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변화의 증인들(1)
일상 속 기후변화 ‘피부’로 증언한다
글 김한솔 기자·영상 최유진 PD입력 : 2020.06.22 06:00
경향신문·녹색연합 공동기획
제주 해녀들이 물질을 시작하러 바다로 이동하고 있다. 최유진PD
“지구온난화가 현재 속도로 지속된다면 2030년과 2052년 사이 지구 기온이 산업화 이전 수준과 비교해 1.5도가량 상승할 가능성이 높다. 많은 지역에서 극한 기온의 온난화, 일부 지역에서 호우 빈도와 강도의 증가, 일부 지역에서 가뭄 강도 또는 빈도의 증가 발생이 예상된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가 2018년 발표한 ‘지구온난화 1.5도 특별보고서’에 적힌 내용이다. 어렵게 쓰여 있지만 지구 기온 상승폭이 1.5도 이상이 될 경우 어떤 지역에서는 기온이 크게 오르고, 어떤 지역에서는 비가 매우 많이 내리게 되는 한편, 또 다른 지역에서는 가뭄이 더 심해진다는 경고다.
지구 기온이 2도 오르면 곤충의 18%, 식물의 16%, 척추동물의 8%는 서식지를 잃게 된다. 산호초의 99%가 사라지고, 빈곤층과 질병은 늘어난다. 195개 IPCC 회원국 ‘모두’가 동의한 내용만 실린 이 보고서에서 기후변화는 눈앞에 닥친 현실이며, 위기다.
지난해 글로벌조사네트워크가 39개국 성인 3만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기후변화 인식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의 기후변화에 대한 인식은 매우 높다. 응답자의 95%가 ‘기후변화가 있다’고 답했는데, 이는 미국(76%), 일본(86%)보다 훨씬 높은 수치였다. 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KEI)이 2019년 실시한 조사에서도 응답자의 91.4%는 ‘현시점에서 기후변화가 심각하다’고 답했다. 하지만 ‘본인 입장에서 기후변화가 심각한가’라는 질문에는 그 수치가 69.6%로 뚝 떨어졌다.
기후변화가 심각하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이들은 드물다. 하지만 기후변화가 당장 ‘나의 구체적 일상’을 바꿀 것이라는 위기감을 느끼는 이들 또한 드물다. 때마다 발표되는 온실가스 배출량 수치, 수온 상승폭 같은 데이터를 앞세운 국내외 보고서들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날씨가 예전보다 덥거나 추워졌다고 느낄 때가 있긴 하지만 이것을 ‘기후변화’와 선뜻 연결 짓긴 어렵다. 그렇게 기후변화는 낯설진 않지만 ‘아직은 나의 일은 아닌 일’이 된다.
경향신문은 녹색연합과의 공동기획을 통해 지난 4월부터 자신의 일터와 삶에서 기후변화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는 ‘변화’를 직접 목격한 이들, 즉 ‘기후변화의 증인들’을 만났다. 이들은 “나는 전문가는 아니지만, 기후변화에 대해 잘 모르지만”이라는 전제를 달고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바다에 여름, 겨울이 없어졌다”(제주 해녀), “침엽수로 푸르다 못해 검던 숲이 희게 변했다”(지리산 산지기), “50년 농사 인생 중 이런 저온피해는 처음”(이상기후 피해 농민)이라고 했다.
각종 보고서상의 ‘숫자’로 존재하던 것들이 이들에겐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위기이자 현실이었다.
한겨울 물질 나갈 때도 두껍게 안 입어요
일상 속 기후변화 ‘피부’로 증언한다
<b>물질경력 45년, 제주 해녀 김혜숙씨 </b> 우도 해녀 김혜숙씨. 김씨는 과거엔 바닷속에서 ‘계절의 변화’를 느끼곤 했지만, 요즘 바다는 “여름도, 겨울도 없는 것 같다”고 했다. 최유진PD yujinchoi@kyunghyang.com
예전엔 2월까지 바다 차가웠는데…요즘엔 계절 없는 것 같아
감태 등 해조류 급감…숨을 곳 없는 소라, 많이 잡아도 착잡해
제주 해녀 김혜숙씨(61)는 중학생 때인 15살에 처음 물질(해녀들이 바닷속에 들어가 해산물을 채취하는 일)을 배웠다. 17살에는 해녀가 직업이 됐다. 그는 제주도 옆의 작은 섬, 우도에서 나고 자랐지만 충청도와 전라도 앞바다까지 가리지 않고 물질을 했다. 물때에 맞춰 출근해 잠수복으로 갈아입고, 장비를 점검한 뒤 바닷속으로 7~8m씩 잠수해 해산물을 땄다. 그렇게 45년이 흘렀다. 그동안 김씨의 작업 방식이나 장비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잠수복의 재질이 조금 더 좋은 것으로 바뀌긴 했지만, 여전히 옛날과 같은 모양의 태왁(어구)을 쓰고, 김서림을 방지하기 위해 수초로 수경을 닦는다. 하나 바뀐 것이 있다면 김씨의 일터, 바닷속의 상황이다.
“예전엔 겨울이 되면 2월까지 바다가 너무 차가웠어요.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뜨겁고 그랬죠. 그런데 요즘엔 뭐, 겨울, 여름이 없는 것 같아요.”
제주도 우도 비양도 앞바다에서 해녀가 물질을 끝내고 나오고 있다. 최유진 PD yujinchoi@kyunghyang.com
지난 4월30일, 우도 비양도 앞바다에서 막 물질을 마치고 나온 김씨를 만났다. 지난 수십년간 거의 매일 물에 들어갔던 그는 과거엔 바닷속에서 계절의 변화를 실감하곤 했다. “가을이 되면 바닷속이 막 써늘해지니까 옷(고무로 된 잠수복)도 두꺼운 옷을 입었어요. 겨울이면 두께 5㎜, 6㎜짜리를 바꿔가며 입었죠.” 하지만 김씨는 이제 더 이상 그런 두께의 잠수복을 입지 않는다. 그는 “위아래 4㎜짜리만 입어도 4~5시간은 참을 수 있다. 바닷속이 따뜻해지면서 이제 두꺼운 건 필요 없게 됐다”고 했다.
바다 온도 상승은 통계로도 확인된다. 기상청에 따르면 한국 바다의 겨울철 수온은 1998년 이후 연평균 0.11도씩 상승했다. 2010년 이후로는 0.21도씩 높아져 상승세가 더 가팔라졌다. 이러한 수온 상승은 동해, 서해, 남해 전 해역에서 확인된다. 역대 가장 따뜻했던 겨울로 기록된 이번 겨울(지난해 12월~올해 2월) 해양 수온은 13도를 기록해 1998년보다 2.2도, 지난해보다 0.5도 올랐다.
서귀포 앞바다 기온 30년 새 2도나 올랐죠
34년간 제주 바다 관찰한 다이버 김병일씨 전문 다이버이자 수중촬영 전문가인 김병일씨. 김씨는 ‘다이빙’이라는 개념이 생소하던 1986년부터 다이빙을 시작했고, 제주로 아예 이주해 다이빙샵을 하며 학자들의 연구를 위한 수중촬영을 돕고 있다. 최유진PD yujinchoi@kyunghyang.com
다이빙 할 때마다 변화들 꼼꼼히 기록, 34년 모아보니 ‘심각’
화려한 열대어종·산호, 다이버들은 즐겁지만 한편으론 씁쓸
전문 다이버인 김병일씨(61)는 이를 기록으로 남겼다. 김씨는 다이빙이 아직 생소하던 1986년 다이빙을 처음 배웠고, 지금은 제주 서귀포에서 다이빙숍을 운영하고 있다. 해양학자들의 연구를 도와 직접 찍기 어려운 수중사진을 촬영하는 전문 사진가이기도 하다.
그는 지난 34년간 다이빙을 할 때마다 측정한 수온과 바다의 탁도, 관찰한 해양생물 등을 자신의 일지에 빠짐없이 기록했다. 그의 일지에는 바닷속에서 일어난 미세한 변화들이 낱낱이 기록돼 있다.
그는 “30년 전에는 서귀포 앞바다 최저 수온이 2~3월의 경우 13도까지도 내려갔다. 그런데 올해의 경우엔 15도로 잠깐 내려갔다가, (다시) 16도로 올라갔다”며 “수중에서 1도의 변화는 육상에서의 10도와 맞먹는다. 그래서 30년간 2도의 변화가 있었다는 것은 엄청난 변화”라고 했다.
‘따뜻해진 바다’에선 예전에 두 사람이 흔히 마주쳤던 것들이 줄어들고 있다. 가장 눈에 띄게 자취를 감춘 것은 해조류다. 해녀 김혜숙씨는 “옛날엔 바닷속에 해초들이 많아서 해초에 오리발이 막 걸렸다. 발이 걸릴까봐 일을 천천히 하기도 했는데, 이제는 그런 게 없다”고 했다. 대부분 70대인 우도 해녀들 중에서 젊은 축에 속하는 김씨는 이날 뿔소라 100㎏을 채취했다. 다른 해녀들에 비해 손에 꼽힐 정도로 수확량이 많은 편이었는데도, 김씨는 좋아하지 않았다. 소라가 이렇게 많이, 수월하게 잡히는 것은 감태가 줄어 소라를 찾기가 쉬워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우도 해녀들이 수확한 소라를 정리하고 있다. 최유진PD yujinchoi@kyunghyang.com
“예전엔 감태가 봄이 되면 새싹이 나가지고 파릇파릇하게 다 덮였어요. 그 감태들 밑에 소라가 숨어 지내는데, (감태가 많아서) 소라를 찾기가 너무 힘들었어요. 막 찾다보면 숨이 다 돼서 다시 위로 올라오곤 했죠. 그런데 이젠 감태가 없으니까 이것들(소라)이 돌 위에서 그냥 뒹굴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올해 많이 잡았다고 좋아할 상황은 아닌 것 같아요.”
톳도 줄었다. 김씨가 속해 있는 비양도 해녀의집은 마을 사업으로 매년 톳을 채취하는데, 보통 200포대씩 수확하던 톳이 올해는 100~150포대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마저도 크기가 현저하게 줄었다. 김씨는 “예전엔 톳 크기가 우리 키만치 해가지고 포대에 담지도 않고 바닥에 펼쳐놓고 (등에) 지고 다니고 그랬는데, 요즘엔 (손바닥을 펼쳐 보이며) 요만하다”며 “예전엔 4~5월 되면 물가에 우뭇가사리, 톳, 미역 등 해초가 풍성하게 있었는데, 지금은 거의 없다”고 했다. 다이버 김병일씨도 “예전에는 한 10m 이상 자라는 모자반이 많아서 해녀들이 물질하기 어려울 정도로 빽빽했는데, 최근 10년 동안 급격히 줄었고 지금은 거의 안 보인다”고 말했다.
감태와 톳, 모자반이 있었던 자리는 낯선 것들이 메워갔다. 대만이나 필리핀, 호주 같은 열대 해역에 서식하는 그물코돌산호나 거품돌산호 같은 것들이다. 그물코돌산호는 1990년대 말까지도 전문 다이버들에게만 가끔 목격될 정도로 희귀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급속하게 퍼졌고, 이제는 제주도 전 연안에 서식 중이다.
