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정치/정의당2020. 5. 11. 18:15

정의당에 대한 전우용 교수의 오진과 오해 (메모) 

민주당,통합당의 정의당 비판이 타당하면 수용하고 그래야 한다. 그러나 전우용 교수의 정의당 진단과 평가는 설득력이 결여되어 있다. 


전우용 교수의 페이스북 글 요지는 다음과 같다. 정의당이 2020년 총선에서 경제적 불평등과 같은 '구 좌파 (구 정치)' 주제보다는, 여성,청년,기후정의,동물권과 같은 '신 좌파(신 정치)'로 기울어져, 유권자들이 정의당에 대해 혼란을 겪고 말았다. 21대 국회에서 정의당이 무게감있는 진보정당 역할을 할 지 의문이 든다.


(1) 전우용 역사학자는 서유럽을 보면서, '경제적 불평등, 분배정의, 군사 안보'와 같은 구정치,구좌파 주제가 발전하고 난 다음, 신 정치(뉴레프트 주제들)이 등장한다고 봤다. 그런데 환경운동,녹색연합 운동이 출발한 게 1980년대 말, 90년대 초라는 점을 '역사적으로' 탐구하지 않은 탓에, 전우용 교수는 이러한 '구 정치' 다음 '신 정치'라는 기계적인 이분법에 빠졌다. 


서독의 '녹색당'과 같은 뉴레프트 주제, 환경과 평화 주제가 한국에서도 벌써 30년 넘은 역사를 가지고 있음을 전우용 역사학자는 인식해야 한다. 

기후정의, 코로나 19 위기와 같은 의학의 영역에서도 '불평등'은 존재하고, 구 정치와 신정치는 착종되어 더 복합적인 정치 문제로 등장함을 전우용 역사학자는 인지할 필요가 있다. 


(2) 한국 지성사라고 할까? 문학사, 역사학, 철학, 사회과학 역사에서, 1960년대~1970년대에서유럽의 '신 좌파' 흐름들과 사회적 저항 시를 담은 포크 송, 서구 록 음악을 한국사람들이 수용했다. 


기존 마르크스주의와 소련 사회주의 추종자들과 달리, 미국/서유럽의 노동자계급은 문화적으로 경제적으로 미국 자본주의 체제에 동화되어 있기 때문에, 오히려 체제에 포섭되지 않은 '변방인들, 배제당한 사람들, 아웃사이더, 유색 인종, 실업자' 와 반전운동 (베트남 전쟁 반대 등) 선봉에 선 학생들과 청년들이 미국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본 마르쿠제 (Marcuse)의 아이디어도 한국에 소개되었다.


프랑스 앙가주망, 장 폴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철학이나 문학 등도 기존의 구 정치보다는 신 정치 내용을 많이 담고 있다. 찬반을 떠나, 사르트르는 소련 마르크스주의를 '게으른 마르크스주의'로 비판하며, 사상과 언론의 자유를 탄압하는 소련 체제를 격렬히 비난했다. 


1980년 518 광주항쟁 이후, 전부는 아니지만 대다수 한국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은 소련사회주의 교과서와 북한 주체사상 교과서를 반독재 반제국주의 투쟁의 기초 안내서로 받아들였다.


전두환-노태우 군사독재 타도 운동은 실천적으로 진지했고 격렬했으나, 그 이론적 철학적 지적 분위기는 세계사와 동시대 국제정치로부터 동떨어져, 특이하게 고립적이고 폐쇄적이었다. (이 부분은 이후 상술함)


(3) 이러한 실천과 이론의 괴리에도 불구하고, 한국 민주화 운동, 시민운동, 신좌파라고 할 수 있는 생태, 여성 운동 등은 80년대부터 꾸준히 성장해왔다.


그리고 실천적으로도 구정치(구좌파) 의 주체인 노동자, 농민들이 환경오염의 직접적인 피해자이기 때문에, 구좌파와 신좌파의 '공통 분모'는 그 차이에 비해 상당히 크다고 볼 수 있다.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여성+사회주의 = 마르크스주의적 페미니즘, 생태+ 마르크스주의 = 생태 사회주의 (ecosocialism)이라는 융합 좌파 상품이 존재한다고 선전하고자 함이 아니다. 이들 패러다임 간에는 상충, 갈등요소가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에, 공통 분모만 강조해 아무도 깰 수 없는 '합금'이라고 과장할 필요도 없다. 


