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열린 우리당=겉다르고 속다른 수박당   


원시 작성일 2004-01-16 


열린 우리당 지도부, 정동영, 이부영, 허운나 등이 광주 망월동 묘역을 '행렬'하고 있다. 어쩌다가 광주 망월동 묘역이 꼭 박정희 묘역가는 길처럼 '권세'와 '살기', 그리고 '위선'이 느껴지는 권세로가 되었는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주역'은 아니고, '희생자'라고 규정되고 싶었던, 김대중이 광주 민주정신을 팔아먹고, 대구지역에서 표 한번 받아보려고, 전두환-노태우를 사면시킨지 몇년이 흘렀다. 결국, 김대중의 '동진 화해 정책'은 대의와 방법에서 모두 틀렸기 때문에 실패했다. 누가 김대중에게 광주 문제를 자기 멋대로 '사죄하고' '화해하고' 공표하라고 했는가? 자기 몫이 아닌 데 말이다. 


지금 총선 때문에, 들떠있다. 열린 우리당이 총선용이라는 것은 다 안다. 그 총선 이후, 노무현 집권 끝나는 날까지 계속해서 정계개편은 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열린 우리당은 보면서 드는 생각이 있다. 이 열린 우리당이 보여주는 '역사인식'의 빈곤이 그것이다. 그리고, 성급하게 자기 몫이 아닌데, 상황에 따라서 자기 멋대로 '광주'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대중이 전두환-노태우를 사면함으로써,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오점을 남겼듯이, 열린 우리당과 노무현 역시, 정치적 권력이나 '표'는 얻을 지언정, 한국 국민들의 '민주주의 성숙도'가 높아지거나, 진보당인 민주노동당이 제자리를 찾는다면, 김대중의 운명처럼 될 가능성이 많다. 


역사는 현실적 이해관계 때문에 드러나지 않고, 이익에 가린 것처럼 보이지만, 어려운 상황이나 다시 모순이 폭발할 때는 그 모습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일상에서도 흐릿하게 드러나는 것 같지만, 정치적 행위 역시 '축적'되고 있는 것이다. 평소점수처럼. 


열린 우리당은 '과대 포장'되어 있다. 마치 서울 사람들 80%가 자신이 중산층이라고 착각하는 허위의식처럼 말이다. 마치 80년대 데모하고, 87년 민주항쟁시 우연히 '지도부'에 있었다는 이류로, 17년이 지나도 여전히 자신들이 '국민의 지도부'라고 착각하는 '줄 반장' 병을 앓고 있는 것이다. 겉다르고 속다른 열린 우리당의 '빈곤한 역사의식'과 '위선적 행동'의 모순은 그들의 정치적 성공과 무관하게, 다시 폭발할 것이다.  









Posted by NJ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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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주의 혹은 주체사상: 김정진 박은지 논쟁점과 논의 방향 (2)


(1)은 김정진의 문제의식에 대해서, (2)는 박은지의 문제의식과 해명에 대해서 쓴다. 박은지의 해명을 보면 간단하다. 질의자들이 이렇게 물은 것같다. 김일성주의가 도대체 어떤 매력이 있어서, 좀 배우고 이정희 통진당 대표처럼 서울대도 나오고 인문계 여자 수석도 하고 변호사도 하는 사람이 주체사상파인가? 박은지부대표가 질의자에 앞서서 “주체사상의 매력에 대해서” 주장을 하지 않았다고 해명한다.


이런 대화 맥락과 박은지의 해명에 대해서는 굳이 다시 의문을 제기하거나 설명을 요하지 않을 것이다. 김정진 전 부대표가 이러한 ‘대화 맥락’에 대해서 고려해주었으면 좋겠다.


1. 당 간부들 내려버지다. 정당은 코디네이터가 필요하다


글쓴이는 박은지 인터뷰의 문제점을 다른 곳에서 찾고자 한다. 당대표나 대표단,그리고 당 주요간부들의 정치활동을 내용적으로 ‘도우미’역할을 할 수 있는 당내 ‘연구소’나 ‘정치토론 그룹’ 혹은 정치조직(정파)의 부재가 더 큰 문제의 원인이다.


얼마전 장석준 부대표가 프레시안에 기고한 <김정은이 망해야 한반도가 산다! >는 글의 전반적 내용은 노동당이나 한국진보정당이나 좌파정당의 대북정책이나 평화정책으로 수용되기 힘든 내용의 글이다. 박은지 부대표의 경우도 썰타임 출연이나 발언 내용 역시 당원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당 정책의 대중화에는 별로 기여하지 못했다고 본다.


당 간부들의 정치적인 활동은 장려되어야 하고 당원들은 적극적으로 같이 협조해야하겠지만, 현재 그리고 지난 2년간 노동당의 당 간부들은 ‘당의 코디네이터’ 없이 그냥 개별적으로 혼자 메이크업하고 혼자 알아서 옷입고 혼자 스케쥴 잡고 언론에 기고하거나 출연하거나 했다. 

진보신당-노동당은 과거 노회찬 심상정 전대표의 당과 독립적인 언론플레이의 문제점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거나,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거나,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지 못하고 있다. 


[고민과 대안] 당 안에는 4-5개 다른 세대들이 공존하고 있다. 내 관심사는 한국정치를 좌지우지하고 있는 속칭 386세대 (*80년대 광주항쟁 세대의 정신은 이제 많이 퇴색되었지만)들을 흉내내지 않고, 70년대,80년대,90년대 리버럴리스트 정부의 출발점인 김영삼 정부 이후는, 그 이전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군사정부와는 차이가 난다. 그리고 또 그 이후 김대중-노무현-이명박 15년은 그 내부에서 분화가 또 발생한다. 이러한 정치적 경험의 차이를 고려해서, 좌파 정치가를 어떻게 집단적으로 부각시킬 것인가? 이다.


