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7.07 02:11

Re: (이야기거리들) 장기적으로 보면 손해일 수도

원시 조회 수 762 댓글 4

?

언론의 자유와 '돈 벌고 이윤 챙기는' 자유에, 그리고 조, 중, 동 및 MB 방송장악 시도에 대해서. 몇가지 드는 생각 적어봅니다. 


1. 조, 중, 동아 다음 뉴스 공급, 중장기적으로 보면 누가 손해일까요? 


다음 주가가 약간 하락할 가능성이 있겠군요 (시장 조사를 조금 해야겠음다) 만약에 조, 중, 동이 다음 포털에 기사 공급을 하지 않는다는 선언을 하면요. 


그런데, 중장기적으로 보면, 뉴스 회사가 '자기 상품'을 팔지 않겠다고 하고, 판매망을 줄이겠다는 전술인데, 과연 성공할까요? 물론 조, 중, 동은 '대기업'이고, 다음 포털을 '하청회사'로 간주해서, 외주나 물량을 안주겠다는 것인가? 



2. 조선, 중앙, 동아일보를 한꺼번에 싸잡아 '조중동' 묶음보다는, 조선, 중앙, 동아의 차이점들을 미세하나마 파고들 필요도 있겠다는 생각을 잠시 해봤습니다.


촛불국면에서 전술적으로 큰 의미는 없지만, 그래도 조, 중, 동의 차이가 약간씩 느껴집니다. 조선 동아일보 사옥이 촛불데모대로부터 공격 비판당했지만, 종이신문 중앙일보 (*온라인 편집본과 차이가 나요. 편집에서 1면 배치랄지. 온라인은 아무래도 20-40대 위주로 배치하니까요)는 청와대 찌라시더군요. 


3. 상징적으로야, 조, 중, 동 폐간을 외쳐야겠지만, 소유-경영권과 관련된 '민사' 소송에 대해서는 조금더 면밀하게 가야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구독, 절독운동은 자발적으로 하는 것은 권장해야겠습니다. 그러나 보다 더 강조할 부분은, 역시 대안 매체를 키우는 것이고, '게임 규칙들'을 바꾸고, 이들이 선점하고 있는 시장들 (종이신문의 경우 60%)의 영토를 축소시키는 방향으로 가야겠습니다. 


(1)  방송국 (KBS, MBC), 경향, 한겨레, 시사IN,  그리고 인터넷 (프레시안, 리버벌 오마이뉴스등이 있지만) 등 기존의 언론매체 유지 발전 지원

(2)  칼라tv 등과 같은 대안적 매체들에 대한 연구

(3) 무엇보다도 켄텐츠 제공자 (저수지가 필요한데, 결국에는 플레이어들이 중요하니까요)를 어떻게 중장기적으로 키울 것인가? 


(3) 켄텐츠 제공자 (contents-providers)가 실제로 인터넷 전사들에게 식량공급자 역할을 한다고 봅니다. 조, 중, 동아일보의 경우 아무리 단순논리를 반복한다 하지만, 그 공급자들 (필진+기자들)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 보다 진보신당 및 진보진영은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보수의 인력풀과 저수지는 100개인데, 진보의 저수지는 1개면, 그 가뭄이 닥치면 100개 물 질이 안좋지만, 그게 더 오래 버티거든요.


조, 중, 동 폐간 등 거리 구호를, 중장기적으로 정치적으로 유의미하게 만들기 위한, 법률적 투쟁 (민사소송 관련부문), 그리고 대안적 매체들에 대한 준비 이게 필요할 것 같습니다.






Posted by NJ원시

댓글을 달아 주세요

역사(history)2016. 2. 6. 21:06

위르겐 힌츠페터,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그리고 명복을 빕니다. 우리에게 너무나 고마운 분이 돌아가셨다. 뭐라고 감사의 말을 전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고마운 분이다.


