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물학적 피나 정신적 피를 흘리지 않는 자유 실현이란 있을 수 없다.
2014년 조사라서 2019년 현재와는 조금 다를 수 있지만, 정치 의식적 측면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아래 기사를 보더라도, 진정한 '자유'란 얼마나 실현하기가 힘든가를 알 수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왜 자유한국당과 같은 보수당을 더 많이 지지하는가? 자발적인 노예의식을 '애국주의'로 승화시켜 자기 개인 가치관으로까지 신념화시키고 내재화하는 그 현상은 왜 발생하는가?
경향신문 강진구 기사는 좋은 글이다. 난제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치학과 철학에서 고전적인 주제이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정치적 동물'이 마치 '폴리스'를 벗어날 수 없듯이, 우리가 떼지어 집단으로 폴리스에서 사는 한 이 주제는 풀기 힘든 난제이다.
물론 사람들이 많이 쓰는 '계급적 존재를 배반하는 허위의식'이라는 정치적 난제는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유럽 지식인들 사이에 연구 대상이 되었다. 이탈리아 그람시, 독일의 프랑크후르트 학파 등의 연구주제들이다.
또한 제국주의 지배를 받았던 비참한 식민지 국가들에서 왜 '제국주의 세력과 결탁한, 제국주의자들보다 더 악날하고 지독한 자국 협력자들 collaborators'이 발생했는가를 두고 민족해방론자 사이에 주된 관심사이기도 했다.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 혹은 규정한다는 조악한 마르크스에 대한 이해는 폐기해야 한다. 소련 스탈린이 통치 이데올로기 수준으로 전락시킨 이런 조악한 유물론, 혹은 변증법적 유물론을 마르크스의 핵심이라고 하는 것은 오해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는 무능과 무반성을 낳을 뿐이다.
마르크스 뿐만 아니라 인류 정치사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인 '자유', 진정한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자발적 노예의식'과 끊임없이 싸워야 한다. 한번 득도하거나 '하느님을 영접'했다는 식은 자유 실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자발적인 복종의식과 자기 기만은 끊임없이 매일 매일 발생하기 때문이고, 그것을 '조장 (助長)'하는 정치 경제 문화 종교 지배자들이 우리들보다 늘 한 걸음 앞서 뛰고 있기 때문이다. CDs 와 같은 금융 상품의 형태로, 신무기 개발, 삼성 바이오로직스 회계 범죄 등으로 늘 다기한 전술로 노예들을 놀라게 만들고 충격받게 만든다.
생물학적 피나 정신적 피를 흘리지 않는 자유 실현이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자주하게 된다.
자유를 추상적으로 '자기 스스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자기 결정권'으로 정의한다고 해서, 공동체의 독립 (independence = freedom 어원은 같다)이나 일터, 가정, 쉼터, 놀이터에서 자기 자유는 곧장 보장받지 못한다.왜냐하면 자유라는 것도 아주 구체적인 경제활동, 정치 문화 종교 활동과 연계되어 있기 때문에, 심지어 같은 노동자들이라고 해도, 같은 직장에서 동일한 일을 하더라도 이해관계는 서로 충돌할 가능성이 커진 복잡한 일상 세계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온 가족이 논과 밭에서 일했던 농경제 사회에 사는 것도 아니고, 수렵 채취 공동체에 사는 것도 아니다. 매일 매일 끊임없이 형태와 내용이 변화하는 유동사회 (fluid society)가 우리 일상이 되었다는 뜻이다. 이렇게 되면 자기 스스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자기 결정권을 한 개인이 충분히 실현한다고 해도, 자기가 속한 수많은 집단들과 공동체의 '자유'와는 충돌하게 되어 있다.
공동체의 자유가 개인의 자유에 우선한다 이런 말에 앞서, 이러한 우리들의 현대적 삶의 조건 하에서는, 시민들 노동자들 학생들 모두 다 자기 이해관계들을 정치적으로 분출하고, 자기들끼리 스스로 조율하고 합의를 해 나가야 한다. 정치적 민주주의 실천이 과거 어느 때보다 더 중요하게 된 이유가 경제활동 양식의 변화 때문이다. 경제와 정치, 경제와 문화적 삶이 분리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제는 자발적 노예의식과 복종을 가르치는 정치 경제 권력자 집단에 비해서, 일반 평민들 노동자 시민들은 '정치 참여' 시간이 없거나 부족하다. '자유 시간'이 생기면 자야 한다. 노동에 지치고 직장에서 받은 스트레스 때문에 그걸 잊기 위해서 뇌 세포를 재생시키기 위해서 자야 한다. 비판의 무기를 벼리는 데 필요한 책이나 지식 습득은 잠 앞에 다 굴종한다.