청줄돔·범돔·분홍멍게…아열대 생물 천지
아열대 지표종 6년째 관찰 중인 고준철 해양수산연구사 국립수산과학원 고준철 해양수산연구사가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고 연구사는 “제주 바다의 아열대화 속도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고 말했다. 최유진PD
6.6cm였던 그물코돌산호, 따뜻한 수온에 해마다 4cm 급성장
이 상태 30~50년 지속 땐, 위도 10도 낮은 대만처럼 될 수도
국립수산과학원 제주수산연구소의 고준철 해양수산연구사는 2014년 2월부터 제주 바다에 서식하는 아열대 지표종인 그물코돌산호 하나를 지정해 6년째 관찰 중이다. 처음 관찰을 시작했을 때 6.6㎝에 불과했던 이 그물코돌산호는 지난해 27㎝가 됐다. 제주의 바다가 따뜻해지자 연평균 4㎝씩 빠르게 성장한 것이다.
고 연구사는 “암반에 붙어 서식하는 그물코돌산호가 기존의 생물들을 밀어내고 있다. 감태, 모자반이 있던 자리를 그물코돌산호나 거품돌산호 같은 것들이 메워가다보니 소라나 전복, 성게가 이동하거나 없어지는 상황”이라며 “해녀들이 그물코돌산호 때문에 소라가 도망갔다고 하는 이야기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했다.
감태 등 해조류의 성장기는 늦겨울부터 봄까지다. 11~12월 포자가 분해돼 자라다가, 초봄인 2~3월쯤 성체가 된다. 특별히 추운 해역에서 자라는 한대성 해조류도 아니다. 제주에서 가장 많이 나던 것들이다. 그런데도 언젠가부터 이렇게 서식하던 해조류들의 재생산 시스템이 제대로 굴러가지 않게 된 것이다.
2014년 6.6cm에 불과했던 그물코돌산호가 급격하게 성장한 모습. 그물코돌산호는 열대 해역에 서식하던 종이지만, 이제는 제주 전 연안에 서식하고 있다. 국립수산과학원 제주수산연구소 제공.
제주 바다의 아열대화는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고 연구사는 2012년부터 제주도 주요 해역 4~5곳에서 매년 2·5·8·11월에 아열대 어종 출현동향을 확인하기 위한 어획시험조사를 진행한다. 지정된 장소에 배를 타고 나가 수심별로 생물을 채집해 그중 아열대 어종이 얼마나 있는지 확인한다. 지난해에는 이렇게 채집된 생물 중 평균 52%가 아열대 어종이었다. 바닷속은 화려해졌다. 노란 바탕에 새파란 줄무늬가 있는 청줄돔, 분홍멍게 등 색깔도 모양도 화려한 이 생물들은 모두 과거엔 희귀했지만 이젠 흔해진 아열대 어종들이다.
고 연구사는 “평균적으로 70~80종이 잡히는데, 그중 40~50종은 아열대 어종”이라며 “예전엔 보이지 않았던 아열대 어종들의 출현 빈도가 높아졌고, 개체수까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추세”라고 말했다. 김병일씨는 “다이버들 입장에서는 산호가 불어나 바닷속이 화려해지니 볼거리가 많아지긴 했지만, 해녀나 어민들 입장에서는 손해일 것 같다”고 말했다.
제주 연안에 서식 중인 아열대 어종 (위 사진) 청졸돔, 범돔, 금강바리 (아래) 쏠배감펭, 세동가리돔, 파랑돔. 국립수산과학원 제주수산연구소 제공
고 연구사는 “바다도 겨울에 좀 추워야 찬 기류가 빠져나가면서 따뜻한 기류가 올라와 회복이 되는데, 올겨울도 제주도는 눈도 안 오고 따뜻했다. 그런 변동이 너무 심하다”고 말했다. 기후변화로 ‘변동성’이 증가하면서 계절마다 어민들이 해왔던 작업이 차질을 빚게 됐다는 의미다.
기후변화로 인한 바다 수온 상승이 지속된다면, 한국의 바다는 어떤 모습으로 바뀔까. 지금 제주도의 바다 환경과 가장 비슷한 곳은 일본의 4개 섬 중 가장 남쪽에 있는 섬, 규슈다. 고 연구사는 “규슈가 제주도와 위도 선이 거의 비슷하다. 현재 규슈의 바다 환경은 제주도와 거의 80% 정도 비슷하다”고 했다. 고 연구사는 “기후변화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진다면 30~50년 후 한국의 바다는 대만의 바다 환경처럼 바뀔 수 있다고 조심스레 예측한다”며 “만약 그렇게 된다면 좋은 것이 아니다. 전 세계적으로 기온이 최근에 비해 4~5도 오른 상태일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는 지난해 9월 채택한 ‘해양 및 빙권 특별보고서’에서 “1993년 이후 해양 온난화 속도는 2배 이상이 됐고, 해양 고수온(현상)은 1982년 이후 그 빈도가 2배로 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했다. 또 “20세기 이후 해양 온난화로 인해 최대 잠재 어획량이 전반적으로 줄었다”며 “(온실가스가 지금처럼 많이 배출될 경우) 예상되는 생태계의 대응(결과)으로는 종 서식지와 다양성의 손실, 그리고 생태계 기능의 퇴화가 있다”고 경고했다.
※ ‘기후변화의 증인들’ 영상 콘텐츠는 경향신문 유튜브 채널 [이런 경향]에서 볼 수 있다.
기후변화의 증인들(2) 지리산 나무.
사철 검푸르던 지리산의 ‘회색 탈모’…그 자리를 활엽수들이 차지
글 김한솔 기자·영상 최유진 PD입력 : 2020.06.29 06:00
지리산 구상나무
사철 검푸르던 지리산의 ‘회색 탈모’…그 자리를 활엽수들이 차지
지리산 임걸령으로 가는 길에서 발견한 구상나무 고사목들. 뿌리가 통째로 뽑힌 채 죽어 있거나(왼쪽 사진), 선 채로 고사해 회백색으로 변해 있다. 국립공원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기후변화로 인해 지리산 반야봉·영신봉·천왕봉의 구상나무 고사목이 최근 10여년간 2~5배 이상 증가했다.
산을 어쩌다가 찾는 이들에게 5월 초의 지리산은 썩 건강해 보인다. 밝은 연두색부터 탁한 풀색까지, 세상의 모든 초록이 지리산에 있는 것 같다.
지리산국립공원 산청분소 직원인 민병태씨(64)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그의 기억 속 지리산의 색깔은, 더 짙었다. “저기가 옛날에는 시커맸는데…. 시커맸어요, 침엽수 때문에. 사시사철 ‘푸른’ 게 아니고, 사시사철 ‘검은’색이었죠.”
이곳의 직원이 되기 전 그는 30년간 지리산 치밭목대피소의 산장관리인이었다. 지리산 해발 1425m에 위치한 이 대피소는 지리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인 천왕봉(1916m)과 500m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높고 외딴 곳에 있다. 그는 치밭목대피소가 ‘대피소’라는 이름을 갖기도 전부터 그곳에 살며 등산객들을 돌봤다. 공단이 노후한 산장을 철거하고, 새로 짓기로 하면서 3년 전에야 비로소 ‘하산’했다. 수십년간 산 한가운데서 살았던 그는 지리산, 그중에서도 인간의 접근이 쉽지 않은 아고산대 생태계 변화를 가까이서 목격한 몇 안 되는 증인이다. 그와 지난달 초 지리산에서 만났다.
지리산 아고산대 침엽수인 구상나무 집단 고사 가속
30년 산장관리인 출신 “어느날 풍경이 낯설게 보였다”
국립공원관리공단 지리산국립공원 경남사무소 산청분소 직원인 민병태씨가 지난 5월7일 지리산 임걸령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그는 공단 직원으로 일 하기 전 수십년 간 지리산 치밭목대피소의 산장 관리인으로 일했다. 최유진PD
아고산대는 따뜻한 곳에서 자라는 활엽수들이 있는 온대림과, 나무가 더 이상 생존할 수 없는 고산지대 사이에 위치한 식생대다. 이곳의 연평균 기온은 4~5도 이하로 춥고, 비와 눈이 많이 내리며, 바람이 많이 분다. 아고산대는 민씨가 기억하는 ‘사철 푸르다 못해 검었던’ 상록침엽수의 주 서식지이기도 하다. 상록침엽수에도 여러 종류가 있지만, 지리산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는 것은 구상나무(Abies Koreana)다. 지리산 아고산대의 침엽수 분포 면적은 총 41.88㎢인데, 이 중 99.84%가 구상나무의 서식지다. 지금까지는 그렇다.
산의 색은 그 색을 채우던 것들이 줄어들면서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산에 살았던 민씨도 산의 색깔이 ‘옅게’ 변하는 것을 눈치채는 덴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전문 지식도 없고, 또 계속 보던 것(풍경)이다 보니 오히려 변화의 심각함을 잘 못 느꼈어요. ‘뭔가 이상한데’ 싶으면서도 감이 잘 안 왔던 거죠.” 그러다 문득 매일 보던 풍경이 낯설게 느껴진 날이 있었다. “겨울에 숲의 푸른색이 없어졌어요. 회색지대로 변한 겁니다. ‘어? 뭐지?’ 했어요.” 그가 반야봉 능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예전엔 숲이 시커멀 정도로 전체가 다 침엽수였는데, 지금은 활엽수들이 치고 올라와서…. 탈모현상처럼 보여요. 다 녹색이 됐어요.”
사철 검푸르던 지리산의 ‘회색 탈모’…그 자리를 활엽수들이 차지사진 크게보기
그와 해발 1320m의 임걸령까지 가는 길에 구상나무 고사목들이 모여있는 곳이 나왔다. 한때 소규모로나마 군락을 이뤘던 것으로 추정되는 나무들은 다양한 형태로 죽어있었다. 누군가 나무를 손가락으로 집어 땅에서 쏙 뽑아낸 것처럼 뿌리가 통째로 뽑힌 채 죽은 나무가 있는가 하면, 어떤 나무는 뿌리는 박혀 있으나 중간이 뚝 부러져 있었다.
똑바로 선 채로 죽어 색깔만 옅은 회색으로 변해 있는 나무 옆에는, 마치 종이가 찢어진 것처럼 몸통이 세로로 길게 찢어진 채 죽어있는 나무도 있었다. 민씨가 찢어져 죽은 나무 옆에 섰다. 땅에서 산 시간보다 산에서 산 시간이 더 긴 그는 나무를 ‘친구’라고 불렀다. “전문용어로는 잘 모르겠고, 그냥 약해요. 싱싱한 친구들은 탄력이 좋아서 바람에 움직였다가도 다시 돌아오죠. 그런데 탄력이 없는 친구들은 그냥 갈라집니다. 통째로 찢어져요. 한쪽은 이렇게 서 있고, 한쪽이 (찢어져) 쓰러져 버리면, 남아있는 부분도 결국은…(죽는 거죠).”
강설량 줄고 고온건조해진 봄에 생육시기 수분 부족
한국에서만 자생하지만 국내선 멸종위기종 분류 안 돼
녹색연합 자연생태팀 서재철 전문위원. 최유진PD
26년차 환경운동가인 녹색연합 자연생태팀의 서재철 전문위원도 지리산 구상나무의 고사 현장을 목격한 순간을 또렷이 기억한다. 그는 2010년 백두대간 생태조사를 하던 과정에서 처음 침엽수 고사 현장을 봤다. “(보자마자) ‘아, 죽어간다’ 했어요.
그런데 그 뒤로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거예요. 2012년, 2013년에는 더 많이 보였어요.” 그러다 2014년 지리산 천왕봉 인근에서 대형 산사태가 발생했다. 그는 산림청 요청으로 산사태 현장을 모니터링하는 헬기에 탔다.