위르겐 힌츠페터가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80년 광주 항쟁의 진실의 절반은 기록으로 갖고 있지 못할 것이다. 1980년 광주항쟁의 참상과 시민들의 저항을 촬영해 진실을 독일과 세계에 알렸던 독일 언론인 위르겐 힌쯔페터가 자신의 고향인 라쩨부르크에서 79세의 나이로 지난 1월 25일 별세했다. (1937년~2016.1월 25일) 1980년 5월 당시 위르겐 힌쯔페터는 독일 방송 아.에르.데(ARD) 일본 됴쿄 지부에서 카메라맨으로 일하고 있었다. 5월 19일 일본에서 광주 소식을 듣고, 5월 20일 새벽에 광주에 도착했다. 


http://bit.ly/1L4ZupQ  (80년 5월 푸른 눈의 목격자 - 힌츠페터 : kbs 제작) 


- 5월 20일 광주에서 계엄군의 몽둥이 맞고 사망한 광주시민들을 촬영,

- 5월 21일 도청앞 계엄군 최초 집단 발포 이후, 시민군들이 계엄군과 싸우기 위해 무장하는 장면을 촬영

- 5월 22일 일본으로 돌아가, 공항에서 위르겐 힌츠페터는 광주에서 촬영한 10개의 필름을 독일로 보냈다.

- ( 당시 전두환 계엄군은 한국에서 외국으로, 외국에서 한국으로 들어오는 모든 전화선을 차단해버렸다.)

- 5월 22일 독일 텔레비젼 타게스샤우에서 광주 항쟁 장면이 전 세계로 보도되었다.

2003년에 위르겐 힌츠페터는 광주항쟁의 진실을 전 세계에 알려, 민주화 운동에 기여했기 때문에, 그는 한겨레 신문 송건호 언론인상 수상했다. 


- 1980년 9월 17일 위르겐 힌츠페터와 그 동료 위르겐 베트람은 광주항쟁의 진실과 전두환-노태우 신군부의 학살을 다룬  <기로에 선 한국>이라는 45분짜리 다큐멘타리를 만들어 독일에서 방송했다. 


Jürgen Hinzpeter und Jürgen Bertram 2003년 송건호 언론인상 수상 광주항쟁 진실보도.





(2003년 KBS와 인터뷰 : 위르겐 힌츠페터 Jürgen Hinzpeter ) 



1980년 5월 20일 오후, 광주에 도착한 위르겐 힌츠페터와 그 동료, 헤닝 




위르겐 힌츠페터가 촬영한 광주 시민 희생자. 5월 20일~21일. 




우리가 광주항쟁의 진실을 알 수 있게끔 위르겐 힌츠페터는 광주 시민군들을 아래와같이 촬영했다. 






위르겐 힌츠페터는 광중에 5월 20일, 그리고 5월 21일 (부처님 오신날, 수요일) 광주 도청앞에서 계엄군이 집단발포를 한 이후 사상자가 발생한 이후, 시민들이 무장하고 있는 장면들을 촬영했다.


위르겐 힌츠페터는 일본에서 가져온 10개의 필름을 다 촬영했다. 그는 독일과 일본으로 전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직접 이 필름 10통을 들고 일본으로 5월 21일 들어간다. 공항에 도착하자 마자, 위르겐 힌츠페터는 광주에서 촬영한 필름들을 독일로 보내고, 5월 22일 마침내 독일 텔레비젼 뉴스, 타게스샤우 (Tagesschau)에 광주 참상과 시민군들이 보도되었다.




.





- 5월 22일 다시 일본에서 한국으로 돌아와, 위르겐 힌츠페터는 서울 김영삼 자택 앞에서 촬영을 강행하려다 계엄군에 의해 저지당한다. 




(출처: 80년 5월 푸른 눈의 목격자, 2003년 KBS) 

- 위르겐 힌츠페터는 다시 5월 23일 광주로 들어간다.




5월 23일부터 5월 27일까지 광주 시민들의 저항, 도청앞 분수대 광장에서 시민들의 집회 등을 위르겐 힌츠페터는 촬영했고, 우리가 지금도 보는 대부분 중요한 장면들이다.




(당시 조선대 3학년 김종배, 도청앞 분수대 광장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 1980년 5월 18일부터 1980년 5월 27일 새벽 5시 10분 광주 도청 내부 시민군들에 대한 무참한 학살이 끝나기까지, 국내 언론들은 전두환 노태우 등 신군부에 의해서 완전히 통제당했다. 
- 5월 21일 도청앞 계엄군의 집단 발포로 최대 사상자들이 발생했는데도, 국내 신문들은 이를 전혀 보도하지 않았다.


독일 언론인 위르겐 힌츠페터와 그 동료 헤닝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 동아일보는 5월 21일에서야 1면에 처음으로 광주 소식을 다뤘다. 그러나 계엄사 이희성의 발표만 간단히 실었다. "소요 사태가 아직 수습되지 않고 있다" 








동아일보. 1980년. 5월 22일 사회면 보도.


