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운이 박종철을 언급하다.
1. 박종운의 '조작된 과거'와 엉터리 지식. 박종운의 기억이 잘못된 것인지?
과거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도 엉터리로 기억하거나, 현실 이해관계에 따라 편집해서 다시 기억한다.
'과거'란 순수한 과거가 아니라, '현실'에 의해서 '조작된 과거'와 '굳건한 현실'이 된다.
데카르트를 흉내내어, '나는 기억을 조작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나는 기억을 조작한다, 그것만 믿고, 그게 지금 나의 현실이다'
2. 광주시민을 공수부대를 투입해 도청 소탕작전을 했던 전두환 살인마에 저항하는 이론적 실천적 동기들은 수백가지다.
그것들 중에 주요하게 1980년대 한국정치에 다시 등장했던 것이 '사회주의 계열'이다. 20세기 세계 정치는 좌우 이념의 대결, 경쟁, 때로는 협력과 수용, 혼합의 역사였다.
1953년 한국전쟁 휴전으로 북한은 공식적으로 당대 반-자본주의 진영인 소련과 중국을 우방으로 하는 '공산주의'에 속했고, 남한은 미국의 후원을 받는 '자본주의 진영'에 속했고, 두 코리아는 생산양식 뿐만 아니라 정치적 '이념' 전투가 휴전이후에도 벌어졌다.
보수파가 된 박종운이 아래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언급한 내용을 보면, 박종운과 당시 서울대 학생들의 '맑스'에 대한 이해 수준을 알 수 있다. 37년이 흐른 지금, 박종운이 이해한 칼 맑스의 자본주의나 상품 개념이 엉터리라고 이야기하는 건 어쩌면 큰 의미도 없을 수 있겠다. 당시 대다수 학생운동권이 53년 이후 '반공법' '국가보안법'으로 금지해 놓은 금서, 맑스나 북한의 통치노선 주체사상, 러시아 레닌, 중국의 마오쩌둥 노선, 쿠바와 니카라과 등 라틴 아메리카 제 3세계 혁명 노선을 공부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 이유란 다름아닌, 친-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길이 아닌 '다른 민주주의'에 대한 고민이었고, 상당수가 금지된 '사회주의' 노선을 정치운동의 길로 수용하기 시작했다. 80년대 학생운동가들이나 노동운동가들의 고민이란 '민중 민주주의', '민족해방' 이후 사회주의의 길에 대한 모색과 실천이었다.
20세기 초반 서유럽이나 러시아,중국 등의 사회주의 운동, 일제시대 하 조선의 공산당 운동이 1980년 5월 광주항쟁을 계기로, 냉전의 섬이었던 한국에 다시 도입되기 시작한 셈이다.
10대 20대 청년들의 이러한 사회주의로 선회는 '금지된 사랑'처럼 불꽃같았고, 7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노태우 정권이 마감되는 시기까지 전국적으로 거의 1만여명의 학생운동가들이 공업단지에 취직해 노동자계급화되었다.
공장으로 간 학생들과 청년들이 혁명을 일궜는가? 아니다.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배경들 중에 하나는 제 1차 세계대전이고, 중국이 공산주의를 선언한 것은 제 2차 세계대전를 거친 1949년이었다. 1만여명이건, 10만 명이었건, 한국의 사회주의 혁명은 1991년 소련의 해체라는 국제적인 정치 지형을 고려하면, 성공하기란 그렇게 쉽지 않은 국제적 국내 정치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다 허망하고 실패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정치투쟁과 저항과 대안이란 매일 매일 일어나고, 사람들 눈에 잘 띄이지 않을 수도 있다.
3. 20대 초반의 박종운의 '맑스'에 대한 기억은 다 엉터리 수준이다.
노동가치설은 자유와 평등,연대 등 이념과 윤리학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그러한 윤리학,삶의 가치관으로서 '노동가치설'은 박종운의 인생 가치관을 바꿔놓을 수 있겠다. 하지만 박종운의 상품 가치 이해는 잘못되었고, 조잡하기 그지없다. 급조된 좌익, 어설픈 지식의 외투일 뿐이다.
