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의 열기와 단두대, 1794년 4월 당통, 데물랭 처형당함, 7월 로베스피에르 처형

책/노트(독후감) 2015. 10. 26.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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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 주역들이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당시 당통은 35세, 데물랭은 34세, 로베스피에르는 36세였다.왜 그들은 갈라서야했고, 결국 권력과 생명을 뺏아야했는가? 당통은 1793년  공공 안전 위원회 (the committee of public safety)의 '테러' 정치에 반대했다. 그러나 자코뱅 클럽의 상징 로베스피에르와 혁명 군사전략가 카르노는 외국군대들의 침입과 프랑스 내부 반동혁명 위험성 있다는 이유로, 당통의 견해에 반대했다. 

 

<프랑스 혁명 당시 실권자는 카르노, 대중적 상징은 로베스피에르> 

 

1794년 4월 5일, 결국 당통, 그리고 혁명 대변인이자 달필가 데물랭은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다. 영화 "당통"에서는 로베스피에르가 당통과 데물랭을 설득하려는 장면들, 그리고 데물랭에 대한 '연민'이 잘 묘사되었다. 

 

프랑스 혁명에 반대하는 유럽국가들, 프러시아(독일)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벨기에 등의 침략과 내부 반혁명을 진압하기 위한 '공공 안전 위원회'의 실질적인 권력은 군사전략가인 카르노에게 있었다. 반면 로베스피에르는 그의 탁월한 대중연설과 의회에서 토론과 수사학 때문에, 프랑스 혁명의 '정치적 상징'이었다. 대중적 지도자이자 스타였다. 로베스피에르 역시 '테러'정치는 교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테러 정치의 대표적 사례는, 마라(Marat)의 명령과 책임으로 알려진 '9월 대학살'이다. 1792년 9월 1일 1100명의 죄수들이 처형된 바가 있다.  반혁명군이 베르다(Verdun)를 점령하고, 파리로 진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혁명군들이 정치죄수들을 처형시켜버렸다.  1793년 9월 '컨벤션'이후 이러한 테러 정치는 제도화되었다.  

 

벨록에 따르면, 로베스피에르가 당통의 목숨을 살릴 수도 있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로베스피에르는 프랑스 대중들이 '테러' 정치를 원한다고 판단했고, 자신의 대중적 인기를 과신했다. 그래서 당통을 그냥 죽게 내버려둔 것이었다. 

 

<당통은 단두대로 끌려가면서 "다음 차례는 로베스피에르다"라고 외쳤다>

 

 

1794년 4월 5일 당통과 데물랭 등 29명의 지롱드 파는 처형당했다. 1794년 봄은 이렇게 잔인했고, 여름 역시 피냄새는 가득했다. 단대두에 끌려가면서 당통은 "다음 차례는 로베스피에르다"고 외쳤다. 로베스피에르는 다가오는 여름의 비극에서 자신을 변호해줄 수 있는 당통을 스스로 버린 셈이었다. 

 

로베스피에르는 4월 이후, 공공안전위원회의 테러 정치와 그 군사적 시스템을 고치려했지만 실패했다. 공공안전위원회에서 실질적인 권력은 카르노에게 있었다.  6월이 테러는 지속되었고, 로베스피에르는 공공안전위원회의 권력핵심부로부터 밀려나기 시작했다. 7월 마지막 주, 테미도르 (Thermidor)의 2번째 주, 로베스피에르에게는 '독재 권력 남용과 오용' 죄목으로 체포되었다.  

 

하지만 감옥 관리자는 로베스피에르의 '투옥'을 믿지 못해, 그를 '죄수'로 투옥시키지 않으려고 했다. 이 에피소드만 봐도 그가 얼마나 대중적으로 지지받고 있었고, 파리시민들이 그를 얼마나 좋아했는지를 알 수 있다. 로베스피에르의 추종자들은 호텔 드 빌 (de Ville)에 모여 공공안전위원회 타도 계획을 세우고, 그 실행을 위해서는 로베스피에르의 공식 '서명'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는 망설였다.

