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 등장 전후 독일 사회주의 노동운동의 실패 교훈

책/노트(독후감) 2016. 4. 25. 0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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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운탈의 논문을 읽고 -  메모
내가 파악한  히틀러 등장 전후 독일 사회주의 노동운동의 실패 교훈은 다음과 같다

1) 독일 당시 사민당 (사회주의자 사민당 )과 공산당, 그리고 사민당을 지지한 노조대표들은 나치의 정체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공동의 정치적 적 앞에서 연대하지도 못했다.

2) 폰 파펜, 폰 쉴라이허, 히틀러 등 정치적 의도들을 파악하지 못한 채, 노조 대표자들과 노동운동가들은 '총파업'과 같은 즉각적인 행동 개시를 통해서, 나치의 세력 확대를 막아내지 못했다. 정치적 대기주의에 경도되었다. "사태 추이를 지켜보자 wait and see" 전술을 채택하고 말았다. 
군부와 노동자들 사이에 시민 내전이 발발하지 않을까 두려워만 했지, 노조와 사민당 (혹은 공산당)의 강력한 연대에 근거한 단기적 중기적 정치 계획이 없었다.
 
브라운탈의 논문을 요약하면서 몇 가지 역사적 사진들을 덧붙여보기로 한다. 

논문 제목: The failure of socialist labor : 
저자: 게라트 브라운탈 Gerard Braunthal, “The German Free [Socialist] Trade Unions during the Rise of Nazism,” Journal of Central European Affairs, XV (January, 1956), 339-353. 

어떠한 정치적 교훈을 얻을 수 있는가? 

브라운탈의 설명 :

바이마르 시대와 파시즘 시기 3가지 노동운동 노조 정치 이념들 (이데올로기)  
1)사회주의자 노동운동 (SPD 사민당:*사민당과 독일 공산당 KPD은 당시 사이가 좋지 않음) 
2)기독교 연합-카톨릭 사회 행동 (Christian union-Catholic social Action)
3)히르쉬 둥커 유니온 Hirsch Duncker Union (맨체스터 리버럴리즘 Manchester Liberalism) 

조직화 정도는 다음과 같다. 
아데게베 (전노총: 전국 독일 노동조합 총연맹) Allegemeiner Deutscher Gewerkschaftsbund
(ADGB) -전국 조합원 숫자는 500만이었다. 

아에프아  AFA: (월급쟁이 자유 총연맹: Allgemeiner freier Angestelltenbund : 50만 조합원

아데베베 : ADBB : Allgemeiner –Deutscher Beamtenbund: 전국 공무원 노조 : 17만
3개 노조 총연맹은 전체 노동자의 25%를 대표했다. 

미국과 달리 독일 노조는 사민당(SPD)과 강한 연계를 맺고 있었다. 1920년 우파 카프 푸취 ( Kapp Putsch) 쿠데타가 발생했을 때, 노동조합원들은 총파업을 실시해 그 쿠데타를 막아냈다. 
“자유” 노조 총연맹들의 조합원들과 노조 대표들은 사회주의자였고 동시에 당시 공산주의자와 파시스트들의 강력한 경쟁자들이었다. 

당시 독일 정치 경제적 조건은 어떠했는가?

바이마르 공화국 후반기 민주주의가 위협받자, 사회주의 노동조합 운동의 열기는 식기 시작했고 거의 마비 상태에 빠졌다. 자본주의 대공황이 발생하자 조직 노동자들은 중차대한 문제에 직면했다. 실업이 치솟았고 독일 경제 생존 자체가 위험에 빠졌던 것이다. 

폰 파펜 (Von Papen), 폰 쉴라이어허 ( von Schleicher), 히틀러 등 권위주의적 정권들 하에서 과연 사회주의자 노동조합들은 무엇을 했는가? 


