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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년, 빙허 현진건 고택 철거 (황평우 기자)

by 원시 2020. 12. 10.



빙허 현진건 고택, 한순간에 철거되다


오래된 건물 철거시 허가제 필요 절실


03.11.27 16:29l최종 업데이트 03.11.27 19:49l


기사 출처: https://bit.ly/3guMBwE


황평우(wearea)




▲ 철거되기전의 현진건 생가

ⓒ 황평우




▲ 철거된 현진건 고택

ⓒ 황평우


종로구 부암동 325-2. 우리나라 근대문단의 사실주의 대표작가 빙허(憑虛) 현진건 선생의 고택을 지난 14일 중장비 굴삭기 굴착시 (excavator) 포크레인을 동원하여 철거한 사실이 밝혀졌다.


인근 주민은 "아침 7시부터 저녁 6시까지 중장비를 동원해 철거됐으며, 기와는 강원도의 업자가 가져갔고 덤프트럭에 폐자재들이 실려나갔다"고 전했다.


27일 기자가 현장을 찾았을 때는 빈터만 남아있었고, 300년이 넘어보이는 은행나무 두 그루와 현진건 고택과 붙어 있는 무계정사(서울시 유형문화재 호)를 지키는 강아지들만 방문객을 향하여 거친 울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현진건 고택은 대지 267평 한옥 70평으로 건축년도는 1930년대로 추정되며, 팔작지붕에 겹처마로 근대문화유산의 가치도 충분하며, 이 집에서 현 선생이 집필활동을 하여 문화사적 가치도 충분하다고 전해진다.



이 집은 1937년 현진건의 소유로 현 선생이 동아일보 재직시 손기정옹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고 1943년 결핵으로 타계할 때까지 살았던 곳이다. 


선생의 타계 후 8명의 소유자를 거쳐 1976년부터 정상해(경기도 성남거주)씨 소유로 되어 있다.



현 선생의 고택은 서울시가 94년과 99년 두 차례 문화재 지정을 검토했지만 문화재적 가치가 없다는 이유로 지정되지 못하고 표석만 설치한 채 인근 주민의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 표석도 7월 22일에 누군가 뜯어가 버리고 말았다.



종로구 문화재심의위원회는 이 건물을 "기념물 또는 문화재 자료로 지정하여 매입하고 현진건 기념관 건립하자"고 서울시에 건의한 상태다. 또한 최근 서울시는 근대건축물을 등록받겠다는 공고를 내기도 했다.



현 선생 고택 철거로 종로구청는 종로구를 '문화1등구'로 조성하겠다고 표방하면서도 현진건 생가를 지켜내지 못했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 집터에 신축 계획 확인을 위해 건축주와 통화를 시도해 보았으나 관리인만 받을 뿐이다

.


이미 현진건의 생가는 철거되었지만 앞으로는 일정한 기간(약 50년 이상)이 지난 건축물의 철거시 허가제를 도입하는 대책이 절실히 필요하다.



빙허(憑虛) 현진건 선생



▲ 누군가에 의해 분실된 현진건 고택 기념 표지석

ⓒ황평우



술 권하는 사회, 

빈처, 

가난한 아내, 

B사삼과 러브레터, 

무영탑 등 자전적 1인칭의 묘사를 통해 우리나라 근대 문학의 사실주의를 개척하며 장단편 20여 편과 7편의 번역 소설이 남아 있다.



1900년 대구에서 출생하였다. 일본 도쿄 독일어학교를 졸업하고 


중국 상하이 외국어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920년 <개벽>지에 단편소설 '희생자'를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등장, 


1921년 발표한 '빈처(貧妻)'로 인정을 받기 시작했으며,


 <백조(白潮)> 동인으로서 '타락자(墮落者)' '운수 좋은 날' '불' 등을 발표함으로써 염상섭과 함께 사실주의를 개척한 작가가 되었고 김동인과 더불어 한국 근대 단편소설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다.



<시대일보> <매일신보>의 기자로 근무하였고 1935년 <동아일보> 사회부장으로 일장기 말살사건으로 1년간 복역하고 신문사를 떠났다. 


작품에 '술 권하는 사회' '할머니의 죽음' '지새는 안개' '까막잡기' 'B사감과 러브레터' '사립 정신병원장' 등 단편이 있고, '적도(赤道)' '무영탑(無影塔)' '흑치상지(黑齒常之)'(未完) 등 장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