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3월 12일 박근혜가 파면 이후 삼성동 집 앞에서 보여준 '웃음'은 1995년 12월 2일 전두환 골목성명과 비슷했다. 박근혜와 전두환 둘 다 국민의 뜻과 헌법을 무시해버렸다. 어떠한 죄의식도 없었다. 


박근혜 공식 논평 "삼성동 골목 성명"은 촛불시위와 헌법재판소 파면 결정은 '진실'이 아니라, 거짓이고 사기이다. 이것이 박근혜 공식 입장이다. 


"제게 주어졌던 대통령으로서의 소명을 끝까지 마무리하지 못해 죄송스럽게 생각한다. 저를 믿고 성원해준 국민 여러분께 감사한다. 이 모든 결과에 대해 제가 안고 가겠다.시간이 걸리겠지만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고 믿고 있다 (박근혜 탄핵 이후 공식 발표.3월 12일.) ”


향후 어떻게 될 것인가? 


박근혜 역시 전두환처럼 구속될 것으로 보인다. 전두환은 12월 2일 1212 쿠데타 범죄 조직원들과 연희동에서 골목성명을 발표하고 검찰 수사에 협조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전두환은 강제 구속당했다. 박근혜도 검찰 수사를 거부하고 있고, 삼성동 집 앞에 박사모와 관제데모단이 앞으로 검찰 수사를 방해하겠지만, 결국 구속될 것이다.


다시 읽어보는 전두환 구속영장. 1212 쿠데타 음모, 정승화 참모총장과 전두환 일당 '하나회'와 갈등, 김오랑 소령 등 군인들 사살, 군 병력 이동 등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다. 



(*출처 경향신문) 



1995년 12월 2일 전두환 쿠데타 세력들의 골목 성명서 "검찰 수사에 협조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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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춘-우병우-최재경 검사 출신들이 부패정권 박근혜 구원투수로 나섰다. 역사적으로 도의적으로도 법률적으로도 승리할 수 없는 게임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현재 박근혜의 '버티기' 전술을 보면, 김기춘이 지난 40년간 검사직, 검찰총장, 법무장관, KBO 총재, 국회의원을 하면서 쌓은 비법들이 고스란히 다 드러난다. 


김기춘은 이번 박근혜 최순실 부정부패 패밀리 조폭사건으로 정치적으로 수장될 것이다. 최순실과 더불어 차움 병원에서 줄기세포 치료까지 받은 것으로 알려진 김기춘은 누구인가? 줄기세포보다 더 질긴 이 정치적 생명력은 우리 사회의 어떠한 단면으로부터 비롯되는가? 그게 내 관심사이다.  

 

김기춘이 한국 정치사에 등장한 것은 1974년 8월 15일 육영수의 총격사망 이후, 문세광을 수사했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김기춘은 중앙정보부에 파견된 검사였다. 그가 묵비권을 행사하던 문세광의 입을 열게 했다고 증언했지만, 실제 사건 경과는 아직도 다 밝혀지지 않았다.


김기춘이 검찰에 기소된 적이 있다. 1992년 12월 대선을 앞두고 전 법무장관 김기춘은 부산에서 김영삼 후보 (민자당) 선거 운동을 했다.김기춘은 부산 지역 기관단체 공직자들 (교육감, 시장, 검사, 안기부 직원)을 모아놓고, "김영삼이 대통령에 당선되지 못하면 영도다리에 빠져죽자"고 발언하면서, 당시 대선 후보였던 김대중과 정주영(국민당)을 어떻게 공격할 것인가, 대구 경북 사람들이 부산 사람들을 무시하지 못하도록 만들자 등을 논의했다.


이게 소위 '초원 복집' 도청 사건이다. 국민당 관계자들이 김기춘 '초원 복집' 회동을 도청해서 언론에 공개버렸다.


김기춘은 선거법 위반 등으로 검찰에 기소되었다. 1년 구형을 받았지만, 김기춘은 헌법재판소에 소송을 걸었고, 이후 김기춘의 선거운동은 위법이 아니라는 판결을 받아냈다. 


1. 생존 욕구가 강했다. 


김기춘은 인척의 연계로 선이 닿아 노태우 정권 하에서 검찰총장과 법무장관을 역임했다. 거제 출신 경남고->서울대 법대 졸업이었던 김기춘에게는 대구 (TK) 헤게모니는 늘 어떤 정신적 그늘 (열등의식과 성공의 장애물)이었는지 모른다.


부산 초원 복집에서 김기춘의 말을 분석해보면, 대구 TK 에 대한 강한 경계의식이 있음을 알 수 있다. 


2. 범죄를 저지르더라도 치밀하게 구체적으로 그 전술을 지시했다.


국민당 정주영 후보가 부산 경남에서 김영삼 표를 갉아먹지 못하도록 아주 구체적인 지시를 했다.


3. 비리와 부정 부패에 익숙해진 전근대적인 관료의 전형이었다.


장관하면 돈봉투가 쏟아진다, 그게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김기춘이었다. 


4. 자기가 위기에 빠졌을 때는, 법률 조항을 따져, 헌법재판소까지 이용하는 전술을 사용했다. 


5. 사회적 비난을 무릅쓰고, 한국야구 KBO 총재에 취임하는 뻔뻔함을 보여줬다. 자기 생존을 위해서라면 염치도 없이 끝까지 자기 지위를 확보하고자 갖은 수단을 다 동원했다.




1992년 12.22 한겨레 신문. 김기춘이 검찰에 소환되었다.





1992년 12월 16일자 신문. 대선 직전에 터진 대형 사건이었다.


김영삼 당시 민자당 후보는 대구 경북에 가서는 "우리가 남이가 !"를 외치고,

그의 경남고 후배 김기춘은 부산에 모여서 "김영삼 후보를 당선시키지 못하면 영도다리에 빠져죽자"고 했다.






1993년 4월 14일.


공안 1부 조준응 부장 검사는 불구속기소된 김기춘 (54세)에 대해 "대통령 선거법 위반, 선거운동원이 아닌 자의 선거운동 죄"를 적용해 징역 1년을 구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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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8월 28일, 김기춘에 대한 공소가 취하되었다. 7월 헌법재판소는 김기춘에게 적용된 대통령 선거법 제 36조 1항 (선거운동원이 아닌 사람의 선거운동 금지 조항)을 위헌 결정내렸다.


이에 따라  불구속기소된 김기춘에 대해서 공소가 취하되었다.





김기춘은 어떤 사람인가? 김기춘의 '공직관"


"장관이라는 자리 해보지 않은 사람은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1993년 12월 15일자.


김기춘은 대통령 선거 1년 후, 변호사를 개업하려고 했다.



1995년 2월 9일자.


김기춘은 한국야구위원회 KBO  8대 총재로 취임한다.

낙하산 인사였다.


전두환 노태우 군사 정권들은 KBO 총재 직에 군인들, 안기부장, 김기춘과 같은 정권 부역자들을 앉혔다.





김기춘의 발언을 들어보면, 한국 보수 엘리트의 가치관과 정치관을 잘 알 수 있다.





(부산 국세청 세수의 4분의 1도 안되는 대구가, 단합력이 뛰어나다고 말하고 있는 김기춘,

신라시대까지 언급하는 것을 보면 그의 역사관이 얼마나 한심한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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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산) 는 멸시받는다"는 말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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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감정을 불러일으키자고 노골적으로 선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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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놈들은 쓸개가 없는 놈들이라는 말을 써가면서 부산의 단결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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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정치/민주당2016. 3. 31. 15:39

이 인터뷰에서 빠진 부분은, 안철수 역시 대권 도전 권리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프랑스 대통령 선거제도처럼, 한국 역시 대통령제를 채택하는 한, 2차 결선투표 (run-off)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안철수 역시 향후 모든 대통령 선거에서 후보단일화 압력없이 대선 출마가 가능하다. 

http://futureplan.tistory.com/527 (1987년 대선에서 프랑스식 대통령 결선투표제도가 있었다면, 김영삼이 당선되었을 것이다) 


1.안철수와 국민의당 비판 이유

- 국민의당과 안철수는 정치적 정체성이 불분명하다. 

