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결선투표 제도만 있었더라면, 노태우는 당선되지 못했을 것이다. 결선투표가 있었다면 1차 투표에서 36.7%로  1위였던 노태우는 '과반' 획득에 실패했기 때문에, 제 2차 결선에서 2위였던 김영삼과 다시 재선거를 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1차에서 김대중을 지지했던 27%의 표 대부분은 김영삼후보에게 돌아갔을 것이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그랬더라면 김영삼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1988년부터 1992년까지 집권했을 지도 모른다. 왜 당시 야당이었던 '민주당'은 민정당과의 개헌 논의에서 '결선 투표제도'를 신설하지 않았을까?  회고담 같지만, 그 원인들을 뒤돌아 보자.


1. 김대중과 김영삼, 그리고 민주진영의 '실수'였다. 대통령 선거에서 '결선투표제도'를 빠뜨렸다.


7월부터 9월까지 3개월 동안, 김영삼과 김대중은 6월 항쟁의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다. 

김대중과 김영삼은 대통령 결선투표 제도를 몰랐는가? 아니다. 그들은 이미 1970년 9월 29일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을 치른 적이 있고, 당시 결선투표제도를 신민당 내부에서 선택했다. 


1차 대의원 투표에서 김영삼은 1위를 했으나 47.6%에 그쳐, 과반수 득표율에 미치지 못해 결국 2차 투표를 했다.2차 투표에서 김대중은 대의원들로부터 458표를 획득, 51.8%로 과반 획득,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당선되었다.  (이승만 자유당 시절, 민주당구파 유진산+김영삼계가 민주당신파였던 김대중과 이철승에게 패한 것이다) 결선투표 제도 덕택에, 김대중은 71년 대선에서 두 김씨를 '애숭이'라 표현했던 박정희와 겨뤘다.


 40대 기수론은 김영삼이 69년에 외치고, 정작 후보는 또 다른 40대 김대중이 되었던 것이다. 


87년 6월 시민항쟁으로 전두환 '호헌 선언'을 깨고,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했지만, 그 대통령 선거 방식과 내용에 대해서는 정밀하지도 장기적이지도 않았다. 더군다나 1970년 김대중과 김영삼 모두 '결선 투표제도' 경험이 있었고, 1987년에도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더 아쉬운 역사적 '실수'다. 


2. 세간에 '돌대가리'라고 놀림당한 전두환보다 계략이 뒤졌다.  새 헌법 양당 타협안은 8월 31일에, 국민투표에 통과된 것은 10월 27일이다. 그렇다면 김영삼과 김대중의 후보 단일화 실패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거나, 못했기 때문에, '결선투표제도'를 개헌특위에서 다루지 못했는가? 이건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런 해석도 전두환과 민정당의 87년 정치계획표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정치적 무능'이라는 비난은 피해갈 수 없다. 


실제로 전두환은 4-13 호헌조치 이후, 전민 항쟁이 발생하자, 6-29 선언 이전에 이미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 후보가 분열하면, 민정당 후보가 승리할 수 있다는 계산을 했다. 전두환과 민정당이 6-29 선언을 통해 노태우를 그 후보로 내세운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정치 일정에서 '새로운 헌법' 타협은 언제 완료되었는가? 8월 31일이다. 10월 25일 고려대 집회에서 김영삼과 김대중의 '결별'이 현실화되었고, '직선제 헌법 (제 6공화국 헌법)'은 10월 27일 국민투표로 통과되었다. 


3. 1987년 7월 15일 민주당 (김영삼 당시 대표) 의원들이 '새 헌법' 토론 내용들을 보면, '결선투표제도'나 총선 '비례대표 제도'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었다. 


당시 민주당 의원들이 토론한 내용들을 잠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동학정신을 넣자, 한국 영토를 다시 정하자, 4-19와 5-18 정신을 강조하자, 근로자라는 단어 대신 노동자를 사용하자 등이다.


김영삼 대표는 대통령 선거를 빨리 앞당겨서 실시하고,13대 총선도 대선 이후 1개월 이내에 실시하자는 발언을 했다. '대통령 선거'가 급했고, 자신이 후보가 되어 당선되는 게 급선무였다는 게 김영삼에게 가장 중요했지, '결선투표'나 '대통령 제도 개선'에 대한 실질적인 고민은 없어 보였다.


