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계획2021. 2. 28. 13:33

1. 통계

전세가격이 상승하고,

차라리 대출을 더 받아서라도 주택을 소유하려는 성향이 늘어나게 되었다.

 

2. 전국에 아파트 공사가 늘어나다.

 

3. 서울 집중 현상에 대한 대안.

 

 

 

 

 

 

https://bit.ly/3ktHDCk

 

미분양주택 17130가구 전월比 9.9% ↓…'역대최저' 기록

 

'공급품귀' 2019 6월 이후 감소세 지속

 

(서울=뉴스1) 김희준 기자 | 2021-02-28 11:00 송고

 

집값 상승에 주택 매수세가 이어지면서 미분양 물량이 역대 최저치를 갈아치웠다.

 

국토교통부는 28 '2021 1월 말 전국 미분양 주택'이 총 17130가구로 집계됐다고 밝혔다.

 

이는 전월 19005가구보다 9.9%(1875가구) 감소한 수치며

 

국토부가 미분양 통계를 집계하기 시작한 2000년 이래 역대 최저 기록이다.

 

종전 최저 기록은 2002 4 17324가구였는데 이보다 더 줄어든 것이다.

 

 

미분양 주택 물량은 2019 6(63705가구) 이후 꾸준히 감소하고 있다.

 

집값이 오르는 상황에서 전셋집 구하기도 어려워지자 실수요자 중심으로 미분양 주택 매수에 나선 것으로 풀이된다.

 

국토부 관계자는주택 매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미분양 물량이 꾸준히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수도권은 1861가구로 전월(2131가구)보다 12.7%(270가구), 지방은 15269가구로 전월(16874가구)보다 9.5%(1605가구) 각각 줄었다. 서울은 49가구로 전월(49가구)과 같았다.

 

 

'악성 미분양'으로 불리는 준공 후 미분양은 1988가구로 전월(12006가구) 대비 8.5%(1018가구) 감소했다.

 

 

규모별로는 85㎡ 초과 중대형 미분양은 전월(700가구) 대비 9.0%(63가구) 감소한 637가구로 집계됐다.

 

85㎡ 이하는 같은 기간 18305가구에서 16493가구로 9.9%(1812가구)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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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비교/노동2021. 2. 24. 19:50

회사의 과실치사, 안전미비로 인한 노동자 사망은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다.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최소장치인 '중대재해기업 처벌법', 과실치사 기업 처벌에 대한 법률안이 다시 만들어져야 한다.

예방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5인~ 99인 이하 회사의 경우, 안전 시설이나 안전교육, 안전담당자 배치가 제대로 이워지지 않는 곳이 많다. 

 

인천 재활용 공장.

작업 특징:  재료 자체가 굉장히 위험하다. 건물 철거할 때 발생하는 골재,철근, 콘크리트 분리작업. 대형 자석으로 철근을 선별해 내는 재활용 공장.

문제점: 안전 담당 직원 부재

 

건물을 철거할 때 나오는 골재나 철근, 콘크리트를 컨베이어벨트 위에 쌓아놓고 대형 자석으로 철근을 선별해 재활용

 

출처: https://bit.ly/2ZKLqll

 

 

산재 청문회 하루 만에 또 끼임 사고…노동자 사망 홍영재 기자

 

yj@sbs.co.kr 작성 2021.02.23 20:32

 

- <앵커> 인천의 한 공장에서 야간작업을 하던 50대가 숨졌습니다.

 

일터에서 숨지거나 다치는 사람 없게 하자고 어제(22일) 국회에서 산업재해 청문회가 열렸는데 하루 만에 또 안타까운 사고가 난 것입니다.

 

홍영재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기자> 인천 서구 오류동에 있는 한 재활용공장.

 

오늘 새벽, 야간작업을 하던 50대 원 모 씨가 사고로 숨졌습니다.

 

이 공장은 건물을 철거할 때 나오는 골재나 철근, 콘크리트를 컨베이어벨트 위에 쌓아놓고 대형 자석으로 철근을 선별해 재활용하는 곳입니다.

 

 

 

 

숨진 노동자는 컨베이어벨트에 낀 이물질을 제거하는 작업을 맡았는데, 작업 도중 컨베이어벨트에 끼는 사고를 당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사고 직전 컨베이어벨트 끝부분에 철근이 박혔는데, 원 씨가 벨트 밑에 손을 넣어 철근을 빼는 순간 벨트가 다시 움직였고 그대로 빨려 들어간 것입니다.

 

 

 

원 씨는 머리와 왼쪽 팔을 크게 다쳐 현장에서 숨졌습니다. 당시 사고현장에는 원 씨를 포함해 공장 노동자 6명이 있었는데, 경찰은 산업안전보건법상 꼭 상주해야 하는 안전관리자가 없었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사고 업체 관계자 : 지금 다 자리에 안 계세요.]

