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철학2020. 3. 28. 0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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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 전에도, 80년 전에도 지금과 유사한 고민을 하다.

Nakjung Kim

March 24, 2013 at 1:43 PM · 


요새 잠시 쉬는시간에 아시아 도서관(중,일,한국책 취급)에 가는데, 신청한 책들이 태평양을 건너오고, 박치우 관련 책도 2권이나 비치가 되었다. 

덕분에 일제시대 경성제국대학이 1926년에 일본의 아시아 지배책의 일환으로 설립되었다는 것도, 대만보다 1년 먼저 설립되었다는 것, 독일대학처럼 예과 2년, 그 다음 3년, 즉 학부가 5년제로 운영되었다는 것도 확인하게 되었다.


 (동경대학은 1886년에, 교토대학은 1897년) 

경성제대 조선인 합격비율 28% (정원 160명 중, 45명: 법 의학은 일본인이 대부분, 문학쪽에 조선인)


처음에는 정치학과도 법문학부(법학,철학,문학)에 있었으나 2년 정도 유지되고, 폐지시켜버렸다고 한다. 식민지에 정치학과는 불필요하다고 봄. 


철학과는 주로 일본 교수들이 당시 독일에서 수입한 하이데거,칸트,헤겔, 그리스 철학 등이 주류를 이룬다. 박치우도 학부졸업논문으로 하르트만에 대해서 썼다고 한다. 

마르크스에 대한 소개는 미야케 교수와 스즈키 일본 교수가 열정적으로 소개했다고 한다. 

<경제연구회>라는 학생모임에서 유진오 (법학과),김계숙,조용욱(철학과) 등을 중심으로 마르크스주의 서적들을 공부했다고 한다.

 (*당시 마르크스주의 서적은 당시 20년대 독일에서 수입된 것). 그런데 당시 논의되던 주제들은 지금도 다른 형태로 다시 등장하고 있다.


박치우 이야기는 다시 또 하기로 하고,


.... 당시 상황이 궁금하여, 1920년대 동아일보를 보니, 1924년 제 1면 (민족의 100년 대계를 수립하고 단결하자...이런 주장임)에 세계사의 주체를 정신을 본 헤겔 Hegel파, 이 헤겔파를 유심론으로 보고, 유심론과 대조적인 유물론 양자 모두를 비판하고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동아일보가 이해가 유물론 (마르크스주의)은 거의 엉터리 수준이고 철저히 왜곡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동아일보: 유물론은 사회현상을 자연현상과 똑같이,자연법칙의 정명론적인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미신적인 자유의지론자가 말하는 인격적인 의지로 좌지우지하지 못한다 => 이것이 유물론의 주장이라고 동아일보 사설이 말하고 있다.)


<소감> 1) 1924년 동아일보 제 1면 독자가 누구였는가? 

상당히 어려운 말들이 많이 등장 

2) 그러나 용어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아님 

3) 그 책임은 물론 동아일보사에 있기 보다는 1920년대 독일 카우츠키 등이 마르크스를 이해한 방식를 그냥 그대로 따름.

: 자연법칙처럼 인류역사에도 법칙이 있고, 헤겔 관념론이 아니라 마르크스 유물론적 역사사관이 진리임 등이 더 큰 문제임 


4) 당시 마르크스에 대한 연구 수준은 그렇게 심층적이지 않고 <독일 이데올로기>책이나, 1844년 경제 철학수고 등도 발견 및 연구가 되지 않던 상황임.


1924년 1월 2일자 동아일보 1면 신문기사...


USA 미국을, 아름다울 미가 아니라, 쌀 미 자라고 표기한 것도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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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history)2013. 7. 7.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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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만 고민한 것이 아니었다. 1930년대, 1940년대에도 박치우 역시 우리와 비슷한 정신적 상황을 겪었다. 


1 민주주의, 그것도 진짜 민주주의를 고민하다. 


박치우는 경성제대 철학과(1928년 입학)에서 주로 독일 철학, 당시 유행하던 하이데거를 비롯한 실존주의를 배웠다. 졸업 논문 역시 하르트만 Hardman 에 대한 것이었다. 