(사진: 1933년 1월 30일. 히틀러 (가운데), 오른쪽 폰 파펜이 앉아서 뭔가를 이야기하고 있다) 

1. 파펜 쿠데타: 

1932년 7월 20일 독일 수상 프란쯔 폰 파펜이 오토 브라운 (사회 민주주의자)이 이끌었던 프러시아 연립정부를 축출했다. 이 보수적 폰 파펜은 이 사실을 사회주의자들과 노조에 보고도 하지 않았다. 폰 파펜은 장관 8명을 해고해버렸고 이 해고자들은 이 문제를 대법원에 소송했다. 폰 파펜의 쿠데타는 독일 파시즘의 중요한 시발점이 되었고 정치에서 ‘불법’이 횡행하는 출발점이었다. 


(1934년 1월 1일, 폰 파펜은 히틀러 체제하에서 부수상이 되었다. 그의 아내 마르타와 함께 베를린에서 어린이들을 위한 한 행사에 참여해, 아돌프 히틀러와 함께 인사하고 있다) 


독일 사회주의자 노조들은 이러한 폰 파펜의 쿠데타에 대해 어떻게 저항했는가?

소수지만 몇 개 공장들에서 평조합원들을 중심이 되어 작업을 중단했다. 지멘스와 이.게. 파르벤 베를린 노동자들은 노조 대표들의 지침을 듣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준-군사조직체이자 사회주의 주도 방어 조직인, 철의 연대 전선 노동자들 역시 베를린에서 노조 대표들의 지침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데게베 (전노총)도 사회민주주의 정당 (에스.페.데)도 어떠한 행동 개시도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실업이 치솟고 있는 상황에서 파업이나 정치행동은 노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실업 증가와 정치적 패배주의가 얽혀서 결국 정치적 대기주의가 노동조합 대표들과 사민당 에스페데에 널리 퍼지고 말았다. 

철도 노조 역시 투쟁의지가 높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실업자들이 그 노조조합원들의 직장을 대체해버릴까봐 우려했기 때문이다. 또한 폰 파펜의 쿠데타가 합법이냐 불법이냐를 놓고 노조 대표자들과 사민당 내부에서 그 의견들이 분분했다. 폰 파펜 쿠데타에 대한 의견 불일치 독일 전노총과 사민당의 정치적 대기주의를 부추겼다. 


(사민당 오토 벨즈, 나치 히틀러가 집권하자 저항하다가 결국  파리로 망명했다) 



1932년 7월 21일 독일 사민당은 긴급회의를 열었다. 그러나 직접 행동은 개시하지 않았다. “사태 추이를 지켜보자 wait and see ” 전술을 채택했다. 다음 세 가지 이유들 때문이었다. 10일 후에 있을 7월 31일 선거에서 좌파 정당들이 다수당이 될 것이고 파시즘 지지는 잦아들 것이라고 예측했다. 두번째는 노동자들과 군대(라이히스베: Reichswehr)와의 충돌과 시민 내전을 예방하고자 했다. 세번째는 폰 파펜이 히틀러의 권력 장악을 막아낼 것이라는 내다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7월 31일 독일 총선 결과는 사민당, 전노총 대표들의 예측과 달리 나치가 제 1당이 되고 말았다) 


사민당 (SPD)은 독일 공산당의 총파업 제안 역시 거부했다. 그 이유는 독일 공산당이 나치가 1931년에 프러시아 정부에 반대하기 위해서 ‘국민투표’를 두고 서로 협조했다는 것이다. 

사민당 대표 오토 벨스 (Otto Wels)는 유혈사태를 우려해 노조와 정당의 직접적인 행동에 찬성하지 않고, 그들의 목소리들을 체계적으로 낮춰버렸다. 프랑크푸르트 노조 위원회 의장 오토 미스바흐 (Otto Misbach)는 성공하지 못할 정치적 행동은 하지 말라고 했다. 철강 노조 대변인이자, 프랑크푸르트 ‘사회주의자 정치부대 라이히스바너 Reichsbanner (검정-빨강-황금색  배너) 위원회 대변인인   물란스키 (Mulanski)는 노동자들이 데모 장소로 이동할 수 있는 운송 수단이 충분하지 않다는 식 발표만 해버렸다.

