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제목: 열린 우리당=겉다르고 속다른 수박당   


원시 작성일 2004-01-16 


열린 우리당 지도부, 정동영, 이부영, 허운나 등이 광주 망월동 묘역을 '행렬'하고 있다. 어쩌다가 광주 망월동 묘역이 꼭 박정희 묘역가는 길처럼 '권세'와 '살기', 그리고 '위선'이 느껴지는 권세로가 되었는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주역'은 아니고, '희생자'라고 규정되고 싶었던, 김대중이 광주 민주정신을 팔아먹고, 대구지역에서 표 한번 받아보려고, 전두환-노태우를 사면시킨지 몇년이 흘렀다. 결국, 김대중의 '동진 화해 정책'은 대의와 방법에서 모두 틀렸기 때문에 실패했다. 누가 김대중에게 광주 문제를 자기 멋대로 '사죄하고' '화해하고' 공표하라고 했는가? 자기 몫이 아닌 데 말이다. 


지금 총선 때문에, 들떠있다. 열린 우리당이 총선용이라는 것은 다 안다. 그 총선 이후, 노무현 집권 끝나는 날까지 계속해서 정계개편은 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열린 우리당은 보면서 드는 생각이 있다. 이 열린 우리당이 보여주는 '역사인식'의 빈곤이 그것이다. 그리고, 성급하게 자기 몫이 아닌데, 상황에 따라서 자기 멋대로 '광주'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대중이 전두환-노태우를 사면함으로써,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오점을 남겼듯이, 열린 우리당과 노무현 역시, 정치적 권력이나 '표'는 얻을 지언정, 한국 국민들의 '민주주의 성숙도'가 높아지거나, 진보당인 민주노동당이 제자리를 찾는다면, 김대중의 운명처럼 될 가능성이 많다. 


역사는 현실적 이해관계 때문에 드러나지 않고, 이익에 가린 것처럼 보이지만, 어려운 상황이나 다시 모순이 폭발할 때는 그 모습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일상에서도 흐릿하게 드러나는 것 같지만, 정치적 행위 역시 '축적'되고 있는 것이다. 평소점수처럼. 


열린 우리당은 '과대 포장'되어 있다. 마치 서울 사람들 80%가 자신이 중산층이라고 착각하는 허위의식처럼 말이다. 마치 80년대 데모하고, 87년 민주항쟁시 우연히 '지도부'에 있었다는 이류로, 17년이 지나도 여전히 자신들이 '국민의 지도부'라고 착각하는 '줄 반장' 병을 앓고 있는 것이다. 겉다르고 속다른 열린 우리당의 '빈곤한 역사의식'과 '위선적 행동'의 모순은 그들의 정치적 성공과 무관하게, 다시 폭발할 것이다.  









반응형
Posted by NJ원시

댓글을 달아 주세요

반응형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결선투표 제도만 있었더라면, 노태우는 당선되지 못했을 것이다. 결선투표가 있었다면 1차 투표에서 36.7%로  1위였던 노태우는 '과반' 획득에 실패했기 때문에, 제 2차 결선에서 2위였던 김영삼과 다시 재선거를 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1차에서 김대중을 지지했던 27%의 표 대부분은 김영삼후보에게 돌아갔을 것이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그랬더라면 김영삼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1988년부터 1992년까지 집권했을 지도 모른다. 왜 당시 야당이었던 '민주당'은 민정당과의 개헌 논의에서 '결선 투표제도'를 신설하지 않았을까?  회고담 같지만, 그 원인들을 뒤돌아 보자.


1. 김대중과 김영삼, 그리고 민주진영의 '실수'였다. 대통령 선거에서 '결선투표제도'를 빠뜨렸다.


7월부터 9월까지 3개월 동안, 김영삼과 김대중은 6월 항쟁의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다. 

김대중과 김영삼은 대통령 결선투표 제도를 몰랐는가? 아니다. 그들은 이미 1970년 9월 29일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을 치른 적이 있고, 당시 결선투표제도를 신민당 내부에서 선택했다. 


1차 대의원 투표에서 김영삼은 1위를 했으나 47.6%에 그쳐, 과반수 득표율에 미치지 못해 결국 2차 투표를 했다.2차 투표에서 김대중은 대의원들로부터 458표를 획득, 51.8%로 과반 획득,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당선되었다.  (이승만 자유당 시절, 민주당구파 유진산+김영삼계가 민주당신파였던 김대중과 이철승에게 패한 것이다) 결선투표 제도 덕택에, 김대중은 71년 대선에서 두 김씨를 '애숭이'라 표현했던 박정희와 겨뤘다.


