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history)2019. 5. 17. 20:57

마지막 목격자’ 마틴,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의 부친 ‘위로’

등록 :2016-05-25 15:03수정 :2016-05-25 22:34



http://www.hani.co.kr/arti/society/area/745369.html


지난 18일 광주에서 5·18항쟁 당시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의 아버지 윤석동(가운데 휠체어 탄 이)씨와 5·18을 취재해 세계에 알린 ‘푸른 눈의 기자들’이 만났다. 오른쪽 두번째부터 윤상원을 마지막으로 인터뷰했던 브래들리 마틴 <전 볼티모어 선> 기자, 도널드 커크 전 <시카고트리뷴> 기자, 노먼 소프 전 <아시아월스트리트저널> 기자. 유족 제공


80년 5월 도청 인터뷰 인연

생가 방문 윤석동씨와 재회

5·18항쟁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1950~1980)을 마지막으로 인터뷰했던 브래들리 마틴(74) <전 볼티모어 선> 기자가 지난 18일 오후 윤상원의 아버지 윤석동(89·전 5·18민주유공자유족회장)씨를 만났다. 80년 5월 광주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현장을 취재했던 노먼 소프 전 <아시아월스트리트저널> 기자와 도널드 커크 전 <시카고트리뷴> 기자도 동행했다.


브래들리 마틴이 윤상원의 생가를 찾은 것은 이번이 네 번째다. 마틴은 80년 5월26일 밤 시민군 항쟁 지도부가 있던 전남도청에서 윤상원을 만나 마지막 인터뷰를 했던 언론인이다. 그는 “그 청년의 생사가 궁금해” 항쟁 8년 뒤 처음으로 윤씨의 집을 방문했다. 마틴은 “바로 코앞에 임박한 죽음을 분명히 인식하면서도 부드러움과 상냥함을 잃지 않는 그(윤상원)의 눈길이 인상적이었다”고 쓴 적이 있다.


아들의 생전 마지막 모습을 가장 생생하게 전달한 마틴 기자와 깊은 우정을 쌓아온 윤씨는 마틴의 손을 잡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1943년부터 60년이 넘도록 농사 이야기와 일상을 꾸준히 기록해온 그는 아들의 죽음에 상처받은 마음을 적어 놓기도 했다. ‘상원이가 살아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1988년 5월29일)’, ‘벌써 8년 전의 일이다. 그때 일을 회상하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느꼈으나, 세월이 흐르니까 폭도란 누명을 씻고 (아들 윤상원의) 명예가 회복되어 가고 있다(1988년 5월28일)’고 썼다.


윤씨는 “마틴과의 만남이 마지막일 것”이라는 생각 때문인지 얼굴에 서운함과 슬픔이 배어있는 표정을 지었다고 가족들이 전했다. 1년여 전부터 신장투석을 받고 있는 윤씨는 이날 기념사진을 찍으면서 마틴이 “키를 맞춰야겠다”며 허리를 구부리자 엷은 미소를 지었다.

광주/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area/745369.html#csidx002f7007b915a9d8533cc43bff7fa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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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없음2019. 2. 22. 20:46


설훈의 설화 舌禍,  설화 說禍 


민주당 설훈 의원의 논리는 문제가 많다.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  거의 80~90% 지지율을 보이던 20대가 지금은 지지를 거두고 있다. 그런데 20대 남성의 문재인 지지율은 29.5%, 20대 여성은 63.5%로 남성과 여성의 격차가 2배를 넘는다. 이런 성별 격차는 거의 유례가 없을 정도이다. 


설훈 의원은 20대의 이러한 정치 성향을 교육에서 찾고 있다. 현재 20대가 청소기를 보낸 시절이 이명박 박근혜 10년 정부였기 때문에, 이들이 제대로된 교육을 받지 못했고, 이것이 문재인 지지율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이는 설훈의 설화 舌禍 에 지나지 않고, 논리적으로도 타당하지 않다. 설훈 주장에 대한 반례는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사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박정희 유신시대 (1972~1979)와 전두환 독재 (1980-1987) 시절에 교육받은 청년들은 독재나 유신헌법을 미화하지 않고, 오히려 박정희 독재 타도와 전두환 학살자 처단 투쟁에 나섰다. 


독재 정부 하 교육부가 편찬한 교과서로 공부한 초, 중,고등학교, 대학교 학생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양심과 정의심은 살아 남을 수 있고 발전할 가능성도 있다. 


민주당과 문재인 정부가 20대 남성들이 겪는 정치적 어려움들, 경제적 난관들, 문화적 소외감 등에 대해서 너무 피상적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증거가 설훈 의원의 설화이다.







설훈 “20대 지지율 하락, 이전 정부 잘못된 교육 탓”


등록 :2019-02-22 -



언론 인터뷰서 “그 시절 교육 제대로 받았나 의문”

자유한국당 “민주당 지지 안하면 멍청이?

역대급 망언…사과하고 의원직 사퇴해야”




설훈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이 20대 남성층의 민주당 지지율 하락을 “학교교육의 문제점”에서 찾으며 “교육 제대로 받았나 하는 의문이 있다”고 주장했다. 자유한국당은 “20대 청년을 모욕하는 망언”이라며 설 의원의 사과와 의원직 사퇴를 요구했다.


설 의원은 21일 <폴리뉴스>와의 인터뷰에서 “(20대) 이분들이 학교 교육을 받았을 때가 10년 전부터 집권세력들, 이명박 박근혜정부 시절이었다. 그때 제대로 된 교육이 됐을까 이런 생각을 먼저 한다”고 답했다.


 이어 설 의원은 “저는 유신 이전에 학교 교육을 거의 마쳤다. 민주주의가 중요한 우리 가치고 민주주의로 대한민국이 앞으로 가야 한다는 교육을 정확히 받았다”며 “그런데 지금 20대를 놓고 보면 그런 교육이 제대로 됐나하는 의문은 있다”고 말했다. 


설 의원은 “20대 정책이 실패했다면 여성들도 지지가 떨어져야 하는데 여성들은 그렇지 않아 보인다”며 “당장 젠더 갈등이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고 했다.


 설 의원은 “젠더 간에 갈등을 우리가 제대로 소화를 못한 것 아닌가 하는 부분은 있을 수 있다”고도 했다. 


설 의원은 “그래서 교육 이야기를 꺼낸 것인데 정확히는 잘 모른다”며 20대 청년 관련 답변을 마쳤다.


이에 자유한국당은 “국민 개·돼지 발언을 능가하는 역대급 망언”이라며 설 의원을 비판했다. 


장능인 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본인이 속한 진영에 대해 지지를 보내지 않으면 바로 교육도 제대로 받지 않은 ‘멍청이’가 된다는 건가”라며 “설훈 최고위원은 본인의 잘못을 즉각 인정하고 의원직에서 사퇴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면 민주당은 2030세대를 모욕한 설훈 최고위원을 제명하고 국민께 사과하기 바란다”고 밝혔다. 다음은 문제가 된 설훈 의원의 <폴리뉴스> 인터뷰 부분.


-문재인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의 지지율이 하락할 때 20대 남성층의 지지가 여성에 비해 낮았다. 과거에는 20~30대 지지가 굳건했었는데 원인은 뭐라고 보나.


젠더 갈등 충돌도 작용했을 수 있고 기본적으로 교육의 문제도 있다. 


이분들이 학교 교육을 받았을 때가 10년 전부터 집권세력들, 이명박 박근혜정부 시절이었다. 그때 제대로 된 교육이 됐을까 이런 생각을 먼저 한다. 


저를 되돌아보면 저는 민주주의 교육을 잘 받은 세대였다고 본다. 저는 유신 이전에 학교 교육을 거의 마쳤다.


 민주주의가 중요한 우리 가치고 민주주의로 대한민국이 앞으로 가야 한다는 교육을 정확히 받았다. 


유신 때 ‘이게 뭐냐, 말도 안되는 것 아니냐’ 당장 몸으로 다 느꼈다. 그게 교육의 힘이었다. 


그런데 지금 20대를 놓고 보면 그런 교육이 제대로 됐나하는 의문은 있다. 


그래서 결론은 교육의 문제점에서 찾아야 할 것 아닌가 생각한다. 또 당장 젠더 갈등이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 남성들이 여성들에 비해 손해보는 것 아닌가 이런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다. 조심스런 추측이다. 복잡한 현상임에 틀림없다.”



-20대에 대한 문재인 정부의 정책 실패 지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어떤 것을 정책 실패라고 하는지 정책 하나하나를 가지고 따져봐야 할 것 같은데 저는 20대 정책이 실패했다면 여성들도 지지가 떨어져야 하는데 여성들은 그렇지 않아 보인다.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젠더 간에 갈등을 우리가 제대로 소화를 못한 것 아닌가 하는 부분은 있을 수 있다. 그래서 교육 이야기를 꺼낸 것인데 정확히는 잘 모른다.”



김태규 기자 dokbul@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883221.html?_fr=mt2#csidx795d1cad2de3a28b7ff3c8750b6e66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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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2018. 1. 4. 17:20

영화 <1987>을 청와대 586 전대협 출신 찬가다, 7~8월 노동자 투쟁이 빠져있다, 87년 김대중-김영삼 낙선 노태우 당선과 같은 패배는 보여주지 않는다, 난 87년 참여하지 않아서 모르고, 97년 IMF 이후 빈부격차가 87체제보다 더 중요하다, <1987> 영화가 민주화와 6월 항쟁에 대한 주류의 서사 영화다 등등.


이런 평가들은 역사에 대한 협소한 평가, 좌파나 사회주의임을 내세우지만 정치적으로는 자멸적인 해석이고, 비역사적인 태도다. 목욕물 버리면서 아이까지 다 버리는 것과 같다. 


이러한 협소하고 정치적으로 자멸적인 평가들이 문재인 열광적 지지자들이 보여주고 있는 온라인에서 ‘홍위병 같은 철의 키보드’에 대한 저항이자 카타르시스 분출이라면 이해할 만하다. 그럼에도 그런 견해들은 정치적으로 신경쇠약하다는 생각을 금할 길이 없다. 


  <1> 영화는 영화다. <1987>은 한국영화 주제들을 다양화했다는 점에서 높이 산다. 팝콘 먹으면서 노동자 시민들이 보는 영화 소재가 대부분 뭔가? 지난 20년간 가장 많은 영화 소재들은 ‘조폭/코메디물’, 혹은 ‘친구엄마 4’와 같은 애로물일 것이다. 


문화와 영화 소재 다양성이라는 관점에서 보자. 또 장준환 감독의 <1987>과는 다른 각도에서 “1987년”을 다룬 영화들이 만들어져야 한다. 1980년 광주, 전태일 등을 다룬 영화들 다시 만들어져야 한다. 문성근 출연한 <전태일> 영화는 보다 나오고 싶었다. ‘저 좋은 소재로 저렇게 못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1987> 영화, 보라고 널리 권장해도 좋다. 페이스북에서 영화 <1987> 그만 써라고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은 정치적 역사적 무능이자 피로감이다. 


87년 7-8월 노동자 대투쟁 주역들이 안철수 지지선언하고, 민주당 문재인 정부에서 일한다고 해서, 나중에 영화 제목 “1987년 7~8월 여름 파업”이 나오면, 영화 보지 않을 것인가? 


<2> 정치적으로 좌파일수록 사회주의자일수록 역사와 대화해야 한다. 