광주 시외 전화 불통, 교통 두절.

소년 체전 연기

그리고 물놀이 사진만 내보냈다.





- 경향신문, 1980년 5월 22일, 사회면. 모내기 한창 사진 보도.








1980년 5월 22일. 경향신문 1면 기사.

이희성 당시 계엄사령관 발표, 광주는 지금 외부인과 고정간첩들이 폭력사태를 일으키고 있다고 발표.







1980년 5월 27일자. 경향신문 1면. 계엄군 광주 장악




1980년 5월 28일자, 조선일보 사설 "악몽을 씻고 일어서 "





계엄군이 신중하게 광주 문제를 해결했다.


"우리는 군의 노고를 잊지 않는다....

계엄군은 일반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극소화한 희생만으로 사태를 진정시키는데 성공했다. 계엄군은 계엄사령관이 지시했듯이, 계속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국민의 군대로서의 사명을 다해줄 것을 우리는 거듭거듭 당부해 마지 않는다 (조선일보 5월 28일자 사설)







1980. 5월 24일, 경향신문 사회면. "극렬분자와 일부 폭도들이 탈취한 시내버스에 올라타고 중심가를 누비고 있다"고

광주 시민들의 항쟁을 왜곡보도 했다.

경향신문 뿐만 아니라, KBS, MBC TV 등 방송국과 모든 신문들을 신군부가 장악하고 광주시민들의 저항을 '폭도'로 매도했다. 







2003년 위르겐 힌츠페터는 광주의 진실을 알렸다는 공로로 송건호 언론상을 수상했다. 







.


위르겐 힌츠페터는 자신을 광주에 묻어달라고 유언했다.





Posted by NJ원시

댓글을 달아 주세요

김대중 정권은 전두환-노태우를 사면해주고, 사도바울 한화갑을 내세우면서 동서 화해론을 주창했다. 동진 정책의 '카톨릭화'였던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식 구복신앙은 카톨릭식 신의 영접을 악귀로 쫓아버리고 말았다. 김대중은 박정희 기념관이라는 '구복신앙'의 서낭당을 건립하고자 본인의 카톨릭신앙의 토착화에 노력했다. 그러나 순교자의 피가 모잘랐다.


열린우리당의 '박정희 친일 혐의' 과연, 신-동진정책인가 포기인가? 아니면 노무현의 '명패 던지기'식 정면돌파인가? 최근 열린우리당이 추경예산 편성에서 부산시가 개최하는 APEC(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 정상회의 관련 지원금 요청을 거부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지난 총리에서 낙마한 김혁규 전경남지사를 내세워, 기업규제완화를 위한 특별법’을 준비중이다. 아직 특별한 성과를 못내고 있는 김혁규 카드를 계속 붙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가? 김혁규 의원을 16일 제주특별자치법 마련과 재정지원 확보를 위해 당내 마련된 제주특별자치도 추진특위의 위원장으로 임명하고, 부산과 제주가 APEC 개최지 선정 문제로 갈등을 김혁규 의원이 해결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박정희 친일 혐의와 박근혜 비판 노선은 과연 노무현의 신-동진정책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노무현은 김대중의 동진정책 실패에서 무엇을 배웠는가?


------------------------------------------------------------

김대중을 비판했던 이유 : 영남-동진정책의 역사 (2001-3-30)


<김대중 정부의 동진정책, 김민석의 화답>


김종필이 98년 대선에서 김대중을 지지한 것은, 그 자신의 정치적 입지점의 강화라는 측면이 있기도 하지만, 김종필은 김대중이 이회창보다는 한국정치의 생리를 잘 안다고 판단했다. 김종필은 '계몽주의적 군주' 박정희 밑에서 죽지 않고 [김형욱, 이후락, 김재규와 비교] 살아남은 투명인간에 가까운 인물이다. 어찌보면 야당을 한 김영삼, 김대중보다 더 정치적 생명이 위태로웠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생리를 몸에 체득한 끝에 '메타포어'의 명수로서 이 땅에 건재하고 있다. 