 40대 기수론은 김영삼이 69년에 외치고, 정작 후보는 또 다른 40대 김대중이 되었던 것이다. 


87년 6월 시민항쟁으로 전두환 '호헌 선언'을 깨고,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했지만, 그 대통령 선거 방식과 내용에 대해서는 정밀하지도 장기적이지도 않았다. 더군다나 1970년 김대중과 김영삼 모두 '결선 투표제도' 경험이 있었고, 1987년에도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더 아쉬운 역사적 '실수'다. 


2. 세간에 '돌대가리'라고 놀림당한 전두환보다 계략이 뒤졌다.  새 헌법 양당 타협안은 8월 31일에, 국민투표에 통과된 것은 10월 27일이다. 그렇다면 김영삼과 김대중의 후보 단일화 실패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거나, 못했기 때문에, '결선투표제도'를 개헌특위에서 다루지 못했는가? 이건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런 해석도 전두환과 민정당의 87년 정치계획표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정치적 무능'이라는 비난은 피해갈 수 없다. 


실제로 전두환은 4-13 호헌조치 이후, 전민 항쟁이 발생하자, 6-29 선언 이전에 이미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 후보가 분열하면, 민정당 후보가 승리할 수 있다는 계산을 했다. 전두환과 민정당이 6-29 선언을 통해 노태우를 그 후보로 내세운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정치 일정에서 '새로운 헌법' 타협은 언제 완료되었는가? 8월 31일이다. 10월 25일 고려대 집회에서 김영삼과 김대중의 '결별'이 현실화되었고, '직선제 헌법 (제 6공화국 헌법)'은 10월 27일 국민투표로 통과되었다. 


3. 1987년 7월 15일 민주당 (김영삼 당시 대표) 의원들이 '새 헌법' 토론 내용들을 보면, '결선투표제도'나 총선 '비례대표 제도'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었다. 


당시 민주당 의원들이 토론한 내용들을 잠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동학정신을 넣자, 한국 영토를 다시 정하자, 4-19와 5-18 정신을 강조하자, 근로자라는 단어 대신 노동자를 사용하자 등이다.


김영삼 대표는 대통령 선거를 빨리 앞당겨서 실시하고,13대 총선도 대선 이후 1개월 이내에 실시하자는 발언을 했다. '대통령 선거'가 급했고, 자신이 후보가 되어 당선되는 게 급선무였다는 게 김영삼에게 가장 중요했지, '결선투표'나 '대통령 제도 개선'에 대한 실질적인 고민은 없어 보였다.


4.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삼선 개헌으로 다시 대통령에 당선된 박정희는 1972년 유신헌법을 만들 때, 한태연과 갈봉근 같은 법학 교수들에게 프랑스 드골, 스페인 프랑코, 싱가폴 리콴유,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대통령 제도들을 연구하게 했다. 


그렇다면 1987년 당시, 왜 김영삼 (민주당 대표) 혹은 김대중은 프랑스 사회당 미테랑이 삼수 끝에 1981년 대통령 선거에서 1차 투표에서는 2위를 했지만, 2차 결선투표에서 1위를 했다는 것을 연구하지 못했을까?


소결론은 다음과 같다.


(1) 1970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 당내 경선에서 김대중과 김영삼은 '결선투표' 경험이 있었다.


(2)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결선 투표제도'를 새 헌법에 포함하지 못한 것은, 아니 하지 않는 것은, 결선투표가 없는 상황에서도, 혹은 김영삼-김대중의 후보 단일화 없이도, 1위를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김대중은 잘 알려진대로, 4자 필승론을 당시 주창했다.


(3) 위와 달리, 그냥 실수였을 수도 있다. 김영삼과 김대중은 결선투표 제도의 중요성을 알고서도, 조항에 삽입하지 않는 '실수'를 범했다. 


5. 교훈과 과제


대통령제도를 유지하는 한, 결선투표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87년과 같은 상황도 막고, 야당 분열이라는 여론도 제도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유럽 대부분 국가들과 같이 '내각제도'와 '수상제도'를 채택하려면 '개헌'을 해야 한다. 87년 제 6공화국 헌법 제도 단점과 문제점들을 여론화시킬 필요가 있다.