- 수도권에서 국민의당이 야권 연대를 하지 않아 새누리당에 어부지리를 가져다 주기 때문에, 안철수와 국민의당은 이적행위를 하고 있다.

- 안철수의 대권 욕심 때문에 총선에서 야권연대를 거부하고 있고, 새누리당 표 보다는 야권 표를 더 분산시키고 있다.


2. 정의당과의 연대에 대해서, 더민주당이 실수를 저질렀다.

- 정의당(심상정 대표) 쪽과는 더민주당이 상대적으로 연대하기 쉬운데도 김종인 지도부가 제대로 정리하지 못했다. 

- 정의당과의 선거 연대 재정비가 필요하다.


3. 김홍걸의 정치 참여에 대해서 이희호 여사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 이희호 여사는 특정 정치인을 지지한 적이 없다.

- 어머니 이희호 여사는 김홍걸의 정치 참여를 예전에 반대했으나, 최근에는 반대하지 않는다.

권노갑 박지원에 대해서, 만약 김대중 대통령이 살아있었다면, 호남을 고립시키지 말고, 다른 지역과 연대하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반대로 호남을 분열시키고 다른 지역과 연대를 하지 않기 때문에 김대중을 계승하고 있다고 보기 힘들다.


- 20대 총선에 출마하지 않는 이유는 ? 아직 국회의원 직에 도전할 준비가 덜 되어 있다. 


 
: 3/28(월) 김홍걸 "연대하면 제명한다는 安, 새누리가 큰절 할일"
번 호6299글쓴이뉴스쇼(뉴스쇼)날 짜2016-03-28 오전 7:53:09
조 회403추 천1첨 부 
* 인터뷰를 인용보도할 때는
프로그램명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를 
정확히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저작권은 CBS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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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송 :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FM 98.1 (07:30~09:00)
■ 진행 : 김현정 앵커
■ 대담 : 김홍걸 (더불어민주당 국민통합위원장)


 

-安, 대권욕심에 협박 정치
-어머니께서 安에 호감 표한 적 없어
-아버지, 동교동계 행보 개탄하실 것
-더민주, 정의당 연대에 다시 나서야


"자기 지역구에서 개별적으로 후보단일화를 한 후보가 있다면 출당이나 제명을 하겠다".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가 이렇게 선언을 했습니다. 즉 당대당의 야권연대는 물론이고 지역구별 후보간 야권연대도 절대 안 된다는 얘기죠. 주말 사이 정치권에는 여러 가지 일이 있었습니다마는,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의 이 발언이 나오면서 일여다야 구도에서 지역구별 연대라도 기대했던 다른 야당들은 지금 속이 바싹바싹 타고 있는데요. 이런 가운데 어제 더불어민주당 김홍걸 국민통합위원장이 안철수 대표를 향해서 이적행위자라고 강하게 비판을 하고 나서서 큰 이슈가 됐습니다. 도대체 무슨 뜻으로 이런 강한 표현을 썼을까요. 직접 만나보죠. 김대중 전 대통령의 3남으로 더불어민주당에 입당한 김홍걸 국민통합위원장 연결이 돼 있습니다. 김 위원장님, 안녕하세요. 

◆ 김홍걸> 네, 안녕하세요. 

◇ 김현정> 사실 더불어민주당에 입당을 하고 나서 불출마 선언하시고 언론 인터뷰도 거의 안 하시고 해서 ‘조용조용 지내시려다보다’ 이렇게 생각을 했었는데, 어제 안철수 대표를 향해서 “이적행위를 하지 마라” 강한 어조로 비판을 하셔서 좀 놀랐어요. 

◆ 김홍걸> 안철수 대표가 연대를 거론하는 것조차 거부하고 있지 않습니까? 

◇ 김현정> 그렇죠. 

◆ 김홍걸> 연대를 하지 않으면 새누리당에게 어부지리를 줘서 특히 수도권에서는 많은 의석을 잃게 되는데요. 그러면 아예 “나는 새누리당 도와주러 나왔다”고 솔직히 얘기를 하든지. 말로는 스스로를 야당이라고 부르면서 여당을 도와주니까 이적행위라는 말이 나오는 겁니다. 정치권에서는 요즘 우스갯소리로, 어부지리로 당선 가능성이 높아진 여당 후보들이 안철수 대표 찾아가서 큰절을 해야 된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 김현정> 그 정도. 하지만 안철수 대표의 주장은 이런 거 아니겠습니까? ‘지금 대한민국의 문제가 풀리지 않는 근본을 따져보면 거대 양당 때문이다. 이 당 아니면 저 당밖에 없으니까 이번 총선에서는 국민의당이 교섭단체 이상을 획득을 해서 제3당으로 탄생을 하면 대한민국이 바뀔 수 있다, 혁명적인 변화가 올 거다’, 이렇게 계속 주장을 하고 있는 건데요. 

◆ 김홍걸> 먼저 국민의당 정체성이 불분명한 것이 문제인데요. 안철수 대표가 전에 인터뷰에서 국회선진화법을 개정하겠다고 했고, 테러방지법 문제 때도 처음 시작했을 때와 태도를 중간에 바꿔서 양비론으로 나오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국민들 입장에서는 선명한 야당인지 믿기가 힘든 거죠. 

◇ 김현정> 그렇게 보시는군요. 그러면 혹시 야권연대, 지역구 개별연대도 안 된다고 하는 데에는, 제3당으로 우뚝 서겠다는 것 외에 어떤 안철수 대표의 자기 욕심, 일종의 과욕, 이런 것도 들어 있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다른 이유도?

◆ 김홍걸> 그러니까 탈당 전부터 좀 억지 주장을 늘어놨고, 정치개혁을 하겠다고 선언한 분이 구태 정치인들을 1명 빼고 대부분 다시 공천했거든요. 그러니까 여당과 싸우는 것보다는 일단 야당을 무너뜨려서 다른 대권 경쟁자들을 제거하면, 혼자 살아남아서 야권의 대권주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 아닌가 싶고요. 

◇ 김현정> 야권의 유일한 대권주자가 되기 위해서 지금 이러는 거 아니냐라는 의심을 하시는 거예요? 

◆ 김홍걸> 네. 대선을 보고 하는 것이다 이거죠. 그러니까 탈당 후에도 여당보다는 야당을 훨씬 많이 공격했고 표가 분산이 돼서 이렇게 공멸할 것이 뻔히 보이는데도 자기 당 후보들에게 사퇴하면 제명하겠다고 엄포를 놓는 전무후무한 협박정치를 한 것을 봐도 알 수 있죠. 

◇ 김현정> 대권 욕심 때문이다. 그런데 더민주가 야권 연대에 소극적이다, 이런 반론도 있습니다. 실제로 정의당과 논의가 진행 중인데도 더민주가 사전 통보도 없이 모든 지역에 공천을 마무리해버려서 정의당이 “이건 갑질의 횡포”라고 비판을 하기도 했는데, 이 부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 김홍걸> 그 점은 우리 당 쪽도 반성할 부분이 많다고 봅니다. 정의당 쪽과의 연대는 상대적으로 쉬운 일인데도 그걸 제대로 정리를 못 한 부분은 지도부에도 책임이 있다고 봐야 죠. 

◇ 김현정> 그 부분은 우리도 잘못이다, 더불어민주당도 잘못이다, 이렇게 인정하시는 거군요. 그럼 정의당과의 야권연대는 다시 한 번 뭔가 재정비해서 시작을 해야 된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하십니까? 

◆ 김홍걸> 네, 그렇습니다. 

◇ 김현정> 어머니 이희호 여사하고 혹시 이런 이야기들을 나누시는지 모르겠어요. 지금의 이 야권분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어머님은? 

