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history)2019. 5. 17. 20:50

자료: http://www.hani.co.kr/arti/society/area/845314.html


아들 묘 비석이라도 만지고 싶었어”…아버지의 오월

등록 :2018-05-18 18:40수정 :2018-05-18 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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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군 대변인 윤상원 열사 부친 윤석동(92)씨



18일 기념식 휠테어 탄 채 아들 묘지 쓰다듬어

윤상원(1950~80)열사의 부친 윤석동(92)씨가 18일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에서 휠체어를 탄 채 아들의 묘비를 쓰다듬고 있다.정대하 기자

윤상원(1950~80)열사의 부친 윤석동(92)씨가 18일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에서 휠체어를 탄 채 아들의 묘비를 쓰다듬고 있다.정대하 기자

하늘은 흐렸고, 묘지에 간간히 빗방울이 떨어졌다. 아버지는 먼저 가버린 아들의 비석을 애틋하게 쓰다듬었다. 이번에 오지 않으면 사랑하는 아들의 묘지를 다시 못볼 것만 같았다.

5·18 당시 시민군 대변인으로 최후까지 계엄군에 맞서 싸우다가 숨진 윤상원(1950~80)열사의 부친 윤석동(92)씨는 18일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에서 휠체어를 탄 채 아들의 묘를 바라 보았다. 신장 투석을 받고 있는 윤씨는 지난 해 기념식에 지병 때문에 참석하지 못했다. 하지만 윤씨는 “올해 기념식엔 꼭 한번 가보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윤씨는 이날 만난 유족회 회원에게 “인자 곧 죽을 것 같아. 마지막으로 아들 비석을 만져보고 싶어 왔어”라고 힘겹게 이야기했다.



윤상원 열사의 부친 윤석동(92)씨가 60여 년 넘도록 써 온 농사일지. 정대하 기자

윤씨는 장남이던 아들이 세상을 뜬 뒤 5·18민주유공자유족회장을 맡아 민주화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또 일기장처럼 써 온 농사일지에 아들이 떠난 뒤 휑한 마음을 적어두기도 했다. 윤씨는 5·18 8돌인 1988년에 ‘벌써 8년 전의 일이다. 그때 일을 회상하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느꼈으나, 세월이 흐르니까 폭도란 누명을 씻고 (아들 윤상원의) 명예가 회복되어 가고 있다(1988년 5월28일)’고 썼다. 그리고 ‘상원이가 살아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1988년 5월29일)’고 적기도 했다.

윤씨는 1943년부터 60년이 넘도록 농사 이야기와 일상을 꾸준히 기록했다. 16살 때인 1943년 광산군 송정리 농업실습학교(현 송정중)에 다니며 처음으로 일기를 쓰기 시작한 뒤 꾸준히 생활의 느낌을 기록했다. 26권의 공책에 담긴 윤씨의 가계부와 노트는 논농사와 축산·양봉을 하며 7남매를 가르쳤던 가장의 일기장역할을 했다. 아들 윤상원 열사도 초등학교 때부터 일기에 일상에서 느낀 생각을 써서 남겼다.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 열사의 생전 모습.



아들 윤상원은 1978년 2월 대학을 졸업하던 날 밤 속사정을 메모장에 옮겨 놓았다. “그래, 지금 내가 일단 발을 들여놓은 길은 부모님에 대한 마지막 효도에 불과하다. 나는 꼭 맘먹은 일을 실천한 것이다.” 주택은행에 입사했던 그는 직장을 그만 두기 전 아버지에게 긴 편지를 썼다. “민족이 처한 어려운 현실에 뛰어들어가 잘못됨을 바로잡는 데 조그만 저의 힘이나마 보태려고 하니 불초 소생의 뜻을 부디 용서하시고 차라리 그 길도 참된 효도의 길이라 여겨주십시오.”

