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경제2020. 8. 5. 07:36

"자본주의 대칭어는 사회주의가 아니라 인본주의다"

조선일보

오산=유석재 기자- 수정 2008.01.08 02:29

퇴임하는 마르크스 경제학 1세대 박영호 한신대 대학원장

정운영·김수행 교수와 80년대 '트로이카' 이뤄

"좌파적 방법론이 신자유주의 약점 보완할 수도"

"제가 보기에 '자본주의(資本主義)'의 대칭어는 사회주의가 아니라 '인본주의(人本主義)'입니다."


다음 달 정년 퇴임하는 박영호(朴榮浩) 한신대 경제학과 교수(대학원장)는 "자본주의는 근본적으로 인간이 아니라 물질이 중심이 된 사회를 지향하는 것이고, 그나마 그 병폐가 완화된 것은 민주주의와 결합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박 교수는 "분명 20세기는 사회주의의 혁명이 실패로 끝났음을 입증한 시대였다"고 말했다. 폭력을 앞세우고 전체주의로 빠졌던 사회주의는 현실 역사에서 자본주의에 패했다. 


그러나 이제 '혁명을 포기한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를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정치경제학(마르크스 경제학)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다. 


"잉여가치와 임금, 노동의 생산성을 연구하고 물질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규명해 자본주의 그 자체를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유일한 학문입니다."


박영호 교수는“나는 마르크스 연구자일 뿐이지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고 말했다.‘ 주의자(主義者)’는 자신이 믿는 대상을 움직일 수 없게끔 신봉하는 사람이지만, 그러면 세상의 변화에 적응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불변 자본(생산수단)에 대한 가변 자본(노동력)의 비율을 줄여 '자본의 유기적 구성'을 높이려는 자본주의의 속성이 더욱 두드러지고, 필연적으로 구조조정과 대량 실업이 따르게 된다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사회복지 정책과 안전수당, 실업수당 같은 좌파적 방법론이야말로 사회 통합을 도울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의 '퇴진'은 1980년대 이후 한국 좌파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던 마르크스 경제학의 제1세대가 모두 강단에서 물러난다는 것을 뜻한다. 


그와 함께 '마르크스 경제학의 트로이카'로 불렸던 정운영(鄭雲暎) 전 경기대 교수는 3년 전 작고했고, 김수행(金秀行) 서울대 교수도 이번에 교단을 떠난다.



1960년대, 고려대 경제학과 학생이던 청년 박영호는 당시 종암동에서 등교하던 서울대 상대생 김수행과 의기투합했다.

 한국의 처참한 상황을 해석하기 위해 몰래 금서를 구해 읽었고, 밤을 새워 종속이론과 제국주의론에 대해 토론했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이론이라 생각하고 유학을 결심했지요." 비행기 표값을 벌기 위해 일부러 은행을 다녔다. 

독일 괴테대에서 '자본론'을 원 없이 읽었고, 국내 은행의 영국 지점에 파견 나온 김수행을 설득해 런던대에 주저앉혔다. 벨기에 루뱅대에서 공부하던 정운영도 알게 됐다.



1980년대 초 세 사람은 한신대 교수로 임용됐다. 영(김수행)·불(정운영)·독(박영호) 계열의 마르크스 경제학자 세 명이 모인 한신대는 이 분야의 아성(牙城)이 됐지만, 현실사회주의가 몰락한 이후 많은 학생과 연구자들이 마르크스 경제학을 버렸다. 


하지만 박 교수는 계속 이 학문에 매진했다. "80년대의 마르크스 경제학 붐이 시대적 유행 때문이었다는 걸 그때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유행으로 공부했던 사람들은 애당초 학문이 아니라 정치를 하는 것이 더 나았을 겁니다." 


자본주의의 본질을 탐구하기 위해 미국 경제학자 슘페터를 연구했고, 지난해엔 '칼 맑스의 정치경제학'을 출간했다. 그는 앞으로 분당에 자본주의연구소를 열 계획이다.