◆ 김홍걸> 분명히 말씀드리는데 저희 어머니는 절대 정치에는 개입을 하시지 않습니다. 

◇ 김현정> 아드님하고는 이런 얘기들이나 대화 정도는 나누실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런 얘기도 일절 안 하세요? 

◆ 김홍걸> 네, 어머니께서 지금 몇 달째 몸이 안 좋으셔서 심기를 편하게 해 드리기 위해서 이런 정치 문제나 골치 아픈 얘기들은 될수록 하지 않고 있고요. 그러니까 누가 그분 뜻이라고 정치적 얘기를 한다면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 김현정> 제가 지금 그 말씀을 들으니까 언뜻 생각나는 게, 한때 ‘이희호 여사가 국민의당을 지지한다더라’ 이런 소문이 돌기도 했었거든요. 

◆ 김홍걸> 저희 어머니께서는 누가 와서 무슨 정치적 얘기를 해도 “그냥 알았다. 당신 소신대로 잘 판단해서 해라” 하는 이런 원론적 답변만 하십니다. 그러니까 제가 가서 입당 문제를 말씀드린다든가 박지원 의원, 권노갑 고문 이런 분들이 그런 것을 말씀드려도 답은 똑같습니다. 그러니까 이래라 저래라 하시지 않는다는 말이죠. 

◇ 김현정> 그렇군요. 

◆ 김홍걸> 그리고 안철수 대표에 대해서 지지 의사를 표명했다는 것도 전혀 사실이 아니고요. 저는 그분이 안철수 대표에 대해서 특별히 호감을 표시하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 김현정> 알겠습니다. 소문은 그냥 소문일 뿐이다, 한마디로 일축을 해버리시는데. 우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마는 갑자기 또 궁금해지는 게 부친인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 만약 살아계셔서 지금의 야권 분열 상황을 보셨다면 뭐라고 하셨을까, 가끔 그런 생각도 좀 해보세요? 

◆ 김홍걸> 네. 아버지께서는 생전에, 호남의 고립을 막고 민주개혁세력 대통합을 항상 주장했던 분인데, 그분을 따른다는 분들이 반대의 길을 가고 있으니까 그분이 이 모습을 보면 정말 안타까워하실 것 같습니다. 

◇ 김현정> 따르던 동교동계 분들이 지금 다 국민의당에 가 있는 그 상황을 지금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요. 

◆ 김홍걸> 네. 유권자들은 누가 그분 곁에서 모셨고 얼마나 친했고 그런 얘기를 듣자는 것이 아니고, 누가 김대중 정신, 노무현 정신을 이 시대에 맞게 계승, 발전시켜서 민주주의를 지키고 박근혜 정권과 싸워서 상위 1%가 지배하는 세상을 중산층과 서민이 살기 좋은 세상으로 바꿔내는 능력을 보여주느냐를 보고싶어합니다. 그러니까 실력으로 승부해라 이거죠. 

◇ 김현정> 네, 알겠습니다. 김홍걸 국민통합위원장. 그나저나 정치를 아예 안 한다면 모를까 더민주에 입당까지 한 마당에 불출마를 선택하신 이유는 뭡니까?

◆ 김홍걸> 저는 처음부터 위기에 빠진 야권을 구하는 데 힘을 보태려고 나온 것이고요. 제 스스로가 지금 당장 원내 진출을 할 준비가 아직 안 돼 있다고 느꼈습니다. 

◇ 김현정> 어머님이 정치하는 것을 극구 말리셨다는 얘기도 있었는데 여전히 못마땅해 하세요? 

◆ 김홍걸> 그렇지 않습니다. 

◇ 김현정> 아닙니까? 

◆ 김홍걸> 말렸다는 것은, 더불어민주당이 싫다던가 제가 정치를 하는 것 자체를 극구 반대하셨다던가 그 뜻이 아니고, 이제 아무래도 정치판이 좀 험하고, 잘못하면 상처 입기 쉬우니까 부모의 입장에서 염려를 하셨다는 거죠. 

◇ 김현정> 그럼 지금은 이제 이왕 들어간 거 열심히 해라 응원해 주십니까? 

◆ 김홍걸> 네, 그렇습니다. 

◇ 김현정> 그럼 이번에는 준비가 안 돼서 도전 못 하셨지만 정말 나중에 훗날을 기약하면서 국회 입성해서 뭔가 좀 제대로 해 보고 싶다, 뭔가 이루어 보고 싶다, 이런 욕심도 있으시고요. 

◆ 김홍걸> 나중에는 할 수 있겠죠. 

◇ 김현정> 그렇군요. 아버지도 지금 하늘에서 자랑스럽게 보고 계실까요? 

◆ 김홍걸> 제가 정치권에 나온 후로 그래도 제가 평소에 하던 것보다 좀 능력을 더 발휘하고 있는 것 같아서, 저희 아버지께서 그래도 지켜주고 계신 거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듭니다.

◇ 김현정> 알겠습니다. 더불어민주당 김홍걸 국민통합위원장. 라디오 인터뷰 처음 하시는 건가요? 

◆ 김홍걸> 라디오로는 처음이죠. 

◇ 김현정> 그러시죠. 목소리가 이러셨군요. 오늘 귀한 시간 고맙습니다. 

◆ 김홍걸> 네, 감사합니다. 

◇ 김현정> 더불어민주당 김홍걸 국민통합위원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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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정치/민주당2016. 3. 11. 12:52

김종인 있는 그대로 보기 시리즈. 김종인 '리즈시절' 사진이다. 1976년 김종인은 '흥미롭게도' 유럽복지국가들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조세정책을 통해서 소득 '재분배'를 할 수 없다고 봤다. (진짜 그랬을까?/응당 했어야 할 세제개혁을 하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반면 김완순 교수는 같은 동아일보 지면에서, 소득계층별로 '적정' 조세 부담율을 적용하자고 주장했다. 




-김종인이 말한 서유럽국가들과 한국의 차이는 이해하지만, 박정희 시대에도 존재했던 소득/자산 불평등을 시정하기 위해서는 법인세나 상위소득자에 대한 '누진과세(직접세)'는 실시하는 게 옳았다. 1978년 총선에서 박정희 공화당은 야당 신민당보다 의석수는 많았지만 득표율은 1.11% 더 적었다. 한마디로 민심이반이었다. 




- 얼마전에 별세한 당시 공화당 의원 이만섭은 박정희의 '부가가치세(간접세)' 실시를 연기해 달라고 데모를 할 정도였다. 그러나 박정희는 밀어부쳤고, 78년 총선에서 이미 민심은 박정희를 떠났다. 이만섭은 2009년에 발간한 <5.16과 10.26 박정희 김재규 그리고 나> 책에서 이 '부가가치세' 도입은 박정희 사망으로 이르게 한 전조였다고 평가할 정도로 '조세 제도'는 중요하다. 




- 당시 부가가치세를 밀어부친 김점령, 남덕우(경제부총리),김용환(재무부 장관)은 총선 이후 실각될 정도로 이 '부가가치세' 문제는 민생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 ‎김종인‬ 이 과연 어떠한 <재정학>으로 어떠한 조세개혁을 했고 제안했는지, 의구심이 든다. 하여 새로운 조사가 필요해 보인다. 1976년 동아일보 신문을 보다가 느낀 점.




김종인과 김완순 기고: (1976년 10월 4일 동아일보 기고) 1977년 예산 2조 6750억원에 대한 논평이다.




1. 김종인 주장 


주제 1977년~1981년 (제 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특징 : 1차~3차에서는 개발계획을 강조했고, 제 4차부터는 ‘사회개발’이 경제개발계획의 기본방향이다.




김종인 논평: 사회개발의 의미는 (노동) 소득 분배와 세금을 통한 재분배를 뜻하고, 그 혜택 대상은 저소득자와 저소득 계층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정부가 할 수 있는 영역은 재정과 연관된 재분배이다. 