신남철의 경우도 브렌타노 Brentano로, 박종홍은 하이데거 Heidegger에 대한 졸업논문을 작성한 것을 보면 당시 조선에 수용된 철학의 특징을 알 수 있다. 경성제대 철학과에는 아베, 미야모토, 다나베 등 일본 교수들이 있었고 그들에 의해 해석된 독일 철학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런데 조선사회사정 연구회라는 모임에서 일본교수 미야케가 있었는데, 그는 일제 식민 통치 수단으로 설립된 경성제대에서 마르크스주의를 가르쳤다. 당시 법대생이었던 유진오는 철학과로 전과를 희망했고, 김태준, 신남철, 유진오, 박치우 역시 미야케 교수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한국전쟁이후, 박종홍은 하이데거 실존주의 철학과 반공사상을 결합시켰고, 박치우는 1949년 빨치산 투쟁 과정 중에 이승만 정부 토벌대에 의해 사살되었다. 



박치우가 설명하는 인민(people)의 정의: 지주나 시민(부르조아) 자본가가 아니라, 노동자, 농민 소시민 인텔리를 포함한 근로대중이라고 했다. 


2. 박치우, 일제시대에 조선의 <새로운 자유>를 고민하다. 


박치우는 조선공산당이나 박헌영과 달리, 당시 소련이나 코민테른의 버전 인민민주주의론이나 레닌의 2단계 혁명론과는 달리, 자신의 철학적 사상 체계에 근거해서, 조선인들의 '자유', 근로대중들의 자유를 보장할 정치 체제로서 '인민 민주주의'를 고민했던 것 같다.





3. 박치우가 말한, 물질적 재화에 휘둘리기 쉬운 인민의 주권이란 무엇인가?

그 인민의 주권이 변증법적인 투쟁을 통해 어떻게 실현되고 정착되는가? 





4. 능력과 노동에 따른 분배가 실현된 사회


인간이 능력에 따라 노동하고, 노동에 따라 분배해야만, 인간과 '가축 (동물)'이 구별된다고 주장한다. 근로인민 민주주의의 핵심이며 조선인들이 추구해야 할 민주주의라고 했다.




5.  물신주의, 물신성 등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비판 용어들이 보인다.


민주주의가 '돈, 화폐'주의나, '물 (상품이나 물건 등)'주주의, "땅(지)주주의'로 될 수 있다고 진단하다.

민이 주인이 아니라, 돈이 주인이 되고, 재화 그 자체가 주인이 되고, 땅이 주인이 되는 민주주의도 있다는 것이고, 그건 인민민주주의가 아니라고 비판한다. 


박치우 역시 마르크스의 <자본 1권>에 등장하는, 그리고 마르크스 사상 전반을 가로지르는 '주객 전도, 물신성에 대한 비판을 언급하고 있고, 자신의 비판철학으로 사용하고 있다. 

참다운 인민 민주주의에서 지양 (aufgehoben)되어야 한다. => Aufhebung (지양) 번역어를 일본에서 한 그대로 지양...이라고 쓰고 있다. 


박치우의 개인 인생관 : 개인의 열정을 사회적인 사명 수행에 쓸 수 있어야 한다고 다짐한다. 





6. 시민 민주주의 (부르조아 민주주의)가 지양된 민주주의가 바로 인민 민주주의다.


사상가는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내는)에서 나오는 소리들을 "심장"을 통해서 들어야 한다고 했다.


인-주주의. 사람이 주인되는 정치 체제. 





7. 철학을 공부했던 박치우는 "나는 정치와는 거리가 먼 일면서생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그는 1945년 이후 해방 정국 좌우 분열 속에서, 조선의 인민 민주주의가 나아가야 할 길을 고민했다. 




8.  의견의 차이와 감정의 대립이 있다면, 이 모든 차이와 대립은 속히 '괄호'에 넣자.


공약수란 "조선을 조선 사람에게 돌려준다"는 이것 이외에는 있을 수 없다. 