다른 대학에 마르크스 경제학의 학맥이 끊길 우려가 큰 지금, 그가 떠난 뒤에도 한신대에는 그 분야를 전공하는 7명의 교수들이 건재하다. 


한신대가 계속 국내 마르크스 경제학의 유일한 '센터'로 남아 있게 되는 셈이다.



 지난 4일 경기도 오산 한신대학교 빈 강의실에서 퇴임을 한달여 앞둔 대표적 마르크스 경제학자 박영호 교수가 본지와 인터뷰를 했다.


 박 교수는 "이 세상에 영원한 보수.영원한 진보는 없다"며 "보수는 진보에게 많은 걸 배울 수 있고, 진보 또한 보수에게 많은 걸 배울 수 있다"고 말했다. 



/오종찬 객원기자 ojc1979@chosun.com




서문
1. 정치경제학과 노동가치론
2. 자본론 성립과정-노동계급의 정치경제학
3. 맑스 정치경제학 방법론-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
4. 맑스의 고전학파 정치경제학 비판
5. 맑스 정치경제학이론- 가치법칙과 잉여가치론
6. 맑스 가치변형문제에 대한 논쟁
7. 고타강령과 반듀링론



Posted by NJ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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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철학2015. 9. 8. 10:55

2010.01.08 08:25

[노회찬 인터뷰1] 지하철 2호선 H 용접한 노회찬, 서울시장 출마하다

원시

 서울시 지하철 2호선 H빔 용접 공사한 적이 있는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 서울시장 출마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한 게 아니라, 만 명만 평등하다' - 노회찬이 뽑이 잘된 어록   

 

<당원이 라디오>, 진보신당 대표 노회찬을 만나다  < 1>  다시 듣기인터뷰 후기

  

인터뷰 날짜 2009. 12. 28.  

 

진보신당 당원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은 진보신당 대표 노회찬님을 모시고 2010년 선거와 서울시장 선거준비 이야기, 진보신당 창당 후 당에 대한 평가, 앞으로의 계획들, 요즘 주제가 되고 있는 진보대연합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원시: 노회찬 대표님 안녕하십니까?

노회찬: , 노회찬입니다. 반갑습니다.

 

원시: 오늘 바쁘셨죠? 오늘 하신 일은 뭡니까?

노회찬: 오늘 대표단 회의가 오전에 있었고요, SK브로드밴드 노조관계자들과의 면담과 기자회견이 있었습니다.

 

원시: 첫 번째 질문입니다. 서울시장 출마를 하셨는데, 삼성 X-File 선고 공판 이전에 출마 선언을 먼저 하셨지 않았습니까? 위험요소가 좀 있었을 것 같은데요. 어떻게 말하면 배짱지원처럼 보이고요.

노회찬: 그렇게 보일 수도 있는데 재판을 의식해서 재판 전에 출마선언을 한 것은 아닙니다. (출마선언을 하면서) 재판에 영향을 미치진 않을까 변호사들과 상의를 했는데 ‘출마와 재판은 무관하다’라고 저에게 조언을 해주셨습니다. 다행히 좋은 판결이 나왔습니다만, 설령 원치 않은 결과가 나왔다 하더라도 2심 항소심이 있기 때문에 피선거권은 유지되는 것이고, 따라서 출마의 뜻은 변함없이 견지할 생각이었습니다.

 

원시: 서울시장 출마선언 이후 하루 중에 많이 생각하는 키워드가 있습니까?

 

노회찬: 제 키워드는 당선입니다. 전장에 나가는 장수 입장에서는 반드시 이겨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을 때와, 그냥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을 때 사람 만나는 느낌도 다르고 정책을 펼치거나 싸움을 대하는 자세 자체가 다릅니다. 부담스럽기 때문에 소극적으로 임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원시: (대표님의) 그러한 결의나 각오는 괜찮은 것 같습니다. 서울시장 선거 출마 선언하실 때 연설문을 동영상으로 보았는데요. 가장 인상적인 대목이 노회찬 대표께서 예전에 용접공으로 일도 하시고, 노동운동도 하셨다는 대목이었습니다. 용접공 할 때 월급을 얼마 받았는지 기억하십니까?