재분배가 중요한 이유는 북한 공산주의의 선동 요인을 제거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한국은 개발도상국가이기 때문에 정부 재정이 풍부하지 않아 재분배 정책에 제약이 따른다.  따라서 김종인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첫번째는 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해야 하고 두번째는 경제성장 투자분을 제외하고 남은 ‘소비’ 억제를 통해서 재원을 마련해야 한다. 그러나 이는 결코 크지 않다고 봤다. 그런데다 저소득층의 경우 소비를 억제하고 저축을 할만큼 넉넉치 않고, 그러한 경제적 합리성을 갖고 있을만큼 교육 수준도 높지 않다. (엘리트 관점) 




그렇다면 김종인의 해법은 무엇인가?




1960-70년대 당시 서유럽과 북미 케인지안들은 국가가 강제적인 수단을 사용해서 소득세의 누진과세를 통해 고소득층의 소비를 억제시킨 반면 저소득층의 소득재분배 효과를 가져오도록 제안했다. 




이에 대한 김종인의 평가에 따르면 위와 같은 케인지안의 소득재분배 조세 정책은 한국에서 성공할 수 없다.왜냐하면 한국은 간접세 위주 세제와 독과점이 심한 상황이기 때문에 소득세를 통한 재분배 효과는 크지 않을 것이라는 게 김종인의 생각이었다.




영국 프랑스 독일 유럽 복지국가 체제와 달리 한국에서는 국가정부가 소득재분배보다는 경제개발에 더 많은 ‘재정’을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서구 유럽국가들의 황금기 (1945~1975년) 복지체제 분배/재분배 정책을 사용할 수 없다고 봤다. 




김종인은 소득재분배 (세금정책)를 당시 한국 박정희 정권을 사용하기에는 정부 돈이 부족하다고 봤기 때문에,  정부는 우선 투자를 지속해서 경제성장을 목표로 뛰고, 유럽국가들의 소득재분배 정책과 달리 소득과 직결되는 ‘재산영역’의 분배 정책을 사용해서 저소득층과 저소득자의 사회개발 문제를 해결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이것이 무엇인지는 신문기사에서 자세히 밝히지는 않음. 그냥 노동소득의 증가를 의미하는 것 같음.) 




2. 김완순 고려대 교수의 경우는 1977년도 예산안 (2조 6750억원)을 충당하려면 국민의 조세 부담( 평균 조세 부담률이 30%가량 증가할 것으로 예상)이 증가한다고 봤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소득 계층별로 적정 조세를 부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조세 납세자들이 조세 혜택을 피부로 느끼지 못하게 되면 정부는 조세 저항에 부딪힐 수 있다고 경고했다.


(사진은 1977년 11월 19일자 동아일보에서, 김종인 ) 


아래 신문은, 1976년 10월 4일자 동아일보. 1977년 한국 정부 예산 2조 6750억에 대한 김종인과 김완순의 논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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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정치/민주당2015. 12. 15. 18:43

조국 교수님의 선의의 뜻, 그러니까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문재인은 진보로, 안철수는 중도로 헤어지고, 나중에 때되면 연대하자'는 제안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하지만 새정련(민주당)이 왜 '준비되지도 않는 정치인' '자질이 부족한' 안철수와 같은 사람을 어딘선가 빌려와야 정치생명이 연장되는 그런 '민주당 나사 빠짐' 현상, 민주당의 구조적 결함을 고치지 않고서는, 조국 교수님의 선의의 뜻은 결코 새정련(민주당)에서 실현되기는 힘들 것이다.



안철수 때리기는 쉽다. 왜냐하면 그는 '이윤창출'이 목적인 비니지스 세계와 '시민의 정치의지' 실현이 목적인 정치세계를 처음에도 지금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번 탈당할 때도 "야 이늠들하 내가 2번이나 후보를 양보했으면, 당신들도 2번 양보해야 수지가 맞는 것 아니냐?"는 속생각이었다.



안철수는 과거 민주당 정치지도자들, 김대중과 김영삼이 보여준 어떤 수난사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 80년 광주내란음모사건으로 사형구형 - 김대중, 김영삼의 경우는 박정희 정부의 질산 테러 사건, 79년 YS 의원 제명 , 전두환시절 3주넘게 단식농성 등) 그런 희생들의 누적은 없는 상태에서, 자본 회수를 단기간에 하려는 비지니스 마인들을 가지고 정치를 하는 사람이다.



안철수 때리기는 너무 쉽다. 여의도 국회 주변에 자칭 '정치 전문가들과 카운셀러, 정치컨설팅 교수들, 회사'는 많고, 안철수를 '판매'하긴 하지만, 안철수를 '세포 분열'시킬 기술은 0 없기 때문이다. 성공확률이 대단히 낮기 때문이다. 안철수보다 돈이 아마도 수백배 많은 정주영도 한번 출전하고 말았다. '해 봤더니 아니더라'



그러나 안철수와 안의 친구들이 새정련을 탈당했다고 해서, 지금 새정련이 '혁신'할 수 있을까? 물론 조국교수님과 김상곤 혁신위를 '문재인과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고 비난했던 안철수와 철수친구들은 너무 무지막지하게 '공천권' 때문에 조국교수를 비난했다.



지금 새정련 사람들은 '안철수와 그 친구들의 공천권' 사수와 다른 그런 '혁신 실천'을 그 동안 해왔는가? 아니 앞으로 할 수 있을 것인가? 이념과 정책 노선으로 다시 구성하지 않는 한, 굉장히 힘든 '혁신' 같다. 조국교수님의 선의의 뜻과는 무관하게.





기사 출처: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721698.html?_fr=sr1


Posted by NJ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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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차라리 정치에 입문하는것이 떳떳하지, 양다리걸치고 뭐 하는것인지! 서민들은 먹어볼수도 없는 쇠고기 부위나 이야기 하는것이
    정치발전에 전혀 도움이 않되는 전형적인 인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차라리 교수직 네려놓고 정치에 입문하는것이 모든 쿡민들을 배려하는것이라고 생각된다.

    2016.01.04 15:56 [ ADDR : EDIT/ DEL : REPLY ]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결선투표 제도만 있었더라면, 노태우는 당선되지 못했을 것이다. 결선투표가 있었다면 1차 투표에서 36.7%로  1위였던 노태우는 '과반' 획득에 실패했기 때문에, 제 2차 결선에서 2위였던 김영삼과 다시 재선거를 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1차에서 김대중을 지지했던 27%의 표 대부분은 김영삼후보에게 돌아갔을 것이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그랬더라면 김영삼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1988년부터 1992년까지 집권했을 지도 모른다. 왜 당시 야당이었던 '민주당'은 민정당과의 개헌 논의에서 '결선 투표제도'를 신설하지 않았을까?  회고담 같지만, 그 원인들을 뒤돌아 보자.


1. 김대중과 김영삼, 그리고 민주진영의 '실수'였다. 대통령 선거에서 '결선투표제도'를 빠뜨렸다.


7월부터 9월까지 3개월 동안, 김영삼과 김대중은 6월 항쟁의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다. 

김대중과 김영삼은 대통령 결선투표 제도를 몰랐는가? 아니다. 그들은 이미 1970년 9월 29일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을 치른 적이 있고, 당시 결선투표제도를 신민당 내부에서 선택했다. 


1차 대의원 투표에서 김영삼은 1위를 했으나 47.6%에 그쳐, 과반수 득표율에 미치지 못해 결국 2차 투표를 했다.2차 투표에서 김대중은 대의원들로부터 458표를 획득, 51.8%로 과반 획득,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당선되었다.  (이승만 자유당 시절, 민주당구파 유진산+김영삼계가 민주당신파였던 김대중과 이철승에게 패한 것이다) 결선투표 제도 덕택에, 김대중은 71년 대선에서 두 김씨를 '애숭이'라 표현했던 박정희와 겨뤘다.


