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history)2019. 5. 17. 20:57

마지막 목격자’ 마틴,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의 부친 ‘위로’

등록 :2016-05-25 15:03수정 :2016-05-25 22:34



http://www.hani.co.kr/arti/society/area/745369.html


지난 18일 광주에서 5·18항쟁 당시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의 아버지 윤석동(가운데 휠체어 탄 이)씨와 5·18을 취재해 세계에 알린 ‘푸른 눈의 기자들’이 만났다. 오른쪽 두번째부터 윤상원을 마지막으로 인터뷰했던 브래들리 마틴 <전 볼티모어 선> 기자, 도널드 커크 전 <시카고트리뷴> 기자, 노먼 소프 전 <아시아월스트리트저널> 기자. 유족 제공


80년 5월 도청 인터뷰 인연

생가 방문 윤석동씨와 재회

5·18항쟁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1950~1980)을 마지막으로 인터뷰했던 브래들리 마틴(74) <전 볼티모어 선> 기자가 지난 18일 오후 윤상원의 아버지 윤석동(89·전 5·18민주유공자유족회장)씨를 만났다. 80년 5월 광주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현장을 취재했던 노먼 소프 전 <아시아월스트리트저널> 기자와 도널드 커크 전 <시카고트리뷴> 기자도 동행했다.


브래들리 마틴이 윤상원의 생가를 찾은 것은 이번이 네 번째다. 마틴은 80년 5월26일 밤 시민군 항쟁 지도부가 있던 전남도청에서 윤상원을 만나 마지막 인터뷰를 했던 언론인이다. 그는 “그 청년의 생사가 궁금해” 항쟁 8년 뒤 처음으로 윤씨의 집을 방문했다. 마틴은 “바로 코앞에 임박한 죽음을 분명히 인식하면서도 부드러움과 상냥함을 잃지 않는 그(윤상원)의 눈길이 인상적이었다”고 쓴 적이 있다.


아들의 생전 마지막 모습을 가장 생생하게 전달한 마틴 기자와 깊은 우정을 쌓아온 윤씨는 마틴의 손을 잡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1943년부터 60년이 넘도록 농사 이야기와 일상을 꾸준히 기록해온 그는 아들의 죽음에 상처받은 마음을 적어 놓기도 했다. ‘상원이가 살아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1988년 5월29일)’, ‘벌써 8년 전의 일이다. 그때 일을 회상하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느꼈으나, 세월이 흐르니까 폭도란 누명을 씻고 (아들 윤상원의) 명예가 회복되어 가고 있다(1988년 5월28일)’고 썼다.


윤씨는 “마틴과의 만남이 마지막일 것”이라는 생각 때문인지 얼굴에 서운함과 슬픔이 배어있는 표정을 지었다고 가족들이 전했다. 1년여 전부터 신장투석을 받고 있는 윤씨는 이날 기념사진을 찍으면서 마틴이 “키를 맞춰야겠다”며 허리를 구부리자 엷은 미소를 지었다.

광주/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area/745369.html#csidx002f7007b915a9d8533cc43bff7fa58 

Posted by NJ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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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history)2019. 5. 17. 20:32

자료 : 


윤상원 열사 곁에 새겨진 총과 밥, 그 의미는


<임을 위한 행진곡>의 주인공,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 열사의 생가를 찾아서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25698

18.05.14 15:53l최종 업데이트 18.05.14 15:53l 글: 임영열(youngim1473)편집: 김지현(diediedie)



 무등산이 어머니 품처럼 포근히 감싸고 있는 광주광역시의 모습

▲  무등산이 어머니 품처럼 포근히 감싸고 있는 광주광역시의 모습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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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산(無等山)이 어머니 품처럼 포근히 감싸고 있는 도시, 빛고을 광주에 오월이 다시 왔다. '광주의 오월'은 여느 도시처럼 라일락 향기 짙어가고 산천은 연한 초록으로 물들어 가고 있다. '빛의 도시' 답게 눈부시고 푸르게 빛나고 있지만, 그 찬란한 푸르름 속에는 서글픔과 애잔함이 배어 있다. 


'오월 광주' 하면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대변인, 서른 살 청년 '윤상원 열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거의 동의어처럼 한몸으로 묶여 있다.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으로 부채의식 때문일까. 매년 이맘때가 되면 조금씩 흐릿해져 가는 기억 속의 그를 호명해 낸다. 윤상원 열사의 생가가 있는 광주광역시 광산구 임곡동 천동마을로 향한다. 

  

광산구 임곡동, 구한말 나주와 광산지역 의병 활동의 본거지였던 용진산이 자리하고 있다. 퇴계 이황과 함께 13년 동안 110여 통의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칠논변(四七論辯)'으로 조선 성리학을 꽃피웠던 고봉 기대승의 월봉서원(月峯書院)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의(義)와 학문(學文)'의 고장이다. 남도의 젖줄 영산강의 지류, 황룡강이 무심히 흐르고 지척에 천동마을이 있다. 광주광역시에 속하지만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다.


 소금을 연주하고 있는 생전의 윤상원 열사.

▲  소금을 연주하고 있는 생전의 윤상원 열사.

ⓒ 윤상원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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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광역시 광산구 천동 윤상원 열사의 생가 벽돌담에는 군 복무 중 윤상원 열사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글이 적혀 있다

▲  광주광역시 광산구 천동 윤상원 열사의 생가 벽돌담에는 군 복무 중 윤상원 열사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글이 적혀 있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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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마을 이름은 '샘골'이었다. 일제 강점기 때 한자어로 고쳐 '천동(泉洞)' 마을이라 부르게 됐다. 마을 입구를 걸어 올라가면 오래된 시골집들 사이로 열사의 생가임을 알리는 노란 배너와 벽화가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가는 하얀 벽돌담 에는 1974년 군 복무 중 아버지에게 보낸 윤상원 열사의 편지글이 소개돼 있다. 


