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2014. 10. 24. 13:02

죽은 아들이 돌아오길 기다리며, 대문을 열어놓는 아버지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의 상처는 평생 간다. 어떠한 보상을 받더라도, 딸 아들 가족 연인 친구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푸르디 푸른 하늘, 구름 한 조각 없는 청명한 날에도, 길을 걷다가도 울음을 참지 못할 것이다. 세월호의 진실을 알고 싶다고 말하는 부모나 가족들 친구들, 그리고 한국 시민들은 그걸 알아야 떠나가 버린 사람들과 작별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이다. 


한 아버지가 있다. 죽은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길 기다리는 아버지 어머니이다. 집 대문을 열어놓는다. 비오는 날에도 맑게 개인 날에도. 집 떠나 서울간 아들이 언젠가는 돌아올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30 여년이 흘러도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들 심정이다. 얼굴 주름은 성형이라도 가능하지만, 가슴팍에 새겨진 아픔은 재발한다. 


정치적 자살과 분신의 시대가 있었다. 미래에 먹어야 할 나이를 응축시켜, 미래 50년 동안 할 수 있는 일을 하루에 다 하고 간 사람들이었다. 그게 어디 불가피한 결단이었다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아픈 살갗이 타고 찢어지는 그런 아픈 순간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말이 없고, 대문은 열려져 있다. 거의 30년이 되어간다.




(이재호 열사의 아버지, 문을 열어놓고 아들이 살아 돌아오길 기다리다)



Posted by NJ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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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주의 혹은 주체사상: 김정진 박은지 논쟁점과 논의 방향 (2)


(1)은 김정진의 문제의식에 대해서, (2)는 박은지의 문제의식과 해명에 대해서 쓴다. 박은지의 해명을 보면 간단하다. 질의자들이 이렇게 물은 것같다. 김일성주의가 도대체 어떤 매력이 있어서, 좀 배우고 이정희 통진당 대표처럼 서울대도 나오고 인문계 여자 수석도 하고 변호사도 하는 사람이 주체사상파인가? 박은지부대표가 질의자에 앞서서 “주체사상의 매력에 대해서” 주장을 하지 않았다고 해명한다.


이런 대화 맥락과 박은지의 해명에 대해서는 굳이 다시 의문을 제기하거나 설명을 요하지 않을 것이다. 김정진 전 부대표가 이러한 ‘대화 맥락’에 대해서 고려해주었으면 좋겠다.


1. 당 간부들 내려버지다. 정당은 코디네이터가 필요하다


글쓴이는 박은지 인터뷰의 문제점을 다른 곳에서 찾고자 한다. 당대표나 대표단,그리고 당 주요간부들의 정치활동을 내용적으로 ‘도우미’역할을 할 수 있는 당내 ‘연구소’나 ‘정치토론 그룹’ 혹은 정치조직(정파)의 부재가 더 큰 문제의 원인이다.


얼마전 장석준 부대표가 프레시안에 기고한 <김정은이 망해야 한반도가 산다! >는 글의 전반적 내용은 노동당이나 한국진보정당이나 좌파정당의 대북정책이나 평화정책으로 수용되기 힘든 내용의 글이다. 박은지 부대표의 경우도 썰타임 출연이나 발언 내용 역시 당원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당 정책의 대중화에는 별로 기여하지 못했다고 본다.


당 간부들의 정치적인 활동은 장려되어야 하고 당원들은 적극적으로 같이 협조해야하겠지만, 현재 그리고 지난 2년간 노동당의 당 간부들은 ‘당의 코디네이터’ 없이 그냥 개별적으로 혼자 메이크업하고 혼자 알아서 옷입고 혼자 스케쥴 잡고 언론에 기고하거나 출연하거나 했다. 

진보신당-노동당은 과거 노회찬 심상정 전대표의 당과 독립적인 언론플레이의 문제점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거나,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거나,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지 못하고 있다. 


