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비교/국제정치2020. 10. 27. 19:36
1. '우월한 유전자' 단어는 히틀러의 '아리안 종족 우월주의'를 떠올린다. 고 1때 읽은 게오르규 소설 '25시',  시골 청년 요한은 독일과 소련 점령 때문에 가정이 풍비박산났다. 예수도 그 어느 누구도 구원하지 못하는 시각 '25시'에 기독교 이름 '요한'은 살아야 했다. 

유태인이라 모함받아 독일 강제 노동 수용소로 끌려갔다. 그렇게 착취당하다가, 어느날  나치 한 장교가 요한을 독일 순수 혈통 우월한 유전자 '아리안 족'으로 선발해, 수용소에서 노동자 감시원 간부 '완장'을 차게 된다.  이 '어이없음'을  앤소니 퀸이 기가 막히게 연기했다. TV에서도 방영된 영화 '25시'에서 요한 역을 맡은 배우가 '사막의 라이언' 에서 리비아 해방군 지도자 '오마 목타르'로 나왔던 앤소니 퀸이었다.

당시 게오르규와 '25시'는 미국과 소련 냉전 대결 체제 하에 있었던 한국에서 굉장히 인기가 많았다.  게오르규가 독일, 미국, 소련 등 강대국의 압박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한국인들과 애환을 쉽게 나눴다. 게오르규는 한국 민주화 운동에 대해서 책을 쓰려고 했다.

독일 제국주의와 소련 팽창주의에 고초를 겪은 동유럽, 중유럽 국가들에 대한 재평가는 필요하다. 이야기가 길어지니 다음에 '1968년 프라하의 봄' 을 언급할 때 자세히 하기로 한다.  한국 좌파나 진보의 정서는 서유럽 좌파 지식인들보다 동유럽,중유럽의 반체제 인사의 정서와 오히려 비슷한 측면이 더 많기 때문이다. 

<우월한 유전와 IQ 성적의 기원>

고등학교 때는 생물학적 사회진화론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잘 몰랐다. IQ 검사 기원은, 1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군대를 유럽에 파병할 때, 그 자격을 심사할 요량으로 미군부가 실시한 시험이었다. 또한 지능검사 IQ 시험을 제국주의와 식민지 사람들의 차별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활용했다. 내 주변에는 IQ 160 인 사람도 있고, 나도 한 때 IQ 높다고 형제들 사이에서 괜히 한번 거들먹거린 적도 있었는데, 부끄러운 과거 아닐 수 없다.  

2.  나치 히틀러, 하인리히 힘러의 우월한 유전자 '레벤스본' 프로그램

나치 히틀러와 하인리히 힘러. '레벤스본 Lebensborn(생명의 기원, 원천)' 프로그램과,
 노르웨이 태생 프리다가 스웨덴 '아바' 멤버가 되기 까지.

스웨덴 밴드 '아바' 멤버, 프리다는 1945년 11월 노르웨이에서 태어났다. 그가 왜 스웨덴 밴드 아바 멤버가 되었는가?  

뮤지컬 마마 미아 음악으로 잘 알려진 그룹 아바의 '댄싱 퀸', 두 명 여성 가수 중에 한 명이 프리다인데, 나 역시 최근까지도 프리다를 포함 아바 멤버 전원이 다 스웨덴 태생인 줄 알았다. 

그런데 1945년생 프리다는 노르웨이에서 태어났다가, 할머니 '아니'가 프리다를 데리고 스웨덴으로  '피란' '망명'왔다. 프리다의 엄마 '지니'는 노르웨이 사람이고, 생부는 나치 친위대 SS 장교였다.  

할머니 '아니'는 독일 점령군이 물러가자, 자기 딸 '지니'가 독일군인 딸을 낳았다 동네 사람들의 비난을 피하고자 스웨덴으로 피란갔다.  

프리다의 출생 역시 '우월한 유전자'와 연관이 있다. 

생명의 원천이라는 뜻을 가진 '레벤스본 Lebensborn 프로그램.'은 히틀러와 그 부하 하인리히 힘러가 가동시켰다.  히틀러가 아리안 (Aryan ) 종족의 우수성을 과학적으로 입증시키기 위해, 선발된 '순수 아리안' 여성들과 주로 독일 나치 친위대 (에스 에스) 군인들과 '접'을 붙여 (sire), '우월한 유전자' 2세들을 생산해냈다. 

1936년 20개 레벤스본이 실제 운영되었다. 레벤스본에 '엄마'로 선발된 여성은, 블론디 머리카락 색깔에 푸른 눈동자를 소유자였다. 당시 이런 여성은 '인종적으로 순수하다'고 평가받고 각종 물질적 사회적 특권도 받았다.

이들과 접붙이 대상 (아빠)는 주로 나치 친위대 에스에스 SS 에서 차출되었다. 독일 전역 레벤스본에서 약 8천명의 '우월한 유전자' 신생아가 태어났다고 하는데,정확한 수치는 모른다. 이들 생물학적 엄마의 60%는 당시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았던 '미혼모'였고, 나머지 여성은 에스에스(나치 친위대 슈츠 슈타펠) 소속 군인의 부인들이었다. 

그런데 레벤스본은 독일에만 있지 않고, 노르웨이, 프랑스, 벨기에서도 운영되었다. 그 이유는 가관인데, 에스에스 출신 하인리히 힘러가 노르웨이 블론디-푸른 눈에 병적으로 꽂혀, 그들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하인리히 힘러는 독일 점령지 에스에스 장교들에게 노르웨이 여성과 '접붙이기'를 장려했고, 신생아들을 친위대가 교육시키려고 했다. 

당시 노르웨이는 유럽 국가들 중에 최빈국 등급에 속했고, 독일의 점령하에 있었다. 이러한 조건들을 나치 힘러가 악용해, 노르웨이 여성들이 '우월한 유전자' 아이를 낳아주거나, 나치에 '기부'를 하면, 재정적인 지원을 해줬다. 

이런 배경 속에서 미래 아바 멤버 프리다가 '레벤스본' 아이로 태어났다. 프리다의 엄마였던 지니 Synni 가 당시 독일 점령군 나치 친위대 알프레드 하제 (Haase)를 만나 낳은 신생아가 바로 미래 아바 (Abba)의 멤버 프리다였다.

프리다는 독일 패망 후, 1945년 11월에 태어났다. 프리다의 엄마 '지니'는 당시 19세였고, 프리다의 독일 이름은 '티스커바나스 Tyskerbarnas' 였다.  
프리다 본명은 아니 프리드 룅스타 (Anni Frid Lyngstad)인데, 엄마 지니 성을 따랐다.
 
하제는 독일이 패망하자 독일로 돌아갔고, 엄마 지니와 딸 프리다는 노르웨이에 남았다. 프리다는 아빠가 독일으로 돌아가다가 배가 전복해 사망한 것으로 알고 살았다고 한다. 

독일군이 노르웨이에서 물러가자, 독일군 하제 사이에 낳은 아이 때문에 '조국의 배신자'라는 사회적 지탄과 비난을 우려한 프리다 할머니 '아니'는 프리다를 데리고 스웨덴으로 먼저 도피했다. 

엄마 지니는 나중에 스웨덴으로 도망와  세 여자가 같이 살았으나, 1947년 엄마 지니는 콩팥이 좋지 않아 21세 나이로 사망했다.  할머니 '아니'는  손녀 프리다와 같이 살기 위해  바느질 노동을 해야했다.    

당시 스웨덴은 아바 '프리다'와 같은 '레벤스본' 출신 아리안족 우월한 유전자 수백명을 수용하기로 했다. 노르웨이는 이들을 스웨덴을 비롯, 브라질, 독일, 오스트랄리아 등 다른 국가로 보냈다. 
 
