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518 광주항쟁
아직도 현재 진행형...숫자로 보는 5.18 민주화 운동
중앙일보
입력 2018.05.17 06:30
박해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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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계엄군에 구타 당하는 시민(왼쪽). 당시 전남 도청앞 금남로에서 수많은 군중과 버스에 탑승한 시민들이 계엄군과 대치하고 있다. [연합뉴스]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지 올해로 38년째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5.18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지지 못한 수많은 의혹들이 남아 있다. 아직도 현재 진행형인 5.18 민주화운동을 숫자로 살펴봤다.
24세 vs 52세
5.18 최초 공식 사망자 고(故) 김경철 씨(왼쪽). 5.18 당시 발포 명령을 거부해 직위 해제 된 후 고문을 당하고 후유증으로 숨을 거둔 고(故) 안병하 경무관 [연합뉴스]
5.18의 최초 공식 사망자는 24세 청각장애인 김경철 씨다. 1980년 5월 18일 오후, 3~4명의 공수부대원들은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길 가던 김씨를 구타했다. 머리를 다친 김 씨는 적십자병원을 거쳐 국군통합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다음날 새벽 3시 사망 판정을 받았다.
1980년 10월 52세를 일기로 순직한 고 안병하 경무관. 5.18 당시 발포 명령을 거부했던 그는 직위 해제당한 뒤 보안사 서빙고 분실에서 고문을 당하고 후유증으로 숨을 거뒀다. 지난해 11월 경찰청은 당시 광주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힘쓴 뜻을 기려 그를 경무관에서 치안감으로 1계급 특진을 추서했다. 또한 ‘올해의 경찰영웅’으로 선정하고 고인이 생전 근무한 전남경찰청에 추모 흉상을 건립했다.
51만 발 vs 200대
5·18 당시 헬기 사격이 이뤄진 광주 전일빌딩 앞을 헬기가 날고 있다. [중앙포토]
5·18민주화운동 당시 군이 작성한 '광주사태 시 계엄군 실탄사용 현황'에 따르면 광주에 투입된 계엄군은 총 51만 2626발의 각종 실탄을 사용했다. 계엄군은 M16 소총 외에도 기관총과 수류탄, 헬기 기관총 등 최소 11개 이상의 무기를 사용했다.
1980년 5월 20일 오후 광주 택시 200여대와 버스 11대는 시민들과 함께 금남로에서 차량시위를 벌였다. [전남대학교 5.18연구소]
이러한 계엄군의 실탄에 맞선 것은 200여 대 광주 택시였다. 버스 11대와 택시 200여 대는 시민들과 함께 계엄군이 주둔했던 전남도청으로 향해 차량시위를 벌였다. 이들의 이야기는 지난해 송강호 주연의 '택시운전사'라는 영화로도 제작된 바 있다.
45곳 vs 0곳
시위대의 무료급식을 위해 노상에서 밥을 짓고 있는 광주 여성들 [전남대학교 5.18연구소]
열흘간 치안 부재 상황이던 광주의 45개 금융 기관 중 강도의 습격을 받은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도로가 통제된 광주에 물자가 부족해지자 식료품점, 약국 등이 나서 물자를 공급했으며 시민들은 쌀을 모아 주먹밥을 만들어 나눠 먹었다.
1일 vs 17일
1980년 9월 1일 제 11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전두환 전 대통령. [대한민국정부기록사진집]
5.18이 일어났던 해인 1980년 9월 1일 전두환 전 대통령은 ‘체육관 선거’로 대통령이 됐고 8년간 집권했다.
그로부터 16일 후 9월 17일, 김대중 전 대통령은 북한 사주를 받아 5.18을 일으킨 주모자로 지목돼 사형을 선고받는다.
내란음모사건으로 사형 선고를 받고 있는 김대중 전 대통령 [중앙포토]
전두환 전 대통령이 처음으로 피고인 신분으로 법정에 선 것은 1995년이다. 대법원은 그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지만 김영삼 정부의 특별 사면으로 구속 2년 만에 석방됐다.
600 vs 0
전두환 전 대통령(왼쪽)이 지난해 4월 출간한 『전두환 회고록』 제1권 ‘혼돈의 시대’ [연합뉴스]
지난해 4월 출간된 『전두환 회고록』에는 광주에 600명의 북한 특수 군이 개입됐다고 쓰여 있다. 당시 신군부가 주장했던 ‘5.18 북한 개입설’은 이후에도 일각에서 꾸준히 제기됐다.
하지만 정부는 북한군 개입설을 한 번도 인정한 적이 없다. 국방부는 2013년 5월 30일 북한군 개입설이 허위사실임을 확인했다. 비밀 해제된 미국 CIA의 정보 분석 문건에도 북한군 개입 관련 내용은 없었다.
2013년 5월 30일 '5.18 북한군 특수부대 개입설'에 대해 국방부가 제출한 자료(왼쪽). 기밀 해제된 미국 CIA 정보 분석 문건. 해당 문서에는 '북한군의 움직임이 전혀 없다'고 쓰여있다. [중앙포토]
『전두환 회고록』 제1권 ‘혼돈의 시대’는 5·18을 왜곡하는 내용이 있다는 이유로 지난해 법원이 출판 등을 금지했고 전 전 대통령은 문제가 된 부분을 삭제하고 다시 출간했다. 하지만 법원은 지난 15일 재출간한 『전두환 회고록』 에 대한 출판 및 배포를 또다시 금지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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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관이 익명의 수집가로부터 입수한 영상은 1980년 5월 20일부터 6월 1일까지 국군통합병원과 적십자병원 환자 치료 상황, 전남도청 기자회견 등 광주 일대와 근교를 촬영했다. 사진은 1980년 당시 전남도청을 장악한 계엄군 병력. [5·18민주화운동기록관 제공 영상 캡처=연합뉴스]
27명 vs ?????
5.18 당시 군경 사망자는 27명이다. 이들은 주로 지도부의 명령을 따라야 했던 낮은 계급의 군인, 경찰들이었다.
아직도 5.18 당시 시민 사망자와 실종자 숫자는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고 있다. 암매장 추정지 발굴 작업이 진행되고 있지만, 아직 유골조차 찾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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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당시 광주 망월동묘지로 옮겨진 희생자 시신이 담긴 관. [연합뉴스]
지난 3월 제정된 5.18 특별법에 따른 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9월에 출범한다.
송영무 국방부 장관은 지난 14일 5·18단체 회장단과 면담한 자리에서 "특별법 제정으로 오는 9월 발족되는 진상규명조사위원회의 조사에 적극 협조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송 장관은 "어두운 역사 속에 가려져 있던 광주의 진실을 명명백백히 밝혀 광주시민의 상처를 치유하고, 다시는 가슴 아픈 일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모든 지원을 다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1980년 5월 계엄군에 의해 숨진 광주시민들의 시신. [중앙포토]
박해리 기자 park.haelee@joongang.co.kr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2633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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