[고민과 대안] 당 안에는 4-5개 다른 세대들이 공존하고 있다. 내 관심사는 한국정치를 좌지우지하고 있는 속칭 386세대 (*80년대 광주항쟁 세대의 정신은 이제 많이 퇴색되었지만)들을 흉내내지 않고, 70년대,80년대,90년대 리버럴리스트 정부의 출발점인 김영삼 정부 이후는, 그 이전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군사정부와는 차이가 난다. 그리고 또 그 이후 김대중-노무현-이명박 15년은 그 내부에서 분화가 또 발생한다. 이러한 정치적 경험의 차이를 고려해서, 좌파 정치가를 어떻게 집단적으로 부각시킬 것인가? 이다.


2. 박은지의 인터뷰와 그 내용에서 향후 토론주제로 뽑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통합진보당, 혹은 NL 로 불리는 운동권들이 한국 진보진영에서 영향력을 어떻게 왜 행사해왔는가? 의미와 한계는 무엇인가? 이런 주제일 것이다.


먼저 하나 바로 잡고자 한다. 통합진보당 ‘내란 사건’ ‘종북몰이’ 사건이후, 김종철 전 부대표와 박은지 부대표가 모 종편방송에서 출연했다. 박은지부대표가 NL의 약자를 National Liberty (민족/국민 자유)라고 했는데, NL은 NLPDR의 약자로 (National Liberation People's Democratic Revolution 민족해방 민중민주혁명)의 준말이다.


언론에서도 그리고 많은 운동권들이 잘못 알고 있는 PD 역시, NLPDR이다. 신신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은 PD중의 하나의 패러다임이다. 그리고 이 두가지 NL,PD만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패러다임들도 있고, 이 둘의 차이점만 부각되었지만, 공통적인 이론적 실천적인 약점들과 한계가 존재한다.


NL이나 PD 문건이나 그 이론은 완성된 체계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두 패러다임은 ‘사회주의로 이행과정’, 그리고 비-자본주의로의 발전 가능성을 목표로 하는 것인데, 89년~91년 사이 현실사회주의 체제 붕괴로, 급속하게 대중적 파급력을 잃게 된다. 80년대말, 90년대 초에도 이미 NL, PD론 (둘다 NLPDR -> socialism 사회주의로 이행)의 한계는 지적되었다. 이게 2004년 민주노동당 10석 이후 다시 대중에게 소개된 것을 보고 약간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과거 사회구성체 논쟁이 언론에 다시 떠올랐기 때문이다. 


남의 나라 혹은 북한 정치변혁 경험들을 근거로 만들어진 NL,PD론은 구체적인 정치,사회,경제적인 예증이 부족한 채, 그 사회구성체 논쟁이 시들어졌다. 주사파 NL은 식민지 반봉건론, PD는 라틴아메리카-소련 내부 논쟁들을 바탕으로 ‘종속 강화’ ‘독점 심화’라는 테제를 가지고 있었으나, 이 두 패러다임은 한국 자본주의, 한국 지배 계급 등의 구체적인 변화과정을 설명하는데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 두 패러다임의 한계,그리고 사회과학 방법론으로서도 천박한 이론적 토대에도 불구하고, ‘종속’문제와 그 변화,한국 자본주의의 자본축적 구조 등은 새롭게 조명될 필요가 있다. 예를들어 '종속' 개념으로 삼성 자본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초국적 자본비율의 문제나 지배권 등을 설명할 수 있는가? 등 


(NL)PDR 은 사회주의로 이행 (transition)이라는 정치적 프로그램을 전제하고 있다. 그리고 정치학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정치적 주체 문제를 조악하게 조야하게 “계급,계층분석”에 기초하고 있다. NL, PD 두 패러다임 공통적으로 한국자본주의의 ‘분화 differentiation'에 대해서는 설명해내지 못했다. 사회과학적 설명 용어와 방법론으로서 부적합하거나, 패러다임의 하드 코어에 문제가 생겼다.