스웨덴을 대표하는 아바가 전 세계에 알려진 후, 1977년 프리다는 생부 알프레드 하제를 최초로 상봉하게 되었다.  (아래 사진 참조) 

히틀러와 미치광이 하인리히 힘러의 '우월한 유전자' 프로그램이라는 반인륜적 범죄 속에서도, 노르웨이에서 스웨덴으로 망명한 다음, 문화인으로 대중예술가로 살아남은 사람이 아바의 '프리다'였다. 하지만 대다수 '우월한 유전자' 아리안 족들은 '프리다'처럼 살지 못한 채 살았고, 지금도 그러하다.  


히틀러와 힘러의 '우생학' 집착은  우수종자 돼지, 강아지처럼 '접 붙이기'를 넘어서, 직접 아이들을 납치했다.  1939년 이후 하인리히 힘러는 아리안 종족처럼 생긴 아이들을 여러나라에서 직접 납치해 왔다.  폴란드, 유고슬라비아, 러시아, 우크라이나,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노르웨이 등. 폴란드, 러시아를 비롯 동유럽 국가들에서 20만명 아이들이 납치당했다.  


이들을 선별해서 '우월한 유전자 자격 미달자'는 수용소로 보내지거나 버려졌다. 우월한 유전자로 선별된 아이들은 자기 이름 대신 독일 이름을 부여받았다. 마치 일제 창씨 개명처럼. 이러한 기록과 서류 대부분은 소각되었다. 폴란드의 경우, 1만명 중, 15%만이 생부모에게 돌아갔다고 한다.

이런 비극적 사실을 고려하면, 
전 세계적 밴드가 되고 스웨덴을 상징하는 '아바'의 프리다는 운이 좋았다고 할까? 프리다 할머니 '아니'가 하인리히 힘러가 그렇게 선호했던 노르웨이를 필사적으로 탈출해 스웨덴에 정착했기 때문에 아바 '프리다'의 성공은 가능했다. 


3. 우월한 유전자, 타고 태어난 천재, 엄친아에 환호하는 한국 언론들과 일상 시민들

'우월한 유전자'를 생산하기 위해 제 2의 '레벤스본'과 같은 범죄는 다시 발생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우연의 일치인지, 올더스 헉슬리의  소설, '아름다운, 용감한 신세계 a brave new world' 의 알파, 베타, 감마 신생아 계급 이야기가 출판된 게 1932년이다.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노동자에게 가장 가혹했던 '해고 자유'를 내세운 IMF 긴축 독재 이후, 지난 23년간 한국 사람들에게 '우월한 유전자'라는 단어는 마치 생물학 교과서처럼 자연스럽게 사용되고 있고, 이를 사회적 성공의 결정적 요소로 설명하기도 한다. 


'레벤스본'을 세워 블론디-푸른 눈 여성과 나치친위대 남자를 '접붙여' '우월한 유전자'를 생산해, 전 세계의 강력한 지배자 되고자 했던 히틀러와 그 따라지 하인리히 힘러가 한국에 온다면, '거 봐라, 레벤스본, 너희들도 좋아하잖아' 말할지도 모른다. 


'느그 아부지 뭐하시노'부터 시작해서, 타고난 천재, '우월한 유전자', '엄친아' 사람을 구별하고 차별하고, 사람들 사이에 사랑과 우정을 가로막은 수많은 장벽들을 만들고 이를 즐기는 부류와 한탄하는 부류가 생겨났다.  1987년 유월항쟁으로 탄생한 '대한민국 헌법' 하에서 합법적으로, 또 당당하게, '느그 아부지 뭐하시노' '우월한 유전자'를 칭송하고 있다.  새로운 헌법이 이제 필요한 것 아닌가? 

타고 태어날 때부터 옆에 살아가는 내 친구 동료를 '있는 그대로' 친구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지 못하게 만든 이 '우월한 유전자' 맹신도들, 그들을 매일 매일 재생산해내고 희희낙락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김어준의 책, '닥치고 정치'부터 우월한 유전자 이건희 손녀를 칭송하는 조선일보까지, 그 밑바닥에는 '적자 생존'을 사회적 윤리로 격상시키는 생물학적 사회진화론이 깔려있다. 이 '우월한 유전자' 라는 신흥 도그마를 누가 즐기는가?  

 







(프리다와 그 아버지 알프레드 하제. 1978년 네덜란드 매거진 '팝 포토'에 실림

Frida and her father Alfred Haase in 1978 article from the Dutch Magazine Pop Foto.)



Adolf Hitler envisioned a perfect world filled with perfect people. He took drastic measures to eliminate those who did not fit in with his vision via the “Final Solution.” 


However, German citizens who did fit in with his view of perfection were bestowed with another fate.




Hitler enacted programs to streamline racial purity by forcing Jews, homosexuals and the disabled into concentration camps, sterilization and euthanasia.


 But for blonde-haired blue-eyed  German women who were deemed “racially pure”, they were given another “privilege.”


It was known as Lebensborn, a selective breeding camp to increase the birth rates of the Aryan race during the war years. Women were screened by doctors to ensure their Aryan heritage all the way up through their grandparents.


 Qualifying women were required to be free of disabilities or mental illness.



Members of the SS were encouraged to participate in fathering the children at Lebensborn facilities. 


There was also evidence of kidnapping children who looked close enough to the Ayran requirements and adopted by German families.


In total there were over 8,000 Lebensborn children brought into the world. It was another example of German eugenics and the architects of the program were placed on trial for war crimes following the war. 



This video goes deeper into the dark history of Nazi Germany’s Lebensborn babies.














What History Didn’t Tell Us about the Nazi “Super Baby” Breeding Program

BY MESSYNESSY APRIL 6, 2017




If there was one subject that could ever truly capture my attention at school, it was the monster story that was Adolf Hitler’s Nazi regime.


 I’ve admittedly always been a ‘bad reader’, but outside of class I devoured books on the war as a teenager and still to this day, there seems to be no end to its disturbing secrets buried beneath history’s hidden rocks. 


Today, I fell into another dark pool of World War II’s repressed footnotes by discovering the details of the Lebensborn breeding program … a story that I would only recommend for those who, like myself, have that insuppressible desire to learn history’s most uncomfortable truths.




Lebensborn, meaning “fount of life” was an SS-initiated program that encouraged anonymous births by unmarried “racially pure” women who were selected to breed with Nazi officers and secure the future of a “super race” for the German Reich. 


The program expanded into several Nazi occupied countries including Norway, France and Belgium, resulting in a shameful post-war ostracism of surviving Lebensborn mothers and the mistreatment of their displaced children across Europe after Germany lost the war.




FRIDA LYNGSTAD OF ABBA WAS A SURVIVOR OF THE LEBENSBORN



An estimated 8,000 children were born in Lebensborn institutions in Germany, up to 12,000 children in Norway and countless others across occupied countries where “super babies” had been selected become part of the German master race. 




(왼쪽에서 세번째가 프리다)


The most famous of the surviving Lebensborn children is Frida Lyngstad of the iconic Swedish pop band, ABBA (pictured third from left).




With their blue eyes and blond hair, Norweigans were regarded by the Nazi regime as especially Aryan. 


Heinrich Himmler, the head of the SS and the creator of the Lebensborn, favoured Norwegian women for his perverted program and set up the majority of its institutions in Nazi occupied Norway.




LEAGUE OF GERMAN GIRLS


독일 소녀 리그.






To counteract falling birth rates in Germany, and to promote Nazi eugenics, leaders of the League of German Girls were also instructed to recruit young women with the potential to become good breeding partners for SS officers.



