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헌법 제정과정에서, 대통령 '결선투표제'를 누락시켰다.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 대통령 '결선투표'가 필요하다는 58.5%
1987년 헌법 제정과정에서, 대통령 '결선투표제'를 누락시켰다. 김영삼과 김대중은 1971년 대선을 앞두고, 당시 신민주당에서 당내 후보 결정 과정에서 '결선투표'를 실시한 바가 있다. 그런데도 1987년 헌법을 제정할 때, 프랑스 헌법처럼 ' 대통령 결선투표' 조항을 삽입하지 않았다. 민주적 헌법을 만들지 못한 그들의 직무유기이다.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 '결선투표'가 필요하다는 58.5% , 필요없다 41%였다. (1987년 10월 22일자, 조선일보) 1987년 10월 22일자 조선일보. 문항 1. 을 보면 당시 유권자들도 김대중,김영삼의 단일화가 실패하면, 당선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64.2%가 불가능하다고 답변했는데도, 이러한 여론조사를 무시했던 김대중과 김영삼, 요즘 같으면 거의 ..
2025. 2. 25.
윤석열 내란, 국회폭동. 1987년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와 같은 구심력 이 없다. 민주당 이재명 리더십 점수 낮아, 1987년 6월 항쟁 당시, 박종철,이한열 학생운동, 김대중,김영상 야당 지도자와 같은 구심점 부족하다.
여론조사 특징. 1987년 6월 항쟁과 비교해, 당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와 같은 구심력이 부족하다. '윤석열 탄핵 완수의 정치적 목표'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민주당 이재명 리더십과 도덕성 점수가 낮은 것도 구심력을 현격히 약화시킨 원인이다. 청년들과 시민들의 자발적인 투쟁들은 돋보이지만, 이 투쟁들의 성과를 '제도'와 '법'으로 만들어낼 계획도 구상도 부족하다. 하루 속히 윤석열 탄핵 국면에서 정치적 목표를 분명히 내걸어야 한다. 1987년은 '민주헌법 쟁취 국민운동본부'가 5월에 발족되었다. 2025년 촛불 시위대의 '명칭'은 윤석열 체포와 탄핵으로 그쳐서는 안되고, '시대에 뒤떨어진' 5년제 단임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개헌을 포함한 포괄적인 정치개혁안들'을 슬로건으로 내세워한다. ..
2025. 1. 6.
영화 '다음 소희', 지난 60년간 개선되지 못한 현장실습생 노동3권, 박정희 정권부터 윤석열 정부까지 일관성 부족. 윤석열 '정부를 기업에 종속시킴'
'다음 소희'를 다룬 MBC 스트레이트 보도. 과거 실업계고, 현재 직업계고,특성화고 등 고등학교 3학년들이 일터에 나가서 일하는 '현장실습'의 문제점을 다뤘다. 현장실습의 역사를 보면, 각 정부가 일관성없이, 노동3권을 적용하지 않고, 필요에 따라, 기업의 요구에 따라, 현장실습 정책들을 사용해왔다. 역사적 변천. 1)1963년 박정희가 '현장 실습 제도'를 만들어, 산업화에 필요한 노동력을 쉽게 제공할 수 있도록 했다. 2)전두환 5공, 현장 실습 기간을 3개월에서 6개월로 늘렸고, 3) 김영삼 정부는 6개월에서 12개월 (1년)으로 더 늘렸다. 4) 1997년 직업교육훈련촉진법이 제정되어, 현행 '현장 실습' 법적 근거를 마련함. 그러나 노무현 정부 하에서, 현실 문제 발생. 현장실습 고3 학생들을..
2024. 1. 6.
[개헌] 역사. 6공화국 헌법 탄생과 1987년 대선 전개 과정 .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노태우, 민중후보 백기완 등 재야 흐름.
1987년 10월부터 12월 16일 대선까지,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노태우, 민중후보 백기완 등 재야 흐름. 1987년 보다 못한, 2022년 민주당. 87년 김대중 후보는 '부유세' 라도 내걸었다. 어쩌다가 2022년 더불어민주당은 1987년 평민당 대선 공약보다 더 퇴보했는가? 심지어 통일민주당보다. 1987년 '6공화국 헌법'에서 '결선투표제도' 누락한 것, 김영삼-김대중의 오류다. 1990년 김영삼이 3당합당해서 2022년 32년간 한국정치를 규정하고 있다. 대중,노동자,시민의 정치참여를 죽쒀서 개주는 정치를 지난 32년간 했지 않나? 87년 김대중이 '부유세 신설'을 공약할 정도였다. 적어도 '농가부채 탕감'이라고 김영삼,김대중도 크게 적어놨다. 현재 2030 유권자들이 바보인가? 그들은 ..
2022. 1. 5.
1987년 10월 26일자, 김영삼과 김대중은 민주당 경선협상에 실패, 각자 대선 후보로 출마하기로. 6공화국 헌법과 법률에 '대통령 선거 결선투표제'를 누락했고, 정당 이념과 정책 중심이 아니라, ..
1. 역사에서 가정. 박정희가 1963년 대선, 1967년 재선 이후, 1969년에 삼선개헌을 하지 않고, 1971년에 대통령에서 물러났다면, 김대중-김영삼은 각각 2번 임기 (총 8년)을 두 사람이 돌아가면서 채웠다고 해도, 1987년 대통령 선거에는 김대중과 김영삼이 더 이상 출마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역사에서 가정은 없다 하지만, 박정희 -전두환 군사반란과 군사독재의 폐해는 고스란히 야당 지도자, 김영삼과 김대중의 한계로 이어졌다. 2022년 대선을 앞두고, 대통령 후보들의 자질이 떨어진 이유는, 김영삼 김대중도 정당의 이념과 정책노선을 내세워 정치를 한 게 아니라, 박정희-전두환 (총통 개념의 독재자)는 아니지만, 권력을 독점했었다. 당내 민주주의나 절차는 부차시 되었고, 당 권력 상층 몇몇 인..
2021. 10.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