이 이야기는, 80년대 말 90년대 초 이야기이다.


그 당시도 그 이후에도, 한국 자본주의 분화와 정치-경제의 관계, 한국 노동자 계급의 의식의 발전과 분화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와 보고서는 많지 않았다. 대부분 NL이건 PD건 정치세력을 앞세워, 이론과 실천적 조사를 바탕으로 자기 패러다임을 혁신해야 하는데, 정치 세력들이 그 ‘이론적 작업’과 ‘실제 연구 조사’를 대신했다. 신념으로 버틴 점은 존경해야 하나, 현실 정치에서 무딘 창으로 버티는 것은 백전백패를 자초한다.


3. 주제를 조금 바꿔서, 그렇다면 왜 NLPDR 혹은 NL 그룹이 한국 운동권의 다수가 되었는가?


이것은 수많은 설명들이 있을 수 있어서, 학생운동사 맥락에서 한 가지만 짚고 다음 기회에 논의하기로 하겠다. 아직까지 한국 학생운동에 대해서 제대로 된 연구는 많지 않다. 부끄러운 현실이고 한국 학계 자체가 ‘사회과학’ 학파가 없다는 게 직접적인 원인이기도 하다. 미국, 캐나다, 독일, 프랑스는 예를들어 광주 518, 87년 6월항쟁, 7-8월 노동자 대투쟁, 노무현 현상 연구, 민주노동당의 성공과 실패 등에 대해서 박사학위를 써서 교수가 된다. 한국에 이러한 연구가 없다는 게 아니다.


87년 충남대에서 결성된 ‘전대협 (전국 대학생 대표자 협의회)’ 의 영향과 전국 대학으로 NL 그룹의 확장이 그 다수파 형성에서 가장 중요한 원인들 중에 하나다. 그리고 87년 대선 이후, 노태우 정권 하에서 학생운동은 ‘제도화’의 길을 가고, 소위 말해서 ‘학생회의 대중화’, 이것은 전두환 체제와는 질적으로 다른 상황을 초래한다. 학생운동권의 제도적 권력 (institutional power)가 학생사회에서 뿌리내리는 계기가 되었다.


80년대 대학생 운동을 한 사람들과 한번 대화를 해보라, 그들은 학번 차이를 대면서, ‘내 때는 더 엄혹했다’고 하거나, 전두환 시절에 투쟁했던 세대와 노태우 정권 하에서 투쟁했던 세대들 사이에 경험 차이 등등...


(전대협의 결성은 학생사회에서 제도적 권력이 형성된 계기를 마련해줬다. 반파쇼 정치 투쟁의 운동가들이 학생회라는 제도적 기구들을 운영해 나가는 정치적 출발점이었다) 



전 세계 정당사, 사회주의운동사, 식민지에서 해방운동사, 인종차별 운동 등, 정치적 행위는 ‘가장 사회과학적으로 정교하고 올바른’ 그런 노선이 반드시 주류를 형성하는 게 아니다.


돌이켜보라 ! 박종철의 죽음, 이한열의 죽음, 그들의 나이가 만으로 치면 20세,21세가 아니었던가? 지금 우리 당원들 중에는 아들 딸 중에, 조카들 중에, 동생들 중에 이 나이 때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죽음에 한 정권의 정당성 자체가 흔들거리던 시절이 1980년대 전두환 정권 하에 일이다. 학생운동권에서 ‘이론의 정교함’ 보다는, 실제 ‘행동과 반-파쇼 집단 학살집단에 대한 직접적인 물리적인 투쟁’ 자체가 사회과학이었다.


