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정치/민주당2019. 11. 4. 00:04

조국 논란, 개념과 주장 바로잡기


 : 서초동 촛불은 ‘파시즘 징후’도, 장정일의 ‘좌파 좀비의 저주’도 아니다. 이진우도 장정일도 노골.

-글쓴 이유: '우리안의 파시즘', '좌파 파시즘'이라는 단어를 오용하지 말자. 서초동 “조국수호,검찰개혁”집회를 파시즘 징후라고 한 이진우 교수 글도 잘못이고, 이진우 허수아비를 힘차게 때리면서, 좌파좀비들은 대중들로부터 격리될 것이라는 주문을 외우는 장정일도 잘못이다.


좌파 파시즘의 비극은, 스승 아도르노를 ‘입 진보’라고 비판했던 한스 위르겐 크랄(Hans Jürgen Krahl)과 아도르노와의 갈등에서 비롯되었다. 우파에서 좌파로 변신해 서독 68운동의 대표주자가 된 한스 위르겐 크랄 그룹이 그 박사학위 논문 지도교수 아도르노 연구실을 점령하자, 아도르노가 경찰을 불러 그 제자들을 쫓아내었다. 아도르노와 연구조수 하버마스가 한스 등 좌파 학생들을 “좌파파시즘 LinksFascismus“라고 욕했다.

그래서였을까? 한스는 교통 사고로 죽었고, 그 다음해 그 스승 아도르노는 심장 마비로 죽었다. 이런 개인사적 정치사적 비극을 담고 있는 단어가 좌파파시즘이다.


이진우 교수가 “광장의 파시즘을 경계한다”는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아주 단순하다. 도덕적 흠결이 있는 조국 전 장관을 임명한 문재인 정부가, 적극 지지자들을 서초동 검찰청 앞에 동원해서 지도자의 의지를 관철시키고자 한다. 그런데 이교수가 이 주장을 하기 위해 논거로 든 단어가 파시즘인데, 이에 대한 개념 정의도, 또 설명 도구로 쓰는 것도 잘못되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조국 수호, 검찰 개혁”을 들고 나온 서초동 집회는 대다수 국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지만, 파시즘 증후와는 거리가 멀다. 조국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사람, 문재인 정부를 지지하는 사람, 이 참에 검찰 개혁이라도 해보자는 사람들, 자유한국당이 미워서, 노무현 비극이 떠올라서 나가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이진우 교수는 파시즘은 자유주의, 공산주의, 사회주의와 같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다라고 했는데, 정치학에서는 파시즘도 하나의 이데올로기(이념)이다. 각 국가별로 파시즘 정의는 조금씩 달라질 수는 있겠지만, 이탈리아 무솔리니, 독일 히틀러로 대표되는 파시즘은 몇 가지 이데올로기를 공유하고 있다.


첫번째는 반-계몽주의 운동적 성격을 띠면서,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보편주의적 정치운동에 반대하는 민족주의(제국주의)를 기치로 내건다.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보다는 ‘민족주의’ 이익이 우선한다.


두번째는 파시즘이 타도하고자 하는 자유주의(Liberalism)와 사회주의는 대중 민주주의를 지향하기 때문에, 파시즘은 이 둘을 부정한다. 대신 파시즘은 소수 엘리트가 지배하는 정치체제를 옹호한다. 생물학적 사회진화론을 신봉하며, “잘난 DNA 놈은 못난 DNA놈을 지배해야 이 사회가 온전히 재생산된다”고 믿는다.


미헬스(Michels)의 과두제의 철의 법칙에 따르면, 어떤 조직에서건 권력은 모든 구성원들이 똑같이 공유할 수 없다. 효율적인 조직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뛰어난 소수 엘리트가 권력을 사용해야 한다는 믿음이 바로 ‘과두제의 철의 법칙’이다.


이러한 대중 민주주의에 대한 정면 부정을 낳게 한 생각이 어디서 왔는가를 놓고, 니이체의 위버멘쉬 (=보통사람을 초월한 위대한 인간 Übermensch), 헤겔의 “위인의 업무 die Sache des großen Mannes”로부터 찾는 이들도 있긴 하다.