 

고용노동지청도 현장 조사를 진행했습니다. 특히 컨베이어벨트에서 이물질을 빼낼 때 기계 작동을 중단시키고 작업했는지를 중점적으로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고용노동청 관계자 : 관리감독자가 지정됐고 관리감독자가 업무 수행했는지도 저희가 따져볼 거고요. 안전조치 안 한 부분 있는지도….]

 

경찰은 내일 원 씨에 대한 부검을 마친 뒤 회사 관계자들의 과실 여부를 조사할 계획입니다.

 

 

 

출처 : SBS 뉴스

 


원본 링크 :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6219244&plink=THUMB&cooper=SBSNEWSPROGRAM&plink=COPYPASTE&cooper=SBSNEWS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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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비교/의료2021. 2. 17. 17:42

버니 샌더스가 가장 많이 했던 말들 중에 하나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 중에 미국의 사회보장 제도, 특히 공공의료보험, 휴가 제도, 은퇴 이후 연금 제도가 가장 뒤처져 있다고 지적.

 

이것은 미국의 국제적인 수치다. 

1위는 덴마크, 2위는 네덜란드, 핀란드, 스웨덴, 스위스, 노르웨이, 독일, 영국, 캐나다, 일본 순서.

미국은 30위.

 

 

 

Developed nations with the best healthcare, family leave, vacation & retirement benefits:

 

1. Denmark 2. The Netherlands 3. Finland 4. Sweden 5. Switzerland 6. Norway 7. Germany 8. UK 9. Canada 10. Japan

 

 

30. United States - Dead last.

 

 

We must end this international embarrass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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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history)2021. 2. 17. 11:11

전옥주 여사

 

 

기사 출처

 

 

https://bit.ly/3as6T8C

 

‘5·18 항쟁의 목소리’ 전옥주씨, 오월 영령 곁에 잠들다

시민참가 호소 ‘거리방송’ 전옥주씨 별세고문·간첩조작·옥살이 후유증 시달려

www.hani.co.kr

출처 : 

https://bit.ly/3pvQN2a

 

“광주 시민 여러분…” 5·18 가두방송의 주인공 전옥주씨 세상 떠나

16일 급성질환으로 사망

www.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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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history)2021. 2. 17. 08:59

 

 

'YWCA 위장결혼 사건 재심 무죄' 백기완에 5천만원 형사보상

송고시간2020-03-30 10:15

 

 

https://bit.ly/3as7Td3

 

'YWCA 위장결혼 사건 재심 무죄' 백기완에 5천만원 형사보상 | 연합뉴스

'YWCA 위장결혼 사건 재심 무죄' 백기완에 5천만원 형사보상, 고동욱기자, 사회뉴스 (송고시간 2020-03-30 10:15)

www.yna.co.kr

(서울=연합뉴스) 고동욱 기자 = 민주화 운동의 상징적 인물인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1970년대 겪은 'YWCA 위장결혼 사건'에 대해 재심 무죄를 받은 데 이어 5천여만원의 형사보상을 받게 됐다.

 

30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고법 형사6(오석준 이정환 정수진 부장판사)는 계엄법 위반 혐의에 대해 재심을 거쳐 무죄가 확정된 백 소장에게 구금에 대한 보상으로 5143만원을, 비용 보상으로 200만원을 지급하는 형사보상 결정을 내렸다.

 

'YWCA 위장결혼 사건' 1979 10월 박정희 대통령 사망 후 간접선거로 대통령을 선출하려는 신군부 세력에 반발해 윤보선, 함석헌 등의 주도로 같은해 11월 서울 YWCA 회관에서 결혼식을 가장해 펼쳐진 대통령 직선제 요구 시위를 말한다.

 

이는 신군부 세력에 반기를 든 첫 군중 집회로 평가받는다.

 

백 소장 등 시위를 주도한 핵심 인물 14명은 당시 용산구 국군보안사령부 서빙고 분실로 끌려가서 모진 고문을 당했다.

 

백 소장은 계엄법 위반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1980년 징역 1 6개월을 선고받은 뒤 1981년 사면을 받아 풀려났다.

 

지난해 서울고법은 "계엄 포고가 당초부터 위헌·무효인 이상, 계엄 포고 1항을 위반했음을 전제로 한 이 사건 공소사실은 범죄가 되지 않는 경우에 해당한다"며 백 소장에게 39년 만에 무죄를 선고했다.

 

한편 법원은 백 소장과 함께 재심 무죄를 선고받은 10명에 대해서도 3천만원∼15천만원의 형사보상 결정을 했다.

 

sncwook@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020/03/30 10:15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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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history)2021. 2. 17. 08:51

백기완 선생과 한국 현대 정치사 .

 

백기완의 길 (2), 1979년 YWCA 직선제 실시 데모, 고문 후유증 ~ 1987년 대선 후보와 김대중 김영삼 단일화를 위한 사퇴.

