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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계획/빈 Wien_비엔나

어떻게 해서 사회민주당이 이끌었던 비엔나 시당국이 직접 고품질 값싼 월세 주택을 건설했는가? - 대장동 개발 범죄단과 차이. 비엔나 시 당국이 직접 주택 건설, 관리, 운영. 토지와 주택 소..

by 원시 2021. 11. 6.

오스트리아 비엔나 ‘노동자의 베르사이유 궁전’ 별칭을 얻었던 사회주택의 역사. 어떻게 해서 사회민주당이 이끌었던 비엔나 시당국이 직접 고품질 값싼 월세 주택을 건설했는가?

(1) 주택 건설을 정부 소관이 아니라고 생각.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은 1888-1889년 창당되었다. 합스부르크 제국 시대에는 성인의 80%가 투표권도 없었다. 1896년 선거에서 사회민주당은 기독사회당의 반-유대교 정책에 반대함.  그리고 자본주의 하에서 보건과 주택 문제를 풀 수 없다고 주장. 이렇듯 사회민주당은 초창기에는 정부가 직접 주택을 건설해 노동자와 시민들에게 제공하는 방안을 주장하지 않았다. 

 

(2) 1919년 5월 선거. 사회민주당이 지방 의회 선거에서 54.2% 득표함.


1921년 12월 29일. 빈(Wien-비엔나)이 독립 주가 되었다. 오스트리아 연방에서 거둔 세금의 절반 정도를 비엔나 시가 환불받을 수 있게 됨. 비엔나 시 재정이 튼튼해짐. 
또한 예산 독립적 위치, 비엔나  시 자체 세금(지방세) 거둘  수 있게 되었음.
이러한 비엔나 시의 재정적 상황이 바뀌게 되자,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변화를 겪게 된다. 
이것은 정책에서. 사회민주당이 미리 준비한 계획적인 것도 아니고, 혁명가들의 이념적인 충성에 기인한 것도 아니었다.

(3) 논문 저자(바게나, 베닝어)의 주장 –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를 포함한 ‘진보적 인문주의’ 


두 가지 요소가 ‘붉은 비엔나’을 만드는데 주요한 역할을 했다. 

(a) 제도적인 투과성(institutional permeability) 투과성이란 막히지 않고 액체가 흘러들어가 퍼지는 현상임. 어떤 정치적 생각,구상,발안 자체가 제도로 스며들었음. 
(b) (정치적) 가치에 의해 추동되는 실용주의 ( a high degree of value-driven pragmatism ) 

1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에, 보수파 기독사회당이 행정 공무원을 증원함. 
그런데 사회민주당 정부는, 사민당에 적대적인 공무원들을 상대해야 했다. 설상가상 사민당 내부 전문가 부족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사민당 야콥 로이만(Jakob Reumann) 시장이 한 일은 공무원 양성을 위한 ‘행정 아카데미’ 창립.

사회민주당의 가장 큰 목적과 목표는 가난한 사람과 노동자들의 삶의 질 향상이었다.  
노동운동 내부에는 이데올로기 색채가 다양했고, 다양성을 인정함. 
나이트 (Knight, 2017) 에 따르면, 이러한 운동 방향성을  “추구자와 의심자, 휴머니스트, 좋음을 믿는 사람” “seeker and doubter, humanist, believer in the good”

‘붉은 비엔나’의 이념적 토대는 ‘진보적인 인문주의 progressive humanism’이고, 이것의 특징은 은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을 포함, 다양한 정치적 문화적 담론들에 개방적임.

(4)  두 사람이 중요하다. 은행가 후고 브라이트(Hugo Breitner) – 재정 조달 담당.
해부학자 겸  의사, 울리우스 탄틀러 (Julius Tandler) – 건강 제도 수립.