이회창은 전직이 판사이고, 법조문을 외우던 사람이다. 그는 항시 판단한다. 보편적 입법 논리와 도덕적 판단은 아니더라도, 형식 '선'과 '악'을 가리는 직업 - 마치 반란자들의 목을 치는 지적인 망나니처럼-을 가졌다. 김종필은 안다. 이회창 밑에서는 그 망나니의 선악을 자르는 칼날에 모가지가 싹둑 잘라나갈 것이라는 것을. 김대중은 한국 국민의 정서를 잘 알고 있고, 정치의 생리를 안다. '타협과 상생'의 논리를 터득한 정치적 친구이고, 동업자이다.



                   (97년 김대중 대통령 당선에 기여한 DJP 연합,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


이러한 김대중의 사도 바울, 한화합씨는 목포에서 전두환과 더불어, 불교신자인 전두환과 카톨릭 신자인 사도 바울 한화합씨는 '화해와 상생'의 새로운 법률을, 야단법석에서 여시니, 이는 대구, 경북 인민의 가슴을 울리는 심금이 될 것으로 믿었다.


 박정희 기념관을 지음으로 써 "조국의 근대화 세력 (점진적 민주화론자) "과 " 민주화 세력 (급진적 민주화론자)"이라는 새로운 이념의 씨앗이 제도적으로 현실화되었다. 김대중의 아카데믹 베드로, 한상진이 이것을 유교적 차원에서 철학적으로 승화시키니, 중화(中和)와 화합이 유교의 기본이요, 우리 조선은 유교의 철학적 본고장이고, 유교가 민주주의와 상치되는 부분도 있지만, 다 버릴 것은 아니니, 그 핵심인 중화사상을 받아들여, 조국의 근대화 세력과 민주화세력이 중화되어 일신우일신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설파했다. 김대중의 요한 김민석이 정치적으로 승화시켜, 자기의 꿈은, 영남권의 표와 젊은층의 표를 획득하는 것이라고 당당하게 청년학도의 심장으로 갈파했다.


<민주주의가 어렵다. 우리에게 너무 어려운 개념인가 ?>


도대체 민중이란 무엇인가 ? 정형근은 가장 높은 득표율로 당선이 되고, 부산의 사나이, 자존심의 사나이로 남게 되었고, 박정희의 딸이라는 이유로 박근혜가 당선이 되고, [김대중의 아들도 당선이 되고 물론]. 지역주의를 조장하는 세력이 더 문제이기는 하지만, 민주주의란 자신들의 권리와 이해관계를 대변해 주는 정당을 스스로 선출하고, 비판할 능력이 있는 시민들이 있어야 하는데, 아직도 우리에게 민주주의적 시민 개념은 어려운 것인가 ?


<한국 지식인들의 권력지향적 태도의 현실화>


서구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발달의 역사는 자본주의 논리[시장의 논리]와 민주주의의 논리의 상충의 역사였다. 그 갈등의 내면을 다 들여다보기 전에, 최소한 지금 합의점을 형성할 수 있는 부분만 이야기를 한다면, 언론과 사상의 자유 [ 밀 (J.S Mill) , 시민 자유론 On Liberty], 혹은 공론영역의 적극적 부활이 아마 민주주의의 기본 토대가 될 것이다. 시장에 대한 여러 가지 입장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정치적 해결의 기초는 이익집단의 자기 주장, 그리고 그 주장들의 합리적 토론과 정치적 표출을 가능하게 해주는 공론영역의 심화발달이다. 


 아쉽게도 한국사에서 지식인들의 학습동기는 '정치적 권력 획득'과 '사회적 신분 이동', 그리고 그로 인한 개인의 사적인 부의 확대이다. 이러한 지식인 문화의 정치적 현실화는 언론에 그대로 반영된다. (조선,동아,문화,중앙 등 거대한 일간지들이 동일한 논조로 '보수'임을 자처하는 현상은 세계 언론사에 길이길이 남을 것으로 예상된다.)


 조선일보가 만들어낸, 이승만 '아버지론', 박정희 '조국 근대화의 기수: 계몽주의적 군주론'은 이제 한국형 보수주의적 가치가 실질적인 힘을 지니고, 이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렇게 논조를 만들어도 신문은 팔리고, 그것을 읽고 내재화시키는 국민들이 있고, 그것을 더 조장(助長)하는정치적 세력이 있다는 것이다.



