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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history)

조봉암 진보당 조작 사건 증언.1999년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한승격 당시 수사관

by 원시 2021. 3. 7.

조봉암 진보당 조작 사건 증언.

 

1999년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한승격 당시 수사관

 

https://bit.ly/2Oy3sER

 

[의혹과 진실 - 한승헌의 재판으로 본 현대사](9) 진보당 사건과 조봉암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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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당 사건은 조작됐다"…당시 조사요원 本報에 증언

입력 1999-08-17 23:49수정 2009-09-23 20:22

 

 

59년 죽산 조봉암(竹山 曺奉岩)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했던 ‘진보당 사건’은 당국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는 증언이 당시 수사에 참여했던 수사관으로부터 나왔다.

 

그동안 ‘진보당 사건’의 피해자와 학자들로부터 ‘진보당 사건’이 조작됐다는 주장은 여러차례 제기됐지만 이 사건을 직접 조사했던 수사관이 조작사실을 털어놓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당시 서울시 경찰국 조사요원으로 진보당 조직부장 전세룡(全世龍·82·서예가)씨를 조사했던 한승격(韓承格·89)씨는 15일 전씨와 함께 동아일보 기자와 만나 “당시 경무대로부터 조봉암을 잡아넣지 않으면 이승만(李承晩)대통령의 재당선이 불가능하니 어떤 수를 쓰더라도 잡아넣으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한씨는 조사과정에서 “당시 상부로부터 ‘진보당을 없애고 죽산을 죽일 수 있을 만큼 사건을 엮지 않으면 네가 죽을 것’이라는 협박도 받았다”고 말했다.

 

한씨가 진보당 사건의 조작 지시를 처음 받은 것은 사건이 터지기 직전인 57년 말.

 

당시 이승만 정부는 56년 5월 제3대 대통령선거에서 엄청난 선거부정을 저질렀음에도 이대통령과 대결한 죽산 조봉암이 260여만표(전체 유효투표의 30%)를 얻은데 대해 심한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

 

한씨에 따르면 “당시 경찰고위인사가 간부 몇 명과 한씨를 불러놓고 ‘경무대에서 조봉암을 그대로 두어서는 이대통령의 재선이 불가능하니 치안국이 책임지고 대책을 강구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며 “우리가 살 길은 이것밖에 없으니 당신들이 책임지고 조봉암을 잡아넣을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라”고 말했다는 것.

 

한씨 등은 이 때부터 시경찰국 분실(일명 남일사)에서 진보당의 강령과 정책, 포고문 등을 수집한 뒤 이를 공산당 이론이나 북한 노동당 강령 등과 연계시키는 작업에 착수했다.

 

58년 1월 이승만정부는 진보당의 강령이 국시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죽산을 비롯한 진보당 간부들을 구속하고 그해 2월 정당등록을 말소한 뒤 이듬해 죽산을 사형에 처했다.

 

한씨는 “당시 조직부장 전씨로부터 ‘북한 김일성의 지령에 따라 대한민국의 전복을 획책했다’ ‘죽산은 빨갱이 간첩이다’는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3주 가량 혹독하게 신문했으나 자백을 받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한씨는 “수사 관계자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사실대로 밝힐 경우 보복당할 수도 있어 진실을 털어놓지 못했다”며 “희생된 이들에게 사죄하고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데 뒤늦게나마 일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함경북도 정평이 고향인 한씨는 북한에서 함경남도 노동당 부위원장을 지내다 56년 남파됐으며 남파 직후 자수해 서울시 경찰국 분실에서 비공식 대공수사요원으로 3년간 근무하다 사표를 냈다.

 

동국대 사회학과 강정구(姜禎求)교수는 “그동안 역사학계에서는 진보당사건이 이승만정권에 의한 법살(法殺)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지만 구체적인 증거가 없어 정황으로만 추론해왔다”며 “당시 수사관의 이같은 증언은 물증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밝혔다.

 

 

〈이헌진·박윤철기자〉mungchi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