맑스의 '상품' 가치란,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 그 측정 도구이다. 맑스가 말하고자 하는 정치적 주장이란, 상품 가치의 크기는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라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렇게 상품 가치가 결정되는 자본주의 시장교환체제를 바꾸자는 데 있다. 어떻게 바꿀 것인가? 그 문제는 아직도 열려있는 주제이고, 다양한 실험과 실천이 가능하다. 실제로 지난 20세기와 지금까지 각 국가별로 이러한 다양한 실천들은 이어지고 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차이란 백지 한장 차이다.
박종운이 말한 '우리의 민주주의는 마오쩌둥이 제기한 것이다. 새로운 프롤레타리아에 의한 신민주주의다,'에서 이것도 다 잘못된 엉터리 지식이다. 마오쩌둥은 소련 유학파나 제 1세대 공산주의자와 달리, 중국의 대다수 인민은 '농민' '소작농'이기 때문에, 당시 잉글랜드처럼 발달된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자계급이 아니라, 중국에서 농민의 정치적 역할을 더 크게 부각시켰다.
잉글랜드, 혹은 소련과의 중국과의 차이를 설명하면서, 마오쩌둥 등이 고안해 낸 개념이 '주요모순'이었다. 맑스의 자본론은 노동자-자본가 대립의 '기본모순'을 말하고 있고, 당시 중국의 현실은 서구와 일본의 제국주의 대 반식민지 중국의 대립 구도에 서 있었기 때문에, 제국주의 타도에 필요한 정치적 세력들을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단어가 필요했다.
광쩌우에서 노동자 반란의 실패의 교훈을 농민과 노동자 등 제국주의 타도 투쟁에 동참하는 '통일전선' 개념을 정당화하는 개념이 마오쩌둥의 '주요모순' 개념과 신민주주의론이다.
박종운이 말하는 소련식 혹은 중국식 사회주의에서 '반 민주주의'요소들, 또는 노동자 농민들이 소련과 중국 공산당의 '통치' 대상화되거나, 관료주의 체제 하의 고객으로 수동화된 점 등은, 1960년대 이후 서유럽 좌파나 사회주의자들부터 미국식 리버럴리스트까지 다양한 비판가들이 이미 지적한 것이다.
모든 한국의 반독재 학생운동가와 급진적 사회주의자들이 '소련 체제'나 '북한 체제', '중국 체제'를 찬양하지 않았다. 박종운에게 맑스를 학습시켰다는 운동권의 정체는 모르겠지만, 당시 학생운동가들의 국제적인 '사회주의' 현실에 대한 지식은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따라서 현실 사회주의 체제, 소련, 중국, 북한의 근현대사나 정치사에 대한 지식과 정보량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 '민중 민주주의'나 과거 급진성에 대한 포기와 좌절에 대한 변명. 과거 지우기에 지나지 않은 변명에 가깝다.
사람의 가치관은 대학생 시절 읽었던 책 1~2권으로, 또는 1000권으로 형성되지 않는다. 가치관은 가족, 친구집단, 어린시절 개인의 경험과 실천, 행복관 등이 꾸준히 누적되어 10대를 거치면서 90%이상은 만들어진다.
박종운이 나이 60이 가까이 되어 조선일보에 '민주투사'라고 소개된다. 그렇다 한 때 민주투사였을 것이고, 이회창 한나라당은 전두환 학살자가 만든 '민정당'은 아니다. 물론 그 후예 정당이다, 지역적 기반이나 이데올로기는 민정당의 계승적 측면이 강하니까.
사회주의 반대가 '민주화 배신'은 아니다. 이런 수사법을 만들어내는 것도 대단한 능력이다. 대한민국 국민들 중에 박종운에게 '사회주의자'가 되어라고 요구한 사람 숫자는 0.00000001% 도 안되기 때문이다.
사과에 대한 반대가 '고구마의 배신'은 아니다. 이런 수사법은 수천가지 수만가지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냥 박종운 자기 정치를 하라. 이회창과 손잡았던 경험을 잘 살려서.
'복숭아의 반대'가 '감자의 배신'은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