자료


1987년 10월 25일 김대중과 김영삼은 사실상 '단일화' 실패를 선언했다. 



.

1987년 7월 15일, 새헌법에 대한 민주당 내부 토론 내용들. 





.


1987년 12월 16일 대통령 선거 결과







1987년 10월 27일 국민투표로 '새 헌법' 마련






.


1987년 9월 15일자, 동아일보, 김대중계와 김영삼계 '단일화' 논의 언급, 낙관한다(이용희: DJ) 와 두 분이 알아서 결정해야 할 일이다 (YS 계, 김동영) 등 언급, 구체적인 방안 등은 없었다.






.


주제어: 결선투표제 (runoff : the two round system : the second ballot) 




 

 

반응형
Posted by NJ원시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참고 자료: 유신 헌법: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61150

    2015.12.06 18:57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한국정치2013. 10. 26. 15:59
반응형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한국 법률사에서 분수령이 될 윤석열 검사 증언, 그리고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 수사 : 


윤석열 법을 제정해서, 검사 활동의 지침서로 만들어야 한다. 

 

왜  윤석열 검사 국정원 수사는 계속되어야 하는가?  

 

윤석열 검사의 국감장 증언은 촛불데모, 민주화운동, 좌파들에게는 정치적 상식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새누리당 국회의원들이 잡아놓은 국감 콘셉트, 즉 ‘윤석열 검사의 항명 및 검사동일체, 상명하복 규율 위반’ 주장도 어쩌면 속 보이는 정치적 연기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윤석열 국정원 댓글 특별수사팀장의 증언은 노회찬 전 의원의 “안기부 삼성 X파일 떡값 검사 폭로” 사건보다 더 정치적으로, 특히 법 제도적인 측면에서 더 중요한 내용들을 포함하고 있다. 


일선 검사 일부는  TV 중계 방송을 보다가 ‘검찰 집안 싸움’의 속살을 보는 듯 해서 TV 를 꺼버렸다고 했다. 정치적 수치감과 자존감의 상처라는 것이다. 그러나 시민의 편에서 보면, 이 정치적 수치감의 실체는 다름 아닌 지난 60년간 한국 검찰의 속살 누출이자 동시에 자정노력이다.


 어둠만 있는 게 아니라 밝음도 있다는 것이다. 검찰의 자율권, 한국 민주주의 수준에 기초한 검찰의 지위, 검사로서의 자존심과 자긍심이 어떻게 훼손되었는가? 그 실체가 윤석열 검사의 증언을 통해서 온 나라와 해외에 중계되었기 때문이다.

 

노회찬씨의 “떡값 검사 폭로 (삼성 재벌이 국가 행정부 검찰을 장악해나가는 한 지배양식)”는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는 정치적 실천이었다. 하지만 보수적인 현행 법률 권력에 밀려나고, 오히려 노회찬씨는 의원직을 상실하고 말았다. 


현행 법률의 정당성이 없다는 것을 법률 제도 (검찰이나 법무부) 기관 바깥에서 비판한 것이 노회찬의 “떡값 검사 폭로”이고, 반면 윤석열 검사의 증언은 법 제도 기관 내부로부터 나온 실증적 기록이고, 시민들에게는 검찰 역사상 가장 생생한 다큐멘타리 보도였다.

 

이 윤석열 검사의 “10월 21일 서울지검 다큐멘타리”는 한국의 어린이들과 청년들에게 한국의 민주주의와 그 정신이 무엇인가? 법의 타당성과 정당성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주는 교과서였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특히 검찰, 법무부라는 제도기관 내부에서, 현행 헌법 정신에 기초한 민주주의와 법률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가르쳐준, 혹은 정견을 발표한 검사는 많지 않았다.

 

윤석열 검사는 왜 법률에 대한 민주주의적 교과서를 우리들에게 남겼는가?

 

첫번째, 어떤 사람들은 이미 사법시험과 사법연수원 시험에 등장한 답안을 윤석열 검사가 말한 것 뿐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윤석열 검사가 국정감사장에서 직접 의견을 밝힌 사실 자체가 역사적으로 정치적으로 중요하다. 