4.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삼선 개헌으로 다시 대통령에 당선된 박정희는 1972년 유신헌법을 만들 때, 한태연과 갈봉근 같은 법학 교수들에게 프랑스 드골, 스페인 프랑코, 싱가폴 리콴유,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대통령 제도들을 연구하게 했다. 


그렇다면 1987년 당시, 왜 김영삼 (민주당 대표) 혹은 김대중은 프랑스 사회당 미테랑이 삼수 끝에 1981년 대통령 선거에서 1차 투표에서는 2위를 했지만, 2차 결선투표에서 1위를 했다는 것을 연구하지 못했을까?


소결론은 다음과 같다.


(1) 1970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 당내 경선에서 김대중과 김영삼은 '결선투표' 경험이 있었다.


(2)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결선 투표제도'를 새 헌법에 포함하지 못한 것은, 아니 하지 않는 것은, 결선투표가 없는 상황에서도, 혹은 김영삼-김대중의 후보 단일화 없이도, 1위를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김대중은 잘 알려진대로, 4자 필승론을 당시 주창했다.


(3) 위와 달리, 그냥 실수였을 수도 있다. 김영삼과 김대중은 결선투표 제도의 중요성을 알고서도, 조항에 삽입하지 않는 '실수'를 범했다. 


5. 교훈과 과제


대통령제도를 유지하는 한, 결선투표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87년과 같은 상황도 막고, 야당 분열이라는 여론도 제도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유럽 대부분 국가들과 같이 '내각제도'와 '수상제도'를 채택하려면 '개헌'을 해야 한다. 87년 제 6공화국 헌법 제도 단점과 문제점들을 여론화시킬 필요가 있다.


자료


1987년 10월 25일 김대중과 김영삼은 사실상 '단일화' 실패를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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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7월 15일, 새헌법에 대한 민주당 내부 토론 내용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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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12월 16일 대통령 선거 결과







1987년 10월 27일 국민투표로 '새 헌법' 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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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9월 15일자, 동아일보, 김대중계와 김영삼계 '단일화' 논의 언급, 낙관한다(이용희: DJ) 와 두 분이 알아서 결정해야 할 일이다 (YS 계, 김동영) 등 언급, 구체적인 방안 등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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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어: 결선투표제 (runoff : the two round system : the second ballot) 




 

 

Posted by NJ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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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참고 자료: 유신 헌법: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61150

    2015.12.06 18:57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민주노동당, 보수주의 정당 제자리 찾아줘야 하는 역사적 책무
2004년 5월 17일


지금 한나라당에 대한 민주노동당의 인식이 안일하다. 민주노동당이 제 2당이 되었다는 뉴스, 기분은 좋다. 그러나, 몇가지 살펴야할 점이 있다. 


낯설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민주노동당의 중요한 정치적 과제는, 한국에서 보수주의 정당, 신보수주의 정당이 10% 내외 정당이 되게끔, 정치적 유도와 안정된 착륙을, 민주노동당이 나서서 그러한 정치적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실제로 민주노동당이 앞으로 성장하는데, 이러한 보수주의 정당의 '안정적 착륙, 제자리 찾기'가 아주 중요하다는 것이다. 


물어본다. 민주노동당과 같은 진보정당이, 앞으로 보수주의 정당을, 과거 파쇼나 미제국주의 침략사에서 드러났듯이, 좌익들 색출해서 죽이고 공산당 무찌르고 그런 방식으로 인간들을 개패듯이 '사상의 외눈박이: 모두 우파만들기, 친-미주의자 훈육시키기'를 해야하겠는가? 


아직 때이른 소리인가? 그렇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이 진정한 진보정당으로서 자기 역할을 하기 위해서, 즉 한국정치사의 아픔을 진정으로 치유하는 정당으로서 자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뤄내야 할 과제가 바로 "보수주의 정당 제자리 찾아주기'이다. 한국의 보수-우익 정당이 왜 미친 개가 되었는가? 왜 광견병 걸려 자기 주인들을 골라 패고 잡아먹고 물어뜯고 고문했는가? 한국이라는 나라, 북쪽-남쪽의 분단체제, 그리고 4강으로 둘러싸였던 조건들 역시 고려해야한다. 