A LEBENSBORN NURSERY



Young women who could prove their Aryan ancestry were given incentives for bearing Aryan children, including financial support and privileged treatment in maternity homes. For many Norwegian women, it became a survival strategy during the war, when their country was one of the poorest places in Europe. 


At a time when abortion was illegal, they could also have the option of leaving or donating their children in the Lebensborn’s special homes, where the child would receive special nutrition and an upbringing and education which reflected the Nazi way of thinking. The Iron Cross award was given to the women who bore the most aryan children.


A LEBENSBORN CHRISTENING


Due to destruction and widespread cover-up of Lebensborn records, it cannot be confirmed whether young girls were forced to mate with Nazi officers, despite strong suggestion that they were (sexual assault was almost official policy within the Third Reich).


 The program was undoubtedly however, a system of supervised selective breeding, and recently discovered records show that “some SS men did sire children in Himmler’s Lebensborn program”.


Just to remind us, I took the liberty of pulling up the definition of ‘sire’ : the male parent of an animal, especially a stallion or bull kept for breeding. 


In 1939, membership of the Lebensborn stood at 8,000, of which 3,500 were SS leaders.




HEINRICH HIMMLER PICTURED WITH HIS DAUGHTER IN 1938 IN BERLIN. (AP-PHOTO)



On 13 September 1936, Heinrich Himmler had written the following to members of the SS:


The organisation “Lebensborn e.V.” serves the SS leaders in the selection and adoption of qualified children. The organisation “Lebensborn e.V.” is under my personal direction, is part of the Race and Settlement Central Bureau of the SS, and has the following obligations:


1. Support racially, biologically and hereditarily valuable families with many children.


2. Placement and care of racially, biologically and hereditarily valuable pregnant women, who, after thorough examination of their and the progenitor’s families by the Race and Settlement Central Bureau of the SS, can be expected to produce equally valuable children.


3. Care for the children.


4. Care for the children’s mothers.


It is the honorable duty of all leaders of the central bureau to become members of the organisation “Lebensborn e.V.”. The application for admission must be filed prior to 23 September 1936.




Relationships between German soldiers and Nordic women in occupied countries were strongly encouraged, provided both parents were proven to be “racially valuable”. The program also accepted women of Aryan descent who were already pregnant or had already given birth and were in need of aid. About 60% of the mothers were unmarried and the Lebensborn allowed them to give birth secretly away from home without social stigma. In most of these cases, the mothers agreed to adoption, but not all were informed that their children would be sent abroad to Germany.



ONE OF THE LEBENSBORN INSTITUTIONS

 


The first of more than 20 Lebensborn homes opened in 1936, in a tiny village near Munich in 1941, the first institution abroad was opened in Norway.


A LEBENSBORN HOUSE IN FRANCE


In northern France, a home was opened in the town of Lamorlaye in 1944 where an estimated 200 children were born. The building (pictured above) now houses a branch of the Red Cross. The Lebensborn facilities included an on-site orphanage and offered adoption services. They were often established in confiscated houses and former nursing homes owned by Jews.




While the program initially excluded children born to foreign women and common (non-SS) soldiers for reasons of racial purity, the Lebensborn later expanded into countries with Germanic populations where parents and children were usually examined by SS doctors before admission. 


But in an even darker twist to the Lebensborn program, the strict requirements of racial purity were practically abandoned altogether by Heinrich Himmler when he took his mission to unimaginable extremes…




In 1939, under Himmler’s direction, Nazis began kidnapping thousands of children regarded as “Aryan-looking” from foreign countries, most notably Poland and Yugoslavia, but also from Russia, Ukraine, Czechoslovakia, Romania, Estonia, Latvia, and Norway – for the Lebensborn program.



Himmler reportedly said, “It is our duty to take [the children] with us to remove them from their environment… either we win over any good blood that we can use for ourselves and give it a place in our people or we destroy this blood”.


The policy of the Lebensraum had essentially given birth to the Nazi ideology of German expansionism and the regime’s plan for the genocide and ethnic cleansing on a vast scale. This was the real crime of Lebensborn, a seemingly helpful, almost innocent welfare solution for struggling women. How easily evil can disguise itself…



A NAZI NURSE SHARES THE LIGHT RAYS AS SCIENTISTS TRY VAINLY TO LIGHTEN THE HAIR COLORING OF SUPER RACE CHILDREN


An estimated 200,000 children were stolen from their parents in Poland, Russia and several Eastern European regions for the purpose of ‘Germanization’. 


They were categorised into groups from the “most desirable” to the least Aryan-looking. If they couldn’t be of use to help build Hitler’s master race, they were discarded and sent off to concentration camps. If a child was considered “acceptable” they would begin indoctrination, spending time at ‘re-education camps’ before being fostered out to German families or boarding schools where they could become culturally German. They were given new German names and forced to forget their birth parents and ancestry. Any children who fought against their indoctrination or resisted, met a tragic fate.




All records of these mass kidnappings were destroyed in the final stages of the war, which made it near impossible to locate and identify children or even know exactly how many were taken. The Polish government has claimed that less than 15% of 10,000 children were returned to their biological parents.



Of the Norwegian children that were born into or indoctrinated under the Lebensborn program, the Norwegian government was able to recover all but 80 after the war. Local communities who had lived in starvation for most of the occupation, sought revenge on both the mothers and children of the Nazi maternity homes where members had received the best treatment available.




The press reported on the unusually well-fed “super babies” that had received two baths a day. Lebensborn mothers were publicly beaten, shamed, ostracized and often sentenced to slave labour. 


The “superior” children who had effectively become German under the Third Reich’s program, were considered outcasts and placed in orphanages or even in insane asylums where they would be relentlessly bullied and abused. The Norwegian government itself even attempted (unsuccessfully) to deport the Lebensborn children to Germany, Brazil, and Australia.



Sweden took in several hundred unwanted children from Norway, including future ABBA singer Anni-Frid Lyngstad, whose father was a German sergeant. Her widowed Norwegian mother escaped persecution after the war and took Anni-Frid to Sweden, where their personal history could not be traced.




In 2008, a group of survivors brought a case before the European Court of Human Rights to fight the Norwegian government into admitting complicity in their mistreatment, revealing shameful details of the program’s aftermath. The case was dismissed with a compensation offering of £8,000 from the Norwegian government.



Associations have since been formed to help survivors identify their origins through documents administered by the International Tracing Service and the German Federal Archives. 




There are so many facets of war that have been under-reported, swept under the carpet and left out of the history books, in large part due to the fact that we find them uncomfortable to talk about. I consider this sort of taboo historical knowledge as further education; a most fundamental one, that can help us identify dangerous patterns in society and recognise early on when history might be dangerously close to repeating itself.



Archive image sources: Histomill, Bytes Daily, DW.com.


https://bit.ly/3jtmw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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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ctims of Hitler's plan for a master race

Climate of shame suppressed discussion of Third Reich's social impact
German nurses take babies out for fresh air in the grounds of a former hotel in the Bavarian resort of Bad Wiessee in June 1945
German nurses take babies out for fresh air in the grounds of a former hotel in the Bavarian resort of Bad Wiessee in June 1945. Photograph: William Allen/AP
 in Wernigerode
Mon 6 Nov 2006 09.36 GMT

The Lebensborn Kinder - a long hushed-up aspect of Nazi history - were born in special maternity homes, places where mostly unmarried women and the wives of SS men gave birth to children with "good Aryan" blood.


Now in their 60s, a group of these children met this weekend in the eastern German town of Wernigerode, telling their stories in the hope of quelling the taboos and flamboyant myths about the murky Nazi institutions.