진정한 좋은 정치가는 이제 우리들에게 노동시간을 가급적 줄이고, 정치적 의사 결정과정, 법률 제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자유 시간'을 시민들과 노동자들에게 내어주는 사람이다.
진정한 자유란, 스스로 직접 참여해서 피를 흘리지 않는 한, 어떠한 그 누구도 대신 해결해 줄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푸닥거리 동원식 정치, 정치적 참여를 단순한 대중동원으로 전락시키고 있는 '정당 테크노크라트'와 '정치 기술자들'은 이제 청산 대상이다. 선거에서 이기는 승리자는 될 지언정, 진정한 자유를 꽃피우는 민주주의 경작자는 절대 될 수 없다.
한국의 비정규직들의 정치 의식 대다수는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지배자들의 '말과 문장'을 자신의 신념 체계로 만들고 있다. 법률적 지식도, 계산적 수학 능력도, 자신이 믿는 종교적 교리도, 윤리학도 다 무용지물이다. 현실에 남는 것은 '강자에 복종하면서 걍 살어'가 되어 버렸다.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문장을 반대로 뒤집어 엎는 그런 실천을 스스로 해보고, 피부로 '아 다른 삶의 양식, 타인과 다른 언어들을 주고 받아도 이 사회가 무너지지 않고, 경제도 붕괴되지 않는다는 자신감'이 생길 때, 진정한 자유를 향한 한 걸음을 비로소 떼는 것이다.
[신문 기사 요약]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지배자 신념을 자기 믿음으로 둔갑시킨 비정규직 정치의식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노동자 권익을 대변하는 진보정당인 정의당보다, 심지어 민주당보다 새누리당을 더 많이 지지하는 층이 비정규직이다.
사실 조사: "2014년 1월 한국노동사회연구소가 서울에 사는 비정규직 2344명에 대한 생활·의식 실태조사"
(1) 비정규직들은 노후 불안과 고용 불안정을 호소하지만, 민주당(16.6%)보다 새누리당(24.4%)에 더 높은 지지를 보였다.
(2) 18대 대선에서 이들의 67%가 투표를 했고 박근혜 후보(36.4%)가 문재인 후보(22.3%)보다 14.1%포인트 더 표를 받았다.
-> 박근혜 정권과 새누리당은 비정규직의 권익을 박탈하는 "파견 확대, 쉬운 해고, 기간제 사용기간 연장" 입법을 만들었다.
(3) 비정규직 조사 대상들은 누구인가? 평균연령은 52세 , 법정노동시간보다 5시간 많은 주당 45시간 노동, 월급여 133만원.
(4) 강진구 기자의 주장은 보수파를 지지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사회적, 경제적 지위는 별 볼 것 없지만 "대부분 산전수전 다 겪은 아Q처럼 세상물정에 환한 다변가들"로 진단하고 있다. 그러니까 자기 신념이 확실하다는 것이다.
(5) 왜 이렇게 자기 권익을 뺏어가는 보수당을 비정규직 노동자들 상당수가 지지하는가? 그 의식구조는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으로
박정희식 개발독재에 대한 추억이 국가주의와 애국주의로 남아있다.
노동조합이나 민노총에 대한 매도. 정규직 비난 등이 이들에게 공통적인 신념이다.