<한나라당이 망한다는 말의 정치적 의미: 그 해석 - 시민사회의 토대를 보라!>


<대중투쟁> 시청앞 100만 군중적 투쟁은 하나의 방법이지, 한나라당을 완전 철거하는 '한 방'은 아니다. 한나라당의 철거는, 한국 사회 시민사회의 완전한 민주주의화, 실질적으로 급진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한나라당의 철거는 단순히 5공 잔재 세력 (이미 나이가 들어 기운이 없어서 죽어가고 있다. 김윤환부터 시작해서...)을 정치적인 밥그릇을 뺏는다고 완수되지 않는다. 

지금 한나라당은, 새로 수혈된 박세일을 비롯한 비례대표 군단 (경제적으로 작은정부 시장만능론자, 선-성장론자)와, 정치적으로 신-보수주의 (원희룡, 김문수, 남경필 등: 제한적 국보법 철폐, 용미론 주장, 점진적 개혁 주창, 엘리뜨주의 강조 )의 정치화를 부르짖고 있다. 

이 후자 노선은 실은 열린우리당과 크게 구별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한나라당이 제 2의 분열사태를 맞게 되는 시점이 바로 거기에 있고, 지역적으로 영남 대 서울지역 의원들 간의 이해관계 상충시, 다른 정당이 탄생할 가능성도 있다. 


한나라당이라는 이름에 얽매여, 민주노동당의 정치적-경제적 상대 경쟁자를 좁혀서는 곤란하다. 한나라당을 누가 지지하고 있고, 한나라당은 어떻게 옷을 갈아입고 있는가에 주목하기 바란다. 


아래 글은 박근혜 들어서기 전에 한나라당의 변화방향에 대해서 쓴 글이다. 


민주노동당의 한나라당의 인식, 한나라당의 공격의 무기에 대한 탐사가 새롭게 이뤄져야 한다. <본질 불변>만을 외쳐서는 싸움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SY-44 최루탄 피하는 법과 지랄탄 다연발 최루탄 피하는 법이 달라야, 시위를 잘 하듯이, 적들이나 상대경쟁자들이 들고 나오는 무기, 인물들에 대한 연구가 촘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대규모 데모를 조직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한국 사회의 신-보수주의 탄생과 그 성격.가능성에 대한 고찰: 그 증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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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원시  (2004-02-19 19:35:27, Hit : 65, 추천 : 2) 


제목   

   [한국정치독해]이문열'"이꼴 보려고 들어온것 아닌데···" 


정치분석은 당파성이나 실용적 필요성을 이유로 행해서는 곤란하다. 한나라당이 쪼그라드는 것과 우리사회의 실제적 보수세력 (20대도 이미 보수정치 세력으로 성장하고 있다)의 잠재력은 별개의 문제이다. 이문열 발언의 정치적 함의를 포착하기 바란다. 그래야 민주노동당이 성장할 정치적 계기점들을 찾을 수 있다. 저번에 쓴 글과 아래 최근 이문열 기사를 비교해보기 바란다.



이름      원시  (2004-01-29 08:36:50, Hit : 103, 추천 : 8) 

제목   

   후회하지 않은 삶을 각오한 이문열과 민주노동당 

후회하지 않은 삶을 각오한 작가 이문열 - 민주노동당에게 주는 정치적 함의는 무엇인가? 


누가 이문열을 이토록 분노하게 했는가? 


4-15 국회의원 총선, 한나라당 공천 심사를 맡고 있는 소설가 이문열씨가 “한나라당 공천 후보들이 싹수가 노랗다,” “이번 총선에서 100명 당선시키기도 힘들다,” “한나라당이 4년 후에는 자민련의 길을 밟으며 폭삭망할 것이다,”라고 한국 제 1당 한나라당에 대해서 시각적 묘사를 통해서 소설적으로 표현해주었다. “싹수가 노랗다”는 시각적 효과와 더불어 1995년 강남 삼풍 백화점 붕괴를 연상시키는 “폭삭 주저앉다”는 동적 이미지를 구사해서, 현재의 한나라당의 심적 갈등과 내분을 표현해 주었다. 


냉전의 아픔을 가슴에 안고 산다던, 빨갱이 아버지를 둔 이 천재작가 선생 이문열을 누가 이렇게 분노하게 만들고 있는가? 