 

 

백기완 선생과 한국 현대 정치사 .

 

백기완의 길 (2), 1979년 YWCA 직선제 실시 데모, 고문 후유증 ~ 1987년 대선 후보와 김대중 김영삼 단일화를 위한 사퇴.

 

1.     1979년 YWCA 위장 결혼 집회 사건. 정치적 주장

 

1979년 12월 24일. 유신체제 철폐, 통일주체회의 대통령 선거 반대, 직선제 실시, 긴급조치 피해자 복직 복교 복권 조치

 

집회 주체: 양순직, 박종태, 백기완, 이우회, 김정택, 함석헌, 윤보선 등, 당시 재야인사, 기독교 종교계, 구 공화당 국회의원, 전 민주당 대통령 등 다양한 민주화운동 세력이었음.

 

 

 백기완 선생은 1980년 5월 13일, 병 보석으로 출감했으나, 고문 후유증이 엄청났다고 한다.

후배 최열이 백기완을 강원도로 데리고 가 요양시켰고, 뱀을 사다가 먹였다고 증언했다.

 

 

1981년 3월 2일자. 전두환이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정치범들을 사면했다. 백기완 사면.

 

 

1984년 10월 9일자. 백기완 선생이 통일문제 연구소를 개설. 은평구 진관외동.

 

1985년 4월 18일자. 백기완은 사면 이후, 가택 연금을 자주 당했다.

1984년 속칭 학원자유화 이후, 대학가에 총학생회가 학생운동의 거점이 되기 시작했고, 백기완은 초청 연설자들 중 한 명이었으나, 전두환 정권이 이를 막았다.

 

 

1985년 10월 4일자.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민통련) 의장이 당시 문익환 목사였고, 서울지부장이 백기완이었다.

백기완 선생은 가택연금, 연행, 석방을 반복했다.

 

 

1986년 12월 8일자.

 

민통련 부의장이 된 백기완 다시 연행. 연행 이유는 문귀동이 부천에서 서울대 학생운동가 권인숙 양을 성추행한 이후,

이를 규탄하는 집회가 명동 성당에서 열렸는데, 백기완이 당시 집회 격려사를 했기 때문이다.

 

 

1987년 5월 20일. 명동 성당 집회로 구속된 백기완은 징역 8개월, 집행 유예 2년 선고를 받고 구치소에서 풀려났다.

6월 항쟁 이후 김대중 , 백기완 등은 정치적 사면을 받게 된다.

 

 

1987년 11월 23일, 백기완은 김대중 김영삼의 분열을 막고, 후보 단일화를 위해, 무소속으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게 되었다.  김대중 김영삼 후보가 정당이라는 '도당' 중심에서 벗어나, '민중'에 기초해 야권 후보 단일화를 이뤄야 한다고, 백후보는 주장했다.

 

 

1987년 11월 25일자. 동아일보.

 

민통련 부의장이었던 백기완이 무소속 후보로 출마선언을 하자, 당시 분열되었던 재야의 속사정을 반영하듯이, 민통련은 "백선생의 출마는 민통련 의결 기구의 결정과는 무관한 개인적 결정일 뿐이다"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민통련 의장이었던 문익환은 김대중 후보를 비판적으로 지지했다.

 

 

프랑스 대선에서 채택하고 있는 '결선 투표제도'를 제 6공화국 헌법과 선거법에 삽입하지 않았던 김대중과 김영삼은 자신들이 1위를 할 수 있다는 근거없는 자신감에 들떠있었다.

 

  

결선 투표 제도도 없고, 아무런 제도적 장치도 마련하지 못한 독재타도 운동과 민주화운동 세력은, 무소속 백기완의 양김씨 후보 단일화 논의를 이끌어 갔다. 그러나 이것마저도 김대중 김영삼의 근시안적 탐욕으로 무산되었다.

백기완 후보의 눈물 호소도 소용이 없었다.

 

  

1987년 12월 14일자. 백기완 후보는 사퇴하면서, 노태우를 제외하고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당당히 투표하라는 입장을 밝혔다.  항간에 떠돌던 김영삼 지지설은 부정했다. 후보직 사퇴 이유는 "민주 세력의 대연대를 이룩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후보직을 사퇴한다"였다. "민주세력의 후보 단일화안이 보수야권의 오랜 분열주의로 인해 산산히 깨진데 대해 한없이 안타깝게 생각한다. 표를 흩뜨리지 않게 하는 것이 애국자의 길이라 믿기에 여러분 곁을 떠난다"고 눈물을 흘렸다.

  

 1987년 12월 16일. 대선에서 1212 군사쿠데타, 80년 5월 광주 학살자 주역 중에 한 명인 노태우가, 김대중-김영삼의 분열 속에 1위로 당선되었다.