역사학자  E.H 카 “역사란 무엇인가?” 에서 역사의 3가지 특성들 중에 두번째 특성을 이렇게 설명한다 “역사가들은 역사 행위자들과 사건들에 대한 '상상력'을 발휘하고 '그들 편에 서서 체험하고 공감'하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진보정당을 하려면 역사가 ‘카’의 말을 곱씹을 필요가 있다. 자기가 87년에 짱돌들고 백골단과 싸웠다고 해서, 혹은 나이가 어려서 참여하지 못했다고 해서, 전자는 무슨 진실을 다 아는 양, 후자는 ‘그건 이전 세대 개팔육, 586들 비지니스고’ 하는 태도들은 다 대중들과 대화하기를 포기한 무능력한 정치적 자포자기일 뿐이다.


역사가 카 (E.H Carr)가 말한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좌파고 사회주의자라면, 그리고 진보정당을 하려면, <1987>을 만든 장준환 감독탓을 할 것이 아니라, 대중들과 노동자들과의 정치적 대화 소재를 깔아준 <1987>을 정치적 담론장으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코카콜라 팔지 못하면, 펩시 콜라라도 옆에서 팔아라. 


<3>  <1987> 6월 항쟁은 형식적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이고, 1987년 7~8월 노동자 대파업은 실질적 민주주의 (혹은 경제민주화)을 위한 투쟁이라는 잘못된 이분법적인 논리.  그래서 전자는 김대중-노무현-문재인 리버럴 민주당 정부 소유고, 후자는 진보정당, 혹은 고유한 사회주의자들의 에센스라는 비역사적이고 정치적인 깡통차기 딱 좋은 논리는 도대체 누가 개발했는가? 리버럴리스트들이다. 정치와 경제 영역을 이분법적으로 다른 영역으로 분리해버린 것이다. 


또하나, 사회주의자라면 더 알아야할 20세기 진실이 있다. 소련이 망한 여러가지 이유들 중에, ‘형식적 민주주의’라고 하는 ‘절차적 정당성’이 스탈린 개인숭배와 공산당 ‘진리독점’으로 치환되었기 때문에 인민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절차적 (형식적) 민주주의의 ‘파괴적 혁명적 성격’을 폄하하지 말아야 한다. 


정당성이 결여된 국가의 ‘강압 (폭력)’에 대한 저항은 소극적 자유, 자아실현을 위한 주체적 자기 결정권은 적극적 자유라는 이분법을 가지고, 전자보다 후자가 더 낫다는 선판단은 중지되어야 한다. 


마치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정부는 ‘형식적 절차적 자유 혹은 민주주의’를 아주 잘 수행했고 하고 있다는 착각을 심어주기 딱 안성맞춤인 사고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짧게 언급하자면, 소극적 시민자유 (negative liberty) 와 실질적 긍정적인 시민자유 (positive liberty)를 구별한 사람이 리버럴리스트 이샤아 베를린 (Isaiah Berlin)이다. 소극적 자유는 국가와 같은 외부 강압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고, 긍정적인 실질적인 자유는 자아실현에 필요한 방법들을 동원할 수 있는 주체의 자기 결정능력이다. 


그가 1958년 정도에 쓴 “두 가지 시민 자유 개념들 Two concepts of Liberty”에서 소극적 시민자유와 긍정적 실질적 시민자유를 구별하지만, 이러한 양분법 패러다임 자체가 리버럴리스트 베를린의 정치철학적 기획이다. 한국 정치사에서 경제사에서 이 두가지 ‘자유’ 혹은 두 가지 민주주의들은 뗄레야 뗄 수가 없고, 그 정치적 폭발력은 이 두 가지 모두에서 나온다. 


민주주의도 마찬가지이다. 절차적-형식적 민주주의와 내용적-실질적 민주주의로 이분법적으로 구별하고, 전자는 민주당 소유권, 후자는 진보정당 혹은 사회주의자 소유권으로 나눈다면, 현실에서는 정치적 무능력만이 남을 것이다. 


좌파임을 자처하고, 청와대 586 386들보다, 혹은 배우 문성근보다 더 라디컬함을 내세우면서, 그 리버럴리스트들이 구사하는 슬라이더를 받아치는 능력을 연마하지 않고, ‘나는 패스트볼만 치는 홈런타자’임을 선언하는 것은, 현실에서도 미래에서도 역사에서도 그냥 삼진 아웃으로 끝날 공산이 크다.


<4> 민주당 국회의원이나 보수당 국회의원 및 성공한 정치가된 87년 민주화 운동 세대는 극소수다. 대다수 전두환 파쇼 타도를 외친 사람들은 지금도 화이트 칼라, 공무원, 교사, 블루 칼라 노동자들이거나 자영업에 종사하는 일하는 사람들이다. 물론 문재인 당선으로 보아, 이들 대다수는 민주당 후보를 대통령으로 선출했지, 진보정당인 정의당 심상정을 뽑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 <1987> 속에 등장하는 대다수 사람들을 30년이 지난 지금에도 전대협 의장 임종석 현 비서관이 대표한다고 생각하는가? 한국 민주주의 운동이라는 거대한 장강의 흐름에서, 문재인과 그 정부 핵심들이 바로 6월 항쟁의 아이들이라고, 87년 유월항쟁에 참여했던 그 땅개미들이 시민들이 승인해 준 적이 있는가? 단연코 없다.


영화 <1987>이 현재 민주당 정권과 ‘청와대 386들을 위한 찬가’로 해석하는 이들은 목욕물을 버린다 해서 욕조에 들어있는 아이까지 버리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1980년 5월 27일 광주도청에서 전두환 계엄군 M16에 맞아 죽을 줄 알면서도 도청을 사수한 윤상원 열사와 그 광주 동료들은, ‘살인마’ 전두환이 부당하게 대한민국의 군대를 동원해서 시민들을 죽였기 때문에, 그 부당한 절차가 300명 넘게 시민들을 죽였기 때문에, 도청에서 빠져 나오지 않고 죽음을 선택했다. 


전두환 쿠데타 세력의 ‘강압’과 ‘폭력’에 대한 저항이고, 한국 민주주의라는 시대적 과제를 ‘자아실현’으로 간주하고, 죽음을 결정한 주체적 결단과 실천이 바로 윤상원과 동료들의 죽음이다. 


소극적 자유와 긍정적/적극적 자유의 결합이고, 절차적 민주주의와 실질적 민주주의가 복잡하게 얽혀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형식적 절차적 민주주의도 피를 먹고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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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정치/민주당2014. 8. 9. 15:43

한홍구 강연이 놓치고 있는 역사적 사실


1. 민주당 투쟁근육을 좀 먹었는가를 설명하지 못했다. 역사적으로 투쟁하는 야당의 성공담을 흑백 다큐멘타리로 틀어주었으나, 민주당(새정련)이 그 투쟁하는 야당 근육을 만들어낼 지는 의문이다. 8월 5일 강연회 직후, 세월호 진상 규명 특별법을 서둘러서 새누리당에 헌납한 것은 불길한 징조이다.


무엇을 놓치고 있는가? 한홍구 <어제의 야당>은 민주당(새정련)과 민주당 의원들이 왜 박정희 전두환 독재시절에 가지고 있었던 투쟁근육을 다 잃어버렸는지 그 원인들을 ‘역사적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하에서, 그리고 이명박 박근혜 정부 하에서도 민주당 대다수 의원들이 새누리당 의원들이 누리는 기득권을 동일하게 누린 사실들을 빠뜨리고 있다. 박정희 전두환-노태우 독재에 저항하는 야당 투쟁근육이,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어떤 정치적 측면과 저항해야 하는가?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박정희-전두환과 동일한 군사파쇼 정부가 아니지 않는가?


특히 한국정치사 경제사에서 1997년, 전세계적으로 가장 혹독한 IMF 긴축 정책을 수용했던 김대중 정부 이후, 2014년 지금까지 소위 민주당 야당의원들은 과거 신민당-평민당과 달리, 한나라당-새누리당 의원들이 누린, 다시 말해서 박정희-전두환 시절보다 더 혹독해진 한국 자본주의 성과를 그들의 정치 경쟁자 새누리당과 같이 향유했다.


박정희-전두환 독재 하에서 상층 20%가 소유한 재산보다 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를 거치면서 상층 20%가 소유한 재산이 차지하는 비중은 4배,5배까지 증가했다. 그만큼 상대적으로 하층, 중산층은 붕괴되거나 상대적 박탈감에 빠지고 말았다. 


OECD 각종 소득 통계나 세금 이후 가처분소득 통계를 봐도 상위층과 하위층의 격차는 박정희-전두환 독재 치하보다 5배~7배 이상 벌어졌다. 심지어 2014년 통계를 보면, 한국 소득 상위 1%가 전체 소득의 16.6%를 차지할 정도가 되었다. 전체 국민 소득 구간를 5개로 나눴을 때, 최상 20%가 최하 20%의 소득 격차가 2.5배 이상 발생해서는 안된다. 진보좌파야 소득격차를 1에 가깝게 하기 위해서 노력하겠지만, 최소한 민주당과 같은 리버럴 정당 (liberalist ) 에서는 2~3배 사이로 막아야 한다.


민주당의 투쟁 근육이 좀먹거나, 그 근육이 주근깨, 혹, 반점, 지방덩어리로 변질된 이유는, 박정희-전두환 군부독재와 싸웠던 그 치열한 투쟁정신만큼, 1997년 이후 한국 사람들을 병들게 만든, 노동의욕을 감퇴시키고, 살 맛 떨어지게 만들었던, 이 소득 격차, 일해도 가난해지고 상대적 박탈감만 생기는, 한국 자본주의 병폐와 투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자본주의 병폐와는 좌파만 투쟁하는 게 아니라, 전 세계 각국 리버럴리스트 정당들도 어느 정도 (타협적으로 하더라도) 실제 사회복지 정책들을 도입한다.


한홍구 <어제의 야당> 강연이 시사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왜 민주당 의원들이 97년 이후 새누리당 (한나라당) 의원들과 별반 차이가 없는가? 과거 386-486 학생회장 민주당표 국회의원들이 실제로는 한나라당-새누리당 의원들과 일상 생활에서 향유하는 경제적 성과물, 다시말해서 절대적 상대적으로 박탈당한 노동소득의 격차 그 기반 위에 서 있다는 역사적 사실을 <어제의 강연>이 말했어야 했다.


인간은 당연히 경제적 동물만은 아니다. 월급 총량이 정치적 의식을 100% 규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 배가 부르는데 배고픈 자의 심정을 알기 역시 쉽지 않다. 박정희-전두환 고문정치, 최루탄 정치, 중앙정보부-안기부 정보정치, 반공-반북 사상 이데올로기 정치에 맞서는 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어려운 정치가 바로, 자본주의의 소득 격차 문제이고, 그것을 가능한 법률적 사회적 교육 문화 제도 장치이다. 





한홍구 교수 강연 내용 요약: by 원시


제목: 어제의 야당

글쓴이: 한홍구(성공회대학교)

발표 시간 및 장소: 2014년 8월 5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제1세미나실)

주제: 야당 어디로 가야 하는가

http://www.polinews.co.kr/news/article.html?no=211559


1. 핵심 주장:

헐거워진 허벅지 투쟁근육을 튼실하게 하라. 투쟁하는 야당 (투야)가 되어라.


2. 한홍구의 진보정당 인식: 2004년 총선과 노무현 탄핵 국면에서 야당지지자들이 열린우리당을 제 1당으로 만들어주고 그에 덤으로 민주노동당에 10석을 준 것이다.


3. 투쟁하는 야당 강연 역사적 논거:


1971년 8대 선거에서 신민당 의석수를 그 이전 40석에서 89석으로 늘려줌 (투쟁 대상은 박정희 영구집권 획책인 유신헌법 반대)

1985년 신민당 제 1야당 전격 진격 (사쿠라 야당인 민한당을 대체할 반-전두환 독재 투쟁 야당 신민당 승리)

1992년 총선에서 공룡보수-민자당 (김영삼+노태우+김종필) 221석을 149석으로 만들고,

김대중 평민당과 꼬마민주당에 97석을 주었다.

