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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비교/노동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2,646명 중, 22명이 사망, 그 중 자살자는 12명이다. 국내 자살률 15배

by 원시 2023. 9. 14.

 

의자놀이, (서울:휴머니스트), 2012. p.148.

 

 " OECD 회원국 중 인구 10만명 당 31명이 자살, 최고 자살율. 쌍용자동차 경우 해고 노동자 2,646명 중, 22명이 사망했는데, 그 중 자살자는 12명이다. 국내 자살율의 15배에 달한다" 

 

 

쌍용차 30번째 사망자, 그가 남긴 마지막 말
등록 2018-06-29 17:22


이문영 기자 


[토요판] 르포
“정리해고를 겪으며 내가 사는 세상을 봤다”

2009년 8월5일의 옥상을
조용히 감당하며 살았다
북받치면 뛰쳐나가 소리 질렀다
이렇게 살아 뭐하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진압·구속 뒤 10년 동안
실제 세계에 눈을 떴다
시간이 갈수록 이 세상이
점점 빠듯해질 것을 안다
내 아이들이 불쌍하다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사태의 30번째 희생자를 기리는 노제가 29일 오전 경기도 평택시 칠괴동 쌍용차 정문 앞에서 열리고 있다. 평택/강재훈 섬임기자 khan@hani.co.kr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사태 뒤 서른 번째 죽음이 발생했습니다. 사망 8일 전 <한겨레>와 인터뷰하며 2009년 8월5일 조립공장 옥상에서의 진압을 증언한 사람이었습니다. 지난달 23일엔 경찰청 인권침해사건진상조사위원회의 요청에 응해 ‘그날의 옥상’을 진술하기도 했습니다. 

 

<한겨레> 보도 5일째 날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최근 복직 의지를 키워온 그의 죽음에 동료들은 황망해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의 마지막 말을 전하게 된 <한겨레>도 그의 죽음에 부채의식을 느낍니다. 그의 떠나는 길과 지난 기사에 다 담지 못한 그의 말을 옮깁니다.

 


세 사람 중 한 명.

 


소식을 접했을 땐 바로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노동자의 서른 번째(가족 포함) 죽음이 전해졌습니다. ‘또 다시…’라고 생각하는데 사망자가 ‘사진 속 그 사람’이란 전언이 따라왔습니다. 주위의 소음이 사라지고 귓속에서 이명이 울렸습니다. 진공의 뇌 안에서 그의 이름이 둥둥 떠다니는 듯했습니다.

 


사진 속 그 사람

 


8일 전 ‘그 세 사람’ 중 가운데 자리에 그(48)가 섰습니다. 2009년 8월5일 쌍용차 조립공장 옥상에서 경찰 특공대의 곤봉과 방패에 무너진 해고노동자들(체포·구속된 11명 중 7명)이 10년 만에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인 날(6월19일)이었습니다. 얼굴과 이름을 공개하며 카메라 앞에서 그날을 증언(<한겨레> 6월23일 12~13면 ‘진압 10년 만에 쌍용차 복면인들 “이제야 말한다, 나였다고”’)한 사람이 그 세 명이었습니다. 

 

그는 세 사람 중 키가 가장 작았고 말 수도 가장 적었습니다.
그날 옥상을 찍은 영상에서 그는 몸을 동그랗게 만 채 경찰 방패를 받아내고 있었습니다. 