“카메라 셔터스피드를 500분의 1로 놓고 훑듯이 죽 찍었어요. 나중에 사진 판독을 하는데 깜짝 놀란 거예요. 반야봉 쪽에서 떼로 죽어있는 게 나오더라고요. 이 정도인가, 심각하다(고 생각했죠.)” 지리산에서 두 번째로 높은 봉우리인 반야봉의 해발고도는 1732m다. 그는 사진에 찍힌 현장을 직접 찾아갔다. 사진에서 봤던 그대로 집단 고사한 구상나무들을 발견했다. 그는 그때부터 아고산대 침엽수 고사 문제를 집중적으로 파고들었고, 2년 뒤인 2016년 식목일에 이 문제를 대대적으로 제기하는 보도자료를 냈다.
정보기술(IT) 회사에서 일하는 박진성씨(38)는 2018년 내내 서 위원과 함께 전국의 산을 함께 다니며 침엽수 고사 현장을 조사했다. 그는 민병태씨 같은 산악인도, 서 위원과 같은 환경운동가도 아닌, 휴일마다 ‘백패킹’하는 것이 취미인 직장인이다. 녹색연합에서 침엽수 생태조사를 함께할 일반인들을 모집하는 것을 우연히 보고 지원했다.
그는 1년간 고산지대 고사목의 높이와 너비를 재고, 색이 변한 잎사귀들을 체크하고, 기록으로 남겼다. 처음엔 어떤 것이 구상나무 고사목인지 구분하기조차 쉽지 않아 온종일 10~20그루를 찾는 것도 힘들었는데, 나중엔 하루에 40~50그루는 쉽게 찾아냈고, 속도가 더 붙은 뒤엔 하루 조사로는 다 기록할 수 없을 만큼 고사목 수가 많다는 사실에 놀랐다. “못 찾아서 안 보였던 것일 뿐, 보이게 되니까 조사할 것들이 너무 많았어요.”
올해 2월 발간된 국립공원연구원의 ‘지리산 아고산대 침엽수 고사개체 공간정보 구축 및 입지환경 분석’ 보고서에는 세 사람의 증언이 통계로 기록돼 있다. 지리산 반야봉·영신봉·천왕봉의 구상나무 고사 현황을 조사한 이 보고서는 “세 지역 모두 최근 10여년간 고사목 개체수가 2~5배 이상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히고 있다.
또 구상나무에 대해 “기후변화에 따른 수분 공급량 부족, 증발산량 증가, 광합성-호흡량 불균형 등에 따른 생리적 스트레스 가중으로 자생지 소멸 위험성이 점차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고 했다. 연구에 참여한 국립공원연구원 이나연 연구위원은 “전 세계적으로 고지대에 살고 있는 구상나무 같은 ‘바늘잎’ 나무들이 많이 죽어가고 있다”면서 “지구의 기후변화를 원인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했다.
녹색연합 ‘그린 백패커’로 활동하며 고산 침엽수 생태조사에 참여했던 시민 박진성씨.최유진PD
사실 나무는 여러 원인으로 고사할 수 있다. 태풍이나 강풍에 꺾일 수도 있고, 자연적으로 수명이 다할 수도 있다. 최근 10여년간 가속화되고 있는 구상나무 고사의 주된 원인이 ‘기후변화’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이 연구위원은 ‘온도 상승’을 들었다. 이 연구위원에 따르면 전라북도 남원의 연평균 기온은 2012년 11.9도였는데, 2019년 13.3도로 1.3도가 올랐다. 같은 기간, 고지대인 지리산 반야봉 지역의 연평균 기온은 4.2도에서 7.7도로 상승했다.
민병태씨는 그것을 피부로 느꼈다. 겨울철 내리는 눈의 양이 줄었고, 봄은 고온건조해졌다. 그는 “1980년대 초반만 해도 5월 말~6월 초까진 비탈진 계곡이나 응달 쪽에는 잔설이랑 얼음이 남아있었는데 지금은 2월 말쯤 되면 잔설이 없다”면서 “작년 겨울엔 측심할 눈도 없었다. 한 번 폭설이 왔는데 온도가 높다보니 2~3일 사이에 다 내려앉아 버렸다”고 했다.
제주의 해녀들이 기후변화로 바다 수온이 높아져 더 이상 예전만큼 두꺼운 잠수복을 입지 않게 된 것처럼, 민씨의 겨울산행용 보호장비 역시 간소해졌다. “장갑 하나만 있어도 어지간히 버티고, 신발도 완벽한 동계화가 아니더라도 다니는 데 불편함이 없어요.”
이러한 변화들은 복합적인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나무의 떼죽음을 야기하고 있다. 이 연구위원은 “겨울철 눈 녹은 물이 토양으로 흡수되면서 나무의 생육을 활성화시키는데, (눈의 양이 줄면서) 나무들이 한창 생육을 해야 할 시기에 수분이 부족해졌다”고 말했다.
그는 “동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태풍의 빈도나 강도가 높아진 것도 지리산 나무들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했다. 구상나무는 뿌리를 수직으로 깊게 박아내리는 대신 얇은 뿌리를 수평으로 퍼뜨리며 자라난다. 토양의 깊이가 얕고, 암반지대가 많은 아고산대 환경에 버틸 수 있게 발달한 뿌리다. 하지만 따뜻하고 건조해진 환경에서 이런 뿌리는 쉽게 뽑혀 버리고 만다.
세계자연보전연맹(ICUN)이 ‘위기종(Endangered)’으로 지정한 구상나무는 전 세계적으로 한국에서밖에 자생하지 않지만 아직 국내에선 멸종위기종으로 분류조차 돼 있지 않다. 사실 아고산대는 거의 사람이 찾지 않는 곳이어서 구상나무가 없어졌다고 당장 ‘인간의 생활’에 타격을 줄 것 같진 않다. 구상나무가 사라진 땅이 황무지로 남는 것도 아니다.
쇠약해진 구상나무가 고사한 자리엔 따뜻한 곳에서 잘 자라는 낙엽활엽수가 들어서고 있다. 구상나무가 외국에서 ‘크리스마스트리’로 인기가 있다고는 하나, 그게 구상나무 고사를 우려해야 하는 이유로는 충분하지 않아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구상나무의 죽음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이 연구위원은 “식물의 변화는 수백년, 수천년에 걸쳐 일어나는데, 현재의 변화는 인간의 ‘인위적인’ 활동으로 인해 (지구) 온도가 변하고 있는 상황에서 나타난 것이라 자연이 스스로 변화하는 속도보다 훨씬 빠르다”고 지적했다.
그는 ‘비행기’를 비유로 들었다. “비행기를 생태계라고 한다면 부품 한두 개가 빠져도 날 수는 있겠죠. 하지만 중요한 부품이 사라지거나 고장나면 날 수 없잖아요. 아고산 생태계가 사라지는 것도 그런 위험성이 있는 거죠. 구상나무의 고사는 단순히 침엽수에서 낙엽활엽수로 ‘세대교체’가 되는 게 아니라, 생태계 자체가 유지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부분으로 봐야 합니다.”
지리산국립공원 전남사무소의 신창근 계장은 ‘팔각’의 예를 들었다. “신종플루의 치료약, 타미플루의 원재료가 되는 나무가 ‘팔각’인 거 아세요? 과거엔 중국 요리에 들어가는 재료 정도로 쓰였지만, 지금은 위상이 달라졌잖아요. 구상나무도 지금은 몰라요. 한 종 한 종의 가치는 현재 일부만 밝혀져 있을 뿐이죠. 지금으로선 가치 평가를 할 수 없어요.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모르니까, 우리로서는 한 종이라도 더 갖고 있는 게 유리한 거죠.”
마지막으로 민씨는 잠시 생각에 잠긴 끝에 이런 말을 남겼다. “온도가 갑자기 이렇게 올라가 버리는 것은 (구상나무에는) 천재지변이에요. 여기서 붙박이로 살고 있는 친구들은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는 거잖아요. 가끔 산에 오는 등산객 중에는 (심각성을) 못 느끼는 분들도 계실 거예요. 그런데 전 심각하다고 생각해요. 우리 인류도 (지구의) 전체 틀에 한 구성원이잖아요. (자연이)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잖아요. 서로 이용하는 관계잖아요. 그래서 저는…, 전 인류의 회의가 필요한 것 같아요.”
따뜻한 겨울 탓 배•꿀 흉작…이상기후, 더 자주 더 세져 더 암울
글 김한솔 기자•영상 최유진 PD
입력 : 2020.07.07 06:00 수정 : 2020.08.21 14:02
이상기후 시대의 농사
나주에서 배 농사를 짓는 노봉주씨가 냉해로 인해 크기가 골프공보다 작고 모양이 찌그러진 기형 배들을 보여주고 있다(위 사진). 노봉주씨가 자신의 배밭에서 냉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최유진PD yujinchoi@kyunghyang.com
빨라진 개화기에 꽃샘추위, 배꽃 고사로 착과 안 되고 기형 많아
“꽃이 피었는데 꿀벌 굶어 죽는 건 처음” 저온 탓 꿀 생산량 급감
농업 재해 세계적 현상…농작물값 폭등 땐 국내 식량 안보 타격
“사후 복구식 위기관리 한계, 사전경보 등 예방 패러다임 전환을”
한때 농사는 단순하고 정직한 일이었다. 베테랑 농부든, 초보 농부든 계절의 변화에 맞춰 매 달 해야 하는 일들이 있었다. 그리고 땅 고르기와 비료 주기 같은 그 티 나지 않는 일들을 얼마나 성실하게 했느냐에 따라 결과도 달라졌다. ‘땀 흘린 만큼 결과가 나오는’, 정직한 원리가 여전히 작동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눈이 한 차례도 내리지 않는 따뜻한 겨울과, 초여름 날씨를 방불케 하는 고온건조한 봄, 한 해에 태풍이 갑자기 7번이나 몰아치는 기후변화의 시대에 농사는 더 이상 단순한 일도, 땀 흘린 만큼 결과가 돌아오는 일도 아니다. 농사는 복잡하고, 또 운에 기대야만 하는 일이 되었다.
26년차 배 농부 노봉주씨(55)도 올해 누구보다 많은 땀을 흘렸다. 하지만 농사는 크게 망쳤다. 그는 전라남도 나주에서 배 농사를 짓고 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5월 중순, 노씨의 배 밭에서 그를 만났다.
그의 밭에는 골프공보다 작은 크기의 열매들이 여기저기 떨어져 질척이는 땅에 처박혀 있었다. 푸릇푸릇한 배나무에는 나뭇잎만 무성했다. 처음엔 그렇게 보였다. 배나무에 달려있는 열매의 크기가 워낙 작아, 나뭇잎에 다 가려졌기 때문이다.
나무에 달려있는 열매의 크기도 바닥에 떨어진 것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어떤 가지에는 검게 말라 비틀어진, 언뜻 보면 얇은 나뭇가지 같은 배꽃도 붙어 있었다. 노씨는 밭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배나무 가지에 달려있는 열매를 툭 땄다.
“이런 배들은… 이렇게 (모양이) 비틀어진 것들은 돈이 안 돼요.” 그는 가지의 나뭇잎들을 들추며 말했다. “원래는 이런 꼭지 하나하나에 배(열매)가 5개, 6개씩 달려있어야 해요.” 그가 가리킨 곳에는 열매가 3, 4개씩밖에 없었는데, 그마저도 모양이 찌그러진 것들이 많았다. 노씨가 아직 새파란 열매 하나를 이리저리 돌리며 살피다 자신의 엄지 손가락에 갖다댔다. “이때쯤이면 이것보다 열매 크기가 1.5배, 2배는 돼야 하는데…. 제 엄지손가락 정도는 돼야 해요.”