2. 박은지의 인터뷰와 그 내용에서 향후 토론주제로 뽑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통합진보당, 혹은 NL 로 불리는 운동권들이 한국 진보진영에서 영향력을 어떻게 왜 행사해왔는가? 의미와 한계는 무엇인가? 이런 주제일 것이다.


먼저 하나 바로 잡고자 한다. 통합진보당 ‘내란 사건’ ‘종북몰이’ 사건이후, 김종철 전 부대표와 박은지 부대표가 모 종편방송에서 출연했다. 박은지부대표가 NL의 약자를 National Liberty (민족/국민 자유)라고 했는데, NL은 NLPDR의 약자로 (National Liberation People's Democratic Revolution 민족해방 민중민주혁명)의 준말이다.


언론에서도 그리고 많은 운동권들이 잘못 알고 있는 PD 역시, NLPDR이다. 신신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은 PD중의 하나의 패러다임이다. 그리고 이 두가지 NL,PD만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패러다임들도 있고, 이 둘의 차이점만 부각되었지만, 공통적인 이론적 실천적인 약점들과 한계가 존재한다.


NL이나 PD 문건이나 그 이론은 완성된 체계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두 패러다임은 ‘사회주의로 이행과정’, 그리고 비-자본주의로의 발전 가능성을 목표로 하는 것인데, 89년~91년 사이 현실사회주의 체제 붕괴로, 급속하게 대중적 파급력을 잃게 된다. 80년대말, 90년대 초에도 이미 NL, PD론 (둘다 NLPDR -> socialism 사회주의로 이행)의 한계는 지적되었다. 이게 2004년 민주노동당 10석 이후 다시 대중에게 소개된 것을 보고 약간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과거 사회구성체 논쟁이 언론에 다시 떠올랐기 때문이다. 


남의 나라 혹은 북한 정치변혁 경험들을 근거로 만들어진 NL,PD론은 구체적인 정치,사회,경제적인 예증이 부족한 채, 그 사회구성체 논쟁이 시들어졌다. 주사파 NL은 식민지 반봉건론, PD는 라틴아메리카-소련 내부 논쟁들을 바탕으로 ‘종속 강화’ ‘독점 심화’라는 테제를 가지고 있었으나, 이 두 패러다임은 한국 자본주의, 한국 지배 계급 등의 구체적인 변화과정을 설명하는데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 두 패러다임의 한계,그리고 사회과학 방법론으로서도 천박한 이론적 토대에도 불구하고, ‘종속’문제와 그 변화,한국 자본주의의 자본축적 구조 등은 새롭게 조명될 필요가 있다. 예를들어 '종속' 개념으로 삼성 자본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초국적 자본비율의 문제나 지배권 등을 설명할 수 있는가? 등 


(NL)PDR 은 사회주의로 이행 (transition)이라는 정치적 프로그램을 전제하고 있다. 그리고 정치학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정치적 주체 문제를 조악하게 조야하게 “계급,계층분석”에 기초하고 있다. NL, PD 두 패러다임 공통적으로 한국자본주의의 ‘분화 differentiation'에 대해서는 설명해내지 못했다. 사회과학적 설명 용어와 방법론으로서 부적합하거나, 패러다임의 하드 코어에 문제가 생겼다.


이 이야기는, 80년대 말 90년대 초 이야기이다.


그 당시도 그 이후에도, 한국 자본주의 분화와 정치-경제의 관계, 한국 노동자 계급의 의식의 발전과 분화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와 보고서는 많지 않았다. 대부분 NL이건 PD건 정치세력을 앞세워, 이론과 실천적 조사를 바탕으로 자기 패러다임을 혁신해야 하는데, 정치 세력들이 그 ‘이론적 작업’과 ‘실제 연구 조사’를 대신했다. 신념으로 버틴 점은 존경해야 하나, 현실 정치에서 무딘 창으로 버티는 것은 백전백패를 자초한다.


3. 주제를 조금 바꿔서, 그렇다면 왜 NLPDR 혹은 NL 그룹이 한국 운동권의 다수가 되었는가?


이것은 수많은 설명들이 있을 수 있어서, 학생운동사 맥락에서 한 가지만 짚고 다음 기회에 논의하기로 하겠다. 아직까지 한국 학생운동에 대해서 제대로 된 연구는 많지 않다. 부끄러운 현실이고 한국 학계 자체가 ‘사회과학’ 학파가 없다는 게 직접적인 원인이기도 하다. 미국, 캐나다, 독일, 프랑스는 예를들어 광주 518, 87년 6월항쟁, 7-8월 노동자 대투쟁, 노무현 현상 연구, 민주노동당의 성공과 실패 등에 대해서 박사학위를 써서 교수가 된다. 한국에 이러한 연구가 없다는 게 아니다.


87년 충남대에서 결성된 ‘전대협 (전국 대학생 대표자 협의회)’ 의 영향과 전국 대학으로 NL 그룹의 확장이 그 다수파 형성에서 가장 중요한 원인들 중에 하나다. 그리고 87년 대선 이후, 노태우 정권 하에서 학생운동은 ‘제도화’의 길을 가고, 소위 말해서 ‘학생회의 대중화’, 이것은 전두환 체제와는 질적으로 다른 상황을 초래한다. 학생운동권의 제도적 권력 (institutional power)가 학생사회에서 뿌리내리는 계기가 되었다.


80년대 대학생 운동을 한 사람들과 한번 대화를 해보라, 그들은 학번 차이를 대면서, ‘내 때는 더 엄혹했다’고 하거나, 전두환 시절에 투쟁했던 세대와 노태우 정권 하에서 투쟁했던 세대들 사이에 경험 차이 등등...