세번째 특징, 파시즘은 반계몽주의, 반이성주의 노선에 기초해, 인간이 어떻게 정치 참여하고 행동을 하는가를 설명할 때, 인간의 합리성과 이성에 기반한 정치 행동이 아니라, 집단(떼거리) 본능에서 그 행동 동기와 동력을 찾는다.


이러한 정치적 이데올로기 특성 때문에 뭇솔리니와 히틀러는 정치적 선전선동, 대규모 군중 시위, 엄청난 횃불 시위들을 조직함으로써 인간의 동물적인 감각을 자극하고, 정치적 적에 대한 압도적인 승리를 향해 돌진했다.


히틀러의 파시즘은 이러한 세가지 이데올로기적 특징들에다 아리안(Aryan)족의 피의 우월성을 강조해, 인종주의적 색채를 강하게 띠었다. 히틀러는 미국 자동차 왕으로 불리우는 헨리 포드를 숭상하고, 공산주의와 유태인들을 독일국가사회주의의 건설의 적으로 간주했다. 이는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다.


서초동 “조국 수호, 검찰 개혁” 집회가 위에서 설명한 파시즘 성격과 징후들을 띤다고 진단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서초동 집회가 노동자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우익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것도 아니고, 소수 엘리트 과두제를 지지하는 것도 아니며, 떼거리 본능에 기초한 프로파간다라고 보기도 힘들다. 코리안 피의 순수성을 외치는 것은 더군다나 아니다.


이진우 교수가 ‘파시즘’ 단어를 너무 편의적으로 끌어들여서 글의 논지를 흐려버렸다. 장정일이 이진우를 비판했지만, 거의 허수아비 때리기가 된 것도, ‘파시즘’ 단어의 몰이해 혹은 오용 때문이기도 하다.


이진우 교수가 네 가지 근거들로써 ‘파시즘 징후’라고 했다. 그런데 그것들도 다 문제점이 있다.

첫번째 ‘기득권을 유지하고 확대하기 위해 광장의 민중을 동원하면 파시즘’이다. 서초동 집회는 민주당 당원들도 적극 참여했지만, 비당원들도 참여했기 때문에 ‘다 동원된 세력’이라고 보기 힘들다.


두번째로, 운동권 정부가 새로운 적들을 만들어 낸다고 했는데, 서초동 집회와 광화문 집에 가지 않는 국민들, 그 둘을 지지하지 않는 국민들이 양적으로도 많을 뿐만 아니라, 두 집회들에 대해 부분적으로 동의도 하고 반대도 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국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광화문도 서초동 집회도 규모가 점점 줄어들 뿐만 아니라, 민주당과 자유한국당에서도 적극적으로 그 두 집회에 나가려고 하지 않고 있다.


이진우 교수가 서초동 집회가 민주당 내 이견도 허용하지 않고, 조국을 비판한 금태섭 의원을 인신공격하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차이와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친문재인, 친민주당 적극 지지층에 대한 비판은 될 지 모르지만, 이 현상을 두고 ‘파시즘 징후’라고 보기는 힘들다.


분명히 온라인 공간들에서 작업을 열심히 하는 각 정당 지지자들의 행태는 ‘독선적 폭력적 횡포적’ 성격을 지닌다. 그러나 이러한 행태들은 부메랑이 되어 오히려 민주당, 자유한국당 지지율을 떨어뜨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진우 교수가 “최고 통치지가 민중과 직접 소통하는 방식이 파시즘이다”라고 했는데, 이는 별 근거가 없다. 이교수는 발터 벤야민(Benjamin)이 파시즘의 핵심은 정치적 권력이 민중에게 나타나는 방식이라고 적었는데, 이는 벤야민 어떤 문장을 번역했는지 불명확하다. 발터 벤야민이 말한 것은 “혁명 (당시 사회주의 혁명)이 실패한 이후, 파시즘이 도래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이탈리아 뭇솔리니도 파시스트가 되기 전에는 이탈리아 공산당원이었기 때문에 쉽게 알 수 있다.


최고 통치자가 민중과 소통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국민들과 대화를 자주 하면 할수록 긍정적인 효과는 많을 것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 가사 노동자들, 청년 실업자들과 자주 이야기하고 그들의 애환을 들으면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지, 파시즘이 도래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진우 교수는 문재인 정부를 “운동권 좌파정부”라고 규정했는데, 이는 완전히 잘못된 규정이다.


