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litical leadership2014. 3. 10. 17:44

박은지 님을 추모하면서 


일부 언론들이 박은지 사망 사건을 두고 자극적인 기사를 내보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수천 겹의 고뇌와 삶의 무게가 (고) 박은지 님의 어깨 위에 있었을 것이다. 비록 짧은 생으로 마감했지만, 그에게는 꿈과 희망이 있었다. 박은지 님이 말하는 자기 이야기를 들어볼 필요가 있다. 다음

10분 정도의 인터뷰는 (고) 박은지 노동당 부대표가 29세의 나이로 진보신당 언론국장을 시작하면서 밝힌 포부이다. 



 


2008년 박은지 언론국장 (진보신당) 인터뷰 편집을 하면서 <넌 할 수 있어 / 강산애 노래> <은지 / 배따라기> 두 곡을 삽입했다. 당시 <당원이라디오> 인터뷰 목적은 다음과 같았다.
29세의 나이로 차 세대 진보정치가로, 당원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당직자로 꿈을 펼치기를 바랬다. 한국에서도 진보정당이 20-30대 청년들에게 미래 직장으로서 자리잡을 수 있기를 희망했다. 
 




http://www.laborparty.kr/bd_member/571473

2008.10.01 14:50

 [당원이 라디오 10 ] 중앙당 25시: 다른 정당에는 없는 발 - 박은지 편


조회 수 564 댓글 13


진보신당 중앙당 25시, 그 네번째 순서로, 당 대변인실 언론국장 박은지씨를,  낭만자객, 쟈넷 김수경이 만나고 왔습니다. (9월 30일)  

질문 : 당에서 하고 계신 일은요? 

박은지:  저는 중앙당 대변인실에서 언론국장일을 하고 있구요 박은지라고 합니다 (냉장고 입니다.^^) 
             2008년 7월 9일부터 당직자로 일하고 있고, 2달 좀 넘어서 3달 째 되고 있습니다

질문 : 그 전에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박은지: 학교에서 국어를 중학생들 한테 가르쳤고 학원강사 일도 했습니다.

질문 : 진보신당 들어와서 당직자로서 보람을 느낄 때는? 

박은지: 촛불정국 이후에, 언론에서 당이 멀어지는 상황이라서... 당에서 제가 하는 일은 당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이쁘게 포장해서 보도자료화 하는 일을 주되게 하고 있는데요... 작은 보도자료라고 해도 다른 언론사에서 취재를 하려고 하는 점에서 보람을 느낌니다

질문 : 내가 이것만큼은 남보다 더 잘 할 수 있다. 노골적인 자랑질 한번 해주세요.

박은지:  뻔뻔함..마구 들이대는 거...ㅎㅎㅎ

질문 : 중앙당에서 일하면서, 가장 힘들거나 스트레스 받는 일은?

박은지: 능력이 부족한거죠...워낙 전문적인 능력이 요구하는 일인데... 아직 제가 준비도 덜 되어 있고, 또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서 미숙하고, 부족한 것도 있고...

질문 : 어떠한 능력이 필요하신 것 같아요?

박은지: 정치적 감각이겠죠...언론에 이렇게 이야기하면 언론에서 잘 받겠다 하는 이러한 판단...주력해서 그때 그때 하는 판단... 아직은 경험이 부족하고 경험 좀 더 쌓여야 할 것 같습니다.

질문 : 다른 당직자들과 비교해서 어떤점이 부족하다고 느끼시지?

박은지 : 그냥 (중앙당 다른 당직자) 옆에 계신 분들과 비교하고 있습니다. 

(동작구 지역 모임 중에서, 리얼리스트 사진작가 황정연, 맹명숙 등과)
질문 : 네트워크 실력은? 대변인실의 언론 담당의 활동하는데,  당 안팎에서 도와줄 분들이 있다면?

박은지: 당 내부에서는 중앙당 체계에 맞게 돌아가는 것이고, 모니터링에 대해서는 외부 혹은 직장생활 하시는 이른바 평당원들... 제가 살고 있는 동작 당원들이 말해주는 내용을 모니터링받고요...

기자들에 대해서는 나름 친해지려고 하고 있습니다

질문 : 본인이 맡고 있는 일을 더 잘 하기 위해서, 어떤 공부를 하나?

박은지 : 보도자료 작성하는 법...언론사 입시생들을 위한 강의등을 듣고 있고... 독서모임이나 세미나 등을 하고 있습니다

질문 : 중앙당과 지역당에서 가장 친하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친구나 멘토역할을 하는 분이라면?

박은지 : 누구라고 말하면 다른 분들이 서운해 하실텐데...개인적인 감정을 말할 수 있는 멘토와 일과 정치적 관점에 대한 멘토는 떨어지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우리 당에는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다. 굳이 말하라고 하면, 저랑 비슷하게 들어오고, 나이도 비슷한 나영정 동지와 교감을 나누고... 지역에서는 연배가 높은 직장생활을 하시는 당원들로 부터 이야기를 나누고 조언을 받고 있습니다

질문 : 일하면서 가장 힘든점은...아기있으시죠?

박은지: 26개월 아기가 있는데...남편과 나눠서 보는데...쉽지도 않지만 어렵게 느끼지도 않습니다...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이 대단히 힘들고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질문 : 당직자 선발될 때 어떤 절차를 거쳐서 오게 되었습니까?