"It's high time to tell the truth," said Gisela Heidenreich, one of the 37 Lebensborn (source of life) children who travelled to the quiet town. 

"There's been too much talk about Nazi babies, women being kept as SS whores and tall blond people being bred."


The assembled group, who have travelled from far and wide, are notable for their diversity - a far cry from stereotypes of any unified Nazi master race. While a few have light blond hair, most are now grey.


Walking down the leafy streets after visiting Wernigerode's Lebensborn home, Gisela described the confusion she and her peers have suffered. 

Her eyes blazed as she spoke of the web of lies that dominated her childhood. 

First she was led to believe that her birth mother was an aunt. She was later told that her father, a married SS officer, was dead. She woke up to the fact that all was not as it seemed when she was four and heard her uncle refer to her as "an SS bastard".


"That was the first time that my world fell apart.

 My second shock came when I was a teenager and found out through mere coincidence that my father was alive," the tall, blond woman explained. 

"I've learnt that this feeling of deep uncertainty about my identity is typical of us Lebensborn children. So many felt that something was wrong before they discovered the truth."


For decades after the second world war a climate of shame suppressed discussion of the social impact of the Third Reich. 

That meant that many Lebensborn children only recently discovered their roots - especially those who grew up in the former communist east. 

Among those, some were astounded to read about their background in their Stasi secret service files, which were made public after the reunification of Germany in 1990.


The children represented a traumatic chapter in 20th century history and were often shunned by society. 


Kikki Skjermo, a lively woman who travelled here from Norway, described being stigmatised as a "Nazi child" during her childhood in a Norwegian children's home.


 When she later found her own mother she also met a wall of coldness. "She only touched me once, gently on the nose. I can remember that day so clearly," Kikki said.


The weekend meeting of the group called Lebensspuren (traces of life), is full of similarly painful stories. 


Since its creation four years ago, its members swap stories about tracing relatives and dealing with rejection and lies. 

There is the odd happy tale of reunited families, but for many it has been a battle against taboos and misinformation.


Folker Heinecke was only two years old when he was kidnapped in what is now Ukraine by Nazis because of his Aryan looks. 


He thinks his real name is Aleksander Litau. After growing up in East Germany, he was only able to search for his family when the wall came down.


He travelled to the rural town in Ukraine where records suggest he was found. "I walked around and, even though I have no memories of living there, it somehow felt strangely comfortable to me. I was sent to some houses where children were meant to have been kidnapped - but no one knew anything," the smartly-dressed 66-year-old said. "I'll keep looking."


Hartmut Mueller, who is sitting in front of him, nods and reaches over to hold Folker's hand. "I know what that's like. I know I've got two other siblings but I just can't find them anywhere."


In Wernigerode, the Lebensspuren organisers want to create a museum in the inconspicuous cream-coloured house that was formerly a Lebensborn home. The last Lebensborn baby was born there in 1945. 


It was kept as a maternity clinic for years afterwards - partly because the Nazi era equipment had been state of the art. When the home was cleared out in 1990, books were found listing the births which had taken place there.


Standing on its front lawn, a member of the Lebensspuren board stresses how important it is to document what happened, but always with a nod to the larger tragedy of Hitler's regime. The museum must remind future generations, "but certainly not stand as any sort of memorial", he says. "That is the crux of the dilemma for this generation. They are victims but at the same time, the children of criminals".


This unwieldy historical baggage impels Gisela to take her story to pupils in schools and colleges. 

"We all need to be aware of what happened, especially the younger generations," she said at the meeting. 

"The story of Lebensborn is so important because it's about families; mothers, fathers, children, it's something they can empathise with."


And for her - as with others gathered in the room - telling the truth is all-important. As she gives an impassioned speech to the crowded room, it is clear how her ruptured history has dominated her life. And her chosen career comes as little surprise - family therapy.


Backstory


Lebensborn, which means "source of life", was a programme created by Heinrich Himmler, Adolf Hitler's right-hand man. 


It was designed to boost the German population by encouraging citizens, especially SS members, to have more children.


 SS officers came under pressure to have four children, inside or outside marriage. 


Ten maternity homes were set up across Germany where 8,000 to 12,000 Lebensborn Kinder were born. 


Some stayed with their mothers, but many were adopted by families of SS officers. About 60% were born to unmarried mothers, the rest to wives of SS men. 


As the Third Reich expanded, Lebensborn homes were set up across Europe.


 In Norway some 10,000 babies were born, most fathered by SS officers to Norwegian mothers.


 There were also cases of children with "Aryan" characteristics being kidnapped from their homes in occupied territories.


Posted by NJ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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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정치/민주당2019. 12. 10. 20:22

이번에도 최장집 교수의 발표는 모호하고, 비판의 촛점을 잃었다.  DJP 연합은 1998-2002 집권과정에 와해되었는데,연합정치의 성공인양 과대평가했다. 현재 민주당은 중도 리버럴인데, 정의당 녹색당 노동당 같은 진보정당과 구별하지도 못한 채 '진보' 개념을 사용함으로써, 최교수의 비판 대상이 누가 누군지 헷갈리게 만들었다. 



문성근의 100만 민란을 '좌파 포퓰리즘'이라고 명명했는데, 이는 잘못된 개념 작성이고, 문성근에 대한 과대평가다. 


1987년을 절차적 민주주의 완성으로 봤는데, 1987년 대선에서도 드러났듯이, 프랑스 헌법을 가장 많이 참고했다는 제6공화국 헌법에서는, 막상 프랑스 헌법의 진수였던 '대통령 결선투표제도'를 누락시켜, 광주 학살 주범 노태우를 당선시켰다. 



최장집의 이분법 '1987년 민주화'와 '87년 이후 민주주의 공고화(consolidation=심화시킨다는 뜻임)', 이런 이분법은 마치 1987년이 절차적 민주주의 완성으로 해석하게 만드는 착시를 낳는다. 


이런 오류들 이외에도, 최장집은 로버트 달의 '다원주의적 민주주의'를 다른 민주주의 관점들보다 우위에 놓는 맹신을 보여준다. 하지만 로버트 달의 다원주의적 민주주의의 장점도 있지만, 그것의 한계도 명료했다.  수퍼 부자나 금융,독점자본가의 전횡을 막지 못했고, 여전히 풀지 못하고 있다. 


신문 기사들을 근거로 몇 가지를 지적하면 다음과  같다.


1.  최장집 교수의 모호한 개념 "진보", 그리고 민주당과 조국에 대한 방향타 잃은 비난. 결과적으로 정의당에도 도움이 안되고, 시민들의 참여민주주의 발전에도 별로 영감을 주지못한다.


안철수와 같은 배를 탔던 최교수 자신의 정치적 결정에 대한 자기 비판서는 없다. 그게 선행되어야 민주당이건 정의당에 대한 비판에 힘이 실릴 것이다. 이것 없이 중앙일보 등에 민주당 586들을 비난하는 글을 실었는데, 비판 촛점이 너무 빗나갔다.


우선 먼저 지적할 것. 언론이나 최장집 교수 등이 먼저 민주당을 '진보'라고 하는 것을 고쳐야 한다. 물론 당 이름에 '진보'라는 단어는 쓸 수 있다. 캐나다 보수당 이름이 '진보 보수당 PC : progressive conservative'이다. 사실 '진보'는 아무나 쓸 수 있다. 하지만 한국적 정치 상황에서는 크게 3가지 이념적 분류가 가능하다. 자유한국당=보수, 민주당=중도 리버럴 liberal, 정의당 등 진보정당 = 좌측 정당이다.