"어떻게 살 것인가. 내가 이 조국을 위해서 무엇을 해낼 수 있을 것인지. 침울한 밤을 새운 적도 있습니다. 내년에 복학을 하면 어려운 현실과 싸울 작정입니다…." 


1974년, 어떤 시대였던가. 서슬 시퍼렇던 '유신 독재'가 한창이었던 시절이었다. 암울한 현실을 바라보는 스물네 살 젊은 윤상원의 깊은 고뇌와 민주주의를 향한 갈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천동에 있는 윤상원 열사의 생가.“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인이 없더라도 보고 가십시오”라는 팻말로 윤상원 열사는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다



▲  광주광역시 광산구 천동에 있는 윤상원 열사의 생가.“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인이 없더라도 보고 가십시오”라는 팻말로 윤상원 열사는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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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사의 생가에 들어선다. 그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방은 2004년 겨울 화재로 소실됐다. 윤상원 열사의 뜻을 기리고, 민주주의의 숭고한 가치를 널리 알리기 위해 이듬해 5월에 '윤상원·박기순 열사 자료전시관'으로 복원했다. 열사의 호를 딴 '해파재(海波齎)'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인이 없더라도 보고 가십시오"라는 팻말로 윤상원은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다. 기념관에는  5·18 광주항쟁의 역사와 정신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잘 정리된 사진과 일기장 등이 전시돼 있고 방명록 옆에 열사의 흉상이 놓여 있다.


마당 오른쪽 한편에 윤상원과 그의 '영혼의 반려자'인 박기순 열사의 얼굴이 부조된 기념비가 있다. 오월을 상징하는 오각형 기단석위에 역사의 수레바퀴가 올려져 있다. 수레바퀴에는 "민주주의를 위해 우리가 저들의 총탄에 죽는다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가 영원히 사는 길입니다"라는 그의 마지막 연설문이 새겨져 있다. 기념비 중간에 한 자루의 총과 고봉밥 한 그릇을 형상화해놨다. 밥그릇에는 '민주'라고 새겨져 있다. '총과 밥'…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열사의 생가 마당 한편에 윤상원 열사와 그의‘영혼의 반려자'인 박기순 열사의 얼굴이 부조된 기념비가 있다. 기념비 중간에 한 자루의 총과 '민주'라고 새겨진 고봉밥 한 그릇을 형상화해 놓았다. "총과 밥"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  열사의 생가 마당 한편에 윤상원 열사와 그의‘영혼의 반려자'인 박기순 열사의 얼굴이 부조된 기념비가 있다. 기념비 중간에 한 자루의 총과 '민주'라고 새겨진 고봉밥 한 그릇을 형상화해 놓았다. "총과 밥"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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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비 옆에는 기념 조형물들이 세워져 있다. 윤상원·박기순 열사의 영혼결혼식 때 헌정된 <임을 위한 행진곡>과 5·18 항쟁 당시 열사의 활동을 중심으로 기록해 놓은 입간판 형태의 기념물 들이다. 거울로 만들어진 기념물이 있다. 자세히 보니 '역사는 미래의 거울이다'라고 적혀 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을 미래는 어떤 모습으로 비칠까. 오월 광주의 상징이자 시대의 들불, 영원한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 열사의 시간은 1980년 5월에 멈춰 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윤상원 열사는 한국전쟁이 일어난 해인 1950년 8월 19일 이곳 천동 마을에서 윤석동 선생과 김인숙 여사 사이에 3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윤개원이다. 장성한 후에 윤상원으로 개명했다. 이곳에 있는 임곡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고·대학교는 광주에서 다녔다. 


고등학교 졸업 후 삼수 끝에 전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한다. 입학 후 연극반 동아리에서 극예술에 심취한다. 연극을 통해 인간의 깊은 내면세계를 탐구하며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깊은 고뇌에 빠진다.


재학 시절 학생운동을 주도했고, 졸업 후 노동운동을 하려 했던 그는 1978년 대학 졸업과 동시에 주택은행에 입사해 광주를 떠나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한다. 그 당시 은행은 높은 연봉에 정년이 보장된 선망의 직장이었다. 얼마든지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유신독재의 암흑시대, 돈을 세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낯설었다. 동료·선·후배 동지들이 눈에 아른거렸다. 반년 만에 사표를 내고 광주로 내려온다. 


 생전의 윤상원 열사와 영혼의 부부가 된 박기순 열사





▲  생전의 윤상원 열사와 영혼의 부부가 된 박기순 열사

ⓒ 5.18 기념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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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반려자 박기순을 만나다  


광주로 내려온 윤상원은 고졸 출신으로 학력을 위장해 광천 공단에 있는 플라스틱 공장에 위장 취업한다. 하루 10시간씩 트럭에 짐을 싣고 내리는 힘든 노동의 연속이었다. 윤상원은 '진짜 노동자'가 돼갔다. 윤상원 말고 또 한 명의 위장 취업자가 있었다.


스물두 살의 꽃다운 여성 박기순이다. 박기순은 전남대 국사학과 3학년 재학 시절 '교육지표 시위 사건'으로 강제 휴학을 당한 후 위장 취업해서 노동운동을 하고 있었다. 바로 '들불야학'이다. '야학(夜學) 운동'이야말로 현실에 입각한 노동운동이라는 박기순의 말에 공감했던 터라 윤상원은 바로 들불야학에 합류한다. 


야학운동은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유신독재 말기의 폭압도 그들을 막지 못했다. 그러나 그해 겨울 '노동자들의 누이' 박기순이 과로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윤상원은 일기장에 "훨훨 타는 그 불꽃 속에 기순이의 넋은 한 송이 꽃이 돼 가슴속에 피어난다"라고 눈물로 적어 놓았다. 노동운동가 윤상원과 박기순은 훗날 '혼령의 부부'가 된다.