윤석열 검사는, 새누리당 의원들이 왜 윤석열 검사는 상부 지시를 따르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보고는 이미 여러 차례 했고, 검찰청법 7조 2항에 나온 상부와 의견이 다를 경우에 대해서는, 상부의 위법한 지시는 따르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이러한 윤석열 검사의 답변은, 현행 검찰청이나 법무부의 지시와 헌법정신이 서로 상충할 경우, 검사는 전자가 아니라 후자 헌법정신에 근거해서 수사와 공소장 작성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어쩌면 정치적 상식일 것이다. 물론 서울지검 검사들을 얼차려 시키는 이주영 새누리당 의원과 얼차려를 당해야 하는 검사들의 심정에는 상식이 아니겠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한국 민주주의 제도나 시민들, 노동자들은 어떻게 이러한 민주적 검사, 즉 헌법정신을 따르는 검사들의 수사와 공소장 작성을 격려할 수 있는가? 


또한 이미 여러 나라들에서 실천하고 있는 시민 참여제도 (배심원 제도)를 우리가 실천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외부적인 시민 참여를 넘어서서, 검사들 스스로 ‘검사 평의회 prosecutor council’를 만들어 돈, 권력,외부협박,승진 불이익으로부터 자유로운 자율적 수사권을 확보하고 실천할 수 있는가를 고민해야 한다.



  

(손석희씨가 진행하는 뉴스에 나온, 여론조사 결과, 윤석열 검사를 국정원 수사에서 배제시키는 게 옳냐 그르냐에 대한 여론조사이다. 잘 모른다는 답변이 많다는 것은, 이번 국감증언이 검찰청 내부 일로 국한될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배제가 부적절하다는 여론이 근소하게 앞선다.) 


 

두번째, 윤석열 검사의 증언과 실천은 공무원 중립성의 의미와 한국 민주주의 심화 발전과의 상관 관계를 해명했다.

 

국감장의 핵심 주제는 윤석열 검사와 국정원 댓글과 대선 개입 특별수사팀의 활동이 왜 정당한가이다. 


새누리당 의원들의 반칙 콘셉트 “윤석열 검사는 명령 불복종 직원이다. 검찰조직을 사랑하지 않는 자의 최후”는 흥행하지 못했다.


 

윤석열 검사는 국정원 직원 대선 개입과 틔위터와 댓글을 이용한 여론조작을 한국 민주주의 질서를 파괴하는 ‘중대한 범죄’로 판단하고 수사를 착수했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10월 16일에 법원에서도 윤석열 특별수사팀에게 국정원 직원 체포 영장 발부를 승인했다.


 

만약 새누리당과 국정원장 (윤석열 특별수사팀이 국정원 직원들 4명을 체포 수사했다는 소식에 격노했다는 남재준 국정원장)과 법무부 황교안, 현 검찰청 직무대행이 윤석열 검사팀의 수사가 한국 민주주의에 발전에 기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려면, 다음과 같은 것이 법정에서 증명되어야 한다.


 

국정원 직원들이 2012년 12월 대선 당시 온라인 댓글을 달고, 틔위터에 6만여 개 글을 올린 행위가 어떻게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를 했는가를 역으로 증명하면 된다.


윤석열 검사는 국정원 직원들의 조직적 온라인 댓글 달기 행위가 ‘중대한 범죄’라고 주장했고, 수사를 해서 법정에서 판결을 받아야 할 사안이라고 판단했다면, 이에 대해서 반박하려면, 황교안 법무부장관과 국정원 남재준, 검찰총장 직무대행 길태기씨는 법정에서 국정원 직원들의 온라인 특수팀의 행위가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어떻게 기여했는가를 입증하면 된다.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의 의미에 대해서는 새누리당 김진태 의원이 말한 “국정원 직원은 댓글도 못다냐?”에 대한 글에서 더 밝히도록 하겠다.


 


 (이번 윤석열 검사의 증언 내용은, 마치 네덜란드 적은 마을에서 한 소년이 동네 저수지 둑에 쥐구멍이 난 것을 발견하고, 밤 새워 손가락으로 막아서 마을을 지킨 것과 유사하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희생과 피에 기초해 있는 한국 민주주의라는 저수지 둑에 쥐구멍을 내는 것을 예방하려는 것이 이번 윤석열 검사팀이 하고자하는 국정원 직원 수사이다.)



세번째, 윤석열 검사와 국정원 직원 댓글 특별수사팀의 수사가 한국 민주주의사에서 중요한 의미는, 검찰 (법제도) 내부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후퇴를 가져오는, 다시 말해서 역사적인 반동체제로 회귀에 대한 예방책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검찰청의 독립성 확보와 검사들의 자율권 행사와도 연결되어 있다. 



