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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보선4

315부정선거 이후, 419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을 축출하고, 51일만에 개헌을 실시해, 내각책임제(의원내각제)를 채택했다. 내각 총리와 국가의 상징적 대표 대통령을 선출했다. 1. 위헌과 부정부패로 얼룩진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의원내각제로 개헌했다. 315부정선거 이후, 419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을 축출하고, 의원내각제를 채택했다. 2. 개헌은 51일만에 이뤄졌다. 419 이후, 51일만에, 1960년 6월 27일 내각책임제 개헌안 통과-  3. 내각책임제 하에서는, 국가를 상징하는 국가 원수는  대통령이고,내각 책임자는 총리이고 실질적인 행정부 수반이다.  4. 1960년 7월 29일 총선 방식과 결과  (1) 참의원 선거 방식은, '제한 연기제'였다. 시도 단위에서 참의원을 2명에서 8명까지 선출했다. 유권자는 선출 정원의 절반을 선택할 수 있었다. 예를들어 6명 참의원을 뽑는 선거구라면, 유권자는 자기가 선택할 수 있는 후보는 최대 3명까지이다. 참의원 선거 결과. 총 .. 2025. 4. 7.
1963년 대선 (박정희 vs 윤보선), 1967년 대선 (박정희 vs 윤보선), 1971년 대선 (박정희 vs 김대중) 63,67년, 71년 서울에서 박정희는 3전 3패. 한번도 이기지 못했다. 오래된 유권자의 역동적 표심, 아무도 모른다. 한국 유권자들을 무시하지 말라.  (1)1963년 대선에서 박정희를 대통령으로 만들어 준 것은, 전남 유권자였다. 57.2% 박정희. 윤보선(민주당 35.9%)였다.  (2) 그러나 63년 당선되자마자 울산,포항,부산 등 남동임해공업단지를 조성하기 시작해 지역 불균형 심화됨.  1967년 대선에서 전남은 44.6% 박정희, 71년 김대중 대 박정희(34.4%)로 점차 점차 전남과 박정희는 결별해갔다. (3) 63,67년, 71년 서울에서 박정희는 3전 3패. 한번도 이기지 못했다.서울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보수파와 보수당에게 절대 유리하지 않다.  박정희 63년 서울 30.2%, 67년 45.2%, 71년 40%. 2025. 3. 5.
코로나 극복 국민 생활 지원비 - 박정희 발꿈치도 못따라가는 황교안. Nakjung KimMarch 15 at 1:28 AM · 박정희 발꿈치도 못따라가는 황교안. 1963년 6월 27일자, 동아일보 1면 리드가 "(여하한 일이 있더라도) 국민을 굶기지 않겠다" 이다1963년 여름 그 상황을 보자. 코로나 바이러스로 경제적 궁핍에 처한 계층들이 적어도 올해 가을까지는 급속히 확산될 것이다. 미래통합당 황교안은 '법인세를 인하'해 민간투자를 활성화시키고, 국민들 가처분소득을 올려주자는 '보수파 대선 공약'을 발표하고 있다. 정신넋나간 타이밍이다. 정치의 기본기, '치수(治水)'를 포기한 황교안이다. '치수'란 생명안전과 경제살림살이다. 심지어 박근혜-최순실 듀오도 그랬지만, 황교안-나경원도 말로만 박정희를 존경하지, 실제로 박정희 정치스타일을 모르는 것 같다. 1963년 1.. 2020. 3. 18.
정치적 비유법의 달인 김종필이 남긴 폐해 - 거짓말과 정치적 은유 정치적 비유법의 달인 김종필이 남긴 폐해 - 거짓말과 정치적 은유, 훈장 추서 반대 - 난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는 공약실천과 무관하게 "아버지가 이룩한 경제성장, 이 근혜가 복지로 되돌려 드립니다"는 슬로건을 들고 나올 것이라고 보았다. 2010년 경 진보정당은 불필요하다고 하면서 민주당으로 다 모여라는 주장에 대해 비판하면서, 그런 생각은 박근혜에게도 질 수 있다는 평가를 한 적이 있다. 아니다 다를까 실제로 박근혜는 박정희 하에서 일한 바 있는 김종인을 내세워 마치 민주노동당 정책집을 베낀 것 같은 복지정책을 들고 나왔다. 새로울 거 하나도 없다.20세기 사회복지국가를 이룩한 유럽,캐나다에서는 보수당이 모조리 전부 '사회복지 국가론'을 당론으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당선이후, 또 아니다 다를까.. 2018. 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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