 

노회찬: , 제가 83년도에 처음 받은 월급이 일당 5,000원이었습니다. 지하철 2호선 H빔을 용접할 때는 제가 한 6,500원 정도 받았습니다. 최고로 센 편은 아니었어요. 그 당시 혼자 생활하는데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주변 동료들보다는 세게 받은 편이었죠.

 

원시: 용접공을 선택한 계기는 무엇입니까?

 

노회찬: 당시 상황으로서는 평생을 지하에서 노동운동을 해야 했는데, 생활의 문제와 어느 곳을 가더라도 쉽게 취직해야 한다라는 문제, 그리고 활동할 때 기술이 있어야 사업장 내에서 지위가 있을 수 있다는 문제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용접을 선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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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시 지하철 공사 H빔 용접을 담당했던 진보신당 노회찬 대표)

 

원시: , 알겠습니다. 두 번째 질문인데요, 제가 당 게시판에 흑백사진을 찾아 올렸는데 (대표님의) 고등학교 때 사진입니까?  (같이 사진을 찍은) 친구 이름은 생각나세요?

 

노회찬: , 이 친구는 지금 목사가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원시: 지금 이 사진을 보니까 굉장히 내성적이고 정치는 안하시게 생겼는데요.

 

노회찬: 그렇죠, 그 나이에는 정치 할 생각을 하지도 않았지요. (웃음)


원시: 굉장히 범생이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데요.

노회찬: (웃음) 저는 원래 범생이인데 세상이 저를 이렇게 만들었지요.


원시: 노동운동이나 반독재운동 그런 거 안하셨으면 정말 하고 싶었던 것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노회찬: 글쎄요, (지금 생각하면) 잘 모르겠는데. 일단 하고싶은 것은 많았죠. 공부도 더 하고 싶었고, 초등학교 때부터 오지에 가서 봉사하고 싶었는데 그런 계통의 일을 했을 수도 있겠죠.

 

 

원시: 이 사진을 보고 100분 토론의 손석희씨가 말한 것(손석희 씨가 동안이라는 주장 - 옮긴이 주)에 대해 반론을 좀 펼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호빵 분위기가 아닌데요?

 

노회찬: , 젊을 때는 누구나 다 그렇죠. 손석희씨도 결국에는 호빵이 될 겁니다. 하하.

 

원시: 336번에 대해 기억하고 계십니까?

 

노회찬: , 잊을 수 없지요.

 

원시: 홈페이지 세상사는 이야기에 동영상을 올려 두었습니다. 노 대표님 어머님께서 목소리가 참 좋으세요. 336번이 수감시절의 번호 같은데요. 그 때가 언제, 어떤 일 때문에 수감생활을 하신겁니까?

 

노회찬: 1989 12월에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이라고, 그 사건으로 구속이 되었고요. 92 4월에 출소를 했는데 서울교도소구치소와 안양교도소를 거쳐서 청주교도소에 있었습니다. 그 때 수번이 336번이었죠.

 

원시: 동영상을 보면서 노 대표님이 참 행복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머님께서 말씀하시는 것들이 정말 진실되게 다가오는데요. 지금 어머님께서는 부산에 계십니까?

 

노회찬: 서울에 계시고요, 어저께가 어머니 생신이셨어요.

 

원시: 선물은 뭐 드리셨습니까?

 

노회찬: 화초와 꽃을 좋아하셔서 화분을 하나 드리구요, 집에서 입는 조끼도 하나 해 드렸습니다.

 

김문수 현 한나라당 경기도지사,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에게 앨빈 토플러 <권력이동>, < 3의 물결> 권해진보정당 동참 거부

 

원시: 지금은 한나라당 소속인 김문수 경기도지사 이야기를 조금 해 보겠는데요. (김문수 지사가) 노회찬 대표님께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을 권유했다고 했는데요, 한국에서는 인맥, 지연, 선후배관계 이런 것들 때문에 철학이나 이념, 정치적 이상의 친구보다는 지연과 학연 등의 요소가 더 강하게 작용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언급을 피하기도 하는데요. 앨빈 토플러 책은 언제 권유 받았고, 당시에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요?