학생운동은 1988년 노태우 정권이 수립된 이후에도, 합법적으로 당선이 된 정권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정치적 ‘정당성’과 ‘윤리성’의 우위를 여전히 주장하게 되었다. 노태우 정부의 가장 큰 특징은 ‘합법성 legality'의 획득과 ’정당성 legitimacy'사이의 충돌이었다. NL이건 PD건 ND건 이 합법성 측면보다는 후자, 노태우 역시 광주학살의 원흉이자 파쇼의 연장으로 파악하고 그 정부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6공화국 하에서 학생운동은 전두환 파쇼와 비교해서, 학교에서 자유 선거를 통한 ‘학생회’라는 ‘제도적 권력’을 가지고 되었는데, 왜 NL 그룹이 가장 ‘다수’가 되었는가? 앞으로도 더 연구해야 할 지점이 이 두 가지 상관관계이다.


민족주의적 경향 (일제의 잔재청산, 미국 제국주의의 발견 : 88년 올림픽에서 관중들이 소련을 응원하고 미국 성조기에 야유보내는 반-미국 정서 anti-American sentiment), 소위 주체사상에서 말하는 품성론, 항일 유격대식 대중노선 등은 여러 가지 요소들 중에서 하나에 불과하다.


많은 사람들이 NL, PD를 ‘사회주의적 지향과 정향 orientation' 이라고 말하지만, 정작 6공화국 노태우 정부 시절에, 이 학생집단의 제도적 권력이 누린 것은, 자유민주주의적 ’정치 실천, 다시 말해서, 전두환 폭압에 누리지 못한, 정치적 표현의 자유였다. 실제 그 운동 주체들이 사회주의적 지향 (NLPDR은 사회주의 체제로 전환을 그 목표로 하고 있다. 사노맹으로 표현된 ND 역시 2단계 혁명론이지만, 사회주의 이행론이다) 을 했고, 또 학생운동 뿐만 아니라, 학생사회 외부와 연계를 맺었기 했지만, 학생사회 내부 정치에서 ‘제도적 권력’ 사용이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에 하나였다.


이들이 나중에 사회에 진출해서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지지세력의 주축이 되거나, 실제 정치가되어서도, 이러한 학생사회의 ‘제도적 권력’의 경험을 그대로 실천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대중적 동원능력을 보여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학생사회 때와 마찬가지로 ‘정치 내용의 빈곤’을 ‘제도적 권력’으로 대신한다.


그렇다면 6공화국 노태우 정부 하에서 전대협을 비롯한 nl 다수파 (주사파를 포함), pD, ND등은 위에서 말한 노태우 정부와 전두환 정부의 ‘통치’차이를 인식하고 ‘합법성’과‘정당성’ 사이의 긴장을 꿰둟어내는 정치 전략을 만들었는가?


89년 몰타 회담 (고르바초프와 조지 부시의 회담)으로 인해 얄타체제 (냉전 체제)의 해체부터 91년 사이에 벌어진 국제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 등이 미치는 정치적 영향에 대해서 제대로 인식하거나 설명하거나 이에 맞는 정치적 프로그램들을 만들어 냈는가?


91년 강경대 타살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민민운 (민족민주운동이라고 약칭)의 위기론이 한창 논의되고, 사회주의 대 사민주의 논쟁이 발생하던 시점에, 이에 대한 답변을 했는가?


사실 그 당시 우리의 문제이기도 했지만, 이러한 질문들과 과제들은 당시 학생운동가들의 지적 실천적 범위를 뛰어넘는 문제였고, 당시 한국 지식계의 수준을 고려했을 때, 이 문제들을 정치적 담론으로 여론화 대중화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4. 박은지 부대표가 말한 주체사상 “사람의 가능성을 믿고 그 힘을 긍정하는 사상”에 대해서

- 소련식 교과서는 마르크스에 대한 왜곡이었다.

- 소련식 교과서를 극복했다는 주체사상은 허수아비 때리기를 하는 것이다.


이 주장은 굳이 주체사상만이 아니라, ‘창조 Creativity' 를 강조하는 사람들, 박정희의 교육헌장과 ’하면 된다‘는 정신, 혹은 안철수식 ’창조적 혁신‘, 박근혜의 ’창조 경제‘ 모두다 ’사람의 가능성을 믿고 그 힘을 긍정하는 사상‘이라는 점에서, 형식적으로는 같다.