그들에게 자비(慈悲)는 없었다


1979년 10월 26일 마침내 박정희의 죽음과 함께 유신독재가 무너지고 '서울의 봄'과 함께 1980년 5월이 됐다. 전국 각지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대학생들과 시민들이 연대한 광주의 집회는 그 어느 곳보다 뜨거웠다. 정권을 찬탈하려던 '전두환 신군부'는 광주를 목표로 삼았다. 바로 계엄군을 내려 보낸다.


작전명 '화려한 휴가'였다. 지상에서는 공수부대가 곤봉으로 머리를 깨부수고 대검으로 찌르고, 총으로 쏘았다. 공중에서는 무장 헬기가 콩 볶듯이 기관총을 난사했다. 시민들은 꽃잎처럼 떨어졌다. 두부처럼 뭉개지고 잘려 나갔다. 어린 학생, 막 결혼한 신혼부부, 임신한 여인 가릴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짓밟히고 육신에 구멍이 뚫린 채 형채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다. 1980년 5월. 그 푸르던 날, 가정의 달이며 이 땅에 자비를 베풀러 부처님이 오신 날, 그들에게 자비는 없었다. 


 5.18 당시 정규 언론들은 광주 시민들을‘폭도'로 매도했다. 신군부의 삼엄한 검열 하에 어느 언론에서도 진실을 접할 수 없었다.

▲  5.18 당시 정규 언론들은 광주 시민들을‘폭도'로 매도했다. 신군부의 삼엄한 검열 하에 어느 언론에서도 진실을 접할 수 없었다.

ⓒ 5.18 기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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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원은 이 사실들을 똑똑히 목격했다. 당시 광주는 완전히 '고립된 섬'이었다. 정규 언론들은 광주 시민들을 '폭도'로 매도했다. 분노한 시민들은 광주 MBC 방송국을 불태웠다. 훗날 MBC는 5·18 왜곡보도에 대한 반성문을 쓰기도 했다. <전남매일신문> 기자들은 단 한 줄의 진실도 싣지 못하는 현실에 좌절하며 "우리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는 사직서를 제출했다. 


어디에서도 진실을 접할 수 없었다. 윤상원은 진실을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들불야학 동지들과 함께 시민들의 '눈과 귀' 역할을 하는 <투사회보>를 만들기로 한다. 밤을 새워 등사기로 <투사회보>를 만들어 시내에 뿌렸다. <투사회보>만이 진실을 알리는 '유일한 언론'이었다.


 5.18 항쟁 기간중 유일하게 진실한 언론 역할을 했던 <투사회보>




▲  5.18 항쟁 기간중 유일하게 진실한 언론 역할을 했던 <투사회보>

ⓒ 5.18 기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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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저승에서 다시 만납시다


다른 도시와는 달리 광주시민들의 저항은 거셌다. 시민군에게 밀려 외각으로 퇴각한 계엄군들은 전남도청을 장악하고 있던 시민들에게 최후통첩을 보내왔다. "폭도들은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도청 안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총을 내려놓자는 사람들과 끝까지 투쟁하자는 사람들로 양분됐다. 윤상원이 나섰다.


"우리가 비록 저들의 총탄에 죽는다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가 영원히 사는 길입니다. 민주주의를 위해 최후의 순간까지 굳게 뭉쳐 싸워야 합니다…."


봄날이 끝나갈 무렵인 1980년 5월 27일 새벽, 계엄군들은 M16 소총과 장갑차를 앞세우고 시민군의 본거지인 도청으로 진격해 오고 있었다. 복도 창가에 서있던 윤상원과 동지들은 이승에서의 마지막 인사를 나눈다. "우리 저승에서 다시 만납시다…." 순간 귀를 찧는 파열음과 함께 총탄이 날아들었다. '아이쿠' 하는 소리와 함께 윤상원은 총을 든 채로 쓰러졌다. 어슴프레 동이 트고 핏빛으로 물든 전남 도청의 새벽을 무등산은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렇게 '광주의 피'를 먹고 제5공화국이 탄생했다.


 5.18 민주묘지에 함께 잠들어 있는'임을 위한 행진곡'의 주인공, 윤상원-박기순 열사의 묘소. 1982년 두 열사의 영혼 결혼식때 헌정된 노래가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  5.18 민주묘지에 함께 잠들어 있는'임을 위한 행진곡'의 주인공, 윤상원-박기순 열사의 묘소. 1982년 두 열사의 영혼 결혼식때 헌정된 노래가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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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영혼의 반려자 박기순을 먼저 떠나보낸 윤상원은 그렇게 1980년 5월 27일 서른 살의 젊은 나이로 박기순의 뒤를 따랐다. 그가 죽고 2년의 세월이 흐른 1982년 2월 20일 망월동 묘역에서는 특별한 결혼식이 열린다. 신랑 윤상원도 신부 박기순도 보이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도 아름다운 '영혼 결혼식'이다. 


이 결혼식에 헌정된 곡이 바로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백기완의 장편시 <묏비나리>를 개작해 소설가 황석영이 가사를 썼다. 윤상원 열사의 전남대학교 후배이자 1979년도 대학 가요제에서 <영랑과 강진>이라는 서정성 짙은 노래로 은상을 수상한 싱어송라이터 김종률이 곡을 붙였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5.18 민주 영령들이 잠들어 있는 망월동 국립묘지 가는길에는 이팝나무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나 만장처럼 흐느끼고 있다. 멀리 보이는 무등산은 '그날' 처럼 말없이 광주를 지켜 보고 있다

▲  5.18 민주 영령들이 잠들어 있는 망월동 국립묘지 가는길에는 이팝나무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나 만장처럼 흐느끼고 있다. 멀리 보이는 무등산은 '그날' 처럼 말없이 광주를 지켜 보고 있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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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오월에도 열사들이 잠들어 있는 망월동 국립묘지 가는 길에는 '하얀 쌀밥' 같은 이팝나무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나 만장(輓章)처럼 흐느끼고 있다. 꽃잎처럼 떨어져 간 열사들은 말없이 누워 있다. 오월 영령들 앞에 선다. 물음을 던져본다. 