두번째, 민주당 586이나 문재인 대통령을 '선악 구도'로 정치한다고 비난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자유한국당도, 정의당도 자기 정당 이념에 근거해서 '정치적 선악'을 구분한다. 이런 이데올로기 (정치적 가치관과 관점)가 없다는 정당정치는 불필요하다. 그냥 중세 교회나 조선시대 유교통치를 하면 된다.


세번째, 최장집은 운동권의 분화를 전혀 설명하지 못한다. 1970-80년대 학생운동권은 변절한 김문수는 자유한국당에, 전대협 의장 이인영 그룹은 민주당에, 진보좌파와 급진민주주의를 표방하는 학생운동권은 정의당, 노동당,녹색당 등에 포진되어 있다.


최장집의 아래 저 문장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1) 학생운동권 중에 한국 정치를 지배하는 정치계급 (the ruling class)는 민주당586 그룹이다. 


2) 그 뒤에 나오는 문장은 해석논란이 많고 넌센스 문장이지만, 굳이 해석해보자면, 이성적 이념에 근거한 급진주의 (radicalism) 태도를 가지고, 세금과 같은 소득재분배, 노동소득과 같은 소득분배, 부동산과 같은 자산 재분배를 포함한 인민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집단이 있다. 이들은 속칭 민주당도 자유한국당도 아닌 정의당을 포함한 ‘진보정당들’이다.


2. 또 다른 최교수 문제점을 보자.


(1) 이번 조국 논란에서 조국 교수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지만, 최장집의 조국 교수의 “진보집권플랜” 책을 독일 칼 슈미트와 유사하다고 한 점은 적절하지 않다.


조국이 ‘진보 대 보수’ 개념틀의 상충을 사용했더라도, 그가 보수의 정치적 숙청이나 법실증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장집은 “다원적 통치체제로서 민주주의”가 마치 “직접 민주주의 =다수 인민 총의”보다 더 나은 것이라고 전제하고 있는데 이는 타당성이 떨어진다.


(2) 알려졌다시피 최장집은 로버트 달 (Robert Dahl)의 ‘다원주의적 민주주의’를 신봉한다. 하지만 그 다원주의적 민주주의 실제 내부를 살펴보면, 미국의 수퍼 파워 엘리트, 부자, 월스트리트 금융자본가가 다원주의를 오히려 파괴하고 ‘정치와 경제’를 독점하고 있다. 이런 경향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비판해야 하는데, 이 비판적 기준이 명료하지 않다.


그리고 직접민주주의는 끊임없이 간접민주주의, 대의제 민주주의 (총선,대선 등)를 개선해나가는데 하나의 지표가 될 수 있다. 최장집은 이러한 직접민주주의를 ‘전체주의’로 매도하고 있는데, 이는 근거가 빈약하다.


스위스는 주민 선거가 가장 많은 국가들 중에 하나다. 선거제도가 ‘간접 대의제’이지만, 직접민주주의 근사치가 되도록, 주민들 의견들을 여러가지 방식들을 만들어서 묻는 것이다.


소환제, 국민과 직접 소통, 시민들이 행정, 입법, 사법 위원회 참여 등 직접 민주주의 요소들을 제도화하는 것은 한국 민주주의자들에게는 필수 과제이다. 이런 직접민주주의 정신은 전체주의와는 인연은 없다.  




관련 기사



https://news.joins.com/article/23652334?fbclid=IwAR2EwzA5eXMH-iolzam5XIxWVPYvlD5rSi_n799pTfyXD5sTF3-Iq2JKJZM





Posted by NJ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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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은 촛불 민심의 진의를 똑바로 봐야 할 것이다. 좁쌀 같은 정치 기술자 그만하라 ! 


박지원, 탄핵 할레루야? 탄핵 니르바나? 새누리당 의원들 중 탄핵하면 “천국”이라고? 새누리당 김무성이 ‘탄핵’ 이외에 국회의원직 ‘안전고용’ 대안있나? 없다. 김무성 유승민 나경원이 살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탄핵’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탄핵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박근혜와 함께 영원히 저주의 똥물로 빠져 질식사당할 것이다. 


박근혜 탄핵은 한국 민주주의 복원의 한 과정이고 예비 조건일 뿐이지, 충분조건이 아니다. 촛불 민심은 지난 박정희 독재시절부터 켜켜히 쌓인 온갖 반-민주적이고 반-민중적인 반-문명적인 부패한 한국 지배엘리트 (재벌, 군부, 검찰, 국정원, 행정관료, 경찰, 국세청,반노동자적 조합들 등) 질서를 뿌리로부터 바꿔라는 것이다. 


박지원이 “히틀러와 싸우기 위해서 소련 스탈린과 손을 잡아서 전쟁을 이겼습니다.” 히틀러가 박근혜이고, 소련 스탈린이 새누리당 김무성인가? 아니다. 그리고 히틀러 인종주의 나치즘과 싸우다가 죽은 2천 700만 소련 민중들이 무덤에서 들으면 개코웃음을 칠 것이다. 


박지원은 과장하지 말라는 것이다. 박근혜를 퇴진시키려고 하는 시민들의 촛불과 시위, 그 열매를 그 과실을 박지원이 몽땅 아주 몽땅 쓸어 담겠다? 떡고물은 김무성 떼어주고서, 이미 망해버린 김대중의 ‘동서화합, 동진정책’의 일환이다. 비록 틀렸지만 김대중은 자기 개인 명분이라도 있었지만, 박지원이 그런 대의명분이라도 있는가?  


새누리당 비박 김무성, 유승민, 나경원 등은 조선시대 같으면 머리를 풀어헤치고 3일간 대성 통곡을 하면서 자기 반성을 하는 과정에서 ‘탄핵’ 표를 던져야 한다. 그렇게 해도 시원치 않고 충분하지도 않다. 김무성과 나경원, 유승민등이 지난 10년간 파괴한 언론(인)의 자유, 대학 학문의 자유, 평화로운 한반도에서 살 자유, 이런 자유들을 얼마나 자기 멋대로 파괴했는가? 중고등학교 학생들도 먹기 싫다는 친일 뉴라이트 역사교과서나 억지로 강제로 고문해서 입을 처 벌리게 해서 쑤셔넣지 않은가? 


촛불 민심은 똑똑히 봐야 한다. 누가 전 세계적으로 가장 아름답다고, 쓰레기까지 다 치우고 가는 이 용감하고 멋진 촛불 시위 열매를 썩게 하는지, 아니면 한국 민주주의의 복원과 부활이라는 과실을 낳게 하는지, 똑똑히 지켜보고 다시 행동할 것이다. 


<참고> 새누리당 비박 김무성 나경원 노선과 목표 -> http://bit.ly/2gFXnUL







Posted by NJ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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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노트(독후감)2016. 4. 25. 06:49
브라운탈의 논문을 읽고 -  메모
내가 파악한  히틀러 등장 전후 독일 사회주의 노동운동의 실패 교훈은 다음과 같다

1) 독일 당시 사민당 (사회주의자 사민당 )과 공산당, 그리고 사민당을 지지한 노조대표들은 나치의 정체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공동의 정치적 적 앞에서 연대하지도 못했다.

2) 폰 파펜, 폰 쉴라이허, 히틀러 등 정치적 의도들을 파악하지 못한 채, 노조 대표자들과 노동운동가들은 '총파업'과 같은 즉각적인 행동 개시를 통해서, 나치의 세력 확대를 막아내지 못했다. 정치적 대기주의에 경도되었다. "사태 추이를 지켜보자 wait and see" 전술을 채택하고 말았다. 
군부와 노동자들 사이에 시민 내전이 발발하지 않을까 두려워만 했지, 노조와 사민당 (혹은 공산당)의 강력한 연대에 근거한 단기적 중기적 정치 계획이 없었다.
 