배꽃이 말라죽은 채로 가지에 매달려 있다. 올해 개화기에도 꽃샘추위가 몰아쳐 얼어붙은 암술 씨방이 까맣게 고사하는 저온 피해를 입었다. 최유진PD
노씨의 배밭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올해는 유독 무엇이 빨리 시작됐다는 소식이 많았다. 1월23일 지리산국립공원 구룡계곡에 사는 북방산개구리가 산란을 했다. 봄에 산란을 하는 북방산개구리가 1월에 산란한 것은 관찰을 시작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유독 따뜻했던 겨울 기온 때문이다. 지난겨울(2019년 12월~2020년 2월) 전국의 평균기온은 3.1도, 특히 북방산개구리가 이른 산란을 한 1월은 전국에 고온 현상이 나타났다. 1월의 평균기온은 2.8도, 한파 일수는 0일로, 기상관측을 시작한 이래 가장 높았다. 2월에 짧은 추위가 있었지만 대부분 기간은 평년보다 기온이 높았다. 그런 날들이 계속 이어졌다. 3월의 전국 평균기온은 7.9도를 기록했고, 4월2일에는 소백산국립공원의 박새가 산란을 했다. 9년 만에 가장 빠른 산란이었다. 노씨 배밭의 배꽃들도 이때 일제히 피었다. 원래 4월 중순쯤에 피어야 하는 꽃들이었다.
“4월11일쯤에 꽃이 피어야 하는데 4월3~4일, (빠르게는) 1일에 꽃이 피어버린 거예요.” 그는 배꽃의 개화가 그전부터 조금씩 빨라지고 있는 걸 느끼고 있었다. “통상적으로 나주의 신고배 꽃의 만개일은 4월15일이라고 했는데, 몇년 전부터 나주는 4월10일 정도에 피었어요.
올해 같은 경우는 생각지도 않게 기온이 너무 높았죠. 그래서 1주일 이상 빨리 피었어요.” 그런데 꽃이 피자마자 내내 따뜻하던 기온이 갑자기 뚝 떨어졌다. “4월5~6일에 기온이 영하 4도, 5도로 내려가서 배 꽃눈이 고사했어요. 그 이후에도 날씨가 안 좋아서, 많은 사람들이 노력을 했는데, 70~80%는 배가 안 달렸고, 배가 달렸다고 해도 상품으로 쓸 수 있는 배가 아니에요.” 노씨는 배의 개수를 배 한 알을 포장하는 데 드는 종이 ‘장수’로 말했다. “(이 밭에선) 3만3000장 정도 싸요. 올해는 1000장은 쌀는지 모르겠어요. 싸 봤자 시중에는 가공품으로 나가요.” 배숙 같은 것으로 ‘가공’해야만 팔 수 있는 배는 그냥 과일로 파는 배보다 값이 훨씬 싸다. “가공배는 사각상자 하나에 45~50개 들어가는데, 그 가격이 ‘1만원’이에요.”
전국적으로도 올해 4월은 추웠다. 4월 전국 평균기온은 10.9도로, 평년(12.2도)보다 낮았고, 강수량은 40.3㎜로 평년(51.1~89.8㎜)보다 적었다. 설상가상으로 기온이 떨어진 다음에는 강풍이 불었다. 4월 말 전국에 태풍 수준의 강풍이 불면서 안 그래도 적게 달린 배 열매들이 그대로 바람에 날려 떨어졌다. 노씨는 내년을 위해 배밭에 간단하게 약만 쳤다. 그리고 냉해 대책을 촉구하는 비상대책위원회 활동에 돌입했다. 현행 농작물 재해보험의 냉해 보상률은 50%에 불과하다.
꽃에 꿀이 사라진 탓에 말라버린 판 형태의 벌집 위에 꿀벌들이 앉아 있다(위 사진). 국립농업과학원 연구원들이 꿀 작황 현장조사를 하고 있다. 최유진PD
노씨가 밭에서 땀 흘리는 일을 멈추고 정부에 대책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 무렵, 강원도 철원에 사는 양봉업자 임송빈씨(64)는 벌 110군을 이끌고 아카시아 꽃을 따라 전국을 돌고 있었다. 그는 이동양봉을 한다. 이동양봉은 아카시아 꽃이 피는 지역을 따라 순차적으로 이동하며 꿀을 따는 것이다. 보통 5월8일쯤 꽃이 가장 먼저 피는 남부지방에서 1차 채밀을 시작한 후 5월 중순쯤 중부지방에서 2차, 5월 말 북부지방에서 3차 채밀을 한다. 한 지역에만 머물며 채밀을 해서는 소득을 얻기 어렵기 때문에 많은 양봉농가들이 이런 식으로 이동하면서 양봉을 한다. 이런 작업 형태에는 조건이 필요하다. 꽃이 정해진 개화시기에 맞춰 남부지방에서부터 북부지방으로 올라오면서 필 것, 비가 내리지 않을 것. 올해는 그 조건이 모두 갖춰지지 않았고, 임씨도 노씨처럼 한 해 농사를 크게 망쳤다.
양봉업 경력 40여년의 임씨가 올해 6월 말까지 딴 아카시아 꿀은 2드럼에 불과하다. 그는 보통 5월 말쯤이면 아카시아 꿀만 20~30드럼씩 땄었다. “(올해 딴 꿀은) 그것도 좋은 꿀이 아니라, 수분이 많이 함유된 ‘물꿀’이에요.” 그는 올해 1차지로 경상북도 구미, 2차지로 세종시 조치원을 찾았고, 3차지로 자신이 양봉을 하는 강원도 철원으로 돌아왔다. 모든 지역에서 꿀이 부족했다. “(과거엔) 경상도 지역에서 날씨가 나빠도 충청도에 가면 꿀이 있고, 또 거기서 안 되면 강원도로 오면 됐고 그랬는데, 올해는 어느 지역에 가도 꿀이 나오는 곳이 없었어요.”
꿀이 말라버린 아카시아꽃에 벌 한 마리가 앉아 있다. 올해 4월 급격한 저온 현상으로 아카시아 나무 꽃대 발육이 예년 대비 50% 수준에 그쳤다. 최유진PD
아카시아 꽃은 국내 양봉농가의 주 밀원이다. “원래 아까시(아카시아)는 기적 같은 나무예요. 큰 나무들은 한 나무에서도 꿀이 많게는 3말(54ℓ)이 나온다고 그래요.” 한국양봉농업협동조합의 ‘2020년 벌꿀 생산 흉작 원인 분석 및 작황과 지원방안’ 보고서에는 이 ‘기적 같은 나무’에 일어난 일이 구체적으로 담겨있다. 보고서는 올해 흉작의 원인으로 4월에 발생한 급격한 저온 현상을 꼽았다. 갑자기 뚝 떨어진 기온이 아카시아 나무 꽃대 생성에 악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한다. 지난해 연달아 몰아친 태풍으로 많이 부러지고 잎이 떨어진 아카시아 나무들의 발육은 이미 저조한 상태로, 꽃송이 숫자 자체도 줄었다. 이동양봉이 시작되는 5월에는 계속해서 비가 내렸다.
결국 그나마 있던 꽃송이에서 나온 꿀도 물이 잔뜩 섞인 물꿀이 됐다. 보고서는 “아카시아 나무 꽃대 발육이 예년 대비 50% 수준”이라며 “최근 지구온난화 등 이상기후로 인해 벌꿀 생산을 예측하기 힘든 불규칙한 상황이 발생하고 있고, 앞으로 이러한 추세가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했다.
임씨는 양봉을 시작한 이래 가장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5월 아카시아 철이 지나면 잡화꿀과 밤꿀의 채밀시기가 돌아온다. 그는 “딴 해는 아카시아가 (꿀이) 안 나와도 잡화, 찔레도 있고 때죽도 있었는데, 아카시아에서만 안 나오는 게 아니라 모든 꽃에서 꿀이 분비가 안 되는 상태”라며 “양봉을 40년 했는데, 2004년 외국에서 벌레가 들어와 아카시아 나무가 병들었을 때 빼고 이건 처음 보는 현상”이라고 말했다. 그는 잡화꿀과 밤꿀을 합해서 겨우 반 드럼을 채웠다.
올해처럼 모든 지역에서, 모든 종류의 꿀이 안 나는 흉년이 오면 복구를 하는데도 오랜 시간이 걸린다. 황협주 한국양봉협회장은 “꽃이 피었는데도 벌이 굶어 죽는 것은 처음 봤다”고 했다. 그는 “꽃밭에서 벌이 아사하는 것은 극히 드물다”면서 “벌에게 먹이는 설탕을 긴급히 구해서 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양봉농가의 흉년은 2018년에도 있었지만, 올해는 그때와 비교해도 더 상황이 좋지 않다. 황 회장은 “그때는 안동, 예천, 이런 내륙지방은 괜찮았어요. 그래도 꿀이 한 3만t 이상은 생산됐는데, 올해가 사상 유례없는 해”라고 했다.
사실 노씨와 임씨의 농사는 배꽃과 아카시아 꽃이 ‘원래 피던 때’에만 피었어도, 망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국립농업과학원 기후변화생태과의 심교문 연구관은 “겨울철이 따뜻하다보니 월동작물과 과수의 생육시기가 빨라졌는데, 그 뒤 4월쯤 온도가 떨어졌다”며 “평상시 같았으면 개화기가 아니어서 피해를 보지 않을 상황에서 피해를 보게 됐다”고 말했다. 최근 10년간 국내에서는 과거에 경험해보지 못한 이상기후 현상이 빈번하게 나타났다. 심 연구관은 “폭염이 매년 발생하고 있는데, 최근에 그 강도가 강화되고 빈도가 증가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반대로 2000년 초반에는 길고 강한 한파가 발생했다. 강수량도, 단기간에 지역적 집중호우가 빈번해지고 있지만, 2015~2017년에는 장기적인 가뭄이 발생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이런 이상기후 현상이 국내에서만 발생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기상청에 따르면 지난 3월 브라질 남동부에서는 폭우로 80여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됐고, 일본 도쿄에서는 32년 만에 1㎝ 이상의 눈이 왔다. 국내 농가들이 냉해를 입었던 지난 4월, 중국 북동부에서는 37년 만에 최대 폭설이 내렸고, 기온이 하루에 20도씩 하강했다. 심 연구관은 “한국은 곡물 자급률이 24%에 불과한 세계 10위권의 식량 수입국이기 때문에 식량안보가 대외적 생산여건과 매우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며 “이상기후를 동반한 기후변화가 전 세계적인 애그플레이션(농작물 가격의 폭등으로 일반 물가도 상승하는 것)을 발생시키고 식량부족 현상을 심화시켜서 식량 수입가격이 폭등하게 되면, 국내 식량안보에도 많은 어려움이 초래될 것”이라고 말했다.
기후변화에 따른 이상기후 현상은 앞으로도 더 자주, 더 큰 폭으로 발생할 것으로 보인다. 심 연구관은 “농업 부문의 재해관리도 사후복구 중심의 위기관리에서 사전 예방으로 피해를 줄이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며 “조기경보를 통해 개별 농장 작물의 생육 상황을 관리하고, 재해 위험 여부를 사전에 판정할 수 있는 기상예보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고 말했다.
25년간 “오직 배만” 키웠다는 노씨는 이번 농사를 끝으로 사실상 배를 포기했다. 한달 반째 정부에 냉해 대책을 호소하고 있는 그는 대규모 집회 개최도 준비하고 있다. “저는 오직 배만 했거든요. 그런데 배는 희망이 안 보여요. 작년부터 인기를 끌고 있는 ‘샤인 머스캣’을 해보려고 준비하고 있어요. 늦었다해도, 가능성이 좀 있어서….