괄호, 이것은 독일 철학자 훗설 (Husserl)의 용어, 에포케 (Epoche)이다. 기존 개념틀, 선 지식, 편견 Vorurteilung 을 버리라는 것이다.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가지고 있는 몇 가지 테제나 도그마로 변질된 역사법칙을 '괄호'안에 넣어라. 이렇게도 사용될 수 있다. 


일민주의와 같은 국수주의도 당대 독일 나치즘이나 이태리 파시즘과 본질적으로 같다고 박치우는 비판한다. 


2013년 남쪽과 북쪽 체제의 차이나, 정세 등은 과거 박치우 시대와는 많이 다르다. 그런데 우리들에게 남겨진 과제들은 유사한 점들도 많다. 수많은 변형들을 겪고 있지만. 





9.  부르조아 (시민) 민주주의, 파시즘, 전체주의, 근로인민 민주주의를 구별하다.





10. 조선이 나아가야 할 민주주의는, 절대 다수의 행복이 보증되고 실현되는 민주주의, 근로 인민 민주주의이다.





11. 해방 정국 당시, 사이비 종교들이 많이 등장했다고 박치우는 기록하고 있다.


전 세계 자본주의 국가들 중에서 한국처럼 종교들이 다양하거나, 유사 종교를 띤 활동들이 많은 나라도 드물 것이다.


왜 이런 현상들이 생겨난 것일까? 






책 출처: 박치우의 삶과 철학사상 (위상복 지음: 길: 2012) 


박치우 (1909년 함경도 출생 - 1949년 태백산맥에서 사망)


독서 일지: 2013년 3월

토론토 대학 아시아학 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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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자료:

    https://www.pinterest.com/pin/353954851938955999/?fb_ref=336292434583532755%3A845fe51724bae2f2848f27

    2015.02.09 03:27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책/노트(독후감)2013. 3. 22. 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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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는 30대 후반, 40대 초반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지금이 어렵다고들 하지만 생명에 위협이 있는 건 아니다.

 

1909년생 박치우는 1949년 만 40의 나이로 태백산에서 이승만 정권의 토벌대에 의해서 사살당했고, 1907년생 이효석도 40대 초반의 나이로 절명했다.

 

이효석은 문학을, 박치우는 철학을 공부했다. 이 두 사람이 1938년에 대화를 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다. 책을 읽다보니 두 사람은 숭실전문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잊어버리고 산 이름. 박치우.

 

남쪽에는 박정희 시절 <국민교육헌장>을 기초했고, <공산주의철학비판>을 저술한 박종홍이 남고, 북쪽으로는 백남운과 신남철이 가고, 박치우는 1949년 태백산 자락에서 죽어갔다. 

 

살아남았으면 좋을 사람들은 일찍 죽는 비운의 역사가 많다. 역사에 가정은 소용없다 하지만, 박치우가 살아있었더라면 여러 사람들의 인생행로는 달라졌을 것이다. 

 

 

(이 인터뷰 기사는 숭실전문학교가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당하기 바로 직전에 이뤄진 것같다. 이 두 사람은 지식인이라는 말을 자주했다)

 

 

 

(이효석의 말 속에서 흥미로운 발언을 찾을 수 있다.  지식계급이 사회적으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강한 의무감, 그 시대적 사명을 <사회적 감각과 비판정신>의 고수. 이것을 지성의 옹호라고 했다. 일제 식민지 시대 하에서 지식층의 심리적 고뇌. 생활의 옹호 vs 지성의 옹호의 갈등이 1930년대에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대 소설가 앙드레 지드와 토마스 만에 대해서도 <시대의 고민의 대변자>라고 해석하는 이효석. 

 

 

인터뷰 당시, 박치우는 31세, 이효석은 33세였다. 박치우의 발언 속에는, 1930년대 당시 학계, 사상계,예술계에서 유행하는 "비합리주의"에 대한 강한 거부감이 나와있다. 지성의 논리(로직)이 아니라 지성의 윤리(Ethik)를 역설하다.