(전대협의 결성은 학생사회에서 제도적 권력이 형성된 계기를 마련해줬다. 반파쇼 정치 투쟁의 운동가들이 학생회라는 제도적 기구들을 운영해 나가는 정치적 출발점이었다) 



전 세계 정당사, 사회주의운동사, 식민지에서 해방운동사, 인종차별 운동 등, 정치적 행위는 ‘가장 사회과학적으로 정교하고 올바른’ 그런 노선이 반드시 주류를 형성하는 게 아니다.


돌이켜보라 ! 박종철의 죽음, 이한열의 죽음, 그들의 나이가 만으로 치면 20세,21세가 아니었던가? 지금 우리 당원들 중에는 아들 딸 중에, 조카들 중에, 동생들 중에 이 나이 때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죽음에 한 정권의 정당성 자체가 흔들거리던 시절이 1980년대 전두환 정권 하에 일이다. 학생운동권에서 ‘이론의 정교함’ 보다는, 실제 ‘행동과 반-파쇼 집단 학살집단에 대한 직접적인 물리적인 투쟁’ 자체가 사회과학이었다.


학생운동은 1988년 노태우 정권이 수립된 이후에도, 합법적으로 당선이 된 정권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정치적 ‘정당성’과 ‘윤리성’의 우위를 여전히 주장하게 되었다. 노태우 정부의 가장 큰 특징은 ‘합법성 legality'의 획득과 ’정당성 legitimacy'사이의 충돌이었다. NL이건 PD건 ND건 이 합법성 측면보다는 후자, 노태우 역시 광주학살의 원흉이자 파쇼의 연장으로 파악하고 그 정부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6공화국 하에서 학생운동은 전두환 파쇼와 비교해서, 학교에서 자유 선거를 통한 ‘학생회’라는 ‘제도적 권력’을 가지고 되었는데, 왜 NL 그룹이 가장 ‘다수’가 되었는가? 앞으로도 더 연구해야 할 지점이 이 두 가지 상관관계이다.


민족주의적 경향 (일제의 잔재청산, 미국 제국주의의 발견 : 88년 올림픽에서 관중들이 소련을 응원하고 미국 성조기에 야유보내는 반-미국 정서 anti-American sentiment), 소위 주체사상에서 말하는 품성론, 항일 유격대식 대중노선 등은 여러 가지 요소들 중에서 하나에 불과하다.


많은 사람들이 NL, PD를 ‘사회주의적 지향과 정향 orientation' 이라고 말하지만, 정작 6공화국 노태우 정부 시절에, 이 학생집단의 제도적 권력이 누린 것은, 자유민주주의적 ’정치 실천, 다시 말해서, 전두환 폭압에 누리지 못한, 정치적 표현의 자유였다. 실제 그 운동 주체들이 사회주의적 지향 (NLPDR은 사회주의 체제로 전환을 그 목표로 하고 있다. 사노맹으로 표현된 ND 역시 2단계 혁명론이지만, 사회주의 이행론이다) 을 했고, 또 학생운동 뿐만 아니라, 학생사회 외부와 연계를 맺었기 했지만, 학생사회 내부 정치에서 ‘제도적 권력’ 사용이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에 하나였다.


이들이 나중에 사회에 진출해서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지지세력의 주축이 되거나, 실제 정치가되어서도, 이러한 학생사회의 ‘제도적 권력’의 경험을 그대로 실천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대중적 동원능력을 보여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학생사회 때와 마찬가지로 ‘정치 내용의 빈곤’을 ‘제도적 권력’으로 대신한다.


그렇다면 6공화국 노태우 정부 하에서 전대협을 비롯한 nl 다수파 (주사파를 포함), pD, ND등은 위에서 말한 노태우 정부와 전두환 정부의 ‘통치’차이를 인식하고 ‘합법성’과‘정당성’ 사이의 긴장을 꿰둟어내는 정치 전략을 만들었는가?


89년 몰타 회담 (고르바초프와 조지 부시의 회담)으로 인해 얄타체제 (냉전 체제)의 해체부터 91년 사이에 벌어진 국제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 등이 미치는 정치적 영향에 대해서 제대로 인식하거나 설명하거나 이에 맞는 정치적 프로그램들을 만들어 냈는가?


91년 강경대 타살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민민운 (민족민주운동이라고 약칭)의 위기론이 한창 논의되고, 사회주의 대 사민주의 논쟁이 발생하던 시점에, 이에 대한 답변을 했는가?


사실 그 당시 우리의 문제이기도 했지만, 이러한 질문들과 과제들은 당시 학생운동가들의 지적 실천적 범위를 뛰어넘는 문제였고, 당시 한국 지식계의 수준을 고려했을 때, 이 문제들을 정치적 담론으로 여론화 대중화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4. 박은지 부대표가 말한 주체사상 “사람의 가능성을 믿고 그 힘을 긍정하는 사상”에 대해서

- 소련식 교과서는 마르크스에 대한 왜곡이었다.

- 소련식 교과서를 극복했다는 주체사상은 허수아비 때리기를 하는 것이다.


이 주장은 굳이 주체사상만이 아니라, ‘창조 Creativity' 를 강조하는 사람들, 박정희의 교육헌장과 ’하면 된다‘는 정신, 혹은 안철수식 ’창조적 혁신‘, 박근혜의 ’창조 경제‘ 모두다 ’사람의 가능성을 믿고 그 힘을 긍정하는 사상‘이라는 점에서, 형식적으로는 같다.


물론 북한의 주체사상은 “계급과 민족” 패러다임인데, 왜 주체사상을 박정희, 안철수, 박근혜와 동급으로 놓느냐고 항변할 것 같다.


주체사상의 이론적 근거 자체가 오류다. 주체사상 주장은 다음과 같다.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 철학의 근본문제를 물질과 의식의 관계 ( matter-consciousness relations)로 설정했다. 그런데 마르크스-레닌주의는 ‘물질’과 ‘의식’관계에서, ‘물질이 의식보다 선차적이고 우위를 갖는다. 이러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물질의 의식에 대한 선차성 (priority)은 인간의주체성, ‘인간의 주체적 파워, 힘과 능력’의 중요성을 해결하지 못했다.