물론 북한의 주체사상은 “계급과 민족” 패러다임인데, 왜 주체사상을 박정희, 안철수, 박근혜와 동급으로 놓느냐고 항변할 것 같다.


주체사상의 이론적 근거 자체가 오류다. 주체사상 주장은 다음과 같다.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 철학의 근본문제를 물질과 의식의 관계 ( matter-consciousness relations)로 설정했다. 그런데 마르크스-레닌주의는 ‘물질’과 ‘의식’관계에서, ‘물질이 의식보다 선차적이고 우위를 갖는다. 이러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물질의 의식에 대한 선차성 (priority)은 인간의주체성, ‘인간의 주체적 파워, 힘과 능력’의 중요성을 해결하지 못했다.


그럴싸하다. 몇 년전에, 미국 최장집-박상훈 등을 따르는 연구자들이 정치의 선차성 (the primacy of politics: 정치가 가장 중요하다) 를 쓴 미국 비교정치학 교수 쉐리 버먼(Sheri Berman) 을 한국에 소개하면서, 좌파 운동권들이 ‘정치’를 모른다고 야단쳤을 때, 그 ‘선차성’ 개념과 위 선차성 개념은 동일한 말이다.


주체사상을 서술했다는 황장엽의 이론적 깊이의 한계이기도 하고, 정보 수집의 한계이기도 하다.


사실 주체사상이 말하는 마르크스-레닌주의 교과서 (소련 사회과학 아카데미에서 만들어낸 검인정 교과서로서, 그 기원은 부하린의 공산주의의 ABC, 그 이후 스탈린의 역사적 유물론 테제 등에 있다. 이는 나중에 설명하겠음)에서 말하는 ‘물질’과 ‘의식’ 관계가 철학의 근본문제라 하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


주체사상이 ‘물질-의식’ 대립항이 아니라, ‘세계-인간’으로 근본문제를 전환시켜, 마르크스 레닌주의가 해결하지 못한 인간의 주체성 (subjectivity)를 해결했다고 하는 것은, 이중의 오류이다. 첫 번째는 소련 사회과학 검인정 교과서 (공산당 명령을 따르는 연구소)에서 마르크스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기반한 ‘물질’ -‘의식’이 철학의 근본문제라고 못박아놓고,


두 번째는, ‘물질’ -‘의식’ 대립항이 풀지 못한 퍼즐과 난관 수수께기를 ‘세계-인간’ 대립항이 풀었다고 선전하는 것 자체가 자화자찬격이다. 세계에 대해서 인간의 주체성 즉, 의식성, 창조성,자주성을 더 부각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 주체사상 답변이 잘못된 문제설정 "물질과 의식"의 관계에 대한 하나의 답 (물론 오답이지만)은 될 수 있겠지만, 철학적 주제들에 대한 답변이 되기에는 불충분하다. 철학적 체계로 인정할 수 있지만, 수많은 증명부담들을 안고 있다. 철학에서 다루는 수백가지 테마들을 이 인간-세계 대립항으로 풀 수 있다는 것인가? 


그리고 자본주의의 변화와 역동성, 그 축적 구조를 어떻게 설명가능하단 말인가? 자기들이 경험하지 않은 세계와 자본주의에 대한 연구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수많은 중요한 사회과학적 주제들을 인간-세계 대립항으로 진단도, 해결도 할 수 없다. 




(1940 년 조제프 스탈린이 서술했다는 : 변증법적 역사적 유물론 교과서: 마르크스에 대한 선택적 이해와 왜곡의 공식적 출발점이 된 책이다. 1980년대 한국에 소개된 마르크스 입문서, 철학개론은 대부분 이 스탈린의 기본골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DIA-MAT의 효시이자, 마르크스 사상의 박제화 왜곡의 공식화 선언이었다)


이 주체성 (subjectivity) 문제는 제 2 인터내셔널 이후, 마르크스에 대한 혹은 사회주의자 내부에서 논쟁된 ‘경제 결정론 economic determinism'에 대한 문제제기로, 당시 중요한 주제였다. 


