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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비교/교육

좋은 기획 (경향: 절반의 한국) 지방소녀들, 그 이후. 지방대학.비수도권 출신 청년 123명(비수도권 거주 68명, 수도권 거주 55명)인터뷰

by 원시 2022. 3. 18.

 경향신문은 지난달 1~12일 만 19~39세의 비수도권 출신 청년 123명(비수도권 거주 68명, 수도권 거주 55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들이 쏟아낸 이야기는 ‘기회의 격차’라는 말로 집약할 수 있다.

 

 

 

 

설레며 대관령 넘던 여고동창들 “서울? 잡기 힘든 무지개”
최민지 기자입력 : 2021.10.08 06:00 수정 : 2021.11.02 07:27

 


강릉 소녀들의 그 후

강원 강릉의 A여고 3학년 1반 동창생인 장호진씨와 김영빈씨(이상 가명), 김현주씨(왼쪽부터)가 지난달 12일 서울 남산공원에서 시내를 내려다보며 대화하고 있다. 졸업한 뒤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인 ‘강릉 소녀’들은 14년째로 접어든 서울살이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되돌아봤다. 김창길 기자

 



“학창시절 내내 목표는 강릉 밖”
강릉 A여고 동창 절반 수도권에
이들에게 서울은 ‘꿈’과 동의어
현실은 정보·전략·기회 태부족

‘안녕히 가십시오 - 강원도(Good-bye, Gangwon-do).’
차가운 새벽 공기를 가르며 구불거리는 대관령 길을 넘는 아버지 차 안에서 김현주씨(당시 19세)의 가슴은 울렁거렸다. 트렁크가 꽉 차 뒷좌석에 실은 짐가방을 그는 꼭 끌어안았다. 고향 강릉을 떠나 ‘대관령을 넘는’ 것은 오랜 바람이었다. “중·고등학교 6년 내내 목표는 강릉 밖으로 나가는 거였어요. 어쩌면 모두의 목표였겠지만요.”
2008년 2월의 그날 그가 짐을 푼 곳은 경기 수원의 한 대학 기숙사. 모든 것이 새로웠다. 대도시의 스카이라인, 차도와 길거리에 넘치는 자동차와 사람들까지. 현주씨는 “낯선 세계로 떨어진 <오즈의 마법사> 속 도로시가 된 기분이었다”고 했다. 13년이 흘러 서른두 살이 된 그는 7년차 영화 마케터다. 서울 관악구의 원룸에 살며 강남의 콘텐츠 회사에서 일한다.
흔한 이야기다. 고향을 뒤로하고 서울에 자리 잡은 청년이 어디 현주씨뿐인가. 50년 전에도, 30년 전에도 청년들은 진학과 취업을 위해 서울로 향했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수도권으로 떠나고 있다. 구불거리는 고개가 매끈한 터널로, 아버지의 자동차가 KTX로 바뀌었을 뿐이다.
‘청년들은 무엇 때문에 고향을 떠나나’ ‘떠난 이들이 향하는 곳은 왜 수도권이며 왜 돌아가지 않나’. 청년층 이탈로 소멸 위기에 처한 지역을 건져내기 위해선 우선 이 질문들의 답을 찾아내야 한다. 경향신문은 2008년 현주씨와 함께 강릉의 A여고를 졸업한 3학년 1반 동창생 36명의 졸업 후 행적을 추적했다. 소재가 파악된 30명 가운데 14명에 대해 대면·전화·서면으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들의 진학과 취업, 결혼 등 청년기 주요 고비의 이동 경로와 선택에서 지방과 지방 청년의 현실을 읽어내려 했다.
강릉 소녀들, 떠나다
‘꿈’ 이룬 미디어 콘텐츠 운영자
“고향에 남는 건 끝난다는 느낌”

