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history)2016. 1. 14.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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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부지는 왜 할 말이 없다고 했을까?


언젠가부터, 먼저 간 사람들이 더 행복한 삶을 살다가 갔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든다. 그렇게 현실을 오래 산다거나, 또 주어진 생명의 시간을 다 채운다거나 하는 게 <좋음> <만족스럼> <행복도 지수의 상승>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 때 데모가 값싼 경력 한 줄이 되고, 고귀하게 팔려 나가지 못했다. 


한국의 독특한 정서, 구속된 자식들의 부모들이 <강력한 동지>가 된다는 것이다. 난 그걸 보면 이 지구상에서 가장 보기 힘든 어떤 <에너지의 분출> 어떤 접착제의 원형질을 보는 것 같다. 


가족의 소소한 나들이 사진, 그 속 주인공들, 선하게 생긴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다. 그리고 그것들은 2012년 이 나침반 상실, 어처구니없는 정치판과는 대조가 된다. 세월이 흘러 우파는 전 세계적으로 되는데, 오히려 개혁이니 진보니 자유주의 외치는 자들은 우물 안에 개구리되어, 다시 한반도는 고립된 섬이 되었다. 


우리의 갈 길은 어디있는가?  '잘 가거래이 아부지는 할 말이 없대이...' 그 선하게 선하게 생기신 박종철의 아부지의 체념은 저항의 마그마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올해도 이 추도장에는 가지 않을 것이다. 아직 갈 자격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2012.01.13 16:02  - 아래 신문 기사를 읽다가 




( 1986년 4월 시위로 구속된 박종철씨의 재판을 참관하면서 박정기씨는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와 처음 인연을 맺었다. 사진은 그해 7월 박종철(오른쪽 둘째)씨가 석달 만에 집행유예로 풀려난 뒤 부산 자택 근처 금정산 계곡으로 형·누나와 나들이를 간 모습이다. ) 




길을찾아서] 판사 앞에 선 종철 “재판은 5·18 학살자가 받아야” / 박정기

[한겨레]

등록 : 2012 0111 19:50


박정기-아들보다 두 살 많은 아버지 28



1986년 4월 청계피복노조와 연대 시위로 체포된 철이(박종철)는 출소할 때까지 석달 동안 집으로 꾸준히 편지를 보냈다. 이 시기 아들의 사고를 엿볼 수 있는 내용이라 일부분을 소개한다. 경어체가 아닌 글은 누나 은숙에게 쓴 편지들이다.


“누나야, 여기 들어온 지가 벌써 한 달이 넘었다. … 여기서 생활은 끊임없는 자기와의 싸움이다. 또 나 자신을 꿋꿋하게 지탱해 주는 것 중의 하나로 진리에 대한 확신을 들 수 있다.”(5월22일)

“그리고 끊임없이 자기 내부로부터 변화를 일으키며 고정된 사고, 고정된 관념으로부터 과감하게 떨쳐 일어나야 한다.”(5월28일)


“나는 대학생활 중 가장 값진 경험을 들라 하면 가장 먼저 농활을 들 것이다. 힘든 노동을 통해 진정한 땀의 의미를 되새겨 보고 훈훈한 흙냄새를 통해서 역시 우리는 땅의 사람들이란 것을 느꼈다. … 기차나 고속버스를 타고 지나갈 때 손쉽게 볼 수 있는 목가적인 시골의 풍경, 흔히들 우리는 그것을 보고 낭만적인 감상에 빠져서 소를 끌고 가는 목동의 모습 정도를 상상하지. 하지만 그 속에는 값싼 수입농산물과 수입소(쇠고기) 때문에 울고, 농협 빚에 찌든 ‘죽지 못해 산다우’ 하는 푸념들을 곁들인 괴로운 농민들의 모습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라.”(6월4일)


“아버지, 어머니. 별로 웃을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당당하게 생활하십시오. 제가 나쁜 죄 짓고 여기 들어온 게 아니잖습니까. 이 땅의 아픈 현실이 바로 우리 가정에 직접 찾아왔다고 생각합시다. … 누나야! 앞으로는 ‘엄마 아빠를 배신하고 나의 이상만을 추구해 온 대가’, 이런 말은 쓰지 마라. … 나는 적어도 내가 처해 있는 모든 처지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면서 누구 못지않게 성실하게 또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을 살고자 노력했었다.”(6월9일)