그 이후 총선과 대선에서도 마찬가지로 투쟁하는 야당을 유권자들이 지지했다.


4.대안

정치 주체 386-486들이 각성하라. 비육지탄(髀肉之嘆)

30년간 학생회장이지 정치적 ‘성인’이 되지 못했고, 애늙이로 전락했다.

광주 정신과 DJ 김대중 정신을 계승하고, 호남 정치를 복원하라




Posted by NJ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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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정치2014. 1. 11. 10:28

1월 14일 박종철 열사 27주기를 맞아, 좌천당한 윤석열 검사, 권은희 수사과장을 생각하다.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던 경찰 검찰 공무원이 박근혜 독재와 싸운다?


현재는 진행중인 역사이고, 역사는 현재의 시작점이다. 그러나 역사적 사건이 현실에서 그대로 반복되지는 않는다. 박근혜 정통성 부재는 516군사 쿠데타와 닮았고, 박근혜 공약사기 사건은 박정희가 쿠데타 이후 군대로 복귀할 것이라는 거짓말,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번이 마지막 출마입니다”라고 말해놓고 당선되자 유신헌법을 만들어 영구집권 획책했던 박정희의 거짓말과 닮았다.


그러나 실상을 보면, 박근혜의 친-자본 정책은 관료주의적 자본통제를 했던 아버지 박정희를 서서히 죽일 것이다. 또한 박근혜의 유신독재로의 회귀라는 평행이론이 있지만, 표창원 경찰대 교수, 권은희 수사과장, 윤석열 검사 등이 지난 1년간 보여준 ‘대통령 권력에 대한 저항’과 공무원으로서 정치적 공정성 실천은 이 암울한 ‘대박’의 얼음장 밑으로 온천수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1987년 1월 14일, 시위하는 학생 노동자 시민들을 잡아 가두던 전두환 파쇼의 용역깡패였던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은 박종철(당시 서울대 언어학과 대학생)군을 물고문해서 죽인 날이다. 경찰과 검찰의 상징적 이미지는 한국 현대사에서 독재와 자본권력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법과 질서’의 이름으로 구속시키고, 손해배상 청구를 통해, 사람 피를 말려 죽게 만드는 고문관의 이미지였다.



( 6월 민주화 운동의 촉매제가 된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 장례식에서 아버지 박정기 옹의 '종철아 잘 가 그래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대이. 말씀은 많은 이의 눈물을 적시게 했다)

그런데 2012년 12월 대선의 중대선거 범죄 사건를 고발하고 그 진실을 구사한 권은희 수사과장과 윤석열 검사는 기존의 경찰과 검찰의 독재-꼭둑각시가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윤석열 검사는 헌법질서를 파괴하는 중대한 선거범죄자(국정원)를 구속 수사해야 한다고 국감장에서 역설했다. 그런데 그 국감장에서 새누리당 의원들은 윤석열 검사가 상명하복 규율을 위반했다고 역공을 취했다. 그리고 그 이후 윤석열 검사는 1개월 중징계를 받았고, 급기야 어제 검찰 인사에서 대구고검이라는 한직으로 좌천되었다. 권은희 수사과장도 사법고시 합격자 출신들은 대부분 무난하게 도달한다는 총경 승진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1987년 1월 14일 한국의 경찰은 민주화운동을 하던 대학생 박종철을 고문 치사시켰다. 그 이후 27년, 한국 경찰과 검찰 공무원 권은희 수사과장, 윤석열 검사 공히 “상부의 위법한 지시는 따르지 않는다”고 말했다. 권은희 수사과장은 “당신이 광주의 경찰이냐”고 욕을 하던 새누리당 의원을 향해 “대한민국의 경찰”이라고 답변하기도 했다.

표창원 교수, 권은희 수사과장, 윤석열 검사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아직 한국 경찰 검찰 수사독립권과 그 제도의 민주화 길은 멀다.





(한국 민주주의의 성숙도를 증명해 준 하나의 사건으로 기록될, 권은희 수사과장: 그는 대선 과정에서 국정원의 댓글 사건을 수사하지 말라는 김용판 서울경찰청장의 외압이 있었다는 것을 양심적으로 증언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지 않은가? 민주당 지도부를 비롯해서 진보정당 (심지어 좌파까지도)은 상대적으로 국정원과 국군의 대 시민 온라인 전투 수행의 심각성과 그 위법성에 대해서 둔감하게 대처한 점이.


지금까지 언론에 보도된 대선 중대선거범죄 사건을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사건과 비교해 보자. 노무현 전 대통령은 “다가올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에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발언을 했다. 당시 한나라당(현 새누리당)과 민주당은 이 발언을 문제삼아 대통령 탄핵을 했다. 단순히 “지원하겠다”는 미래 의지 표명으로도 탄핵을 당했다. 2012년 대선에서는 국정원과 국군을 비롯한 다른 국가기관들이 명백히 대선에 개입했다는 실제 증거들이 있었다. 만약 현재 야당들이 국회의원 3분의 2 이상 의석을 가지고 있었다면, 박근혜 당선자를 탄핵하거나 당선 무효화를 선언할 수 있다.




(이번 대선 선거 중대 범죄 사건을 알리는데는, 80년대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주체들과는 상당히 다르게, 경찰, 검찰, 경찰대학 교수 등 공무원들의 양심적인 업무 수행에서부터 폭발되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사진은 중도보수임을 표방하는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

많은 비교정치학자들이나 법학자들이 지적했듯이 한국이 대통령제가 아니라 유럽정당정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의원내각제를 취하고 있었다면, 현행 의회를 해산하고 선거를 다시 치를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현실과 한국 대통령제도와 국회 제도의 특성을 고려했을 때, 현실적으로 취할 수 있는 행동은 무엇인가?



모든 야당들은 의원직을 내던질 각오로 싸워야 한다. 대선 선거 중대범죄 문제를 선차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헌정질서 파괴자들을 엄중 처벌하고 나서 그 이후에 '민생 현안'을 놓고 새누리당과 경쟁해야 한다.


민주당이나 심지어 진보정당에서도 박근혜가 말한 것을 그대로 따라하는 경우도 있다. “국정원이나 국군 사이버 사령부 댓글이 대선 결과에 미친 영향은 지극히 미미하다”는 것이다. 민주주의 정신은 결과 지상주의가 아니다.


또 이런 전략전술가들 이야기도 있다. 대선을 다시 할 수는 없다고들 한다, 대선을 해도 새누리당이 이긴다고 한다. 지금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는 부차적인 문제이다. 민주당 후보 문재인이 당선되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지금 대선 선거 중대 범죄자 처벌하자는 게 아니다. 문제의 핵심은 국정원과 국군이 국민을 상대로 심리적 전투를 벌였다는 것이다. 양심과 정치적 자유를 향해 M 16 총알을 난사했다. 민주주의 기본권인 정치의 자유권을 지키자는 것이다. 1961년 516 박정희 군사 쿠데타에서 시작해서 1993년에서야 종식된 군사독재 하에서 수많은 희생과 투쟁을 통해 획득한 그 민주주의 참정권과 자유권리를 지키자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민주당 김한길대표는 ‘대통령 선거 결과 불복’은 아니라고 했다가, 국정원 수사 특검을 2013년 안에 실시하라고 했다가, 갈팡질팡하다가, 결국 새누리당과 '국정원개혁' 누더기 법안 타협해 버리고 말았다. 1월 13일 기자회견에서 특검수용하라고 '공갈포'를 쏠 예정이라고 한다. 많은 이들이 민주당 김한길 대표의 진짜 의도가 뭔지 의심하고 있고, 이번에도 억지춘향처럼 끌려나와 천막 농성 시늉하는 것 아닌가? 불안해 하고 있다.




(법과 질서를 강조하는 보수 우익의 논리 앞에서, 오히려 현행 법대로 수사하다 보니, 국정원 댓글이 선거 중대 범죄였다고 증언하고 있는 윤석열 검사. 그는 국정원 진실 증언으로 1개월 정직 중징계를 당하고, 대구 고검으로 좌천 발령되었다.) 


다른 한편 진보정당이라고 자임하는 정의당, 노동당 등은 대선 중대 선거범죄 사건을 ‘절차적 민주주의’나 ‘87년 6월체제’ 틀에 국한시키고, 일부 민주당 지지 촛불 시민들의 정치적 아우성 정도로 격하시키는 오류를 범했다. 2013년 여름까지 수사가 진행되지도 못한 상황에서 뉴스타파 등 언론보도 정도에서 터져나올 때까지, 국정원 국군의 대 시민 심리전투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윤석열 검사 등이 국감장에서 밝힌 증언은 국정원과 국군 사이버 사령부 등이 2012년 대선에서 ‘헌정 질서’를 파괴하고 대한민국 헌법 자체를 유린했음을 보여주었다.


양심적 시민의 입장에서 13일 김한길 기자회견 하는 날, 민주당 점거라고 하고 싶은 심정이다. 검찰청 경찰성 인사과에 가서 항의 방문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한국정치사에서 검사란, 검찰청이란, 독재 반대, 노동자 해방과 인권을 주장하면 '용공,종북' '빨갱이' '국가보안법' '집시법위반' '손해배상청구'로 시위자들과 노동자들을 구속했던 자들이다. 그런데 그렇게 각인된 검사나 떡검찰청에서, 윤석열 검사같은 '그냥 법대로' 수사하고 보니, 12월 대선은 중대 선거 범죄가 발생했으니, 국정원 직원들 4명을 구속수사해야 한다고, 국정감사장에 나와서, 7시간을 넘게 증언했다.


이런 광경을 지난 40년, 아니 한국 정치사에서 본 적이 있는가? 1월 14일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한 지 27년이 되는 날이다. 1987년 그 날은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이 박종철을 물고문 전기고문했고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고 하던 날이다. 한국 정치사에서 검찰 검사란, 이렇게 경찰이 고문한 것을 용인하고 명령하던 권력이었지 않은가? 독재의 시녀였던 검사들이 대선선거가 중대범죄이고 선거법위반이라고 전 국민들 앞에 나와서 TV 로 생중계해주고 있지 않은가?




(양심적인 종교인들과 진보정당들이 대선 불법 선거 엄정 처벌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집권 1년도 채 되지 않아 이러한 정권 정통성 논란이 된 것은 유례가 없었다) 


절차적 민주주의건 형식적 민주주의건 민주주의 발전 없이는 노동운동, 좌파정치 성장할 수 없다. 87년 6월 항쟁없이 7월8월 노동자 대투쟁 있을 수 있었겠는가? 노동운동 진보정당 운동없이 민주주의 내용이 심화되고 실질적인 민주화 방향으로 전진할 수 있겠는가? 기계적인 이분법과 도그마화한 선차성 (형식보다 내용, 정치적 민주화보다 경제적 민주화)을 단순도식화하지 말라 ! 절차적 형식적 민주주의 쟁취를 위해서도 수많은 희생과 피가 필요하고 한국사에서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격언성 문장도 있지 않았는가?



박근혜는 특검 수용하지 않는다. 원세훈 김용판 법정 판결 이후에 다시 한번 거짓말과 허언으로 이 상황을 모면하려 할 것이다. 진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전면에 나서서, 현재 모든 야당들 대표는 사퇴할 각오로, 모든 현직 국회의원들은 사퇴할 각오가 없다면, 박근혜의 정통성 시비 싸움에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할 것이다.