그럴싸하다. 몇 년전에, 미국 최장집-박상훈 등을 따르는 연구자들이 정치의 선차성 (the primacy of politics: 정치가 가장 중요하다) 를 쓴 미국 비교정치학 교수 쉐리 버먼(Sheri Berman) 을 한국에 소개하면서, 좌파 운동권들이 ‘정치’를 모른다고 야단쳤을 때, 그 ‘선차성’ 개념과 위 선차성 개념은 동일한 말이다.


주체사상을 서술했다는 황장엽의 이론적 깊이의 한계이기도 하고, 정보 수집의 한계이기도 하다.


사실 주체사상이 말하는 마르크스-레닌주의 교과서 (소련 사회과학 아카데미에서 만들어낸 검인정 교과서로서, 그 기원은 부하린의 공산주의의 ABC, 그 이후 스탈린의 역사적 유물론 테제 등에 있다. 이는 나중에 설명하겠음)에서 말하는 ‘물질’과 ‘의식’ 관계가 철학의 근본문제라 하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


주체사상이 ‘물질-의식’ 대립항이 아니라, ‘세계-인간’으로 근본문제를 전환시켜, 마르크스 레닌주의가 해결하지 못한 인간의 주체성 (subjectivity)를 해결했다고 하는 것은, 이중의 오류이다. 첫 번째는 소련 사회과학 검인정 교과서 (공산당 명령을 따르는 연구소)에서 마르크스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기반한 ‘물질’ -‘의식’이 철학의 근본문제라고 못박아놓고,


두 번째는, ‘물질’ -‘의식’ 대립항이 풀지 못한 퍼즐과 난관 수수께기를 ‘세계-인간’ 대립항이 풀었다고 선전하는 것 자체가 자화자찬격이다. 세계에 대해서 인간의 주체성 즉, 의식성, 창조성,자주성을 더 부각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 주체사상 답변이 잘못된 문제설정 "물질과 의식"의 관계에 대한 하나의 답 (물론 오답이지만)은 될 수 있겠지만, 철학적 주제들에 대한 답변이 되기에는 불충분하다. 철학적 체계로 인정할 수 있지만, 수많은 증명부담들을 안고 있다. 철학에서 다루는 수백가지 테마들을 이 인간-세계 대립항으로 풀 수 있다는 것인가? 


그리고 자본주의의 변화와 역동성, 그 축적 구조를 어떻게 설명가능하단 말인가? 자기들이 경험하지 않은 세계와 자본주의에 대한 연구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수많은 중요한 사회과학적 주제들을 인간-세계 대립항으로 진단도, 해결도 할 수 없다. 




(1940 년 조제프 스탈린이 서술했다는 : 변증법적 역사적 유물론 교과서: 마르크스에 대한 선택적 이해와 왜곡의 공식적 출발점이 된 책이다. 1980년대 한국에 소개된 마르크스 입문서, 철학개론은 대부분 이 스탈린의 기본골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DIA-MAT의 효시이자, 마르크스 사상의 박제화 왜곡의 공식화 선언이었다)


이 주체성 (subjectivity) 문제는 제 2 인터내셔널 이후, 마르크스에 대한 혹은 사회주의자 내부에서 논쟁된 ‘경제 결정론 economic determinism'에 대한 문제제기로, 당시 중요한 주제였다. 


그런데 80년대말, 90년대 초, 한국에 소개되고 번역된 마르크스 입문서, 넓게 봐서 사회주의체제의 토대를 이루는 철학 교과서들은, 대부분 소련 사회과학 아카데미나 동독, 중국, 주사파 NL의 경우는 평양에서 출간된 교과서들이었다. 이건 NL이건, PD건, ND건, 과학적 사회주의자건 다 마찬가지로 안고 있었던 한계였다.


학생운동권, 노동운동가들의 헌신적인 정치적 실천, 분신까지 포함한 그 숭고한 정치적 투쟁들과, 이론 사이에는, 이러한 엄청난 문화적 지적 간극이 있었다. 그것은 2014년 1월 현재 평가가 아니라, 25년 전 이야기이다.


25년, 아니 길게 잡아 30여년이 흘렀다. 한 세대가 바뀌었다. 한국 전쟁이 미친 지식인 사회, 이론가 사회, 좌파 정치권 사회, 학생운동가, 시민운동, 노동운동, 그리고 진보정당, 좌파정당... 우리가 생각한 것 이상이다.


자기들 스스로 학파를 만들어서, 지식노동이건 육체노동이건 그 무슨 노동이건간에, 학파를 형성해서, 코리아라는 한국 현실 (social reality)을 사회,사람,사회구조,의식 등을 설명하고 연구하는 사회인식론(social epistemology)를 갖추기도 전에, 90년대 긴 암흑기가 있었고, 이런 것들을 지속적으로 연구하기 전에 97년 IMF 긴축통치로 한국은 운없게도 세계에서 최단시간에 가장 살벌한 자본주의적 신자유주의 체제를, 80년대 민주화 세력 (김대중정당과 80년대 학생운동권 주류파)이 그 악날한 반-민중적 반-노동자적 어메리칸 스탠다드 자본주의를 실천해버렸다.


사람들은 자기 정치적 정당성 때문에,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신념, 정치적 방법론, 조직론, 이론적 정당화 등에 대해서 게을리 한다. 왜냐하면 현실정치는 늘 나보다 우리보다 더 나쁜 세력이 존재하고 있고, 그들이 늘 음모를 꾸미고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기 때문이다.