브라이트너 고민:  “빈 정부의 재정적 적자/하락 아니냐?” 이 문제를 풀어야했음.


a. 1단계. 아파트 주인(소유자)가  비엔나 시당국에 ‘빈 집’을 신고해준다.
그러면 시 당국이 성공적인 주택 교환에 나섬. 그 빈집을 집구하는 사람에게 알려주고. 대가족들이 새로운 아파트를 찾게끔 시당국은 도와준다. 


1919~1925년 사이, 비엔나 시 정부는 44,838채 아파트를 소유하게 되었고, 무주택자 숫자를 절반으로 줄였다. (1913년과 비교해서)
그러나 이렇게 주택을 재분배해 준다고 해서 주택 공급 부족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무주택자들은 교환할 수 있는 집이 없었기 때문이다.


비엔나 사회민주당 의회가 이 주택의 재배치에 신경쓰고, 주택의 직접 건설에 나서지 않았던 이유는?  오스트리아 사회의 가치, 경험, 충성심, 전통 때문임.

b. 시 당국이 직접 주택을 건설하게 된 동기. 세금으로 직접 사회주택을 짓자. 


공동체 사회주의 (Community socialism) 개념. 사회민주당의 경험(정부)의 토대 위에서 나오게 되었다.  사회민주당 우파였던 칼 레너(Karl Renner)가 직접 주택 공급안 주장. 


당시 사회민주당 지도자 오토 바우어(Otto Bauer)는 엥엘스를 그대로  따라, 자본주의 하에서는 주택 문제는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 주택의 사회화 (socialization)방안을 주창. 그래서 “세금을 주택 건설 자금으로 사용하자는 방안’에 대해서 경시했다.

현실에서 엥엘스의 ‘주택의 사회화’ socialization of housing 방안이 정치적으로 성공하지 못하자 부르주아 개혁가들이 옹호했던 방법들, 즉 시장에서 비영리 행위자의 ‘증진 promotion’ 개념 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후고 브라이트너처럼, 바우어 역시 고전적 거시경제학에 대해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무비판적 수용을 받아들였다. (자본주의) 시장은 국가의 규제에 영향을 받지 않는 자율적인, ‘자연적’ 힘이라고 받아들였다는 의미.  


또한 국가의 의무란 대차대조를 통해 결산하고, 문제를 해결하고, 투자자 신뢰를 잃어버리지 않게 하다. 주택 시장에서 악영향을 줄이는 것은, 다음과 같을 때만이 현실적이다. 만약 현재 주어진 예산 프레임 안에서 ‘감당할 수 있는 , 적정 가격으로 살 수 있을 때’ (affordable)만이 현실적이다. 현재 주택 시장이 책정된 예산 범위 안에서 감당할 수 있는 비용일 때만이, 주택시장의 악영향을 줄여나갈 수 있다고 인식했음. 

따라서 1912년의 개정된 시당국 프로그램도, 바우어 혹은 레너도 당시 주택정책을 “복지, 보건, 교육, 문화, 노동자 계급의 정체성, 참여 사회주의”에 대한 통합된 접근으로서 간주하지 않았다.

(5) 통합된 접근이 시작되다. 1921년 변화. 비엔나 시 당국이 직접 재정을 투하, 주택을 건설하기로 했다. 누진세와 시당국 채권 발행으로 재정 조달. 
 
문제 핵심은 비엔나 시 당국의 재정조달. 1921년 오스트리아 연방정부가 예산 삭감, 긴축 방향.
비엔나 시당국이 할 수 있는 일은, 세금을 올리는 수밖에 없었고, 독립적인 주로서 후고 브라이트너가 ‘누진세’를 도입했다. 

11년간 재임 기간, 브라이트 정적들은 그의 누진세 정책을 “조세 볼셰비키주의”로 부르고, 경제를 목졸라 죽인다고 비난했을 정도임.

후고 브라이트너의 재정 정책은 실제로 보수적이고, 시 자급자족 원리와 시 예산 균형 원리에 기초해 있었다. 