1987년 1월 14일 전두환 독재의 시녀였던 경찰은 23세의 청년 박종철의 민주화 희구와 그 양심을 물 속에 처박아 질식시켜 죽였다. 27년 이후 그 독재 시녀임을 거부하는 경찰 표창원, 권은희, 검찰 윤석열 검사 등은 공무원의 ‘양심’과 ‘자존심’을 우리들에게 보여줬다.


역사는 단순히 반동으로 복고로 회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Posted by NJ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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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학규

    좋은 글 잘 봤습니다.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첫번째 사진설명을 좀 바꿨으면 합니다. 호헌선언이전에 박종철군고문치사사건이 발생했습니다~~

    2014.01.11 15:57 [ ADDR : EDIT/ DEL : REPLY ]
    • 예. 문장이 그렇게 해석될 수도 있겠군요. 전두환 호헌 선언은 아마 제 기억에도 4월이었던 것으로... 원래 문장에서는, 6월 항쟁을 더 촉발시키는 역할을 한 것이 박종철 열사의 죽음이었다. 전두환 호헌 발언 이후에. 이런 의미였습니다.

      2014.01.11 22:01 신고 [ ADDR : EDIT/ DEL ]

김일성주의 혹은 주체사상: 김정진 박은지 논쟁점과 논의 방향 (2)


(1)은 김정진의 문제의식에 대해서, (2)는 박은지의 문제의식과 해명에 대해서 쓴다. 박은지의 해명을 보면 간단하다. 질의자들이 이렇게 물은 것같다. 김일성주의가 도대체 어떤 매력이 있어서, 좀 배우고 이정희 통진당 대표처럼 서울대도 나오고 인문계 여자 수석도 하고 변호사도 하는 사람이 주체사상파인가? 박은지부대표가 질의자에 앞서서 “주체사상의 매력에 대해서” 주장을 하지 않았다고 해명한다.


이런 대화 맥락과 박은지의 해명에 대해서는 굳이 다시 의문을 제기하거나 설명을 요하지 않을 것이다. 김정진 전 부대표가 이러한 ‘대화 맥락’에 대해서 고려해주었으면 좋겠다.


1. 당 간부들 내려버지다. 정당은 코디네이터가 필요하다


글쓴이는 박은지 인터뷰의 문제점을 다른 곳에서 찾고자 한다. 당대표나 대표단,그리고 당 주요간부들의 정치활동을 내용적으로 ‘도우미’역할을 할 수 있는 당내 ‘연구소’나 ‘정치토론 그룹’ 혹은 정치조직(정파)의 부재가 더 큰 문제의 원인이다.


얼마전 장석준 부대표가 프레시안에 기고한 <김정은이 망해야 한반도가 산다! >는 글의 전반적 내용은 노동당이나 한국진보정당이나 좌파정당의 대북정책이나 평화정책으로 수용되기 힘든 내용의 글이다. 박은지 부대표의 경우도 썰타임 출연이나 발언 내용 역시 당원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당 정책의 대중화에는 별로 기여하지 못했다고 본다.


당 간부들의 정치적인 활동은 장려되어야 하고 당원들은 적극적으로 같이 협조해야하겠지만, 현재 그리고 지난 2년간 노동당의 당 간부들은 ‘당의 코디네이터’ 없이 그냥 개별적으로 혼자 메이크업하고 혼자 알아서 옷입고 혼자 스케쥴 잡고 언론에 기고하거나 출연하거나 했다. 

진보신당-노동당은 과거 노회찬 심상정 전대표의 당과 독립적인 언론플레이의 문제점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거나,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거나,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지 못하고 있다. 


[고민과 대안] 당 안에는 4-5개 다른 세대들이 공존하고 있다. 내 관심사는 한국정치를 좌지우지하고 있는 속칭 386세대 (*80년대 광주항쟁 세대의 정신은 이제 많이 퇴색되었지만)들을 흉내내지 않고, 70년대,80년대,90년대 리버럴리스트 정부의 출발점인 김영삼 정부 이후는, 그 이전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군사정부와는 차이가 난다. 그리고 또 그 이후 김대중-노무현-이명박 15년은 그 내부에서 분화가 또 발생한다. 이러한 정치적 경험의 차이를 고려해서, 좌파 정치가를 어떻게 집단적으로 부각시킬 것인가? 이다.


2. 박은지의 인터뷰와 그 내용에서 향후 토론주제로 뽑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통합진보당, 혹은 NL 로 불리는 운동권들이 한국 진보진영에서 영향력을 어떻게 왜 행사해왔는가? 의미와 한계는 무엇인가? 이런 주제일 것이다.


먼저 하나 바로 잡고자 한다. 통합진보당 ‘내란 사건’ ‘종북몰이’ 사건이후, 김종철 전 부대표와 박은지 부대표가 모 종편방송에서 출연했다. 박은지부대표가 NL의 약자를 National Liberty (민족/국민 자유)라고 했는데, NL은 NLPDR의 약자로 (National Liberation People's Democratic Revolution 민족해방 민중민주혁명)의 준말이다.


언론에서도 그리고 많은 운동권들이 잘못 알고 있는 PD 역시, NLPDR이다. 신신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은 PD중의 하나의 패러다임이다. 그리고 이 두가지 NL,PD만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패러다임들도 있고, 이 둘의 차이점만 부각되었지만, 공통적인 이론적 실천적인 약점들과 한계가 존재한다.


NL이나 PD 문건이나 그 이론은 완성된 체계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두 패러다임은 ‘사회주의로 이행과정’, 그리고 비-자본주의로의 발전 가능성을 목표로 하는 것인데, 89년~91년 사이 현실사회주의 체제 붕괴로, 급속하게 대중적 파급력을 잃게 된다. 80년대말, 90년대 초에도 이미 NL, PD론 (둘다 NLPDR -> socialism 사회주의로 이행)의 한계는 지적되었다. 이게 2004년 민주노동당 10석 이후 다시 대중에게 소개된 것을 보고 약간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과거 사회구성체 논쟁이 언론에 다시 떠올랐기 때문이다. 


남의 나라 혹은 북한 정치변혁 경험들을 근거로 만들어진 NL,PD론은 구체적인 정치,사회,경제적인 예증이 부족한 채, 그 사회구성체 논쟁이 시들어졌다. 주사파 NL은 식민지 반봉건론, PD는 라틴아메리카-소련 내부 논쟁들을 바탕으로 ‘종속 강화’ ‘독점 심화’라는 테제를 가지고 있었으나, 이 두 패러다임은 한국 자본주의, 한국 지배 계급 등의 구체적인 변화과정을 설명하는데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 두 패러다임의 한계,그리고 사회과학 방법론으로서도 천박한 이론적 토대에도 불구하고, ‘종속’문제와 그 변화,한국 자본주의의 자본축적 구조 등은 새롭게 조명될 필요가 있다. 예를들어 '종속' 개념으로 삼성 자본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초국적 자본비율의 문제나 지배권 등을 설명할 수 있는가? 등 


(NL)PDR 은 사회주의로 이행 (transition)이라는 정치적 프로그램을 전제하고 있다. 그리고 정치학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정치적 주체 문제를 조악하게 조야하게 “계급,계층분석”에 기초하고 있다. NL, PD 두 패러다임 공통적으로 한국자본주의의 ‘분화 differentiation'에 대해서는 설명해내지 못했다. 사회과학적 설명 용어와 방법론으로서 부적합하거나, 패러다임의 하드 코어에 문제가 생겼다.


이 이야기는, 80년대 말 90년대 초 이야기이다.


그 당시도 그 이후에도, 한국 자본주의 분화와 정치-경제의 관계, 한국 노동자 계급의 의식의 발전과 분화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와 보고서는 많지 않았다. 대부분 NL이건 PD건 정치세력을 앞세워, 이론과 실천적 조사를 바탕으로 자기 패러다임을 혁신해야 하는데, 정치 세력들이 그 ‘이론적 작업’과 ‘실제 연구 조사’를 대신했다. 신념으로 버틴 점은 존경해야 하나, 현실 정치에서 무딘 창으로 버티는 것은 백전백패를 자초한다.


3. 주제를 조금 바꿔서, 그렇다면 왜 NLPDR 혹은 NL 그룹이 한국 운동권의 다수가 되었는가?


이것은 수많은 설명들이 있을 수 있어서, 학생운동사 맥락에서 한 가지만 짚고 다음 기회에 논의하기로 하겠다. 아직까지 한국 학생운동에 대해서 제대로 된 연구는 많지 않다. 부끄러운 현실이고 한국 학계 자체가 ‘사회과학’ 학파가 없다는 게 직접적인 원인이기도 하다. 미국, 캐나다, 독일, 프랑스는 예를들어 광주 518, 87년 6월항쟁, 7-8월 노동자 대투쟁, 노무현 현상 연구, 민주노동당의 성공과 실패 등에 대해서 박사학위를 써서 교수가 된다. 한국에 이러한 연구가 없다는 게 아니다.


87년 충남대에서 결성된 ‘전대협 (전국 대학생 대표자 협의회)’ 의 영향과 전국 대학으로 NL 그룹의 확장이 그 다수파 형성에서 가장 중요한 원인들 중에 하나다. 그리고 87년 대선 이후, 노태우 정권 하에서 학생운동은 ‘제도화’의 길을 가고, 소위 말해서 ‘학생회의 대중화’, 이것은 전두환 체제와는 질적으로 다른 상황을 초래한다. 학생운동권의 제도적 권력 (institutional power)가 학생사회에서 뿌리내리는 계기가 되었다.


80년대 대학생 운동을 한 사람들과 한번 대화를 해보라, 그들은 학번 차이를 대면서, ‘내 때는 더 엄혹했다’고 하거나, 전두환 시절에 투쟁했던 세대와 노태우 정권 하에서 투쟁했던 세대들 사이에 경험 차이 등등...


(전대협의 결성은 학생사회에서 제도적 권력이 형성된 계기를 마련해줬다. 반파쇼 정치 투쟁의 운동가들이 학생회라는 제도적 기구들을 운영해 나가는 정치적 출발점이었다) 



전 세계 정당사, 사회주의운동사, 식민지에서 해방운동사, 인종차별 운동 등, 정치적 행위는 ‘가장 사회과학적으로 정교하고 올바른’ 그런 노선이 반드시 주류를 형성하는 게 아니다.


돌이켜보라 ! 박종철의 죽음, 이한열의 죽음, 그들의 나이가 만으로 치면 20세,21세가 아니었던가? 지금 우리 당원들 중에는 아들 딸 중에, 조카들 중에, 동생들 중에 이 나이 때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죽음에 한 정권의 정당성 자체가 흔들거리던 시절이 1980년대 전두환 정권 하에 일이다. 학생운동권에서 ‘이론의 정교함’ 보다는, 실제 ‘행동과 반-파쇼 집단 학살집단에 대한 직접적인 물리적인 투쟁’ 자체가 사회과학이었다.


학생운동은 1988년 노태우 정권이 수립된 이후에도, 합법적으로 당선이 된 정권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정치적 ‘정당성’과 ‘윤리성’의 우위를 여전히 주장하게 되었다. 노태우 정부의 가장 큰 특징은 ‘합법성 legality'의 획득과 ’정당성 legitimacy'사이의 충돌이었다. NL이건 PD건 ND건 이 합법성 측면보다는 후자, 노태우 역시 광주학살의 원흉이자 파쇼의 연장으로 파악하고 그 정부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6공화국 하에서 학생운동은 전두환 파쇼와 비교해서, 학교에서 자유 선거를 통한 ‘학생회’라는 ‘제도적 권력’을 가지고 되었는데, 왜 NL 그룹이 가장 ‘다수’가 되었는가? 앞으로도 더 연구해야 할 지점이 이 두 가지 상관관계이다.