정치는 늘 실천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야구는 9회로 끝나지만, 정치세계는 쉼없는 연장전이다. 9회 이후에 ‘이론’으로 야구하나? 정신력으로 버틴다. 제한된 숫자 선수들로 버티는 것이다. 그것이 늘 정치적 현실이다.


하지만, 역사에서 현실에서 정치적 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현실을 설명할 인식론을 우리 스스로 가지고 있어야 한다.


돌직구 하나로 승부하는 투수보다는, 체인지업과 슬라이더를 장착하고 돌직구를 가진 투수가 실제 경기에서 이기니까.


(1922년 경, 부하린 Buhkarin 이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소련 대중들을 위해 서술한 공산주의의 abc : 마르크스 엥겔스 책들이 노동자 해방의 성전으로 격상화되기 시작했다.

 )


Posted by NJ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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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학교 평가의 논

    2014.04.15 01:50 [ ADDR : EDIT/ DEL : REPLY ]
  2. 그냥 NL이 다수를 차지하게 된건 생활 학문 투쟁의 공동체라는 학생회중심의 학생운동을 했다는점으로보고 PD는 직업적 혁명가의 길을 가려고 했다는 점에서 학생회중심의 운동이 다수를 차지하기 편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편협하게나마 듭니다만.. 뭐 주사파 논쟁은 논외로 하는것이 맞을것 같고.. 하다보면.. 한국운동권에 주사파가 존재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되어지니까요..

    그냥 지나가다 코맨트 남깁니다.

    2018.02.14 14:48 [ ADDR : EDIT/ DEL : REPLY ]

[518광주] 윤상원 선생 아버지와 대화

: 원시 등록일 : 2004-05-14 17:03:45



시간이 흐르면 사람은 없어지기도 하고, 잊어먹기도 한다. 그렇게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삶의 의지의 끈을 놓기 때문이다. 대부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고, 어쩌면 포기한다는 말이 더 어울릴지 모르겠다. 죽음과 생의 사멸을 스스로 선택하고 거기에 ‘의지’를 집어넣는다는 것은 그래서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배와 같이 자연스런 현상은 아니다.


아직도 의문이다. 왜 윤상원은 5월 27일 새벽, 도청에서 철수하지 않았을까?


윤상원의 아버지, 윤석동(78세)님에게 물었다. 올해가 윤상원 선생이 연세가 어떻게 되냐고?

“올해 그럼 살아계시면 연세가 어떻게 되죠?”

“쉰 다섯(55)인가? 쉰 여섯인가? 그럴 것입니다.”

옆에 있던 어머니 (김인숙씨:76세)께서 다시 정정해주신다

“아, 지 엄마는 또 쉰 일곱이라고 하네요.”

항상 청년의 얼굴이었던 그 윤상원이 오십대 중반이었다는 것이다.


“요새도 들에 나가신다고 저번에 (윤상원) 어머니께서 그러시던데요?”

“고혈압이 있어서 약 먹고 그러네요.”

윤상원의 어머니께서도 무릎이 안좋아 병원에 다닌다고 저번에 그랬다.



(2005년 임곡 천동마을 윤상원 생가에 화재가 발생했다고 한다)


“요즘도 운동하는 사람들이 (윤상원 생가)에 찾아오고 그럽니까?”

“아수울 때 (아쉬울 때)는 찾아오고 그러더니만, 요새는 …….”

말이 한참 끊어졌다. “안 잊고 전화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셨다.


“대학시절 제가 다큐멘타리 찍는다고 몇 친구들과 가서 따님 (윤상원 선생 막내 여동생)과 어머니, 아버지 인터뷰했는데, 그 때 많이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시 윤상원선생 막내 여동생이 5-18 계엄령군이 윤선생 집에 와서 대검으로 온 집안을 다 쑤시고 큰오빠 (윤상원) 행방을 찾았다고 하면서, 자상한 큰 오빠를 기억하면서 울던 기억이 난다. 어머니도 한참 이야기하시다가 결국에는 우시고…)


“저도 가끔씩 왜 5월 27일, 그 날 그렇게 도청에서 윤상원 선생이 빠져 나오지 않았는가 생각해봅니다…” “예…. 그 때 우리 상원이가 고등학교 아이들을 다 불러놓고, 느그들은 다 나가라. 나가서 살아서 민주주의를 위해서 싸우고, 역사의 징인 (증인)이 되어라고 했다고 …” 한참, 아니 평생을 생각해도 답을 찾기 힘들 이 질문을, 윤상원 선생 아버지는 “우리 상원이가” 그랬다고 했다.


그러면서 볼티모오선(Bolitimoresun) 신문사 기자 마르틴 (Martin)이야기를 했다. 한국을 두어번 다녀갔고, 윤상원 생가도 방문했다고 한다. 이 마르틴 기자가 마지막까지 도청에 남아서 윤상원 시민군 대변인의 브리팅과 기자회견을 알렸다고 한다.


“그 마르틴 기자가 우리 상원이가 참 기억에 남는다고 하면서, 어떻게 한국에서 유년시절을 보냈길래, 그런 순수하고 정의로운 눈을 하고 있을 수 있느냐고, 죽음앞에 초연할 수 있냐고…합디다.”



   (윤상원 부친, 윤석동 옹 : 출처 : http://www.oneclick.or.kr/contents/nativecult/area09.jsp?cid=87948


“어렸을 때는 어떠했습니까? 의리가 많았나요?”


“그랬지요. 의리가 많고, 지 친구들이 누구한테 맞고 그러면, 아무리 힘센 놈들이라도 가서 상원이가 싸우고, 또 지보다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옷도 다 벗어주고 오고…” 윤석동 아버지는 윤상원 선생이 장남인데다, 중학교시절부터 광주에서 유학을 해서, 같이 지낼 시간이 많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것은 전형적인 한국 농촌 장남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였다. 농사짓는 아버지와 대학다니는 아들과의 어려운 관계. 그런데, 윤상원선생은 어떻게 70년대에 노동운동에 관심을 가질 수 있었을까?