취업 큰 산 넘으면 집값·생활비
서울 토박이가 부러운 이방인 삶

A여고는 비평준화 지역이던 강원도에서 지역 명문으로 통했다. 동해나 속초 등 인근 시·군에서 온 유학생도 많았다. 그런 분위기에서 ‘인서울’ 대학 진학은 중요함을 넘어 당연시되는 목표였다. 현주씨의 짝꿍으로 서울에서 대학을 나와 미디어 콘텐츠 운영 업무를 하는 장호진씨(가명)도 예외는 아니었다. 부모님은 집 근처 사범대를 나와 교사가 될 것을 권했지만 딸의 고집을 꺾지는 못했다. 미디어 업계에서 일하고 싶었던 그에게 서울은 꿈과 동의어였다. “강릉에 남는다는 것은 무언가 ‘끝나버릴 것’ 같다는 느낌이었어요.”
추적을 통해 확인한 ‘강릉 소녀’들의 근황에서도 ‘수도권 지향성’이 뚜렷했다. 소재가 파악된 30명 중 수도권 거주자는 16명(서울 13명·경기 3명)으로 절반이 넘는다. 전업주부 1명을 제외하면 15명이 수도권에서 일한다. 비수도권 거주자는 14명으로 강릉(8명)과 춘천·속초·부산·대구·세종·청주(각 1명)에 산다. 진학 대학이 파악된 32명 가운데 40% 이상인 15명이 서울과 인천, 경기 등 수도권으로 갔다. 특히 대학을 서울로 진학한 경우에는 거의 예외 없이 수도권에 정착했다.
그러나 ‘인서울’은 결코 쉽지 않았다. 수도권 학생들에 비해 입시 정보와 전략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꿈이 큐레이터였던 현주씨는 어려서부터 미술사 책을 끼고 살았고 그림 감상을 좋아했다. 진로를 상담한 선생님은 미술사를 전공하려면 미술 실기를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형편이 안 됐던 현주씨는 진로를 바꿔 행정학과에 진학했지만, 서울에 올라오고 나서야 실기 없이도 갈 수 있는 관련 학과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서울에 있었더라면 저렴한 비용으로 미술이론 전공자에게 논술 과외를 받을 수 있었을 거예요. 그랬으면 인생행로가 달라지지 않았을까요?”
2008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은 ‘등급제’가 적용된 처음이자 마지막 시험이었다. 등급제란 표준점수와 백분위 없이 성적표에 등급만 표기하는 제도다. 1~2점 차이로 당락이 갈리는 폐단을 막기 위해 마련됐지만 예상치 못한 문제들이 속출했고, 원서 접수 과정에서 눈치 싸움이 극에 달했다.
박소흔씨(가명)는 대입제도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던 것이 지금도 원망스럽다. 서울의 대형병원 간호사인 그는 ‘인서울’ 대학 대신 춘천의 한 사립대를 졸업했다. 그는 “입시 때 학교의 도움을 전혀 받지 못했는데, 나중에 보니 성적이 비슷한 다른 수험생이 인서울 대학에 합격한 것을 알고 속상했다”고 말했다. 정보 부족으로 국가유공자 자녀임에도 관련 수시 전형 대신 정시에만 올인한 경우도 있었다.
서울 생활의 기쁨과 슬픔
상경한 강릉 소녀들은 대도시에 압도됐다. 곳곳에 즐비한 고층건물에 충격적으로 편리한 대중교통, 어디서든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문화 인프라, 다양한 출신 배경의 사람들과의 만남은 그 자체로 기회이자 가능성이었다.
현주씨도 공강 시간이면 미술 전시나 특색 있는 큐레이션의 영화를 보기 위해 수원과 서울을 수도 없이 오갔다. 영화 마케팅이라는 새로운 꿈을 꾸게 된 것도, 복수전공으로 문화산업을 택한 것도 이 경험 덕분이었다.
넓은 세상을 경험한다는 것은 나 자신을 알게 되는 일이기도 했다. 호진씨는 서울살이를 통해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잘하는지 깨달았다. 여고 시절 한 아이돌그룹의 열정적인 팬이었던 그는 서울에 와서야 진짜 ‘덕통 사고’를 당했다. 록페스티벌에서 만난 한 밴드에 푹 빠진 것이다. 호진씨는 말했다. “그때 알았어요. 강릉에 있을 때 아이돌을 좋아한 건 ‘좋아할 수 있는 게 그것뿐이어서’라는 걸요.”
하지만 안도감도 잠시, 서울에 발붙이고 사는 일은 만만치 않음을 곧 깨달았다. 대부분 월세 30만~60만원대의 작은 방에 살며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강릉에선 본 적 없는 서울역의 홈리스, 강남의 명품 거리가 빈부격차를 실감케 했다.
경기 부천의 사립대를 나와 8년째 IT 서비스 기획자로 일하는 김영빈씨(가명)는 ‘서울 토박이’가 가장 부러웠다고 했다. “서울 친구들은 자취를 하는 저를 속도 모르고 부러워했어요. ‘강릉 유지’ 딸 아니냐면서요. 아직도 부모님과 살면서 월급을 차곡차곡 모으고 있는 친구들이 많은데, 그 차이는 어마어마하다고 생각해요.”
더 놀란 것은 서울 사람들의 지방에 대한 무지·무관심이었다. 강릉 사람이라면 2002년 태풍 루사는 잊을 수 없다. 하루에 800㎜가 넘는 물폭탄이 쏟아지며 사망·실종자만 246명, 재산 피해는 5조원이 넘었다. 하지만 서울 친구들은 수도권 피해가 컸던 태풍 매미는 기억하면서도 루사는 전혀 몰랐다. 그는 “하도 모르길래 재산 피해액, 인명 피해 수치를 뽑아 보여준 적도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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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갈림길, 취업
게임사 그래픽 디자이너 취업자
“강원도엔 사행성 게임사 한 곳뿐”