우선 공천심사 15일 만에, 이런 이문열의 한국정치에 대해서 소설적 기법을 사용해서 비판한 이유는 무엇이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천재작가라던 이문열씨는 민정당, 민자당, 신한국당, 한나라당, (이후, 온누리당)으로 이어질 이 한국 우익-보수주의 정치적 세력의 본질을, 하필이면 2004년 이 삼동 겨울에 깨달았는가?

 그 자세한 속내는 신문 기사 하나만으로 알 수가 없다. 이문열의 고백에 근거해서 그 이유를 따져 묻자면, 이문열 스스로 말했듯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게 그 한나라당 비판의 동기같다. 공천 심사관들 사이에 이문열이라는 존재 자체가 걸끄러운 존재로 되었거나, 아니면 이문열 개인의 심사를 뒤틀리게 하는 한나라당 내부 갈등의 표출이 이번 이문열 분노의 배경이라는 것이다.

두번째는, 공천심사 총책인 김문수와 이문열과의 신-보수주의 코드가 읽혀지는 대목이다. 이문열씨가 지금 한나라당내 “산업화의 그늘과 냉전논리의 부담”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김용갑과 정형근을 비판한 이유도, 한나라당의 사무총장을 목표로 하시는 김문수씨와의 문-문(문수-문열) 코드가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민주노동당과 이문열의 ‘신-보수주의’ 운동


성급하게 이문열의 발언을 한국내 ‘신-보수주의 우익 운동’이라고 단정짓기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이문열의 발언 중에서 ‘산업화의 그늘과 냉전논리의 부담’이라는 표현은, 이제 한나라당 노친네 정치꾼들의 사랑방 타령, ‘반공, 박정희식의 하면된다’는 논리가 60년대 이후 태어난 젊은 유권자들에게 들어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민주화운동과 노동/시민운동을 경험한 새로운 세대들에 대한 경계의식이, 대중적 진보정당을 표방한 민주노동당이 실제적으로 사회 유효 득표 세력으로 떠오르자, 그러한 경계의식이 이제 ‘빨간 불’을 직접 켜게 한 것이다. 한국에서도 이제 보수주의를 표방하려면 보수주의 자기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진보와 보수는 20세기 세계 정치사의 기본 축이다. 지금 한국에서 진보-보수의 균형을 논하기에는 시기상조이고, 어처구니없는 불균형/불공정 게임 (특히 언론은 홈관중도 아니고, 거의 코치세력에 가깝다)을 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진보 세력 자체가 보수주의 세력까지 신경쓰기 힘든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보수주의’의 진정한 뿌리 내림은, 민주노동당과 같은 진보당의 안착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이문열의 한나라당의 비판 “산업화의 그늘과 냉전논리의 부담”의 그 내용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런 자체 반성은, 한국의 파쇼적-보수주의에서 ‘보수(保守)’할 게 있는 보수주의, 즉 구-보수주의를 보수(補修) 해서 싹수 있는 보수(保守), 진보를 외치는 민족자주권과 평등을 외치는 사람들도 따라 배울만한 ‘보수적 가치’ ‘덕’을 생산적으로 배출해줄 수 있는 보수주의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다. M16, 곤봉, 방패, 군화발로 시위하는 국민들 신체에 상해나 입히고, 지하실에 가두고 고문하는 보수주의는 더 이상 용납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한나라당 공천 심사 위원 이문열씨의 한나라당 비판은, 결과적으로 민주노동당과 같은 국민적 진보정당이 국회진출이 가시화됨에 따라, 국가경영의 유효한 한 축으로 자리매김됨에 따라서, 보수우익당 한나라당의 ‘녹’을 제거하는 ‘신-보수주의’ 운동을 강제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근현대사, 1876년 강화도 조약이후 지금까지 벌어졌던 한국근현대사를 고려한다면, 평등과 자주를 외치는 진보세력은, 한국내 보수정치 세력을 10-15%로 안정적으로 안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과거 미제국주의와 결탁한 이승만, 일제 유제에 의존한 박정희, 전두환-노태우-김영삼 식의 ‘빨갱이 사냥’이나 정치적 숙청으로, 타 정치 세력을 대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이문열-김문수 (문-문 신-보수주의 코드)의 사회적 세력들의 출현에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고, 민주노동당의 새로운 경쟁자들이 지금의 자중지란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 없는가 중요한 한국 정치사의 한 대목이라고 할 수 있겠다 


-05/17

 

 


Posted by NJ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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