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김종대 ,헨리 키신저 만남 , 사인 받았다고 함. 전범 War Criminal 에게 사인받는 게 진보정당 의원이 할 일인가?
[세상 읽기] 미 대선 이후 열릴 기회의 창 / 김종대
등록 2020-11-05 14:37
김종대 l 연세대 통일연구원 객원교수
2년 전 여름, 필자는 뉴욕에서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을 만난 적이 있다. 95세의 이 노인은 당시 낙관적 전망이 팽배하던 북-미 대화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왜 미국과 북한의 비핵화 협상이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섣부른 기대는 하지 말라, 중요한 것은 한국 국민의 의지다. 트럼프만 믿지 말고 한국이 평화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굳혀라.” 2019년에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되고 난 후 키신저의 말은 아프게 다가왔다.
국가의 중장기적인 생존전략을 구사하는 데 있어 오랫동안 우리 자신을 짓눌러 온 두 가지 관점이 있다.
첫 번째는 동맹을 신성시하는 관점이다. 이에 따르면 우리는 오직 미국의 품 안에서 안전을 도모해야지 다른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안보는 미국과, 경제는 중국과 도모하는 양다리 걸치기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동맹의 관점은 이제는 확실하게 “우리는 미국 편”이라고 선언해야 할 지정학의 시간이라고 주장한다.
두 번째는 민족의 가치를 절대시하는 관점이다. 미국은 엄연히 외세이므로 언젠가는 이 땅에 나가야 한다. 그러니 남과 북 우리 민족끼리 단결하여 우리 운명에 부당하게 간섭하는 외세를 배격해야 할 통일의 시간이라고 주장한다.
동맹이냐, 민족이냐를 양자택일하라고 강요하는 나쁜 습관이다. 이혼하는 부모를 둔 어린아이가 아빠냐, 엄마냐를 선택해야 하는 딜레마에 처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그렇게 약한 존재라는 전제다.
이상하게 일반 국민보다 엘리트 전문가일수록 더 편향적이다. 얼핏 보면 매우 상극의 주장인 것처럼 비치는 이 두 주장에도 스스로 선택을 강요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우리가 주변 열강에 둘러싸인 작은 존재 아니냐는 약소국의 정서다. 실제로 근세 이래 우리 역사가 고난과 시련으로 점철되어 왔으니 우리의 정신적 유전자 안에도 피해의식이 깊이 새겨졌다. 동맹, 또는 민족의 가치를 절대화하는 출발점은 안전에 대한 열망이었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부작용이 생겼다. 더욱 강해진 자신을 발견하지 못한 채 위축된 자존감, 두려움에 떨며 스스로 운명을 개척할 줄 모르는 나약함과 비굴함을 당연시하는 사람들. 필자는 이를 ‘변두리 근본주의자’라고 부르고 싶다.
3억명의 이슬람에 포위된 700만명 인구의 이스라엘에는 미군이 한명도 없다.
그런데도 행동의 자유를 누리며 생존한다. 타이, 인도네시아와 같은 큰 나라에 둘러싸인 700만 인구의 도시국가인 싱가포르는 미국과 중국을 거침없이 비판하는 엄연한 자주국가다.
안보 현실이 엄혹하기로는 국가로 인정받지도 못하고 무기 수입도 자유롭지 못한 2300만의 대만이 우리보다 결코 낫다고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대만은 두려움 없이 유연한 생존전략을 구사한다.
러시아 위협에 직면한 인구 천만명의 스웨덴과 그보다 더 작은 핀란드는 어떠한가. 훅 불면 날아가 버릴 것 같은 이 나라들에 비해 대한민국은 엄청나게 큰 대국이다. 그런데도 주한미군 수가 한명이라도 줄까 봐 전전긍긍하는 나라다.
전시작전권도 보유하지 못하고 정전협정 서명국도 아닌 대한민국은 주권의 상당 부분을 행사하지 못하는 처지다. 사실상 전범국이나 패전국과 같은 취급을 받는 것인데, 변두리 근본주의자들 중 상당수는 이를 당연시한다.
한반도 문제는 엄연히 우리의 생존 문제인데 미국과 북한의 협상을 기다리기만 하는 ‘중재자’로 스스로를 규정하고 있으니 이 역시 황당한 일이다. 여전히 “우리는 약소국”이라는 인식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자유로운 정신 위에서 강인한 생존의지가 표출되는 역동적인 국가 건설, 어려운 일인가. 왜 우리는 장기적인 안목에서 한반도 주변 정세를 주도하는 중견국가의 생존전략을 구사하지 못하는 것인가.
지금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보이는 혼란은 단순한 선거의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 자체의 위기다. 당분간 미국은 북한에 대해 어떤 정책을 집행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아마도 단기간 내에 북한의 비핵화와 한반도의 긴장 완화를 기대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이런 진공상태야말로 대한민국이 한반도 정세를 결정하는 중심국가로 도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과거 김대중 대통령이 클린턴 대통령을 가르쳐 ‘페리 프로세스’를 탄생시킨 황금의 역사가 엄연히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미국의 대통령이 누가 되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국가가 되겠느냐는 의지와 노력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