열사들이 꿈꾸던 더불어 사는 대동세상. 우리는 지금, 함께 가고 있는가?

Posted by NJ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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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창고/20042018. 9. 5. 17:29

[518광주] 윤상원 선생 아버지, 윤석동 옹 인터뷰

 글쓴이 : 원시 

등록일 : 2004-05-14 17:03:45 

<전화: 062-952-8308 윤석동, 김인숙> 


시간이 흐르면 사람은 없어지기도 하고, 잊어먹기도 한다. 그렇게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삶의 의지의 끈을 놓기 때문이다. 대부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고, 어쩌면 포기한다는 말이 더 어울릴지 모르겠다. 죽음과 생의 사멸을 스스로 선택하고 거기에 ‘의지’를 집어넣는다는 것은 그래서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배와 같이 자연스런 현상은 아니다.


 아직도 의문이다. 왜 윤상원은 5월 27일 새벽, 도청에서 철수하지 않았을까?


 윤상원의 아버지, 윤석동(78세)님에게 물었다. 올해가 윤상원 선생이 연세가 어떻게 되냐고? 

“올해 그럼 살아계시면 연세가 어떻게 되죠?” 

“쉰 다섯(55)인가? 쉰 여섯인가? 그럴 것입니다.”

 옆에 있던 어머니 (김인숙씨:76세)께서 다시 정정해주신다 “아, 지 엄마는 또 쉰 일곱이라고 하네요.”

 항상 청년의 얼굴이었던 그 윤상원이 오십대 중반이었다는 것이다. 


“요새도 들에 나가신다고 저번에 (윤상원) 어머니께서 그러시던데요?” “고혈압이 있어서 약 먹고 그러네요.”

 윤상원의 어머니께서도 무릎이 안좋아 병원에 다닌다고 저번에 그랬다.

 “요즘도 운동하는 사람들이 (윤상원 생가)에 찾아오고 그럽니까?” 

“아수울 때 (아쉬울 때)는 찾아오고 그러더니만, 요새는 …….” 

말이 한참 끊어졌다. “안 잊고 전화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셨다.


 “1992년에 제가 다큐멘타리 찍는다고 몇 친구들과 가서 따님 (윤상원 선생 막내 여동생)과 어머니, 아버지 인터뷰했는데, 그 때 많이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시 윤상원선생 막내 여동생이 5-18 계엄령군이 윤선생 집에 와서 대검으로 온 집안을 다 쑤시고 큰오빠 (윤상원) 행방을 찾았다고 하면서, 자상한 큰 오빠를 기억하면서 울던 기억이 난다. 어머니도 한참 이야기하시다가 결국에는 우시고…)


 “저도 가끔씩 왜 5월 27일, 그 날 그렇게 도청에서 윤상원 선생이 빠져 나오지 않았는가 생각해봅니다…”


 “예…. 그 때 우리 상원이가 고등학교 아이들을 다 불러놓고, 느그들은 다 나가라. 나가서 살아서 민주주의를 위해서 싸우고, 역사의 징인 (증인)이 되어라고 했다고 …”


 한참, 아니 평생을 생각해도 답을 찾기 힘들 이 질문을, 윤상원 선생 아버지는 “우리 상원이가” 그랬다고 했다. 그러면서 볼티모오선(Boltimore Sun) 신문사 기자 마틴 (Martin)이야기를 했다. 한국을 두어번 다녀갔고, 윤상원 생가도 방문했다고 한다.


 이 마틴 기자가 마지막까지 도청에 남아서 윤상원 시민군 대변인의 브리팅과 기자회견을 알렸다고 한다.


 “그 마틴 기자가 우리 상원이가 참 기억에 남는다고 하면서, 어떻게 한국에서 유년시절을 보냈길래, 그런 순수하고 정의로운 눈을 하고 있을 수 있느냐고, 죽음앞에 초연할 수 있냐고…합디다.”


 “어렸을 때는 어떠했습니까? 의리가 많았나요?” “그랬지요. 의리가 많고, 지 친구들이 누구한테 맞고 그러면, 아무리 힘센 놈들이라도 가서 상원이가 싸우고, 또 지보다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옷도 다 벗어주고 오고…” 


윤석동 아버지는 윤상원 선생이 장남인데다, 중학교시절부터 광주에서 유학을 해서, 같이 지낼 시간이 많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것은 전형적인 한국 농촌 장남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였다. 농사짓는 아버지와 대학다니는 아들과의 어려운 관계. 그런데, 윤상원선생은 어떻게 70년대에 노동운동에 관심을 가질 수 있었을까?


 “지가 3남 4녀인디… 딸 중에 경희가 야간고등학교를 다니면서, 한미제과에서 일했는데, 월급이 쌀 7대 (됫박) 값 밖에는 안되었지요. 그래서 노동자들이 월급도 적고 배는 고프고 그러니까, 예를들어 쌀 1000 kg 을 가져다가 상품을 맹그는디, 중간에 배고파서 노동자들이 다 먹어버리고, 800 kg, 600 kg 만 상품 만드는데 가고, 그래서 또 관리자들이 노동자들을 때리고… 


우리 상원이가 그런 것도 보고…들불 야학도 하고…” 윤상원 평전에 나오는 이야기가 아닌, 가족사를 통해서 본 것이다.