김영삼과 김대중이 얻은 득표율 합산은 53.1%로, 노태우 36.6%보다 훨씬 더 많았다.

독일 사회학자 겸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는 이런 대선 결과를 보고, '넌센스 Unsinn' 이라고 평가했다.

 

 

 

 

 

 

 

정치적 주장

 

1979년 12월 24일. 유신체제 철폐, 통일주체회의 대통령 선거 반대, 직선제 실시, 긴급조치 피해자 복직 복교 복권 조치

 

집회 주체: 양순직, 박종태, 백기완, 이우회, 김정택, 함석헌, 윤보선 등, 당시 재야인사, 기독교 종교계, 구 공화당 국회의원, 전 민주당 대통령 등 다양한 민주화운동 세력이었음.

 

 

 

 

 

 

 

 

 

 

 

 

백기완 선생은 1980년 5월 13일, 병 보석으로 출감했으나, 고문 후유증이 엄청났다고 한다. 

후배 최열이 백기완을 강원도로 데리고 가 요양시켰고, 뱀을 사다가 먹였다고 증언했다.

 

 

 

 

1981년 3월 2일자. 전두환이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정치범들을 사면했다. 백기완 사면.

 

 

 

1984년 10월 9일자. 백기완 선생이 통일문제 연구소를 개설. 은평구 진관외동.

 

 

 

 

 

1985년 4월 18일자. 백기완은 사면 이후, 가택 연금을 자주 당했다. 

1984년 속칭 학원자유화 이후, 대학가에 총학생회가 학생운동의 거점이 되기 시작했고, 백기완은 초청 연설자들 중 한 명이었으나, 전두환 정권이 이를 막았다.

 

 

 

 

 

 

1985년 10월 4일자.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민통련) 의장이 당시 문익환 목사였고, 서울지부장이 백기완이었다.

백기완 선생은 가택연금, 연행, 석방을 반복했다.

 

 

 

 

1986년 12월 8일자.

 

민통련 부의장이 된 백기완 다시 연행. 연행 이유는 문귀동이 부천에서 서울대 학생운동가 권인숙 양을 성추행한 이후,

이를 규탄하는 집회가 명동 성당에서 열렸는데, 백기완이 당시 집회 격려사를 했기 때문이다.

 

 

 

 

 

1987년 5월 20일. 명동 성당 집회로 구속된 백기완은 징역 8개월, 집행 유예 2년 선고를 받고 구치소에서 풀려났다.

6월 항쟁 이후 김대중 , 백기완 등은 정치적 사면을 받게 된다.

 

 

 

 

 

1987년 11월 23일, 백기완은 김대중 김영삼의 분열을 막고, 후보 단일화를 위해, 무소속으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게 되었다.  김대중 김영삼 후보가 정당이라는 '도당' 중심에서 벗어나, '민중'에 기초해 야권 후보 단일화를 이뤄야 한다고, 백후보는 주장했다.

 

 

 

 

1987년 11월 25일자. 동아일보.

 

민통련 부의장이었던 백기완이 무소속 후보로 출마선언을 하자, 당시 분열되었던 재야의 속사정을 반영하듯이, 민통련은 "백선생의 출마는 민통련 의결 기구의 결정과는 무관한 개인적 결정일 뿐이다"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민통련 의장이었던 문익환은 김대중 후보를 비판적으로 지지했다.

 

 

 

 

프랑스 대선에서 채택하고 있는 '결선 투표제도'를 제 6공화국 헌법과 선거법에 삽입하지 않았던 김대중과 김영삼은 자신들이 1위를 할 수 있다는 근거없는 자신감에 들떠있었다.

 

 

 

 

 

결선 투표 제도도 없고, 아무런 제도적 장치도 마련하지 못한 독재타도 운동과 민주화운동 세력은, 무소속 백기완의 양김씨 후보 단일화 논의를 이끌어 갔다. 그러나 이것마저도 김대중 김영삼의 근시안적 탐욕으로 무산되었다.

백기완 후보의 눈물 호소도 소용이 없었다.

 

 

 

 

 

 

 

 

 

1987년 12월 14일자. 백기완 후보는 사퇴하면서, 노태우를 제외하고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당당히 투표하라는 입장을 밝혔다.  항간에 떠돌던 김영삼 지지설은 부정했다. 후보직 사퇴 이유는 "민주 세력의 대연대를 이룩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후보직을 사퇴한다"였다. "민주세력의 후보 단일화안이 보수야권의 오랜 분열주의로 인해 산산히 깨진데 대해 한없이 안타깝게 생각한다. 표를 흩뜨리지 않게 하는 것이 애국자의 길이라 믿기에 여러분 곁을 떠난다"고 눈물을 흘렸다.