민족주의적 경향 (일제의 잔재청산, 미국 제국주의의 발견 : 88년 올림픽에서 관중들이 소련을 응원하고 미국 성조기에 야유보내는 반-미국 정서 anti-American sentiment), 소위 주체사상에서 말하는 품성론, 항일 유격대식 대중노선 등은 여러 가지 요소들 중에서 하나에 불과하다.


많은 사람들이 NL, PD를 ‘사회주의적 지향과 정향 orientation' 이라고 말하지만, 정작 6공화국 노태우 정부 시절에, 이 학생집단의 제도적 권력이 누린 것은, 자유민주주의적 ’정치 실천, 다시 말해서, 전두환 폭압에 누리지 못한, 정치적 표현의 자유였다. 실제 그 운동 주체들이 사회주의적 지향 (NLPDR은 사회주의 체제로 전환을 그 목표로 하고 있다. 사노맹으로 표현된 ND 역시 2단계 혁명론이지만, 사회주의 이행론이다) 을 했고, 또 학생운동 뿐만 아니라, 학생사회 외부와 연계를 맺었기 했지만, 학생사회 내부 정치에서 ‘제도적 권력’ 사용이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에 하나였다.


이들이 나중에 사회에 진출해서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지지세력의 주축이 되거나, 실제 정치가되어서도, 이러한 학생사회의 ‘제도적 권력’의 경험을 그대로 실천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대중적 동원능력을 보여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학생사회 때와 마찬가지로 ‘정치 내용의 빈곤’을 ‘제도적 권력’으로 대신한다.


그렇다면 6공화국 노태우 정부 하에서 전대협을 비롯한 nl 다수파 (주사파를 포함), pD, ND등은 위에서 말한 노태우 정부와 전두환 정부의 ‘통치’차이를 인식하고 ‘합법성’과‘정당성’ 사이의 긴장을 꿰둟어내는 정치 전략을 만들었는가?


89년 몰타 회담 (고르바초프와 조지 부시의 회담)으로 인해 얄타체제 (냉전 체제)의 해체부터 91년 사이에 벌어진 국제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 등이 미치는 정치적 영향에 대해서 제대로 인식하거나 설명하거나 이에 맞는 정치적 프로그램들을 만들어 냈는가?


91년 강경대 타살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민민운 (민족민주운동이라고 약칭)의 위기론이 한창 논의되고, 사회주의 대 사민주의 논쟁이 발생하던 시점에, 이에 대한 답변을 했는가?


사실 그 당시 우리의 문제이기도 했지만, 이러한 질문들과 과제들은 당시 학생운동가들의 지적 실천적 범위를 뛰어넘는 문제였고, 당시 한국 지식계의 수준을 고려했을 때, 이 문제들을 정치적 담론으로 여론화 대중화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4. 박은지 부대표가 말한 주체사상 “사람의 가능성을 믿고 그 힘을 긍정하는 사상”에 대해서

- 소련식 교과서는 마르크스에 대한 왜곡이었다.

- 소련식 교과서를 극복했다는 주체사상은 허수아비 때리기를 하는 것이다.


이 주장은 굳이 주체사상만이 아니라, ‘창조 Creativity' 를 강조하는 사람들, 박정희의 교육헌장과 ’하면 된다‘는 정신, 혹은 안철수식 ’창조적 혁신‘, 박근혜의 ’창조 경제‘ 모두다 ’사람의 가능성을 믿고 그 힘을 긍정하는 사상‘이라는 점에서, 형식적으로는 같다.


물론 북한의 주체사상은 “계급과 민족” 패러다임인데, 왜 주체사상을 박정희, 안철수, 박근혜와 동급으로 놓느냐고 항변할 것 같다.


주체사상의 이론적 근거 자체가 오류다. 주체사상 주장은 다음과 같다.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 철학의 근본문제를 물질과 의식의 관계 ( matter-consciousness relations)로 설정했다. 그런데 마르크스-레닌주의는 ‘물질’과 ‘의식’관계에서, ‘물질이 의식보다 선차적이고 우위를 갖는다. 이러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물질의 의식에 대한 선차성 (priority)은 인간의주체성, ‘인간의 주체적 파워, 힘과 능력’의 중요성을 해결하지 못했다.


그럴싸하다. 몇 년전에, 미국 최장집-박상훈 등을 따르는 연구자들이 정치의 선차성 (the primacy of politics: 정치가 가장 중요하다) 를 쓴 미국 비교정치학 교수 쉐리 버먼(Sheri Berman) 을 한국에 소개하면서, 좌파 운동권들이 ‘정치’를 모른다고 야단쳤을 때, 그 ‘선차성’ 개념과 위 선차성 개념은 동일한 말이다.


주체사상을 서술했다는 황장엽의 이론적 깊이의 한계이기도 하고, 정보 수집의 한계이기도 하다.


사실 주체사상이 말하는 마르크스-레닌주의 교과서 (소련 사회과학 아카데미에서 만들어낸 검인정 교과서로서, 그 기원은 부하린의 공산주의의 ABC, 그 이후 스탈린의 역사적 유물론 테제 등에 있다. 이는 나중에 설명하겠음)에서 말하는 ‘물질’과 ‘의식’ 관계가 철학의 근본문제라 하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


주체사상이 ‘물질-의식’ 대립항이 아니라, ‘세계-인간’으로 근본문제를 전환시켜, 마르크스 레닌주의가 해결하지 못한 인간의 주체성 (subjectivity)를 해결했다고 하는 것은, 이중의 오류이다. 첫 번째는 소련 사회과학 검인정 교과서 (공산당 명령을 따르는 연구소)에서 마르크스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기반한 ‘물질’ -‘의식’이 철학의 근본문제라고 못박아놓고,


두 번째는, ‘물질’ -‘의식’ 대립항이 풀지 못한 퍼즐과 난관 수수께기를 ‘세계-인간’ 대립항이 풀었다고 선전하는 것 자체가 자화자찬격이다. 세계에 대해서 인간의 주체성 즉, 의식성, 창조성,자주성을 더 부각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 주체사상 답변이 잘못된 문제설정 "물질과 의식"의 관계에 대한 하나의 답 (물론 오답이지만)은 될 수 있겠지만, 철학적 주제들에 대한 답변이 되기에는 불충분하다. 철학적 체계로 인정할 수 있지만, 수많은 증명부담들을 안고 있다. 철학에서 다루는 수백가지 테마들을 이 인간-세계 대립항으로 풀 수 있다는 것인가? 


그리고 자본주의의 변화와 역동성, 그 축적 구조를 어떻게 설명가능하단 말인가? 자기들이 경험하지 않은 세계와 자본주의에 대한 연구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수많은 중요한 사회과학적 주제들을 인간-세계 대립항으로 진단도, 해결도 할 수 없다. 




(1940 년 조제프 스탈린이 서술했다는 : 변증법적 역사적 유물론 교과서: 마르크스에 대한 선택적 이해와 왜곡의 공식적 출발점이 된 책이다. 1980년대 한국에 소개된 마르크스 입문서, 철학개론은 대부분 이 스탈린의 기본골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DIA-MAT의 효시이자, 마르크스 사상의 박제화 왜곡의 공식화 선언이었다)


이 주체성 (subjectivity) 문제는 제 2 인터내셔널 이후, 마르크스에 대한 혹은 사회주의자 내부에서 논쟁된 ‘경제 결정론 economic determinism'에 대한 문제제기로, 당시 중요한 주제였다. 


그런데 80년대말, 90년대 초, 한국에 소개되고 번역된 마르크스 입문서, 넓게 봐서 사회주의체제의 토대를 이루는 철학 교과서들은, 대부분 소련 사회과학 아카데미나 동독, 중국, 주사파 NL의 경우는 평양에서 출간된 교과서들이었다. 이건 NL이건, PD건, ND건, 과학적 사회주의자건 다 마찬가지로 안고 있었던 한계였다.


학생운동권, 노동운동가들의 헌신적인 정치적 실천, 분신까지 포함한 그 숭고한 정치적 투쟁들과, 이론 사이에는, 이러한 엄청난 문화적 지적 간극이 있었다. 그것은 2014년 1월 현재 평가가 아니라, 25년 전 이야기이다.


25년, 아니 길게 잡아 30여년이 흘렀다. 한 세대가 바뀌었다. 한국 전쟁이 미친 지식인 사회, 이론가 사회, 좌파 정치권 사회, 학생운동가, 시민운동, 노동운동, 그리고 진보정당, 좌파정당... 우리가 생각한 것 이상이다.


자기들 스스로 학파를 만들어서, 지식노동이건 육체노동이건 그 무슨 노동이건간에, 학파를 형성해서, 코리아라는 한국 현실 (social reality)을 사회,사람,사회구조,의식 등을 설명하고 연구하는 사회인식론(social epistemology)를 갖추기도 전에, 90년대 긴 암흑기가 있었고, 이런 것들을 지속적으로 연구하기 전에 97년 IMF 긴축통치로 한국은 운없게도 세계에서 최단시간에 가장 살벌한 자본주의적 신자유주의 체제를, 80년대 민주화 세력 (김대중정당과 80년대 학생운동권 주류파)이 그 악날한 반-민중적 반-노동자적 어메리칸 스탠다드 자본주의를 실천해버렸다.


사람들은 자기 정치적 정당성 때문에,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신념, 정치적 방법론, 조직론, 이론적 정당화 등에 대해서 게을리 한다. 왜냐하면 현실정치는 늘 나보다 우리보다 더 나쁜 세력이 존재하고 있고, 그들이 늘 음모를 꾸미고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기 때문이다.


정치는 늘 실천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야구는 9회로 끝나지만, 정치세계는 쉼없는 연장전이다. 9회 이후에 ‘이론’으로 야구하나? 정신력으로 버틴다. 제한된 숫자 선수들로 버티는 것이다. 그것이 늘 정치적 현실이다.


하지만, 역사에서 현실에서 정치적 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현실을 설명할 인식론을 우리 스스로 가지고 있어야 한다.


돌직구 하나로 승부하는 투수보다는, 체인지업과 슬라이더를 장착하고 돌직구를 가진 투수가 실제 경기에서 이기니까.


(1922년 경, 부하린 Buhkarin 이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소련 대중들을 위해 서술한 공산주의의 abc : 마르크스 엥겔스 책들이 노동자 해방의 성전으로 격상화되기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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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학교 평가의 논

    2014.04.15 01:50 [ ADDR : EDIT/ DEL : REPLY ]
  2. 그냥 NL이 다수를 차지하게 된건 생활 학문 투쟁의 공동체라는 학생회중심의 학생운동을 했다는점으로보고 PD는 직업적 혁명가의 길을 가려고 했다는 점에서 학생회중심의 운동이 다수를 차지하기 편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편협하게나마 듭니다만.. 뭐 주사파 논쟁은 논외로 하는것이 맞을것 같고.. 하다보면.. 한국운동권에 주사파가 존재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되어지니까요..

    그냥 지나가다 코맨트 남깁니다.

    2018.02.14 14:48 [ ADDR : EDIT/ DEL : REPLY ]

518광주는 '비극'이 아니다. 우리 사회의 온갖 고름들이 터져나온, 아니 터뜨린 진정한 생존의 출발점이다. 유행처럼 번진 힐링(치유)은 고립된 자기 성공철학으로 귀결되기 십상이다. 멘토 비지니스는 획일화된 성공기준을 사회적으로 승인받는 고대 그리스 소피스트들의 상업적 정치적 공연이 되어가고 있다. 