기후변화의 증인들(4) 산불.
더 커지고, 오래가고, 연중 끊이지 않고…산불이 심상찮다
글 김한솔 기자·영상·사진 최유진 PD입력 : 2020.07.13 06:00
산불
경향신문·녹색연합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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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24일 경북 안동시 풍천면 인금리 야산에서 시작된 산불이 번져가고 있다. 이 불은 사흘간 계속되다가 축구장 2700개 규모(1944㏊)의 피해를 낸 후 꺼졌다. 연합뉴스
강수량·강수일수 감소 추세
건조해진 땅, 발화하기 쉬워
높은 기온 겹쳐 ‘대형 산불’로
산불이 나는 데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먼저 불씨가 있어야 한다. 이것은 대체로 인간이 만든다. 국내에서 발생하는 산불은 대부분 인간의 실수에 의한 실화다. 자연발화는 드물다. 불씨가 생겼다면 그것을 댕길 연료가 있어야 한다. 산불의 연료는 나무와 낙엽이다. 인화성이 강한 소나무, 그 바닥에 쌓여 있는 마른 낙엽 같은 것들을 만나 불씨는 비로소 불이 된다. 마지막 조건은 기상이다. 바람이 얼마나 세게 부는지, 날이 얼마나 건조한지에 따라 ‘불의 크기’가 결정된다.
낙엽에 떨어진 불씨 하나가 작은 산불에 그칠지, 생명을 위협하는 대형 재난으로 커질지는 전적으로 기상 조건에 달렸다.
이 세 가지 조건을 인간이 통제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나눠보면 이렇다.
불의 시작점이 되는 인간의 실수는 ‘어느 정도’까진 통제할 수 있다. 산 주변의 논밭에서 무언가를 태우지 않도록 반복해서 주의시키고, 산불 위험 기간엔 산 출입을 막을 수도 있다. 연료는 그보다 조금 더 적극적인 통제가 필요하다. 땅에서 시작된 불이 나무를 타고 올라갔을 때, 나무가 빽빽히 들어선 숲에서 불은 더 쉽게 번진다. 나무와 나무 사이 간격을 띄워 심는 것, 가지치기를 하는 것, 불에 강한 나무를 심는 것 등은 모두 연료를 통제해 산불을 억제하는 방법이다. 이 두 가지 조건은 완벽하게는 아니더라도, 그나마 통제가 가능한 것들이다. 그런데 기상은 그렇지 않다. 인간이 통제할 수 없다.
김만주 산림청 산림항공본부 산림항공과장(현 중앙산림재난상황실장)이 강원도 원주에 있는 항공본부 상황실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김 과장은 “전문인력과 헬기 같은 진화자원들이 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형 산불로 갈 만한 여지들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최유진 PD
“제일 중요한 것은 기상입니다. 건조한 날씨에 부는 강풍이 (산불에) 가장 영향력이 큰 인자예요.” 산림청 산림항공본부의 김만주 산림항공과장(52·현 산림청 중앙산림재난상황실장)이 말했다. 그는 13년째 산림청에서 산불 대응을 하고 있다. 산불이 났을 때 현장의 어디로, 몇 대의 헬기를 보내 어떻게 불을 끌지, 그가 결정한다. 지난달 강원도 원주에 있는 산림항공본부 상황실에서 그를 만났다.
2009~2018년 강수량 추이. 행정안전부 ‘2019 강원 동해안 산불백서 중.
행정안전부 ‘2019 강원 동해안 산불백서 중 2009~2018년 강수일수 및 건조주의보 발령일수 추이 그림. 백서는 “최근 10년간(09~18) 기상관측자료 통계를 살펴보면 강수일수와 강수량이 전반적으로 감소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고 밝혔다.
김 과장이 느끼기에 기상 조건들은 점점 ‘불의 크기를 키우는’ 방향으로 변하고 있다. 일단 강수량과 강수일수가 모두 감소하는 추세다. “예전엔 영동지역에 2m씩 눈이 쌓이는 건 흔히 있는 일이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눈 없이 지나가는 겨울이 있을 정도로 적설량이 줄고 있어요. 적설량, 강수량이 큰 영향을 미치는데….” 한국의 강수량은 연평균으로 따지면 적지 않은 수준이지만, 여름철에 편중돼 있다. 산불 위험이 높은 봄·가을 기온은 점점 높아지고, 건조해지고 있다. 5월부터 시작되는 ‘이른 고온 현상’은 최근 5년간 2018년 한 해를 제외하고 매년 발생했다. 지난해 가을철(9~11월) 평균 기온은 15.4도까지 올라, 관측 이래 두 번째로 높았다. “요즘엔 ‘아차하면 대형 산불로 가겠구나’ 하는 불들이, 그런 기상 조건들이 많아진 것 같아요. 전문인력과 헬기 같은 진화 자원들이 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형 산불로 갈 만한 여지들이 많아졌어요.” 눈과 비가 적게 내려 한껏 건조해진 땅에, 높은 기온이 더해지고 있다. 불이 나기 좋은, 그것도 ‘크게 나기’ 좋은 조건이다.
베테랑 헬기 조종사인 이상우 산림청 산림항공본부 운항팀장이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이 팀장은 “5월 중순에 아카시아 꽃이 피면 산불이 끝난다는 말을 했죠. 그런 말이 무색해질 정도로 7~8월까지 불을 끄는 사례가 요즘 증가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최유진 PD
진화 헬기도 중대형 교체 중
“소형으로는 감당 안 될 정도”
지난해 강원도 동해안에서 일어난 산불은 이러한 기상 조건일 때, 불이 얼마나 순식간에 커질 수 있는지 정확히 보여줬다. 산림항공본부 이상우 운항팀장(50)은 1년여 전 헬기를 몰고 강원도 고성 산불 현장에 도착했을 때의 허무함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한다. “고성 산불은 새벽에 발생(확산)했죠. 일출과 동시에 이륙하라는 지시를 받고 기상이 안 좋은데도 불구하고 정말 어렵게 넘어갔어요. 그런데 막상 저희가 도착했을 땐 그야말로 ‘잔불’만 남아있는 상태였어요. 불이 이미 다 휩쓸고 지나가 (더 이상) 탈 만한 게 남아있지 않은 상태였으니까요. 그때 느낀 게, 자연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구나였어요.” 비행 시간 2600시간, 산불 진화 경력 13년의 베테랑 조종사에게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무력감이 들게 한 당시의 산불 상황은 행정안전부의 ‘2019 강원 동해안 산불백서’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흔히 ‘고성 산불’로 알려져 있지만, 2019년 4월4일 산불이 처음 시작된 곳은 강원도 인제군이었다. 오후 2시45분, 산 인근에서 쓰레기 소각 중 불씨가 산으로 튀었다. 습도 27%, 초속 5.6~6.5m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산 정상부로 향하던 불꽃은 바람을 타고 북쪽과 동쪽으로 1.5~2㎞씩 튀었다. 같은 날 저녁 7시17분, 고성군의 전신주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당시 습도는 19%, 바람의 순간 최대풍속은 태풍급인 초속 32m였다. 불은 속초 시내를 향해 2시30분 만에 5.3㎞까지 번졌고, 불이 난 지 5시간 뒤인 4월5일 0시21분에는 7.5㎞까지 번져 있었다.
그와 비슷한 시각인 0시9분, 강릉시 옥계면에서도 전기초 합선으로 인해 불이 나기 시작했다. 2시간15분 뒤, 산불은 8㎞를 이동해 동해안까지 갔다. 인제의 산불은 고성·속초, 강릉에서 불이 나고 있는 동안에도 계속 타다, 이틀 뒤인 4월6일에야 진화되었다. 이 팀장은 “대형 산불의 기준은 면적으로는 100㏊ 이상, 시간으로는 24시간 이상, 헬기 대수로는 10대 이상 투입되는 것으로 정의한다”고 했다. 동해안 산불은 산림 2832㏊를 소실시켰고, 3일간 지속됐으며, 헬기 105대가 투입됐다. 2명이 사망했고, 이재민 1524명, 재산피해 1291억원이 발생했다. 백서는 이때 피해가 컸던 이유를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4월4일 강풍경보, 건조경보가 발효 중인 가운데 4월5일 오전까지 바람이 매우 강하게 불었다. (…) 산불에 취약한 소나무림은 평균 풍속 10~18m/s의 강풍에 불쏘시개 역할을 해 산불 확산을 가속시켰으며, 일몰 후 헬기 투입도 불가능하여 피해가 가중되었다.”
산불은 커진 것뿐 아니라 불규칙한 양상도 보이고 있다. 과거엔 산불에도 나름의 규칙성이 있었다. 지역적으로는 아래에서 시작해 위에서 끝났다. 남부지방에서 보통 그해의 첫 불이 나면, 이후 중부지방, 경기 북부로 이어지다 잦아들었다. 시기적으로는 2월쯤 시작돼 5월 중순이면 끝났다. 김 과장은 “(예전엔) 남부지역에서부터 ‘불이 올라온다’고 표현했다. 저희끼린 ‘강원도 고성까지 가면 산불이 끝난다’고 이야기했다”고 말했다. 이 팀장도 “5월 중순에 아카시아꽃이 피면 산불이 끝난다고들 했다”고 말했다.
경향성 있던 발생 시기·지역
이제는 때·장소 예측 불가능
상시·대형화 대비책 마련을
지금은 다르다. 어떤 지역에서든, 언제든, 산불이 난다. 김 과장이 말했다. “지금은 강원도 고성에서 불이 먼저 났다가, 경상남도에서 났다가 해요. 어떤 경향성을 보인다기보다는 국지적으로 조건만 되면 발화합니다.” 불이 시작되는 시기는 빨라졌고, 끝나는 시기는 늦춰졌다. “지금은 1월부터 시작되는 것 같아요. 10년 전쯤엔 보통 5월 중순이 되면 거의 불이 끝났거든요. 그런데 작년엔 8월까지도 불이 이어졌어요.” 1년 열두 달 중 긴장해서 산불 상황을 주시해야 하는 기간이 8개월로 늘어난 것이다. 산불은 ‘연중화’되고 있다.
이렇게 예측 불가능해진 산불은 두 사람의 일 하는 방식도 바꿨다. 김 과장은 이제 어느 지역에서 산불이 나도 그 지역에 헬기들을 미리 전진배치하지 않는다. 남부지방에서부터 산불이 서서히 위로 올라오곤 했을 때는 그렇게 했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 산불이 날지 알 수 없는 지금은 더 이상 유효한 전략이 아니다. “과거엔 (첫 산불 발생지가) 경상남도 양산이다, 하면 위쪽에 있던 헬기들을 밑으로 보내서 그쪽부터 진화를 했어요. 지금은 어느 지역에서 산불이 먼저 시작했다고 해서 그쪽에 헬기를 보내지는 않아요. 그냥 다 원래 포스트에 있어요. 또 어디서 발생할지 모르니까요.”
더 커지고, 오래가고, 연중 끊이지 않고…산불이 심상찮다사진 크게보기
7~8월에도 산불이 발생할 수 있는 조건이 되자, 이 팀장처럼 헬기를 직접 조종하는 이들은 ‘대기 시간’이 늘었다. “산불 기간으로 정해진 때는 항공기 가용 대수도 그에 맞춰 증가하거든요. 옛날엔 산불 위험 기간이 끝나면 거의 대기가 없어졌는데, 요즘엔 일몰 때까지 대기하는 상태가 지속되고 있어요. 원래는 5월 말이면 끝났죠.” 올해 대기는 7월 초에 끝났다. 산불이 대형화되면서 소형 헬기들도 점차 중대형으로 교체되고 있다. 김 과장은 “화세가 소형 헬기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점점 커졌다”면서 “예전엔 소형 헬기 2대로도 껐는데, 지금은 그렇게 해선 못 끄는 불들이 많아진 것”이라고 했다.
