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주 <노숙자 부끄러움 마비> 컬럼 논리적 오류들
살아 생전에는 난 소피스트(지식 판매원)일 뿐이다. 반면 철학자는 수많은, 아마도 수 만명의 소피스트들의 시행착오 속에서 1명 정도 나온다.
철학자가 할 일은 세 가지이다. 절대적 권능을 가진 사람이나 신과 대화하거나, 현존 인구 70억과 대화하고 역사적으로 지구상에 존재했던 사람들과 대화하거나, 마지막으로 이 두가지가 넘사벽이면 자기 내면과 대화하는 것이다.
철학이 지혜의 사랑이라고 정의한다면, 지혜의 원천은 70억 인구의 공통 희로애락애오욕에 대한 추출이며 그들의 생활에 대한 개념화와 문장화(명제)이다. 그런데 이 작업이 가능한가? 불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쉬운 일인가?
다시 말하면 철학자란 과연 탄생할 수 있는가? 인구의 90%가 글자를 모르고 책을 못 읽던 시절, 인구의 0.01%도 안되는 불굴의 의지를 가진 사람들 중에 간혹 철학자가 나왔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 살아 생전에 안녕하지 못했고, 정신적 탄압과 외압에 노출된 사람들이거나, 제 명에 살지 못하고 죽은 이들이 적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등장했던 철학자들과 지금 우리 시대의 철학자가 같은가? 역사적으로 철학자는 대부분 남자들었는데, 그 시대가 지금 딸-바보 아빠 시대와 같은가?
강신주의 첫 번째 오류는 ‘나는 일개 소피스트일 뿐이오’ 라고 자기를 소개하지 않고, ‘나는 철학자요’ 하고 강연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철학자는 못되어도 철학의 뜻을 조금 아는 사람들이면, 70억 인구의 지식과 경험들 속에서 지혜를 추출해 낸다는 게 얼마나 힘든 고된 노역인지를 깨달을 것이다.
스피노자가 말한 ‘부끄러움 (치욕?)’이란 슬픈 감정인데, 내가 한 행동을 돌이켜볼 때 ‘아 내가 이렇게 행동하면 남들이 나를 비난하겠지?’ ‘아 부끄러워라. 쥐 구멍에라도 숨고 싶다’ 이런 상황이 발생했을 때, 내 머리 속에 ‘부끄러움’이라는 감정 개념이 생기는 것이다.
철학자(지혜를 사랑하는 자)와 소피스트(지식 판매원)의 차이를 무시해버리는 일은 부끄러운 일인가 아닌가? ‘요새 이 두 가지를 엄격히 구분하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어?’ 라고 해버리면 그건 철학자가 가져야 할 ‘두뇌’가 ‘심장’이 마비되었다고 볼 수 있다.
강신주의 두 번째 오류는 에세이의 논거가 부실하다는 점이다. 서울역 노숙자, 정신 마비, 제임스 조이스 <더블린 사람들>, 스피노자 <부끄러움:치욕/수치> 개념들을 세탁기 빨래감 넣듯이 막 쏟아넣었다.
그런데 정작 강신주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단순하다. 인생을 관성적으로 살아가지 말고 (*이걸 마비라고 진단), 마비를 극복하기 위한 ‘계기’ (일종의 회개의 계기)를 만들어서, 스스로 정신과 감정을 마비라는 잠에서 깨어나게 하자. 이것이다.
그런데 이 단순한 ‘회개하라’ 주장을 하기 위해서 서울역 노숙자를 논거로 들었는가? 강신주는 강연회에서 “자본주의 돈을 사랑하지 말고, 사람을 사랑하라”고 외치고, “공부못하면 서울역 청소부된다” 이렇게 학부모들이 자녀를 가르치면 안된다고 주장해오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이 특별한가?는 차치하고, 평소에 강신주 주장을 고려해보면, 서울역 노숙자들이 정신이 마비된 강시(좀비)라고 규정하거나 그런 비유는 자기 모순이다.
노숙자가 사회적 약자인데 강신주가 이들을 ‘정신이 마비된 자’라고 비난해서 강신주 주장이 잘못이라고 말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리고 노숙자(홈리스)는 사회적 악이고 정신적 마비 현상인가? 서울역 노숙자들 상당수가 97년 IMF 긴축 통치 후에 급격히 늘어난 생계형인 경우가 많다. 노숙자 발생 원인, 진단, 해법은 다양한 사회학적 조사를 통해서 이뤄질 수 있다.