강진구의 고전으로 보는 노동이야기](11)노동현실 망각 재벌 편들기, 아Q의 ‘허위의식’이 드리워져 있다
강진구 노동전문기자 kangjk@kyunghyang.com 2019.01.04 17:08:57
루쉰 ‘아Q정전’
루쉰의 소설 <아Q정전>의 시대 배경인 1911년 신해혁명 당시 봉건착취와 외세침략에 시달리던 중국 사회의 모습(위)과 2016년 5월 서울 현대차 사옥 앞에서 영정을 들고 원청인 현대차의 노조파괴 행위를 규탄하는 금속노조 유성기업 지회 조합원들. 김정근 기자 jeongk@kyunghyang.com
재발에 관대·노조엔 가혹한 태도는 아Q의 ‘강한 사람 추종’ 연상
재계 최저임금 깎기 시도, 일부 비정규직 애국심·반노조정서 이용
중국 작가 루쉰의 <아Q정전>(1921)에 등장하는 주인공 아Q는 날품팔이 노동자다. 온갖 차별과 멸시를 받으며 살지만 자존심이 강해 절대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실 그의 자존심은 불굴의 용기가 아닌 허위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Q는 현실의 승리보다는 자기기만과 환상을 통해 정신승리에 안주한다. 그러다 보니 억압적 권력에 직접 저항하는 대신 자신보다 힘이 약한 사람을 괴롭히거나 엉뚱한 곳에 화풀이하며 자신의 우월성을 확인받고 싶어 한다.
이 점에서 아Q정신은 봉건적 착취와 외세의 침략에 시달리면서도 현실 개선에 관심이 없었던 약 100년 전 무기력한 중국인에게만 있었던 게 아니다. 부당한 차별과 모욕의 피해자이면서도 이를 애써 외면하거나 문제로 느끼지 못한다면 누구나 아Q정신을 의심해볼 만하다.
루쉰의 작품 속에서 아Q는 인격을 가진 노동자가 아니라 노동력을 가진 상품으로 거래될 뿐이다. 그는 웨이짱이라는 시골 마을에서 일정한 직업 없이 보리 벨 때가 되면 보리를 베어주고 벼를 찧을 때면 남의 벼를 찧어주며, 어떤 때는 배의 노를 젓기도 했다. 일거리가 좀 오래 있을 때면 주인의 집에 기거하다가 일이 끝나면 가버렸기 때문에 사람들은 바쁠 때나 그를 기억해내곤 했다.
아Q의 과거 행적에 대해 아는 사람도 없었지만 굳이 관심을 가질 이유도 없었다. 심지어 그의 본명을 아는 사람도 없다. 아Q는 집도 없어 토지신을 모신 사당인 토곡사에서 살았다.
특별한 근력도 기술도 없는 그는 일손이 부족할 때 언제든 불러서 허드렛일을 시킬 수 있는 존재에 불과했다. 아Q의 나이는 서른 살이다. 지금의 노동현실에 비춰보면 취업이나 결혼은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고시촌 등 열악한 주거환경 속에 아무런 희망도 없이 불안정 노동시장을 떠도는 청년 비정규직 노동자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루쉰의 작품 속에서는 아Q에 대한 동정이나 연민의 시선을 찾아보기 어렵다. 루쉰은 아Q를 통해 자신의 계급적 이해관계를 망각한 채 부정확한 현실인식에다 부와 권력을 가진 사람과 자신을 동일시하려는 민초들의 허위의식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아Q는 자신에게 허드렛일을 시키는 웨이짱 사람들을 ‘시골 촌뜨기’라고 얕잡아 본다. 반면 자신은 세상물정에 밝아 성내에서 일어나는 일을 속속 꿰뚫고 있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그가 알고 있는 세상물정이란 기껏해야 웨이짱 사람들이 튀긴 생선에 듬성듬성 썬 파를 얹는 데 반해 성내 사람들은 잘게 썬 실파를 얹어 놓는다는 것 정도다. 현실인식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지식일 뿐이지만 아Q에게는 자신이 우월하다고 믿게 만드는 최면제로 사용된다.
아Q는 또 웨이짱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지역의 세도가이자 부와 권력을 가진 ‘짜오(趙) 타이예(지방현관의 존칭)’와 자신이 같은 성씨라고 자랑하고 다닌다.
심지어 짜오 타이예의 아들이 ‘수재(秀才)’에 급제하자 “촌수를 따지면 내가 수재보다 3대나 위이니 이번 일은 나에게도 기쁜 일”이라며 거들먹거리기도 한다. 웨이짱의 보통 사람들이 주는 일거리로 살아가면서도 짜오가와의 동일시를 통해 일종의 정신승리를 추구한 것이다.
부정확한 현실인식에다 부와 권력을 가진 사람과 동일시하는 허위의식을 통해 대리만족을 추구하는 아Q는 우리의 노동현실에도 낯설지 않은 모습이다.
2014년 1월 한국노동사회연구소가 서울에 사는 비정규직 2344명에 대한 생활·의식 실태조사를 벌인 적이 있다.