(검정-빨강-황금 3가지 색깔 배너. 통일, 권리와 자유를 상징함) 



 ‘철의 전선 (Eiserner Front) 집행위원들’ 역시 코커스를 개최했는데, 여기에서도 대부분 사민당 대표들과 노조 대표들은 즉각적인 총파업은 시민 내전으로 비화할 수 있다고 우려를 표명했다. 이에 반대해  라이히스바너 대표 칼 횔터만 (Karl Höltermann)과  월급쟁이 노동조합 (AFA) 대표  지그프리트 아우프호이저(Siegfried Aufhäuser)는 최소한  파업과 같은 데모를 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사민당과 노조 대표단은 이들의 제안 역시 거부했다.


(철의 전선, 아아세너 프론트로 ! 1932년 슬로건) 


7월 20일과 21일 베를린 노조 대표들은 파업촉구 (provocateur)에 대한 경고조치를 내렸고, 합법노조를 준수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폰 파펜의 행정 장관 8명 해고에 대한 대법원의 결정을 기다려보자고 했다. 

결국 사민당과 노조 대표들은 세 차례 회의를 거쳤으나 그 결론은 ‘사태 추이를 지켜보자 wait and see’이었고, ‘총파업’과 같은 직접 행동 반대였다.

그러나 1932년 7월 31일 나치는 총선에서 더 많은 의석을 얻었고, 바이마르 공화국의 허약한 구조를 깨뜨리고 있었다. 

논문 저자 게라트 브라운탈(Gerard Braunthal)의 평가는 다음과 같다. 나치의 총선 승리를 가져다 준 것은 노조, 사민당에 1차 책임이 있다고 봤다. 

1932년 폰 파펜의 쿠데타 시기에 드러난 사민당과 노조의 ‘리더십’ 위기가 가장 큰 책임이 있다고 본 것이다. 파시즘 세력은 커져가는 반면에 노조와 사회주의자 사민당은 소수파 (행동파)와 다수 온건파로 분열되어 총파업과 같은 직접 행동은 보류되었다. 결국 사민당과 노조 대표들은 총파업 강행을 거부했고, 대규모 군중 시위 조직화 역시 거부했다. 이 같은  사민당과 노조 대표들의 소극적 대처와 정치적 대기주의는 반파시즘 운동을 약화시켰다. 

2. 두번째 국면: 쉴라이허 정권  The Schleicher Regime 하에서 사민당과 노조대표들의 대응은 어떠했는가? 


(폰 쉴라이허와 폰 파펜 )


1932년 12월 3일 폰 파펜 정권 하에서 국방장관이었던 쿠르트 폰 쉴라이허가 수상직을 승계했다. 쉴라이허는 히틀러를 제거하기 위해서 군대 장군들의 지도하에 노동정부를 수립하고자 했다. 군대와 노동운동(노동조합)을 결합시켜 히틀러 파시즘을 제거하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쉴라이허 발상은 실패했다. 그 이유는 군부는 폰 파펜, 괴링, 히틀러의 연합을 원했기 때문이다.  

쉴라이허는 나름대로 나치 온간파와 강경파를 분리하기 위해서 온건파에 속하는 그레고 쉬트라세 (Gregor Strasser)와 협상에 나섰지만, 이후에 쉬트라세의 세력이 나치 내부에서 점차 힘을 잃어버려서 쉴라이허의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또한 쉴라이허는 노동조합(노동운동)과 사민당 (정치)를 분리시켜 노동 총연맹을 건설해서, 이를 중심으로 나치 세력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짰다. 또한 길드 (Guild)를 강조해서 경제 체제를 길드로 전환하려고 시도했다. 노동조합을 기반삼아 코포라티즘 정부를 건설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수상 취임 5일 전,  1932년 11월 28일 쉴라이허는 아데게베 (전노총) 위원장 테오도르 라이파트(Theodor Leipart) 등 노조 대표들을 개인적 모임에 초대해 그를 격려하고 칭찬하기도 했다. 