 

 

 

 

 

1987년 12월 16일. 대선에서 1212 군사쿠데타, 80년 5월 광주 학살자 주역 중에 한 명인 노태우가, 김대중-김영삼의 분열 속에 1위로 당선되었다.

김영삼과 김대중이 얻은 득표율 합산은 53.1%로, 노태우 36.6%보다 훨씬 더 많았다.

독일 사회학자 겸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는 이런 대선 결과를 보고, '넌센스 Unsinn' 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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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비교/노동2021. 2. 17. 06:21

최철원이 대한 아이스하키 협회장 선거에서 당선되었으나 대한체육협회가 인준을 거부했다. 올바른 결정이다. 대한 아이스하키 협회와 하키인들도 이번 기회로 각성을 해야 한다. 아이스하키 저변확대와 선수지원도 절실하지만, 노동자를 야구방망이로 폭행한 최철원은 공직이나 스포츠 조직의 대표가 되어서는 안된다.

 

최철원은 누구인가? SK 최태원의 사촌 동생이다. 

 

최철원은 2010년  SK 본사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던 50대 탱크로리 화물기사 유홍준을 알루미늄 야구 방망이로 폭행했다. 유홍준씨는 전치 2주 부상을 당하고, 최철원은 1천만원짜리 수표 2장을 유씨에게 맷값이라고 던져줬다. 최철원은 1심에서 징역 1년 6개월, 2심에서는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맷값 폭행 만행을 저지른 최철원, 징역 1년 6개월 집행유예 3년.   

 

 

 

 

 

 

체육회 ‘맷값 폭행’ 최철원 아이스하키협회장 인준 거부

황민국 기자 stylelomo@kyunghyang.com

 

/ 2021.02.16 22:05

 

체육회 ‘맷값 폭행’ 최철원 아이스하키협회장 인준 거부

 

대한체육회가 ‘맷값 폭행’ 사건을 일으켰던 최철원 대한아이스하키협회장 당선자(마이트앤메인 대표·사진)의 인준을 최종 거부했다.

 

대한아이스하키협회는 16일 대한체육회에서 최 당선자의 인준 불가 공문을 받았다고 밝혔다. 최 대표는 지난해 12월 제24대 회장 선거에 출마해 총 82표 중 62표를 얻어 당선증을 받고 체육회에 인준 신청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체육회는 그가 과거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것을 결격 사유로 들어 인준을 거부했다.

 

최 대표의 선택지는 체육회를 상대로 소송에 나서거나 사퇴하는 것이다.

 

최 대표는 2015년 영화 <베테랑>의 모티브가 된 인물로 알려졌다. 그는 2010년 회사 인수·합병 과정에서 고용승계를 요구하며 SK 본사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던 탱크로리 기사를 회사 사무실로 불러 야구방망이와 주먹으로 때린 뒤 맷값으로 2000만원을 준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이 범행으로 1심에서 징역 1년6개월을 선고받은 최 대표는 2심에서 집행유예를 받아 풀려났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102162200055&code=980701#csidxbc15838fa923c5dbc043eb3299f2633

 

 

기사 출처: https://bit.ly/3bg5TUe

 

  최철원, “한 대에 100만원” 야구방망이 폭행…피해자 눈물로 인터뷰

 

: 2018-05-02 10:48

 

 

SK그룹 최태원 회장의 사촌동생이자, 물류회사 M&M 대표였던 최철원으로부터 8년 전 ‘맷값’이라며 야구방망이 폭행을 당한 피해자는 당시의 기억으로 여전히 고통받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약자들이 당당하게 살 수 있는 정의로운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2일 KBS는 ‘맷값 폭행’의 피해자였던 유홍준씨와의 인터뷰를 통해 당시 사건에 대해 재조명했다. 최철원은 지난 2009년 동서상운을 인수하면서 화물기사들에게 화물연대를 탈퇴하고 노조에 가입하지 말 것을 고용승계 조건으로 내걸었다.

 

 

화물연대 지회장이였던 유씨는 계약 체결이 거절됐고 2010년 1월부터 SK본사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였다. 10월에서야 차량을 인수해주겠다는 답을 받고 최씨가 대표였던 M&M 사무실로 향했지만 그곳에는 야구방망이를 든 최철원이 있었다.

 

최철원은 유씨에게 “합의금이 2천만 원이니까 한 대에 100만 원이라 치고 스무 대만 맞아라”며 열 대를 때렸고 ‘살려달라’는 유씨에게 “그럼 지금부터는 한 대에 300만 원씩이다”라며 세 대를 더 때렸다. 그리고 화장지를 둘둘 말아 유 씨의 입안에 밀어넣고 얼굴을 마지막으로 때렸다. 최씨는 피범벅이 된 유씨의 얼굴에 1000만원짜리 수표 2장을 던졌고 합의서에 서명만 하라고 요구했다.