 40대 기수론은 김영삼이 69년에 외치고, 정작 후보는 또 다른 40대 김대중이 되었던 것이다. 


87년 6월 시민항쟁으로 전두환 '호헌 선언'을 깨고,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했지만, 그 대통령 선거 방식과 내용에 대해서는 정밀하지도 장기적이지도 않았다. 더군다나 1970년 김대중과 김영삼 모두 '결선 투표제도' 경험이 있었고, 1987년에도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더 아쉬운 역사적 '실수'다. 


2. 세간에 '돌대가리'라고 놀림당한 전두환보다 계략이 뒤졌다.  새 헌법 양당 타협안은 8월 31일에, 국민투표에 통과된 것은 10월 27일이다. 그렇다면 김영삼과 김대중의 후보 단일화 실패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거나, 못했기 때문에, '결선투표제도'를 개헌특위에서 다루지 못했는가? 이건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런 해석도 전두환과 민정당의 87년 정치계획표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정치적 무능'이라는 비난은 피해갈 수 없다. 


실제로 전두환은 4-13 호헌조치 이후, 전민 항쟁이 발생하자, 6-29 선언 이전에 이미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 후보가 분열하면, 민정당 후보가 승리할 수 있다는 계산을 했다. 전두환과 민정당이 6-29 선언을 통해 노태우를 그 후보로 내세운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정치 일정에서 '새로운 헌법' 타협은 언제 완료되었는가? 8월 31일이다. 10월 25일 고려대 집회에서 김영삼과 김대중의 '결별'이 현실화되었고, '직선제 헌법 (제 6공화국 헌법)'은 10월 27일 국민투표로 통과되었다. 


3. 1987년 7월 15일 민주당 (김영삼 당시 대표) 의원들이 '새 헌법' 토론 내용들을 보면, '결선투표제도'나 총선 '비례대표 제도'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었다. 


당시 민주당 의원들이 토론한 내용들을 잠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동학정신을 넣자, 한국 영토를 다시 정하자, 4-19와 5-18 정신을 강조하자, 근로자라는 단어 대신 노동자를 사용하자 등이다.


김영삼 대표는 대통령 선거를 빨리 앞당겨서 실시하고,13대 총선도 대선 이후 1개월 이내에 실시하자는 발언을 했다. '대통령 선거'가 급했고, 자신이 후보가 되어 당선되는 게 급선무였다는 게 김영삼에게 가장 중요했지, '결선투표'나 '대통령 제도 개선'에 대한 실질적인 고민은 없어 보였다.


4.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삼선 개헌으로 다시 대통령에 당선된 박정희는 1972년 유신헌법을 만들 때, 한태연과 갈봉근 같은 법학 교수들에게 프랑스 드골, 스페인 프랑코, 싱가폴 리콴유,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대통령 제도들을 연구하게 했다. 


그렇다면 1987년 당시, 왜 김영삼 (민주당 대표) 혹은 김대중은 프랑스 사회당 미테랑이 삼수 끝에 1981년 대통령 선거에서 1차 투표에서는 2위를 했지만, 2차 결선투표에서 1위를 했다는 것을 연구하지 못했을까?


소결론은 다음과 같다.


(1) 1970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 당내 경선에서 김대중과 김영삼은 '결선투표' 경험이 있었다.


(2)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결선 투표제도'를 새 헌법에 포함하지 못한 것은, 아니 하지 않는 것은, 결선투표가 없는 상황에서도, 혹은 김영삼-김대중의 후보 단일화 없이도, 1위를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김대중은 잘 알려진대로, 4자 필승론을 당시 주창했다.


(3) 위와 달리, 그냥 실수였을 수도 있다. 김영삼과 김대중은 결선투표 제도의 중요성을 알고서도, 조항에 삽입하지 않는 '실수'를 범했다. 


5. 교훈과 과제


대통령제도를 유지하는 한, 결선투표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87년과 같은 상황도 막고, 야당 분열이라는 여론도 제도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유럽 대부분 국가들과 같이 '내각제도'와 '수상제도'를 채택하려면 '개헌'을 해야 한다. 87년 제 6공화국 헌법 제도 단점과 문제점들을 여론화시킬 필요가 있다.


자료


1987년 10월 25일 김대중과 김영삼은 사실상 '단일화' 실패를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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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7월 15일, 새헌법에 대한 민주당 내부 토론 내용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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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12월 16일 대통령 선거 결과







1987년 10월 27일 국민투표로 '새 헌법' 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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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9월 15일자, 동아일보, 김대중계와 김영삼계 '단일화' 논의 언급, 낙관한다(이용희: DJ) 와 두 분이 알아서 결정해야 할 일이다 (YS 계, 김동영) 등 언급, 구체적인 방안 등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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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어: 결선투표제 (runoff : the two round system : the second bal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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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참고 자료: 유신 헌법: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61150

    2015.12.06 18:57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역사(history)2015. 1. 25. 09:38

1.1990년 1월 22일, 24년전 오늘은 현재 한국 정치 지형을 만든 역사적으로 중요한 날이다. 민주자유당이라는 거대 보수 정당이 태어났고, 전국노동자협의회 20만 조직이 탄생했다. (당시 단병호 위원장은 41세)

가장 기억에 남는 두 단어 "억압과 굴종의 시간"이다. 당시 노동자들의 마음과 현실을 가장 잘 표현한 두 단어, 누가 알았으랴? 97년 이후 더 악랄한 IMF 긴축통치로 전 한국사회가 시민 내전 상태로 빠져들어, 또 다시 신분제 자본주의에 맞서 "억압과 굴종, 노예를 거부"라는 똑같은 슬로건을 내 걸게 될지, 인간의 역사는 모질다. 어디로부터 그 반동과 복고, 반혁명의 폭풍이 몰아칠지 모르니 말이다. 



2.  1990년 1월 22일, 김영삼 헤어스타일, 노태우-김종필과 손 잡고 있던 사진. 그 전 해 겨울부터 떠돌던 보수대연합이 현실화되던 날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민자당이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의 이념 ideology "을 제 1원리로 삼는다고 밝혔다는 점이다. 이는 2015년 새누리당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또 하나 시선이 가는 대목은 "한국 정치가 늘 일본 자민당 정치를 닮아간다"는 걱정이다. 1997년 대선, 김종필과 김대중의 DJP연합으로 일본 정치와는 다르게 전개되었다. 역설적으로 가장 친-일 정치인인 김종필 때문에 민자당의 1당 장기집권 프로젝트가 좌절되었다. 물론 DJP 연합 정부는 가장 혹독한 IMF 긴축통치에 굴종해, 노동자들의 '해고'를 맘대로 하게 해줬고, 노동운동 탄압방식으로 '손배 가압류'라는 최고 악질적인 수단을 합법화했다.


교훈: 글로벌 자본주의 역동성에 대해서 추적. IMF 에 비토(veto)권 등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미국 등 국가들에 대한 연구, 미 재정부를 장악하는 월가( Wall street )  금융자본가들 추적 필요.


3. 1990년 1월 23일자 신문은 민주자유당 , 전노협 소식과 함께, 동유럽 동독 제 1당이었던 독일 사회주의자 통일 정당 이름을 '민주사회당'으로 바꾸자고 제안한 그레고 기지 Gysi (당시 42세) 소식도 외신으로 전하고 있다. 당시 동유럽 국가들에서는 '민주 개혁' 데모가 한창이었다. (구)소련식 사회주의 체제와 바르샤바 조약기구가 해체되고 있었다.

소련과 동유럽에서는 공산당에 저항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당시 한국에서는 거대 보수정당 (자유시장 경제를 지향하는 민자당)에 대한 저항이 거세지고 있었다. 세계사의 시계가 참 달랐다. 지금봐도 현기증나네.