자산운용사 취업 10년차 직장인
“금융사 지방 영업점, 인턴 안 뽑아
서울에 있었기에 취업 가능했다”

취업은 청년층의 두 번째 이동 기점이다. 강릉 소녀들의 ‘2차 이동’은 대학 졸업 전후인 2010년대 초중반 시작됐다. 비수도권 대학을 졸업한 뒤 5명이 수도권으로 올라왔다. 반대의 경우는 3명(강릉 2명·세종 1명)이다. 이 시기 수도권 거주자가 15명에서 16명으로 비수도권을 앞질렀다.
서울의 유통회사에서 상품기획자로 일하는 최서현씨(가명)는 2012년 말 춘천에서 상경했다. 그의 대학 생활은 강원도 탈출을 위한 준비 기간이었다. 편입과 교환학생, 해외취업 등 시도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무조건 인서울 대학에 가고 싶었는데 못 갔어요. 편입도 해외취업도 하지 못했을 때에는 온 우주의 기운이 나를 강원도 안에 잡아두려는 건가 싶었어요.” 서현씨는 졸업 전부터 서울에서 방을 잡았고, 얼마 안 가 취업할 수 있었다.
원하는 일자리가 서울에만 있는 경우도 많았다. 서울의 게임회사에서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하는 길효리씨(가명)는 강원도의 대학을 나와 서울로 취업했다. 사행성 게임을 만드는 업체 한 곳을 제외하면 강원도에는 게임회사가 한 군데도 없었다.
효리씨는 고향에 머물며 취업준비를 위해 서울로 디자인 학원을 다녔다. 강원도에는 그래픽 디자인을 배울 수 있는 곳이 없다. 약 2년간은 매주 일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열리는 수업을 듣기 위해 왕복 8시간을 꼬박 버스에서 보내야 했다. “제가 차 안에 있던 그 시간에 서울 친구들은 연습을 더 하면서 진도를 뺄 수 있었어요. 확실히 그 친구들이 취업도 빨리했고요.”
자산운용사에서 10년째 일하고 있는 한예현씨(가명)도 서울에 있었기에 취업 기회도 주어졌다고 생각한다. 서울의 한 사립대를 졸업한 예현씨는 대학 시절 자산운용사에서 인턴을 한 경험을 살려 빠른 취업에 성공했다. “강릉에 있었다면 기회가 없었을 거예요. 자산운용사는 서울에 몰려 있고 다른 금융기업의 지방 영업점들은 인턴을 뽑지 않거든요.”
취업이라는 큰 산을 넘은 강릉 소녀들의 최대 고민은 이제 ‘내 집 마련’이다. 치솟는 수도권 집값으로 출신과 관계없이 청년층에게 내 집 마련은 요원해졌지만 지방 출신 청년들의 출발선은 서울 출신들보다 뒤에 그어져 있다. 대충 따져봐도 서울의 부모님 집에서 생활하는 이들과 비교하면 월세와 생활비를 포함해 한 달 최소 100만원 이상을 10여년 손해본다는 계산이 나온다. 한국 사회에서 서울에 집이 있다는 건 매우 유리한 고지를 점한 것이기도 하다. “서울 출신인 회사 후배가 저보다 모은 돈이 훨씬 많다는 것을 알았어요. ‘나보다 연봉 많이 받는 거 아니냐’고 물어볼 정도였죠. 서울 출신은 지방 출신보다 적어도 1000만원 연봉을 더 받는 것과 마찬가지예요.”(김영빈씨)
강릉·고창 출신 여고 동창생 19명의 생생하고 자세한 이야기는 인터랙티브 <지방 소녀들은 어디로>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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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핫플’이 된 고향…돌아갈 수 없는 이유
‘힙스터의 성지’가 된 강릉이지만
다시 돌아가겠느냐 물으면 ‘NO’
영화 마케터·IT 서비스 기획자 등
고향선 구직 어렵고 임금 낮아져