                                   (조갑제, 박정희 전 대통령을 근대화의 기수로 칭송하다. 조갑제와 뉴라이트 그룹이 시도한 담론 헤게모니 전쟁, 끝나지 않는 전투는 계속된다) 

 

조선일보의 논조가 공론영역의 발달에 얼마나 큰 기여를 했고, 민주주의 원리에 얼마나 충실했는가 ? 오히려 그러한 박정희에 대한 새로운 향수와 환영(幻影)의 실체화는, 포퓰리즘의 우익적 극치였다. 지식인들이 만들어내고 조장해낸 박정희 신화와 종교는, 현재 정치적 권력 투쟁의 신앙적 표현이고, 권력을 향한 지식인들의 새로운 도전이다. 그리고 그것은 언론 집단이건 학자집단이건 간에, 그 피말리는 인정욕구의 또다른 표출이다. 


[이것은 소위 좌파도, 과거 민주화 운동 경험자들도 예외는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준다] 


 공론영역에서 새로운 이성의 잠재적 가능성을 발견해내고, 이것을 제도적 합리화로 물꼬를 틀 수 있는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것이 지식인의 임무이지, '나 아니면 안된다는 식'으로 내가 입각하고, 내가 직접 뛰어들어 '조국'을 구원하는 동키호테식의 발상은, 이제 정화할 때가 아닌가. 풍차 밑의 물레를 타는 청개구리를 보라.

Posted by NJ원시

댓글을 달아 주세요

책/노트(독후감)2013. 3. 22. 22:27

그 당시는 30대 후반, 40대 초반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지금이 어렵다고들 하지만 생명에 위협이 있는 건 아니다. 1909년생 박치우는 1949년 만 40의 나이로 태백산에서 이승만 정권의 토벌대에 의해서 사살당했고, 1907년생 이효석도 40대 초반의 나이로 절명했다. 이효석은 문학을, 박치우는 철학을 공부했다. 이 두 사람이 1938년에 대화를 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다. 책을 읽다보니 두 사람은 숭실전문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잊어버리고 산 이름. 박치우. 남쪽에는 박정희 시절 <국민교육헌장>을 기초했고, <공산주의철학비판>을 저술한 박종홍이 남고, 북쪽으로는 백남운과 신남철이 가고, 박치우는 1949년 태백산 자락에서 죽어갔다. 살아남았으면 좋을 사람들은 일찍 죽는 비운의 역사가 많다. 역사에 가정은 소용없다 하지만, 박치우가 살아있었더라면 여러 사람들의 인생행로는 달라졌을 것이다. 

LG Electronics | LG-P999 | Center-weighted average | 1/145sec | F/2.8 | 0.00 EV | 4.5mm | ISO-100 | Flash did not fire | 2013:03:21 14:06:11


(이 인터뷰 기사는 숭실전문학교가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당하기 바로 직전에 이뤄진 것같다. 이 두 사람은 지식인이라는 말을 자주했다)



LG Electronics | LG-P999 | Center-weighted average | 1/145sec | F/2.8 | 0.00 EV | 4.5mm | ISO-100 | Flash did not fire | 2013:03:21 14:06:11


(이효석의 말 속에서 흥미로운 발언을 찾을 수 있다.  지식계급이 사회적으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강한 의무감, 그 시대적 사명을 <사회적 감각과 비판정신>의 고수. 이것을 지성의 옹호라고 했다. 일제 식민지 시대 하에서 지식층의 심리적 고뇌. 생활의 옹호 vs 지성의 옹호의 갈등이 1930년대에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LG Electronics | LG-P999 | Center-weighted average | 1/145sec | F/2.8 | 0.00 EV | 4.5mm | ISO-100 | Flash did not fire | 2013:03:21 14:06:11



당대 소설가 앙드레 지드와 토마스 만에 대해서도 <시대의 고민의 대변자>라고 해석하는 이효석. 


LG Electronics | LG-P999 | Center-weighted average | 1/145sec | F/2.8 | 0.00 EV | 4.5mm | ISO-100 | Flash did not fire | 2013:03:21 14:06:11


인터뷰 당시, 박치우는 31세, 이효석은 33세였다. 박치우의 발언 속에는, 1930년대 당시 학계, 사상계,예술계에서 유행하는 "비합리주의"에 대한 강한 거부감이 나와있다. 지성의 논리(로직)이 아니라 지성의 윤리(Ethik)를 역설하다.

