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철학2021. 1. 30. 19:36

생각과 토론의 자유에 대해서


고전적 자유주의자였던 존 스튜어트 밀은 '생각과 토론의 자유'를 인간의 정신적 행복이라고 했다.  아래와 같은 네 가지 이유에서  의견의 자유, 의견을 표현할 자유는 인류의 정신적 행복이다.  

 

 첫째는, 어떤 주장이나 의견이 있으면, 말하게 하라. "어떤 주장이나 의견이 표출되지 못하고 침묵을 당했을 때도, 우리는 그 주장이 '참'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만일 이런 사실 조차 부정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무오류성을 외치고 있는 셈이다." 


 둘째는, "침묵당한 의견이 설령 '참(진리)'와 거리가 있을지라도, 그 의견은 일말의 진리라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주제에 대한 지배적인 혹은 다수의 의견이, 완벽한 참(전체 진리)은 아니기 때문에, 그 완벽한 참은 어떤 반대 주장과의 충돌을 통해서 성립될 수 있을 것이다." 


 셋째는, "이미 확고하게 받아들여진 의견이 참일 뿐만 아니라, 전체 진리일지라도, 만약에 우리가  그 의견을 격렬하고 진지하게 조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의견의 합리적인 논거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은 채, 어떠한 편견들에 사로잡히게 된다." 


 넷째는, " 지식체계나 믿음체계 (doctrine) 자체는 효력을 상실하거나 약화될 수 있고, 사람들의 행위나 성향에도 강하게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권위-교조적 교리(dogma)는 단지 형식적인 공언에 지나지 않고, 효력도 없다. 도그마는 우리의 이성이 근거를 제시하는 것을 방해하고, 개인의 체험이 진지하고 참된 신념으로 발전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 1859  (역, NJ 원시) 2004


- John Stuart Mill, On Liberty 1859 ,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1989, p.53 



 

존 스튜어트 밀의 핵심적인 생각.

우리의 주장이나 의견이 충분히, 자주, 두려움없이 토론될 때만이 그것은 '죽은 도그마'가 아니라 '살아 숨쉬는 진리'가 될 것이다.


Posted by NJ원시

댓글을 달아 주세요

수필2021. 1. 29. 21:06

어떤 인간 조건.

쉽게 고쳐질 것 같지만, 뒤를 잠시 돌아보다. 정경심-조국 재판, 윤석열,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연말부터 최근 정의당 일까지, 수 년이 흘러버린 느낌이다. 정치운동은 늘 새로운 배움이고, 자아의 풍성함으로 귀결되어야 한다고 머리 속으로는 생각해오고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늘 어떤 ‘회한’을 남긴다. 같이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나 역시 많은 비판을 해왔다. 변명도 해본다. 대의와 튼실한 논거를 만들기 위해 그랬다고. “네 말이 조금도 틀림없고, 운동권으로서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나 참 섭섭하구나” 그런 경우가 많았다. 


조국-윤석열-추미애로 이어지는 국면에서, 촛불 이후 느닷없이 민주당원이 되었다는 과거 학생운동 한 선배와 대화에서도 그랬다. 한국상식에 맞는 예의를 지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도 했지만, 본질적으로는 내가 별로 변한 건 없다고 그 선배는 느꼈을 것이다. 차마 그 분이 했던 말 그대로를 옮기진 못하겠다. 


최근 명진 선생이 자기 스승 스님 ‘탄성’과의 대화를 소개해줬다. 탄성은 평소 암환자들에게 ‘항암치료’보다는 부처님에게 기도하라고 강연을 했다 한다. 그런데 막상 70세 탄성이 위암 3기 진단을 받고, 막 항암치료를 받을 참이었다. 병문안을 갔던 그의 제자 명진은 탄성의 항암치료 결정이 평소 탄성의 지론과 모순됨을 지적했다 한다. 


명진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탄성은 병석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다. “네 말이 조금도 틀림이 없고, 부처님 제자로서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나 참 섭섭하구나.”

 

이 이야기를 듣고서 나도 살짝 웃었다. 자조였다. 나에게도 참 섭섭함을 느낀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여튼 자기 제자 명진의 지적을 듣고, 탄성은 항암치료를 받지 아니하고, 다시 절간으로 돌아갔고, 2 개월 후 별세(입적)했다고 한다. 명진은 이 에피소드를 이야기하며, 자기 스스로를 ‘참 못된 사람’이라고 고백했다. 


그래서 뭐를 어떻게 바꾸자, 대안이 뭐냐를 떠나, ‘회한’이 든다는 말하는 명진의 이야기가 와닿았다. 


실은 나 역시 ‘섭섭함’ ‘서운함’을 다 알고도, 일부러 그렇게 수 천번을 해 왔다. 마치 8대 0으로 9회초까지 지고 있다가, 9회말에 9대 8로 역전하는 야구팀의 주장처럼, 그런 모든 ‘서운함’ ‘섭섭함’은 9대 8로 역전하기 전까지 필수 드라마로 간주하면서. 깐에는 자신도 있었다. 아니 지금도 호기를 부리고 있는지 모르겠다.


명진은 불가의 세계에서 ‘큰 도를 깨침’ 게임을 하고 돌아다녔다. 위암 3기 자기 스승 탄성에게도 ‘자기 일관성’을 주창했던 것은, 탄성이 그만큼 큰 사람이라는 전제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삶과 죽음이 큰 구분이 없는 ‘연기론’이 불가의 원리이기 때문에 더 그랬을 것 같다. 


죽음을 하등 두려워할 것 없어야 하는 그들의 숙명이라고 해야겠다. 이 가혹한 진리 게임 앞에서, 그 두 사람은 너무나 투명한 고드름 칼 싸움을 했다.


“네 말이 조금도 틀림이 없고” 그러니까, “네 말이 다 진리이고 진실이다. 내가 마땅히 그걸 수용해야 함을 안다. 그러나 참 섭섭하구나” 이 말이 오히려 인간의 진실을 드러내는 것 아닌가?


이런 질문을 나에게도 던져본다. 


아직도 난 상류에서 중류 정도, 하류의 그 안과 겉이 구분이 없는 둥근 돌이 아니라, 중류쯤에서 나뒹구는 돌임을 잘 알고 있다. 


방향도 없는 이야기이다. 

진한 회한이다.


이미 내가 다 스스로 인정해버리고, 많은 경우에 의도적으로, “네 말이 조금도 틀림이 진짜, 주관적으로도 객관적으로도, 내가 생각해도 그렇고 타인이 생각해도 그렇고, 다 수긍하는 틀림이 없다”고 전제하고서 지금까지 달려와 버렸다. 그러니 왜 회한인들 없겠는가?


 


Posted by NJ원시

댓글을 달아 주세요

수필2019. 3. 22. 15:55

너무나 큰 진리를 마주 대할 때는 공포심이 생긴다. 이런 정서는 어린시절부터 계속 되었다. 자디잔 지식의 진리나 참을 알아나갈 때는 '기쁨'을 느끼지만, 너무나 큰 진리와 진실 앞에서는 섬뜩함을 느낀다.



Posted by NJ원시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