 

 

  

                      (진보정당을 포기하고, 한나라당으로 간 김문수 현 경기지사, 노회찬 대표에게 앨빈 토플러 책 권한 적 있어


노회찬: 당시 김문수 현 지사는 진보정당을 하겠다고 우리 당에 참여한 상태였어요. 이미 그 때 생각이 좀 바뀌기 시작하는 과정이었던 것 같아요. 교도소 면회를 와서 어떤 책을 읽느냐고 묻길래 제가 맑스 선집을 읽고 있다고 얘기하니까 사뭇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가 토플러 책을 몇 권 가져왔는데 이런 책을 읽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책을 넣어주었어요. 그런 인연이 있었고 그 후에 제가 92년 출소를 해서 진보정당 안하겠다고 김문수 현 지사가 얘기를 할 때 진보정당 같이 하자고 강하게 권유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개인 문제를 돌보며 살겠다고 답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원시: 노회찬 대표가 90년대 그 어려운 상황에서 진보정당을 하게끔 한 데는 어떤 이유가 있습니까?

 

노회찬: "인생관, 역사관, 철학의 산물이다." 거창하게 얘기하면 그렇게 말씀드리고 싶고요. 저는 학생운동을 하다가 학생운동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해서 노동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원시: 어떤 한계를 느꼈습니까?

 

노회찬: 학생운동이라고 하면 지식인운동의 한 유형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반독재민주화운동은 지식인 중심이었거든요. 광주항쟁 때 군홧발에 여지없이 밟히는 것을 보면서 일부 지식인들의 엘리트 운동으로는 한계가 있다, 역량이 성숙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노동운동에 투신을 했습니다. 노동운동을 하면서 한국사회가 근본적인 변혁 없이는 불가능하다, 군사독재를 청산하는 것도 쉽지는 않다, 싸움이 장기화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용접도 배웠던 것인데요.

 

 87년 이후 민주화는 부분적으로 진행이 됐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주의권이 몰락했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제 많은 주변 동료들은 운동을 떠났습니다. 잘못된 사회주의 국가가 망한 것이지, 사회주의적 이념과 이상이 실패한 것은 아니라고 당시에 생각을 했고요한국사회의 현 단계에 필요한 것은 민주화운동이 자주적으로 성장해가고 있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정치세력화가 없이는 노동운동도 같이 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정치세력화의 방편으로서 진보정당에 뛰어든거죠. 진보정당을 한 두번하고 사람들이 떠나는 걸 보면서 이게 원래부터 어려운 일이고, 수십 년 걸쳐서 발전하는 일이기 때문에 한 두번 실패했다고 자기 인생 스케쥴에 맞춰서 운동을 하고 안하고 이런 생각을 하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원시: 이 질문을 던진 이유는 진보신당에 계신 분들이 과거 민중당, 민주노동당, 민주노총 등에서 지도자급에 있었던 사람들이 왜 한나라당이나 민주당으로 이적을 했는가, 그 원인이 뭔가 라는 것에 대해 이런 내용의 질문을 많이 하셨기 때문인데요대표님은 어떻게 생각하셨는지 궁금해서요.

1부 마지막 순서로 노회찬 대표님의 연기력 테스트를 한번 하려고 하는데요. 혹시 아이리스 보셨습니까


노회찬: 그게 tv에서 방영될 시간에는 제가 tv앞에 있기가 힘들죠.


 

원시: 대사 중에 아이리스라는 것을 군사자본 내지는 한국의 평화통일을 반대하는 제국주의적 음모그룹 이런 걸로 묘사가 되어있던데 혹시 정치적으로 해석하셨는가 해서 여쭤보았습니다.


노회찬: 제가 드라마 내용을 몰라서..


