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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history)/5공_전두환_1980-87

[언론보도] 이을호 선생, 한평생 고문후유증 시달린 ‘민청련 이론가’ 끝내 떠나다

by 원시 2022. 1. 27.

 

한평생 고문후유증 시달린 ‘민청련 이론가’ 끝내 떠나다
등록 :2022-01-26 19:03


김경애 기자 

 


이을호 우석대 김근태연구소 부소장 별세
1983년 민청련 창립때 ‘정책연구실장’ 맡아
1985년 남영동·남산 고문으로 정신분열증

 


‘독재 정권의 고문 후유증으로 고통받던 비운의 천재’. 26일 오전 10시45분 67살을 일기로 별세한 이을호 우석대 김근태연구소 부소장을 두고 지인들이 평소 했던 말이다.


유족은 이날 고인이 지난해 12월 코로나19에 감염돼 그동안 입원 치료를 받아왔다고 밝혔다.


1955년 전북 부안에서 태어나 전주고를 수석 졸업한 고인은 74년 서울대 사회계열에 입학한 뒤 철학과로 전과했다. 4학년 때인 77년 소설가 김영현·시인 김사인 등과 함께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첫 구속됐다. 

 

전두환 정권 시절인 1983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창립에 뛰어든 그는 85년 검거돼 고 김근태 의장과 더불어 남영동 대공분실과 남산 안기부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운동권의 뛰어난 수재로, 민청련에서 ‘이론’을 담당하며 정책연구실장을 맡았던 고인은 이때 정신분열 증세가 나타나 정신병원 감정 유치 상태에서 재판을 받아야 했다. 

 

고인은 훗날 남영동과 남산에서 당한 혹독한 물고문 등의 경험을 이렇게 증언했다. “머리를 물에 처박아 숨을 쉬지 못하게 했습니다. 몇 번인지도 기억조차 할 수 없습니다. 나중에는 변이 안 나왔고 먹지도 못했습니다. 변을 한 번도 못 봤습니다.” “안기부 수사관들에게 무차별 구타를 당한 뒤 내가 올빼미로 생각되고 밤새 옥돌을 갈고 있는 환상 속을 헤매었다.”

 

 


1988년 6월 김근태 의장 석방 때 함께한 민청련 간부들 기념사진. 앞줄 맨왼쪽부터 원혜영, 김근태, 최민화, 이을호, 임태숙. 민청련동지회 제공

 


고인의 민청련 동지이기도 했던 부인 최정순 서울시의원은 “김근태 의장보다 이틀 앞서 체포된 남편에게 김근태를 죽이는 근거를 찾기 위해 극심한 고문이 가해진 것 같다”고 밝혔다. 고인은 1986년 6월 구속집행 정지 결정으로 풀려났지만, 2011년까지 25년 동안 1년에 3개월 정도는 정신이상 증세로 입원을 할 정도로 평생 고문후유증에 시달렸다.
고인은 대학 졸업 뒤 출판사 지학사와 중원문화 등에서 일했고 <세계철학사>(전 12권, 중원문화)를 번역했다.


유족으로 자녀 준의·준아(작가), 사위 정병훈씨가 있다. 민청련동지회장으로 장례를 치르며 27일 오후 6시 서울대병원에서 추모식이 열린다. 발인은 28일 오전 7시30분, 장지는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이다. (02)2072-2011.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상임위 부의장을 역임하신 이을호 선생님께서 금일 1월 26일(수) 오전 별세하셨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빈    소 :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2층 2호실
◼︎ 추모식 : 2022년 1월 27일(목) 저녁 6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 발    인 : 2022년 1월 28일(금) 오전 7시
◼︎ 장    지 :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

 

 

"끝내 순수하고 아름다웠던"···이을호 전 민청련 부위원장 별세, 향년 67세
이유진 기자입력 : 2022.01.27 09:18 

 


1980년대 ‘NL-PDR’ 이론 정립
전두환 정권 고문에 평생 후유증

 


이을호 전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이 26일 별세했다.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에 이 전 부위원장의 아내인 최정순 서울시의원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민청련동지회 제공



이을호 전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이 지난 26일 67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고인은 1980년대 재야-운동권의 핵심 논제였던 ‘NL-PDR 이론’을 정립했다. 전두환 정권 시절 겪은 모진 고문으로 평생을 후유증에 시달린 고문 피해자이기도 했다.


유족은 27일 이 전 부위원장이 전날 오전 10시41분 지병으로 별세했다고 밝혔다. 고인은 지난달 18일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고 서울 경희의료원에 입원했다. 이후 코로나19는 완치했으나, 기저질환에 따른 후유증으로 상태가 악화돼 1월 초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영면했다.


고인은 1955년 전북 부안에서 태어났다. 전주고를 수석 졸업한 뒤 1974년 서울대 사회계열로 입학했다가 철학과로 전과했다. 4학년이던 1977년 소설가 김영현, 시인 김사인 등과 함께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처음 구속됐다.


1983년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이 주도한 민주화 운동단체 민주화청년운동연합(민청련) 창립에 참여한 뒤 기획실장, 정책실장, 상임위 부위원장 등을 지냈다. 당시 운동권의 운동론을 CDR(시민민주혁명론), NDR(민족민주혁명론), PDR(민중민주혁명론) 등 세 가지로 정리해 ‘C-N-P 논쟁’에 불을 붙인 장본인이기도 했다.


1985년 국가보안법 위반 등 혐의로 검거된 후 김 전 의장과 더불어 남영동 대공분실과 남산 안기부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고문후유증으로 정신분열 증세가 나타나 정신병원에 유치된 상태에서 재판을 받았다. 고인은 훗날 “무차별 구타를 당한 후 스스로가 올빼미로 생각되고, 밤새 옥돌을 갈고 있는 환상 속을 헤맸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1986년 6월 구속집행 정지 결정으로 풀려났지만 2011년까지 25년간 1년에 3개월 정도는 정신이상 증세로 입원할 만큼 고문후유증이 지속됐다.


고인은 대학 졸업 뒤 출판사 지학사와 중원문화 등에서 일했으며, <세계철학사>(전 12권, 중원문화)를 번역했다. 2018년에는 우석대 김근태연구소 부소장으로 취임했다.


유족으로는 고인의 민청련 동지이기도 했던 부인 최정순 서울시의원, 자녀 준의·준아, 사위 정병훈씨가 있다. 딸 준아씨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고인에 대해 “끝내 순수하고 아름다운 분이었다”고 추억했다. 그는 “아버지는 평생을 반독재 투쟁에 헌신했던 청년시기 속에 사셨다”며 “고문후유증 때문에 가족 모두가 고통스러웠지만 아버지의 그 순수한 마음만은 변함이 없었다”고 했다. 이어 “항상 나라를 걱정하셨고, 류마티스 등으로 건강이 악화하는데도 본인이 가진 철학과 사상을 지인들에게 전달하려 노력하셨다”고 덧붙였다.


추모식은 이날 오후 6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2호실)에서 열린다. 발인은 28일 오전 7시, 장지는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이다. ☎ 02-2072-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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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2201270918001#csidx13560e05eb51efd87f2853c57ed2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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