문재인 정부는, 오직 자유한국당에게 ‘좌파’일 뿐, 공정하게 말해서 ‘중도 우파’정부이다. 범죄자 삼성 이재용에게 ‘힘내라 잘하고 있다’고 칭찬하는 문재인 정부가 어떻게 ‘좌파’정부가 될 수 있는가?


조국 논란 과정에서 주요 일간지, 종편들에 등장한 컬럼니스트들의 글들 상당수가 기본적인 개념들에 대한 오용, 자의적이고 사적으로 남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진보적인 언론인 경향신문과 한겨레에서도 이런 현상은 예외가 아니었다.


온라인이건, 광장이건, 우리 사회에서 일하면서도 더 가난해지고 일하고 싶어도 노동의지를 현실화시키지 못하는 청년들과 중장년 실업자들의 행복을 위한 민주주의가 무엇인가? 그 토론은 멈추지 말아야 한다.


자기 의견과 다르다고 해서 정치적 역사적 맥락과 무관하게 ‘파시즘’, ‘좌파 좀비’라 욕하지 않고서.




Posted by NJ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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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위르겐 하버마스라는 사람이, 한때 주장했던, 이상적 대화(혹은 토론) 조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상적 대화 상황이란 ?


이상적 대화상황은 우선 두가지 일상적인 조건들을 충족시켜야 한다. 


<1> 모든 잠재적인 대화 참여자들은 의사소통 언어행위에 공평하고 평등하게 참가할 기회를 가져야 한다. 서로  말하고 대답함으로써 대화나 토론이 시작되고, 질문과 답변이 끊임없이 지속될 수 있다. 


 <2> 모든 대화나 토론 참여자들에게 그들의 해석, 주장, 권고, 설명, 그리고 정당화 논변을 스스로 만들어 갈 수 있는 균등한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또한 그러한 해석, 주장, 권고, 설명, 정당화 논변들이 타당한가를 대화 참여자들이 서로 따지고, 그 근거들을 문제삼고, 나아가서 반대 논변을 펼칠 기회 역시 가져야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참여자들이 대화와 토론을 지속적으로 주제화하고, 과거 자기의견과 선입견을 비판적으로 뒤돌아 볼 수 있게 된다.  


이상적 대화상황에서 충족되어야 할 더 심화된 두가지 조건들은 역시 중요하다. 


그런데, 진짜로 우리는 아무런 외적인 강제[ *예들들어 나이, 학벌, 학력, 지식의 유무, 남녀, 지역, 승진에 따른 이해관계, 정치적 이해관계 등]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는가 ? 우리가 어떠한 행위강제들로부터 해방된 ‘순수한 의사소통행위’를 창출할 수 있는가 ? 이에 대한 어떠한 믿음이 있어야, 우리는 두가지 이상적 대화상황 심화조건들을 말할 수 있다. 


<3> 만약에 대화나 토론에 참가하는 사람이,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 감정, 소원을 표현할 수 있다면, 우선 그들은 대화나 토론 자격을 가진다. 대화나 토론 참가자는, 스스로 표현한 것들, 즉 자신의 입장, 감정, 희망사항 등을 거짓으로 꾸며 말해서는 안되고, 진실하게 표현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자신들의 내적 본성을 투명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4> 대화 참여자는 규제적인 언어행위를 사용해야 한다. 다시말해서 그들은 명령하고 반대하고, 허락하고 금지하고, 약속하고, 약속을 받아들이고, 변명을 하고 변명을 요구하는 균등한 기회를 가진 행위자들이다. 이런 대화 참가자 혹은 토론 참가자만이 어떤 담론(discourse) 을 펼칠 수 있다. 대화나 토론을 시작하고 계속할 수 있는 기회를 형식적으로 균등하게 분배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현실적 강제들을 중지하고, 자신의 경험과 행동으로부터 한발짝 떨어져서, 자유로운 대화나 토론의 의사소통영역으로 넘어가야 한다. 대화나 토론에 앞서서, 어떠한 의무규정, 행위 의무, 가치규범을 확립해 버리면, 대화나 토론의 상호 호혜성을 확보할 수 없다.