 

원시:그럼 1부 마지막 질문은 이것으로 드릴께요. 대표님이 생각하실 때 가장 좋았던 노회찬 어록, 그리고 내가 볼 때는 이거 좀 실패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노회찬: 여러 말들이 있었는데요. 성공과 실패로 보진 않습니다만, 국정감사 할 때 서울고법원장을 앉혀두고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한 게 아니라 만 명만 평등하다’ 이렇게 다그쳤던 것이 기억이 납니다. 그 말에 고법원장도 수긍을 할 정도로요. 그래서 기억에 남구요


아쉬웠던 대목은 성소수자 문제 가지고 한번 얘기를 한 적이 있었어요. 그게 주제는 아니었고 다른 걸 비유하면서 얼떨결에 얘기가 나왔는데, 본뜻과 다르게 전달될 소지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것 때문에 많이 상처받은 분들도 계셔서 사과를 드렸습니다

  



 

제작: 새로운 데모연구회

자료조사, 섭외, 편집: 꿈책, @여수, 박원규, 한재필, 다온혜윰  

기술지원: 클라시커

진행: 원시

음악: 하트

<당원이 라디오> 참여http://cafe.daum.net/new-demo  

 

Posted by NJ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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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좋은 하루 되세요~ 좋은정보입니다.

    2020.07.08 05:47 [ ADDR : EDIT/ DEL : REPLY ]
  2. 좋은 정보입니다.

    2020.07.08 05:47 [ ADDR : EDIT/ DEL : REPLY ]

1. 박근혜 정부 통치 특징 (1) http://bit.ly/1aBdljP 박근혜씨 호칭 논란 : ‘박근혜씨’가 문제라는 새누리당은 과거에…

박근혜 대통령이냐, 박근혜씨냐? 왜 호칭를 정치화시키는가? 


아노 메이어(Arno Mayer:역사학자)가 반-혁명세력의 특징들, 그리고 그들의 정치적 행위 특성들을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은 논조로 말한 적이 있다. 


반혁명(counterrevolution)의 정치 기획이란,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인 현안이나 실제 그 주제들보다는 수사학, 스타일, 행동방식에 훨씬 더 전투적으로 '실천'하는 것을 의미한다.


정당간 정치투쟁과 언론보도도, 실제 시민들 실생활 문제 해결보다는, 그것들과 연관되어 있는 언어들, 수사학들, 통치 스타일, 행동 방식, 말 (박근혜씨라고 부르면 상스럽다, 예의가 없다 등)에 더 사활을 건다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는 유신시대 (1972~1979년)와 달리 경제성장율이나 1인당 국민소득이나 가처분 소득은 피부로 느낄만큼 증가하지 않을 것이다. 글로벌 슬럼프는 다음 정권까지도 연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노인 기초연금 (기존 9만원의 2배 증가분) 대선 공약도 지키지 못하고, 국민연금과 기초연금을 연계한다랄지, 노인들 소득별로 분류해서 연금을 지급한다랄지 하는 것도, 실제 박근혜 정부는 경제 정치 사회적 현안을 해결하기 보다는 통치 제스처, 수사학, (박정희) 스타일, 박근혜 행동방식 (한복입고 외교 레이디, 영어, 중국어, 불어 구사 등)에 더 재미와 즐거움을 느낄 것이다.

실제로 유신부활은 없을 것이다. 그 수사학들과 흉내, 에피고넨, 말만 가득찰 확률이 높다. 자기들끼리 이익은 나눠가지면서. 


이게 반동 혁명, 혹은 카운터-혁명시대의 특징이기도 하다. 



( 박근혜 대통령이 가장 잘 하고 자신감있는 표정이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정치 행위는, 손님 맞이이다. 1974년 육영수 여사의 사망 이후, 박정희 퍼스트 레이디를 한 경험 때문이다. )


2. 박근혜 통치 스타일 


박근혜 통치의 심리적 기초: “당신들이 내 슬픔을 알기나 해?
뭘 그런 걸 가지고, 조.족.지.혈. 아휴, 그건 새 발의 피죠."
어머니는 1974년, 아버지는 1979년 각각, 총맞고 사살당한 경험이 있는 박근혜에게는 이 세상 어느 슬픔도 그 슬픔과 인생의 고초를 따라올 수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최종범 삼성서비스 센터 노동자의 자결도,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도, 윤석열 검사의 항의도,
전교조 교사들의 허탈함도, 
20만원 노인연금 준다고 좋아했다가, 심사 받은 후에 10만원 정도 준다고 하니, ‘노인 알기를 원숭이 조삼모사냐고’ 격노하는 노인들에게도,
그들의 슬픔은 ‘뭘 그런 정도 가지고’ 정도로 해석될 것이다.