518광주는 비극이 아니다. 518 광주, 5월 18일부터 5월 27일, 10일간의 벌어진 비극적 사건이 아니다. 518광주를 진정한 생존의 출발점이라고 했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살아가는 방식, 우리 모두는 아닐지라도 518 참여자들의 크고 적은 실천들의 파장은 우리들의 살아가는 방식을 바꿨다.  518 이전의 정치, 국회, 노동, 미국식 자유민주주의, 군부, 도시 빈민, 아줌마, 공동체 정신, 좌익, 한국역사 등에 대한 관점을 바꾸게 된 것이다.


518 광주, 그 10일간은 우리가 이상화할 수 있는 공동체 정신, 이 세상의 모든 고등종교에서 '경전화했던' 개념들, 예수의 '이웃사랑', 부처의 '자비', 공자 맹자의 '측은지심'과 '시비지심'이 광주 금남로와 충장로에 모인 사람들을 통해서 현실로 드러났다. 



(1980년 5월 광주항쟁 당시, 계엄군이 퇴각하고 난 후에, 광주 시민들이 밥을 해서 서로 나누주고 있다. 시민군의 총은 쌀과 밥과 떨어질 수 없다. 밥을 하는 사람들이 왜 길거리로 나왔는가? 그들의 정치적 행동 뒤에 숨은 정치철학은 무엇인가? 우리가 2013년 518 광주를 살아있는 정치로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 


힐링과 멘토 비지니스는 고립화된 개인들의 이야기와 전략들을 기계적으로 병렬적으로 나열할 뿐이다. 현실에서는 힐링과 멘토 전략들을 서로 싸우고 상출하고 원리적으로 또다시 대립할 수 있다. 왜냐하면 힐링과 멘토의 출발점이 고립된 자아, 이 세상과 맞서 싸우는 파편화된 '나'라는 것에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힐링과 멘토의 주인공인 파편화되고 고립된 '나'는 금남로와 충장로라는 요새 유행하는 '파크', 혹은 '광장'과 거리가 멀다. 그 힐링 멘토 비지니스는 우리 개별화된 파편화된 여러 '나'들, 다시 말해서 공적인 '자아'의 행복에 대해서, 또 공동체의 보호와 방어에서 출발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518 광주를 '피상적으로 정치'하는 사람들이, 김대중 전 대통령과 연관짓는다. 또 반대로 김대중과 노무현을 '좌파'라고 매도하는 일본 아베식 한국우파들이 있다. 518 광주를 고정된 1980년 광주로 고정시킨다면 김대중 전대통령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33년이 지난 518 광주를 뒤돌아볼 때, 그 518 광주의 실천주역들이 남긴 '정치 철학', 즉 자기 공동체의 수호와 방어, 그리고 쌀 한톨이라도 나누려는 공생의 철학은, 고 김대중 대통령의 실제 통치와는 오히려 정반대였다. 1997년~2002년 고 김대중 대통령의 재임기간, 한국사회는 역설적이게도 김대중을 탄압했던 박정희 독재시절보다 더 친미적으로(어메리칸 스탠다드라는 이름으로) 돌진했다. 또 미국식 자본주의의 삶의 방식(강자를 숭배하고 약자는 그저 루저가 되는)이 우리 일상 곳곳에 파고들었다. 아이들까지도 '너희집 아파트는 몇 평이냐?'가 친구되기 직전에 확인해야 하는 질문이 되었다. 


518 광주는 그 사실에서부터 정치적 의미까지 새롭게 해석되어야 한다. 새롭게 해석되기 전에 역사적 진실 역시 계속해서 발굴되고 발표되어야 한다. 이름없이 죽어간 사람들부터, 발포자까지 밝혀내야 한다. 박근혜 정부만을 그 비판대상으로 삼고, 그 나머지는 다 '우리편'이라는 발상과 실천은 무의미하다. 안철수 멘토 비지니스 몰아주기에 불과할 것이다. 518 광주를 재해석하자는 취지는 옳다.  


'숭배받지 못한, 알려지지 않은 영웅들 Unsung Heroes/Heroines' 이 있다. 이들 모두가 실은 윤상원이다. 


518 광주는 비극이 아니다. 10일간 광주를 움직인 사람들, 경찰서, 군대, 공무원 조직 등 기존 지배질서가 없어도 광주는 세계에서 가장 평화로운 마을, '정'을 나누고 '밥'을 나누고 '김치'를 나누는 삶의 터전이었다. 왜냐하면 광주와 광주 인근 전남 도민들은 임진왜란 (조일전쟁)처럼, 마치 왜적이 침입한 것으로 그 광주사태를 인식했기 때문이다. 


(한 영화감독에 의해서 재조명된 광주 항쟁 다큐멘타리, 오월애. 포스터가 인상적이다. 518 광주의 진정한 부활은, 한정된 몇개의 공간, 예를들어서 광주 도청 등에만 촛점을 맞추는 게 아니라, 수많은 미시적 공간들에서 자기 역할을 해낸 주체들이 왜 그런 실천을 해냈는가를, 그들 스스로 말하게 하고, 아니면 우리가 찾아서 발굴해야 한다. ) 



518 광주 현재적 의미는, 상품화된 힐링과 멘토를 넘어선 적은 실천, 나눔의 삶, 그것이다. 이 공자같은 말씀, 부처님같은 평범한 말, 2000년 민주노동당 이후 2012년 통합진보당 패배와 붕괴까지 삶을 뒤돌아본다면, 이 나눔의 삶이 얼마나 힘든가를 우리는 알 수 있다. 518광주 정신을 계승했다던 진보정당들이 자기 스스로 얼마나 이 나눔의 실천을 행동으로 옮겼는지 뼈저리게 반성해야 한다.  518 광주, 밥해주는 사람들의 저 사진 속의 주인공들의 무심한 표정, 그냥 무던한 표정이 부끄러울 뿐이다. 그래서 2013년 518 광주, 그 나눔의 삶이 뼈아프게 다가온다.  


  

Posted by NJ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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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광주] 윤상원 선생 아버지와 대화

: 원시 등록일 : 2004-05-14 17:03:45



시간이 흐르면 사람은 없어지기도 하고, 잊어먹기도 한다. 그렇게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삶의 의지의 끈을 놓기 때문이다. 대부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고, 어쩌면 포기한다는 말이 더 어울릴지 모르겠다. 죽음과 생의 사멸을 스스로 선택하고 거기에 ‘의지’를 집어넣는다는 것은 그래서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배와 같이 자연스런 현상은 아니다.


아직도 의문이다. 왜 윤상원은 5월 27일 새벽, 도청에서 철수하지 않았을까?


윤상원의 아버지, 윤석동(78세)님에게 물었다. 올해가 윤상원 선생이 연세가 어떻게 되냐고?

“올해 그럼 살아계시면 연세가 어떻게 되죠?”

“쉰 다섯(55)인가? 쉰 여섯인가? 그럴 것입니다.”

옆에 있던 어머니 (김인숙씨:76세)께서 다시 정정해주신다

“아, 지 엄마는 또 쉰 일곱이라고 하네요.”

항상 청년의 얼굴이었던 그 윤상원이 오십대 중반이었다는 것이다.


“요새도 들에 나가신다고 저번에 (윤상원) 어머니께서 그러시던데요?”

“고혈압이 있어서 약 먹고 그러네요.”

윤상원의 어머니께서도 무릎이 안좋아 병원에 다닌다고 저번에 그랬다.



(2005년 임곡 천동마을 윤상원 생가에 화재가 발생했다고 한다)


“요즘도 운동하는 사람들이 (윤상원 생가)에 찾아오고 그럽니까?”

“아수울 때 (아쉬울 때)는 찾아오고 그러더니만, 요새는 …….”

말이 한참 끊어졌다. “안 잊고 전화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셨다.


“대학시절 제가 다큐멘타리 찍는다고 몇 친구들과 가서 따님 (윤상원 선생 막내 여동생)과 어머니, 아버지 인터뷰했는데, 그 때 많이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시 윤상원선생 막내 여동생이 5-18 계엄령군이 윤선생 집에 와서 대검으로 온 집안을 다 쑤시고 큰오빠 (윤상원) 행방을 찾았다고 하면서, 자상한 큰 오빠를 기억하면서 울던 기억이 난다. 어머니도 한참 이야기하시다가 결국에는 우시고…)


“저도 가끔씩 왜 5월 27일, 그 날 그렇게 도청에서 윤상원 선생이 빠져 나오지 않았는가 생각해봅니다…” “예…. 그 때 우리 상원이가 고등학교 아이들을 다 불러놓고, 느그들은 다 나가라. 나가서 살아서 민주주의를 위해서 싸우고, 역사의 징인 (증인)이 되어라고 했다고 …” 한참, 아니 평생을 생각해도 답을 찾기 힘들 이 질문을, 윤상원 선생 아버지는 “우리 상원이가” 그랬다고 했다.


그러면서 볼티모오선(Bolitimoresun) 신문사 기자 마르틴 (Martin)이야기를 했다. 한국을 두어번 다녀갔고, 윤상원 생가도 방문했다고 한다. 이 마르틴 기자가 마지막까지 도청에 남아서 윤상원 시민군 대변인의 브리팅과 기자회견을 알렸다고 한다.


“그 마르틴 기자가 우리 상원이가 참 기억에 남는다고 하면서, 어떻게 한국에서 유년시절을 보냈길래, 그런 순수하고 정의로운 눈을 하고 있을 수 있느냐고, 죽음앞에 초연할 수 있냐고…합디다.”



   (윤상원 부친, 윤석동 옹 : 출처 : http://www.oneclick.or.kr/contents/nativecult/area09.jsp?cid=87948


“어렸을 때는 어떠했습니까? 의리가 많았나요?”


“그랬지요. 의리가 많고, 지 친구들이 누구한테 맞고 그러면, 아무리 힘센 놈들이라도 가서 상원이가 싸우고, 또 지보다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옷도 다 벗어주고 오고…” 윤석동 아버지는 윤상원 선생이 장남인데다, 중학교시절부터 광주에서 유학을 해서, 같이 지낼 시간이 많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것은 전형적인 한국 농촌 장남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였다. 농사짓는 아버지와 대학다니는 아들과의 어려운 관계. 그런데, 윤상원선생은 어떻게 70년대에 노동운동에 관심을 가질 수 있었을까?


“지가 3남 4녀인디… 딸 중에 경희가 야간고등학교를 다니면서, 한미제과에서 일했는데, 월급이 쌀 7대 (됫박) 값 밖에는 안되었지요. 그래서 노동자들이 월급도 적고 배는 고프고 그러니까, 예를들어 쌀 1000 kg 을 가져다가 상품을 맹그는디, 중간에 배고파서 노동자들이 다 먹어버리고, 800 kg, 600 kg 만 상품 만드는데 가고, 그래서 또 관리자들이 노동자들을 때리고… 우리 상원이가 그런 것도 보고…들불 야학도 하고…”


윤상원 평전에 나오는 이야기가 아닌, 가족사를 통해서 본 것이다. 90년대 초반에 잠시 인터뷰한 윤상원선생 막내 여동생 소식을 잠시 물었다. ”지금 대구에 살아요. 아들 둘 낳고 잘 살아요. 남편이 대구에서 왔는디, 여수시청에서 근무하다가, 지 친구가 소개해줘가꼬…지금은 대구서 아이들 키우고 잘 삽니다.” “…님 같은 분들이, 나중에 많이 (광주 항쟁, 윤상원 선생등) 기록해주시고, 발전시켜주십시오. 이렇게 안잊고, 멀리서 전화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고맙다는 말은 제가 해야지요.” 언젠가 광주에 간 적이 있다. 어린시절 야구한다고 시가행진하던 그 곳, 금남로에서 윤상원 선생 아버지 윤석동씨를 만났다. 중절모를 벗으면서 “여기까지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셨다. 아직 새파랗게 젊은 우리들에게. 인생이 어찌했든, 민주화가 어떻고, 자주-평등이 아무리 고귀하더라도, 자기 자식새끼가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등지고 간다는 것은 자연의 이치에 어긋나는 일이다.