오히려 한국 좌파, 진보정당의 특질은, 70년대 박정희,80년대 전두환 노태우의 '독재정치'와 구별되는 '다원주의적 민주주의' 정신이, 행동과 조직화의 원천이다. 학생과 여성들의 머리카락과 신체를 국가 경찰과 군인이 함부로 깎아버리고, 개인 공간 (personal space)를 동의없이 구타, 처벌하고, 획일적인 이데올로기 (반공, 반북)를 암송하지 않으면, 감옥에 가두는 체제에서, '다원주의와 관용'은 저항의 원동력이 되었다.


70년대~80년대 한국 학생운동은 단지 '반독재 저항 투쟁'만이 아니었고, 기득권과 기성세대 문화와 이데올로기를 거부하는 '세대 간 투쟁'과 문화투쟁도 포함하고 있었다. 

  

한국은 5천만의 인구를 가진 커다란 나라이다. 서유럽의  UK,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규모이다. 진보정당과 좌파정치의 발전경로가 서유럽이나 미국의 그것과 같을 수 없다. 역사에서도 정치와 마찬가지로 국가별로 '비동시성'과 '동시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서유럽이 구정치 먼저 하고 신정치는 나중에 했으니까, 한국도 그럴 것이라고 막연히 대입하는 것은 기계적인 종속적인 사고방식이다.


4. 정의당이 발전하지 못한 이유는, 구정치를 덜 발전시키고, 신정치만 해서가 아니다. 신정치 내용이건, 구정치 내용이건, 그 깊이와 뿌리가 아직 허약하기 때문이다. 진보정당으로서 정의당, 그리고 지난 20년간 진보정당이 노동자 시민들의 기대보다 그 발전 속도가 더딘 이유는, 전우용 교수의 견해와 달리, 다른 100가지 넘는 이유들이 존재한다. 이에 대해서는 따로 서술하겠다.



관련 글 (1) 구 좌파, 신 좌파란? https://bit.ly/3bsRS41


(2) 생태운동과 결합 : 신좌파와 구좌파 공존 https://bit.ly/2LhqHhV 


(3) 노동-생태 공통분모를 찾아라 : https://bit.ly/3bjXAFe





Posted by NJ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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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비교/노동2018. 12. 19. 02:26

들뜬 사회의 적 “왜 세심하지 못했을까 ?” 



사람 귀중한 줄 아는 나라, 그리고 진보정당의 책임.



철로 보수공사를 하던 9명 중에, 7명이 무궁화 열차에 치여 사망했다. 왜 선로 작업을 책임지고 있는 철도청 역장과, 시공사 대진철도 회사는 열차운행 시간 파악을 하지 않은 채, 그리고 공사 감리단의 작업지시와 감독도 없이 노동자 9명만 철로로 나아가게 했는가 ? 왜 세심하지 못했을까 ? 이런 생각이 맴돈다. 



7명의 노동자들 모두가 40에서 50 사이였다. 하루 일당이 6만원에서 10만원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유족들과 회사, 철도청과 보상금 협상에 들어갔다고 한다. 복리식(라이프니츠식)이냐 단리식(호프만식)이냐를 놓고 유족측과 회사(+철도청)과의 마찰이 있다고 한다.



얼마전 유시민의 구정치/신정치, 구좌파/신좌파 구별에 대해서 비판을 가한 바 있다. 구정치의 주제들, 경제, 정치, 사회, 안전, 군사와 안보등이 신정치의 주제들, 삶의 질, 평등권, 자아실현, 참여, 인권 주제등과 복잡하게 서로 얽혀 있음을 지적했다. 한국이라는 역사적, 정치적 현실 때문에. 



새벽 1시에, 온 국민이 다들 자고 있을 때, 철로 위에서 9명의 40대 중년 남자들이 일하다가 열차에 치여서 죽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 



이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무엇으로 보상할 것인가 ? 호프만식이니 라이프니츠식이니, 그것도 다 좋다. 남은 유가족들의 생계를 위해서. 하지만, 작업장 원칙, 작업 순서의 원리들을 무시하고, 사람들을 일터로 가게 한 그 사회 사람들의 의식, 그 의식 구조, 습관, 행태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 몸을 쓰는 단순 노동자이건, 고 배달호씨처럼 스카핑 용접공이건, 테에란 강남 사무실에서 일하든 IT 기술노동자건, 일하는 사람들의 신체의 안전을 배려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들의 자화상이, 이번 사건의 핵심이다. 특히 육체노동자들에 대한 사회적 무시, 그리고 스스로 무시, 그런 의식들의 내재화 과정, 이 모든 것들이 이번 7명이 한꺼번에 철도 위에서 사망하게 된 원인이다. 