그 결과 비정규직들은 노후 불안과 함께 고용 불안정을 호소하면서도 민주당(16.6%)보다 새누리당(24.4%)에 더 높은 지지를 보였다.
18대 대선에서 이들의 67%가 투표를 했고 박근혜 후보(36.4%)가 문재인 후보(22.3%)보다 14.1%포인트 더 표를 받았다.
파견 확대, 쉬운 해고, 기간제 사용기간 연장 등 고용 불안정을 심화시키는 입법을 추진한 정치세력이 더 높은 지지를 받은 것이다.
조사 대상 비정규직들의 평균연령은 52세로 법정노동시간보다 5시간 많은 주당 45시간을 일하면서도 급여는 월 133만원에 불과했다.
이들은 사회적·경제적 지위는 별 볼 것 없지만 대부분 산전수전 다 겪은 아Q처럼 세상물정에 환한 다변가들이다.
[이유 분석] (1) 개발 독재 잔재 (2) 국가주의 애국주의 (3) 노동조합 매도 (4) 정규직 비난
하지만 이들의 기억은 1970~1980년대 개발독재시대 고도성장의 기억에 멈춰져 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그들의 기억처럼 기업의 성장은 노동자들의 숙련과 소득 증가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들은 외환위기 이후 자동화에 기초한 수출형 조립산업이나 단순 서비스 위주로 산업이 재편되면서 비정규직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숙련이나 소득 증가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쉽사리 인정하지 않는다.
여전히 이들에겐 수출 대기업을 위해 노동자들은 희생해야 하고 기업들은 일자리 창출과 임금 증가로 보답하리라는 믿음이 있다. 자연스럽게 파업은 매국이고, 고분고분하지 않은 노조들은 국가 발전의 최대 걸림돌로 생각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우리 사회 가장 밑바닥에서 생활하는 일부 비정규직들이 자신의 계급이해에 배반하는 정치성향을 보인 것은 자신의 안정적 일자리를 철밥통 정규직 노조가 빼앗고 있다는 생각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양대 노총의 거센 반발을 무릅쓰고 고용 유연화 정책을 밀어붙인 박 전 대통령과 새누리당을 통해 이들은 일종의 정신승리를 추구했다고 볼 수 있다.
재계와 자유한국당, 친재벌 보수언론들이 지난해 마지막 날까지 대놓고 최저임금법 시행령 개정안에 반대하는 여론몰이에 나설 수 있었던 것도 같은 배경이다.
자영업자와 중장년 비정규직들의 애국심과 반노조 정서를 등에 업고 ‘일 안 하고 노는 유급휴일에도 최저임금을 줘야 하느냐’는 가짜뉴스로 월 174만원의 최저임금을 148만원으로 깎으려는 시도를 했던 것이다.
최저임금 논쟁은 이 점에서 현실인식을 바로 하지 않으면 누구나 아Q가 될 수 있다는 교훈을 준다.
루쉰의 작품에서 아Q는 봉건적 착취를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한 짜오가로부터 온갖 굴욕을 당하면서도 단 한번도 저항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아Q는 자신의 성이 짜오라고 자랑하고 다니다 짜오 타이예에게 불려가 따귀를 맞고 띠빠오(하급관리)로부터 일장 훈시를 들은 뒤 술값으로 200문(文)을 물어줬다.
또 짜오가에 일을 하러 갔다가 젊은 과부 우마에게 무릎을 꿇고 구애를 하다 성추행범으로 몰려 노임을 받기는커녕 막대한 손해배상에 입고 있던 옷과 털모자, 이불까지 전당 잡히고 알거지가 되기도 했다.
아Q는 이 일이 있은 뒤로 웨이짱 마을 어디에서도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다. 일종의 블랙리스트에 오른 셈이다.
반면 짜오가는 악행을 정화하기 위한 푸닥거리 명목으로 아Q로부터 받아낸 향이나 초를 고스란히 쌓아뒀다. 아Q의 해진 옷은 장차 태어날 아기의 기저귀감으로 사용됐다.