숫자가 많고 적음을 떠나서 논리적으로만 따져보자. 노숙자들 가운데는 서울역을 해인사로 간주하고 ‘스님’ ‘비구니’처럼 살아가는 자발적인 행려자들도 있다. 이 숫자가 극소수라도, 그들이 서울 시민들이 먹을 수도 있는데 쓰레기통에 버린 음식을 먹고 산다거나, 팔리지 않은 제과점 빵을 얻어 먹고 산다면, 오히려 생태계에 기여하는 사람들 아닌가?
위 가정에 따라 논리적으로 생각해보자. 이러한 자발적인 노숙자가 5천만 인구 중에 20%에 육박해서 1천만명이 전국적으로 생겨난다면 ‘사회적 재생산의 마비’이지만, 어느 사회나 ‘정상?’이라고 하는 지극히 평균적이고 평범한 삶의 궤도에서 벗어나 사는 살아가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수녀님의 비율, 스님 비구니의 비율, 신부님의 비율도 그 중에 하나이다. 자발적인 노숙자 (홈리스) 역시 그 비율이 지극히 적지만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철학자임을 자처하는 강신주의 오류가 바로 이것이다. 노숙자 (홈리스) 현상에 대한 사회학적, 정치학적, 문화 인류학적, 경제학적 연구를 알아보지 않고, 도덕,바른생활 교과서처럼 ‘노숙자는 정신이 마비된 강시이다’라고 규정했다는 것이다.
정신적 마비 사례를 잘못 들었으니, 혹은 제대로 지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다음 강신주의 에세이 전개는 오리무중이 되는 것이다.
세 번째 오류는, 스피노자가 말한 부끄러움(pudor:shame)과 삼가다
(verecunida:modesty)에 대한 잘못된 이해이다. 스피노자는 ‘부끄러움’를 일종의 ‘슬픈 감정’이라고 규정한다. 기쁘거나 행복한 감정은 아닌 것이다. 내가 어떤 행동을 했는데, 그 행동들을 남들이 비난하거나 야단쳤을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 느끼는 감정이 ‘부끄러움’이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되겠는가? 풀이 죽고 기운도 빠지고 슬퍼지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부끄러움’을 타인과의 사회생활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슬픔’으로 규정했다.
강신주는 신문 칼럼에서 <부끄러움>을 ‘치욕:pudor: shame'으로 ’verecundia'를 ‘수치’로 번역하고 분류를 했다. pudor와 verecundia 는 모두 ‘부끄러움 shame : 수치심'으로 번역된다. 그런데 스피노자 <윤리학> 영어번역판에서는 <Pudor 부끄러움>과 < Verecundia: 부끄러움->삼가다:modesty>를 구분하는데, 이 <Verecundia:modesty: 부끄러움>의 의미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가장 가까운 단어는 ’삼가다‘이다. 우리가 보통 ’행동을 삼가다‘ 혹은 ’행동을 신중히 하다‘, 또는 ’마음 가짐을 삼가다‘라고 할 때 사용하는 단어이다.
스피노자의 <부끄러움: verecundia:modesty>는 <마음가짐과 행동을 삼가다: modesty>는 뜻을 함축하고 있고, 부끄러움 혹은 부끄러운 행동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러니까 내가 어떤 행동을 할 때, 혹은 하기 전에 ’아 내 행동이 행여 부끄러운 행동은 아닐까?‘하고 예방조치를 해주는 것이 바로 <verecundia: modesty: 삼가다>이다.
나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어떤 특정 사회구성원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사회적 역할이 있다. 그 역할 기대를 충족시키면 명예로운 사람이 되고, 충족시키지 못한 불명예로운 혹은 부끄러운 수치스런 존재가 된다. 그러한 역할 기대에 어긋나는 행동을 미연에 방지해주는 게 바로 이 <마음가짐과 생동을 삼가다 : verecundia: modesty>이다. 스피노자는 <삼가다 modesty> 반대말로 <부끄러운 줄 모름: 존경심이 없이 시건방짐 :impudentia: impudence>이라고 했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부끄러움: 수치>의 두 가지 단어, pudor와 verecundia를 빌어온 강신주의 노숙자 개념 규정에 따르면, 노숙자는 우리 사회에서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내지 못하면서도 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한마디로 노숙자는 불명예 시민인 것이다.
이런 노숙자 개념이 정치적으로 좌파건 우파건 간에 지배자 관점에 서 있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박근혜의 용어대로 ‘노숙자는 다 정상이 아니고,’ 강신주 진단대로 하면, ‘노숙자는 부끄러운 줄 모르는, 즉 부끄러운 행동을 해놓고도 그게 부끄러운 행동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impudentia’ 자이다.
그러나 노숙자도 단순하지 않다. 아주 거칠게 두 가지 범주로, 자발적인 노숙자와 비-자발적인 노숙자로 분류해본다고 할 때, 전자는 차치하고, 후자의 경우에도, 그 원인들은 스피노자의 ‘부끄러움' 틀로 해명되지 않는다.