박은지 : 민노당때 당직자 그만둔 상태에서 총선을 맞이하였고 지역선거운동을 하면서 정치적으로 진보신당 활동을 열심히 하고자 생각했습니다. 동작구 선거운동을 하면서, "내가 참 정치적 발언을 못하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대학원에 갈까, 뭐를 할까 경험있는 분들한테 조언을 구했고요. 중앙당에서 일하는 것이 어떻겠냐? 이런 의견이 있어서, 6월 공채에 응시를 하게 되었고, 7월부터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질문 : 월급에 만족하나요?

박은지 : 매우 만족(?)합니다. 기본급 120만원에 수당이 조금 붙는 정도인데...일반 사회단체, 비정규직 혹은 영세상인 당원에 비해서, 비정규직 노동자에 비해서 결코 적은 금액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질문 : 전문가 그룹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적정한 급여는 아닐텐데요?

박은지 : 상대적인 것이고 절대적으로 적정한 금액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평당원들도 일상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비교해 보았을때 많은 어려움이 있으신데 적은 금액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질문 : 언론국장으로서 포부는?

박은지: 당원들은 언론에 비치는 모습에 관심이 많으신것 같습니다. 진보신당이 정치적인 뉴스에서 소외되는 상황인데 다른 당에서는 할 수 없는, 대표적으로는 당원들의 자발성을 이쁘게 꾸며내서 자료화할 것인가? 그것 많이 생각하고요, 장기적으로는 거창한 것보다 나도 즐겁고 다른 분들도 즐거운 그런 당생활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조금 더 부지런하게 움직이면 그렇게 되지 않을까? 소박한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 부지런하게 움직이는 발 (슬리퍼가 상당히 인상적임). 진보신당 당원들의 활동을 알려내는데, 부지런한 발의 활약을 기대해봅니다.



제작: [당원이 라디오] 시험방송 제공:  새로운 데모 연구회: 
   http://cafe.daum.net/new-demo



Posted by NJ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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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진보정치’ 꿈 접고 떠난 박은지 노동당 부대표, 무엇이 젊은 그를 좌절케 했나
    이명희 기자 minsu@kyunghyang.com-
    입력 : 2014.03.12 13:43 수정 : 2014.03.12 14:27인쇄글자 작게글자 크게
    고 박은지 노동당 부대표 걸개그림. 노동당 제공
    고 박은지 노동당 부대표 걸개그림. 노동당 제공

    “한 해 동안 아이는 키가 9.4cm 컸고, 방과 후 학교 어딘가에서 수업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가방 한 번, 실내화 주머니를 두 번 잃어버렸다 다시 찾았고, 꿈을 기관사에서 딱지장사로 바꿨다…”

    고 박은지 노동당 부대표(35)가 지난달 14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남긴 “아이가 1학년을 무사히 마쳤다”로 시작하는 글이다.

    ‘싱글맘’으로 홀로 아들을 키워오던 그는 사랑하는 아들을 남긴 채 지난 8일 오전 서울 사당동 자택에서 목을 매 숨졌다. 그의 아들은 이제 겨우 아홉살. 자신 역시 서른 다섯살에 불과했던 젊은 진보 정치인은 예고도 없이 일찍 세상을 떠났다.

    경찰 조사 결과 박 부대표는 우울증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그는 무엇 때문에 우울해야 했을까.

    박 부대표는 유서를 남기지 않았다. 그가 왜 우울했는지는 그의 과거를 통해 유추하는 방법 밖에 없다.

    사범대학을 나와 교사를 꿈꿨던 그는 학원 강사를 하면서 89통의 이력서를 쓴 뒤에야 서울의 한 중학교 교사가 됐다. 하지만 정규직 교사가 아닌 기간제 교사였다. 계약한 지 6개월 만에 임신을 했다는 이유로 해고 통보를 받았다. 계약기간은 1년이었지만 기간제 교사였던 그는 이 기간을 채울 수 없었다.

    정규직 여교사들은 출산휴가, 육아휴직 등 ‘모성애를 누릴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지만 기간제 교사들이 이런 권리를 누리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임신한 기간제 교사가 고민한 것은 오로지 ‘어떻게 해야 퇴사를 피할 수 있을까’ 뿐이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이 있지만 그의 해고를 막지 못했다. 박 부대표는 당시 전교조도 전체 교사 중 15%에 해당하는 기간제 교사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다고 한 인터뷰에서 밝힌바 있다. 전교조 교사가 돼서 참교육을 실천하고, 조합의 일원으로 운동도 하고 싶었던 박 부대표는 교사의 꿈을 접고 그렇게 학교를 나왔다.

    그는 생활을 위해 다시 학원 강사를 시작했다. 아이가 생겼으니 다른 곳으로 눈 돌릴 여유도 없었다. 학원 강사를 하며 돈도 제법 모았지만, 마흔이 넘어서까지 학원 강사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진보정당에 희망을 걸고 2008년 진보신당 공채에 지원해 정치에 입문했다, 이후 18대 총선 동작을 김종철 후보 수행비서, 언론국장, 대변인을 거쳐 19대 총선에서 진보신당 비례대표 후보로 활동했다. 지난해 2월에는 노동당(전 진보신당) 부대표로 당선돼 대변인까지 겸직했다.