1979년 7월 아들은 은행에 사직서를 냈다. 그뒤 광주 광천공단의 한 공장에 고졸 학력이라고 속이고 취업을 했다. 그리고 박기순 열사가 만든 들불야학에 참여해 강학(교사)로 활동하는 등 현장운동가로 변신했다. 그리고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학생투쟁위원회’ 대변인으로 활동하다 5월27일 새벽 옛 전남도청에서 계엄군과 맞서 싸우다 숨졌다. 1982년 4월 두 사람의 넋풀이를 위해 만들어진 노래가 바로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광주/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area/845314.html#csidx62d015ac05c00c9b9d8fbd3017786f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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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history)2019. 5. 17. 20:32

자료 : 


윤상원 열사 곁에 새겨진 총과 밥, 그 의미는


<임을 위한 행진곡>의 주인공,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 열사의 생가를 찾아서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25698

18.05.14 15:53l최종 업데이트 18.05.14 15:53l 글: 임영열(youngim1473)편집: 김지현(diediedie)



 무등산이 어머니 품처럼 포근히 감싸고 있는 광주광역시의 모습

▲  무등산이 어머니 품처럼 포근히 감싸고 있는 광주광역시의 모습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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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산(無等山)이 어머니 품처럼 포근히 감싸고 있는 도시, 빛고을 광주에 오월이 다시 왔다. '광주의 오월'은 여느 도시처럼 라일락 향기 짙어가고 산천은 연한 초록으로 물들어 가고 있다. '빛의 도시' 답게 눈부시고 푸르게 빛나고 있지만, 그 찬란한 푸르름 속에는 서글픔과 애잔함이 배어 있다. 


'오월 광주' 하면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대변인, 서른 살 청년 '윤상원 열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거의 동의어처럼 한몸으로 묶여 있다.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으로 부채의식 때문일까. 매년 이맘때가 되면 조금씩 흐릿해져 가는 기억 속의 그를 호명해 낸다. 윤상원 열사의 생가가 있는 광주광역시 광산구 임곡동 천동마을로 향한다. 

  

광산구 임곡동, 구한말 나주와 광산지역 의병 활동의 본거지였던 용진산이 자리하고 있다. 퇴계 이황과 함께 13년 동안 110여 통의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칠논변(四七論辯)'으로 조선 성리학을 꽃피웠던 고봉 기대승의 월봉서원(月峯書院)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의(義)와 학문(學文)'의 고장이다. 남도의 젖줄 영산강의 지류, 황룡강이 무심히 흐르고 지척에 천동마을이 있다. 광주광역시에 속하지만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다.


 소금을 연주하고 있는 생전의 윤상원 열사.

▲  소금을 연주하고 있는 생전의 윤상원 열사.

ⓒ 윤상원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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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광역시 광산구 천동 윤상원 열사의 생가 벽돌담에는 군 복무 중 윤상원 열사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글이 적혀 있다

▲  광주광역시 광산구 천동 윤상원 열사의 생가 벽돌담에는 군 복무 중 윤상원 열사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글이 적혀 있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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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마을 이름은 '샘골'이었다. 일제 강점기 때 한자어로 고쳐 '천동(泉洞)' 마을이라 부르게 됐다. 마을 입구를 걸어 올라가면 오래된 시골집들 사이로 열사의 생가임을 알리는 노란 배너와 벽화가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가는 하얀 벽돌담 에는 1974년 군 복무 중 아버지에게 보낸 윤상원 열사의 편지글이 소개돼 있다. 


"어떻게 살 것인가. 내가 이 조국을 위해서 무엇을 해낼 수 있을 것인지. 침울한 밤을 새운 적도 있습니다. 내년에 복학을 하면 어려운 현실과 싸울 작정입니다…." 


1974년, 어떤 시대였던가. 서슬 시퍼렇던 '유신 독재'가 한창이었던 시절이었다. 암울한 현실을 바라보는 스물네 살 젊은 윤상원의 깊은 고뇌와 민주주의를 향한 갈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천동에 있는 윤상원 열사의 생가.“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인이 없더라도 보고 가십시오”라는 팻말로 윤상원 열사는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다



▲  광주광역시 광산구 천동에 있는 윤상원 열사의 생가.“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인이 없더라도 보고 가십시오”라는 팻말로 윤상원 열사는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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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사의 생가에 들어선다. 그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방은 2004년 겨울 화재로 소실됐다. 윤상원 열사의 뜻을 기리고, 민주주의의 숭고한 가치를 널리 알리기 위해 이듬해 5월에 '윤상원·박기순 열사 자료전시관'으로 복원했다. 열사의 호를 딴 '해파재(海波齎)'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인이 없더라도 보고 가십시오"라는 팻말로 윤상원은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다. 기념관에는  5·18 광주항쟁의 역사와 정신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잘 정리된 사진과 일기장 등이 전시돼 있고 방명록 옆에 열사의 흉상이 놓여 있다.