강신주가 철학자건 소피스트건, 노숙자의 사회적 역사적 심리학적 원인들에 대한 규명을 하지 않고, ‘부끄러움이 없는 자’로 진단해 버리는 것은, 수 많은 연구 도구들을 동원해야 하는 것이 철학자의 사회적 역할인데,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부끄러운 행동이다.
(스피노자, 유리알을 갈고 닦다)
네 번째, 더 복잡한 문제가 남아 있다. 스피노자의 <부끄러움 = 마음과 행동을 삼가다: verecundia:modesty>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마땅히 사회 안에서 아버지로서 어머니로서 선생으로서 학생으로서 대통령으로서 장관으로서 대리로서 과장으로서 부장으로서 아들로서 딸로서 자기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불명예로운 시민이 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누가 어떤 기준으로 나에게 우리에게 ‘역할’을 주는가? 또 그 ‘기능과 역할’ 수행을 평가할 주체는 누구인가? 이 스피노자의 두 가지 <부끄러움>은 사실 맹자의 <수오지심>과 일맥상통한다. 그런데 이들의 <부끄러움> 개념은 사회가 농경제와 같이 변화의 속도가 자연의 시계에 맞춰져 있거나, 소규모 공동체 안에서 살아갈 때, 강력한 사회적 규범 자격을 가진다. 단적으로 말하면, 그런 단순한 자급자족 경제 공동체에서는, 위에서 제기한 역할 판단 ‘기준’이 단순할 수 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고모도 이모도 형도 누나도 동생도 제수씨도 형수씨도 처제도 다같이 논에서 일하고 밭에서 일하고 한 마을에 모여살 때와, 이들이 다 제각각 미국 한국 중국 베트남에 흩어져서 다 서로 다른 직업을 가지고 살아 갈 때, <부끄러움>의 내용과 측정 기준은 누가 어떻게 설정할 수 있겠는가?
철학자 강신주건 소피스트 강신주건, 신문 칼럼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일상의 관성과 타성에 빠져, 자기가 하는 일이 부끄러운 행동인 줄 모르는 자들이여 ! 회개의 기회를 얻어 마비당한 부끄러움을 부활하라!”는 강력한 처방전이다. 그런데 강신주의 처방은 시대착오적이다.
맹자나 스피노자의 <부끄러움> 개념은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있고, 그 개념들의 지시 대상 역시 아주 구체적이다. 맹자는 왕이나 군주를 대상으로 <수오지심>을 항상 간직하라고 했다.
스피노자는 <윤리학>에서 열거한 감정들은 반드시 정신의 통제 하에 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외적인 요소나 감정에 의해 좌지 우지 되지 않고, 신과 자연에 대한 깊은 성찰을 통해서 지혜로운 사람이 되라고 역설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정신의 평화를 즐길 줄 아는 사람의 행복이며, 결코 쉬운 길이 아니라고 해도, 고귀한 것이 쉽게 얻어지지 않듯이, 우리가 노력하고 또 도전할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스피노자의 <부끄러움> 개념은 맹자의 <수오지심> 정도의 높은 지위, 이론적 체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 않다. 그런데 두 사람 다 그 <부끄러움>의 실천 주체는 노숙자(홈리스)가 아니라, 맹자에게는 군주나 왕, 혹은 왕의 후보자들이고, 스피노자에게는 “정신의 평화”를 즐길 줄 아는 자들이다. 스피노자와 맹자에게 당신이 말한 <부끄러움>이 노숙자(홈리스)를 대상으로 하고자 한 말이요? 라고 물은다면, 맹자는 <연목구어>라고 답했을 것이고, 스피노자는 “닦던 유리나 닦게 해주시오”라고 ‘삼가’ 말을 아꼈을 것이다.
서미현 선생님의 글: (페이스북에서)
타임라인에 강신주씨의 칼럼에 대한 성토가 보이길래 호기심에 기사를 클릭했다. 강씨의 노숙자 비하 발언이 문제가 된 듯하다. 사실 강신주의 글을 주의깊게 읽어본 적이 없는데, 도대체 어떻게 쓰길래 그렇게 잘 나가는 인기강사가 됐나 갑자기 궁금했다.
노숙자는 정신적 '마비' 상태에 있다 -> 어떻게 노숙자를 인간으로 만들 것인가 -> (그에게 감정을 되살려 주어야 한다) -> 조이스의 <죽은 사람들>이란 단편을 보면 인간은 수치심을 가질 때 마비에서 벗어날 수 있다 -> 수치심은 인간의 감정이 살아 있다는 증거다 -> 마비된 사람은 감정을 가질 수 없다 -> 노숙자는 마비 상태에 있다 -> 어떻게 노숙자를 인간으로...(...무한루프)
즉 강씨의 논리를 따라가면 노숙자는 영원히 마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파탄에 이른다. 이쯤 되면 완전히 강씨는 XXX가 아닌가?!??