    그러나 진보정당 당직자로 생활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박 부대표는 지난해 11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에서 웬만한 전문직, 고소득직이 아닌 이상에야 아이를 키우면서 살기 어렵다. 진보 정치 활동하는 사람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고 이혼 후 혼자 아이를 키우며 진보정치 활동을 하는 어려움에 대해 토로한 바 있다. 당시 인터뷰에서 그는 “현재 노동당은 최저임금만 주고 있다”며 “학원 강사 시절 모아둔 돈을 조금씩 조금씩 뜯어서 쓰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아이와 2층 침대를 쓰는 것도 가스비를 어떻게 하면 줄일 수 있을까 하는 고민에서 나온 발상”이라며 “어떻게든 한 방에서 자야 될 것 같아서”라고 하기도 했다.

    노동당이 활동가들에게 최저임금밖에 줄 수 없는 이유는 한국의 정치 구조 때문이다. 현재 정당들에게 배분되는 국고보조금과 운영지원금의 경우 총액의 50%를 새누리당과 민주당이 우선 나눠 갖는다. 나머지 50%는 양당을 포함한 모든 정당이 의원 수 비례로 나눈다. 의원을 배출하지 못한 노동당은 국고보조금과 운영지원금을 한 푼도 받을 수 없다.

    노동당이 운영비를 기댈 수 있는 곳은 당비뿐이다. 그러나 당원이 많지 않은 노동당은 이마저도 큰 금액을 기대할 수는 없다. 한 진보정당 관계자는 “관변 단체들도 1년에 수억원의 국고보조금을 받고 있다”며 “의석수가 많아야 지원금도 더 많이 받는 ‘승자독식’ 구도인 현행 정치자금법에 대한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가 업무를 맡았던 언론도 진보정당에 무관심했다. 원외 정당이 된 노동당에 대한 기사를 써주는 언론은 거의 없었다. 박 부대표가 지난 1월17일 대변인직을 사임하면서 자신의 트위터에 남긴 글은 “지난 2년여의 대변인직을 마무리하며 언론인들께 한가지 간곡한 요청을 드린다”로 시작된다. 그는 “진보정치의 겨울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상황은 현재 노동당의 열악한 모습과 다르지 않다”며 “비록 지금은 작은 원외 정당이지만 노동당이 갖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믿고 작은 관심이라도 기울여주시기 바란다”고 호소했다.

    그의 한 지인은 블로그에서 “박 부대표가 진보신당 대변인 시절 전 국민에게 대출을 권하는 ‘김미영 팀장’ 수준으로 기자들에게 문자 폭탄을 돌렸다”고 전했다. 진보신당이란 이름이 단 한번이라도 언론에 더 언급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가 택한 전략이었다.

    그는 최선을 다하면 언젠가는 세상이 변할 거라고 믿었다고 한다. 그러나 세상의 변화는 느렸다. 그러는 사이 박 부대표에게 우울증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는 늘 유쾌하고 화통했기에 주위 사람들은 그가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대부분 알지 못했다.

    진보신당 시절 박 부대표와 활동했던 정의당 관계자 ㄱ씨는 지난 10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내가 행복해야 운동도 실천도 할 수 있다”며 “진보정치가 존재감을 잃어가고 있는 현 상황에서 우울증을 앓거나 이혼한 사람도 많이 있다”고 전했다. 그는 “박 부대표를 옆에서 좀더 살펴봐주지 못해 무엇보다 미안한 심정”이라며 “나보다 박 부대표와 더 가까웠던 지인들 중에 이런 생각들로 자신을 자책하며 고민하는 사람들이 분명 있을텐데 이 점도 걱정”이라고 했다. 실제 박 부대표의 한 지인은 자신의 블로그에 “지난번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힘들다고 했을 때 좀더 관심있게 봤어야 했는데 미안하다”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ㄱ씨는 박 부대표가 이런 결정을 내린 이유에 대해 “희망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희망이 있으면 현실이 힘들어도 얼마든지 버틸 수 있다”며 “현재 노동당이 한국 사회에서 차지하고 있는 존재감에 대해 누구보다 고민이 많고 힘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런 불행한 일이 또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주변 사람들도 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지난 10일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열린 박은지 노동당 부대표 영결식에서 참석자들이 헌화하고 있다. 노동당 제공
    지난 10일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열린 박은지 노동당 부대표 영결식에서 참석자들이 헌화하고 있다. 노동당 제공

    동지를 잃어버린 노동당 역시 분위기가 우울했다. 박 부대표와 진보신당 시절부터 함께 한 이봉화 노동당 부대표는 11일 경향신문과의 전화통화에서 “박 부대표가 우울증을 앓고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불안한 사회에서 우리 모두 힘겹게 살아가며 우울감을 겪고 있는게 아니냐”며 “그의 죽음에 대해 뭐라고 얘기하기 조심스럽다”고 밝혔다. 다만 “그동안 진보 진영이 계파 등으로 분열을 겪었지만 함께 운동해왔던 선·후배들의 도움으로 따뜻하게 장례를 치뤄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 부대표의 영결식은 지난 10일 오전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치러졌다. 이용길 노동당 대표는 이날 추도사에서 “죄송합니다. 우리가 그대를 아프게 했습니다. 우리가 그대에게 고통의 짐을 함께 짊어지도록 요구했습니다. 동지는 기꺼이 그 짐을 함께 짊어졌고, 늘 웃는 얼굴로 오히려 주위 동지들을 챙겼습니다. 그 웃음 뒤에서 동지가 어떤 아픔을 인내해야 했는지, 그 아픔의 깊이가 어떠했는지 우리는 미처 가늠하지 못했습니다”라고 안타까워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노동당’이라는 이름이 들어간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포털사이트에서 ‘노동당’이 인기 검색어에 오르기도 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야.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403121343091#csidx1fd5418233a7a90b1a24858f1010489