마당 오른쪽 한편에 윤상원과 그의 '영혼의 반려자'인 박기순 열사의 얼굴이 부조된 기념비가 있다. 오월을 상징하는 오각형 기단석위에 역사의 수레바퀴가 올려져 있다. 수레바퀴에는 "민주주의를 위해 우리가 저들의 총탄에 죽는다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가 영원히 사는 길입니다"라는 그의 마지막 연설문이 새겨져 있다. 기념비 중간에 한 자루의 총과 고봉밥 한 그릇을 형상화해놨다. 밥그릇에는 '민주'라고 새겨져 있다. '총과 밥'…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열사의 생가 마당 한편에 윤상원 열사와 그의‘영혼의 반려자'인 박기순 열사의 얼굴이 부조된 기념비가 있다. 기념비 중간에 한 자루의 총과 '민주'라고 새겨진 고봉밥 한 그릇을 형상화해 놓았다. "총과 밥"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  열사의 생가 마당 한편에 윤상원 열사와 그의‘영혼의 반려자'인 박기순 열사의 얼굴이 부조된 기념비가 있다. 기념비 중간에 한 자루의 총과 '민주'라고 새겨진 고봉밥 한 그릇을 형상화해 놓았다. "총과 밥"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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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비 옆에는 기념 조형물들이 세워져 있다. 윤상원·박기순 열사의 영혼결혼식 때 헌정된 <임을 위한 행진곡>과 5·18 항쟁 당시 열사의 활동을 중심으로 기록해 놓은 입간판 형태의 기념물 들이다. 거울로 만들어진 기념물이 있다. 자세히 보니 '역사는 미래의 거울이다'라고 적혀 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을 미래는 어떤 모습으로 비칠까. 오월 광주의 상징이자 시대의 들불, 영원한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 열사의 시간은 1980년 5월에 멈춰 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윤상원 열사는 한국전쟁이 일어난 해인 1950년 8월 19일 이곳 천동 마을에서 윤석동 선생과 김인숙 여사 사이에 3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윤개원이다. 장성한 후에 윤상원으로 개명했다. 이곳에 있는 임곡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고·대학교는 광주에서 다녔다. 


고등학교 졸업 후 삼수 끝에 전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한다. 입학 후 연극반 동아리에서 극예술에 심취한다. 연극을 통해 인간의 깊은 내면세계를 탐구하며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깊은 고뇌에 빠진다.


재학 시절 학생운동을 주도했고, 졸업 후 노동운동을 하려 했던 그는 1978년 대학 졸업과 동시에 주택은행에 입사해 광주를 떠나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한다. 그 당시 은행은 높은 연봉에 정년이 보장된 선망의 직장이었다. 얼마든지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유신독재의 암흑시대, 돈을 세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낯설었다. 동료·선·후배 동지들이 눈에 아른거렸다. 반년 만에 사표를 내고 광주로 내려온다. 


 생전의 윤상원 열사와 영혼의 부부가 된 박기순 열사





▲  생전의 윤상원 열사와 영혼의 부부가 된 박기순 열사

ⓒ 5.18 기념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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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반려자 박기순을 만나다  


광주로 내려온 윤상원은 고졸 출신으로 학력을 위장해 광천 공단에 있는 플라스틱 공장에 위장 취업한다. 하루 10시간씩 트럭에 짐을 싣고 내리는 힘든 노동의 연속이었다. 윤상원은 '진짜 노동자'가 돼갔다. 윤상원 말고 또 한 명의 위장 취업자가 있었다.


스물두 살의 꽃다운 여성 박기순이다. 박기순은 전남대 국사학과 3학년 재학 시절 '교육지표 시위 사건'으로 강제 휴학을 당한 후 위장 취업해서 노동운동을 하고 있었다. 바로 '들불야학'이다. '야학(夜學) 운동'이야말로 현실에 입각한 노동운동이라는 박기순의 말에 공감했던 터라 윤상원은 바로 들불야학에 합류한다. 