1938년 박치우-이효석의 대화에서도, 자신들의, 혹은 조선의 지식인으로서 자기 사상체계가 허술한 채, 외국 유행물만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서 박치우와 이효석이 비판하고 있다. <사상 빈혈증>을 치유하기 위해서 박치우는 서적을 많이 읽을 것을 제안한다. 이효석 역시 사상적 교양의 깊이가 없으니 작가의 시야가 좁아진다고 지적했다. 조선에 걸작이 나외기 위해서는 조선의 문학 전통을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효석. 이효석이 일찍 죽어서 아쉽다. 

 

 

제목: 사상과 현실 (박치우)

편집: 윤대석, 윤미란 

출판: 인하대학교출판부 (2010.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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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양의 미가 월등하다"... 작가 이효석의 충격 발언
    [전국 문학관 기행] 봉평 '이효석 문학관'②
    14.11.02 11:55l최종 업데이트 14.11.05 08:32l류효정(kdi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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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장에서 새벽에 갓 짜낸 생우유를 배달 받아 그것을 따뜻하게 데워 입 안 가득 머금는다. 우유의 진한 향기와 맛이 감동적이다. 학교에서 퇴근한 후, 다방에 가서 좋아하는 클래식을 들으며 커피 한 잔을 마신다. 집에 돌아와 잘 가꾸어진 화단을 내다보며 클래식과 커피를 즐기는 것도 큰 행복이다. 다가오는 겨울에는 꼭 스키를 배워보리라. 그리고 이번 주말에는 백화점에서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을 사와야겠다. 백화점 아래층에서 커피 원두도 찧어와야지…."

    이효석의 수필들을 참고해 재구성한 그의 하루이다. 다방이라는 단어가 예스럽긴 하지만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도 이 정도 삶이라면 꽤나 호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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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양 '푸른집' 내부 이효석 문학관 내부에 설치된 것으로 그가 가장 윤택한 생활을 했던 평양 '푸른집'의 내부를 본뜬 것이다. 피아노, 축음기, 여배우 '다니엘 다리유'의 사진 등이 그의 생활양식을 잘 보여준다.
    ⓒ 류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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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년대 경성... '모던'했던 그곳

    그의 이러한 서구적 취향은 경성제국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던 때 그리고 함경북도 경성 시절 주을 온천에서 서구식 생활을 직접 경험한 부분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살았던 1930년대다. 이때는 이미 일제를 통해 수입된 서구식 자본주의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이와 같은 현실배경이 있었기에 그의 서구적 취향이 가능할 수 있었다.

    그가 서구적 생활을 향유한 곳은 당시의 서울 '경성(京城)'이 아니라 함북 '경성(鏡城)'과 평양이었다. 지방에서 누린 서구식 문화가 이 정도인데, 당시 서울이었던 경성은 얼마나 근대적이고 번화한 곳이었을까.

    무려 36년이라는 긴 역사 속에는 다양한 부류의 사람이 있다. 모든 사람들이 일제의 탄압과 이에 대한 저항만 생각하며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대인 중 염상섭의 <만세전>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일제의 지배를 무감각하게 받아들이고 새로운 문명을 향유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1907년생인 이효석이 별다른 저항 없이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인 것도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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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양 '푸른집' 외부 이효석이 살았던 평양의 '푸른집'을 본떠 봉평에 만들었다.
    ⓒ 류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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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심호의 <대중적 감수성의 탄생>에 따르면 1930년대 서울이었던 경성은 일제의 도시계획에 의해 조선인 거주 지역인 북촌과 일본인 거주 지역인 남촌으로 나눠져 있었다. 그리고 각각에 종로와 본정(명동)의 상권이 형성됐다.

    이때 경성에는 무려 6개의 백화점이 있었다. 그중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일본인이 설립한 미쓰코시 백화점과 조선인이 설립한 화신백화점이다. 미쓰코시 백화점의 경우 360명의 종업원을 거느리고 있었다고 하니 그 규모가 짐작된다.

    당시 조선인들은 이러한 백화점을 통해 근대적 소비문화에 점차 익숙해져 갔다. 조선은 일본의 경제발전을 위한 상품시장으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했다.