LG Electronics | LG-P999 | Center-weighted average | 1/150sec | F/2.8 | 0.00 EV | 4.5mm | ISO-100 | Flash did not fire | 2013:03:21 14:08:43


1938년 박치우-이효석의 대화에서도, 자신들의, 혹은 조선의 지식인으로서 자기 사상체계가 허술한 채, 외국 유행물만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서 박치우와 이효석이 비판하고 있다. <사상 빈혈증>을 치유하기 위해서 박치우는 서적을 많이 읽을 것을 제안한다. 이효석 역시 사상적 교양의 깊이가 없으니 작가의 시야가 좁아진다고 지적했다. 조선에 걸작이 나외기 위해서는 조선의 문학 전통을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효석. 이효석이 일찍 죽어서 아쉽다. 

LG Electronics | LG-P999 | Center-weighted average | 1/150sec | F/2.8 | 0.00 EV | 4.5mm | ISO-100 | Flash did not fire | 2013:03:21 14:08:43



제목: 사상과 현실 (박치우)

편집: 윤대석, 윤미란 

출판: 인하대학교출판부 (2010.07.30)



Posted by NJ원시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서양의 미가 월등하다"... 작가 이효석의 충격 발언
    [전국 문학관 기행] 봉평 '이효석 문학관'②
    14.11.02 11:55l최종 업데이트 14.11.05 08:32l류효정(kdiem)

    크게l
    작게l
    인쇄l
    URL줄이기
    스크랩
    40
    13
    5
    메일
    오블
    "목장에서 새벽에 갓 짜낸 생우유를 배달 받아 그것을 따뜻하게 데워 입 안 가득 머금는다. 우유의 진한 향기와 맛이 감동적이다. 학교에서 퇴근한 후, 다방에 가서 좋아하는 클래식을 들으며 커피 한 잔을 마신다. 집에 돌아와 잘 가꾸어진 화단을 내다보며 클래식과 커피를 즐기는 것도 큰 행복이다. 다가오는 겨울에는 꼭 스키를 배워보리라. 그리고 이번 주말에는 백화점에서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을 사와야겠다. 백화점 아래층에서 커피 원두도 찧어와야지…."

    이효석의 수필들을 참고해 재구성한 그의 하루이다. 다방이라는 단어가 예스럽긴 하지만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도 이 정도 삶이라면 꽤나 호사다.

    기사 관련 사진
    ▲ 평양 '푸른집' 내부 이효석 문학관 내부에 설치된 것으로 그가 가장 윤택한 생활을 했던 평양 '푸른집'의 내부를 본뜬 것이다. 피아노, 축음기, 여배우 '다니엘 다리유'의 사진 등이 그의 생활양식을 잘 보여준다.
    ⓒ 류효정
    관련사진보기

    1930년대 경성... '모던'했던 그곳

    그의 이러한 서구적 취향은 경성제국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던 때 그리고 함경북도 경성 시절 주을 온천에서 서구식 생활을 직접 경험한 부분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살았던 1930년대다. 이때는 이미 일제를 통해 수입된 서구식 자본주의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이와 같은 현실배경이 있었기에 그의 서구적 취향이 가능할 수 있었다.

    그가 서구적 생활을 향유한 곳은 당시의 서울 '경성(京城)'이 아니라 함북 '경성(鏡城)'과 평양이었다. 지방에서 누린 서구식 문화가 이 정도인데, 당시 서울이었던 경성은 얼마나 근대적이고 번화한 곳이었을까.

    무려 36년이라는 긴 역사 속에는 다양한 부류의 사람이 있다. 모든 사람들이 일제의 탄압과 이에 대한 저항만 생각하며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대인 중 염상섭의 <만세전>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일제의 지배를 무감각하게 받아들이고 새로운 문명을 향유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1907년생인 이효석이 별다른 저항 없이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인 것도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기사 관련 사진
    ▲ 평양 '푸른집' 외부 이효석이 살았던 평양의 '푸른집'을 본떠 봉평에 만들었다.
    ⓒ 류효정
    관련사진보기

    강심호의 <대중적 감수성의 탄생>에 따르면 1930년대 서울이었던 경성은 일제의 도시계획에 의해 조선인 거주 지역인 북촌과 일본인 거주 지역인 남촌으로 나눠져 있었다. 그리고 각각에 종로와 본정(명동)의 상권이 형성됐다.

    이때 경성에는 무려 6개의 백화점이 있었다. 그중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일본인이 설립한 미쓰코시 백화점과 조선인이 설립한 화신백화점이다. 미쓰코시 백화점의 경우 360명의 종업원을 거느리고 있었다고 하니 그 규모가 짐작된다.