당시 3가지 종류의 조세, 1)사치세, 2)자본 소득세, 토지세, 주택세, 3) 서비스 수수료,
세금 정책의 목표는 저소득층의 부담을 덜고, 자본과 자산에 세금을 부과하려고 함.
자본 소득세 도입함.

1923년 1월, 아주 가파른 누진적(진보적) 주택세를 도입. 
노동자의 아파트는 1년에 11실링, 호화 고급 주택 (월세로 환산하면, 노동자 주택(flat) 연간 월세의 140배 정도되는) 경우, 22,770 실링을 주택세로 부과했다. 노동자 주택에 비해 거의 2000배나 많은 주택세였다.

사치세 (브라이트너세 Breitner tax로 불림)의 경우, 그 범위는, 오페라 감상, 영화 연극 감상, 삼페인, 사치 음식, 가정부 고용, 경마 등까지 포함.
 
재산세 (property tax)의 경우, 비엔나 시의 세입자의 82%는 22%의 재산세를 납부한 반면, 가장 비싼 재산(집)의 0.55%는 45% 재산세를 납부했다. 

그 다음  ‘복지세 welfare tax ’ 자본가(고용주)가 노동자 임금 총액의 일정 비율을 세금으로 낸다. 이러한 조세들 덕분에, 비엔나 시당국은 일상 필수품의 판매세를 폐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누진세 제도와 특수목적으로 발행한 채권에 힘입어, 두번째 결정적인 주택 정책의 변화가 발생했다.

(6) 시 소유 토지를 30%까지. 1923년, 빈 시당국은 주택공급을 민간 개발업자에 맡기지 않고, 5년 안에 2만 5000 가구 주택을 직접 건설하기로 했다. 시당국이 주택개발업자가 되었다.

왜 이렇게 빈 시당국이 직접 주택 건설자가 되었는가? 


(a)뤼거 시대 the Lueger era.
도시 인프라는 상대적으로 새롭고, 투자 조건들과 유지 비용은 적었다. 따라서 예산을 주택 건설에 먼저 배치했고, (도로, 병원, 학교 건설보다 주택건설을 먼저함). 

(b) 빈 시당국이 대규모 토지를 소유했다. 빈 시당국의 대규모 토지 매입이 가능했던 원인들, 토지 가격이 감소해서다. (강력한 임대료-월세 통제, 세입자보호, 인플레이션 결과) 1918년 시 당국은 빈 시 전체 영토의 17%의 토지를 소유했다.1930년에는 30%까지 끌어올렸다.

붉은 비엔나만의 고유한 ‘적정 가격의 주택’ 유형을 건설할 수 있었고, 그 대표적인 사례가 칼-맑스-뜰이라는 뜻을 지닌, 칼 맑스 호프였다. 1927년에 착공해 1930년에 완공했다. (Karl Marx Hof)
이 공동주택 (아파트)의 특질은, 크고, 상대적으로 한적하고, 녹지대가 많은 정원(뜰)이었다.

(c) 시 당국이 주택 건설 프로그램 성공을 위해, 직접 건설과 관리의 주체가 되었다. 비엔나 사회주택의 성공에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첫번째 요소.시 당국이 직접 주택 건설 과정을 관리감독함으로써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다. 

두번째 성공요소, 시당국 내부, 재정, 경제 기획, 기술 업무와 주택부서간의 협업 증진됨.
세번째 성공 요소. 치밀한 계획, 재정조달, 프로젝트 관리에 대한 영구적인 감시.

(d) 공동주택 공급 현황  
1927년 3만 가구 건설 공급,
1928~1933년 사이, 3만 가구 건설 공급,
시영 주택 총, 63,934 채.

(e) 주택의 질

수퍼 블록( super blocks) 의 건설이었다. 건축양식. 비용 절감 효과 컸고, 주택의 질도 높였다. 건물이 들어서는 주택단지(built-up) 영역이 전체 토지의 50%를 초과해서는 안된다 (1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85%). 
칼-맑스-뜰(정언) 주택은 18.4%으로, 정원과 녹지대가 그만큼 많게 설계되었다.