(테오도르 라이파트 Leipart , 독일 전노총 대표) 


그러나 이러한 쉴라이허의 계략을 알아챈 사민당 (SPD) 은 전노총 대표 라이파트에게 압력을 가하면서, 노동조합과 정당을 분리시켜내려는 쉴라이허에 저항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쉴라이허와 노조 대표들인 라이파트, 빌헬름 에거트 (Eggert) 사이에 정치적인 거래가 오고갔다. 폰 파펜 정권이 대규모 임금 삭감을 감행했고, 이와는 대조적으로 독일 대토지 계급 융커 Junker 에게는 혜택을 주자, 쉴라이허는 9월 5일 경, 이러한 폰 파펜 결정에 대한 노동자들의 불만을 자신에게 제출해달라고 라이파트와 에거트에게 제안했던 것이다.

라이파트와 에거트는 이러한 쉴라이허 제안에 화답하며, 주요 기업들의 사회화를 제안했고, 대규모 공공 노동 프로그램을 실시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러한 요구를 쉴라이허가 수용하면 라이파트와 에거트는 그를 지지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12월 3일 쉴라이허가 수상직을 계승하고 대부분 보수적인 행정 장관들을 유임시키자, 사민당과 다른 정당들은 쉴라이허 정권을 지지하지 않기로 했다.

3. 세번째 국면: 히틀러와 나치의 등장

1933년 1월 28일에 폰 파펜 측근들은 쉴라이허의 사임을 요구했다. 1월 30일 역사적인 날이 오고 말았다. 대통령 힌덴브르크 (Hindenburg)는 “헌법을 수호하겠다”고 맹세한 아돌프 히틀러를 새 수상으로 임명하고 말았다.

(1933년 5월 1일, 메이데이. 파울 폰 힌덴브루크 대통령과 아돌프 히틀러가 베를린에서 메이데이를 경축하고 있다.) 



논문 저자 게라트 브라운탈 평가:  어떻게 해서 독일 나치 파시즘, 히틀러는 권력을 장악했는가? 

독일 노조들은  총파업과 같은 즉각적인 정치 행동을 개시하지 않음으로써 독일을 나치 파시즘으로부터 독일을 구출하지 못했다.  총파업과 같은 즉각 행동을 반대한 독일 노조 대표들은 만약 총파업에 나섰을 경우, 군부가 노동조합을 탄압할 수 있다고 판단해버렸다. 할 가능성을 들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 수상이 되었다. 

당시 사민당과 독일 노조 대표들은 아돌프 히틀러의 전체주의 속성을 간파하지 못했다.
또한 그들은 히틀러가 권좌에서 곧 내려올 것이라고 예측했다.

노조지도자들은 반파시즘 운동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지 못했다.

독일 노조들은 1930년대 미국처럼 “뉴딜 New Deal”을 요구하지도 않았고, 스웨덴 노조들의 정치적 요구들도 하지 않았다. 또한 독일 사민당과 공산당이 서로 차이를 줄이고 모두다 반 나치즘 반파시즘 전선으로 나가도록 두 정당들을 독일 노조들은 추동하지도 않았다. 노조 대표들은 아돌프 히틀러가 노동조합 조직들을 파괴할 것이라고 상상하지도 못했기 때문에, 어떠한 데모도 하지 않고 ‘사태 추이를 지켜보자 wait and see’ 전술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돌프 히틀러가 수상이 된 다음 날, 1933년 1월 31일, 전노총 (ADGB)은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했다. 반정부 태도를 가진 노동자들 심정을 이해한다. 그러나 그것은 위험하고 오히려 노동자 이해에 반하는 것이다. 아돌프 히틀러 정부는 과도기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반동 정부라 할지라도 노동운동과 노조를 파괴하지는 못할 것이다. 

노조 대표들은 아돌프 히틀러에 대해 오판했다. 그 이유는 ‘두려움’ 이다. 노조 대표들은 어떤 두려움에 떨고 있었고, 이러한 두려움을 떨치지 못했기 때문에 정치적 오판을 한 것이다. 