 90년대 초반에 잠시 인터뷰한 윤상원선생 막내 여동생 소식을 잠시 물었다.


 ”지금 대구에 살아요. 아들 둘 낳고 잘 살아요. 남편이 대구에서 왔는디, 여수시청에서 근무하다가, 지 친구가 소개해줘가꼬…지금은 대구서 아이들 키우고 잘 삽니다.”


 “…님 같은 분들이, 나중에 많이 (광주 항쟁, 윤상원 선생등) 기록해주시고, 발전시켜주십시오. 이렇게 안잊고, 멀리서 전화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고맙다는 말은 제가 해야지요.” 


언젠가 광주에 간 적이 있다. 어린시절 야구한다고 시가행진하던 그 곳, 금남로에서 윤상원 선생 아버지 윤석동씨를 만났다. 


중절모를 벗으면서 “여기까지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셨다.


 아직 새파랗게 젊은 우리들에게. 인생이 어찌했든, 민주화가 어떻고, 자주-평등이 아무리 고귀하더라도, 자기 자식새끼가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등지고 간다는 것은 자연의 이치에 어긋나는 일이다. 2004년 5월, 세월이 많이 흘렀다. 


민주노동당도 국회의원이 10명이나 생겼다. 우리가 풀어야 한국문제는 민족, 노동, 여성, 생태 등 그 문제의 복잡성이 훨씬 증대되었고, 수 많은 인력들이 필요하게 되었다. 어쩌면 윤상원 선생 같은 영웅보다, 면서기, 구청서기들이 필요한 시대인지도 모르겠다. 


80년 5월 27일, 도청 한 사무실 방에서 M1 총을 들고 있다가 계엄군 총에 맞아서 전사했던 윤상원,그리고 수많은 광주시민들과 그 후 그 후예들이 있었다. 진보를 말하는 사람들, 민주노동당과 같은 진보당 사람들이 그 도청을 다시 지키려 들어올 때까지 그렇게 영혼을 붙들고 있겠다는 것인가? 


새로 지은 5-18 광주 묘역, 그곳이 왜 그렇게 낯설까? 묘는 커지고 공식화되고 그랬는데, 한 구석 허전하다. 실제 주인공들이 누구인지, 왜 그리도 손님들이 무거운 어깨들로 나타나는지, ‘새벽에 몰래 다녀올까?’ 그런 심정이 든다. 


죽은 자의 이름으로 산 자기 이름을 아직 돌비석에 새길 때가 아닌 것같다. 돌비석에 절할 시간에, 산 사람들, 그들의 가족, 아직 남은 상흔을 껴안을 때이다. 아직은 우리가 복원해야 할 역사가 많이 있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이 마라톤을 한다면, 광주 도청에서 윤상원 선생 생가(예전 임곡마을)까지 해 봄도 괜찮을 것 같다. 

윤상원 선생이 광주 도청, 아니 전라남도 도청에서 나오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서른 하나 (31세)의 나이로, 마치 한국의 예수처럼 그렇게 십자가를 진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생각들은 다 어디서 온 것일까?






2009.05.18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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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박하지만 진실한 노래이군요. 오랫만에 몰래 따라 불러봅니다.





표지 그림은, 1980년 광주 항쟁 당시 도청을 끝까지 지켰던 윤상원 선생, 

국내외 정세를 살피느라 신문을 보고 있다 (도청안)



지금까지 전두환이 싱긋 웃고 있다.

학살자는 공식적으로 아직 없다.

다만 자위발동권만이 있을 뿐이다.

이게 공식 입장이다.



보리피리를 불기 좋은 그런 오월

푸른 보리밭 사이로,

붉은 피보다 더 진한

그 푸르디 푸른 하늘을 이고서

온 짙은 초록 보리밭 사이로

젊은 시민군들

속삭이며 스러지다.


http://serviceapi.nmv.naver.com/flash/convertIframeTag.nhn?vid=76856B57ECE06579880A9C7C5F97885BFB1D&outKey=V123ba07f701442ba237fb36b104327b6cbbb67487a051419f98ab36b104327b6cbbb&width=544&height=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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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광주] 윤상원 선생 아버지와 대화

: 원시 등록일 : 2004-05-14 17:03:45



시간이 흐르면 사람은 없어지기도 하고, 잊어먹기도 한다. 그렇게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삶의 의지의 끈을 놓기 때문이다. 대부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고, 어쩌면 포기한다는 말이 더 어울릴지 모르겠다. 죽음과 생의 사멸을 스스로 선택하고 거기에 ‘의지’를 집어넣는다는 것은 그래서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배와 같이 자연스런 현상은 아니다.


아직도 의문이다. 왜 윤상원은 5월 27일 새벽, 도청에서 철수하지 않았을까?


윤상원의 아버지, 윤석동(78세)님에게 물었다. 올해가 윤상원 선생이 연세가 어떻게 되냐고?

“올해 그럼 살아계시면 연세가 어떻게 되죠?”

“쉰 다섯(55)인가? 쉰 여섯인가? 그럴 것입니다.”

옆에 있던 어머니 (김인숙씨:76세)께서 다시 정정해주신다

“아, 지 엄마는 또 쉰 일곱이라고 하네요.”

항상 청년의 얼굴이었던 그 윤상원이 오십대 중반이었다는 것이다.


“요새도 들에 나가신다고 저번에 (윤상원) 어머니께서 그러시던데요?”

“고혈압이 있어서 약 먹고 그러네요.”

윤상원의 어머니께서도 무릎이 안좋아 병원에 다닌다고 저번에 그랬다.



(2005년 임곡 천동마을 윤상원 생가에 화재가 발생했다고 한다)


“요즘도 운동하는 사람들이 (윤상원 생가)에 찾아오고 그럽니까?”

“아수울 때 (아쉬울 때)는 찾아오고 그러더니만, 요새는 …….”