    당시 조선인들은 이러한 백화점을 통해 근대적 소비문화에 점차 익숙해져 갔다. 조선은 일본의 경제발전을 위한 상품시장으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했다.

    채만식의 <탁류>에서 계봉이가 젊음을 뽐내며 백화점 직원으로 일했던 것도, 이상의 <날개>에서 주인공이 미쓰코시 백화점 옥상에서 비상을 꿈꾸었던 것도 이런 배경에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1930년대가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조차도 취직할 곳이 없을 정도로 식민지 경제가 악화된 때였다는 것이다. 때문에 많은 조선인들은 근대적 소비는커녕 하루의 끼니를 걱정하며 살아갔다. 이런 현실 속에서 근대적 소비는 당대의 부유층에게나 가능했던 일이다.

    하지만 이효석은 전문학교 교수라는 안정적인 직업, 살뜰한 아내와 부유한 처가가 있었기에 어느 정도 수준의 근대적 소비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효석을 포함하여 당시에 근대문명을 소비했던 지식인들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당대의 많은 모더니스트 중의 한 명으로 치부하면 되는 것일까, 아니면 지식인으로서 역사의식이 없음을 질타해야 하는 것일까. 어느 쪽으로 판단을 하든지 이효석의 삶이 1930년대를 살았던 지식인의 한 양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흥미롭다.

    서구문명에 매몰돼 버린 이효석

    기사 관련 사진
    ▲ 카페 '동' 이효석 문학관과 마주 보고 있는 북카페 '동'은 이효석이 함북 경성 시절 먼 길에도 불구하고 자주 찾았다고 하는 다방 '동'을 소재로 한 것이다. 수필 <고요한 '동'의 밤>의 모티프가 된 곳이다.
    ⓒ 류효정
    관련사진보기

    그의 서구적 취향은 여인에 대해서도 나타난다. 평양 창전리 '푸른집' 시절에는 프랑스 출신 여배우 다니엘 다리유의 사진을 걸어놓고 생활했다고 한다. 그는 그녀에 대한 애정이 컸는지 <스크린의 여왕에게 보내는 편지-Miss 다니엘 다류>라는 수필을 쓰기도 했다. 한편 그의 서구 여인에 대한 동경은 수필 <내가 꾸미는 여인>에도 잘 드러난다.

    "조선적 현실에서는 찾을 수 없는 경지나-그러므로 이상이라도 있겠으나-르누아르의 '프랑슈'나 '말토'쯤의 여인이면 이상에 가깝다 할까. 하필 '프랑슈'나 '말토'를 드는 것은 그들의 높은 지적 계급을 원함으로써이다." (<내가 꾸미는 여인> 중에서)

    이 수필에서도 엿보이는 바이나 그는 서구의 것은 '우월한 것'으로, 조선의 것은 '열등한 것'으로 규정하기에 이른다.

    "서양의 미에 비하여 우리의 것이 너무도 초라하게 느껴지는 것은 편견도 아무 것도 아니다. 인간이나 생활의 미에 있어서 이곳의 것이 그곳의 것에 비길 바 못 된다고 말하여도 그것은 반드시 독단과 편기(偏嗜)에서 나오는 말만이 아닐 듯하다... 미의 특정한 기준이 다른 것은 없겠으나 바다빛 눈과 낙엽빛 머리카락이 단색의 검은 그것보다는 한층 자연율에 합치되는 것이며 따라서 월등히 아름다움은 사실이다."(<화춘의장> 중에서)

    서구에 대한 동경이 서구의 기준으로 조선을 평가하는 데까지 나아간 것이다. 이러한 태도를 보인 지식인은 이효석만이 아니다. 급격한 근대문명의 유입으로 기존 조선의 모습이 초라해 보였던 탓일까. 다른 작가의 작품에서도 이런 태도는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낙후된 조선의 현실 속에서 세련된 근대문명은 충분히 그들을 홀렸을 테다.

    그의 서구지향적 태도는 이처럼 아름답지 못한 조선에 대한 환멸이 불러온 반작용이었다. 이는 그가 오랜 시간 고향을 외면했던 것과도 관련이 있다. 그는 고향 상실감을 회복하고자 서구적인 것에서 고향의 이미지를 찾으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부분들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자기부정에 다다른 그의 생각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평가가 필요하다.

    2014.11.19 18:37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