국내에서는 올해도 큰 산불이 났다. 지난 4월24일 경북 안동 풍천면에서 난 산불은 하루 만에 진화될 뻔했지만, 강풍으로 불이 재점화돼 3일간 탄 뒤에야 꺼졌다. 강풍과 소나무림이 만나 발생한 이 산불은 축구장 2700개 규모(1944㏊)의 피해를 냈다. 김 과장이 여태까지 본 것 중 가장 큰 내륙 산불이었다.
“그 불덩어리가 화산 폭발 수준의 상승기류를 만들어 냈어요. 예전(2009년) 칠곡 산불이 좀 크다고 했는데, 이것은 게임이 안 됐어요.” 3일차 진화작업에 투입됐던 이 팀장은 “산림청 생활을 13년 했는데, 그렇게 화세가 세고 진화 반경이 15㎞ 이상 되는 산불은 처음 봤다”고 했다. 그는 안동 산불과 같은 불이 언제든 또 날 수 있다고 본다. “바람이 동쪽으로 부는데 동쪽은 전부 산이었어요. 산불이 크게 날 수밖에 없는 최적의 요건을 갖춘 상태였죠. 앞으로도 발생할 수 있다고 봅니다.”
지난 1월31일 호주 산불이 확산하고 있는 모습. 호주에서 지난해 9월 발생한 대형 산불은 6개월 간 지속됐다. AP연합뉴스
러시아 방송인 RU-RTR이 제공한 러시아의 산불 진화 작업 모습. 2000 ha 이상의 산림이 불에 휩쌓였다. 강한 바람이 불길을 더욱 번지게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기후변화로 인한 산불의 대형화, 장기화, 연중화는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국립산림과학원 산림방재과 권춘근 박사는 2년 전부터 기후변화 시나리오를 활용해 전 지구와 한반도 산불 발생 패턴을 연구하고 있다. 그는 최근 세계 각국에서 발생한 대형 산불들을 보며 묘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연구결과가 하나둘씩 현실화됐기 때문이다. 권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기후변화로 인해) 남반구보다 북반구의 기온 상승이 강하며, 아마존 지역의 건조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또 기온 상승이 클수록 몽골, 남아프리카, 호주, 아마존, 남아메리카 일부 지역의 산불 위험이 증가했다. 호주에서는 지난해 9월 발생한 산불이 올해 2월에 꺼졌다. 아마존 열대우림에서는 올해 들어 6월까지 산불이 1만395번 났다. 몽골과 인접한 러시아 시베리아에서는 6월 말까지 246번의 산불이 났다.
권 박사는 “2년 전 분석한 결과들이 묘하게 현실에서 발생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기후변화에 따른 한반도 산불 위험에 대해서도 분석했는데, 한반도는 “지난 40년간 봄·가을철 기온이 가파르게 상승해, 산불위험지수 또한 상승”했고, “강수량 증가는 미미하나 상대습도가 감소해 건조일수가 증가할 것으로 예상”됐다.
올해 국내 언론에도 여러 차례 보도됐던 호주 산불은 남한보다 넓은 면적을 태운 뒤 수그러들었다. 김 과장에게 호주 산불을 보며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물었다. “호주도 원래 그 시기는 산불이 나는 때가 아니거든요. 진화 자원을 아무리 쏟아부어도 진화는 되지 않고, 비가 오지 않으면 탈 것들을 전부 다 태운 후에야 (산불이) 끝나는 것을 보니, 참 저게 보이지 않는 지구의 기후변화인가 (싶어요)….”
한국은 국토의 63.5%가 산지다. 한국에서도 산불이 호주와 같이 장기화, 대형화될까. 김 과장은 “그럴 수 있다”고 했다. “산림 내 축적된 임목량이나 낙엽층이 계속 증가하고 있으니까요. 지금은 그래도 단위면적당 헬기나 인력이 잘 갖춰져 있는 편인데, 호주나 미국처럼 산불 발생 기간이 길어지면, 예컨대 한 1주일씩 간다, 한 달 간다고 하면…. 더 큰 대형 산불에 대비하는 체계를 갖춰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글 김한솔 기자·영상·사진 최유진 기자hansol@kyunghyang.com>
5.
기후변화의 증인들(5)
누군가의 일상에 도사린 위협, 폭염
글 김한솔 기자·영상·사진 최유진 PD입력 : 2020.07.29 06:00
폭염
경향신문·녹색연합 공동기획
<b>가스검침원</b> 온종일 그늘이 없는 언덕을 오르내리며 일을 하는 가스검침원 박현정씨(가명).
가스검침원 온종일 그늘이 없는 언덕을 오르내리며 일을 하는 가스검침원 박현정씨(가명).
야외 노동자들 “땡볕 아래서 일하다 보면
현기증 나고, 메스껍기까지…”
소화전, 우편물 반송함, 골목 담벼락 사이의 작은 틈. 가스검침원 박현정씨(58·가명)는 곧 장마가 끝나고 무더위가 시작되면 이곳에 하얗게 얼린 500㎖ 생수 한 병을 수건에 싸 숨겨놓을 것이다. 다른 한 병은 겨드랑이에 끼울 것이다. 그렇게 검침을 다니다, 겨드랑이에 끼워둔 얼음물이 녹을 때마다 한 모금씩 아껴 마실 것이다. 그러다 물이 다 떨어지면, 처음에 숨겨놓은 물병을 찾아와 다시 겨드랑이에 끼운 채 일을 계속할 것이다.
그는 지난 12년간, 매 여름을 이렇게 버텨왔다.
경향신문은 ‘기후변화의 증인들’ 마지막 회에서 폭염 속 야외 노동자들과 돈의동 쪽방 주민들을 만났다. 가스검침원, 배달기사, 건설노동자, 쪽방 주민들은 앞서 만난 해녀, 산지기, 농부, 산불 진화 인력보다 우리 일상에 조금 더 가까이, 더 깊숙이 들어와 있는 이들이다. 2018년 폭염은 압도적이었다. 2019년은 2018년보다는 덜 더웠다. 2020년은 어떨까. 전 세계 기상기구들은 올해가 ‘역대 가장 더운 해’가 될 것이라는 경고를 연초부터 꾸준히 내놓고 있다. 기상청은 장마가 끝난 뒤 여름철 기온은 평년보다 0.5~1.5도 높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오늘은 인터뷰 복장 갖추려고 이 조끼를 입고 나왔는데, 이것도 더워요, 솔직히. 한여름에는 못 입어요. 이거 입고 조금만 돌면 한증막이에요.”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에서 만난 박씨는 오른쪽 가슴에 ‘도시가스’ 마크가 찍힌 남색 조끼를 입고 있었다. 등 부분이 메시 소재이긴 했지만, 여름 기능성 조끼라고 할 만큼 시원해 보이진 않았다.
가스 검침·배달 같은 이동 업무
아무리 더워도 쉴 여건 안 돼
그늘 없는 골목·도로는 ‘찜통’
“얼린 생수 끼고 다니며 버텨”
가스검침원 박현정씨(가명)가 검침을 하기 위해 계단을 오르고 있다. 박씨는 이 계단을 ‘죽음의 계단’이라고 부른다. 최유진 PD
가스검침원 박현정씨(가명)가 검침을 하기 위해 계단을 오르고 있다. 박씨는 이 계단을 ‘죽음의 계단’이라고 부른다. 최유진 PD
그는 야외 노동자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집집마다 돌며 검침을 한다. 온종일 걷는 일을 하는데, 짐이 많았다. 조끼의 오른쪽 주머니부터 불룩했다. 주머니에서 작은 망원경이 나왔다. 자신의 키보다 높은 곳에 있는 계량기, 사람 없는 집의 담 밖이나 대문 틈새로 계량기 숫자를 확인할 때 필요하다고 했다. 등에 멘 초록색 배낭에는 수건, 휴지, 검침서류 같은 것들이 들어 있었다.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되면 얼린 생수 두 병이 이 가방에 추가될 것이다. 그는 다른 지역에서 검침을 할 때 이 방법을 터득했다. “물이 꽝꽝 얼면 잘 안 녹잖아요? 어느날 여기다(겨드랑이) 끼웠어요. 그러니까 시원하고, 빨리 녹는 거예요. 지금은 첫 스타트부터 끼고 다녀요.” 새 옷도 한 벌 가지고 다닌다. “여기 올라갔다 내려오면 (더워서) 옷이 다 젖어요. 그래서 집에 갈 때 입을 옷을 하나 싸 갖고 와요. 버스를 타고 다니는데, 나한테 냄새가 나잖아요. 다른 사람들한테 너무 미안하니까….” 일을 시작한 지 1시간도 채 되지 않았는데, 이 말을 하는 선캡 밑 그의 얼굴이 이미 땀으로 흥건했다.
그는 스스로 “더위를 많이 타는 편”이라고 했다. 하지만 박씨와 같은 작업 환경에서라면 누구라도 더울 수밖에 없다. 박씨의 검침 구역은 서대문구 홍은동 일대다. 이곳은 온통 언덕이다. 박씨는 길고 완만한 언덕을 타고 올라가 몇 집을 검침하고 내려오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 또 몇 집을 검침하고 내려오는 작업을 하루 종일 반복한다.
그렇게 3일간 1670곳을 검침한다. 이 동네에는 그늘이 거의 없다. 바로 옆 산의 녹음은 짙은데, 박씨가 검침을 다니는 주택 주변에는 이상할 정도로 나무 한 그루 찾아보기 힘들다. 산이 만든 그늘은 그 바로 밑에 위치한 주택들에만 드리워졌을 뿐, 박씨가 온종일 걷는 길에는 햇빛이 아무런 방해 없이 그대로 내리꽂힌다.
<b>위탁배달원</b> 하루종일 짐을 들고 뛰어다니며 배달을 하는 우체국 위탁배달원 맹창영씨.
위탁배달원 하루종일 짐을 들고 뛰어다니며 배달을 하는 우체국 위탁배달원 맹창영씨.
그늘 한 점 없는 홍은동 골목에서 박씨가 힘겹게 발걸음을 옮기는 동안, 서울 중구의 도로 한복판에서는 오토바이에 탄 배달의민족 라이더 이병선씨(37)가 아스팔트 열기로 숨 막혀하고 있다. “해는 내리쬐고, 아스팔트 열기는 올라오고…. 한 오후 3시쯤 되면 중간에서 햄버거가 돼요.” 그는 중학교 때부터 배달 일을 했고, 지금도 생업으로 일을 하고 있다. 보통 오전 9시부터 자정까지 배달을 한다. 도로 위에서 일을 하는 그는 여름이 특히 힘들다. 도로는 인도보다 더 덥다. “엄청 더워요. 막 햇빛 내리쬐고, 밑(아스팔트)에선 열기 올라오고, 막 정신줄이 끊어질랑 말랑하는 걸 겨우 붙잡고 다녀요. 그런 때 대형차, 버스 같은 데 뒤에 있으면 열기 때문에 머리가 휘청휘청하죠. 찜질방 안에서 땀을 막 흘리는 것하고 똑같아요. 도로 전체가 찜질방이 되니까…. 오토바이는 (자동차처럼) 실내도 아니고 밖에 있잖아요. 자동차들이 내뿜는 열기 안에 서 있는 거니까….”
