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87년 대선3

1987년 10월 26일자, 김영삼과 김대중은 민주당 경선협상에 실패, 각자 대선 후보로 출마하기로. 6공화국 헌법과 법률에 '대통령 선거 결선투표제'를 누락했고, 정당 이념과 정책 중심이 아니라, .. 1. 역사에서 가정. 박정희가 1963년 대선, 1967년 재선 이후, 1969년에 삼선개헌을 하지 않고, 1971년에 대통령에서 물러났다면, 김대중-김영삼은 각각 2번 임기 (총 8년)을 두 사람이 돌아가면서 채웠다고 해도, 1987년 대통령 선거에는 김대중과 김영삼이 더 이상 출마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역사에서 가정은 없다 하지만, 박정희 -전두환 군사반란과 군사독재의 폐해는 고스란히 야당 지도자, 김영삼과 김대중의 한계로 이어졌다. 2022년 대선을 앞두고, 대통령 후보들의 자질이 떨어진 이유는, 김영삼 김대중도 정당의 이념과 정책노선을 내세워 정치를 한 게 아니라, 박정희-전두환 (총통 개념의 독재자)는 아니지만, 권력을 독점했었다. 당내 민주주의나 절차는 부차시 되었고, 당 권력 상층 몇몇 인.. 2021. 10. 26.
1987년 개헌, 결선투표 제도만 도입했다면, 노태우는 낙선되었을 것이다.김대중과 김영삼, 그리고 민주진영의 '실수'였다. 대통령 선거에서 '결선투표제도'를 빠뜨렸다.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결선투표 제도만 있었더라면, 노태우는 당선되지 못했을 것이다. 결선투표가 있었다면 1차 투표에서 36.7%로 1위였던 노태우는 '과반' 획득에 실패했기 때문에, 제 2차 결선에서 2위였던 김영삼과 다시 재선거를 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1차에서 김대중을 지지했던 27%의 표 대부분은 김영삼후보에게 돌아갔을 것이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그랬더라면 김영삼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1988년부터 1992년까지 집권했을 지도 모른다. 왜 당시 야당이었던 '민주당'은 민정당과의 개헌 논의에서 '결선 투표제도'를 신설하지 않았을까? 회고담 같지만, 그 원인들을 뒤돌아 보자. 1. 김대중과 김영삼, 그리고 민주진영의 '실수'였다. 대통령 선거에서 '결선투표제도'를 빠뜨렸다. 7월부터 9월까.. 2015. 12. 6.
민주주의 심화를 위한 정치개혁, 국회/정당 개혁 4가지도 강조해야 원시 http://newjinbo.org/xe/934297 2010.12.11 09:31:04 256 1 http://bit.ly/igYq26 방금 국회 예산 날치기 YTN 돌발영상 보고 씁니다. 폭력 문제도 있지만, 문제의 본질은 사회복지 예산삭감이고, 한나라당 이명박 형, 이상득씨, 특임장관 이재오씨 등 특정 인사들 지역구에 특혜예산안 배치 등입니다. 그리고, 하나 더 강조해야할 것은, 대통령도 한나라당 의회도 한나라당이 과반수 이상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토론 실종 폭력적인 표몰이식 의회 운영에 대해서 비판해야 합니다. 진보신당은 정치개혁을 요구해야 합니다. 무너진 국격, 이제 국회를 바꿀 때입니다. 민주당도 무능함을 탈피하기 위해서, 지역정당을 벗어나기 위해서도, 정치 개혁에 동참해야 합니다. .. 2011. 12. 28.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