“지가 3남 4녀인디… 딸 중에 경희가 야간고등학교를 다니면서, 한미제과에서 일했는데, 월급이 쌀 7대 (됫박) 값 밖에는 안되었지요. 그래서 노동자들이 월급도 적고 배는 고프고 그러니까, 예를들어 쌀 1000 kg 을 가져다가 상품을 맹그는디, 중간에 배고파서 노동자들이 다 먹어버리고, 800 kg, 600 kg 만 상품 만드는데 가고, 그래서 또 관리자들이 노동자들을 때리고… 우리 상원이가 그런 것도 보고…들불 야학도 하고…”


윤상원 평전에 나오는 이야기가 아닌, 가족사를 통해서 본 것이다. 90년대 초반에 잠시 인터뷰한 윤상원선생 막내 여동생 소식을 잠시 물었다. ”지금 대구에 살아요. 아들 둘 낳고 잘 살아요. 남편이 대구에서 왔는디, 여수시청에서 근무하다가, 지 친구가 소개해줘가꼬…지금은 대구서 아이들 키우고 잘 삽니다.” “…님 같은 분들이, 나중에 많이 (광주 항쟁, 윤상원 선생등) 기록해주시고, 발전시켜주십시오. 이렇게 안잊고, 멀리서 전화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고맙다는 말은 제가 해야지요.” 언젠가 광주에 간 적이 있다. 어린시절 야구한다고 시가행진하던 그 곳, 금남로에서 윤상원 선생 아버지 윤석동씨를 만났다. 중절모를 벗으면서 “여기까지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셨다. 아직 새파랗게 젊은 우리들에게. 인생이 어찌했든, 민주화가 어떻고, 자주-평등이 아무리 고귀하더라도, 자기 자식새끼가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등지고 간다는 것은 자연의 이치에 어긋나는 일이다.




(2013년 5월 15일 한 신문 기사: 복구된 윤상원 선생 생가에서 윤석동 부친이 학생들과 시민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있다.)


2004년 5월, 세월이 많이 흘렀다. 민주노동당도 국회의원이 10명이나 생겼다. 우리가 풀어야 한국문제는 민족, 노동, 여성, 생태 등 그 문제의 복잡성이 훨씬 증대되었고, 수 많은 인력들이 필요하게 되었다. 어쩌면 윤상원 선생 같은 영웅보다, 면서기, 구청서기들이 필요한 시대인지도 모르겠다. 80년 5월 27일, 도청 한 사무실 방에서 M1 총을 들고 있다가 계엄군 총에 맞아서 전사했던 윤상원,그리고 수많은 광주시민들과 그 후 그 후예들이 있었다.


진보를 말하는 사람들, 민주노동당과 같은 진보당 사람들이 그 도청을 다시 지키려 들어올 때까지 그렇게 영혼을 붙들고 있겠다는 것인가? 새로 지은 5-18 광주 묘역, 그곳이 왜 그렇게 낯설까? 묘는 커지고 공식화되고 그랬는데, 한 구석 허전하다.


실제 주인공들이 누구인지, 왜 그리도 손님들이 무거운 어깨들로 나타나는지, ‘새벽에 몰래 다녀올까?’ 그런 심정이 든다. 죽은 자의 이름으로 산 자기 이름을 아직 돌비석에 새길 때가 아닌 것같다. 돌비석에 절할 시간에, 산 사람들, 그들의 가족, 아직 남은 상흔을 껴안을 때이다. 아직은 우리가 복원해야 할 역사가 많이 있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이 마라톤을 한다면, 광주 도청에서 윤상원 선생 생가(예전 임곡마을)까지 해 봄도 괜찮을 것 같다. 윤상원 선생이 광주 도청, 아니 전라남도 도청에서 나오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서른 하나 (31세)의 나이로, 마치 한국의 예수처럼 그렇게 십자가를 진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생각들은 다 어디서 온 것일까?


연락처 : 윤상원 부친 윤석동, 모친 김인숙  062-952-8308 

Posted by NJ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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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March Song for My Dear Love ! 


 (임을 위한 행진곡 : 님을 위한 행진곡) 

- 번역  NJ 원시

 Without Leaving Love, Glory, or Name,

 Determined to Fight for Democracy to the Last. 

 With Only the Banner of Liberation in the Wind, 

Our Comrades Falling Fight. 

Not Being in Despair,  

Looking Forward to Seeing the Dawn of A New World!

Though Time Passing On, 

Our Land Remembering Truth. 

 wakening Our Spirit, 

Speaking Up Truth. 

Making One Step Forward, 

So Those Who Survive Follow ! 


 어제 매니토바 주에서 온 친구와 대화를 하다가, 그 친구가 말하길, 한국 노동운동이나 진보정당, 그리고 민주화 운동에 대한 책 (영어로 씌여진 책)이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역사학과를 졸업한 친구인데, 브루스 커밍스가 쓴 한국 역사책 읽은 게 전부라고 했다. 한국은 남아프리카 공화국, 브라질과 더불어 소위 3대 노동운동의 메카로 분류된다. 

(서유럽국가들을 제외하고 속칭 신흥공업국가들 중에서) 한국 진보정당운동이나 노동운동의 쇠락이나 후퇴와는 무관하게, 지금까지도 지난 30년간 군사정부에 저항하면서 이룩한 민주화 운동의 성과, 그리고 노동운동,시민운동, 진보정당 (범)사회주의정당운동들을 비-한국인들에게 소개하는 노력은 등한시했다.

 속칭 진보나 좌파들의 비주체적인 태도도 문제이고, 스웨덴 모델이나 핀란드 모델, 이탈리아 협동조합을 '화석화된 이상향'으로 소개하기 급급하지, 우리 역사 속에서 실제 주체들의 고민과 성과, 한계들을 차분히 성찰한 후에, 정치적 대안들을 제시하는 '성숙함'과 '사유의 주체성과 독립정신'은 부족하다. 