섬세해야 한다. 사람들의 생명, 신체의 안전에 대해서 진보정당은 특히 더 세심한 배려와 관심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사회주의/진보의 아젠다를 찾아서, 서유럽의 신사회운동(NSM)의아젠다만을 ‘진보’로 착각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된다. 아주 기본적인 구정치의 주제들(경제, 정치, 안전, 안보, 군사)에 대해서도 여전히 새롭게 연구하고, 이 주제들이 국민들과 시민들, 특히 노동자들의 삶과 직결되어 있다면, 제도적, 법적, 의식적 차원에서 깊이있게 연구해서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작업장에서 안전(이는 단순히 공장만으로 공간을 한정시켜서는 안된다. 8시간 일하는 모든 작업장, 엔지니어, 과학자, 화이트칼라, 학교, 공무원, 공장 노동자, 가내 노동자, 재택근무, 가정 주부/아저씨 등) 문제를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은 철저하게 책임져야 한다. 



1977년 당시, 미국 공중 보건청 통계에 따르면, 일년에 39만개의 직업병이 새롭게 등장한다고 한다. 현재 2003년에는 산업규모나 종류로 봐서 더 많은 직업병들이 존재하고 있다. 특히 한국에서, 노조가 없는 노동자들, 비정규직 노동자들, 사무실에서 저임금으로 일하는 여성 노동자들, 농업에 종사하는 농민들의 경우는, 더욱더 위험에 노출되어 있고, 신체의 안전을 보호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 



직업병, 산업재해, 안전사고 문제를, 직접적 신체 손상만으로 그 영역을 좁혀서 생각해서는 안된다. 영국에서 발간된 조사에 따르면, 암의 80%는 환경적 요인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특히 서울처럼 대도시, 더럽고, 사람들이 한꺼번에 많이 몰려있는 도시에서 일하는 사무식 노동자들 또한 산업재해에 직/간접적으로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손가락이 잘리고, 뼈가 부러지는 외상만을 산업재해, 직업병으로 국한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도시환경, 그리고 심리적, 사회적 조건 등도 반드시 신체의 안전과 건강이라는 주제에 포함시켜야 한다.



그래야, 신정치의 주제, ‘삶의 질’을 높일 것 아닌가 ? ‘안전’이라는 기본적인 구정치 주제, 신체의 안전과 건강이라는 아주 기초적인 주제에 대해서,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은 어느 정당보다도 더 세심하게 관심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꼭 새벽 1시에, 다들 잠자고 있을 시간에, 무슨 인생의 업보를 타고 태어났다고, 철도에서 국민들의 생활을 편리하게 하겠다던 노동자들 7명이나 죽게 해야 하는가 ? 들뜬 사회에서, 다시 기초공사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가슴 아프게 생각해보는 밤이다.



2003-2-16


-07/10

Posted by NJ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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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litical leadership2016. 8. 10. 07:00

2013.07.12 23:00

평화노동당 (노동 해제3) 노동자 중심성이 아니라, 생활터전의 중심주체를 말해야

원시 조회 수 453 댓글 2


평화노동당 : (노동 해제 3) 노동자 중심성이 아니라, 생활터전의 중심주체로서 노동자를 말해야 한다


평화노동당의 당명은 노동 패러다임 바깥, 일터를 포함하긴 하지만 생활터전이라는 보다 더 포괄적인 삶의 공간에서 노동자들의 자유와 평등, 행복의 실현을 담고자 한다. 만약 노동 바깥인데 왜 ‘노동당’ 명칭을 쓰느냐? 형용모순이라고 지적한다면 그 비판은 수용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명칭에 노동이라는 말을 쓰는 이유는 실천주체에 대한 고민 때문이다.


노동정치, 노동해방정치, 또 진보정당 좌파정치는 노동자라는 존재 자체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다. <평화 노동당>에서 초점을 맞추는 정치는 노동자들의 정치적 문화적 의식들을 형성하는 요소들이다. 극단적으로 우리에게 불리한 현실을 먼저 이야기하자. 한국에서 노동자들의 대다수는 민주당도 진보좌파정당도 아닌, 새누리당에 투표하고 있다. 이 문제를 계급을 배반하는 투표행위라고 서술한다고 우리의 정치적 임무는 끝나지 않는다.


우리는 왜 한국의 노동자 대다수가 새누리당을 지지하고, 리버럴리스트 민주당에 투표하는지를 설명하고 그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한국의 노동자들 대다수가 보수-새누리당에 투표하고 있는데, 계급 혹은 노동 패러다임이 아직도 유효한가? 이런 질문은 당연히 던질 수 있다. 여전히 유효하다. 문제는 그러한 유효성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의식 구성요소들에 직접 뛰어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자 계급과 그들의 정치적 의식 사이에는 샛강이 아니라 한강 두만강이 흐르고 있다. 정치의식들을 규정하는 요소들은 가족,지역,종교,가치관,계급,계층,정치적 경험들, 문화 등 수없이 많다. 다르게 표현하면 일하는 사람들, 노동자의 계급의식이나 정치적 의식은 계급과 연관되지만, 계급/노동 패러다임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의식규정요소들 사이에 위계순서,우선성(경제,정치,문화 요소들)이 아니라, 의식의 변화 가능성과 방향성이다.