야학운동은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유신독재 말기의 폭압도 그들을 막지 못했다. 그러나 그해 겨울 '노동자들의 누이' 박기순이 과로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윤상원은 일기장에 "훨훨 타는 그 불꽃 속에 기순이의 넋은 한 송이 꽃이 돼 가슴속에 피어난다"라고 눈물로 적어 놓았다. 노동운동가 윤상원과 박기순은 훗날 '혼령의 부부'가 된다.


그들에게 자비(慈悲)는 없었다


1979년 10월 26일 마침내 박정희의 죽음과 함께 유신독재가 무너지고 '서울의 봄'과 함께 1980년 5월이 됐다. 전국 각지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대학생들과 시민들이 연대한 광주의 집회는 그 어느 곳보다 뜨거웠다. 정권을 찬탈하려던 '전두환 신군부'는 광주를 목표로 삼았다. 바로 계엄군을 내려 보낸다.


작전명 '화려한 휴가'였다. 지상에서는 공수부대가 곤봉으로 머리를 깨부수고 대검으로 찌르고, 총으로 쏘았다. 공중에서는 무장 헬기가 콩 볶듯이 기관총을 난사했다. 시민들은 꽃잎처럼 떨어졌다. 두부처럼 뭉개지고 잘려 나갔다. 어린 학생, 막 결혼한 신혼부부, 임신한 여인 가릴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짓밟히고 육신에 구멍이 뚫린 채 형채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다. 1980년 5월. 그 푸르던 날, 가정의 달이며 이 땅에 자비를 베풀러 부처님이 오신 날, 그들에게 자비는 없었다. 


 5.18 당시 정규 언론들은 광주 시민들을‘폭도'로 매도했다. 신군부의 삼엄한 검열 하에 어느 언론에서도 진실을 접할 수 없었다.

▲  5.18 당시 정규 언론들은 광주 시민들을‘폭도'로 매도했다. 신군부의 삼엄한 검열 하에 어느 언론에서도 진실을 접할 수 없었다.

ⓒ 5.18 기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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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원은 이 사실들을 똑똑히 목격했다. 당시 광주는 완전히 '고립된 섬'이었다. 정규 언론들은 광주 시민들을 '폭도'로 매도했다. 분노한 시민들은 광주 MBC 방송국을 불태웠다. 훗날 MBC는 5·18 왜곡보도에 대한 반성문을 쓰기도 했다. <전남매일신문> 기자들은 단 한 줄의 진실도 싣지 못하는 현실에 좌절하며 "우리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는 사직서를 제출했다. 


어디에서도 진실을 접할 수 없었다. 윤상원은 진실을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들불야학 동지들과 함께 시민들의 '눈과 귀' 역할을 하는 <투사회보>를 만들기로 한다. 밤을 새워 등사기로 <투사회보>를 만들어 시내에 뿌렸다. <투사회보>만이 진실을 알리는 '유일한 언론'이었다.


 5.18 항쟁 기간중 유일하게 진실한 언론 역할을 했던 <투사회보>




▲  5.18 항쟁 기간중 유일하게 진실한 언론 역할을 했던 <투사회보>

ⓒ 5.18 기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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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저승에서 다시 만납시다


다른 도시와는 달리 광주시민들의 저항은 거셌다. 시민군에게 밀려 외각으로 퇴각한 계엄군들은 전남도청을 장악하고 있던 시민들에게 최후통첩을 보내왔다. "폭도들은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도청 안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총을 내려놓자는 사람들과 끝까지 투쟁하자는 사람들로 양분됐다. 윤상원이 나섰다.


"우리가 비록 저들의 총탄에 죽는다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가 영원히 사는 길입니다. 민주주의를 위해 최후의 순간까지 굳게 뭉쳐 싸워야 합니다…."