    2019.10.12 16:04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political leadership2014. 3. 8. 22:14


차라리 컴퓨터를 열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박은지 본인상, 이 말도 안되는 소리인가? 난 박은지 씨를 늘 공인으로만 대했다.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다. YTN 뉴스에 노동당 대변인으로 정견을 발표하는 장면이 아니라, 고 박은지 뉴스가 나오고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


회한이 남을 것 같다. 불찰이니까. “좀 많이 힘들었어요. 자살을 생각할 만큼요” 이렇게 말했을 때, 이것은 너무나 명백한 신호, 도움과 대화가 필요하다는 신호였는데,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


너무 박은지 부대표를 믿어 버렸다. 당 자체가 어려우니까 부대표로서 대변인 일이 힘들 것이라고만 생각해버렸다.

페이스북에서 은혁군 학교 다니는 이야기, 정치 논평, 일상 생활의 감상 등을 왕성하게 올리고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을 보면서, ‘박은지 부대표가 의욕적으로 잘하고 있구나!’ 그렇게만 생각했다. 


그런데 작년 늦가을부터 얼굴이 수심이 가득해 보였다. 그래서 페이스북 쪽지로 안부를 물어봤다. 지금 보니 그 때가 12월 1일이었다. 그러다가 2주 후에 통상임금 관련해서 의견을 물어와서, 이제 박은지 부대표가 안정을 되찾고 본 궤도로 다시 진입했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박은지 부대표를 공인으로만, 언론국장, 대변인, 부대표로만 대한 채, 따뜻한 이야기 하나 해주지 못했다. 작년 12월에 전화를 하지 못한 게, 또 올해 2월에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한 게 후회가 된다. 지금은 명복을 빌지 못하겠다. 국화꽃 한 송이 들지 못하는 초라한 새벽이다.   



·         December 1, 2013

·         원시

https://fbstatic-a.akamaihd.net/rsrc.php/v2/yj/r/mkUCm0hEprk.gif12/1, 12:16pm

원시

hi 은지씨.

한창 슬림해지더니...

무슨 일이 생겼소이까?

·         Eun Ji Park

12/1, 12:41pm

Eun Ji Park

많이 힘들었어요. 자살 생각할 만큼요. 지난주에 정점을 찍었고 이제 정신 차리는 중이에요.

·         Eun Ji Park

12/1, 12:47pm

Eun Ji Park

저를 전혀 돌보지 않았지요. 제가 원래 체질이 찌고 빠지고 그래요^^

·         원시

12/1, 12:56pm

원시

통화 한번 있나요

??

그런 줄도 몰랐네요.

·         Eun Ji Park

12/1, 12:58pm

Eun Ji Park

ㅎㅎ 나중에요~^^ 여긴 한밤중이라.

·         원시

12/1, 1:24pm

원시

알죠. 여긴 .

거긴 .

너무 늦었으니까. 시간을 한번 맞춰요.

오케이?

괜찮다고 하지 마시고...

한번 마신다고 생각하시고.

다음 주에 한번 통화해요.

그럼 주무시고.

떨어지게 하지 말고^^

·         December 1, 2013

·         원시

12/1, 6:51pm

원시

전화번호는 그대로인가요? 예전에 기록해둔 같은데.

씩씩한 알고 있었는데 ..

·         December 18, 2013

·         Eun Ji Park

https://fbstatic-a.akamaihd.net/rsrc.php/v2/yj/r/mkUCm0hEprk.gif12/18, 8:58pm

Eun Ji Park

똑똑~~!1

통상임금 관련해 여쭤볼라 했는데

·         원시

12/18, 9:43pm

원시

dk..은지님. 지금 저녁식사. 요리중. 20 후에요.

괜찮은지요?

한국시각으로 12 20-30 사이에 돌아옵니다.

·         Eun Ji Park

12/18, 9:45pm

Eun Ji Park

. 아녀요~ 당게에 쓰신 글보고 참고했어요

·         원시

12/18, 10:49pm

Posted by NJ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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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주의 혹은 주체사상: 김정진 박은지 논쟁점과 논의 방향 (2)


(1)은 김정진의 문제의식에 대해서, (2)는 박은지의 문제의식과 해명에 대해서 쓴다. 박은지의 해명을 보면 간단하다. 질의자들이 이렇게 물은 것같다. 김일성주의가 도대체 어떤 매력이 있어서, 좀 배우고 이정희 통진당 대표처럼 서울대도 나오고 인문계 여자 수석도 하고 변호사도 하는 사람이 주체사상파인가? 박은지부대표가 질의자에 앞서서 “주체사상의 매력에 대해서” 주장을 하지 않았다고 해명한다.


