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시마 사다코 추모비와 서울 평화비 소녀상
종이학 천마리를 접으려다 644마리에 그친 못다한 꿈이 있었다.
1946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 미국 원자폭탄 투하 당시,
원자폭탄이 떨어진 그라운드제로와 사사키 사다코 (1943년 생, 당시 만 2세)의 집은 1.6km 정도 떨어졌다고 한다.
사다코 어머니 말에 따르면, 원자폭탄 폭발 당시 사다코는 집에 있었는데, 그 폭발로 집 바깥으로 날아가 버렸고, 죽은 줄 알았는데, 한참 만에 산 채로 발견되었다.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fABpssKWCoE
1943년 사사키 사다코 양 태어나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 공격 이후, 폐허가 되었다.
사다코 양은 당시 2세였고, 원자폭탄은 사다코 집 근처 미사사 다리에 떨어졌다.
원자폭탄이 폭발했을 때, 사다코 양은 창문을 통해 집바깥으로 튕겨져 나갔지만, 다행히 살았다.
사다코는 학교에 들어갔고, 달리기를 특히 좋아했다.
그런데 5학년이던 1954년에 사다코 양의 외모는 변해갔다. 목과 얼굴, 귀 주변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1955년 (초등학교 6학년) 1월에는 자주색 반점들이 다리까지 번져나갔다.
사다코의 병은 '백혈병 (Leukemia 원자폭탄으로 인한 질병)'으로 판정되었고,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사다코가 병원에 입원했을 당시, 친구 치추코가 사다코에게 한 제안을 했다.
치주코는 사다코가 천마리 종이학을 접으면 그 소원이 달성된다고 말해줬다.
그 후로 사다코는 종이학을 접기 시작했다.
사다코가 죽기 전까지 접은 종이학 숫자는 644마리였다.
사다코는 1955년 10월 25일 아침, 12세로 사망했다.
"난 사다코 너의 양 날개에 평화를 새길 것이다. 그리고 넌 온 나라들 위로 날아갈 거야"
"전쟁은 어떤 경우는 필요악이다. 그러나 아무리 피할 수 없는 전쟁이라도, 그것은 나쁜 것이지 좋은 건 아니다.
우리가 서로 아이들을 죽여가면서까지 평화롭게 공존하는 법을 배울 필요는 없다 - 지미 카터 "
히로시마에는 사사키 사다코의 희생을 추모하고, 핵무기 반대 세계 평화를 기리는 비가 있다.
그리고 학생들의 학습 장소로 이용된다.
사다코 양이 채 접지 못한 종이학이 추모비 주변에 쌓여있다.
히로시마에 있는 사사키 사다코 추모비 (위)
(사다코 양의 추모비 앞에 종이학을 접어서 놓고 묵념을 올리는 일본 학생들)
사사키 사다코 양도 원자폭탄의 피해자였고 전쟁의 희생자였듯이,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 20만 전쟁 성노예 여성들도 전쟁의 희생자였다. 둘 다 못다한 꿈이 있는 전쟁 희생자들이다.
후대 사람들이 전쟁 범죄와 비극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취지는 일본 히로시마나 한국이나 다 같다. 일본 히로시마에서 사시카 사다코의 천마리 종이학이 전쟁반대와 '생명' '평화'를 상징하듯이, 한국에서 평화비 소녀상 역시 전쟁반대 인권유린 전쟁 성범죄 반대와 '생명' '평화' 공존을 상징한다.
진실어린 일본 국가의 공식적인 사과가 필요하다.
(아래: 서울에 있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제국주의 군대 성노예 착취를 당한 한국 여성들을 잊지 말자는 취지의 '평화비 소녀상' )
평화비 소녀상에 대한 아이들 태도.
역사의 교훈을 잊지 말자는 의미일 것이다.
위 사진 출처: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173518
후기: 어린시절 우리 역시 일본이 미국의 원자폭탄을 맞고 항복했고, 조선이 일제로부터 해방되었다고 '잘못' 배웠다.
미국은 우리편이고 일본은 악당이었는데, 우리편이 일본 악당을 혼내준 것으로 배웠다.
나중에 역사책을 보니,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나카사키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릴 필요가 없었다. 원자 폭탄을 사용하지 않아도 미국과 참전을 선언을 소련의 합작으로 일본군대를 중국본토와 남태평양 섬들에서 섬멸시킬 수 있었다.
만약 일본이 아시아에 속한 나라가 아니라 유럽에 속한 나라였다면 원자 폭탄을 떨어뜨려 수십만을 죽였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히로시마와 나카사키에서 원자 폭탄을 맞고 다치거나 죽은 사람들 중에는 조선인 (한국사람들)도 많았다. 우리가 아는 야구 스타 장훈도 그 중 한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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