법률원)
지난해 11월, 대법원은 청호나이스 정수기 수리기사들이 회사를 상대로 제기한 퇴직금 청구를 인용하며 수리기사들의 손을 들어줬다. 퇴직금은 근로기준법 9조에서 규정하고 있고, 따라서 근기법상 근로자로 인정되는 경우에만 청구가 가능하다. 따라서 이번 대법원 판결은 정수기 수리기사가 근기법상 근로자임을 최초로 인정한 판례라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진다.
그런데 이상하다. 지금까지 정수기 수리기사는 노동자가 아니었다는 말인가? 소속된 회사의 유니폼을 입고, 소속된 회사의 제품만을 판매하고 수리하는 그들이 노동자가 아니면 무엇이라는 말인가.
무늬만 사업주
지금까지 정수기 수리기사들은 모두 개인사업자로 분류됐다. 회사와 근로계약이 아닌 위탁계약을 통해 업무를 수행하는, 근기법상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장님’들이었다. 그런데 그 사장님들의 일하는 모습은 우리가 생각하는 사장님들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회사가 고객에게 가전제품 설치나 수리 요청을 받으면, 회사는 이를 수리기사들에게 배정한다. 그리고 수리기사들은 매일 자신이 소지한 PDA나 스마트폰 앱을 통해 배정된 업무를 확인하고 제품의 설치나 수리를 하는 방식으로 일을 해야만 했다. 배정된 업무를 마치면 곧바로 이를 앱에 입력하고 이는 회사에게 자동으로 전송돼 보고됐다. 사업주가 매일같이 업무를 배정받고, 매일같이 보고해야 했던 셈이다.
노동자가 아니므로 취업규칙은 없었지만, 각종 기준과 규정들은 사실상의 취업규칙이었고 기사들은 서비스 방식은 물론 용모와 복장까지도 회사가 정한 규정에 따라야 했다. 규정을 어기면 작게는 재교육, 더 나아가서는 계약해지 등 각종 불이익이 뒤따랐다. 사업주라면 가지게 되는 의사결정 권한이나 자율성은 수리기사들에게서는 눈 씻고 찾아볼 수 없었다.
수리기사들이 제품을 수리하거나 판매하는 지역 역시 회사에 의해 정해져 있었다. 그리고 이 지역 내에 구체적인 지휘·감독은 수리기사 중 위촉된 관리자인 시니어 매니저들이 담당했다. 시니어 매니저들은 회사의 각종 지시들을 수리기사들에게 통보하고 수리기사들의 구체적 목표 수치까지 제시하며 매출 증진을 독촉했다.
매니저들에게 지시를 받고, 매출을 독촉당하며 일하는 수리기사들의 모습은 중간관리자에 의해 지휘·감독을 받으며 근무하는 노동자의 모습과 전혀 다르지 않다.
수리기사들의 제공한 서비스의 가격은 어떻게 결정됐을까? 고정급이 없었을 뿐, 수리기사들은 자신이 제공한 서비스에 대한 수수료도 회사가 정한 기준에 따라서만 받아야 했다. 렌털·AS 수수료는 물론, 판매와 할인의 경우에도 모든 수수료는 오로지 회사가 정한 기준에 의해서만 지급받을 수 있었다.
매일 회사에서 업무를 배정받고, 회사 규정에 따라 업무를 수행하고, 배정받은 업무를 회사에 보고하고, 회사가 정한 금액에 따라 소득을 얻는 사람을 사업주라 부르는 것이 타당할까, 아니면 노동자라 부르는 것이 타당할까. 수리기사들은 회사가 배정한 일을 회사가 규정한 방식으로 제공하고 회사가 정한 금액을 지급받는 ‘실체는 노동자’인, ‘무늬만 사업주’였다.
노동자가 노동자로 불릴 때
대법원은 위와 같이 ‘무늬만 사업주’인 청호 나이스 수리기사들이 실질적으로 근기법상 근로자에 해당한다고 판단해 수리기사들의 퇴직금 청구를 인용했다. 또한 퇴직금의 기초가 되는 금액(평균임금)을 산정할 때 설치·수리에 따른 수수료뿐만 아닌 판매실적에 따라 지급받는 판매수수료 역시 평균임금에 포함된다고 판시했다. 개인사업자로 분류돼 근기법상 보호를 받지 못하던 정수기 수리기사들이 근기법상 근로자임을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판결의 의의가 있다.
4차 산업혁명과 플랫폼 노동이 자주 입에 오르내리는 시대다. 시대 변화에 따라 노동의 양태도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노동자를 사업주로 둔갑해 근로기준법을 회피하는 것을 4차 산업혁명과 플랫폼노동이란 이름으로 포장하는 것은 4차 산업혁명과도, 플랫폼노동과도 아무런 관계가 없는 그저 ‘꼼수’일 뿐이다.
여전히 노동자임에도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노동자가 아니기에 주 52시간도, 퇴직금도, 연장근로수당도 모두 그들에게는 다른 세상 이야기일 뿐이다. 노동자가 아니기에 아무런 절차 없이 계약해지통보서 한 장으로 계약이 해지되고 직장을 잃는 경우도 부지기수며, 노동자가 아니기에 민사소송에 비해 신속하게 판단을 받을 수 있는 노동위원회 구제 절차도 이용할 수 없다. 이번 판결이 그런 분들이 노동자로 불리고, 노동자의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작은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
박현익 webmaster@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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