이런 대화 맥락과 박은지의 해명에 대해서는 굳이 다시 의문을 제기하거나 설명을 요하지 않을 것이다. 김정진 전 부대표가 이러한 ‘대화 맥락’에 대해서 고려해주었으면 좋겠다.


1. 당 간부들 내려버지다. 정당은 코디네이터가 필요하다


글쓴이는 박은지 인터뷰의 문제점을 다른 곳에서 찾고자 한다. 당대표나 대표단,그리고 당 주요간부들의 정치활동을 내용적으로 ‘도우미’역할을 할 수 있는 당내 ‘연구소’나 ‘정치토론 그룹’ 혹은 정치조직(정파)의 부재가 더 큰 문제의 원인이다.


얼마전 장석준 부대표가 프레시안에 기고한 <김정은이 망해야 한반도가 산다! >는 글의 전반적 내용은 노동당이나 한국진보정당이나 좌파정당의 대북정책이나 평화정책으로 수용되기 힘든 내용의 글이다. 박은지 부대표의 경우도 썰타임 출연이나 발언 내용 역시 당원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당 정책의 대중화에는 별로 기여하지 못했다고 본다.


당 간부들의 정치적인 활동은 장려되어야 하고 당원들은 적극적으로 같이 협조해야하겠지만, 현재 그리고 지난 2년간 노동당의 당 간부들은 ‘당의 코디네이터’ 없이 그냥 개별적으로 혼자 메이크업하고 혼자 알아서 옷입고 혼자 스케쥴 잡고 언론에 기고하거나 출연하거나 했다. 

진보신당-노동당은 과거 노회찬 심상정 전대표의 당과 독립적인 언론플레이의 문제점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거나,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거나,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지 못하고 있다. 


[고민과 대안] 당 안에는 4-5개 다른 세대들이 공존하고 있다. 내 관심사는 한국정치를 좌지우지하고 있는 속칭 386세대 (*80년대 광주항쟁 세대의 정신은 이제 많이 퇴색되었지만)들을 흉내내지 않고, 70년대,80년대,90년대 리버럴리스트 정부의 출발점인 김영삼 정부 이후는, 그 이전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군사정부와는 차이가 난다. 그리고 또 그 이후 김대중-노무현-이명박 15년은 그 내부에서 분화가 또 발생한다. 이러한 정치적 경험의 차이를 고려해서, 좌파 정치가를 어떻게 집단적으로 부각시킬 것인가? 이다.


2. 박은지의 인터뷰와 그 내용에서 향후 토론주제로 뽑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통합진보당, 혹은 NL 로 불리는 운동권들이 한국 진보진영에서 영향력을 어떻게 왜 행사해왔는가? 의미와 한계는 무엇인가? 이런 주제일 것이다.


먼저 하나 바로 잡고자 한다. 통합진보당 ‘내란 사건’ ‘종북몰이’ 사건이후, 김종철 전 부대표와 박은지 부대표가 모 종편방송에서 출연했다. 박은지부대표가 NL의 약자를 National Liberty (민족/국민 자유)라고 했는데, NL은 NLPDR의 약자로 (National Liberation People's Democratic Revolution 민족해방 민중민주혁명)의 준말이다.


언론에서도 그리고 많은 운동권들이 잘못 알고 있는 PD 역시, NLPDR이다. 신신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은 PD중의 하나의 패러다임이다. 그리고 이 두가지 NL,PD만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패러다임들도 있고, 이 둘의 차이점만 부각되었지만, 공통적인 이론적 실천적인 약점들과 한계가 존재한다.


NL이나 PD 문건이나 그 이론은 완성된 체계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두 패러다임은 ‘사회주의로 이행과정’, 그리고 비-자본주의로의 발전 가능성을 목표로 하는 것인데, 89년~91년 사이 현실사회주의 체제 붕괴로, 급속하게 대중적 파급력을 잃게 된다. 80년대말, 90년대 초에도 이미 NL, PD론 (둘다 NLPDR -> socialism 사회주의로 이행)의 한계는 지적되었다. 이게 2004년 민주노동당 10석 이후 다시 대중에게 소개된 것을 보고 약간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과거 사회구성체 논쟁이 언론에 다시 떠올랐기 때문이다. 


남의 나라 혹은 북한 정치변혁 경험들을 근거로 만들어진 NL,PD론은 구체적인 정치,사회,경제적인 예증이 부족한 채, 그 사회구성체 논쟁이 시들어졌다. 주사파 NL은 식민지 반봉건론, PD는 라틴아메리카-소련 내부 논쟁들을 바탕으로 ‘종속 강화’ ‘독점 심화’라는 테제를 가지고 있었으나, 이 두 패러다임은 한국 자본주의, 한국 지배 계급 등의 구체적인 변화과정을 설명하는데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 두 패러다임의 한계,그리고 사회과학 방법론으로서도 천박한 이론적 토대에도 불구하고, ‘종속’문제와 그 변화,한국 자본주의의 자본축적 구조 등은 새롭게 조명될 필요가 있다. 예를들어 '종속' 개념으로 삼성 자본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초국적 자본비율의 문제나 지배권 등을 설명할 수 있는가? 등 


(NL)PDR 은 사회주의로 이행 (transition)이라는 정치적 프로그램을 전제하고 있다. 그리고 정치학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정치적 주체 문제를 조악하게 조야하게 “계급,계층분석”에 기초하고 있다. NL, PD 두 패러다임 공통적으로 한국자본주의의 ‘분화 differentiation'에 대해서는 설명해내지 못했다. 사회과학적 설명 용어와 방법론으로서 부적합하거나, 패러다임의 하드 코어에 문제가 생겼다.