 

그가 방패 삼아 들고 있던 솥뚜껑 위로 경찰의 시위 진압 방패가 수직으로 내리 찍혔습니다. 그가 “군홧발로 차이고 진압봉으로 맞는” 한 남자를 손으로 가리키며 “이 사람이 나”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할 수 있기까지 햇수로 10년이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진압을 지휘한 조현오 경기지방경찰청장이 ‘댓글 여론조작 혐의’로 고발됐고, 진압을 허락한 이명박 대통령이 18개 혐의로 구속된 뒤에야 가능해졌습니다.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사태의 30번째 희생자가 사망 전인 지난 19일 금속노조 쌍용차지부(경기도 평택시 칠괴동) 사무실에서, 2009년 8월5일 조립공장 옥상에서 경찰 특공대의 곤봉과 방패에 진압 당하는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다.  평택/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27일 오후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집 근처 야산에서 목을 맨 채 발견됐습니다. 인터뷰 8일 뒤였고 보도 5일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쌍용차의 비극을 죽음으로 고발한 ‘30번째 고인’이 됐습니다. 그렇게 <한겨레>는 그의 마지막 말을 담은 매체가 됐고, 그렇게 저는 그의 마지막 말을 옮긴 기자가 됐습니다.

 


빛 없는 곳에 얼굴을 감췄더니 눈물이 훅 쏟아졌습니다. 그의 죽음과 기사와의 인과를 따져보며 자책했습니다. 기사를 쓰지 않았다면, 그가 인터뷰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그의 얼굴과 이름이 보도되지 않았다면, 돌이키기 싫은 기억을 되살리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그의 선택은 달라졌을까 생각했습니다. 수많은 가정들이 머리를 헤집는 동안 자동차의 가속페달과 브레이크 사이에서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습니다.

 


28일 오전 1시가 못 돼 자택 근처의 장례식장(경기도 평택시)에 도착했습니다. 조문을 마치고 나온 동료들이 어두운 주차장에서 묽은 그림자처럼 흔들렸습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운 뒤에도 한참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유족들 앞에서 누구라고 설명해야 할지, 고인에게 무슨 인사를 건네야 할지, 한 시간 가까이 빈소 밖을 맴돌았지만 답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의 해고 뒤 10년 사이 성인이 된 아들이 조문객을 맞았습니다. 향을 꽂고 간신히 눈을 맞춘 그가 영정 속에서 웃고 있었습니다. 언제 찍은 사진인지 알 수 없었으나 인터뷰 때보다 표정이 밝고 따뜻했습니다. 그때 본 적 없는 미소가 얼굴에 어려 있었습니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앞에 마주선 아들에게도, 옆에서 지켜보는 아내에게도, 영정 속의 그를 향해서도, 저는 입을 떼지 못했습니다.

 


그는 1970년 평택에서 태어났습니다. 1993년 쌍용차 평택공장에 입사해 2009년 6월8일 정리해고 됐습니다. 그해 8월5일 조립공장 옥상에서 경찰 특공대에 폭력 진압된 뒤 구속(이후 집행유예)됐습니다. 오랜 해고는 그에게 많은 빚을 안겼습니다. 생활고로 카드를 돌려 쓴 뒤 막지 못했고, 신용불량자가 돼 일다운 일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회생 절차를 밟고 싶어도 법률 지원을 받을 변호사 비용이 없었습니다. 새벽부터 아침까지 화물차를 운전했고, 낮엔 건설현장을 다니며 미장일을 했습니다. 지난 5월23일 경찰청 인권침해사건진상조사위원회에 ‘그날의 진압’을 진술한 뒤부턴 복직 의지를 더욱 키워왔습니다.

 


새벽 빈소는 공기부터 무거웠습니다. 빈소를 찾은 사람들은 밤새 목소리를 낮춰 이야기했습니다. 한쪽에선 쌍용차지부(민주노총 금속노조)가 장례 절차 등을 두고 유족과 상의했습니다. 이 참혹한 빈소가 지난 10년 동안 서른 차례 차려졌습니다.
‘세 사람 중 한 명’으로 그의 왼쪽에 섰던 조문경(54)씨도 빈소를 찾아 술잔을 들었습니다.

 


“부고 문자 보고 설마 했어. 그날 인터뷰 끝나고 헤어질 때 7월 중으로 술 한 잔 하자고 약속했는데 믿기지가 않아요.”
그도 “죽음의 두려움이 사라진 지 오래됐다”고 했습니다.