< 요약: 이상적 대화상황의 4가지 조건 >




① 언어행위 이용에 대한 균등기회


② 타당성요구의 주제화와 비판 기회균등


③ 자기자신의 진실성 = 순수한 의사소통행위의 형식적 특성


④ 상호호혜성/ 자유로운 담론보장 조건







대화의 목적은 더 나은 진리를 찾기 위해서이다. 















Posted by NJ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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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판이 지쳐보여요


원시


http://www.newjinbo.org/xe/1285942008.07.14 17:08:2866711


촛불데모가 너무 길어져서 그럴까요? 칼라tv 조피디님도 "신경이 저절로 날카로와집니다" 그러던데요. 


60일 넘게 저 아스팔트 바닥에서 뛰어다니다 보면, 정상인이면 누구나 다 "신경 쇠약"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인터넷 공간이라도 조금이나마 현실과 연결고리를 찾아보고, 촛불의 땔감을 제공해보려고 했습니다만, 그게 쉽지 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시청 앞 광장 뺏겨서 (가족단위로 나와서 정치+소풍을 결합시키지 못하고, 진보신당과 칼라tv 천막 근거지도 없어지고) 그게 참 큰 손실이 아닌가 싶습니다. 


토론을 하더라도, 정치정당에서는 직접 사람들을 만나보고 이야기하는 게 효과적이고, 또 타인이 뭔가 마음으로부터 깨달아서, 자기 행동을 바꿀 수 있게 만드는 것도 큰 정치적 능력인데 아쉬운 부분이 많습니다.



멀리서 느끼는 추상적인 느낌이 들어서, <게시판이 지쳐보입니다>라고 썼습니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왜 대화가 잘 안될까?> 그런 질문도 던져보고 그랬습니다. 대화의 기술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글이나 말은 다 사람의 마음과 정신의 표현이니까요. 강아지도 표정을 지어 표현하는데, 사람이 하물며...



제가 아래 던진 질문에, 한 친구가 답한 내용 소개드립니다. 당원 여러분들의 의견도 듣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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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의 질문(아래)이 상당히 복잡다단한 생각을 하게 만드는 주제입니다.

 

인터넷에서 왜 대화가 잘 안될까? [5] 원시 2008-07-08


물론 제가 인터넷에서 주로 만나는 집단들과 원시가 말하는 '상당히 정치적 집단'은 분명한 차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십대 빠순이, 아니메 오다쿠, 타로 점성 매니아, 고양이 학대자 등을 만나서도 항상 기회가 생기면 (소크라테스적으로) 토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저로서도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그점을 염두에 두시고 저의 답을 봐주시길.


1. 왜 인터넷 여론장에서 대화가 잘 안되는가 ? 


굳이 인터넷이 아니라도 일상 샐활에서도 '대화' 자체가 잘 안 되는 경우가 많죠. 저는 그게 기본적으로 '토론하는 문화'가 없이 자라서라고 생각합니다.


(1) 논리학의 부재


어떤 주장의 옳고그름을 판단하는 방법이 뭔지 모릅니다. 아주 기초적인 형식논리의 오류를 범하는 경우가 아주 허다합니다. '합리적 사고'를 주장하면 '과학 만능 주의'라고 말하면서 다른 진리 검증의 방법을 제안하지는 못하죠.


(2)  비유의 범람과 증거의 부족 


왠지 뭔가에 갖다붙여 비유를 하지 않으면 못 견디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야 '논객'처럼 멋져 보인다고 생각하나 봐요. 요즘 신문 기자들이 수사적 픽션적 글쓰기를 하는 걸 보면 무척 당혹스럽습니다.


(3) 익명의 문제


사이버 공간이 주는 익명성의 매력은 인정하는 바이지만, 토론의 무책임함을 만들어내는 아주 중요한 요소죠.  굳이 실명일 필요는 없지만 토론 공간 내에서 그 사람의 '정체성'은 분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지켜지면 앞의 두 문제는 오히려 현실 공간의 토론보다 인터넷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 자기기 한 말이 고스람히 남아 있기 때문에 조목조목 비판 할 수 있죠.(이게 말꼬리 잡는 수단도 되지만)


(4) 감정 과잉 -> 잘못 불인정


익명성과도 연관이 되겠지만, 앞에 사람 없다고 할 소리 못 할 소리 하기 시작하면 상대방도 감정이 끓기 때문에, 결국 어느 쪽도 잘못 인정 -> 패배 -> 바보가 되는 과격한 상황이 되어 버립니다. 토론에서 중요한 건 '자기 주장의 승리'가 아니라 '진리'임을 누구나 알지만 쉽게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죠.