이 이야기는, 80년대 말 90년대 초 이야기이다.


그 당시도 그 이후에도, 한국 자본주의 분화와 정치-경제의 관계, 한국 노동자 계급의 의식의 발전과 분화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와 보고서는 많지 않았다. 대부분 NL이건 PD건 정치세력을 앞세워, 이론과 실천적 조사를 바탕으로 자기 패러다임을 혁신해야 하는데, 정치 세력들이 그 ‘이론적 작업’과 ‘실제 연구 조사’를 대신했다. 신념으로 버틴 점은 존경해야 하나, 현실 정치에서 무딘 창으로 버티는 것은 백전백패를 자초한다.


3. 주제를 조금 바꿔서, 그렇다면 왜 NLPDR 혹은 NL 그룹이 한국 운동권의 다수가 되었는가?


이것은 수많은 설명들이 있을 수 있어서, 학생운동사 맥락에서 한 가지만 짚고 다음 기회에 논의하기로 하겠다. 아직까지 한국 학생운동에 대해서 제대로 된 연구는 많지 않다. 부끄러운 현실이고 한국 학계 자체가 ‘사회과학’ 학파가 없다는 게 직접적인 원인이기도 하다. 미국, 캐나다, 독일, 프랑스는 예를들어 광주 518, 87년 6월항쟁, 7-8월 노동자 대투쟁, 노무현 현상 연구, 민주노동당의 성공과 실패 등에 대해서 박사학위를 써서 교수가 된다. 한국에 이러한 연구가 없다는 게 아니다.


87년 충남대에서 결성된 ‘전대협 (전국 대학생 대표자 협의회)’ 의 영향과 전국 대학으로 NL 그룹의 확장이 그 다수파 형성에서 가장 중요한 원인들 중에 하나다. 그리고 87년 대선 이후, 노태우 정권 하에서 학생운동은 ‘제도화’의 길을 가고, 소위 말해서 ‘학생회의 대중화’, 이것은 전두환 체제와는 질적으로 다른 상황을 초래한다. 학생운동권의 제도적 권력 (institutional power)가 학생사회에서 뿌리내리는 계기가 되었다.


80년대 대학생 운동을 한 사람들과 한번 대화를 해보라, 그들은 학번 차이를 대면서, ‘내 때는 더 엄혹했다’고 하거나, 전두환 시절에 투쟁했던 세대와 노태우 정권 하에서 투쟁했던 세대들 사이에 경험 차이 등등...


(전대협의 결성은 학생사회에서 제도적 권력이 형성된 계기를 마련해줬다. 반파쇼 정치 투쟁의 운동가들이 학생회라는 제도적 기구들을 운영해 나가는 정치적 출발점이었다) 



전 세계 정당사, 사회주의운동사, 식민지에서 해방운동사, 인종차별 운동 등, 정치적 행위는 ‘가장 사회과학적으로 정교하고 올바른’ 그런 노선이 반드시 주류를 형성하는 게 아니다.


돌이켜보라 ! 박종철의 죽음, 이한열의 죽음, 그들의 나이가 만으로 치면 20세,21세가 아니었던가? 지금 우리 당원들 중에는 아들 딸 중에, 조카들 중에, 동생들 중에 이 나이 때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죽음에 한 정권의 정당성 자체가 흔들거리던 시절이 1980년대 전두환 정권 하에 일이다. 학생운동권에서 ‘이론의 정교함’ 보다는, 실제 ‘행동과 반-파쇼 집단 학살집단에 대한 직접적인 물리적인 투쟁’ 자체가 사회과학이었다.


학생운동은 1988년 노태우 정권이 수립된 이후에도, 합법적으로 당선이 된 정권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정치적 ‘정당성’과 ‘윤리성’의 우위를 여전히 주장하게 되었다. 노태우 정부의 가장 큰 특징은 ‘합법성 legality'의 획득과 ’정당성 legitimacy'사이의 충돌이었다. NL이건 PD건 ND건 이 합법성 측면보다는 후자, 노태우 역시 광주학살의 원흉이자 파쇼의 연장으로 파악하고 그 정부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6공화국 하에서 학생운동은 전두환 파쇼와 비교해서, 학교에서 자유 선거를 통한 ‘학생회’라는 ‘제도적 권력’을 가지고 되었는데, 왜 NL 그룹이 가장 ‘다수’가 되었는가? 앞으로도 더 연구해야 할 지점이 이 두 가지 상관관계이다.


민족주의적 경향 (일제의 잔재청산, 미국 제국주의의 발견 : 88년 올림픽에서 관중들이 소련을 응원하고 미국 성조기에 야유보내는 반-미국 정서 anti-American sentiment), 소위 주체사상에서 말하는 품성론, 항일 유격대식 대중노선 등은 여러 가지 요소들 중에서 하나에 불과하다.