    채만식의 <탁류>에서 계봉이가 젊음을 뽐내며 백화점 직원으로 일했던 것도, 이상의 <날개>에서 주인공이 미쓰코시 백화점 옥상에서 비상을 꿈꾸었던 것도 이런 배경에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1930년대가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조차도 취직할 곳이 없을 정도로 식민지 경제가 악화된 때였다는 것이다. 때문에 많은 조선인들은 근대적 소비는커녕 하루의 끼니를 걱정하며 살아갔다. 이런 현실 속에서 근대적 소비는 당대의 부유층에게나 가능했던 일이다.

    하지만 이효석은 전문학교 교수라는 안정적인 직업, 살뜰한 아내와 부유한 처가가 있었기에 어느 정도 수준의 근대적 소비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효석을 포함하여 당시에 근대문명을 소비했던 지식인들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당대의 많은 모더니스트 중의 한 명으로 치부하면 되는 것일까, 아니면 지식인으로서 역사의식이 없음을 질타해야 하는 것일까. 어느 쪽으로 판단을 하든지 이효석의 삶이 1930년대를 살았던 지식인의 한 양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흥미롭다.

    서구문명에 매몰돼 버린 이효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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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카페 '동' 이효석 문학관과 마주 보고 있는 북카페 '동'은 이효석이 함북 경성 시절 먼 길에도 불구하고 자주 찾았다고 하는 다방 '동'을 소재로 한 것이다. 수필 <고요한 '동'의 밤>의 모티프가 된 곳이다.
    ⓒ 류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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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서구적 취향은 여인에 대해서도 나타난다. 평양 창전리 '푸른집' 시절에는 프랑스 출신 여배우 다니엘 다리유의 사진을 걸어놓고 생활했다고 한다. 그는 그녀에 대한 애정이 컸는지 <스크린의 여왕에게 보내는 편지-Miss 다니엘 다류>라는 수필을 쓰기도 했다. 한편 그의 서구 여인에 대한 동경은 수필 <내가 꾸미는 여인>에도 잘 드러난다.

    "조선적 현실에서는 찾을 수 없는 경지나-그러므로 이상이라도 있겠으나-르누아르의 '프랑슈'나 '말토'쯤의 여인이면 이상에 가깝다 할까. 하필 '프랑슈'나 '말토'를 드는 것은 그들의 높은 지적 계급을 원함으로써이다." (<내가 꾸미는 여인> 중에서)

    이 수필에서도 엿보이는 바이나 그는 서구의 것은 '우월한 것'으로, 조선의 것은 '열등한 것'으로 규정하기에 이른다.

    "서양의 미에 비하여 우리의 것이 너무도 초라하게 느껴지는 것은 편견도 아무 것도 아니다. 인간이나 생활의 미에 있어서 이곳의 것이 그곳의 것에 비길 바 못 된다고 말하여도 그것은 반드시 독단과 편기(偏嗜)에서 나오는 말만이 아닐 듯하다... 미의 특정한 기준이 다른 것은 없겠으나 바다빛 눈과 낙엽빛 머리카락이 단색의 검은 그것보다는 한층 자연율에 합치되는 것이며 따라서 월등히 아름다움은 사실이다."(<화춘의장> 중에서)

    서구에 대한 동경이 서구의 기준으로 조선을 평가하는 데까지 나아간 것이다. 이러한 태도를 보인 지식인은 이효석만이 아니다. 급격한 근대문명의 유입으로 기존 조선의 모습이 초라해 보였던 탓일까. 다른 작가의 작품에서도 이런 태도는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낙후된 조선의 현실 속에서 세련된 근대문명은 충분히 그들을 홀렸을 테다.

    그의 서구지향적 태도는 이처럼 아름답지 못한 조선에 대한 환멸이 불러온 반작용이었다. 이는 그가 오랜 시간 고향을 외면했던 것과도 관련이 있다. 그는 고향 상실감을 회복하고자 서구적인 것에서 고향의 이미지를 찾으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부분들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자기부정에 다다른 그의 생각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평가가 필요하다.

    2014.11.19 18:37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