기지와 볼프강 베르크호퍼 (1990,Januar)

알렉산더플라츠 광장에서 연설하는 기지 (1989 November),

Gregor Gysi : 독일 좌파당 정치가

SED: Sozialistische Einheitspartei Deutschlands, SED

SED-PDS: SED-Partei des Demokratischen Sozialism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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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조직 성장 연구 주제 : 개신교에서 카톨릭으로 개종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교황 프란시스 영향으로, 카톨릭이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역사적으로는 파쇼와 독재, 혹은 왕족과 손잡은 적이 많았다. 한국에서도 민주화 운동의 도우미로 알려진 김수한 추기경도, 정치적으로는 보수적이고, 노동자나 교사들의 정치적 행동에 대해서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노동자들을 탄압하는 김영삼 정부 편을 들기도 했다. 말년이 아쉬운 게 아니라, 그의 일관된 정치학이 개혁보수였기 때문에 이해가 간다.


그런데 주목할만한 현상이 하나 있다. 전 세계적으로 기독교 인구는 줄어들고 있고, 아시아만이 최후 보루 성장 지대로 남아있다. 미국에 유학온 중국대학생들이 교회를 다니는데, COOL 쿨 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과거 한국사람들처럼.


카톨릭 신자들이 한국에서 증가하고 있다? 이건 새로운 현상이다. '조직가'로서 카톨릭이 왜 성장세를 기록하고 있는가? 정치가들이 배울 필요가 있다. 특히 신념과 이념에 기초해 정치를 한다는 그룹에서는 더욱더 그렇다.

1) 자율성의 파괴

2) 관용 부족

3) 교회가 '승진'과 '계급 서열'로 다시 얼룩짐.


진보정당과 교회는 다르지만, 조직의 파괴 원인과 유사하다. 1) 개인들이 당에 들어와서 오히려 비판의식과 창조적 학습능력은 삭감되고, 관료적 집중제와 분파적 행위만을 배운다. 자기 공간의 부재, 이는 미래 비전의 부재로 연결된다. 

2) 자기 자신이나 자기정파의 내용이 빈곤한데, 이를 만회하기 위해 다른 의견을 가진 정파를 공격하거나 탓하는데 시간을 더 많이 할애한다. 

3) 정치적 이념과 가치의 확대에 필요한 정당 바깥 사람들을 당 안으로 끌어들이는 노력보다는, 자기나 자파의 지위 확보에 더 신경을 쓴다. 지난 12년간 진보정당이 쇠퇴한 내부적 요인이다. 9급 공무원 승진 체계보다 더 낙후된 당 운영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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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인 왜 가톨릭으로 개종하나? / 목회사회학연구소 주최 포럼

2006/12/01 (금) 10:38 ㆍ추천: 0

개신교 인구 감소의 원인과 가톨릭 인구의 상대적 증가 현상을 통해 한국 현대인이 어떠한 종교적 심성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 고찰해보는 뜻 깊은 시간이 마련되었다.

‘목회사회학연구소’(소장 조성돈 교수)와 사회학과 신학자들의 연구모임인 ‘일상과초월’은 11월 30일 한국교회백주년기념관에서 ‘2005 인구주택총조사 그 이후, 현대인의 마음을 사로잡은 가톨릭 성장’이라는 제목의 포럼을 공동개최했다.

주최측은 이날 포럼이 “지난 2005년 5월 개신교 인구가 지난 10년 동안 14만 4천명이 줄었다는 통계청의 인구주택총조사 결과에 대해 어떻게 하면 한국교회가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하는 고민에서 시작되었다”고 밝혔다.


가톨릭측, “청렴성과 타문화에 대한 유연성이 성장 이끌었다”


가톨릭은 인구주택총조사 결과 지난 10년 동안 74.4%나 증가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날 포럼에서는 개신교의 쇠퇴와 대비되는 천주교의 성장을 통해 현대인들이 어떠한 종교적 심성들을 가지고 있는가를 천주교와 개신교 목회자와 학자들의 연구조사를 통해 분석했다.


첫 번째 발표자로 나선 오경환 신부(인천가톨릭대학교 명예교수)는 천주교에 대한 호감의 원인으로 첫째 ‘천주교회의 결속력’을 꼽았다. 한국 천주교회는 서울, 인천, 의정부, 수원 등 15개 지역교구로 나눠지는데, 모든 천주교 신부들은 교구장의 허락 하에 인사 및 활동이 이뤄지며 교구 공납금 제도 등을 비롯한 재정운영에도 강력한 결속력을 보인다는 것이다.


오 신부는 둘째로 ‘천주교회의 청렴성’을 호감요인으로 소개했다. 독신생활을 하는 천주교 신부들과 수녀들은 주택을 소유하거나 재산을 모으는 일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기 때문에 신자들에게 성스러운 체험과 함께 신뢰를 쌓는다는 것이다. 또 천주교회가 각 성당의 수입과 지출을 신자들의 관리하에 투명하게 처리하고, 신자들의 헌금액을 절대 공개하지 않는 점도 호감요소로 지적했다.


셋째 요소로는 ‘천주교회의 정의와 인권활동’이 거론되었다. 1968년 강화도 한 직물공장에서 가톨릭노동청년들의 노동운동으로 시작된 천주교의 정의활동은 1972년 유신헌법 때 더욱 강력해졌고, 1987년 개헌까지 계속되었는데, 이때의 정의활동이 사람들에게 호감으로 작용했다는 설명이다. 실제 전국 15개 교구 중 정의활동에 적극적이었던 교구가 그렇지 않은 교구에 비해 신자 증가율이 높은 등 정의활동이 가톨릭 신자 증가에 실질적이었다고 오 신부는 설명했다.


오 신부는 넷째로 ‘조상제사와 장례예식에 대한 유연한 태도’를 호감요인으로 꼽았다. 한국 천주교는 1958년 이후 시체나 사진, 죽은 이의 이름이 적힌 위패 앞에서 절하고 향을 피우고 음식을 차려놓는 행위를 허용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유연성이 유교 문화에 젖어있는 많은 한국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고 천주교로 입교하겠다고 결심하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설명이다.


오 신부는 마지막 호감요인으로 ‘타종교에 대한 열린 태도’를 꼽았다. 천주교회는 1930~40년대까지만 해도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타종교에 대해서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자세를 견지해왔으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 이후 비그리스도교 전통들의 의미와 가치를 깊게 성찰하고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대표적으로 천주교의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 제2항에서는 다른 종교들에 대해 “비록 가톨릭교회에서 주장하고 가르치는 것과는 여러 면에서 서로 다르다 해도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진리를 반영하는 일도 드물지 않다”고 언급하고 있다.


개신교측 “한국교회, 성장 이데올로기에 빠져 성스러움 상실했다”


개신교인 입장에서 개신교인 이탈현상을 분석한 박영신 교수(실천신학대학원 석좌교수, 연세대 사회학 명예교수)는 “개신교회는 적어도 외형으로는 다른 집단과 구별되지만, 그 외에는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는 물질주의와 경제지상주의의 이념과 가치와 궤를 같이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즉 교회 밖의 사람들이 바라고 꿈꾸고 얻고자 하는 모든 것을 교회와 교인들도 가감없이 바라고 꿈꾸고 얻고자 한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또 “교인이 많아야 헌금이 많이 들어오고, 당연히 교회를 증축하고 재건축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한국교회의 성장 이데올로기 현실을 비판했다. 한국교회가 번듯한 대형 교회 건물을 올려놓으려는데 관심이 집중되고 있으며, 그것이 이른바 목회 성공의 잣대이며 성공한 교회의 평가기준이 되어버렸다는 지적이다.