막대한 이익잉여금을 투자 대신 사내유보금으로 쌓아두고 계열사 일감 몰아주기를 통한 편법상속에 열을 올리는 한국의 재벌들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하지만 한국의 아Q들이 그렇듯이 루쉰의 아Q 역시 짜오가가 아니라 자신의 일자리를 빼앗은 샤오D를 보고 눈이 뒤집힌다. 아Q는 “쇠사슬로 네 놈을 후려치리라”고 소리치며 샤오D와 멱살잡이를 벌이지만 싸움은 쉽게 끝나지 않고, 웨이짱 사람들은 “거 참 꼴 보기 좋구나”라며 한마디씩 거든다.
이처럼 짜오가에 말 한마디 못하면서 웨이짱의 가장 밑바닥에서 생활하는 샤오D와 드잡이를 하는 아Q의 모습은 재벌들의 편법적인 부의 축적과 상속에 무관심하면서 민주노총 얘기만 나오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악성 댓글러들과 모습이 겹쳐 있다.
2011년부터 무려 8년간의 부당노동행위에 시달리다 지난해 9월 퇴사한 유성기업의 한 50대 퇴직자가 자살한 사건을 다룬 기사에는 ‘한국의 아Q’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댓글들이 달렸다.
이들은 벌써 2명의 목숨을 앗아간 유성기업 부당노동행위에 현대자동차가 개입돼 있지만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고 있다는 사실엔 관심도 없다. 오직 민주노총만이 문제다.
“민노총아 고인에게 부끄럽지 않나. 얼마를 받고 싶은 건지. 벌써 8년이 되어가는구나. 기륭전자 생각나네. 기업도 망하고, 노동자도 망했네.” “문 닫으면. 노사 모두 조용하겠네요. 공장, 대지 팔고 재고품도 팔아 퇴직금 주고 손 터는 게 사업주 만수무강 비결.”
4조5000억원대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사건에 대해서도 한국의 아Q들은 엉뚱한 곳으로 분노를 표출시키고 있다.
이들은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의 편법 경영승계와 수천억원의 국민연금 손실 사태에 대한 진상규명보다 주가 폭락 방지와 경제 안정을 위해 적당히 넘어가길 바라는 ‘노예근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아주 나라 말아먹네. 검찰이 삼성 건들면 코스피 1500은 따놓은 당상이네.” “그만 좀 물고 뜯어라. 경제 40%를 벌어들이는 기업 자꾸 잡으면 결국 누구 손해냐.”
2016년 1월16일 뉴욕타임스는 ‘<아Q정전>을 차용한 중국 엘리트들에 대한 비판’이란 기사에서 “중국 공산당이 관리하는 ‘50센트당’(유급 댓글부대) 이외에도 아Q와 같은 자발적 댓글부대들이 중국의 엘리트 권력을 지탱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재벌들에 관대하면서 노조에 가혹한 한국적 아Q는 뉴욕타임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한국의 재벌권력들을 지탱하는 자발적 댓글부대들이라 할 수 있다.
새로운 변화를 거부하고 자신의 계급적 이해 대신에 강한 사람과 동일시하려는 한국의 아Q들이 내세우는 애국심은 루쉰의 ‘아Q정신’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아Q정전’을 쓴 중국 작가 루쉰.
루쉰의 작품에서 아Q는 짜오 타이예 치하의 가장 큰 피해자라 할 수 있지만 외세나 혁명에 의해 봉건질서가 무너지면 더 큰 혼란이 올 것을 우려해 전통적 질서에 안주한다.
이 때문에 아Q는 일본에서 공부하다 변발을 자른 채 나타난 ‘치엔(錢)가’의 큰아들을 ‘가짜 양귀신’이라고 부르며 경멸한다. 하지만 혁명당이 상륙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Q는 양귀신을 찾아가 혁명당에 가입하려다 거절당하고 결국은 도적떼로 몰려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아Q는 형장으로 끌려가면서도 누구를 원망하기보다 제대로 된 장송곡 하나 불러보지 못하고 죽는 것이 억울할 뿐이다. 제대로 된 현실인식 없이 자존심만 센 채 저항할 생각 한번 못해보고 비굴한 삶을 살다 최후를 맞은 아Q의 죽음은 딱히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없다. 그래서 아Q의 죽음엔 애도도 분노도 하기 힘들다.
루쉰의 본명은 '주수인'씨이다.
30년 전에 읽은 루쉰의 '고향'이라는 소설은 '아큐정전'과 더불어 지금도 인상깊게 남아있다.
'고향'이 얼마나 어떻게 변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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