 누굴 탓하겠는가? 갈 길이 멀다. 이런 문제의식을 느낀 사람들부터 움직여야 하고, 마음을 합치고 적은 일이라도 시작해야 한다. 임을 위한 행진곡, 다양한 영어 번역이 가능할 것이다. 캐나다에 와서 영어 조금 배워서 맨 처음 한 일 중에 하나가 임을 위한 행진곡 영어 번역이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 세계 각국에서 실제로 애창될 날이 올 것이다. 마치 프랑스 애국가가 축구장에서 불려지듯이.




Posted by NJ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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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손재원

    페이스북에 친구들에게 보이려고, 임을 위한 행진곡을 올렸더니(아주 간략한 5,18민주화운동에 관한 내용과 같이) 가사를 물어보길래 이 사이트를 링크로 남겼습니다. 그리고 이런 좋은 자료 고맙습니다^^

    2013.05.17 00:53 [ ADDR : EDIT/ DEL : REPLY ]
    • 518 은 계속해서 앞으로도 더 연구되어야 할 주제이니까요...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지고 의견을 낼 수 있었으면 합니다.

      2013.06.02 05:05 신고 [ ADDR : EDIT/ DEL ]
  2. Yanula

    번역이 의미를 정확히 전달하지 못한것 같습니다.. 완전히 다른 내용으로 시적 아름다움 뿐만아니라 처절한 투쟁도 잘 나타내지 못하네요..ㅜ.ㅜ

    2013.05.17 19:22 [ ADDR : EDIT/ DEL : REPLY ]
    • 예 번역은 다양하게 될 수 있으니까요, Yanula 님도 한번 올려주세요. 구체적으로 뭐가 문제인지도 알려주시고요.

      2013.06.02 05:06 신고 [ ADDR : EDIT/ DEL ]
  3. 5.18 민주화운동에 임을위한 행진곡은 맞지않다고 봅니다 왜냐면 3.1 6.25. 8.15 절 등은
    외국에대한 우리민족 저항 예방 고통 예방 등을
    그리기위해서 부르곤합니다 5.18은 우리나라
    자국에서 일어난 일은 나라을 구하고 나라를
    애국하기위한것이라면 당연히 애국가를
    제창하고 고인의 묵념으로 하는것이
    맞다고 봅니다

    2016.05.15 17:22 [ ADDR : EDIT/ DEL : REPLY ]
    •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도 애국가를 불렀다는 사실을 아세요? 광주 시민들이 제일 많이 부른 노래입니다. "전두환 살인마를 찢어죽이자" 이런 구호와 더불어 애국가도 많이 불렀습니다.

      애국가는 사람들이 시대 상황에 맞게 다시 고쳐서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2016.12.10 20:51 신고 [ ADDR : EDIT/ DEL ]
  4. 더 이상 5․18과 ‘임을 위한 행진곡’의 의미가 훼손되지 않았으면...”
    김경민 기자 (kkim@sisajournal.com) 승인 2017.05.17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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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뷰] ‘임을 위한 행진곡’ 작곡가 김종률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

    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 김종률 작곡·황석영 작사 <임을 위한 행진곡>



    유장한 단조의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은 5·18 민주화운동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이다. 그 태생은 5·18 2주기를 기념하는 단막극 공연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후 1987년 6월항쟁에서 대중들에게 확산되며 노동 운동 현장에서는 투쟁의 노래로, 혹은 위로의 노래로 널리 불렸다. 대학생 새내기 시절 누구나 한번쯤 불러봤을 법한 대표적인 민중가요가 됐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5·18민주화운동 기념일이 정부 기념일로 지정된 1997년부터 기념식에서 제창됐다. 하지만 이 노래는 지난 9년 간 원하는 참석자만 따라 부르는 합창 형식으로 불렸다. 이명박 정부 2년차였던 2009년, 국가보훈처는 ‘국론 분열 우려’를 이유로 제창 대신 합창 형식으로 바꿨기 때문이었다. 9년이 지나서야 ‘임을 위한 행진곡’은 다시 제창으로 돌아왔다. 문재인 대통령은 오는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이 곡을 다시 제창으로 부를 것을 지시하면서 부터다.



    이 곡을 쓴 이는 김종률 현 광주문화재단 사무처장이다. 전남 강진 출신의 김 사무처장은 전남대 재학 시절이던 1982년 5·18 2주기를 기념하기 위해 이 노래를 만들었다. 재야운동가인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의 시 ‘묏비나리’에서 영감을 받아 황석영 작가가 가사를 붙였다. ‘묏비나리’는 작가로도 활동한 백기완 소장이 1980년 서빙고 보안사에서 고문당할 때 쓴 장편시다. 5·18​민주화운동 37주년 기념식을 앞두고 ‘임을 위한 행진곡’의 작곡가 김종률 광주문화재단 사무처장을 전화로 인터뷰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의 작곡가 김종률 광주문화재단 사무처장 ⓒ 사진=연합뉴스



    ‘임을 위한 행진곡’이 9년 만에 5·18 기념식에서 제창될 예정이다. 이 날 행사에 함께 참여해 노래를 부른다고 들었다.



    문재인 대통령께서 후보 시절 광주를 방문해 ‘임을 위한 행진곡’을 기념식에서 제창하고 5·18 기념곡으로 지정하겠다고 약속했다. 무엇보다 자신의 약속을 실천한 것이 반갑고 무엇보다 신뢰가 간다.



    기념곡으로 지정되려면 필요한 절차가 있으니까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내년 5·18 기념식에서는 기념곡으로 함께 제창하게 되지 않을까 기대가 된다.





    김 사무처장이 24살 때 만든 노래다.