봄날이 끝나갈 무렵인 1980년 5월 27일 새벽, 계엄군들은 M16 소총과 장갑차를 앞세우고 시민군의 본거지인 도청으로 진격해 오고 있었다. 복도 창가에 서있던 윤상원과 동지들은 이승에서의 마지막 인사를 나눈다. "우리 저승에서 다시 만납시다…." 순간 귀를 찧는 파열음과 함께 총탄이 날아들었다. '아이쿠' 하는 소리와 함께 윤상원은 총을 든 채로 쓰러졌다. 어슴프레 동이 트고 핏빛으로 물든 전남 도청의 새벽을 무등산은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렇게 '광주의 피'를 먹고 제5공화국이 탄생했다.


 5.18 민주묘지에 함께 잠들어 있는'임을 위한 행진곡'의 주인공, 윤상원-박기순 열사의 묘소. 1982년 두 열사의 영혼 결혼식때 헌정된 노래가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  5.18 민주묘지에 함께 잠들어 있는'임을 위한 행진곡'의 주인공, 윤상원-박기순 열사의 묘소. 1982년 두 열사의 영혼 결혼식때 헌정된 노래가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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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영혼의 반려자 박기순을 먼저 떠나보낸 윤상원은 그렇게 1980년 5월 27일 서른 살의 젊은 나이로 박기순의 뒤를 따랐다. 그가 죽고 2년의 세월이 흐른 1982년 2월 20일 망월동 묘역에서는 특별한 결혼식이 열린다. 신랑 윤상원도 신부 박기순도 보이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도 아름다운 '영혼 결혼식'이다. 


이 결혼식에 헌정된 곡이 바로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백기완의 장편시 <묏비나리>를 개작해 소설가 황석영이 가사를 썼다. 윤상원 열사의 전남대학교 후배이자 1979년도 대학 가요제에서 <영랑과 강진>이라는 서정성 짙은 노래로 은상을 수상한 싱어송라이터 김종률이 곡을 붙였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5.18 민주 영령들이 잠들어 있는 망월동 국립묘지 가는길에는 이팝나무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나 만장처럼 흐느끼고 있다. 멀리 보이는 무등산은 '그날' 처럼 말없이 광주를 지켜 보고 있다

▲  5.18 민주 영령들이 잠들어 있는 망월동 국립묘지 가는길에는 이팝나무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나 만장처럼 흐느끼고 있다. 멀리 보이는 무등산은 '그날' 처럼 말없이 광주를 지켜 보고 있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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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오월에도 열사들이 잠들어 있는 망월동 국립묘지 가는 길에는 '하얀 쌀밥' 같은 이팝나무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나 만장(輓章)처럼 흐느끼고 있다. 꽃잎처럼 떨어져 간 열사들은 말없이 누워 있다. 오월 영령들 앞에 선다. 물음을 던져본다. 


열사들이 꿈꾸던 더불어 사는 대동세상. 우리는 지금, 함께 가고 있는가?

Posted by NJ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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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history)2019. 5. 16. 13:47

지금 경향신문의 논조는 진보적으로 바뀌었지만, 1980년 당시 경향신문은 전두환의 보도지침 때문인지, 신문사 사장단의 입장인지 몰라도, 광주 518을 '폭도'와 '무질서 난동'으로 묘사하고, 평온을 되찾아야한다는 논조를 유지했다. 518 광주항쟁의 원인, 범죄자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집단에 대한 보도는 거의 없었다.



동아일보 1980년 10월 25일 보도 


광주사태, 5월18일 전남대 학생데모가 발단이 돼 폭도들의 무장난동으로 번진 광주사태는 열흘동안 광주일원을 무법천지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1980년 518 당시 이희성 계엄사령관의 '포고령 10호 전문'


















1980년 5월 29일자. 경향 신문.






















Posted by NJ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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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2018. 1. 4. 17:20

영화 <1987>을 청와대 586 전대협 출신 찬가다, 7~8월 노동자 투쟁이 빠져있다, 87년 김대중-김영삼 낙선 노태우 당선과 같은 패배는 보여주지 않는다, 난 87년 참여하지 않아서 모르고, 97년 IMF 이후 빈부격차가 87체제보다 더 중요하다, <1987> 영화가 민주화와 6월 항쟁에 대한 주류의 서사 영화다 등등.


이런 평가들은 역사에 대한 협소한 평가, 좌파나 사회주의임을 내세우지만 정치적으로는 자멸적인 해석이고, 비역사적인 태도다. 목욕물 버리면서 아이까지 다 버리는 것과 같다. 