말이 한참 끊어졌다. “안 잊고 전화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셨다.


“대학시절 제가 다큐멘타리 찍는다고 몇 친구들과 가서 따님 (윤상원 선생 막내 여동생)과 어머니, 아버지 인터뷰했는데, 그 때 많이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시 윤상원선생 막내 여동생이 5-18 계엄령군이 윤선생 집에 와서 대검으로 온 집안을 다 쑤시고 큰오빠 (윤상원) 행방을 찾았다고 하면서, 자상한 큰 오빠를 기억하면서 울던 기억이 난다. 어머니도 한참 이야기하시다가 결국에는 우시고…)


“저도 가끔씩 왜 5월 27일, 그 날 그렇게 도청에서 윤상원 선생이 빠져 나오지 않았는가 생각해봅니다…” “예…. 그 때 우리 상원이가 고등학교 아이들을 다 불러놓고, 느그들은 다 나가라. 나가서 살아서 민주주의를 위해서 싸우고, 역사의 징인 (증인)이 되어라고 했다고 …” 한참, 아니 평생을 생각해도 답을 찾기 힘들 이 질문을, 윤상원 선생 아버지는 “우리 상원이가” 그랬다고 했다.


그러면서 볼티모오선(Bolitimoresun) 신문사 기자 마르틴 (Martin)이야기를 했다. 한국을 두어번 다녀갔고, 윤상원 생가도 방문했다고 한다. 이 마르틴 기자가 마지막까지 도청에 남아서 윤상원 시민군 대변인의 브리팅과 기자회견을 알렸다고 한다.


“그 마르틴 기자가 우리 상원이가 참 기억에 남는다고 하면서, 어떻게 한국에서 유년시절을 보냈길래, 그런 순수하고 정의로운 눈을 하고 있을 수 있느냐고, 죽음앞에 초연할 수 있냐고…합디다.”



   (윤상원 부친, 윤석동 옹 : 출처 : http://www.oneclick.or.kr/contents/nativecult/area09.jsp?cid=87948


“어렸을 때는 어떠했습니까? 의리가 많았나요?”


“그랬지요. 의리가 많고, 지 친구들이 누구한테 맞고 그러면, 아무리 힘센 놈들이라도 가서 상원이가 싸우고, 또 지보다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옷도 다 벗어주고 오고…” 윤석동 아버지는 윤상원 선생이 장남인데다, 중학교시절부터 광주에서 유학을 해서, 같이 지낼 시간이 많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것은 전형적인 한국 농촌 장남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였다. 농사짓는 아버지와 대학다니는 아들과의 어려운 관계. 그런데, 윤상원선생은 어떻게 70년대에 노동운동에 관심을 가질 수 있었을까?


“지가 3남 4녀인디… 딸 중에 경희가 야간고등학교를 다니면서, 한미제과에서 일했는데, 월급이 쌀 7대 (됫박) 값 밖에는 안되었지요. 그래서 노동자들이 월급도 적고 배는 고프고 그러니까, 예를들어 쌀 1000 kg 을 가져다가 상품을 맹그는디, 중간에 배고파서 노동자들이 다 먹어버리고, 800 kg, 600 kg 만 상품 만드는데 가고, 그래서 또 관리자들이 노동자들을 때리고… 우리 상원이가 그런 것도 보고…들불 야학도 하고…”


윤상원 평전에 나오는 이야기가 아닌, 가족사를 통해서 본 것이다. 90년대 초반에 잠시 인터뷰한 윤상원선생 막내 여동생 소식을 잠시 물었다. ”지금 대구에 살아요. 아들 둘 낳고 잘 살아요. 남편이 대구에서 왔는디, 여수시청에서 근무하다가, 지 친구가 소개해줘가꼬…지금은 대구서 아이들 키우고 잘 삽니다.” “…님 같은 분들이, 나중에 많이 (광주 항쟁, 윤상원 선생등) 기록해주시고, 발전시켜주십시오. 이렇게 안잊고, 멀리서 전화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고맙다는 말은 제가 해야지요.” 언젠가 광주에 간 적이 있다. 어린시절 야구한다고 시가행진하던 그 곳, 금남로에서 윤상원 선생 아버지 윤석동씨를 만났다. 중절모를 벗으면서 “여기까지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셨다. 아직 새파랗게 젊은 우리들에게. 인생이 어찌했든, 민주화가 어떻고, 자주-평등이 아무리 고귀하더라도, 자기 자식새끼가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등지고 간다는 것은 자연의 이치에 어긋나는 일이다.




(2013년 5월 15일 한 신문 기사: 복구된 윤상원 선생 생가에서 윤석동 부친이 학생들과 시민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있다.)


2004년 5월, 세월이 많이 흘렀다. 민주노동당도 국회의원이 10명이나 생겼다. 우리가 풀어야 한국문제는 민족, 노동, 여성, 생태 등 그 문제의 복잡성이 훨씬 증대되었고, 수 많은 인력들이 필요하게 되었다. 어쩌면 윤상원 선생 같은 영웅보다, 면서기, 구청서기들이 필요한 시대인지도 모르겠다. 80년 5월 27일, 도청 한 사무실 방에서 M1 총을 들고 있다가 계엄군 총에 맞아서 전사했던 윤상원,그리고 수많은 광주시민들과 그 후 그 후예들이 있었다.


진보를 말하는 사람들, 민주노동당과 같은 진보당 사람들이 그 도청을 다시 지키려 들어올 때까지 그렇게 영혼을 붙들고 있겠다는 것인가? 새로 지은 5-18 광주 묘역, 그곳이 왜 그렇게 낯설까? 묘는 커지고 공식화되고 그랬는데, 한 구석 허전하다.