    지금 생각해도 신기한 게 4시간 만에 뚝딱 써내려간 곡이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1982년 4월, 5·18 2주기를 앞두고 만들어졌다. 당시만 해도 5·18을 입 밖으로 내기만 해도 잡혀가던 시절이었다. 엄혹한 시국이었지만 5·18 2주기를 그대로 넘길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함께 운동을 하던 친구들과 “뭔가 5·18을 기념할 수 있는 것을 하자”고 결의했다. 그러던 중 5·18 민주화운동 당시 전남도청을 사수하다 사살된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과 1979년 노동 현장에서 야학을 운영하다 사망한 노동운동가 박기순의 ‘영혼 결혼식’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리는 윤상원-박기순의 영혼 결혼식을 소재로 30분짜리 노래극, 그러니까 ‘미니 뮤지컬’을 만들기로 했다. 제가 거기에 들어갈 곡들을 맡았다. 총 8곡이 들어갔는데, 그 중 마지막, 극의 대미를 장식한 곡이 ‘임을 위한 행진곡’이었다. 부부가 뒤에 남은 후배들에게 ‘새 날이 올 때까지 나아가라’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주는 곡이었다.





    작사가가 황석영 작가다. 그의 방북 이력으로 인해 이 노래 역시 곤혹을 치렀다.



    노래 속 ‘임’이 북한의 김일성 부자를 지칭하는 것 아니냐는 논란이었다. 가사 가운데 ‘새날’은 북한 주도로 ‘적화통일되는 날’을 의미한다는 일부의 주장이 있었다. 곡에 대한 지나친 왜곡이다. 이 곡은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노래다.



    1982년 당시 황석영 작가가 광주에 있었다. 제가 곡을 쓴 뒤 동료들과 함께 가사를 붙이는데 딱 떨어지는 가사가 안 나왔다. 그런데 황 작가가 갑자기 서재에 들어가 시집 한 권을 가져오더니 뭘 적어내리더라. 나중에 알았지만 백기완 시인의 ‘묏비나리’였다. 그 중 일부에서 영감을 얻어 써내려간 가사가 곡과 딱 붙은 거다. 마치 원래 그 곡 가사였던 것처럼.





    벗이여,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라.

    갈대마저 일어나 소리치는 끝없는 함성

    일어나라 일어나라

    소리치는 피맺힌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산 자여 따르라



    - 백기완의 시 <묏비나리> 중 일부


    2016년 광주 국립 5.18국립묘지에서 열린 5.18 기념식에 문재인 당시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가 참석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이 노래가 이렇게 대표적인 민중가요가 될 줄 알았나.



    제가 1982년도에 이 곡을 만들고 바로 군대에 갔다. 그래서 이 곡이 어떻게 불렸고 어떻게 퍼져나갔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1983년 3월 군대에서 휴가를 나와 연세대학교에 다니던 친구를 만나러 갔을 때의 일이다. 신촌 거리를 지나가는데 학생들이 데모를 하는 틈에서 어디서 많이 듣던 노래가 나오는 거다. 연세대에 다니던 친구에게 무슨 노래냐 물었더니 그 친구가 “너 군대 가있을 때 나온 노랜데 요즘 최고 인기다”고 하더라. 제가 만든 ‘임을 위한 행진곡’이었다. 그날 밤 그 친구와 밤새 술 마시고 어깨동무를 하고 거리를 다니며 이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난다.





    원래 작곡을 공부했나?



    전남대 상대생이었다. 그저 어릴 때부터 노래를 좋아해 작곡을 독학했다. 당시에는 대학가요제들이 활성화돼있었다. 지역 VOC 대학가요제에서 대상도 받고, 1979년 MBC 대학가요제에선 ‘영랑과 강진’이란 곡으로 은상을 받았다. 그냥 좋아서 한 일이었다.

    만약 민주항쟁이 없었더라면 나는 지금쯤 아마 싱어송라이터가 됐을 것이다. 지금과는 아마 다른 인생을 살았을 거다.





    노래를 부를 때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노래를 부를 때마다 매번 울컥한다. 처음 노래를 완성한 뒤 가사까지 붙여 카세트 레코딩으로 녹음한 뒤 처음 듣던 순간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때 정말 울컥했다. 당시 함께 제작한 10명의 동료들이 있었는데 노래를 들으며 모두들 아무 말이 없었다. 그 순간 공기가 울컥하고 감동적이었다. 모두 눈빛으로 서로의 감정을 공유했던 순간이었다.





    새 정부가 출범했다. 이미 개혁의 신호탄이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문화예술인으로서 어떤 기대감을 품고 있나.



    이제야 모든 것이 제 자리를 찾아가는 것 같다. 무엇보다. 더 이상 5·18이, 그리고 그 상징인 ‘임을 위한 행진곡’의 의미가 훼손되지 않았으면 한다. 개인적으로는 제 위치에서 뜻 맞는 사람끼리 ‘임을 위한 행진곡’을 문화예술로 승화시키는 작업을 계속 해나가려고 한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클래식 교향곡과 뮤지컬로 만들려는 준비를 한다고 들었다.



    둘 다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다. 제 바람은 이 곡이 기념곡으로 지정된 뒤 내년 5·18 기념식에서 유명 연주자들을 초청해 교향곡 초연을 하는 것이다. 상당히 의미 있는 공연이 될 것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교향곡, 뮤지컬 등 다른 형태의 문화예술로 만드는 것은 의미가 있다. 박근혜 정부 때의 일도 그렇지만 불행한 역사는 국민이 원치 않더라도 반복되는 경향이 있다. 역사적 사실이 왜곡되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역사가 사람들의 삶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야 한다. 그래야 잊지 않을 수 있다. 교과서에만 실린 역사는 언제든 권력에 의해 훼손될 수 있다.

    2020.05.19 13:37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