브라운탈의 논문을 요약하면서 몇 가지 역사적 사진들을 덧붙여보기로 한다. 

논문 제목: The failure of socialist labor : 
저자: 게라트 브라운탈 Gerard Braunthal, “The German Free [Socialist] Trade Unions during the Rise of Nazism,” Journal of Central European Affairs, XV (January, 1956), 339-353. 

어떠한 정치적 교훈을 얻을 수 있는가? 

브라운탈의 설명 :

바이마르 시대와 파시즘 시기 3가지 노동운동 노조 정치 이념들 (이데올로기)  
1)사회주의자 노동운동 (SPD 사민당:*사민당과 독일 공산당 KPD은 당시 사이가 좋지 않음) 
2)기독교 연합-카톨릭 사회 행동 (Christian union-Catholic social Action)
3)히르쉬 둥커 유니온 Hirsch Duncker Union (맨체스터 리버럴리즘 Manchester Liberalism) 

조직화 정도는 다음과 같다. 
아데게베 (전노총: 전국 독일 노동조합 총연맹) Allegemeiner Deutscher Gewerkschaftsbund
(ADGB) -전국 조합원 숫자는 500만이었다. 

아에프아  AFA: (월급쟁이 자유 총연맹: Allgemeiner freier Angestelltenbund : 50만 조합원

아데베베 : ADBB : Allgemeiner –Deutscher Beamtenbund: 전국 공무원 노조 : 17만
3개 노조 총연맹은 전체 노동자의 25%를 대표했다. 

미국과 달리 독일 노조는 사민당(SPD)과 강한 연계를 맺고 있었다. 1920년 우파 카프 푸취 ( Kapp Putsch) 쿠데타가 발생했을 때, 노동조합원들은 총파업을 실시해 그 쿠데타를 막아냈다. 
“자유” 노조 총연맹들의 조합원들과 노조 대표들은 사회주의자였고 동시에 당시 공산주의자와 파시스트들의 강력한 경쟁자들이었다. 

당시 독일 정치 경제적 조건은 어떠했는가?

바이마르 공화국 후반기 민주주의가 위협받자, 사회주의 노동조합 운동의 열기는 식기 시작했고 거의 마비 상태에 빠졌다. 자본주의 대공황이 발생하자 조직 노동자들은 중차대한 문제에 직면했다. 실업이 치솟았고 독일 경제 생존 자체가 위험에 빠졌던 것이다. 

폰 파펜 (Von Papen), 폰 쉴라이어허 ( von Schleicher), 히틀러 등 권위주의적 정권들 하에서 과연 사회주의자 노동조합들은 무엇을 했는가? 


(사진: 1933년 1월 30일. 히틀러 (가운데), 오른쪽 폰 파펜이 앉아서 뭔가를 이야기하고 있다) 

1. 파펜 쿠데타: 

1932년 7월 20일 독일 수상 프란쯔 폰 파펜이 오토 브라운 (사회 민주주의자)이 이끌었던 프러시아 연립정부를 축출했다. 이 보수적 폰 파펜은 이 사실을 사회주의자들과 노조에 보고도 하지 않았다. 폰 파펜은 장관 8명을 해고해버렸고 이 해고자들은 이 문제를 대법원에 소송했다. 폰 파펜의 쿠데타는 독일 파시즘의 중요한 시발점이 되었고 정치에서 ‘불법’이 횡행하는 출발점이었다. 


(1934년 1월 1일, 폰 파펜은 히틀러 체제하에서 부수상이 되었다. 그의 아내 마르타와 함께 베를린에서 어린이들을 위한 한 행사에 참여해, 아돌프 히틀러와 함께 인사하고 있다) 


독일 사회주의자 노조들은 이러한 폰 파펜의 쿠데타에 대해 어떻게 저항했는가?

소수지만 몇 개 공장들에서 평조합원들을 중심이 되어 작업을 중단했다. 지멘스와 이.게. 파르벤 베를린 노동자들은 노조 대표들의 지침을 듣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준-군사조직체이자 사회주의 주도 방어 조직인, 철의 연대 전선 노동자들 역시 베를린에서 노조 대표들의 지침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데게베 (전노총)도 사회민주주의 정당 (에스.페.데)도 어떠한 행동 개시도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실업이 치솟고 있는 상황에서 파업이나 정치행동은 노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실업 증가와 정치적 패배주의가 얽혀서 결국 정치적 대기주의가 노동조합 대표들과 사민당 에스페데에 널리 퍼지고 말았다. 

철도 노조 역시 투쟁의지가 높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실업자들이 그 노조조합원들의 직장을 대체해버릴까봐 우려했기 때문이다. 또한 폰 파펜의 쿠데타가 합법이냐 불법이냐를 놓고 노조 대표자들과 사민당 내부에서 그 의견들이 분분했다. 폰 파펜 쿠데타에 대한 의견 불일치 독일 전노총과 사민당의 정치적 대기주의를 부추겼다. 


(사민당 오토 벨즈, 나치 히틀러가 집권하자 저항하다가 결국  파리로 망명했다) 



1932년 7월 21일 독일 사민당은 긴급회의를 열었다. 그러나 직접 행동은 개시하지 않았다. “사태 추이를 지켜보자 wait and see ” 전술을 채택했다. 다음 세 가지 이유들 때문이었다. 10일 후에 있을 7월 31일 선거에서 좌파 정당들이 다수당이 될 것이고 파시즘 지지는 잦아들 것이라고 예측했다. 두번째는 노동자들과 군대(라이히스베: Reichswehr)와의 충돌과 시민 내전을 예방하고자 했다. 세번째는 폰 파펜이 히틀러의 권력 장악을 막아낼 것이라는 내다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7월 31일 독일 총선 결과는 사민당, 전노총 대표들의 예측과 달리 나치가 제 1당이 되고 말았다) 


사민당 (SPD)은 독일 공산당의 총파업 제안 역시 거부했다. 그 이유는 독일 공산당이 나치가 1931년에 프러시아 정부에 반대하기 위해서 ‘국민투표’를 두고 서로 협조했다는 것이다. 

사민당 대표 오토 벨스 (Otto Wels)는 유혈사태를 우려해 노조와 정당의 직접적인 행동에 찬성하지 않고, 그들의 목소리들을 체계적으로 낮춰버렸다. 프랑크푸르트 노조 위원회 의장 오토 미스바흐 (Otto Misbach)는 성공하지 못할 정치적 행동은 하지 말라고 했다. 철강 노조 대변인이자, 프랑크푸르트 ‘사회주의자 정치부대 라이히스바너 Reichsbanner (검정-빨강-황금색  배너) 위원회 대변인인   물란스키 (Mulanski)는 노동자들이 데모 장소로 이동할 수 있는 운송 수단이 충분하지 않다는 식 발표만 해버렸다.

(검정-빨강-황금 3가지 색깔 배너. 통일, 권리와 자유를 상징함) 



 ‘철의 전선 (Eiserner Front) 집행위원들’ 역시 코커스를 개최했는데, 여기에서도 대부분 사민당 대표들과 노조 대표들은 즉각적인 총파업은 시민 내전으로 비화할 수 있다고 우려를 표명했다. 이에 반대해  라이히스바너 대표 칼 횔터만 (Karl Höltermann)과  월급쟁이 노동조합 (AFA) 대표  지그프리트 아우프호이저(Siegfried Aufhäuser)는 최소한  파업과 같은 데모를 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사민당과 노조 대표단은 이들의 제안 역시 거부했다.