(2013년 5월 15일 한 신문 기사: 복구된 윤상원 선생 생가에서 윤석동 부친이 학생들과 시민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있다.)


2004년 5월, 세월이 많이 흘렀다. 민주노동당도 국회의원이 10명이나 생겼다. 우리가 풀어야 한국문제는 민족, 노동, 여성, 생태 등 그 문제의 복잡성이 훨씬 증대되었고, 수 많은 인력들이 필요하게 되었다. 어쩌면 윤상원 선생 같은 영웅보다, 면서기, 구청서기들이 필요한 시대인지도 모르겠다. 80년 5월 27일, 도청 한 사무실 방에서 M1 총을 들고 있다가 계엄군 총에 맞아서 전사했던 윤상원,그리고 수많은 광주시민들과 그 후 그 후예들이 있었다.


진보를 말하는 사람들, 민주노동당과 같은 진보당 사람들이 그 도청을 다시 지키려 들어올 때까지 그렇게 영혼을 붙들고 있겠다는 것인가? 새로 지은 5-18 광주 묘역, 그곳이 왜 그렇게 낯설까? 묘는 커지고 공식화되고 그랬는데, 한 구석 허전하다.


실제 주인공들이 누구인지, 왜 그리도 손님들이 무거운 어깨들로 나타나는지, ‘새벽에 몰래 다녀올까?’ 그런 심정이 든다. 죽은 자의 이름으로 산 자기 이름을 아직 돌비석에 새길 때가 아닌 것같다. 돌비석에 절할 시간에, 산 사람들, 그들의 가족, 아직 남은 상흔을 껴안을 때이다. 아직은 우리가 복원해야 할 역사가 많이 있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이 마라톤을 한다면, 광주 도청에서 윤상원 선생 생가(예전 임곡마을)까지 해 봄도 괜찮을 것 같다. 윤상원 선생이 광주 도청, 아니 전라남도 도청에서 나오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서른 하나 (31세)의 나이로, 마치 한국의 예수처럼 그렇게 십자가를 진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생각들은 다 어디서 온 것일까?


연락처 : 윤상원 부친 윤석동, 모친 김인숙  062-952-8308 

Posted by NJ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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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March Song for My Dear Love ! 


 (임을 위한 행진곡 : 님을 위한 행진곡) 

- 번역  NJ 원시

 Without Leaving Love, Glory, or Name,

 Determined to Fight for Democracy to the Last. 

 With Only the Banner of Liberation in the Wind, 

Our Comrades Falling Fight. 

Not Being in Despair,  

Looking Forward to Seeing the Dawn of A New World!

Though Time Passing On, 

Our Land Remembering Truth. 

 wakening Our Spirit, 

Speaking Up Truth. 

Making One Step Forward, 

So Those Who Survive Follow ! 


 어제 매니토바 주에서 온 친구와 대화를 하다가, 그 친구가 말하길, 한국 노동운동이나 진보정당, 그리고 민주화 운동에 대한 책 (영어로 씌여진 책)이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역사학과를 졸업한 친구인데, 브루스 커밍스가 쓴 한국 역사책 읽은 게 전부라고 했다. 한국은 남아프리카 공화국, 브라질과 더불어 소위 3대 노동운동의 메카로 분류된다. 

(서유럽국가들을 제외하고 속칭 신흥공업국가들 중에서) 한국 진보정당운동이나 노동운동의 쇠락이나 후퇴와는 무관하게, 지금까지도 지난 30년간 군사정부에 저항하면서 이룩한 민주화 운동의 성과, 그리고 노동운동,시민운동, 진보정당 (범)사회주의정당운동들을 비-한국인들에게 소개하는 노력은 등한시했다.

 속칭 진보나 좌파들의 비주체적인 태도도 문제이고, 스웨덴 모델이나 핀란드 모델, 이탈리아 협동조합을 '화석화된 이상향'으로 소개하기 급급하지, 우리 역사 속에서 실제 주체들의 고민과 성과, 한계들을 차분히 성찰한 후에, 정치적 대안들을 제시하는 '성숙함'과 '사유의 주체성과 독립정신'은 부족하다. 

 누굴 탓하겠는가? 갈 길이 멀다. 이런 문제의식을 느낀 사람들부터 움직여야 하고, 마음을 합치고 적은 일이라도 시작해야 한다. 임을 위한 행진곡, 다양한 영어 번역이 가능할 것이다. 캐나다에 와서 영어 조금 배워서 맨 처음 한 일 중에 하나가 임을 위한 행진곡 영어 번역이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 세계 각국에서 실제로 애창될 날이 올 것이다. 마치 프랑스 애국가가 축구장에서 불려지듯이.




Posted by NJ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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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손재원

    페이스북에 친구들에게 보이려고, 임을 위한 행진곡을 올렸더니(아주 간략한 5,18민주화운동에 관한 내용과 같이) 가사를 물어보길래 이 사이트를 링크로 남겼습니다. 그리고 이런 좋은 자료 고맙습니다^^

    2013.05.17 00:53 [ ADDR : EDIT/ DEL : REPLY ]
    • 518 은 계속해서 앞으로도 더 연구되어야 할 주제이니까요...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지고 의견을 낼 수 있었으면 합니다.

      2013.06.02 05:05 신고 [ ADDR : EDIT/ DEL ]
  2. Yanula

    번역이 의미를 정확히 전달하지 못한것 같습니다.. 완전히 다른 내용으로 시적 아름다움 뿐만아니라 처절한 투쟁도 잘 나타내지 못하네요..ㅜ.ㅜ

    2013.05.17 19:22 [ ADDR : EDIT/ DEL : REPLY ]
    • 예 번역은 다양하게 될 수 있으니까요, Yanula 님도 한번 올려주세요. 구체적으로 뭐가 문제인지도 알려주시고요.

      2013.06.02 05:06 신고 [ ADDR : EDIT/ DEL ]
  3. 5.18 민주화운동에 임을위한 행진곡은 맞지않다고 봅니다 왜냐면 3.1 6.25. 8.15 절 등은
    외국에대한 우리민족 저항 예방 고통 예방 등을
    그리기위해서 부르곤합니다 5.18은 우리나라
    자국에서 일어난 일은 나라을 구하고 나라를
    애국하기위한것이라면 당연히 애국가를
    제창하고 고인의 묵념으로 하는것이
    맞다고 봅니다

    2016.05.15 17:22 [ ADDR : EDIT/ DEL : REPLY ]
    •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도 애국가를 불렀다는 사실을 아세요? 광주 시민들이 제일 많이 부른 노래입니다. "전두환 살인마를 찢어죽이자" 이런 구호와 더불어 애국가도 많이 불렀습니다.

      애국가는 사람들이 시대 상황에 맞게 다시 고쳐서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2016.12.10 20:51 신고 [ ADDR : EDIT/ DEL ]
  4. 더 이상 5․18과 ‘임을 위한 행진곡’의 의미가 훼손되지 않았으면...”
    김경민 기자 (kkim@sisajournal.com) 승인 2017.05.17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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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뷰] ‘임을 위한 행진곡’ 작곡가 김종률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

    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 김종률 작곡·황석영 작사 <임을 위한 행진곡>



    유장한 단조의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은 5·18 민주화운동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이다. 그 태생은 5·18 2주기를 기념하는 단막극 공연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후 1987년 6월항쟁에서 대중들에게 확산되며 노동 운동 현장에서는 투쟁의 노래로, 혹은 위로의 노래로 널리 불렸다. 대학생 새내기 시절 누구나 한번쯤 불러봤을 법한 대표적인 민중가요가 됐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5·18민주화운동 기념일이 정부 기념일로 지정된 1997년부터 기념식에서 제창됐다. 하지만 이 노래는 지난 9년 간 원하는 참석자만 따라 부르는 합창 형식으로 불렸다. 이명박 정부 2년차였던 2009년, 국가보훈처는 ‘국론 분열 우려’를 이유로 제창 대신 합창 형식으로 바꿨기 때문이었다. 9년이 지나서야 ‘임을 위한 행진곡’은 다시 제창으로 돌아왔다. 문재인 대통령은 오는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이 곡을 다시 제창으로 부를 것을 지시하면서 부터다.



    이 곡을 쓴 이는 김종률 현 광주문화재단 사무처장이다. 전남 강진 출신의 김 사무처장은 전남대 재학 시절이던 1982년 5·18 2주기를 기념하기 위해 이 노래를 만들었다. 재야운동가인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의 시 ‘묏비나리’에서 영감을 받아 황석영 작가가 가사를 붙였다. ‘묏비나리’는 작가로도 활동한 백기완 소장이 1980년 서빙고 보안사에서 고문당할 때 쓴 장편시다. 5·18​민주화운동 37주년 기념식을 앞두고 ‘임을 위한 행진곡’의 작곡가 김종률 광주문화재단 사무처장을 전화로 인터뷰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의 작곡가 김종률 광주문화재단 사무처장 ⓒ 사진=연합뉴스



    ‘임을 위한 행진곡’이 9년 만에 5·18 기념식에서 제창될 예정이다. 이 날 행사에 함께 참여해 노래를 부른다고 들었다.



    문재인 대통령께서 후보 시절 광주를 방문해 ‘임을 위한 행진곡’을 기념식에서 제창하고 5·18 기념곡으로 지정하겠다고 약속했다. 무엇보다 자신의 약속을 실천한 것이 반갑고 무엇보다 신뢰가 간다.



    기념곡으로 지정되려면 필요한 절차가 있으니까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내년 5·18 기념식에서는 기념곡으로 함께 제창하게 되지 않을까 기대가 된다.





    김 사무처장이 24살 때 만든 노래다.



    지금 생각해도 신기한 게 4시간 만에 뚝딱 써내려간 곡이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1982년 4월, 5·18 2주기를 앞두고 만들어졌다. 당시만 해도 5·18을 입 밖으로 내기만 해도 잡혀가던 시절이었다. 엄혹한 시국이었지만 5·18 2주기를 그대로 넘길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함께 운동을 하던 친구들과 “뭔가 5·18을 기념할 수 있는 것을 하자”고 결의했다. 그러던 중 5·18 민주화운동 당시 전남도청을 사수하다 사살된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과 1979년 노동 현장에서 야학을 운영하다 사망한 노동운동가 박기순의 ‘영혼 결혼식’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리는 윤상원-박기순의 영혼 결혼식을 소재로 30분짜리 노래극, 그러니까 ‘미니 뮤지컬’을 만들기로 했다. 제가 거기에 들어갈 곡들을 맡았다. 총 8곡이 들어갔는데, 그 중 마지막, 극의 대미를 장식한 곡이 ‘임을 위한 행진곡’이었다. 부부가 뒤에 남은 후배들에게 ‘새 날이 올 때까지 나아가라’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주는 곡이었다.





    작사가가 황석영 작가다. 그의 방북 이력으로 인해 이 노래 역시 곤혹을 치렀다.



    노래 속 ‘임’이 북한의 김일성 부자를 지칭하는 것 아니냐는 논란이었다. 가사 가운데 ‘새날’은 북한 주도로 ‘적화통일되는 날’을 의미한다는 일부의 주장이 있었다. 곡에 대한 지나친 왜곡이다. 이 곡은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노래다.



    1982년 당시 황석영 작가가 광주에 있었다. 제가 곡을 쓴 뒤 동료들과 함께 가사를 붙이는데 딱 떨어지는 가사가 안 나왔다. 그런데 황 작가가 갑자기 서재에 들어가 시집 한 권을 가져오더니 뭘 적어내리더라. 나중에 알았지만 백기완 시인의 ‘묏비나리’였다. 그 중 일부에서 영감을 얻어 써내려간 가사가 곡과 딱 붙은 거다. 마치 원래 그 곡 가사였던 것처럼.