두 사람은 모두 2018년 폭염을 기억하고 있다. 이씨는 “2018년에는 폭염이 워낙 심해서 휴대폰도 열이 많이 올라 충전도 안 됐다”면서 “저는 그때 그냥… 일을 많이 못했던 것 같다. 너무 더워서”라고 했다. 박씨도 2018년을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하…. 진짜 그때는, 얼음팩 있죠? 얼음팩을 등허리에 대고, 목에다 대고, 작은 팩은 목에 손수건으로 묶고 다녔어요.” 하루 최고기온(당시 기준) 33도 이상인 날이 31.4일, 온열질환(열사병, 열탈진 등)으로 48명이 사망하고, 4526명이 병원을 찾았던 해다.
이씨가 현기증을 느끼며 최대한 빠르게 배달을 마치려고 애쓰는 동안, 서울 송파구 방이동의 빌라 골목에서는 송파우체국 소속 위탁배달원 맹창영씨(55)가 자신의 배달차에서 점프하듯 뛰어내려 택배 물품을 꺼냈다. 상자당 8㎏짜리 메론 4상자를 한꺼번에 둘러멘 그가 빌라 계단을 올라갔다. 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었지만, 그는 우산을 쓰기는커녕 우비도 입지 않고 있었다. “우비가 있긴 한데 이런 데 뛰어올라다니다 보면 비보다 땀에 더 젖어요. 땀이 나가지고 우비는 못 입어요, 차라리 비에 젖는 게 낫죠. 물건 젖을까봐 어떨 때 우산 같은 거는 써도, 우비는 안 입어요.”
택배기사 맹창영씨가 배달할 물건을 들고 계단을 오르고 있다. 맹씨가 일을 시작하는 이른 아침 시간엔 아직 건물 엘리베이터가 작동하지 않고 있을 때도 많다. 최유진 PD
맹씨는 15년차 우체국 택배 기사다. 우체국 물류지원단과 2년마다 위탁 계약을 맺고, 건당 수수료를 받는다. 그는 오전 5시에 출근해 자신이 맡은 그날치 택배 물량을 모두 배달할 때까지 일을 한다. 이날 차에 실린 택배는 212개였다. 노하우가 쌓일 만큼 쌓인 택배 기사인데도, 전날 오후 8시가 넘어 퇴근했다고 했다.
그는 정말 비 같은 것에는 신경 쓸 겨를이 없어 보였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지도를 펴서 최단 이동경로를 짜고, 차에서 내려 배달을 하기 위해 시동을 껐다 켤 때 내비게이션이 로딩되는 3~4초를 아끼기 위해 시동을 켜는 동시에 작동하는 후방 카메라를 한 대 더 달았다. 그만큼 바빴다. 그는 1건 배달에 3분 이상 쓰는 일이 거의 없었는데, 배달 구역의 지리에 밝은 그가 한 번도 헤매지 않고 복잡하고 좁은 골목에 차를 대고, 차에서 뛰어내려 새벽에 미리 배달 순서에 맞게 정리해 둔 물건을 집어들고, 경보를 하거나 거의 뛰어서 배달을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맹씨가 초 단위로 시간을 아껴 쓰며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는 동안, 서울 강서구 마곡동의 한 건설 현장에서는 건설노동자 이성원씨(56)의 안전모 밑으로 땀이 뚝뚝 떨어졌다.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그는 남들보다 일할 때 갖춰야 할 복장이 더 많다. 등산화보다 더 무거운 안전화, 두꺼운 등산양말, 안전모, 안전조끼, 안전벨트, 긴 팔에 긴 바지, 목을 감싸는 버프. 입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더울 복장이지만, 그는 이렇게 갖춘 채 오전 7시부터 오후 4시까지 무언가를 들고, 옮기고, 붙이며 끊임없이 몸을 움직인다. 올해는 코로나19 때문에 이 복장에 마스크도 추가됐다. “올여름은 코로나 때문에 마스크를 쓰면서 일을 해야 돼서 더 힘들어요. 마스크를 하면 더워서 땀이 나고…. 그래도 어쩔 수 없이 해야죠.”
철골구조물 햇빛 반사로 열기
건설현장도 점점 더 더워져
“모호한 폭염 대응 매뉴얼에
언제 어떻게 쉬어야 할지 애매”
<b>건설노동자</b> 폭염에 종종 현기증을 느끼곤 하는 건설노동자 이성원씨.
건설노동자 폭염에 종종 현기증을 느끼곤 하는 건설노동자 이성원씨.
건설노동자 이성원씨가 지난해 여름 휴대폰에 기록했던 작업 현장의 온도. 최유진 PD
건설 현장은 점점 더워지고 있다. “재래식 공법을 쓸 때는 조금 덜 더웠는데, 이제는 사람 손이 덜 가게 하려고 공장에서 기계로 찍어 나오는 철골구조물을 쓰거든요. 그게 햇볕에 반사돼서 열을 내뿜는 바람에 가면 갈수록 더 더워지고 있습니다. 무척 덥습니다.”
건물을 지어올려야 하는 현장에 따로 그늘이 있을 리 없다. 그는 밥을 먹고 30분 정도만 에어컨이 있는 현장 컨테이너에서 쉰다. “점심시간에 밥 먹으러 가면 다른 노동자가 옆에 있는 게 싫어요. 땀냄새 나니까. 자주 빨아입으면 냄새가 덜 나는데, 덜 빨아입는 사람은 냄새가 많이 나요. 그런데 덜 빤 사람이나 자주 빤 사람이나 땀에 옷이 절어가지고 하얀 소금기가 남아있는 건 똑같아요.”
건설노동자 이성원씨가 안전모에 마스크까지 착용한 모습. 그는 “마스크를 하면 더 덥다”고 말했다. 최유진 PD
이들의 건강은 괜찮은 것일까. 폭염으로 발생할 수 있는 건강 장해는 열사병, 열탈진, 열경련 등이 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무더위 속에서 일을 할 때면 숨이 차고, 현기증이 나고, 메스껍고, 식욕이 떨어진다고 했다. 검침원 박씨는 여름이면 안과를 자주 찾는다. 다래끼 때문이다. “안과에서 이물질이 많이 들어가서 그렇대요. 생각해보니까 땀이 많이 나서 계속 닦다보면 수건이 더러워지잖아요. 수건을 2개 갖고 다니면서, 젖으면 새것 꺼내서 닦았는데….”
우체국 배달원 맹씨는 없던 햇빛 알레르기가 갑자기 생겼다. “몇년 전부터 팔뚝에 오돌토돌 빨갛게 좁쌀 같은 것이 생기고, 간지럽고 그러더라고요. 하루 종일 이렇게 일하면요, 반나절만 돼도 벌써 간질간질하고, 무슨 두드러기 나는 것처럼 그래요.”
맹씨는 배달을 위해 5~10분에 한 번씩 차를 멈추고 내리고 타기를 반복했는데, 차 안과 바깥의 온도차가 매우 컸다. 차 안은 에어컨을 세게 틀어 팔뚝에 오스스 소름이 돋을 정도로 차가웠는데, 바깥에서 짐을 들고 뛸 때면 땀이 비오듯 흘렀다. 고혈압이 있는 건설노동자 이씨는 지난해 쪼그려 앉은 자세로 한참 작업을 하고 일어서는데, 머리가 휘청였다. 혈압은 뚝 떨어지고, 맥박은 지나치게 빨리 뛰었다. “그때 의사가 죽을 수도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는 휴대폰에 최고·최저 혈압, 맥박 수를 기록하는 앱을 깔아놓고, 조금이라도 몸이 이상하다 싶으면 보건실로 가 혈압과 맥박을 검사받고 있다.
이보라 녹색병원 인권치유센터 센터장. 이 센터장은 “고온의 환경에서 땀을 많이 흘리면서 장시간 쉬지 못하고 6~7일 연속 일을 하면, 만성피로가 쌓일 수 있다”며 “몸이 안 좋을 때 하루 이틀씩 작업을 중지했다 복귀가 가능해야 하는데, 그걸 못하고 참으면서 일을 계속해야 한다면 본인도 모르게 탈수나 전해질 장해가 생길 수도 있다”고 말했다. 최유진 PD
“야외노동자는 폭염에 아주 취약하죠. 대피소나 그늘막 없이 야외에서 어쩔 수 없이 근무하셔야 하는 분들은 기저질환이 없고 나이가 젊더라도 굉장히 위험할 수 있습니다.” 이보라 녹색병원 인권치유센터장이 말했다. “고온의 환경에서 땀을 많이 흘리면서 장시간 쉬지 못하고 6~7일 연속 일을 하면, 만성피로가 쌓일 수 있어요. 본인 몸이 안 좋을 때 하루이틀씩 작업을 중지했다 복귀가 가능해야 하는데, 그걸 못하고 참으면서 일을 계속해야 한다면 자신도 모르게 탈수나 전해질 장해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이 센터장은 특히 택배 기사인 맹씨처럼 차 안과 밖의 온도 차이가 큰 경우에 대해 “온도차가 많이 나는 환경에 노출되는 것 자체가 면역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고 말했다.
물, 그늘, 휴식.
고용노동부가 ‘열사병 예방 3대 수칙’으로 안내하고 있는 것들이다. 이걸 야외 노동자들에게 제공할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사업주에게 있다. 산업안전보건법은 제5조 ‘사업주 등의 의무’ 2항에 “근로자의 신체적 피로와 정신적 스트레스 등을 줄일 수 있는 쾌적한 작업환경의 조성 및 근로조건 개선”을 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 조항은 현장에서 매우 허술하게 작동한다. 검침원 박씨는 2018년 폭염 때 “너무 더우니 편의점에서 물이라도 사먹을 수 있게 해달라”고 회사에 요구했다. “그랬더니 회사에서 음료값으로 1년에 2만원을 주더라고요.”
물은 충분히 마실 수 있을까. 박씨가 일하는 곳엔 공용 화장실이 거의 없다. “저 윗동네엔 진짜 아무것도 없어요. 저기 검침하는 데 4시간이 걸리는데, 그때는 진짜 물도 안 마셔요.” 그늘은 있을까. 라이더 이씨는 “가능하면 그늘로 다니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도로에 그늘이 있는 부분이 얼마나 될까. “사실 거의 없죠. 햇볕이 너무 뜨거우니까 반팔을 입어도 팔 토시를 하고 물 머금는 스카프 같은 거 하고 그래요.” 이씨가 멋쩍게 웃었다.
충분히 쉬고는 있을까. 검침원 박씨는 가장 꼭대기에 있는 집의 검침을 마치면 떡이나 빵을 점심으로 먹으며 ‘5분’ 동안 쉰다. 아파트 검침을 할 때는 그나마 상황이 나아서 ‘10분’을 쉰다고 했다. 택배 기사 맹씨는 “점심시간에 혼자 식당 테이블 차지하고 밥 먹는 게 미안해서” 남들 점심시간이 다 끝날 무렵 잠깐 들어 가서 후딱 먹고 나와 일을 계속한다.
