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은 대통령이 된 이후에는, 파업하는 노동자들과 거리 시위를 하는 농민들과 사이가 좋지 못했다. 노태우 정권 하에서는 구속된 노동자들을 변론하는 변호사였다.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아직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정치가로서 노무현은 노동자 주체 민주주의 정치에 대한 일관성있는 태도를 견지하지 못했다.
우리는 이러한 한계와 오류가 왜 나타나는지에 대해서는 끈질기게 묻고 답해야 할 것이다.
1989년 3월 21일 제 1차 의원직 사퇴 결정. 노무현 민주당 의원이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하고, 노동자 대중투쟁이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길이라고 천명했다.
국회의 정치적 무능 1) 민정당은 광주 5공청산 특위 불참과 국회무시 2) 국회 상임위 태만. 오히려 노동자 탄압 방조. 3) 서울지하철 파업, 30명 노동자 구속, 노동권 탄압 4) 현대중공업 노조 탄압 5) 노동자 파업권 무시 등을 비판하면서, 노무현은 국회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했다.
"따라서 지금 이 시간에도 온갖 박해를 무릅쓰고 싸우는 대중투재이야말로 의정 활동에 못지 않게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보는 입장에 (서) 있습니다...... 건강이 회복되는 대로 박해 속에서 싸우고 있는 동지들의 투쟁 대열에 동참하려 합니다. (노무현) "
1989년 4월 3일 노무현은 그 결정을 철회했는데, 여론을 경청한 끝에 내린 결론이라고 했다.
1989년 4월 4일자 경향신문.
전국 각지를 돌며, 목욕탕 때밀이, 여관 종업원, 자동차 정비원 등 여러사람들의 의견을 들었다. "사표까지 낼 필요는 없지 않느냐"는 여론. 이런 여론이 논리적이라기 보다는, 정서적으로 와닿았다고 함.
자료 1.
국회의 정치적 무능 1) 민정당은 광주 5공청산 특위 불참과 국회무시 2) 국회 상임위 태만. 오히려 노동자 탄압 방조. 3) 서울지하철 파업, 30명 노동자 구속, 노동권 탄압 4) 현대중공업 노조 탄압 5) 노동자 파업권 무시 등을 비판하면서, 노무현은 국회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했다.
"따라서 지금 이 시간에도 온갖 박해를 무릅쓰고 싸우는 대중투재이야말로 의정 활동에 못지 않게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보는 입장에 (서) 있습니다...... 건강이 회복되는 대로 박해 속에서 싸우고 있는 동지들의 투쟁 대열에 동참하려 합니다. (노무현) "
1989년 4월 4일자. 한겨레 신문.
1989년 4월 4일자 경향신문.
전국 각지를 돌며, 목욕탕 때밀이, 여관 종업원, 자동차 정비원 등 여러사람들의 의견을 들었다. "사표까지 낼 필요는 없지 않느냐"는 여론. 이런 여론이 논리적이라기 보다는, 정서적으로 와닿았다고 함.
(당시 만 43세 노무현- 아래 기자가 잘못 적은 것임.)
1989년 4월3일 노무현 국회의원이 자택에서 기자들을 만나고 있다(사진/ 1989.4.3.) 노무현은 40세인데, 그가 걸어온 굵고 거칠은 삶이 그의 얼굴에 묻어난다. 기자들을 만나기에 앞서 노무현은 최형우 통일민주당 총무와 면담을 했다. 노무현은 ‘국회의원으로서의 활동에 한계를 느껴서 비정치인으로 노동운동을 계속 하겠다‘며 3월17일 의원직 사퇴서를 냈다가 20여 일만에 이를 번복한 것이다.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노무현은 ’총재와 당원, 선거구민들이 의원직 사퇴를 적극 만류했고 시기상 사퇴가 적절치 않아, 국회에 돌아와 근로자와 소외계층을 위해 투쟁하기로 했다‘며 사퇴서 철회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설명했다. 철회 절차에 따라 4월 4일 직접 김재순 국회의장을 만나 철회 의사를 밝혔고 사퇴서는 반려됐다. 부산에서 인권변호사를 하던 노무현은 통일민주당 김영삼의 공천을 받아 제13대(1988~1991)국회의원 총선에 출마, 부산 동구에서 당선됐다. 그는 5공비리 특별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청문회 스타’로 주목을 받았다.
노무현의 정치권 입성은 운동권 세력이 제도권 정치에 들어와 참여하는 실험 케이스였다. 노무현은 사퇴와 관련하여 국회의원으로서 한계의 예로 노동관계법에 대한 정부의 거부권 행사 방침을 예로 들면서 대통령의 거부권이 국무회의 의결로 한꺼번에 무더기로 행사되면 의회민주주의에 대한 중대한 모독이라고 지적했었다.
그의 사퇴를 미성숙한 정치인이라는 비판도 있었고, 제도정치의 한계와 사이비 민주화의 실체를 보여주었다는 평가도 있었다. 국회의원으로서의 한계에 사퇴서까지 제출했던 노무현은 14년 후 2003년 제16대 대통령이 됐다. [헤럴드DB/ 우재복 기자 jbwoo@heraldcorp.com]
민주당 노무현 의원 의원직 사퇴[황희만]
입력 1989-03-21 | 수정 1989-03-210
[민주당 노무현 의원 의원직 사퇴]
● 앵커: 민주당의 노무현 의원이 의정 활동에 회의를 느껴 사퇴를 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노 의원의 사퇴는 재야에서 제도권 정치에 참여한 인사가 제도권에 한계를 느끼고 다시 재야로 돌아간다는 점에서 정가에 파문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황희만 기자의 보도입니다.
● 기자: 지난 17일 김재순 국회의원장 앞으로 보낸 사퇴서에서 노무현 의원은 국회가 현재 제 할 일을 못하고 있어 국회에 남아 있을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박해 속에서 싸우고 있는 노동자들의 대중 투쟁 대열에 동참하기 위해 의원직을 사임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노 의원은 국회에서 정부로 하여금 비리 혐의를 조사케 하는 노조에 정부에서 오히려 노조에게 산업 훈장을 수여하는 가 하면 국회가 지적한 정부의 부당 행위가 하나도 개선되지 않는 등 국회 활동에 한계를 느꼈다고 말하고 대중 투쟁에 역시 의정 활동 못 지 않게 민주주의에 기여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노 위원은 또 얼마 동안 휴식을 취한 뒤 동기들의 투쟁 대열에 동참하겠다고 밝히고 오늘 민정당의 김정길 위원에게도 비슷한 내용의 편지를 남기고 잠적했습니다.
이인제 민주당 대변인은 노 의원의 사퇴서 제출과 관련해 빠른 시일 안에 노 의원과 접촉하고 사퇴 의사 처리를 종영할 방침이라고 노 의원 자신이 당론이나 평 당으로라도 민주당을 위해 일하겠다고 밝힌 점을 미루어 노무현 의원도 당의 뜻을 받아들일 것으로 본다고 말했습니다.
한편 국회의장에서는 민주당 측과 노무현 자신의 진술을 들어본 뒤 사퇴의 수리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노 의원의 의원직 사퇴는 민중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재야에서 제도건 인사에 참여한 인사가 제도권에서의 한계를 느끼고 다시 재야로 돌아갔다는 점에서 정가에 파문을 던져 주었습니다.
MBC뉴스 황희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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