1933년 2월에는 노동자들 사이에서 저항이 터져나왔다. 괴링(Göring)은 독일 좌파들을 때려 부수기 위해서 준 군사조직인 SA와 SS (폭풍 부대: 쉬투름압타이룽 Sturm-abteilung :SA, “방위군 : 슈츠쉬타펠 Schutz-staffel )를 창설했다. 노동자 일부는 이러한 괴링에 저항했다. 또한 베를린 섬유 의류 노동자들과 인쇄 노동자들은 사민당과 공산당 (KPD)가 서로 협력해서 나치에 저항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노조 대표들은 이러한 두가지 요구들을 수용하지 않았다. 

1933년 3월 5일 선거에서 나치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정당NSDAP) 는 승리했다. 10일 이후 독일 노조 대표는 노조가 정치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노조는 3월 5일 총선에서는 사민당을 지지했으나 그 이후 중립적 태도를 취하다가 결국 나치에 굴복했다. 하지만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는 이러한 굴복적인 독일 노조에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나치는 독일 노조를 파괴했고 노동운동가들을 잡아가두기 시작했다.

1933년 3월 8일 베나우 (Bernau) 소재 노동조합 학교에 괴링 나치 준군사조직 SA와 SS가 침입했고, 노동조합 건물들에 난입하거나 노조 신문과 언론들을 탄압했다. 

이러한 나치의 노동운동과 노조에 대한 탄압이 자행되는 가운데도 노동 운동 내부에서는 나치에 대한 통일된 평가와 판단이 없었다. 심지어 허만 젤바흐 (Hermann Seelbarch)는 전노총 노조간부 학교 교장이면서 동시에 나치 당원이었다. (* 의심이 든다: 나치가 노조에 직접적으로 조직원으로 개입했을 수도 있다) 젤바흐와 같은 자들은 노조와 나치와의 타협을 유도해냈다. 히틀러의 정치 조언자였던 칼 쉬미트 (Carl Schmitt)의 측근이었던 후버(E.R.Huber)는 노조는 제 3 제국 (the Third Reich)의 협력과 조정 하에서 합법적인 공적 조직(제도)이라고 주장했다.
 


(1933년 5월 2일 베를린 엥겔스우퍼에 있는 한  노조 사무실에 침입하는 나치 폭풍부대 SA ) 


브루크너 (Bruckner)가 대표로 있던 ‘독일국가사회주의 공장 세포 조직 NSBO’가 전노총 대표들과 임금 및 노동 현안들을 협의했고 통제했다. 라이파트는 전노총 대표 사임을 거부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1933년 3월 28일 AFA 는 나치에 굴복했고, 4월 6일 공무원 노조는 해산했다. 노동절 (MAY Day) 이름은 ‘국가 노동일 National Labor Day’로 개명되었다. 4월 15일에는 전노총 (ADGB)가 나치에 굴복하고 말았다. 4월 19일에는 완전히 굴복 단계로 발전했고,  나치의 지원하 5월 1일 메이데이를 환영한다고 공식 노조 홍보물에 발표했다. 

심지어 전노총은 나치당과 국가사회주의에 사회주의 요소가 있다고 인정했다. 결국 독일 노조들은 국가사회주의 나치에 완전히 포섭되었고 패배했다. “국가 사회주의 승리는 우리의 승리이기도 하다. 사회주의 임무는 전체 국가에 있다” 이런 식으로 노조의 나치 지지를 정당화했다.

하지만 아돌프 히틀러, 괴벨스, 나치는 이러한 노조의 굴복에 전혀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나치 정권은 5월 13일 테오도 라이파트, 그라스만 (Grassmann), 비젤 (Wissell)등 전노총 노조 대표자들을 체포했고, 노조 건물 등 재산들을 몰수해버렸다. 이러한 사회주의자 노조들 뿐만 아니라, 기독교, 자유(리버럴) 노조들 역시 나치는 가만 놔두지 않고 탄압했다.

이후 나치 독일 노동 전선 (DAF)이 만들어졌고, 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독일 노동자를 대표했다. 