네 사람 중 ‘위치가 고정된 사업장’에서 일하는 이는 건설노동자인 이씨가 유일하다. 나머지는 모두 이동 노동자다. 산안법 5조의 ‘근로자’에는 검침원, 라이더, 택배 기사 같은 특수고용형태 노동자들도 포함된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라는 세부지침은 없다. 결국 물 마시는 것도, 그늘에서 쉬는 것도, 몸이 힘들 때 일을 멈추는 것도 모두 ‘알아서’ 해야 한다. 알아서는 하되, 그날치 검침은 끝내놔야 하고, 택배 물품도 모두 배달해야 하고, 생계를 유지할 만큼의 배달도 해야 한다. 이렇게 모든 것을 알아서 해결하는 과정에서 ‘사업주의 의무’로 규정됐던 조항은 무색해진다.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류현철 소장은 “결국은 적정한 강도로 일을 했을 때에도 생활임금이 유지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건설노동자 이씨의 일터에는 폭염 특보 시 대응 요령이 안내돼 있다. 하지만 안내를 봐도 헷갈리긴 마찬가지다. “예컨대 35도 이상일 땐 60세 이상은 일을 하지 말라고 써 있습니다. 그런데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아침에 집에서 나오는데 35도라고 폭염 경보가 발령되면 일을 하지 말라는 얘기인지, 아니면 일하다 쉬어도 일당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인지,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현재 고용노동부의 안내는 ‘노동자가 작업중지를 요청할 경우’ 사업주가 즉시 조치해야 한다고 되어있다. 폭염 특보가 내려졌을 때 자동적으로 작업이 중지되는 게 아니라, 개별 노동자가 이를 요청하면 조치하라는 ‘권고’다. 이 안내에는 불가피한 경우엔 작업을 해도 되며, 이 경우 충분한 휴식을 보장해야 한다고도 돼 있다.
이씨와 같은 노동자들이 일을 하다 폭염 특보가 내려졌음을 확인한 뒤, 사업주에게 ‘지금 폭염 특보가 내려졌으니 작업을 중지할게요’라고 말하는 건 가능한 일일까. “100% 불가능하죠. 현장에서 개별 노동자는 폭염뿐 아니라 ‘사고 위험’이 있어도 작업중지나 대피를 못하고 있는 상황이에요. 한 사업장에서 혼자 작업 안 하고 쉴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 현장 작업 자체가 중지해야 쉴 수 있는 것이지, 개별 노동자가 폭염이라 작업 안 하겠다고 하면 옥외작업을 주로 하는 건설 일용노동자들은 그 자리에서 바로 잘리는 결과로 이어지는 거예요.” 최명선 민주노총 노동안전보건실장이 말했다.
올해부터 폭염 특보의 기준은 ‘일 최고기온’에서 ‘일 최고체감온도’로 바뀌었다. 과거보다 나아진 것이긴 하지만, 현장 노동자들의 체감온도는 공식 특보가 발효되기 전 이미 33도를 훌쩍 뛰어넘는다. 류 소장은 “미국의 경우는 (노동자들이 입는) 작업복에 따라서 (체감온도를) 가산할 수 있도록 하고 있지만, 우린 그렇게 디테일하게 기준이 설정돼 있지 않다. 그런 디테일까지 안 가더라도, 당장 체감온도가 높아졌을 경우 적당한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최 실장은 “건설노동자들이 예전엔 ‘동절기 실업’에 대한 문제제기를 많이 했다. 지금 현장에선 ‘동절기 실업 같은 건 10년 전 이야기이고, 지금은 폭염이 가장 문제’라고 이야기한다”고 했다.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은 지난해 기후변화가 야외 노동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연구한 ‘기후변화에 따른 옥외작업자 건강보호 종합대책 마련 연구’ 보고서를 발표했다. 연구진은 “옥외작업자는 외부 기상에 장시간 직접 노출된다는 점에서 기후변화에 영향을 크게 받는 집단”이라며 “2011~2018년 폭염으로 인한 온열질환 감시체계 분석 결과 폭염일수가 온열질환 및 사망 증가와 관련성이 높은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이 보고서는 2015년 인구센서스를 기준으로 국내 야외 노동자 수를 추정했는데, 전체 경제활동인구 2359만570명 중 10.1%, 운송을 포함할 경우 14.1%가 야외 노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보고서는 “전 지구적인 기후변화는 예측 불가능성이 커지고 있으며 이에 따라 근로자의 건강영향 위험도 커지고 있으므로, 옥외작업자의 건강보호를 위한 다각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창문 없는 쪽방촌 사람들,
외출 자제하란 ‘폭염 문자’ 뜨면 밖으로…
방문만 있는 집에서 산다는 건
여름을 더 공포스럽게 만들어
“1평도 안 되는 공간들 다닥다닥
코로나로 쉼터도 닫고 한숨만”
<b>쪽방 주민들</b> 다닥다닥 붙어 공기가 통할 곳 없는 쪽방.
쪽방 주민들 다닥다닥 붙어 공기가 통할 곳 없는 쪽방.
검침원 박씨, 라이더 이씨, 택배 기사 맹씨, 건설노동자 이씨가 ‘일터’에서 지쳐가고 있다면, 서울 종로구 돈의동에 사는 길상근씨(69)의 상황은 더 복잡하다. 그는 살고 있는 집이 덥다. 길씨는 3.3㎡(1평)짜리 쪽방에서 살고 있다. 그가 20만원씩 월세를 내는 방의 문을 열었다. 1평짜리 방의 네 모서리에 살림살이들이 벽을 타고 올라가 천장까지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그의 방과 외부를 경계짓는 것은 그리 튼튼해 보이지 않는 방문 한 개뿐이었다. 창문도 없었다. “창문이 있어서 (공기가) 통해야 하는데, 여기는 통하는 데가 없어요.” 물건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선풍기는 한 대 있다고 했다. “얼마 안 있으면 고장날 것 같아요. 지금도 덜덜덜거려요.” 폭염에 ‘외출 자제’ 권고가 내려올 때, 그는 밖으로 나간다. “하루 종일 집에만 있지는 못해요. 나갔다 들어와야 해요. 공원이나 뭐 그런 데 가죠.” 창문 없는 방에 있는 것보다는 밖이 낫기 때문이다.
최봉명 돈의동 주민협동회 간사. 최 간사는 “에너지는 유한하다. 능력있는 사람들이 에너지를 구매해 선점한다면, 취약한 사람들은 에너지 소비에서 더 소외될 것”이라며 “주거 취약계층을 위한 에너지는 저렴하게, 상황에 따라선 무상에 가깝게 사용할 수 있는 ‘공공재’로 접근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최유진 PD
돈의동 쪽방 주민들의 생활을 돕고 있는 최봉명 돈의동 주민협동회 간사는 “여긴 골목 자체가 통풍이 안 된다”며 “공기가 고여 있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여긴 도심 한복판에 있어요. 다 콘크리트 건물입니다. 1평도 안 되는 공간이 다닥다닥 붙어있어요. 개인별 냉풍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사람의 체온이 붙어 있을수록 더 뜨겁죠.” 그는 올여름이 걱정이다. “2018년, 그해에 앰뷸런스가 (동네에) 유독 많이 왔어요. 그런데 올여름은 더 두려워요. 그때는 종로구청에서 열대야에도 잠을 잘 수 있게 근처 공용공간에 무더위 쉼터라도 운영했었는데, 올해는 코로나19 때문에 대책이 없으니까요.”
그가 보기에 쪽방 주민들은 보통 사람들보다 ‘에너지를 더 많이 써야 하는’ 사람들이다. “단열재, 환기시설이 잘돼 있으면 에너지를 많이 안 써도 되잖아요. 하지만 대부분의 주거취약 계층은 노후주택에 살고 있는 데다 일반인보다 건강 상태도 좋지 않기 때문에 적절한 신체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선 남들보다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해요.” 하지만 이들은 선풍기도 겨우 가동하는 것이 현실이다. 과다한 에너지 소비로 인해 발생하는 피해를, 에너지를 가장 적게 쓰는 이들이 가장 크게 입고 있다. “에너지는 유한하잖아요. 능력 있는 사람들이 에너지를 구매해 선점한다면, 취약한 사람들은 에너지 소비에서 더 소외될 거예요. 주거 취약계층을 위한 에너지는 저렴하게, 상황에 따라선 무상에 가깝게 사용할 수 있는 ‘공공재’로 접근해야 할 것 같아요.”
이보라 녹색병원 인권치유센터장은 지난해 8월 서울 중랑구 면목동에 거주하는 폭염 취약계층 건강실태를 조사했다. 주민센터의 추천을 받아 조사 대상자를 추렸는데, 대부분 60~80대 1인 가구였다. 조사에 응한 32가구 중 반지하가 20가구였다. 쪽방뿐 아니라 반지하, 옥탑방도 모두 폭염에 취약한 주거형태다. 32가구의 평균 실내 온도는 29.6도. 14가구의 실내 온도는 30도를 넘었다. 14가구가 에어컨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실제 사용한다’고 답한 집은 단 1가구뿐이었다. “전기세가 걱정되고, 혼자 있기 때문에” 가동하지 않는다고 했다.
돈의동 쪽방, 면목동 취약계층의 현실은 황인창 서울연구원 부연구위원이 쓴 ‘서울시 저소득가구 에너지소비 실태와 에너지 빈곤 현황’ 보고서의 내용과 일치한다. 보고서는 “외부요인이 동일하더라도 이로 인한 에너지 비용 지출과 건강영향 등 부정적인 영향은 저소득 가구가 상대적으로 더 크게 받을 수밖에 없다”며 “저소득 가구는 상대적으로 단열이 부족한 노후화된 주택에 거주하면서, 오래된 저효율 가전기기와 냉난방 기기를 소유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조사결과 서울시 저소득 가구의 에어컨 보급률은 가구당 0.18대로 전체 가구 평균인 0.89대에 비해 현저히 낮았으며, 3가구 중 1가구는 온열질환 등 건강질환을 경험한 바 있었다. 보고서는 “기후변화와 기후변동성의 증가, 이로 인한 냉난방 요구량의 증가는 저소득 가구의 에너지 비용 부담을 더욱 높인다”고 지적했다.
기후변화로 뜨거워진 지구는
일상에 ‘구체적인 위협’이 돼
더위로부터 안전할 권리
보장하는 제도 고민해야 할 때
앞으로 폭염은 더 강한 강도로, 더 자주 닥칠 것이다. 28일 발간된 국내 기후변화의 최근 상황과 전망을 담은 ‘한국 기후변화 평가보고서 2020’은 한국의 폭염 일수가 현재 연간 10.1일에서 21세기 후반에는 35.5일로 3배 이상 늘어날 것이라며 “폭염으로 인한 사망자가 증가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렇게 되면 검침원 박씨는 더 뜨거워진 직사광선을 받으며 누군가의 집 가스를 검침해야 할 것이다. 라이더 이씨는 누군가가 주문한 음식을 싣고 더 뜨거워진 도로를 달리게 될 것이다. 택배 기사 맹씨는 누군가가 기다릴 물건을 배달하기 위해 더 숨막히는 골목을 뛰어다니게 될 것이고, 건설노동자 이씨는 달궈진 안전모 아래 더 자주 현기증을 느끼게 될 것이다. 돈의동 주민들은 더 오래, 더 자주 집 밖에 나와 앉아있게 될 것이다. 기후변화는 누군가의 일상에 이렇게 ‘구체적인 위협’이다.
이 센터장은 인터뷰 마지막에 이런 말을 남겼다. “내가 더우면 다 더운 거잖아요. 내가 나가기 싫으면 다른 사람도 나가기 싫은 거고요. 내가 나가기 싫어서 배달 음식을 시켜먹으면, 누군가는 그 땡볕에 오토바이를 타고 음식을 들고 와야 되는 거잖아요. 그럼 그것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그 노동에 대한 존중이 있어야죠. 다른 사람의 편의를 위해 일하는 분들에겐 적당한 휴식, 건강을 유지하며 일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 제도가 필요한 것 같아요. 독거노인, 쪽방에 계신 분들에겐 더 자주 찾아가서 실제 환경을 체크하고, 가능하다면 정부 차원에서 좀 더 적당한 주거시설로 이전하는 대책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시리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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