    벗이여,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라.

    갈대마저 일어나 소리치는 끝없는 함성

    일어나라 일어나라

    소리치는 피맺힌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산 자여 따르라



    - 백기완의 시 <묏비나리> 중 일부


    2016년 광주 국립 5.18국립묘지에서 열린 5.18 기념식에 문재인 당시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가 참석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이 노래가 이렇게 대표적인 민중가요가 될 줄 알았나.



    제가 1982년도에 이 곡을 만들고 바로 군대에 갔다. 그래서 이 곡이 어떻게 불렸고 어떻게 퍼져나갔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1983년 3월 군대에서 휴가를 나와 연세대학교에 다니던 친구를 만나러 갔을 때의 일이다. 신촌 거리를 지나가는데 학생들이 데모를 하는 틈에서 어디서 많이 듣던 노래가 나오는 거다. 연세대에 다니던 친구에게 무슨 노래냐 물었더니 그 친구가 “너 군대 가있을 때 나온 노랜데 요즘 최고 인기다”고 하더라. 제가 만든 ‘임을 위한 행진곡’이었다. 그날 밤 그 친구와 밤새 술 마시고 어깨동무를 하고 거리를 다니며 이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난다.





    원래 작곡을 공부했나?



    전남대 상대생이었다. 그저 어릴 때부터 노래를 좋아해 작곡을 독학했다. 당시에는 대학가요제들이 활성화돼있었다. 지역 VOC 대학가요제에서 대상도 받고, 1979년 MBC 대학가요제에선 ‘영랑과 강진’이란 곡으로 은상을 받았다. 그냥 좋아서 한 일이었다.

    만약 민주항쟁이 없었더라면 나는 지금쯤 아마 싱어송라이터가 됐을 것이다. 지금과는 아마 다른 인생을 살았을 거다.





    노래를 부를 때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노래를 부를 때마다 매번 울컥한다. 처음 노래를 완성한 뒤 가사까지 붙여 카세트 레코딩으로 녹음한 뒤 처음 듣던 순간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때 정말 울컥했다. 당시 함께 제작한 10명의 동료들이 있었는데 노래를 들으며 모두들 아무 말이 없었다. 그 순간 공기가 울컥하고 감동적이었다. 모두 눈빛으로 서로의 감정을 공유했던 순간이었다.





    새 정부가 출범했다. 이미 개혁의 신호탄이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문화예술인으로서 어떤 기대감을 품고 있나.



    이제야 모든 것이 제 자리를 찾아가는 것 같다. 무엇보다. 더 이상 5·18이, 그리고 그 상징인 ‘임을 위한 행진곡’의 의미가 훼손되지 않았으면 한다. 개인적으로는 제 위치에서 뜻 맞는 사람끼리 ‘임을 위한 행진곡’을 문화예술로 승화시키는 작업을 계속 해나가려고 한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클래식 교향곡과 뮤지컬로 만들려는 준비를 한다고 들었다.



    둘 다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다. 제 바람은 이 곡이 기념곡으로 지정된 뒤 내년 5·18 기념식에서 유명 연주자들을 초청해 교향곡 초연을 하는 것이다. 상당히 의미 있는 공연이 될 것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교향곡, 뮤지컬 등 다른 형태의 문화예술로 만드는 것은 의미가 있다. 박근혜 정부 때의 일도 그렇지만 불행한 역사는 국민이 원치 않더라도 반복되는 경향이 있다. 역사적 사실이 왜곡되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역사가 사람들의 삶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야 한다. 그래야 잊지 않을 수 있다. 교과서에만 실린 역사는 언제든 권력에 의해 훼손될 수 있다.

    2020.05.19 13:37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디테일 민주-사회주의자들의 탄생을 위해. 
"지금 오빠가 살아있었다면 어떻게 되았을까?" "변절해부렀을까?" 


2010년 윤상원 열사 가족들 (아버지 윤석동 옹), 두 여동생, 남동생되는 분들과 전화 통화를 했다. 대학시절 518광주 항쟁 다큐멘타리 인터뷰 자료를 만들다 맺은 인연이 있었다. 윤석동 옹을 방문했을 때, 그 분은 어린 우리들에게 찾아주셔서 고맙다고 중절모를 벗어 인사를 했다. 광주 임동에서 비빔밥을 얻어 먹고, 버스를 타고 광주 외곽 (당시는 광산군 임곡면 천동 마을이었다) 한적해 보이는 한 농촌 마을로 갔다. 윤상원 선생의 생가였다. 

윤상원 열사 아버지 윤석동씨는 방 한개를 윤상원 열사 유품들을 모아놓은 곳을 만들어놓았다. 노문과 철학과 후배들과 함께 가족들 인터뷰에 들어갔다. 윤상원 선생 어머니 김인순여사는 우리 인터뷰에 응하지 못하셨다. 말을 하시려고 하는데도 눈물이 먼저 나오고 목이 매여서. 그날 마침 윤상원 선생 막내 여동생이 그 생가에 있었다. 80년 5월 당시 막내 여동생분은 초등학교 5~6학년 정도 되었다고 한다. 계엄군들이 큰 오빠 (윤상원)을 찾는다고 하면서 임곡 천동마을을 다 뒤지고, 공수부대 군인들이 대검으로 온 집안을 쑤시고 다녀서, 온 가족들이 겁에 질려서 벌벌 떨었다고 한다. 


막내 동생분도 인터뷰 도중에 많이 우셨다. 당시만 해도 노태우 정권시절이어서 518 광주항쟁이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공식적으로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받고 있지 못했고, 정치적 상처와 응어리를 안고 살아야했다. 특히 유가족들에게는 더욱더 그랬다. 


2010년 다시 그 막내 동생분과 통화를 하게 되었다. 결혼 이후 대구광역시에 정착해서 살고 있다고 했다. 옛날 인터뷰하던 시절 울먹이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리고 반가워했다. 그간 과정을 이야기하다가, 이런 이야기를 해주셨다. 윤상원 선생 부모님들은 아직도 큰 아들의 죽음에 상처를 많이 안고 살아가신다고 한다. 


그런데 동생들끼리 설이나 추석 명절 때 큰 오빠 이야기를 하면서, "지금 오빠가 살아있었다면 어떻게 되얐을까?" "국회의원 뱃지 받은 사람들처럼 그렇게 변절해부렀을까? 우리 오빠도" "큰 오빠가 죽은 것은 너무 아픈 일이지만, 사회를 위해서 민주주의를 위해서 그렇게 대의을 위해서 그 때 그렇게 돌아가신 것이, 지금 살아서 욕먹고 사는 사람들보다 더 낫지..." 이런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고 한다. 


내가 궁금해했던 그러나 직접 물어보지는 못했던 이야기들을 막내 동생분이 해주셨다. 사람들은 87년 체제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그것보다도 위 이야기를 들으면서, 80년 광주항쟁의 제 1막이 종결되고, 제 2막이 펼쳐져야 할 때가 되었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518 광주 항쟁은 끊임없이 재해석되어야 하고, 재발굴되어야 한다. 아직도 수 많은 이야기들이 묻혀져 있기 때문에 그렇다. 

2013년 5월 15일. 이제는 디테일-민주사회주의자들의 탄생이 필요해보인다. For the birth of detail democratic socialist

518 광주 항쟁은 한국역사 뿐만 아니라, 세계사 속에서 재조명되어야 한다. 끊임없이. 그림으로도 만화로도 웹튠으로도 대중가요로도. 


알 스튜어트 (Al Stewart)가 프랑스 혁명 이후, 정확히 말하면 자코뱅주의자와 로베스피에르의 정치 실험 실패 이후, 노랫말처럼 혁명시대는 저물고 나폴레옹 군대가 베르사이유 궁전으로 진격할 때...패배를 인정하는 것과 '패배주의'는 다르다. 패배의 직시야말로 새로운 창조의 시작이다. 마치 윤상원의 죽음이 수만의 리틀 윤상원들을 창조해냈듯이.  






   

의역: 원시

제목: 베르사이유 궁전

노래: 알 스튜어트


바스티유 감옥은 불타 연기로 자욱하고,

빠리 시내 사람들은 ‘이게 현실이란 말인가?’

믿기조차 힘들다.


왕족들은 모조리 도망가고,

신하들은 종적을 감췄다.

우리는 왕정 대저택들을 불살라버렸다

로베스삐에르 이름으로 !


그리고 우리는 아직도 혁명의 그 날이 시작되길 기다려보지만,

‘왜 혁명을 해야 하지?’ 물음만을 던지면서.

시간만 낭비하고 있다.

외로운 베르사이유 궁전에 메아리치는 그 물음만을.


자정까지 계속되는 (인민) 의회 건물 안,

불빛이 아스라히 새어나오고,

혁명가들은 밤새 내내 토론을 하다.

그러나 (혁명의 방향이) 어디로 향할 지 모르고.


나폴레옹 군대는 남쪽에서 빠리로 진격해오고,

마라 (Marat) 혁명 동지, 살 날은 얼마 남지 않았고,

우리도 겨우 살아남아 생명만을 부지하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도 혁명의 그 날이 시작되길 기다려보지만,

‘왜 혁명을 해야 하지?’ 물음만을 던지면서.

시간만 낭비하고 있다.

외로운 베르사이유 궁전에 메아리치는 그 물음만을.


혁명 영혼은 지금도 빠리 거리들을 배회하고,

그것도 수 백년 간.

‘왜 아직 혁명이 완수되지 않았을까?’ 물음을 던지며.

여름밤 카페에 앉아 싸구려 붉은 포도주를 마시며 열변을 토하다.

적포도주 황갈색 혁명으로 물든 그들의 목소리는,

신호 대기 중인 차들을 불러세우고,

‘혁명을 완수하자고’ 하네.


그리고 우리는 아직도 혁명의 그 날이 시작되길 기다려보지만,

‘왜 혁명을 해야 하지?’ 물음만을 던지면서.

시간만 낭비하고 있다.

외로운 베르사이유 궁전에 메아리치는 그 물음만을.




(1793년 프랑스 혁명가 다비드 마라를 칼로 찔러 죽인 매리 앤 샤를로테 클로데. 집에서 목욕중인 다비드 마라를 무고한 프랑스 백성을 선동한다는 이유를 들어 클로데는 마라를 살해했다. ) 






-The Palace Of Versailles -- Al Stewart


The wands of smoke are rising

From the walls of the Bastilles

And through the streets of Paris

Runs a sense of the unreal


The Kings have all departed

There servants are nowhere

We burned out their mansions

In the name of Robespierre

And still we wait


To see the day begin

Our time is wasting in the wind

Wondering why

Wondering why, it echoes

Through the lonely palace of Versailles


Inside the midnight councils

The lamps are burning low

On you sit and talk all through the night

But there's just no place to go


And Bonaparte is coming

With his army from the south

Marat your days are numbered

And we live hand to mouth


While we wait

To see the day begin

Our time is wasting in the wind

Wondering why

Wondering why, it echoes

Through the lonely palace of Versailles


The ghost of revolution

Still prowls the Paris streets

Down all the restless centuries

It wonders incomplete

It speaks inside the cheap red wine

Of cafe summer nights


Its red and amber voices

Call the cars at traffic lights


Why do you wait

To see the day begin

Your time is wasting in the wind

Wondering why

Wondering why, it echoes

Through the lonely palace of Versailles

Wondering why, it echoes

Through the lonely palace of Versailles

Posted by NJ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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