많은 사람들이 NL, PD를 ‘사회주의적 지향과 정향 orientation' 이라고 말하지만, 정작 6공화국 노태우 정부 시절에, 이 학생집단의 제도적 권력이 누린 것은, 자유민주주의적 ’정치 실천, 다시 말해서, 전두환 폭압에 누리지 못한, 정치적 표현의 자유였다. 실제 그 운동 주체들이 사회주의적 지향 (NLPDR은 사회주의 체제로 전환을 그 목표로 하고 있다. 사노맹으로 표현된 ND 역시 2단계 혁명론이지만, 사회주의 이행론이다) 을 했고, 또 학생운동 뿐만 아니라, 학생사회 외부와 연계를 맺었기 했지만, 학생사회 내부 정치에서 ‘제도적 권력’ 사용이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에 하나였다.


이들이 나중에 사회에 진출해서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지지세력의 주축이 되거나, 실제 정치가되어서도, 이러한 학생사회의 ‘제도적 권력’의 경험을 그대로 실천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대중적 동원능력을 보여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학생사회 때와 마찬가지로 ‘정치 내용의 빈곤’을 ‘제도적 권력’으로 대신한다.


그렇다면 6공화국 노태우 정부 하에서 전대협을 비롯한 nl 다수파 (주사파를 포함), pD, ND등은 위에서 말한 노태우 정부와 전두환 정부의 ‘통치’차이를 인식하고 ‘합법성’과‘정당성’ 사이의 긴장을 꿰둟어내는 정치 전략을 만들었는가?


89년 몰타 회담 (고르바초프와 조지 부시의 회담)으로 인해 얄타체제 (냉전 체제)의 해체부터 91년 사이에 벌어진 국제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 등이 미치는 정치적 영향에 대해서 제대로 인식하거나 설명하거나 이에 맞는 정치적 프로그램들을 만들어 냈는가?


91년 강경대 타살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민민운 (민족민주운동이라고 약칭)의 위기론이 한창 논의되고, 사회주의 대 사민주의 논쟁이 발생하던 시점에, 이에 대한 답변을 했는가?


사실 그 당시 우리의 문제이기도 했지만, 이러한 질문들과 과제들은 당시 학생운동가들의 지적 실천적 범위를 뛰어넘는 문제였고, 당시 한국 지식계의 수준을 고려했을 때, 이 문제들을 정치적 담론으로 여론화 대중화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4. 박은지 부대표가 말한 주체사상 “사람의 가능성을 믿고 그 힘을 긍정하는 사상”에 대해서

- 소련식 교과서는 마르크스에 대한 왜곡이었다.

- 소련식 교과서를 극복했다는 주체사상은 허수아비 때리기를 하는 것이다.


이 주장은 굳이 주체사상만이 아니라, ‘창조 Creativity' 를 강조하는 사람들, 박정희의 교육헌장과 ’하면 된다‘는 정신, 혹은 안철수식 ’창조적 혁신‘, 박근혜의 ’창조 경제‘ 모두다 ’사람의 가능성을 믿고 그 힘을 긍정하는 사상‘이라는 점에서, 형식적으로는 같다.


물론 북한의 주체사상은 “계급과 민족” 패러다임인데, 왜 주체사상을 박정희, 안철수, 박근혜와 동급으로 놓느냐고 항변할 것 같다.


주체사상의 이론적 근거 자체가 오류다. 주체사상 주장은 다음과 같다.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 철학의 근본문제를 물질과 의식의 관계 ( matter-consciousness relations)로 설정했다. 그런데 마르크스-레닌주의는 ‘물질’과 ‘의식’관계에서, ‘물질이 의식보다 선차적이고 우위를 갖는다. 이러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물질의 의식에 대한 선차성 (priority)은 인간의주체성, ‘인간의 주체적 파워, 힘과 능력’의 중요성을 해결하지 못했다.


그럴싸하다. 몇 년전에, 미국 최장집-박상훈 등을 따르는 연구자들이 정치의 선차성 (the primacy of politics: 정치가 가장 중요하다) 를 쓴 미국 비교정치학 교수 쉐리 버먼(Sheri Berman) 을 한국에 소개하면서, 좌파 운동권들이 ‘정치’를 모른다고 야단쳤을 때, 그 ‘선차성’ 개념과 위 선차성 개념은 동일한 말이다.


주체사상을 서술했다는 황장엽의 이론적 깊이의 한계이기도 하고, 정보 수집의 한계이기도 하다.


사실 주체사상이 말하는 마르크스-레닌주의 교과서 (소련 사회과학 아카데미에서 만들어낸 검인정 교과서로서, 그 기원은 부하린의 공산주의의 ABC, 그 이후 스탈린의 역사적 유물론 테제 등에 있다. 이는 나중에 설명하겠음)에서 말하는 ‘물질’과 ‘의식’ 관계가 철학의 근본문제라 하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


주체사상이 ‘물질-의식’ 대립항이 아니라, ‘세계-인간’으로 근본문제를 전환시켜, 마르크스 레닌주의가 해결하지 못한 인간의 주체성 (subjectivity)를 해결했다고 하는 것은, 이중의 오류이다. 첫 번째는 소련 사회과학 검인정 교과서 (공산당 명령을 따르는 연구소)에서 마르크스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기반한 ‘물질’ -‘의식’이 철학의 근본문제라고 못박아놓고,


두 번째는, ‘물질’ -‘의식’ 대립항이 풀지 못한 퍼즐과 난관 수수께기를 ‘세계-인간’ 대립항이 풀었다고 선전하는 것 자체가 자화자찬격이다. 세계에 대해서 인간의 주체성 즉, 의식성, 창조성,자주성을 더 부각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 주체사상 답변이 잘못된 문제설정 "물질과 의식"의 관계에 대한 하나의 답 (물론 오답이지만)은 될 수 있겠지만, 철학적 주제들에 대한 답변이 되기에는 불충분하다. 철학적 체계로 인정할 수 있지만, 수많은 증명부담들을 안고 있다. 철학에서 다루는 수백가지 테마들을 이 인간-세계 대립항으로 풀 수 있다는 것인가? 