박 교수는 아울러 한국교회의 ‘성스러움의 상실’도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특히 목회자들의 설교에 대해 “(신도들은) 진실성을 찾기 힘든 말만 되풀이하여 늘어놓고 싸구려 농담과 반말과 비속어에 신물이 났다”고 비판하며, “바깥에서 요란을 떠는 온갖 소리들과는 뜻과 지향성에서 다른 구별된 말씀에서 성스러움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목회사회학연구소는 이날 포럼에 앞서 개신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14명을 심층 면접조사해 한국인의 종교성을 ▷정체성이 약한 종교인 ▷가족주의라는 문화적 토대에 근거한 집단적 종교활동 ▷개인적이지만 성스러운 것을 추구하는 종교인으로 분석했다.


이날 포럼은 개신교 목회자와 신자, 가톨릭 관계자들 등 3백여명이 참석했으며, 기독교계 언론 등 다수의 취재진이 참석해 개신교 위기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대변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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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개신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14명 심층면접조사 결과 분석을 요약한 내용이다.


1. 개신교가 밀어내는 요인

▶개신교는 ‘표현’의 종교 - 자신의 내면의 모습을 성찰하고 성경의 가르침을 묵상하기보다는 빠른 박자의 찬양을 부르며 자신의 신앙을 표출하기에 애쓴다는 것이다. 설교나 성경에 대한 가르침에 대해서도 깊이 숙고하기보다는 ‘덮어놓고 믿는 식’이라며, 목사님 말씀에는 “할렐루야”, “아멘”하고 외치라고 하고, 하지 않으면 왜 “아멘”이라고 하지 않느냐며 다그친다는 것이다.


▶외형에 치중하는 교회, 자리싸움하는 교인 - 유아세례를 받고 30대까지 교회 생활을 하다가 개종한 한 여성은 교회에서 헌금 그래프를 그려놓으며 헌금을 많이 내도록 강요했고, 헌금을 많이 한 어떤 교인이 교회에 출석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금세 집사가 되는 것을 보고 크게 실망을 해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고 말한다. 유명 교회에서 집사로 구역장을 지내다가 권사 후보에 오른 후에 성당으로 옮긴 한 개종자는 “자기 교회와 같은 좋은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을 무시하면서 쓸데없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보다는 목사님을 하나님같이 섬기며 장로나 권사가 되려고 선거운동 하는 모습에 질렸다”고 말한다.


▶가족 같은 교회, 시댁 같은 교회 - 개신교회 구성원들은 서로 간에 매우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며 가족과 같은 분위기에서 신앙생활을 하는데, 이것은 친근감을 준다는 좋은 점도 있지만 사생활의 영역이 침범 당한다는 느낌을 주어 불편하게 하기도 한다. 특히 중보기도회와 같은 자리에서 은밀하게 나눈 기도제목조차 다른 사람들에게 공개되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람이 다가와서 “내가 기도하고 있다”는 말을 들을 때면 고맙다기보다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라는 것이다.


2. 천주교가 끌어들이는 요인


▶세속스러운 교회, 성스러운 성당 - 성당의 엄숙한 분위기는 개신교의 화려하고 활기차지만 ‘시끄럽고 가벼운’ 교회 분위기와 대비된다. 천주교의 엄숙한 분위기에 있다 보면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더 나아가 용서받는 것 같은 감동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또 개신교의 목사들이 일반 성도들과 같이 가정을 이루고 자식도 낳고, 그래서 돈의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세속적일 수밖에 없지만, 반면 결혼을 하지 않고 그만큼 경제문제로부터 자유로운 신부나 수녀들은 훨씬 더 성스러운 생활을 하고 존경할 수 있다고 말한다.


▶피곤한 교회, 자유로운 성당 - 인터뷰한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갔을 때 교인들이 자신들에게 보이는 친절이 진정성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신자를 끌어들이기 위한 가식처럼 느껴진다고 말한다. 그에 비해 천주교는 ‘미온적’이고, ‘너는 너, 나는 나’로 깊이 사생활 침해는 안하려고 노력한다고 말한다. 물론 천주교도 개신교처럼 조직이나 구역으로 다 나누어져 있지만, 활동이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에 ‘자유롭게’ 다닐 수 있다는 것이다.


▶흑백 논리의 교회, 융통성 있는 성당 - 많은 사람들이 천주교에는 술과 담배에 대한 규제가 없다는 것, 제사를 허용하고 있다는 점, 다른 종교에 대해 관용적인 태도 등을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다원주의적인 현대 사회에서 폐쇄적인 개신교에 비해 천주교는 개방적이고 융통성이 있다는 이미지를 갖게 한다.


조준영 eunbi@newspow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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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J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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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999

    다 각설하고 카톨릭이 잘해서가 아니라 개신교가 똥을 싸고 미쳐서 입니다.

    2014.12.29 12:04 [ ADDR : EDIT/ DEL : REPLY ]

한국정치/민주당2014. 8. 9. 15:43

한홍구 강연이 놓치고 있는 역사적 사실



1. 민주당 투쟁근육을 좀 먹었는가를 설명하지 못했다. 역사적으로 투쟁하는 야당의 성공담을 흑백 다큐멘타리로 틀어주었으나, 민주당(새정련)이 그 투쟁하는 야당 근육을 만들어낼 지는 의문이다. 8월 5일 강연회 직후, 세월호 진상 규명 특별법을 서둘러서 새누리당에 헌납한 것은 불길한 징조이다.



무엇을 놓치고 있는가? 한홍구 <어제의 야당>은 민주당(새정련)과 민주당 의원들이 왜 박정희 전두환 독재시절에 가지고 있었던 투쟁근육을 다 잃어버렸는지 그 원인들을 ‘역사적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하에서, 그리고 이명박 박근혜 정부 하에서도 민주당 대다수 의원들이 새누리당 의원들이 누리는 기득권을 동일하게 누린 사실들을 빠뜨리고 있다. 박정희 전두환-노태우 독재에 저항하는 야당 투쟁근육이,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어떤 정치적 측면과 저항해야 하는가?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박정희-전두환과 동일한 군사파쇼 정부가 아니지 않는가?



특히 한국정치사 경제사에서 1997년, 전세계적으로 가장 혹독한 IMF 긴축 정책을 수용했던 김대중 정부 이후, 2014년 지금까지 소위 민주당 야당의원들은 과거 신민당-평민당과 달리, 한나라당-새누리당 의원들이 누린, 다시 말해서 박정희-전두환 시절보다 더 혹독해진 한국 자본주의 성과를 그들의 정치 경쟁자 새누리당과 같이 향유했다.



박정희-전두환 독재 하에서 상층 20%가 소유한 재산보다 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를 거치면서 상층 20%가 소유한 재산이 차지하는 비중은 4배,5배까지 증가했다. 그만큼 상대적으로 하층, 중산층은 붕괴되거나 상대적 박탈감에 빠지고 말았다. 



OECD 각종 소득 통계나 세금 이후 가처분소득 통계를 봐도 상위층과 하위층의 격차는 박정희-전두환 독재 치하보다 5배~7배 이상 벌어졌다. 심지어 2014년 통계를 보면, 한국 소득 상위 1%가 전체 소득의 16.6%를 차지할 정도가 되었다. 전체 국민 소득 구간를 5개로 나눴을 때, 최상 20%가 최하 20%의 소득 격차가 2.5배 이상 발생해서는 안된다. 진보좌파야 소득격차를 1에 가깝게 하기 위해서 노력하겠지만, 최소한 민주당과 같은 리버럴 정당 (liberalist ) 에서는 2~3배 사이로 막아야 한다.



민주당의 투쟁 근육이 좀먹거나, 그 근육이 주근깨, 혹, 반점, 지방덩어리로 변질된 이유는, 박정희-전두환 군부독재와 싸웠던 그 치열한 투쟁정신만큼, 1997년 이후 한국 사람들을 병들게 만든, 노동의욕을 감퇴시키고, 살 맛 떨어지게 만들었던, 이 소득 격차, 일해도 가난해지고 상대적 박탈감만 생기는, 한국 자본주의 병폐와 투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자본주의 병폐와는 좌파만 투쟁하는 게 아니라, 전 세계 각국 리버럴리스트 정당들도 어느 정도 (타협적으로 하더라도) 실제 사회복지 정책들을 도입한다.