이러한 협소하고 정치적으로 자멸적인 평가들이 문재인 열광적 지지자들이 보여주고 있는 온라인에서 ‘홍위병 같은 철의 키보드’에 대한 저항이자 카타르시스 분출이라면 이해할 만하다. 그럼에도 그런 견해들은 정치적으로 신경쇠약하다는 생각을 금할 길이 없다. 


  <1> 영화는 영화다. <1987>은 한국영화 주제들을 다양화했다는 점에서 높이 산다. 팝콘 먹으면서 노동자 시민들이 보는 영화 소재가 대부분 뭔가? 지난 20년간 가장 많은 영화 소재들은 ‘조폭/코메디물’, 혹은 ‘친구엄마 4’와 같은 애로물일 것이다. 


문화와 영화 소재 다양성이라는 관점에서 보자. 또 장준환 감독의 <1987>과는 다른 각도에서 “1987년”을 다룬 영화들이 만들어져야 한다. 1980년 광주, 전태일 등을 다룬 영화들 다시 만들어져야 한다. 문성근 출연한 <전태일> 영화는 보다 나오고 싶었다. ‘저 좋은 소재로 저렇게 못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1987> 영화, 보라고 널리 권장해도 좋다. 페이스북에서 영화 <1987> 그만 써라고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은 정치적 역사적 무능이자 피로감이다. 


87년 7-8월 노동자 대투쟁 주역들이 안철수 지지선언하고, 민주당 문재인 정부에서 일한다고 해서, 나중에 영화 제목 “1987년 7~8월 여름 파업”이 나오면, 영화 보지 않을 것인가? 


<2> 정치적으로 좌파일수록 사회주의자일수록 역사와 대화해야 한다. 


역사학자  E.H 카 “역사란 무엇인가?” 에서 역사의 3가지 특성들 중에 두번째 특성을 이렇게 설명한다 “역사가들은 역사 행위자들과 사건들에 대한 '상상력'을 발휘하고 '그들 편에 서서 체험하고 공감'하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진보정당을 하려면 역사가 ‘카’의 말을 곱씹을 필요가 있다. 자기가 87년에 짱돌들고 백골단과 싸웠다고 해서, 혹은 나이가 어려서 참여하지 못했다고 해서, 전자는 무슨 진실을 다 아는 양, 후자는 ‘그건 이전 세대 개팔육, 586들 비지니스고’ 하는 태도들은 다 대중들과 대화하기를 포기한 무능력한 정치적 자포자기일 뿐이다.


역사가 카 (E.H Carr)가 말한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좌파고 사회주의자라면, 그리고 진보정당을 하려면, <1987>을 만든 장준환 감독탓을 할 것이 아니라, 대중들과 노동자들과의 정치적 대화 소재를 깔아준 <1987>을 정치적 담론장으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코카콜라 팔지 못하면, 펩시 콜라라도 옆에서 팔아라. 


<3>  <1987> 6월 항쟁은 형식적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이고, 1987년 7~8월 노동자 대파업은 실질적 민주주의 (혹은 경제민주화)을 위한 투쟁이라는 잘못된 이분법적인 논리.  그래서 전자는 김대중-노무현-문재인 리버럴 민주당 정부 소유고, 후자는 진보정당, 혹은 고유한 사회주의자들의 에센스라는 비역사적이고 정치적인 깡통차기 딱 좋은 논리는 도대체 누가 개발했는가? 리버럴리스트들이다. 정치와 경제 영역을 이분법적으로 다른 영역으로 분리해버린 것이다. 


또하나, 사회주의자라면 더 알아야할 20세기 진실이 있다. 소련이 망한 여러가지 이유들 중에, ‘형식적 민주주의’라고 하는 ‘절차적 정당성’이 스탈린 개인숭배와 공산당 ‘진리독점’으로 치환되었기 때문에 인민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절차적 (형식적) 민주주의의 ‘파괴적 혁명적 성격’을 폄하하지 말아야 한다. 


정당성이 결여된 국가의 ‘강압 (폭력)’에 대한 저항은 소극적 자유, 자아실현을 위한 주체적 자기 결정권은 적극적 자유라는 이분법을 가지고, 전자보다 후자가 더 낫다는 선판단은 중지되어야 한다. 