 

 

‘맷값 폭행’ 재벌가 최철원씨 소환 고용승계 문제로 마찰을 빚은 탱크로리 기사를 야구방망이와 주먹으로 때린 뒤 ‘매값’이라며 2천만원을 건넨 혐의를 받고 있는 M&M 전 대표 최철원 씨가 2일 오후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지방경찰청으로 들어서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 ‘맷값 폭행’ 재벌가 최철원씨 소환

 

 

고용승계 문제로 마찰을 빚은 탱크로리 기사를 야구방망이와 주먹으로 때린 뒤 ‘매값’이라며 2천만원을 건넨 혐의를 받고 있는 M&M 전 대표 최철원 씨가 2일 오후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지방경찰청으로 들어서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유씨는 “너무 고통스러워서 살고 싶은 생각이 없었을 정도”였다. 언론사, 국민권익위, 인권위 등을 찾아 도움을 요청했지만 재벌이 얽힌 폭행 사건에 선뜻 나서는 곳은 드물었다.

 

극적으로 한 변호사와 연결됐고 언론 매체를 통해 당시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게 됐고, 다음 아고라에서 최씨의 구속을 요구하는 청원이 빗발쳤다.

 

경찰은 수사에 착수했고, 최씨는 구속기소됐다. 그러나 최철원은 그 과정에서 유씨에게 한번도 직접 사과하지 않았다. 법정에서는 “군대에서 맞는 ‘빠따’ 정도로 생각하고 ‘훈육’ 개념으로 때렸다”라는 충격적인 해명을 했다.

 

 

1심에서 최철원은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지만 2심 재판부는 원심을 파기하고,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유씨는 “가슴이 아프다. 피해자의 마음은 이렇게 미어지는데, 돈과 법은 그걸 무시한다”며 눈물을 흘렸다.

 

 

한편 최철원은 2006년 층간소음 문제를 제기한 이웃을 야구방망이를 들고 협박했던 전력도 있다. 알루미늄 야구 방망이를 들고 장정 3명과 함께 아랫집을 찾았고 당시 아파트 경비원은 “야구 배트를 들고 가서 두들겨서(위협해서) 그 사람이 무서워서 한 달 뒤에 이사 갔을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에도 파출소는 ‘상호 다툼’으로 처리하고 본서에는 보고조차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최씨가 대표로 있었던 M&M 전 직원들은 최씨가 사냥개 도베르만을 사무실에 데려와 여직원들에 “요즘 불만이 많다며?”라면서 도베르만의 개줄을 풀고 “물어”라고 명령하며 여직원들을 위협했다는 증언을 하기도 했다.

 

 

김유민 기자 planet@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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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2021. 2. 17. 05:30

2011년 이야기.

 

 

I don’t understand it, to be honest with you. I don’t know why anybody can be bothered with that kind of stuff.

 

How do you find the time to do that? There are a million things you can do in your life without that.

Get yourself down to the library and read a book. Seriously. It is a waste of time. It seems to have a certain momentum at the moment.

 

Everyone seems to want to do it.

 

 

 

 

Twitter is 'a waste of time', says Manchester United manager Sir Alex Ferguson Sir Alex Ferguson has joined the debate about footballers' use of the social networking Twitter site by branding it "a waste of time".

 

By Telegraph staff and agencies 20 May 2011 • 12:16 pm

 

 

The manager was speaking at the end of a week in which his club's high-profile forward Wayne Rooney attracted unwanted headlines for an on-line dispute with one follower....

 

 

 

 

 

기사출처

 

https://bit.ly/3qrh8Qr

Sir Alex Ferguson may order Manchester United players off Twitter

This article is more than 9 years old

 

• Manager suggests players 'read a book' instead of tweeting


• Says United are 'looking' at use of social-networking site

 

The Manchester United striker Wayne Rooney attracted attention when he threatened one of his followers on Twitter. Photograph: Jason Cairnduff/Action Images

 

 

Press Association

Fri 20 May 2011 11.08 BST

 

7

The Manchester United manager, Sir Alex Ferguson, has criticised the social networking website Twitter and hinted that his players may be banned from using it.

 

Rio Ferdinand is one of the most prolific users among the United squad and has attracted nearly a million followers. Wayne Rooney also has vast numbers who follow his observations about life; Michael Owen and Nani also use the site.

 

Rooney this week threatened a respondent who had been abusive, although he said later his threat was not meant to be taken seriously.

 

Darron Gibson took himself off Twitter after barely two hours last month, when he received abuse from United fans.

 

Ferguson said: "I don't understand it, to be honest with you. I don't know why anybody can be bothered with that kind of stuff. How do you find the time to do that? There are a million things you can do in your life without that. Get yourself down to the library and read a book. Seriously. It is a waste of time. It seems to have a certain momentum at the moment. Everyone seems to want to do it."

 

Ferguson said that anyone with a high profile needed to act with caution.