그런데 80년대말, 90년대 초, 한국에 소개되고 번역된 마르크스 입문서, 넓게 봐서 사회주의체제의 토대를 이루는 철학 교과서들은, 대부분 소련 사회과학 아카데미나 동독, 중국, 주사파 NL의 경우는 평양에서 출간된 교과서들이었다. 이건 NL이건, PD건, ND건, 과학적 사회주의자건 다 마찬가지로 안고 있었던 한계였다.


학생운동권, 노동운동가들의 헌신적인 정치적 실천, 분신까지 포함한 그 숭고한 정치적 투쟁들과, 이론 사이에는, 이러한 엄청난 문화적 지적 간극이 있었다. 그것은 2014년 1월 현재 평가가 아니라, 25년 전 이야기이다.


25년, 아니 길게 잡아 30여년이 흘렀다. 한 세대가 바뀌었다. 한국 전쟁이 미친 지식인 사회, 이론가 사회, 좌파 정치권 사회, 학생운동가, 시민운동, 노동운동, 그리고 진보정당, 좌파정당... 우리가 생각한 것 이상이다.


자기들 스스로 학파를 만들어서, 지식노동이건 육체노동이건 그 무슨 노동이건간에, 학파를 형성해서, 코리아라는 한국 현실 (social reality)을 사회,사람,사회구조,의식 등을 설명하고 연구하는 사회인식론(social epistemology)를 갖추기도 전에, 90년대 긴 암흑기가 있었고, 이런 것들을 지속적으로 연구하기 전에 97년 IMF 긴축통치로 한국은 운없게도 세계에서 최단시간에 가장 살벌한 자본주의적 신자유주의 체제를, 80년대 민주화 세력 (김대중정당과 80년대 학생운동권 주류파)이 그 악날한 반-민중적 반-노동자적 어메리칸 스탠다드 자본주의를 실천해버렸다.


사람들은 자기 정치적 정당성 때문에,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신념, 정치적 방법론, 조직론, 이론적 정당화 등에 대해서 게을리 한다. 왜냐하면 현실정치는 늘 나보다 우리보다 더 나쁜 세력이 존재하고 있고, 그들이 늘 음모를 꾸미고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기 때문이다.


정치는 늘 실천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야구는 9회로 끝나지만, 정치세계는 쉼없는 연장전이다. 9회 이후에 ‘이론’으로 야구하나? 정신력으로 버틴다. 제한된 숫자 선수들로 버티는 것이다. 그것이 늘 정치적 현실이다.


하지만, 역사에서 현실에서 정치적 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현실을 설명할 인식론을 우리 스스로 가지고 있어야 한다.


돌직구 하나로 승부하는 투수보다는, 체인지업과 슬라이더를 장착하고 돌직구를 가진 투수가 실제 경기에서 이기니까.


(1922년 경, 부하린 Buhkarin 이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소련 대중들을 위해 서술한 공산주의의 abc : 마르크스 엥겔스 책들이 노동자 해방의 성전으로 격상화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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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J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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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학교 평가의 논

    2014.04.15 01:50 [ ADDR : EDIT/ DEL : REPLY ]
  2. 그냥 NL이 다수를 차지하게 된건 생활 학문 투쟁의 공동체라는 학생회중심의 학생운동을 했다는점으로보고 PD는 직업적 혁명가의 길을 가려고 했다는 점에서 학생회중심의 운동이 다수를 차지하기 편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편협하게나마 듭니다만.. 뭐 주사파 논쟁은 논외로 하는것이 맞을것 같고.. 하다보면.. 한국운동권에 주사파가 존재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되어지니까요..

    그냥 지나가다 코맨트 남깁니다.

    2018.02.14 14:48 [ ADDR : EDIT/ DEL : REPL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