실제 주인공들이 누구인지, 왜 그리도 손님들이 무거운 어깨들로 나타나는지, ‘새벽에 몰래 다녀올까?’ 그런 심정이 든다. 죽은 자의 이름으로 산 자기 이름을 아직 돌비석에 새길 때가 아닌 것같다. 돌비석에 절할 시간에, 산 사람들, 그들의 가족, 아직 남은 상흔을 껴안을 때이다. 아직은 우리가 복원해야 할 역사가 많이 있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이 마라톤을 한다면, 광주 도청에서 윤상원 선생 생가(예전 임곡마을)까지 해 봄도 괜찮을 것 같다. 윤상원 선생이 광주 도청, 아니 전라남도 도청에서 나오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서른 하나 (31세)의 나이로, 마치 한국의 예수처럼 그렇게 십자가를 진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생각들은 다 어디서 온 것일까?


연락처 : 윤상원 부친 윤석동, 모친 김인숙  062-952-8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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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테일 민주-사회주의자들의 탄생을 위해. 
"지금 오빠가 살아있었다면 어떻게 되았을까?" "변절해부렀을까?" 


2010년 윤상원 열사 가족들 (아버지 윤석동 옹), 두 여동생, 남동생되는 분들과 전화 통화를 했다. 대학시절 518광주 항쟁 다큐멘타리 인터뷰 자료를 만들다 맺은 인연이 있었다. 윤석동 옹을 방문했을 때, 그 분은 어린 우리들에게 찾아주셔서 고맙다고 중절모를 벗어 인사를 했다. 광주 임동에서 비빔밥을 얻어 먹고, 버스를 타고 광주 외곽 (당시는 광산군 임곡면 천동 마을이었다) 한적해 보이는 한 농촌 마을로 갔다. 윤상원 선생의 생가였다. 

윤상원 열사 아버지 윤석동씨는 방 한개를 윤상원 열사 유품들을 모아놓은 곳을 만들어놓았다. 노문과 철학과 후배들과 함께 가족들 인터뷰에 들어갔다. 윤상원 선생 어머니 김인순여사는 우리 인터뷰에 응하지 못하셨다. 말을 하시려고 하는데도 눈물이 먼저 나오고 목이 매여서. 그날 마침 윤상원 선생 막내 여동생이 그 생가에 있었다. 80년 5월 당시 막내 여동생분은 초등학교 5~6학년 정도 되었다고 한다. 계엄군들이 큰 오빠 (윤상원)을 찾는다고 하면서 임곡 천동마을을 다 뒤지고, 공수부대 군인들이 대검으로 온 집안을 쑤시고 다녀서, 온 가족들이 겁에 질려서 벌벌 떨었다고 한다. 


막내 동생분도 인터뷰 도중에 많이 우셨다. 당시만 해도 노태우 정권시절이어서 518 광주항쟁이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공식적으로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받고 있지 못했고, 정치적 상처와 응어리를 안고 살아야했다. 특히 유가족들에게는 더욱더 그랬다. 


2010년 다시 그 막내 동생분과 통화를 하게 되었다. 결혼 이후 대구광역시에 정착해서 살고 있다고 했다. 옛날 인터뷰하던 시절 울먹이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리고 반가워했다. 그간 과정을 이야기하다가, 이런 이야기를 해주셨다. 윤상원 선생 부모님들은 아직도 큰 아들의 죽음에 상처를 많이 안고 살아가신다고 한다. 


그런데 동생들끼리 설이나 추석 명절 때 큰 오빠 이야기를 하면서, "지금 오빠가 살아있었다면 어떻게 되얐을까?" "국회의원 뱃지 받은 사람들처럼 그렇게 변절해부렀을까? 우리 오빠도" "큰 오빠가 죽은 것은 너무 아픈 일이지만, 사회를 위해서 민주주의를 위해서 그렇게 대의을 위해서 그 때 그렇게 돌아가신 것이, 지금 살아서 욕먹고 사는 사람들보다 더 낫지..." 이런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고 한다. 


내가 궁금해했던 그러나 직접 물어보지는 못했던 이야기들을 막내 동생분이 해주셨다. 사람들은 87년 체제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그것보다도 위 이야기를 들으면서, 80년 광주항쟁의 제 1막이 종결되고, 제 2막이 펼쳐져야 할 때가 되었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518 광주 항쟁은 끊임없이 재해석되어야 하고, 재발굴되어야 한다. 아직도 수 많은 이야기들이 묻혀져 있기 때문에 그렇다. 

2013년 5월 15일. 이제는 디테일-민주사회주의자들의 탄생이 필요해보인다. For the birth of detail democratic socialist

518 광주 항쟁은 한국역사 뿐만 아니라, 세계사 속에서 재조명되어야 한다. 끊임없이. 그림으로도 만화로도 웹튠으로도 대중가요로도. 


알 스튜어트 (Al Stewart)가 프랑스 혁명 이후, 정확히 말하면 자코뱅주의자와 로베스피에르의 정치 실험 실패 이후, 노랫말처럼 혁명시대는 저물고 나폴레옹 군대가 베르사이유 궁전으로 진격할 때...패배를 인정하는 것과 '패배주의'는 다르다. 패배의 직시야말로 새로운 창조의 시작이다. 마치 윤상원의 죽음이 수만의 리틀 윤상원들을 창조해냈듯이.  






   

의역: 원시

제목: 베르사이유 궁전

노래: 알 스튜어트


바스티유 감옥은 불타 연기로 자욱하고,

빠리 시내 사람들은 ‘이게 현실이란 말인가?’

믿기조차 힘들다.


왕족들은 모조리 도망가고,

신하들은 종적을 감췄다.

우리는 왕정 대저택들을 불살라버렸다

로베스삐에르 이름으로 !


그리고 우리는 아직도 혁명의 그 날이 시작되길 기다려보지만,

‘왜 혁명을 해야 하지?’ 물음만을 던지면서.