 

"It is responsibility. [Players] are responsible for their actions," he said. "We as a club are looking at it because there can be issues attached to it. And we don't want t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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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history)2021. 2. 15. 23:28

설 이후, 백기완 선생의 별세 소식이다. 고인의 명복을 빌며, 백선생이 걸어온 현대 정치사의 길은 어떠했을까? 잠시 신문을 찾아본다.

 

1955년 (23세)부터 백기완 선생은 일간지에 등장했다. 

1975년 2월 긴급조치 구속자 석방까지, 백기완 선생 관련 신문 기사들이다. 

 

 

1955년, 7월 19일자 동아일보.

 

 신흥(新興: 경희대 전신)대 백기완 군 외 31명 학생들이 여름방학을 맞이하여 2주간 강원도 벽촌지방을 순회하면서 문맹퇴치 운동을 벌인다는 기사. (* 동명이인인지 확인 필요)

 

 

1963년 2월 28일자. 백기완 (31세), 박정희 군사 쿠데타 이후 시국 수습안 강연회, 자유대중당을 대표해서 백기완 선생이 발표를 하다.

 

 

1965년 8월 14일자. 박정희의 한일 협정 비준안이 통과.

 

1965년 8월 14일, 함석헌, 백기완 등이 한일협정은 매국적이라고 비판, 즉각 무효화를 주장했다.

 

1966년11월 7일자. 백기완 (34세) 자유대중당 대표.

 

1967년 6월 10일자. 7대 총선 참가. 백기완 (민주당) 서울시 영등포 갑 출마. 신민주당 유진산이 1위, 6만 6227표. 백기완은 당시 35세로 당명을 '민주당'으로 짓고, 출마해서 2천 234표를 얻었다.

6대 총선에 비해, 67년 7대 총선에서는 공화당이 후퇴하고, 신민주당이 약진했다.

 

 

1972년 2월 2일자, 조선일보, 주필 선우휘씨가 백기완의 저서 "항일민족론"을 칭찬하다. 채신머리없이 친일하는 자들이 꼭 읽어야 할 책이라고 소개. 선우휘 주필이 '사이다나 맥주를 마신 때 상쾌감을 느낄 수 있는 책'이라고 칭찬한 점이 흥미롭다.

 

 

1974년 1월 16일자. 장준하, 백기완 등 긴급조치 1호 위반 구속.

 

구속 사유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비방 선전"

1974년 2월 2일. 비상보통 군법회의, 박희동 중장이 장준화, 백기완 피고에 징역 15년 선고.

 

박희동 중장의 선고 내용. "헌법 개정을 빙자, 국론을 분열시키고 사회적 불안을 조성함으로써 국가의 안전보장과 공공의 안녕질서에 중대한 위협을 준 사실은 추호도 용서할 수 없다"

 

 

1975년 2월 17일자 경향신문.

 

긴급조치 관련 일지.

 

1974년 8월 29일. 대법원은 장준하, 백기완 포고인에 대한 상고를 기각, 원심을 확정 (15년 징역)

 

1974년 12월 3일, 장준하씨가 형집행 정지 결정으로 출감. 조광현 내과에 입원.

 

(박정희가 장준하를 석방하기로 결정함)

 

1975년 2월 15일 박정희가 인혁당 관련자를 제외한 긴급조치 위반자를 석방하기로 결정.

 

 

1975년 2월 17일자 동아일보. 당시 43세였던 백기완 선생은, 석방 결정에 대해 '소감옥'에서 '대감옥'으로 이감되었을 뿐, 민주주의를 배반한 유신체제 하에서는 감옥 안과 바깥이 구분이 없음을 선언.

 

유신체제 철폐가 한국 민주주의 당면 과제임을 역설했다.

 

1975년 2월 15일자 경향신문.  긴급조치 위반자 석방 소식이 알려지자, "긴긴 겨울은 걷히고, 봄은 오는지"라는 제목을 달았던 경향신문.

 

1975년 2월 18일자 조선일보.

 

긴급조치 석방자들에 대한 소식. "백기완씨는 오랜만에 대하는 흰쌀밥, 불고기의 아침상을 대하고 목이 메였다. 백씨는 외출하려다가 '다시는 아빠를 뺏기지 않겠다'며 붙드는 딸들의 강권에 못이겨 눌러앉고, 찾아오는 사람들과 돼지고기찌개에 소주잔을 기울였다.

 

그러나 석방되고 나서 1개월 후, 1975년 3월 29일자, 중앙정보부는 백기완 선생을 다시 연행했다.

 

 

 

 

1975년 2월 17일 동아일보 인터뷰 백기완 

 

 신흥대 백기완군 외 31명 학생들이 여름방학을 맞이하여 2주간 강원도 벽촌지방을 순회하면서 문맹퇴치 운동을 벌인다는 기사.