5년내내 반동시대의 특징이 될 것이다. 


- 박근혜가 출연한 '힐링캠프'를 보다가, 당시에 느낀 감상이다. 이 대목. 박근혜의 답변을 주시해서 보다.




 


Posted by NJ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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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april.4.

    최순실, 청와대 아무도 없는 방에서 박근혜 옷값 현금으로 줘”
    등록 :2017-04-04 15:47수정 :2017-04-04 15:54

    -
    박 전 대통령 의상 제작한 디자이너 특검 진술 “최씨 없으면 진행 안돼”
    “취임식 코트 200만원인데 최씨가 비싸다고 100만원만 줘…끝이 안좋아”

    '비선 실세' 최순실 씨가 박근혜 전 대통령 자택뿐만 아니라 청와대에서도 의상비를 현금으로 지급했다는 진술이 나왔다. 박영수 특별검사팀은 4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김세윤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최 씨의 뇌물수수 혐의 첫 공판에서 10년 이상 박 전 대통령의 의상을 제작한 홍모 씨의 특검 진술 내용을 공개했다. 특검에 따르면 홍 씨는 박 전 대통령이 국회의원 시절인 1998년부터 대통령 취임 이후인 2013년 10월까지 의상을 제작했던 디자이너다. 1998년 최 씨가 자신의 가게에 박 전 대통령과 함께 찾아와서 처음 옷을 제작하기 시작했다는 홍 씨는 대통령 취임 전에는 최씨가 대부분 삼성동 자택과 인근 사무실로 자신을 불렀다고 진술했다.

    이어 "의상대금은 모두 최씨가 현금으로 줬다"며 "대부분 삼성동 자택에서 받았는데, 최씨에게 '옷값이 얼마다'라고 말하면 최씨가 2층에 올라가 현금을 가져와서는 봉투에 줬다"고 말했다. 홍 씨는 또 "2013년 2월 박 전 대통령이 취임식에서 입은 옷도 제작했다"며 "전세계 사람들이 보는 것이라 두 달 정도에 걸쳐 신중하게 만들었다"고 했다.

    그는 "(취임식 때 입은) 재킷과 코트를 100만원 정도씩 받았다"며 "코트는 200만원을 받아야 하는데 최씨가 비싸다고 100만원밖에 주지 않았다"고도 했다.
    홍 씨는 "대통령 당선 이후에는 최 씨 연락을 받고 청와대에 들어갔다"며 "박 전 대통령이 처음 옷 맞출 때 기성복 샘플을 입을 때나 가봉한 옷을 입어볼 때는 항상 최 씨가 있었고, 최 씨가 없으면 옷 만드는 것이 진행이 안 됐다"고 전했다. 이어 처음에는 비표 없이 이영선 당시 행정관의 차를 타고 청와대에 출입하다가 한 달 이후에는 출입증을 받았다고 진술했다.

    그는 자신의 월급 300만원은 청와대에서 받았지만, 사무실 임대료, 봉제사 월급, 사무실 운영비 등 매달 1천만원을 최 씨로부터 현금으로 받았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대통령 취임 이후에는 최 씨를 대부분 청와대에서만 봤다"며 "최 씨가 아무도 없는 방에 데려가 문을 닫고 돈을 줬다"고 밝혔다. 그는 2013년 10월까지 16년 동안 박 전 대통령의 의상을 제작했다고 재차 확인하면서 "그런데 최 씨 때문에 끝이 안 좋았다"고 진술했다.

    연합뉴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789251.html?_fr=mt2#csidx568d245f6607273b5124b7747b91140

    2017.04.04 16:05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