공무원으로서 윤석열 검사가 “국정원 댓글은 중대한 범죄라서 수사를 착수해야 한다”고 말한 것을 정치학적으로 해석하면, 소위 87년 헌법체제를1981년 2월 25일의 제 5공화국 전두환 헌법으로 되돌아가려는 역사적 반동에 대한 예방책이다. 


왜냐하면 국정원 직원들이 유권자들의 정치적 투표권 행사에 필요한 정보들을 왜곡하고 통제함으로써, 참정권을 찬탈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참정권을 행사(투표 자체)에만 국한 되는 게 아니라, 어떻게 투표하느냐, 어떤 과정을 거쳐 투표에 참여하는냐이다. 국정원식 선거는 유권자들을 ‘통제 가능한 조작가능한’ 투표 기계로 간주하는 것이다. 



18세기 프랑스 계몽주의 사상가 루소가 영국 의회주의 제도와 유권자 투표의 문제점을 비판하면서, 투표만 한다고 해서 민의 의사가 반영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이 말은 투표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시민들이 정치 의사 결정 과정에 직접 참여하는 것이 수반되지 않은 ‘투표’행위는 언제든지 지배자들에게 통제 조작당할 수 있다는 경고이다.


한국 민주주의는 1981년 장충체육관 대통령 선거 (2천여명 조금 넘는 대의원들이 전두환을 대통령으로 선출한 선거)체제로 회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이와 같은 반동적인 경향들은 끊임없이 나올 것이다. 

 

80년대는 집회 결사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아서 길거리 데모만 해도 백골단 전경이 시위자들을 마음대로 구타하고 구속시켰다. 


경찰이 시위자를 잡아오면 검찰 (검사)가 집시법 위반으로 구속시키고 법정에 넘겼다. 2012년 국정원 대선 댓글 틔위터 조직적 개입, 군인들의 사이버사령부는, 80년대 길거리 시위대 구타 및 체포와 그 형식은 다르지만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동일하거나 더 악날하다고 볼 수 있다.


 

인터넷 공간은 길거리 데모와 달리 24시간 감시 통제가 가능하고, 정보 통제와 왜곡된 정보를 유통시키는 것은 신체 구속이나 폭력보다 더 장기적인 심리적인 폭력을 가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적인 공간까지 침해가 가능하고, 언제든지 어디 곳에서든지 구속이나 체포가 가능하다.


 

세금 받아서 생활을 꾸려나가는 국정원, 검찰 공무원, 국가 발전을 위해서 정보수집해야 하는 국정원 직원들이 세금 내는 시민들의 정치활동과 참정권을 찬탈하는 게 ‘중대 범죄’아니고 무엇인가? 


 윤석열 검사와 특별수사팀에서 강조하는 것은 한국 시민들이 정치적 실천과 민주화운동을 통해서 만들어놓은, 시민들의 합의에 기초한 현행 법을 국정원 직원들이 먼저 나서서 위반했다는 점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네덜란드 어느 적은 마을에서 저수지 둑에 쥐구멍이 생겨서 저수지가 통째로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밤을 지새우면서 그 소년이 적은 손가락과 손으로 그 구멍을 막았다는 일화가 있다. 한국 민주주의라는 저수지 둑에 쥐구멍을 뚫고 있는 국정원 직원들, 그들을 비호하고 엄호하는 법무부 장관, 박근혜 대통령, 현 검찰청 일부 검사들은 이 저수지 쥐구멍이 커져서 저수지 둑이 무너지면, 그들도 오갈데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윤석열 검사의 증언과 실천은 한국 민주주의 제도의 심화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검찰과 법의 타당성과 정당성이라는 측면에서, 민주주의 제도가 우리 일상생활로 어떻게 안착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현재 권력의 편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형성된 시민들의 합의정신에 기초해 있다는 점에서 법률적으로도 정치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





(새누리당 의원들이 이번 국정원 직원 댓글 사건의 본질은 말하지 않고, 오직 윤석열 검사가 수사과정에서 상부지시를 따르지 않았다는 점만을 왜곡되게 부각시키자, 답답한 마음을 피력하면서, 위법한 상부지시와 검찰청 내부의 이견의 차이에 대해서 상세히 설명하는 장면이다. 손가락을 펴서 들어보이고 있는 윤석열 검사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반응형
Posted by NJ원시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