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김숙흥2

고려가 거란 연호를 사용하기로 협정. 1022년 4월.고려는 강동 6주를 거란에게 돌려주지 않음. 고려가 거란 연호를 사용하기로 협정. 1022년 4월. 고려는 강동 6주를 거란에게 돌려주지 않음. 1022년 4월 미상 거란에서 왕을 책봉하니 거란 연호를 사용하다 여름 4월 거란(契丹)에서 어사대부 상장군(御史大夫 上將軍) 소회례(蕭懷禮) 등이 와서 왕을 개부의동삼사 수상서령 상주국 고려국왕(開府儀同三司 守尙書令 上柱國 高麗國王)에 책봉하고, 식읍(食邑) 1만호와 식실봉(食實封) 1천호, 아울러 수레와 의복, 의례에 사용하는 물품을 하사하였다. 이때부터 다시 거란의 연호(年號)를 사용하였다 1022년 4월 28일 정묘 채충순을 서경유수로 임명하다 hoi 정묘 채충순(蔡忠順)을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 겸 서경유수(西京留守)로 임명하였다. 야율융서 (요나라, 거란, 성종)와 고려 현종 사이 협정 .. 2024. 1. 16.
고려-거란 전쟁 tv 드라마. 양규,김숙흥의 죽음이 민의 마음을 하나로 만들다 (중심내일 衆心乃一) 고려-거란 전쟁 드라마 중. 양규와 김숙흥은 드라마처럼 거란군의 수많은 화살을 맞고 전사했다. 그들의 이러한 장렬한 최후가 고려백성들과 군사들을 '하나로 만들었다' 중심내일( 衆心乃一) 1010년 제 2차 거란-고려 전쟁. 거란과 고려 (현종) 사이 휴전 협정이 성사되었다. 조건은 고려 현종이 거란 성종에게 친조 ( 親朝 - 제후국 고려 현종이 황제국 거란 성종을 알현하러 감)였다. 고려 수도 개경을 함락한 거란이 압록강을 건너 거란으로 돌아가는 과정에, 고려 백성 수만명을 포로로 잡아가고 있었다. 양규는 거란의 제 2차 침략 과정, 1개월 간 7번 싸워, 포로로 잡힌 고려 백성들, 3만을 구출해 냈다. 거란군이 압록강을 건너기 전, 양규와 김숙흥은 고려 백성을 구하고자 퇴각하는 거란군과 일대 혈전을 벌.. 2024. 1. 13.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