(5) 좋은 게 좋다


바로 위에서 나오는 문제지만, 제 3자가 나타나 '좋은 게 좋다'라고 대충 무마시키려는 겁니다. '진리'보다는 '친목'이 우선이라는 커뮤니티적인 생각이죠. 토론자의 주장의 타당성보다는 인간 관계가 더 큰 역할을 하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봅니다.


(6) 카테고리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


상대방의 주장을 상세히 검토하기도 전에, 쟤는 민노당파, 쟤는 진보신당파, 쟤는 일류대생, 쟤는 영어 잘하잖아, 라고 카테고리 짓길 좋아합니다. 물론 상대방의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생각을 구성하는 배경 조건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걸 상대에 대한 공격 방법으로 쓰면 안 되겠죠?


(7)  비겁한 리플들 


원시가 선거 4대 원칙을 이야기 했는데, 이건 약간 좀 복잡한 방식으로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토론자의 게시판 글쓰기 회수가 정해지지 않았으니 1인 1표는 아니죠. 많이 글쓰는 사람이 더 많은 주장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꼭 이렇게 글 많이 쓴다고 더 큰 힘을 발휘하는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평소엔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자기가 반대하는 사람의 글에 '그건 좀 말이 안 되는 것 같네요.' '너 바보냐?'라고 한줄 리플을 답니다. 근데 이것이 마치 침묵하는 다수의 대표적 발언처럼 큰 힘을 줍니다.  물론 이것도 발언의 한 방법이지만, 한번도 자기 주장의 근거를 펼치지 않으면서, 이렇게 리플로만 힘을 발휘하는 비겁한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내 말이 왜 틀렸다는지 이유를 좀 들어봅시다' '그걸 말해야 아냐? 이 바보'

 

 

2. 대화체로 글쓰기 방식의 전환의 문제의식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 


저는 논술체보다는 대화체가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익명이라는 게 언제든지 감정을 상하게 만들기 좋기 때문에, 오히려 실제 공간보다 더 예의발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평상시에는 반말 하는 상대도 토론이다 싶으면 존대말을 합니다. 개인적으로 딴지 일보투, 디씨 하오체, 우리 사회의 마초적 속성을 드러내는 것 같아 불쾌할 때가 많습니다.



Posted by NJ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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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서 왜 대화가 잘 안될까?


원시


http://www.newjinbo.org/xe/1233022008.07.08 17:00:453675


날씨가 더워 잠시, 인터넷과 정치를 생각해보다.


1. 난 논객이 아니고, 태권도로 치면 파란띠나 되려나?


내가 진보신당 게시판에 글을 쓴다 하니까, 어떤 사람이 물었다. '논객'이냐고. 웃고 말았다. 


논객(論客)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게 맹자이다. 맹자(孟子)가 양혜왕을 만나서, 하필이면 '왕이 되어가지고 이익을 이야기하느냐 ?'(하필왈리 何必曰利)고 준엄하게 비판했다. 논객은 이런 사람을 일컫는 거 아닌가? 혹은 하마못해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나오는 수많은 식객(食客)들 정도는 되어야 논객의 반열에 오르는 것 아닐까 한다. 


그래서 내가 그냥 웃고 만 것이다. 한국에서 인터넷 논객은 2002년부터 만들어진 말이다. 컨텐츠 부족으로 1~2년 못갈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실제로 그랬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적 야망이 정해진 사람들 (서프라이즈 등), 혹은 '진보'를 이야기하지만 준비가 너무 부실했다.  


2. 자기 색채가 뚜렷해야 하는 진보신당 인터넷 게시판 


포르노 동영상 공급, 인터넷 게임, 홈 쇼핑, 일반 동호회와 비교해서, 예를들어 진보신당 게시판은 무슨 색채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다시 맹자 이야기를 해보다. 맹자는 아마 군자(이상적인 왕)에게 한 이야기겠지만. 사람을 대할 때는, '나이가 많다고, 돈이 많다고, 지식이 많다고, 자기 배후 배경이 많다고' 이 네가지가 많다는 것을 내세워서는 안된다고 <맹자>에서 말한다. <맹자>를 처음 접한지 20년이 지났는데도 이 말이 인상적으로 남아있다. 