 

<로베스피에르는 체포 이후, 왜 공공안전위원회 타도 시도를 하지 않았는가?>

 

로베스피에르가 그런 '반란' 서명하지 않은 이유는, 그 반란이 '인민 주권론'과 '인민의 일반 의지'에 위배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서명'을 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고민하던 차에, 공공안전위원회의 지원 하에, 의회 군대가 들이닥쳐 로베스피에르와 그 친구들을 체포했다.

 

1794년 7월 28일 오후 7:30 로베스피에르는 생쥐쓰(Saint-Just) 와 레바(Lebas) 등 21명과 더불어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다. 아니러니하게도 로베스피에르의 처형 이후, '테러 정치'는 서서히 끝을 맺었다. 벨록(Belloc)의 평가대로, 로베스피에르는 결국 공공안전위원회의 정치 테러의 '도구'에 불과했던가? 

 

<감상> 

 

프랑스 혁명 선언문인,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조항들을 보면, 당통, 데물랭, 로베스피에르 등의 죽음이 아니러니하다. 

 

8항에 보면, 처벌을 위해서는 반드시 '법적 근거'를 갖춰야 한다. 다시 말해서 사형 등 중형을 실행할 때는 '법 규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자기들이 만들어놓은 '혁명 선언'과 자신들의 죽음, 혁명동지들의 처형은 서로 어긋나버린 것 같다.

 

혁명동료의 관점에서 보면, 11항에 나온대로, 자유로운 생각과 토론이 보장되어야 하는데, 과연 목숨을 내걸고 '혁명'을 한 동지들끼리 그런 자유로운 정치 토론을 했는가? 외국군대의 침략, 반혁명 가능성 하에 11항과 같은 정치 행위는 너무나 낭만적이고 이상적이었을까? 

 

2천년 넘게 존속해온 '왕권'을 타도하고, 그들을 단두대에 세운 그 '정치적 열기' 속에는 늘 '죽느냐 사느냐, 죽이느냐 살리느냐' 그런 정치적 선택 속에서 프랑스 혁명 주체들은 괴로워했을 것이다. 그리고 당통, 데물랭, 마라, 로베스삐에르가 스스로 내세원 '인민주권'과 '인민 의지'는 시대정신으로서 '부패한 독재 왕권'을 타도했으나, 그 과정에서 자신들만의 새로운 '권력 사용'과 '인민의지'의 실천에서는 불완전했을 것이다. 

 

로베스피에르 체포 장면

 

 

권력 3인방, 생쥐쓰, 로베스피에르, 쿠토 

 

 

 

자료: 영화 "당통 Danton (1982)" 

 

 

 

 (단두대로 끌려가는 당통과 지롱드 Gironde 파) 

 

 

 

데물랭과 막시밀리온 로베스피에르, 학창시절

 

(로베스피에르는 학창시절, 루이 16세 앞에서 헌사를 낭독한 적이 있다. )

 

https://www.youtube.com/watch?v=-SP4iii_THQ

 

 

 

 

 

 

 

 

(Mossse;Cameron;Hill;Petrovich. Europe In Review. Chicago:Rand McNally & Company. 1964.)  

.

 

 

 

 

Belloc,Hilaire, The French Revolution. London:Oxford University Press.1966.

(written in 1911)

Lefebvre, Georges. The French Revolution volume 1 :from its origins to 1793.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1962

 

연구과제: 프랑스 혁명 당시, 프랑스와 프러시아,오스트리아 (헝가리 오스트리아), 벨기에, 이탈리아 등 인접 유럽국가들과의 전쟁과 외교 관계 연구.

 

 

당통 (Danton : 26 October 1759 – 5 April 1794 : 35세 

로베스피에르 (Robespierre : 6 May 1758 – 28 July 1794 : 36세)

쿠토 George Couthon 죠지 쿠토 (1755-1794)

카르노 (Lazare  Carnot  라자 카르노 13 May 1753 – 2 August 1823 : 70세

데물랭(Desmoulins : 2 March 1760 – 5 April 1794 34세

마라 (Jean-Paul Marat, May 24 1743 - July 13, 1793 5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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