한국 자본주의와 일상생활 속에서 노동자의 정치의식을 쳐다보면, 직종 숫자 만큼이나 천차만별이다. 97년 IMF 신자유주의적 긴축통치 이후, 자본과 국가권력이 노노갈등을 부추기는 것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이미 수 천가지 직종들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정치의식들과 계급의식들을 천차만별이다. 당장에 민주노총 내부 조합원들 사이에도 정치의식들이 다르고 계급의식이 단일하지 않다.


우리 당은 이러한 다양한 노동자들의 정치의식들과 실천들과의 정치적 소통을 해야 한다. 그러한 소통을 바탕으로 노동자 정치의 방향성을 제시해야 한다. 


생활터전 도시와 정치 사진 2009.jpg 


 (향후 30년간 한국 좌파 정당 운동에서 가장 주요한 주제로 떠오를 도시 공간 정치라는 주제. 어떤 토론회장,

좌파정당으로서 우리 당이 심혈을 기울여야 할 정치적 주제들이다)


이런 맥락을 고려할 때, 최근 “노동 중심성”이라는 단어는 전략적인 측면에서 수정되어야 한다고 본다.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첫 번째는 현장에서부터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다시 해보자는 좋은 취지에도 불구하고, 위에서 토론한 노동계급의식의 정치적 집결체로서 정당운동이 왜 실패했는가? 그에 대한 대안들은 무엇인가에 대한 정치적 기획이 뚜렷하지 않다는 것이다. ‘중심성’ 강조에 앞서 노동자들의 계급의식들의 분화에 대한 정치적 대책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 과거 사회당을 보면, 이미 구정치의 영역 (노동, 복지, 군사, 안보, 안전 등) 뿐만 아니라, 신정치와 새 사회운동의 영역인 평화, 녹색, 여성, 생태, 인종차별반대, 소수자 운동 주체들이 참여하고 있는 현실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중심성이라는 말이 어떤 특정 집단의 정치적 헤게모니 선점으로 오해될 소지가 다분하다.


그렇다면 대안은 없는가?

노동자 중심성이 아니라, 노동자가 생활터전에서 정치의 주체로 되어야 한다로 바꿔야 한다. 굳이 노동과정에서 노동자들의 진정한 자유나 해방과 구별해서 말하자면, 삶의 터전에서 자유와 평등의 구현이라는 표현을 쓰고 싶다.

위에서 말한 노동자 정치의식과 계급의식의 형성 지역, 그 충돌과 갈등이 일어나는 공간이 바로 우리들의 삶의 터전이다. 좁게 말하면 도시공간이다. 97년 이후 한국자본주의가 규정한 삶이란 어떠한가?


일터에서는 노동자도 친구도 없다. 정규직 비정규직 갈라져 있고, 유니폼도 다르고 소득도 다르다. 삶의 터전인 쉼터, 놀이터, 집터 역시 ‘있는 자’와 ‘없는 자’로 분열되어 있다.


생활터전 도시와 정치 구로 민중의 집.jpg 

 ( 좌파 정당이 삶의 터전에 뿌리 내리기 시도를 하고 있다. 구로 민중의 집 사진. 보수적 시민사회와의 경쟁에서 살아남느냐가 관건이자 정치적 과제이다.)


노동운동이 살기 위해서는, 또 진보좌파정당이 부활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삶의 터전, 일터, 놀이터 쉽터, 집터 등에 끊임없이 침입하는 자본과 돈, 부당한 권력과 맞서 싸우고 저항하는 것이다. 노동자들의 정치적 임무는 일터에서 재산권 생산수단, 노동소득을 다루는 법률, 집터에서 도시계획, 아파트 용적율, 뉴타운 건설 등, 쉼터 놀이터에서 문화 스포츠 활동에서 계급차별적 요소들을 발견하고 제거해나가는 것이다.


도시라는 공간 자체가 계급적이다. 우리들의 행복과 희로애락 역시 계급계층차별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도시 공간의 사적 소유 재산권과 자산에 대한 해체와 재구성에 돌입해야 한다. 좌파 정치의 중요한 주제들은 일터와 ‘노동’ 안 패러다임에서만 발견되지 않는다. 일터를 포함한 포괄적인 삶의 터전 속에서 계급계층 차별적 요소들을 제거해 나가는 것이 좌파 정당의 정치적 임무이다.



Posted by NJ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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