마치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정부는 ‘형식적 절차적 자유 혹은 민주주의’를 아주 잘 수행했고 하고 있다는 착각을 심어주기 딱 안성맞춤인 사고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짧게 언급하자면, 소극적 시민자유 (negative liberty) 와 실질적 긍정적인 시민자유 (positive liberty)를 구별한 사람이 리버럴리스트 이샤아 베를린 (Isaiah Berlin)이다. 소극적 자유는 국가와 같은 외부 강압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고, 긍정적인 실질적인 자유는 자아실현에 필요한 방법들을 동원할 수 있는 주체의 자기 결정능력이다. 


그가 1958년 정도에 쓴 “두 가지 시민 자유 개념들 Two concepts of Liberty”에서 소극적 시민자유와 긍정적 실질적 시민자유를 구별하지만, 이러한 양분법 패러다임 자체가 리버럴리스트 베를린의 정치철학적 기획이다. 한국 정치사에서 경제사에서 이 두가지 ‘자유’ 혹은 두 가지 민주주의들은 뗄레야 뗄 수가 없고, 그 정치적 폭발력은 이 두 가지 모두에서 나온다. 


민주주의도 마찬가지이다. 절차적-형식적 민주주의와 내용적-실질적 민주주의로 이분법적으로 구별하고, 전자는 민주당 소유권, 후자는 진보정당 혹은 사회주의자 소유권으로 나눈다면, 현실에서는 정치적 무능력만이 남을 것이다. 


좌파임을 자처하고, 청와대 586 386들보다, 혹은 배우 문성근보다 더 라디컬함을 내세우면서, 그 리버럴리스트들이 구사하는 슬라이더를 받아치는 능력을 연마하지 않고, ‘나는 패스트볼만 치는 홈런타자’임을 선언하는 것은, 현실에서도 미래에서도 역사에서도 그냥 삼진 아웃으로 끝날 공산이 크다.


<4> 민주당 국회의원이나 보수당 국회의원 및 성공한 정치가된 87년 민주화 운동 세대는 극소수다. 대다수 전두환 파쇼 타도를 외친 사람들은 지금도 화이트 칼라, 공무원, 교사, 블루 칼라 노동자들이거나 자영업에 종사하는 일하는 사람들이다. 물론 문재인 당선으로 보아, 이들 대다수는 민주당 후보를 대통령으로 선출했지, 진보정당인 정의당 심상정을 뽑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 <1987> 속에 등장하는 대다수 사람들을 30년이 지난 지금에도 전대협 의장 임종석 현 비서관이 대표한다고 생각하는가? 한국 민주주의 운동이라는 거대한 장강의 흐름에서, 문재인과 그 정부 핵심들이 바로 6월 항쟁의 아이들이라고, 87년 유월항쟁에 참여했던 그 땅개미들이 시민들이 승인해 준 적이 있는가? 단연코 없다.


영화 <1987>이 현재 민주당 정권과 ‘청와대 386들을 위한 찬가’로 해석하는 이들은 목욕물을 버린다 해서 욕조에 들어있는 아이까지 버리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1980년 5월 27일 광주도청에서 전두환 계엄군 M16에 맞아 죽을 줄 알면서도 도청을 사수한 윤상원 열사와 그 광주 동료들은, ‘살인마’ 전두환이 부당하게 대한민국의 군대를 동원해서 시민들을 죽였기 때문에, 그 부당한 절차가 300명 넘게 시민들을 죽였기 때문에, 도청에서 빠져 나오지 않고 죽음을 선택했다. 


전두환 쿠데타 세력의 ‘강압’과 ‘폭력’에 대한 저항이고, 한국 민주주의라는 시대적 과제를 ‘자아실현’으로 간주하고, 죽음을 결정한 주체적 결단과 실천이 바로 윤상원과 동료들의 죽음이다. 


소극적 자유와 긍정적/적극적 자유의 결합이고, 절차적 민주주의와 실질적 민주주의가 복잡하게 얽혀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형식적 절차적 민주주의도 피를 먹고 자란다. 








Posted by NJ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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