시간만 낭비하고 있다.

외로운 베르사이유 궁전에 메아리치는 그 물음만을.


자정까지 계속되는 (인민) 의회 건물 안,

불빛이 아스라히 새어나오고,

혁명가들은 밤새 내내 토론을 하다.

그러나 (혁명의 방향이) 어디로 향할 지 모르고.


나폴레옹 군대는 남쪽에서 빠리로 진격해오고,

마라 (Marat) 혁명 동지, 살 날은 얼마 남지 않았고,

우리도 겨우 살아남아 생명만을 부지하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도 혁명의 그 날이 시작되길 기다려보지만,

‘왜 혁명을 해야 하지?’ 물음만을 던지면서.

시간만 낭비하고 있다.

외로운 베르사이유 궁전에 메아리치는 그 물음만을.


혁명 영혼은 지금도 빠리 거리들을 배회하고,

그것도 수 백년 간.

‘왜 아직 혁명이 완수되지 않았을까?’ 물음을 던지며.

여름밤 카페에 앉아 싸구려 붉은 포도주를 마시며 열변을 토하다.

적포도주 황갈색 혁명으로 물든 그들의 목소리는,

신호 대기 중인 차들을 불러세우고,

‘혁명을 완수하자고’ 하네.


그리고 우리는 아직도 혁명의 그 날이 시작되길 기다려보지만,

‘왜 혁명을 해야 하지?’ 물음만을 던지면서.

시간만 낭비하고 있다.

외로운 베르사이유 궁전에 메아리치는 그 물음만을.




(1793년 프랑스 혁명가 다비드 마라를 칼로 찔러 죽인 매리 앤 샤를로테 클로데. 집에서 목욕중인 다비드 마라를 무고한 프랑스 백성을 선동한다는 이유를 들어 클로데는 마라를 살해했다. ) 






-The Palace Of Versailles -- Al Stewart


The wands of smoke are rising

From the walls of the Bastilles

And through the streets of Paris

Runs a sense of the unreal


The Kings have all departed

There servants are nowhere

We burned out their mansions

In the name of Robespierre

And still we wait


To see the day begin

Our time is wasting in the wind

Wondering why

Wondering why, it echoes

Through the lonely palace of Versailles


Inside the midnight councils

The lamps are burning low

On you sit and talk all through the night

But there's just no place to go


And Bonaparte is coming

With his army from the south

Marat your days are numbered

And we live hand to mouth


While we wait

To see the day begin

Our time is wasting in the wind

Wondering why

Wondering why, it echoes

Through the lonely palace of Versailles


The ghost of revolution

Still prowls the Paris streets

Down all the restless centuries

It wonders incomplete

It speaks inside the cheap red wine

Of cafe summer nights


Its red and amber voices

Call the cars at traffic lights


Why do you wait

To see the day begin

Your time is wasting in the wind

Wondering why

Wondering why, it echoes

Through the lonely palace of Versailles

Wondering why, it echoes

Through the lonely palace of Versailles

Posted by NJ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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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철학2013. 5. 9. 08:42


전화 인터뷰: 2010년 5월 18일 오전 8시 45분


(기록: 당원이 라디오/ 새로운 데모 연구회  http://cafe.daum.net/new-demo

인터뷰 진행: 원시 )


윤석동 (86세: 광주시민군 윤상원 대변인의 아버지: )


 


 


 


인터뷰를 하게 된 이유: 첫번째는, 고 윤상원 광주 시민군 대변인 아버지 살아생전에, 그 아버지에게 기억된 윤상원 대변인의 모습을 무엇인가를 기록하는 것입니다.


 








(광주 항쟁 당시, 도청 안에서, 광주 관련 신문을 읽고 있는 윤상원 시민군 대변인: 태연하게 담배를 피우면서 읽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두번째는 광주항쟁발발 30년이 지났고, 민주화운동 기념식도 총리/대통령이 하게 되고, 이제 시민군도 "폭도"에서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공식적으로는 광주 시민들에게 발포를 명령한 책임자는 누구인지 밝혀진 바가 없습니다. 이러한 정치 역사적 배경에 촛점을 맞추는 것도 중요하고, 늘 재해석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30주년이 되는 날, 윤상원 대변인의 가족들에게 그 존재 의미는 무엇일까? 그 내부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듣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정치적 이해관계, 입장을 우선 괄호치고, 우리 주변 이웃들 중에 한 명, 그리고 그 한 명의 가족들에게 비친 윤상원 대변인의 모습을 이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윤상원 대변인의 부친 윤석동님이 이제 늙으셔서 귀가 잘 안들린다고 하십니다. 2004년 전화통화를 할 때만 해도 정정하셨는데요. 인터뷰 내용을 들으시면 아시겠지만, 전남대학교 교문 (5.18 시-발-점)을 새로 바꿔버린 것, 도청 별관 문제에 대해서 많이 서운해하시더군요.


 



(2010년 윤상원 대변인이 살아있었다면 60 회갑이라고 부친은 말씀하셨다. 80년 당시 30세, 영정사진이 젊다)


 


전화  인터뷰 2: 2010년 5월 18일 오전 10시


진행: 원시 

윤승희씨 (42세:  대구에서 가족과 거주: 윤상원 대변인의 막내 여동생)


 


 


 


80년 당시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윤승희씨가 기억하고 있는 큰 오빠, 3남 4녀의 큰 아들로서 윤상원에게 거는 가족들의 기대, 가난한 집안의 기둥이었던 큰 오빠에 대한 어린 시절 기억, 가족들을 생각하지 않고, 아버지 어머니 보다 일찍 죽은 큰 오빠가 이해가 되지 않고, 그게 큰 충격과 상처였다고 합니다. 


 


 


 


 


   


 

Posted by NJ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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