그렇다면 1920년대 독일 사회주의자들 (사민당)은 왜 나치와 타협했는가? 대공황 국면이 닥치자 노조는 도덕적 해이되어 경제적 이기주의에 빠지고 말았다. 또한 나치의 정체성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채 총파업과 같은 행동을 전혀 개시하지도 못했다. 나치가 민주적 제도인 ‘노조’를 파괴할 것이라고 예상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게라트 브라운탈은 이러한 진술들은 정치적 변명에 불과하다고 평가한다. 왜냐하면 당시 전노총을 비롯한 노조 대표들은 사민당과 협력해서 독일 내부에서 정치적 힘을 발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바이마르 공화국도 독일에서 가장 큰 규모의 민주적 조직이었던 노조도  내부로부터 썩어들어갔기 때문에, 나치와 같은 정치 세력이 등장했을 때 독일을 파시즘으로부터 방어해내지 못한 채 오히려 히틀러에 굴복하고 말았다. 독일 민주 체제 (정치)와 독일 노동 운동이 강력하게 연대하지 못했기 때문에 독일 비극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33년 1월 1일, 나치주의. 국가사회주의 공장 세포 조직 .엔.에스.베.오가 독일 총선을 앞두고 베를린에서 데모를 하고 있다. 독일 노동자들의 나치 참여 ) 




참고: NSBO: 국가 사회주의자 공장 세포 조직:  시초는 1927년 베를린을 중심으로 대규모 공장 노동자들이 민주-기독교 노조에 대항해 건설했고, 1928년  국가사회주의자 공장 세포 조직 (NSBO)이 만들어졌다. 1931년 1월 15일 나치의 “독일 제국 공장 세포 조직”이 탄생했다. 이들은 “공장속으로 ! Hinein in die Betriebe : HIB !”라는 구호를 내걸고 프로파간다와 폭력 등을 사용해 조직을 키워나갔다. 

(국가사회주의자 공장 세포 조직 NSBO 완장 : 노동을 상징하는 톱니와 나치 상징인 스와스티카가 결합되어 있다 ) 


1933년 5월 2일, 나치를 지지하지 않는 모든 노조들은 불법화되었고, NSBO (국가사회주의자 공장 세포조직)만이 합법적으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독일 노동 전선 (Deutsche Arbeitsfront : DAF)가 며칠 후 만들어졌고, 1935년 독일 노동 전선 (DAF)이 NSBO를 합병했다. 


(DAF 총책임자, 로베르트 라이 1890-1945) 



 


(독일 노동 전선 DAF 깃발: 나치를 상징하는 스와스티카 Swastika 와 노동을 상징하는 톱니바퀴가 섞여져 있다) 



 
논문 저자: 게라트 브라운탈 : 2014년 10월 29일 90세 일기로 별세했다. (미국 암허스트 소재, 매사추세츠 주립대학 정치학과 명예교수) 






나치 :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 정당 : 나치오날-조찌알리스티셰 도이체 아르바이터 파타이 NSDAP: 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 : 약칭 NSDAP)  

나치가 독일 총선에서 의석수를 증가해 나가는 과정

1. 1930년 9월 14일 총선 결과 :
총 577석 중, 과반은 289석 (정부 수립 가능)




2.  1932년 7월 31일  독일 총선, 총 608석에서 과반은 305석 기준.

폰 파펜 쿠데타 이후, 제 1당이 된 나치 (히틀러) 당. 230석을 얻었다. 사민당은 제 2당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3. 1932년 11월 6일 독일 총선
584석 중에 과반은 293석, 제 1당은 나치 196석, 제 2당은 사민당 121석, 제 3당은 공산당 100석이었다. 




4.  1933년 3월 5일 독일 총선

나치 (히틀러)가 288석을 얻어 제 1당이 되었다. 사민당과 공산당은 축소되었다.



5. 1933년 11월 12일 총선, 야당들은 총선 참여가 금지되고, 나치 1당만이 참여했다.
661 석 중, 나치 당이 661석을 다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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