 


세 사람이 사진을 찍을 때 맞은편 의자에 앉아 지켜봤던 조합원(47)은 오지 못했습니다. 그의 아내가 김정욱 사무국장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남편은) 빈소 못 지킬 것 같습니다. 지금 너무 힘들어해서 저도 무서워요.”


그의 죽음을 접한 남편(지금도 진압 화면을 보면 악몽을 꾸고 소리 지름)이 짐승처럼 울부짖는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10년 전 조립공장 옥상에서 아직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기다림의 절망이 부른 죽음

 


27일 그는 밤샘 화물차를 운전(화장품 배달)한 뒤 퇴근했습니다. 오후 2시 가족과 동료·지인들에게 마지막 문자를 발송했습니다. 아내에게 인사했습니다.

 


“그동안 못난 남편 만나 고생만 시키고 마지막에도 빚만 남기고 가는구나. 사는 게 힘들겠지만 부디 행복해라.”
누나에게 보냈습니다.


“못난 동생 때문에 그동안 고생 많았어. 정말 고마웠고 미안해. 열심히 살아보려고 했는데 힘드네. 건강 챙기면서 살아.”
배달 차량 구입에 도움(신용불량자인 그에게 명의를 빌려주고 할부금을 받아 대신 납부하되 배달로 번 돈은 가지도록)을 준 친구에게도 미안함을 남겼습니다.


“내가 상황이 좋지 않아 화물차 못할 것 같다. 현재 할부잔금은 ○○○○만원 남았는데 니가 인수해서 하든 차량 유지비만 내고 나머지는 가져 가.”


모두 2시에 전송된 동시 예약문자였습니다. 문자를 받은 사람들이 놀라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받지 않았습니다. 그가 나무에 목을 건 정확한 시간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아내의 신고와 경찰의 위치 추적으로 발견된 주검은 오후 5시에 장례식장에 안치됐습니다.


2009년 1월8일 첫 죽음 뒤 쌍용차 해고노동자와 가족들은 계속(2009년 6명→2010년 5명→2011년 8명→2012년 4명→2013년 1명→2014년 2명→2015년 2명) 죽었습니다. 그 시간 동안 그들의 죽음을 써왔습니다. 그들의 세 차례 고공농성을 썼고, 그들의 망가진 마음을 썼습니다. 지난해 2월엔 “2009년 이후 매년 이어지던 죽음의 행렬이 2016년 처음 멈췄다”(<한겨레> 2017년 2월4일 15면 ‘복직이 시작되자 29는 오지 않았다’)고 썼습니다.

 


2015년 12월30일 노사 복직 합의 이후 사망자(2015년 4월30일 28번째 죽음을 마지막으로)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직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죽음의 진행을 막았습니다. 그 죽음이 2017년 5월 다시 시작됐습니다(해고노동자 아내가 목숨을 끊음). 회사가 약속했던 “2017년 상반기까지 정리해고 및 징계해고 노동자 전원 복직 노력”이 지켜지지 않으면서(현재까지 45명 복직에 120명 대기) 1년여 만에 발생한 29번째 사망자였습니다.


그리고 1년 1개월 뒤 그에게 30번째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기약 없는 기다림이 그의 절망을 키웠다고 동료들을 말했습니다. “회사가 복직 시한만이라도 알려줬다면 그가 목숨을 끊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김득중 지부장의 ‘32일 단식’(지난 2월28일~4월1일)에도 복직은 진전이 없었습니다. 2012년 대선 때 ‘쌍용차 정리해고 해결을 위한 국정조사’를 약속한 문재인 후보가 5년 뒤 대통령이 됐지만 ‘해결’은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국가가 제기한 손해배상(24억원)도 그대로입니다.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사태의 30번째 희생자를 기리는 노제(29일, 평택시 쌍용차 정문 앞)에서 ‘거리의 춤꾼’으로 불리는 이삼헌씨가 추모 춤을 추고 있다.  