(1) 인터넷에서는 맹자가 말한 4다 (네가지 많은 것)를 피하고, 수평적으로 만났으면 한다. 


한가지 사례를 이야기하면, 민주노동당 시절, 최장집 교수를 마치 '진보의 대표적인 지식인'처럼 권위를 부여하는 광경을 본 적이 있다. 좌파는 우파와 달라야 한다. 사람을 대할 때, 절대적인 숭배 태도나, 무작정 묻지마 '권위 부여'를 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무슨 타이틀, 직위 등을 먼저 내세우거나 거기에 의존하는 작태는 버려야 한다. 인터넷 여론장은, 마치 투표 4대 원칙(부르조아 민주주의) 보통, 평등, 직접, 비밀선거처럼, 그런 속성을 지닌다. 수평적인 관계라는 것이다. 현실 사회적 관계의 편견을 괄호치고, 1인 1표 행사를 하는 곳이다. 


(2) 대화를 즐겨야 한다. 


그 다음은, 아마도 가장 중요하게 고찰해야 할 것은, '대화 (對話: 상대가 있다는 의미)'의 공간이 바로 인터넷이다. 이명박 몰입영어교육 때문에 영어 쓰는 게 꺼려지지만, 대화의 뜻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잠시 써본다.  다이얼로그 dialogue, 독일말로는 디알레틱(Dialektik) 이라고 하는 것도, 다 di (two 두개, 두 사람, 두개의 사물, 두 측면, 두가지 특질)가 붙어있듯이, 인터넷에서는 대화를 잘 했으면 한다. 


(*   rabbit/rabbit (12).gif이거 요새 내가 배운 것이다. 인터넷 세계에서는 한물지난 유행이라고 한다. 하지만, 사람들과 대화하기 위해서 한물지나갔지만 배울려고 애쓴다) 대화는 실은 한자어로 보면 인간 (人間)할 때, 그 뒷자 '사이 間'을 의미한다. 


(3) 가급적이면 자기 주장의 근거들을 제시했으면 한다.


인터넷이 없으면 해외에 있으면서 진보정치 공간을 학습할 기회를 박탈당했을 것이다. 그래서 당연히 인터넷 발달과 와이브로와 정치공간의 결합을 긍정적으로 난 해석한다. 하지만, 지난 몇년간 경험으로 비춰보건대, 글이나 말의 컨텐츠가 부족하다는 것을 많이 느꼈다. 이것은 부정적인 모습이고 인터넷의가장 큰 맹점이고 한계이다. 


소위 논객들은 이미 정해진 목표들을 향해 "목소리는 큰데,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 가수같은 사람들이 많았다. 눈빛도 맑지 않은 경우도 허다하고. 굳이 논객들이 아니더라도, 민주노동당 게시판 (2004년-2008년)은, 당원들이 혹은 논객들이 대화를 통해서 보다 생산적인 논의를 하려는 마음 보다는, 그리고 나의 상-대(對)와 교접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성, 제왕의 성을 쌓으려고 할 때가 많았다. 심지어는 악날한 범죄행위도 자행되었다. 관객들은 다 떠나게 되어있다.


(4) 물질적 심리적으로 뭔가 얻어가는 인터넷 공간이었으면 한다.


 좌파가 아직 아마추어라도 진실성을 가지고 있고,그 진실성과 구체적인 전문 능력을 결합시켜낸다면, 한국에서도 충분히 정치적 이상을 펼칠 수 있다. 그래서 이러한 맥락에서 사회주의 좌파 지식인들은 자신들이 앎이 어떠한 타인의 지배나 군림의 도구로 쓰이는 것이 아니라, 현재 지배체제를 조장하는 큰 바위를 뚫는 한 방울의 낙수물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유럽의 역사 기록을 보면, 좌파와 사회주의 개념, 혹은 민중들의 저항 철학은 '너무나 너무나 윤리적인' 요청이 그 바탕에 깔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터넷 공간에서 심리적 위안이란, 이러한 윤리적 요청들과 관련된 주제들을 많이 계발하고, 풍부하게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노래, 춤, 책, 영화, 스포츠, 정치, 가족, 연인, 음식, 옷, 가구 등 모든 소재들과 우리 활동 공간에서 만나는 것들에서 말이다. 그렇지 않고, '윤리'만 강조해버리면, '나는 진실한데, 너는 진실성이 떨어진다. 나는 옳은데, 너는 그르다'는 식 대화밖에는 할 수 없다. 보는 관중들 물병 던지고 그라운드로 난입한다. 이런 식 대화나 글쓰기는 물질적으로도 심리적으로 뭐 하나 얻어가는 게 없다. 