한홍구 <어제의 야당> 강연이 시사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왜 민주당 의원들이 97년 이후 새누리당 (한나라당) 의원들과 별반 차이가 없는가? 과거 386-486 학생회장 민주당표 국회의원들이 실제로는 한나라당-새누리당 의원들과 일상 생활에서 향유하는 경제적 성과물, 다시말해서 절대적 상대적으로 박탈당한 노동소득의 격차 그 기반 위에 서 있다는 역사적 사실을 <어제의 강연>이 말했어야 했다.



인간은 당연히 경제적 동물만은 아니다. 월급 총량이 정치적 의식을 100% 규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 배가 부르는데 배고픈 자의 심정을 알기 역시 쉽지 않다. 박정희-전두환 고문정치, 최루탄 정치, 중앙정보부-안기부 정보정치, 반공-반북 사상 이데올로기 정치에 맞서는 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어려운 정치가 바로, 자본주의의 소득 격차 문제이고, 그것을 가능한 법률적 사회적 교육 문화 제도 장치이다. 







한홍구 교수 강연 내용 요약: by 원시


제목: 어제의 야당

글쓴이: 한홍구(성공회대학교)

발표 시간 및 장소: 2014년 8월 5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제1세미나실)

주제: 야당 어디로 가야 하는가

http://www.polinews.co.kr/news/article.html?no=211559



1. 핵심 주장:

헐거워진 허벅지 투쟁근육을 튼실하게 하라. 투쟁하는 야당 (투야)가 되어라.


2. 한홍구의 진보정당 인식: 2004년 총선과 노무현 탄핵 국면에서 야당지지자들이 열린우리당을 제 1당으로 만들어주고 그에 덤으로 민주노동당에 10석을 준 것이다.



3. 투쟁하는 야당 강연 역사적 논거:


1971년 8대 선거에서 신민당 의석수를 그 이전 40석에서 89석으로 늘려줌 (투쟁 대상은 박정희 영구집권 획책인 유신헌법 반대)


1985년 신민당 제 1야당 전격 진격 (사쿠라 야당인 민한당을 대체할 반-전두환 독재 투쟁 야당 신민당 승리)


1992년 총선에서 공룡보수-민자당 (김영삼+노태우+김종필) 221석을 149석으로 만들고,김대중 평민당과 꼬마민주당에 97석을 주었다.

그 이후 총선과 대선에서도 마찬가지로 투쟁하는 야당을 유권자들이 지지했다.



4.대안


정치 주체 386-486들이 각성하라. 비육지탄(髀肉之嘆)


30년간 학생회장이지 정치적 ‘성인’이 되지 못했고, 애늙이로 전락했다.


광주 정신과 DJ 김대중 정신을 계승하고, 호남 정치를 복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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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표 선거설문 결과발표 (1) 3~4명 후보 새얼굴들의 검증을 기대한다 59%

원시 조회 수 378 댓글 1



지난 9월 27일부터 10월 3일까지 1주일간 당게시판에서 개인적으로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대략 83명 당원이 참여했습니다. 엄밀한 설문조사는 아니지만, 당대표 선거에 참고했으면 합니다. 아울러 당원들의 많은 의견도 부탁드립니다.


2012년 4월 총선, 지금으로서는 단순한 <비관>이 아니라, 당 해산을 <각오>하는 당원들의 내부의지와 서로에 대한 신뢰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봅니다. 제가 볼 때는 지난 3년간 진보신당 뼈를 깎는 <와신상담: 방바닥에서 자지 않고 나무 장작 위에서 자면서 쓸개맛을 보면서 부활을 꿈꾸는 그런 와신상담>하지 않았습니다. 민주노동당 국회의원표 달고 진보신당 정치했습니다. 당원들 팬들에 불과했습니다. 이 팬들에 불과한 당원들이 90분 전후반 다 뛸 것 같습니까? 전반 10분 뛰면 다리 쥐나서 포기할 것입니다. 이게 현재 <진보신당> 객관적인 능력의 현주소입니다.


그런데 왜 다들 싸우고 인신공격하느냐? 심성이 나빠서 그런 거 아닙니다. <검증>받을 기회라도 있었나요? <대중 정치가>로 교육받을 기회라도 있었나요? 통합파라고 하는 정종권 전부대표, TV, 라디오 토론회(*당원이라디오 말고 KBS, MBC, SBS, 하다못해 불교방송,CBS) 한번 등장한 적 있나요? 또 강경-열대-온난-툰드라-시베리아-독자파들은 어떠합니까? 


<폐허> <난파선> 당. 좋습니다. 앞으로도 지난 4주간 보여준 <너 나 때렸냐? 내가 제일 아프다>식으로 정당 운영하면, 진짜 <폐허> <난파선>당이 될 것입니다. 주어진 시간 많이 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당 설문결과 보시면 알겠지만, 지금 당원들이 바라는 것은 <당 역량 강화>와 <내부 통일성>을 어떻게 높일 것인가? 그 방안을 놓고 당대표들이 공개 경쟁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짧게 결과에 대한 소견을 쓰겠습니다. 다른 분들도 의견 주시기 바랍니다.


1. 당대표 후보군 (설문조사에서 대표-부대표 러닝 메이트 제도도 고려) 숫자를 보면, 59% 설문에 응한 83명 당원들 중 거의 60%가 3명에서 4명 정도 새로운 얼굴들을 발굴해보자는 의견을 주셨습니다. 2번 문항은 <당역량 강화방안> 과 <통합논쟁> 등을 동시에 다루자는 설문이었는데 25% 당원들이 선택했습니다. <통합>논의를 전혀 하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당원들의 여론 속에는 차기 당을 이끌어나갈 새로운 얼굴들을 <당 대표 선거>를 통해서, 3~4개 팀이나 개인들을 보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2011_설문_당대표후보_숫자.jpg



2. 당내 서로 다른 정치적 경험을 가진 세대별 분류 ;


이 분류는 당연히 영원히 서로 다르다? 이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당의 <정치적 철학적 정책적 정치활동의 통일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조사 작업입니다.

70년대 7%

80년대 42% (*소위 언론에서 말하는 386 세대, 진보정당에서는 87년 노동자 대투쟁 세대+ 전노세대 )

90년대 25%

2000년대 25%

설문에 응한 분이 76명이지만, 전 당적으로 조사하더라도 이러한 분포도를 보일 것입니다.



2011_설문_당원들_정치경험_세대분류1.jpg





3. 논쟁적인 설문 결과이긴 합니다.


하지만, 44% 가 <진정한 통일성>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 당 정치활동이 뭐가 필요한가? 당원의 자기 미래, 당에서 자기 역할, 당 운영상의 창의성과 민주성 등을 확보하기 위해서, 의사소통를 개척하기 위해서는 뭐가 필요한가? 세대별로 꽉 막혀, 자폐적인 관성적인 사업방식, 또 만나자 마자 <형님, 언니, 누나....야, 누구 하면서 반말하고...등등> 이런 사람들 관계 문제에서부터, 조직화 방식들에서, 생활문화까지 다 재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36%가 반대한 이유로, 아직 시기상조이다. 이 말은 44%의견에 대해서 동감하기도 하지만, 현재 당이 처한 처지, 위기상황을 더 적극적으로 먼저 해결하자는 의견으로 해석됩니다.


2011_설문_당원들_정치경험_세대_후보1.jpg




4. 이 설문은 아예 그렇다며 세대별 대표 경선은 어떻냐는 <조금 막 나간. 극단적인 한 사례>입니다.


50% 당원이 진보의 재구성과 세대별 분류 상관도는 약하다는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설문자인 저의 의도는 꼭 이렇게 세대별 경선을 하자는 아닙니다. 다만 앞으로 당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당에서 그동안 발굴하지 못한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키울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Posted by NJ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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