 

 

평택/강재훈 섬임기자 khan@hani.co.kr

 

 

 


장례식장을 출발한 운구버스가 29일 아침 8시44분 쌍용차 정문 앞에 도착했습니다. 버스에 실린 그의 관과 끝내 돌아가지 못한 회사 사이는 채 10m가 되지 않았습니다. 두 아들이 꿇어앉아 제를 올리는 동안 아내는 부축을 받으며 오열했습니다. 만장을 든 동료들이 가족들 뒤에서 노제 내내 흐느꼈습니다. 마이크를 들고 고인을 소개하던 김득중 지부장은 “제발 살려달라”며 울먹였습니다. 국화꽃다발을 들고 정문을 통과하려다 막힌 김선동 조직실장은 하얗게 꽃을 뿌리며 울부짖었습니다. “차라리 (복직은) 안 된다고 하든지… 왜 희망고문을 하나.”

 


사망 이튿날 새벽 한 유족이 울며 물었습니다.
“사람이 죽었는데 이런 댓글을 써도 되는 건가요?”

 


그가 복면을 벗고 등장한 기사 끝엔 “범죄자”와 “총살감” 등의 댓글이 달렸습니다. 죽음을 전하는 기사들에서도 그는 비방의 대상이 됐습니다. 저는 그의 죽음에 책임이 있습니다. 그가 댓글들을 읽었든 읽지 않았든, 그 책임에 실체가 있든 없든, 저는 내려놓지 못할 부채감을 지고 살아갈 것입니다. 저도, 당신도, 우리도, 그의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회사가 복직 약속을 지켰다면, 정치가 사태 해결 약속을 지켰다면, 그들이 겪어온 시간이 냉소받지 않았다면, 그는 죽음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부서진 삶의 회복 외에 죽음을 멈추는 길은 이 세계에 없습니다.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사태의 30번째 희생자를 기리는 노제(29일)가 끝난 뒤 김선동 쌍용차지부 조직실장이 정문 앞에서 경비 직원들에게 가로막힌 채 “살려내라”며 울부짖고 있다.  평택/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내 아이들이 불쌍하다”
그는 조용한 사람이었습니다.

 


‘옥상 당시’를 떠올릴 때나 ‘옥상 이후’를 이야기할 때 그는 담담했습니다. 인터뷰 때도 그는 목소리 높이는 일 없이 지난 시간을 설명했습니다. 기사에 담지 못했던 그의 이야기들을 되살립니다. 유언이 돼버린 그의 마지막 말들을 전합니다.
“(옥상에서 경찰 방패에 맞고 구속된 일을) 혼자 가슴에 담고 살았다. 

 

어머니는 아직도 모르신다. 마음 아파하실 걸 아니까 이야기하지 못했다. 나 혼자 조용히 감당하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생활고보다 힘든 것은 가족 사이의 틈이었다. 싸움이 잦아졌다. 아내도 일 다니느라 힘들었다. 부모가 돼서 아이들한테 신경 쓸 여력이 전혀 없었다. 술을 많이 마셨다. 감정이 북받치면 뛰쳐나가 소리를 질렀다. 

 

 

싸고 낡고 작은 집들로만 떠돌았다(사망 당시에도 거주지가 재개발 구역이 되면서 이사할 집을 찾아야 하는 상황). ‘이렇게 살아 뭐하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파업 종료 직후엔 친구들도 꽤 만났다. 그때마다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알 수 있었다. 싸울 수 없으니 내가 피하는 게 최선이었다. 점점 얼굴 보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정리해고를 겪으며 ‘내가 사는 세상’을 봤다. 전엔 몰랐던 실제 세계에 눈을 뜬 것 같았다. 갈수록 이 세상이 점점 빠듯해질 것이란 사실을 알았다. 내 아이들이 불쌍하다.”

 


평택/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https://bit.ly/48qw7Au

 

쌍용차 30번째 사망자, 이것은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다

“정리해고를 겪으며 내가 사는 세상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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