 

 

 

1963년 2월 28일자. 백기완 (31세), 박정희 군사 쿠데타 이후 시국 수습안 강연회, 자유대중당을 대표해서 백기완 선생이 발표를 하다. 

 

 

 

1965년 8월 14일자. 박정희의 한일 협정 비준안  통과.

 

1965년 8월 14일, 함석헌, 백기완 등이 한일협정은 매국적이라고 비판, 즉각 무효화를 주장했다.

 

 

 

 

1966년11월 7일자. 백기완 (34세) 자유대중당 대표.

 

 

 

 

 

 

1967년 6-8 총선, 5월 18일자 조선일보 보도.

그 해 6대 대통령 선거 결과, 서울시에서  유일하게 박정희가 윤보선을 앞선 선거구가 영등포 (갑)이었다. 공화당 윤주영 후보와 신민당 유진산, 민주당 백기완 후보 등이 맞섰다.

 

 

 

 

 

 

1967년 6월 10일자. 7대 총선 참가. 백기완 (민주당) 서울시 영등포 갑 출마. 신민주당 유진산이 1위, 6만 6227표. 백기완은 당시 35세로 당명을 '민주당'으로 짓고, 출마해서 2천 234표를 얻었다.

 

 

6대 총선에 비해, 67년 7대 총선에서는 공화당이 후퇴하고, 신민주당이 약진했다.

 

 

 

 

1972년 2월 2일자, 조선일보, 주필 선우휘씨가 백기완의 저서 "항일민족론"을 칭찬하다. 채신머리없이 친일하는 자들이 꼭 읽어야 할 책이라고 소개. 선우휘 주필이 '사이다나 맥주를 마신 때 상쾌감을 느낄 수 있는 책'이라고 칭찬한 점이 흥미롭다.

 

 

 

  

1974년 1월 16일자. 장준하, 백기완 등 긴급조치 1호 위반 구속.

 

구속 사유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비방 선전"

 

 

 

 

1974년 2월 2일. 비상보통 군법회의, 박희동 중장이 장준화, 백기완 피고에 징역 15년 선고. 

 

박희동 중장의 선고 내용. "헌법 개정을 빙자, 국론을 분열시키고 사회적 불안을 조성함으로써 국가의 안전보장과 공공의 안녕질서에 중대한 위협을 준 사실은 추호도 용서할 수 없다"

 

 

 

 

 

1975년 2월 17일자 경향신문.

긴급조치 관련 일지. 

1974년 8월 29일. 대법원은 장준하, 백기완 포고인에 대한 상고를 기각, 원심을 확정 (15년 징역)

1974년 12월 3일, 장준하씨가 형집행 정지 결정으로 출감. 조광현 내과에 입원. 

(박정희가 장준하를 석방하기로 결정함)

1975년 2월 15일 박정희가 인혁당 관련자를 제외한 긴급조치 위반자를 석방하기로 결정.

 

 

 

 

1975년 2월 17일자 동아일보. 당시 43세였던 백기완 선생은, 석방 결정에 대해 '소감옥'에서 '대감옥'으로 이감되었을 뿐, 민주주의를 배반한 유신체제 하에서는 감옥 안과 바깥이 구분이 없음을 선언.

유신체제 철폐가 한국 민주주의 당면 과제임을 역설했다.

 

 

 

 

1975년 2월 15일자 경향신문.  긴급조치 위반자 석방 소식이 알려지자, "긴긴 겨울은 걷히고, 봄은 오는지"라는 제목을 달았던 경향신문.

 

 

 

1975년 2월 18일자 조선일보.

 

긴급조치 석방자들에 대한 소식. "백기완씨는 오랜만에 대하는 흰쌀밥, 불고기의 아침상을 대하고 목이 메였다. 백씨는 외출하려다가 '다시는 아빠를 뺏기지 않겠다'며 붙드는 딸들의 강권에 못이겨 눌러앉고, 찾아오는 사람들과 돼지고기찌개에 소주잔을 기울였다.

 

 

 

 

 

그러나 석방되고 나서 1개월 후, 1975년 3월 29일자, 중앙정보부는 백기완 선생을 다시 연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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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history)2021. 2. 15. 18:05

메모. 옛 신문을 읽다가.

 

2021년 2월 15일. 35년 전 신문. 동아일보 1면.

 

전두환 노태우 정권 하에서 대학은 늘 감시자가들이 있었다. 학교 교직원들 자의반 타의반으로 전두환 노태우 검찰,경찰의 협조자들이었다. 잘못된 줄 알면서도 학교 직원들은 전노 독재정권에 협력했다. 

 

압수 수색 용품들이 흥미롭다. 이화여대 모의 수류탄 2개. 서울대 상복 10벌. 

 

35년이 지난 지금, 대학은 어떤 진리와 진실을 추구하고 있어야하는가? 그런 질문을 던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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