그리고 자본주의의 변화와 역동성, 그 축적 구조를 어떻게 설명가능하단 말인가? 자기들이 경험하지 않은 세계와 자본주의에 대한 연구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수많은 중요한 사회과학적 주제들을 인간-세계 대립항으로 진단도, 해결도 할 수 없다. 




(1940 년 조제프 스탈린이 서술했다는 : 변증법적 역사적 유물론 교과서: 마르크스에 대한 선택적 이해와 왜곡의 공식적 출발점이 된 책이다. 1980년대 한국에 소개된 마르크스 입문서, 철학개론은 대부분 이 스탈린의 기본골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DIA-MAT의 효시이자, 마르크스 사상의 박제화 왜곡의 공식화 선언이었다)


이 주체성 (subjectivity) 문제는 제 2 인터내셔널 이후, 마르크스에 대한 혹은 사회주의자 내부에서 논쟁된 ‘경제 결정론 economic determinism'에 대한 문제제기로, 당시 중요한 주제였다. 


그런데 80년대말, 90년대 초, 한국에 소개되고 번역된 마르크스 입문서, 넓게 봐서 사회주의체제의 토대를 이루는 철학 교과서들은, 대부분 소련 사회과학 아카데미나 동독, 중국, 주사파 NL의 경우는 평양에서 출간된 교과서들이었다. 이건 NL이건, PD건, ND건, 과학적 사회주의자건 다 마찬가지로 안고 있었던 한계였다.


학생운동권, 노동운동가들의 헌신적인 정치적 실천, 분신까지 포함한 그 숭고한 정치적 투쟁들과, 이론 사이에는, 이러한 엄청난 문화적 지적 간극이 있었다. 그것은 2014년 1월 현재 평가가 아니라, 25년 전 이야기이다.


25년, 아니 길게 잡아 30여년이 흘렀다. 한 세대가 바뀌었다. 한국 전쟁이 미친 지식인 사회, 이론가 사회, 좌파 정치권 사회, 학생운동가, 시민운동, 노동운동, 그리고 진보정당, 좌파정당... 우리가 생각한 것 이상이다.


자기들 스스로 학파를 만들어서, 지식노동이건 육체노동이건 그 무슨 노동이건간에, 학파를 형성해서, 코리아라는 한국 현실 (social reality)을 사회,사람,사회구조,의식 등을 설명하고 연구하는 사회인식론(social epistemology)를 갖추기도 전에, 90년대 긴 암흑기가 있었고, 이런 것들을 지속적으로 연구하기 전에 97년 IMF 긴축통치로 한국은 운없게도 세계에서 최단시간에 가장 살벌한 자본주의적 신자유주의 체제를, 80년대 민주화 세력 (김대중정당과 80년대 학생운동권 주류파)이 그 악날한 반-민중적 반-노동자적 어메리칸 스탠다드 자본주의를 실천해버렸다.


사람들은 자기 정치적 정당성 때문에,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신념, 정치적 방법론, 조직론, 이론적 정당화 등에 대해서 게을리 한다. 왜냐하면 현실정치는 늘 나보다 우리보다 더 나쁜 세력이 존재하고 있고, 그들이 늘 음모를 꾸미고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기 때문이다.


정치는 늘 실천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야구는 9회로 끝나지만, 정치세계는 쉼없는 연장전이다. 9회 이후에 ‘이론’으로 야구하나? 정신력으로 버틴다. 제한된 숫자 선수들로 버티는 것이다. 그것이 늘 정치적 현실이다.


하지만, 역사에서 현실에서 정치적 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현실을 설명할 인식론을 우리 스스로 가지고 있어야 한다.


돌직구 하나로 승부하는 투수보다는, 체인지업과 슬라이더를 장착하고 돌직구를 가진 투수가 실제 경기에서 이기니까.


(1922년 경, 부하린 Buhkarin 이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소련 대중들을 위해 서술한 공산주의의 abc : 마르크스 엥겔스 책들이 노동자 해방의 성전으로 격상화되기 시작했다.

 )


Posted by NJ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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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학교 평가의 논

    2014.04.15 01:50 [ ADDR : EDIT/ DEL : REPLY ]
  2. 그냥 NL이 다수를 차지하게 된건 생활 학문 투쟁의 공동체라는 학생회중심의 학생운동을 했다는점으로보고 PD는 직업적 혁명가의 길을 가려고 했다는 점에서 학생회중심의 운동이 다수를 차지하기 편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편협하게나마 듭니다만.. 뭐 주사파 논쟁은 논외로 하는것이 맞을것 같고.. 하다보면.. 한국운동권에 주사파가 존재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되어지니까요..

    그냥 지나가다 코맨트 남깁니다.

    2018.02.14 14:48 [ ADDR : EDIT/ DEL : REPL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