“날씨가 더워지면 무엇보다도 더위와 싸움이지. 하지만 가장 큰 싸움은 이 나라를 좀먹는 도적의 무리들과의 끊임없는 싸움이다. 삼천리 금수강산 어디를 가도 도적놈의 손길이 없는 곳이 없지만, 반면 삼천리 어디에도 이 크고 작은 도적의 무리들을 징치하려는 의기를 가진 사람이 없는 곳 또한 없다.”(6월19일)


“부모님께서 부처님을 절대적인 존재로서 또 그의 말씀을 절대적인 진리로 믿는 것처럼 저는 저 자신과 저의 신념과 사상을 참된 진리로서 확신합니다. … 제 자신이 바로 그 수레바퀴의 일부가 되는 것입니다.”(6월24일)


“저들이 비록 나의 신체는 구속을 시켰지만 나의 사상과 신념은 결코 구속시키지 못합니다.”(7월8일)


그해 7월15일, 철이는 출소했다. 연락을 받고 나(박정기)와 은숙이 마중 나갔다. 재판 장소는 서울지방법원 동부지원이었다.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어머니들이 방청석에 앉아 있었다. 서너명의 학생들이 재판정에 들어서는 소리가 들렸다. 학생들은 ‘5·18 광주’와 관련한 구호를 외치며 등장했다. 아들의 우렁찬 구호를 듣는 순간 머리끝이 쭈뼛해졌다. 아들은 학생들 중 두번째로 진술했다.


“내가 왜 당신들 앞에서 재판을 받아야 합니까? 80년 오월 광주에서 죄 없는 시민들을 학살하고 권력을 잡은 자들은 어디 있습니까? 재판을 하려면 그 학살자들을 잡아들여 재판하십시오.”


법원 경위들이 철이의 입을 막으며 제지했다. 방청석에선 커다란 함성과 박수 소리가 쏟아졌다. 나는 아들의 말을 듣고 기가 막혔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며 진정되지 않았다. 철이에게 저런 면이 있었던가? 아들의 낯선 모습에 놀란 나는 그저 멍하게 앉아 있었다.


» 박정기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

재판 결과는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이었다. 출소 뒤 철이는 항소장을 작성했다. 아들이 부산에 내려왔을 때 아내가 물었다.


“니 또 데모할끼가?”


“지금 무슨 말씀 하시는 겁니껴? 어무이도 이제 이 종철이 얘기 잘 들으시고 함께 싸웁시더.”

아들은 우리가 동지가 되길 원했다. 나는 공무원 신분으로서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내 역시 그 말을 듣고 근심을 쌓아올릴 뿐이었다. 출소 뒤 친구들을 만났을 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감옥생활을 계기로 가족 문제는 더 이상 나의 발목을 옥죄지 못할 것이다.”


철이는 그때 감옥에 있으면서 단전호흡과 요가를 익힌 일을 자랑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나는 이제 어떤 고문도 견딜 수 있을 만큼 내공이 강해졌다.”

이 말을 전해들었을 때 내 가슴은 미어지는 듯했다.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구술작가 송기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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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J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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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2014. 10. 24.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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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아들이 돌아오길 기다리며, 대문을 열어놓는 아버지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의 상처는 평생 간다. 어떠한 보상을 받더라도, 딸 아들 가족 연인 친구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푸르디 푸른 하늘, 구름 한 조각 없는 청명한 날에도, 길을 걷다가도 울음을 참지 못할 것이다. 세월호의 진실을 알고 싶다고 말하는 부모나 가족들 친구들, 그리고 한국 시민들은 그걸 알아야 떠나가 버린 사람들과 작별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이다. 


한 아버지가 있다. 죽은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길 기다리는 아버지 어머니이다. 집 대문을 열어놓는다. 비오는 날에도 맑게 개인 날에도. 집 떠나 서울간 아들이 언젠가는 돌아올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30 여년이 흘러도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들 심정이다. 얼굴 주름은 성형이라도 가능하지만, 가슴팍에 새겨진 아픔은 재발한다. 


정치적 자살과 분신의 시대가 있었다. 미래에 먹어야 할 나이를 응축시켜, 미래 50년 동안 할 수 있는 일을 하루에 다 하고 간 사람들이었다. 그게 어디 불가피한 결단이었다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아픈 살갗이 타고 찢어지는 그런 아픈 순간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말이 없고, 대문은 열려져 있다. 거의 30년이 되어간다.




(이재호 열사의 아버지, 문을 열어놓고 아들이 살아 돌아오길 기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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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J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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