(철의 전선, 아아세너 프론트로 ! 1932년 슬로건) 


7월 20일과 21일 베를린 노조 대표들은 파업촉구 (provocateur)에 대한 경고조치를 내렸고, 합법노조를 준수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폰 파펜의 행정 장관 8명 해고에 대한 대법원의 결정을 기다려보자고 했다. 

결국 사민당과 노조 대표들은 세 차례 회의를 거쳤으나 그 결론은 ‘사태 추이를 지켜보자 wait and see’이었고, ‘총파업’과 같은 직접 행동 반대였다.

그러나 1932년 7월 31일 나치는 총선에서 더 많은 의석을 얻었고, 바이마르 공화국의 허약한 구조를 깨뜨리고 있었다. 

논문 저자 게라트 브라운탈(Gerard Braunthal)의 평가는 다음과 같다. 나치의 총선 승리를 가져다 준 것은 노조, 사민당에 1차 책임이 있다고 봤다. 

1932년 폰 파펜의 쿠데타 시기에 드러난 사민당과 노조의 ‘리더십’ 위기가 가장 큰 책임이 있다고 본 것이다. 파시즘 세력은 커져가는 반면에 노조와 사회주의자 사민당은 소수파 (행동파)와 다수 온건파로 분열되어 총파업과 같은 직접 행동은 보류되었다. 결국 사민당과 노조 대표들은 총파업 강행을 거부했고, 대규모 군중 시위 조직화 역시 거부했다. 이 같은  사민당과 노조 대표들의 소극적 대처와 정치적 대기주의는 반파시즘 운동을 약화시켰다. 

2. 두번째 국면: 쉴라이허 정권  The Schleicher Regime 하에서 사민당과 노조대표들의 대응은 어떠했는가? 


(폰 쉴라이허와 폰 파펜 )


1932년 12월 3일 폰 파펜 정권 하에서 국방장관이었던 쿠르트 폰 쉴라이허가 수상직을 승계했다. 쉴라이허는 히틀러를 제거하기 위해서 군대 장군들의 지도하에 노동정부를 수립하고자 했다. 군대와 노동운동(노동조합)을 결합시켜 히틀러 파시즘을 제거하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쉴라이허 발상은 실패했다. 그 이유는 군부는 폰 파펜, 괴링, 히틀러의 연합을 원했기 때문이다.  

쉴라이허는 나름대로 나치 온간파와 강경파를 분리하기 위해서 온건파에 속하는 그레고 쉬트라세 (Gregor Strasser)와 협상에 나섰지만, 이후에 쉬트라세의 세력이 나치 내부에서 점차 힘을 잃어버려서 쉴라이허의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또한 쉴라이허는 노동조합(노동운동)과 사민당 (정치)를 분리시켜 노동 총연맹을 건설해서, 이를 중심으로 나치 세력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짰다. 또한 길드 (Guild)를 강조해서 경제 체제를 길드로 전환하려고 시도했다. 노동조합을 기반삼아 코포라티즘 정부를 건설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수상 취임 5일 전,  1932년 11월 28일 쉴라이허는 아데게베 (전노총) 위원장 테오도르 라이파트(Theodor Leipart) 등 노조 대표들을 개인적 모임에 초대해 그를 격려하고 칭찬하기도 했다. 


(테오도르 라이파트 Leipart , 독일 전노총 대표) 


그러나 이러한 쉴라이허의 계략을 알아챈 사민당 (SPD) 은 전노총 대표 라이파트에게 압력을 가하면서, 노동조합과 정당을 분리시켜내려는 쉴라이허에 저항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쉴라이허와 노조 대표들인 라이파트, 빌헬름 에거트 (Eggert) 사이에 정치적인 거래가 오고갔다. 폰 파펜 정권이 대규모 임금 삭감을 감행했고, 이와는 대조적으로 독일 대토지 계급 융커 Junker 에게는 혜택을 주자, 쉴라이허는 9월 5일 경, 이러한 폰 파펜 결정에 대한 노동자들의 불만을 자신에게 제출해달라고 라이파트와 에거트에게 제안했던 것이다.

라이파트와 에거트는 이러한 쉴라이허 제안에 화답하며, 주요 기업들의 사회화를 제안했고, 대규모 공공 노동 프로그램을 실시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러한 요구를 쉴라이허가 수용하면 라이파트와 에거트는 그를 지지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12월 3일 쉴라이허가 수상직을 계승하고 대부분 보수적인 행정 장관들을 유임시키자, 사민당과 다른 정당들은 쉴라이허 정권을 지지하지 않기로 했다.

3. 세번째 국면: 히틀러와 나치의 등장

1933년 1월 28일에 폰 파펜 측근들은 쉴라이허의 사임을 요구했다. 1월 30일 역사적인 날이 오고 말았다. 대통령 힌덴브르크 (Hindenburg)는 “헌법을 수호하겠다”고 맹세한 아돌프 히틀러를 새 수상으로 임명하고 말았다.

(1933년 5월 1일, 메이데이. 파울 폰 힌덴브루크 대통령과 아돌프 히틀러가 베를린에서 메이데이를 경축하고 있다.) 



논문 저자 게라트 브라운탈 평가:  어떻게 해서 독일 나치 파시즘, 히틀러는 권력을 장악했는가? 

독일 노조들은  총파업과 같은 즉각적인 정치 행동을 개시하지 않음으로써 독일을 나치 파시즘으로부터 독일을 구출하지 못했다.  총파업과 같은 즉각 행동을 반대한 독일 노조 대표들은 만약 총파업에 나섰을 경우, 군부가 노동조합을 탄압할 수 있다고 판단해버렸다. 할 가능성을 들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 수상이 되었다. 

당시 사민당과 독일 노조 대표들은 아돌프 히틀러의 전체주의 속성을 간파하지 못했다.
또한 그들은 히틀러가 권좌에서 곧 내려올 것이라고 예측했다.

노조지도자들은 반파시즘 운동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지 못했다.

독일 노조들은 1930년대 미국처럼 “뉴딜 New Deal”을 요구하지도 않았고, 스웨덴 노조들의 정치적 요구들도 하지 않았다. 또한 독일 사민당과 공산당이 서로 차이를 줄이고 모두다 반 나치즘 반파시즘 전선으로 나가도록 두 정당들을 독일 노조들은 추동하지도 않았다. 노조 대표들은 아돌프 히틀러가 노동조합 조직들을 파괴할 것이라고 상상하지도 못했기 때문에, 어떠한 데모도 하지 않고 ‘사태 추이를 지켜보자 wait and see’ 전술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돌프 히틀러가 수상이 된 다음 날, 1933년 1월 31일, 전노총 (ADGB)은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했다. 반정부 태도를 가진 노동자들 심정을 이해한다. 그러나 그것은 위험하고 오히려 노동자 이해에 반하는 것이다. 아돌프 히틀러 정부는 과도기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반동 정부라 할지라도 노동운동과 노조를 파괴하지는 못할 것이다. 

노조 대표들은 아돌프 히틀러에 대해 오판했다. 그 이유는 ‘두려움’ 이다. 노조 대표들은 어떤 두려움에 떨고 있었고, 이러한 두려움을 떨치지 못했기 때문에 정치적 오판을 한 것이다. 

1933년 2월에는 노동자들 사이에서 저항이 터져나왔다. 괴링(Göring)은 독일 좌파들을 때려 부수기 위해서 준 군사조직인 SA와 SS (폭풍 부대: 쉬투름압타이룽 Sturm-abteilung :SA, “방위군 : 슈츠쉬타펠 Schutz-staffel )를 창설했다. 노동자 일부는 이러한 괴링에 저항했다. 또한 베를린 섬유 의류 노동자들과 인쇄 노동자들은 사민당과 공산당 (KPD)가 서로 협력해서 나치에 저항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노조 대표들은 이러한 두가지 요구들을 수용하지 않았다. 