건축 구조에서도,  대기실, 독립 화장실도 구비. 공용 목욕탕, 세탁장도 갖춤. 내부 정원.
주택비용을, 노동자 임금의 (가처분 소득)의 25%에서 5%까지 낮춘다는 목표는 달성되지는 못했지만, 민간(사적 월세) 임대료보다는 낮았다.

(f) 칼-맑스-뜰(정원) 부대 시설.

이외에도, 울리우스 탄틀러가 건강,보건 위생, 돌봄 제도를 도입.
고아원 운영. 
비엔나 시 교육 기관 (Pädagogisches Institut der Stadt Wien)  
교육과 주거 정책은 사회민주당의 핵심 정책임. 
유치원 중시. “Whoever builds places for children tears down prison walls” 어린이를 위한 왕국을 건설하는 자는 감옥 벽들을 무너뜨린다.”
 
주택만 공급한 것이 아니라, 돌봄, 교육, 보건건강, 성인 교욱, 문화정책 5가지를 더 준비했다.
공동주택이 단지 사는 곳뿐만 아니라, 공동체 발달, 사회적 엔지니어링, 정치 의식의 공간으로서 역할.

3가지 요소 성공: 1)제도 2) 비전 (굳은 강경 마르크스주의자 아니라, 진보적인 휴머니즘) 3)비계 (보조, 지원 체제: scaffolding) 

 

 

참고 논문

 

저자- 헨드릭 바게나 (Hendrik Wagenaar), 플로리안 베닝어 (Florian Wenninger) 

제목 - 심사숙고와 토론을 통한 정책 분석, 상호연관성과 제도적 설계. "붉은 비엔나"의 교훈

Deliberative policy analysis, interconnectedness and institutional design: lessons from “Red Vienna”

저널 출처 - POLICY STUDIES,2020, VOL. 41, NO. 4, 411–437

 

 

 

 

2020_-_Hendrik_Wagenaar_-_Deliberativepolicyanalysisinterconnectednessandins[retrieved 2021-10-23].pdf
1.80MB

 

 

위 논문의 목표.

 

논문 목적과 목표.


정책입안자에게 복합성 개념은 중대한 도전이다.
그래서 세상 일에 개입하려는 정책입안자는 복합성의 가장 핵심적 측면인 상호연관성 (interconnectedness) 개념을 파악해야만 튼실하고 차별적인 정책을 고안해 낼 수 있다.


심사숙고와 토론을 통한 분석법 (DPA)는 상호연관성 문제를 다루기 위해 작은 집단의 심사숙고와 토론을 추천한다.
그렇지만 복합 체계에서 상호작용을 통해 발생하는 현상들은 단순한 추정으로써 저차원 현상들로부터 재구성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그 현상들은 법, 조직,제도와 같은 총체적인 현상을 연관되기 있기 때문에, 단순한 사람들 사이 관계를 초월해 있다. 
이러한 종류의 조직의 상호연관을 잘 다루기 위해서는 제도적 디자인을 통해 이러한 총체적 독립적 기관들에 지적으로 개입하는 능력이 요청된다.



첫번째, 우리는 ‘통합적 통치(governance)’의 가장 눈에 띄는 성공적인 역사적 사례, 즉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15년간 주택정책 “붉은 비엔나”를 설명해보겠다.우리의 목적은 ‘상호연관성’과 딱 들어맞는 정책입안이 현실 세계에서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두번째 목적은 반사실적이다. ‘붉은 비엔나’시 공무원들은 실제로 우리가 “실행 중 디자인 design-in-practice”이라고 부르는 특정 형태의 제도적 디자인에 직접 개입했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세번째, ‘실행 중 디자인’은 ‘심사숙고와 토론을 통한 정책 분석 DPA’의 방법론적 병기에서 가장 기초적인 도구라는 것을 주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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