(5) 좌파가 정치 컨텐츠를 드러내고 발굴하는 '접점'은 어디인가? 


한가지 사례만을 들어보자. 노동자들의 정당한 파업이나 노조건설 (삼성 회사)이 바로 일종의 사회적 화해이다. 이는 마치 예수의 화해의 죽음(Versoehnungstod 독일어 화해+죽음 = 예수 십자가에 못받혀 죽음) 과 비슷한 것이다. 


칼라tv에 나온 뉴라이트들과 우익 청년들의 좌파 이해는 "예수의 죽음, 화해의 죽음"과는 다르다. 이들은 마치 좌파는 계급의식를 고양하고 인간을 분열적 존재로 파악하는 쌈박질 좋아하는 인간들로 치부해버린다. 더러운 그림이다. 


예수죽음에 대한 좌파적 해석은 바로 그 죽음이 사회정의를 이루는 한 방식라는 것이다. 사회정의를 위해 싸우고 그 해법이 드라마처럼 전개되었다는 것이다. 좌파의 글쓰기는 이러한 예수의 '화해의 죽음 (인간과 신의 분열, 인간과 인간의 분열을 극복하는 화해의 죽음)'이 우리 사회 곳곳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드러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보수적 기독인들의 '고정불변'의 예수해석에 그쳐서는 안되고, 늘 역동적이고 변화하는 현실을 담아내야 한다. 지금 이 시간에도 보이지 않는, 칼라tv가 조명하지 못하는, 수많은 '화해의 죽음들'이 귀신이 되어 대한민국을 떠돌고 있다. 


마치며: 그나저나 왜 인터넷 여론장에서 대화가 잘 안되는가 ?  목표가 달라서일까? 아니면 대화의 기술이 부족해서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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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글


그냥 서민


나에게는 관대하고, 타인에게는 엄정한 ..... 올린글의 배경과 '그 사람'의 고민 먼저 생각해 봐야 하는데요. 결과적으로 '그 사람'이 어떻게 바뀔지, 어떻게 바꿀지에 대한 계획이 없다는..




빠블리또

경우가 약간 다르지만 참고할 만한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애인과 전화(채팅)으로 얘기하는 것이 직접 만나서 얘기하는 것보다 싸울 확률이 훨씬 높지요. 벙어리 채팅은 의사소통의 수단인 눈빛,표정,침묵 등의 시청각적 수단들을 가동시키지 못하게 하지요. 또한 표정없는 전화는 의사소통의 수단 가운데 얼굴 표정과 눈빛 등의 시각적 요소들을 모두 무시하게 만들지요. 그러니 전화와 채팅으론 좋은 얘기만 해야 합니다. 싸움을 만들어낼 소지가 크고 싸움 자체도 더욱 극대화할 소지가 높은 수단들이거든요. ^^. 그러니 보십시오. 문자 메세지로 받는 해고통지로 직접 대면해서 받는 것은 천양지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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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규



와우~~ 잘 읽었습니다 ^^ 논객 맞으시네요 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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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

원시님 글은 일단 재미있어서 빠짐없이 읽고 있습니다. 인터넷 여론장에서 대화가 잘 안 되는 까닭은, 제 생각엔 상대방의 눈을 볼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내용이 약 30%고 나머지는 다양한 표정 변화와 그 사람의 눈이 70%의 내용을 담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역시나 온라인 상에서의 대화는 30%밖에 주고받을 수 없는 관계로 완벽한 대화를 이끌어내기가 힘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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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드

글 좋습니다. 냠냠






Posted by NJ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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