찾아보니 중앙선데이에 연재한 이 칼럼들을 모아서 강신주는 <강신주의 감정 수업>이란 책을 냈다. 책의 컨셉은 스피노자가 분류한 48가지 감정들을 48편의 세계문학 고전들과 매치시키고 저자의 감성적인 해설을 덧붙인 것이다. 여기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은 첫째, 유명인의 신문 연재 칼럼을 묶어 낸 책에 큰 기대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 둘째, 척 보기에 책의 컨셉이 솔깃하다거나 왠지 그럴듯한 숫자가 개입되어 있다면 그 책은 사기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 강씨가 스피노자를 잘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도 않지만, 48편이나 되는 세계문학을 어떻게 다 읽었겠는가? 태반이 아전인수, 견강부회일 가능성이 높다. 숫자 48을 맞추기 위해 별의별 짜집기를 다 해야 한다.
조이스의 <죽은 사람들>은 그의 유명한 단편집 <더블린 사람들>의 맨 끝에 배치된 단편으로, 영어 산문 강독수업의 단골 메뉴다. 예전의 영문학 번역자들은 <사자들>이라고 번역하곤 했는데, 덕분에 나는 소설을 읽기 전까지 이게 아프리카의 사자들인지 메시지를 전하는 사자들인지 도통 몰랐다. <분노의 포도>에서 포도가 포장도로의 포도인지 보라색 포도인지 책을 안 읽고는 알 수 없듯이.. 아무튼 강신주가 이 책을 읽었다면(안 읽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보는데) '마비'라는 단어를 이 칼럼에서처럼 아무렇게나 쓰지는 못했을 것이다.
'마비'(paralysis)는 <더블린 사람들> 전체의 핵심 키워드다. (조이스 자신이 그 단어를 제 소설집의 주제라고 스스로 말했기 때문에 연구자들은 약간의 수고를 덜 수 있었다.) 그건 강신주가 이야기하는 '개인의 정신적 불활성 상태'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일반적으로 영국의 지배하에 있었던 식민지 아일랜드-더블린의 질곡, 거기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의 지적, 정서적, 물질적 상황 전체를 가리키는 비유로 본다.
<죽은 사람들>의 주인공 가브리엘은 친영파 영문학 교수다. 칼럼에서 강신주가 "순수한 마이클과 달리 자신은 너무나 속물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라고 언급한 문장은 과도한 일반화인데, 소설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가브리엘이 수치심을 느낀 계기는 아내의 죽은 옛 연인 마이클이 그저 '아내의 첫사랑을 가져간 순수한 인간'이어서가 아니다. 마이클은 17살에 죽을 때까지 가스공장에서 일했던 하층계급 소년이었고 영국물을 잔뜩 먹은 '개화된' 더블린이 아니라 아일랜드 전통의 힘이 강한 골웨이 지역에 살았다. 조이스가 사용하는 단어 '마비'와 '수치심'에는 계급적, 역사적, 정치적 함의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소설을 제대로 읽은 사람이라면 강신주처럼 거칠게 일반화할 수가 없을 것이다. 또한 '마비'라는 한 단어만 따로 적출해서 '노숙자'에게 갖다붙이는 견강부회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무엇보다도 불쾌한 것은 강신주의 이 칼럼이 '노숙자의 마비상태 vs 중산층의 각성'이라는 단순하고 무신경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강신주가 소설을 읽지 않은 상태였다면 이런 구조를 의도했을 수도 없지만, 그래도 가브리엘이 어떤 출신배경을 가지고 있는지는 어렴풋이 알았을 것이다. 하긴 기초가 없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급하게 짜내서 글을 쓰다 보면 별의별 짓을 다 하게 되어 있다... 내 경험으로 그렇다.
p.s. 강신주의 노숙자 비하 발언만 보자면, 단순한 무신경이나 부주의나 개념 부족이 아닐 수도 있다. 도올 같은 사람들을 롤모델로 삼아 벤치마킹하는 과정에서 저런 식의 지르는 도발을 의도적으로 집어넣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도발을 해야 일단 눈길을 끄니까. 뭐 도발은 좋은데, 도올과 다른 점은 글의 중후반부가 너무 지리멸렬해서 이 용감한 도발이 도저히 해소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강신주 컬럼:
http://money.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7834413&ctg=1700
수치심은 정신이 살아있다는 증거
[중앙선데이] 입력 2012.04.07 23:10 / 수정 2012.04.09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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