1933년 3월 5일 선거에서 나치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정당NSDAP) 는 승리했다. 10일 이후 독일 노조 대표는 노조가 정치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노조는 3월 5일 총선에서는 사민당을 지지했으나 그 이후 중립적 태도를 취하다가 결국 나치에 굴복했다. 하지만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는 이러한 굴복적인 독일 노조에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나치는 독일 노조를 파괴했고 노동운동가들을 잡아가두기 시작했다.

1933년 3월 8일 베나우 (Bernau) 소재 노동조합 학교에 괴링 나치 준군사조직 SA와 SS가 침입했고, 노동조합 건물들에 난입하거나 노조 신문과 언론들을 탄압했다. 

이러한 나치의 노동운동과 노조에 대한 탄압이 자행되는 가운데도 노동 운동 내부에서는 나치에 대한 통일된 평가와 판단이 없었다. 심지어 허만 젤바흐 (Hermann Seelbarch)는 전노총 노조간부 학교 교장이면서 동시에 나치 당원이었다. (* 의심이 든다: 나치가 노조에 직접적으로 조직원으로 개입했을 수도 있다) 젤바흐와 같은 자들은 노조와 나치와의 타협을 유도해냈다. 히틀러의 정치 조언자였던 칼 쉬미트 (Carl Schmitt)의 측근이었던 후버(E.R.Huber)는 노조는 제 3 제국 (the Third Reich)의 협력과 조정 하에서 합법적인 공적 조직(제도)이라고 주장했다.
 


(1933년 5월 2일 베를린 엥겔스우퍼에 있는 한  노조 사무실에 침입하는 나치 폭풍부대 SA ) 


브루크너 (Bruckner)가 대표로 있던 ‘독일국가사회주의 공장 세포 조직 NSBO’가 전노총 대표들과 임금 및 노동 현안들을 협의했고 통제했다. 라이파트는 전노총 대표 사임을 거부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1933년 3월 28일 AFA 는 나치에 굴복했고, 4월 6일 공무원 노조는 해산했다. 노동절 (MAY Day) 이름은 ‘국가 노동일 National Labor Day’로 개명되었다. 4월 15일에는 전노총 (ADGB)가 나치에 굴복하고 말았다. 4월 19일에는 완전히 굴복 단계로 발전했고,  나치의 지원하 5월 1일 메이데이를 환영한다고 공식 노조 홍보물에 발표했다. 

심지어 전노총은 나치당과 국가사회주의에 사회주의 요소가 있다고 인정했다. 결국 독일 노조들은 국가사회주의 나치에 완전히 포섭되었고 패배했다. “국가 사회주의 승리는 우리의 승리이기도 하다. 사회주의 임무는 전체 국가에 있다” 이런 식으로 노조의 나치 지지를 정당화했다.

하지만 아돌프 히틀러, 괴벨스, 나치는 이러한 노조의 굴복에 전혀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나치 정권은 5월 13일 테오도 라이파트, 그라스만 (Grassmann), 비젤 (Wissell)등 전노총 노조 대표자들을 체포했고, 노조 건물 등 재산들을 몰수해버렸다. 이러한 사회주의자 노조들 뿐만 아니라, 기독교, 자유(리버럴) 노조들 역시 나치는 가만 놔두지 않고 탄압했다.

이후 나치 독일 노동 전선 (DAF)이 만들어졌고, 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독일 노동자를 대표했다. 

그렇다면 1920년대 독일 사회주의자들 (사민당)은 왜 나치와 타협했는가? 대공황 국면이 닥치자 노조는 도덕적 해이되어 경제적 이기주의에 빠지고 말았다. 또한 나치의 정체성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채 총파업과 같은 행동을 전혀 개시하지도 못했다. 나치가 민주적 제도인 ‘노조’를 파괴할 것이라고 예상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게라트 브라운탈은 이러한 진술들은 정치적 변명에 불과하다고 평가한다. 왜냐하면 당시 전노총을 비롯한 노조 대표들은 사민당과 협력해서 독일 내부에서 정치적 힘을 발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바이마르 공화국도 독일에서 가장 큰 규모의 민주적 조직이었던 노조도  내부로부터 썩어들어갔기 때문에, 나치와 같은 정치 세력이 등장했을 때 독일을 파시즘으로부터 방어해내지 못한 채 오히려 히틀러에 굴복하고 말았다. 독일 민주 체제 (정치)와 독일 노동 운동이 강력하게 연대하지 못했기 때문에 독일 비극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33년 1월 1일, 나치주의. 국가사회주의 공장 세포 조직 .엔.에스.베.오가 독일 총선을 앞두고 베를린에서 데모를 하고 있다. 독일 노동자들의 나치 참여 ) 




참고: NSBO: 국가 사회주의자 공장 세포 조직:  시초는 1927년 베를린을 중심으로 대규모 공장 노동자들이 민주-기독교 노조에 대항해 건설했고, 1928년  국가사회주의자 공장 세포 조직 (NSBO)이 만들어졌다. 1931년 1월 15일 나치의 “독일 제국 공장 세포 조직”이 탄생했다. 이들은 “공장속으로 ! Hinein in die Betriebe : HIB !”라는 구호를 내걸고 프로파간다와 폭력 등을 사용해 조직을 키워나갔다. 

(국가사회주의자 공장 세포 조직 NSBO 완장 : 노동을 상징하는 톱니와 나치 상징인 스와스티카가 결합되어 있다 ) 


1933년 5월 2일, 나치를 지지하지 않는 모든 노조들은 불법화되었고, NSBO (국가사회주의자 공장 세포조직)만이 합법적으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독일 노동 전선 (Deutsche Arbeitsfront : DAF)가 며칠 후 만들어졌고, 1935년 독일 노동 전선 (DAF)이 NSBO를 합병했다. 


(DAF 총책임자, 로베르트 라이 1890-1945) 



 


(독일 노동 전선 DAF 깃발: 나치를 상징하는 스와스티카 Swastika 와 노동을 상징하는 톱니바퀴가 섞여져 있다) 



 
논문 저자: 게라트 브라운탈 : 2014년 10월 29일 90세 일기로 별세했다. (미국 암허스트 소재, 매사추세츠 주립대학 정치학과 명예교수) 






나치 :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 정당 : 나치오날-조찌알리스티셰 도이체 아르바이터 파타이 NSDAP: 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 : 약칭 NSDAP)  

나치가 독일 총선에서 의석수를 증가해 나가는 과정

1. 1930년 9월 14일 총선 결과 :
총 577석 중, 과반은 289석 (정부 수립 가능)




2.  1932년 7월 31일  독일 총선, 총 608석에서 과반은 305석 기준.

폰 파펜 쿠데타 이후, 제 1당이 된 나치 (히틀러) 당. 230석을 얻었다. 사민당은 제 2당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3. 1932년 11월 6일 독일 총선
584석 중에 과반은 293석, 제 1당은 나치 196석, 제 2당은 사민당 121석, 제 3당은 공산당 100석이었다. 




4.  1933년 3월 5일 독일 총선

나치 (히틀러)가 288석을 얻어 제 1당이 되었다. 사민당과 공산당은 축소되었다.



5. 1933년 11월 12일 총선, 야당들은 총선 참여가 금지되고, 나치 1당만이 참여했다.
661 석 중, 나치 당이 661석을 다 차지했다.





Posted by NJ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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