강릉은 요즘 ‘힙스터의 성지’로 떴다. 해안을 따라 늘어선 개성 있는 카페와 서핑숍이 전국에서 온 이들로 북적인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무렵 개통된 KTX 강릉선으로 수도권과의 거리도 더 가까워졌다. 코로나19 사태 이전인 2019년 강릉을 찾은 방문객은 1900만명에 달했다. 2015년 이후 전입이 전출을 역전하면서 2019년 말 기준 강릉시 인구(21만3442명)는 전년 대비 485명 증가했다. 빠르게 쪼그라드는 여느 지방 소도시들과 대조적이다.
고향의 활기는 강릉으로 유턴한 소녀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김승혜씨(가명)는 춘천에서 대학을 졸업한 뒤 강릉으로 돌아와 10년째 문화 관련 기관에서 일하고 있다. 수도권 취업을 노리다 우연한 기회에 일을 하게 됐다. 그는 “지역 문화유산 관련 행사를 열면 젊은층 참여도가 높고 호응도 좋다”며 “강릉의 문화적 요소를 보고 이주하려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승혜씨도 강릉 생활의 만족도가 점점 높아진다고 했다. “몇년 사이 KTX가 생기고 놀거리도 많이 생겼어요. 일하면서 지역을 알아가는 재미도 있고요.”
수도권에 자리를 잡은 강릉 소녀들에게도 고향은 숨통 트이는 곳이다. 짧게는 5년, 길게는 10년간 사회생활을 한 소녀들은 매일 아침 ‘지옥철’에 몸을 실을 때마다 강릉의 깨끗한 공기와 바다를 떠올린다.
하지만 ‘고향에 내려가 살 수 있냐’는 질문에는 대부분 고개를 저었다. “강릉은 홈(Home)이에요. 돌아가고 싶지 않은 홈.” 김현주씨 목소리에 씁쓸함과 단호함이 뒤섞여 있었다. 그는 “강릉에서는 내 일(영화 마케팅)을 할 수 없다. 이 일을 하는 내 자신이 좋고 앞으로도 할 생각”이라며 “강릉에서의 현주라는 그 삶의 단계는 확실히 지나온 느낌”이라고 말했다.
강원도 강릉의 A여고 3학년 1반 동창생인 김현주씨와 김영빈씨(가명) 장호진씨(가명)가 지난달 12일 서울 남산공원의 카페 창가에 앉아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고 있다. 졸업 후 처음으로 한 자리에 모인 ‘강릉소녀’들은 서울에 사는 30대 초반 여성으로서의 고민들을 나눴다. 김창길 기자
강원도 강릉의 A여고 3학년 1반 동창생인 김현주씨와 김영빈씨(가명) 장호진씨(가명)가 지난달 12일 서울 남산공원의 카페 창가에 앉아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고 있다. 졸업 후 처음으로 한 자리에 모인 ‘강릉소녀’들은 서울에 사는 30대 초반 여성으로서의 고민들을 나눴다. 김창길 기자

일자리는 귀향의 가장 큰 장애물이다. 강릉의 지역내총생산(GRDP)에서 가장 비중이 큰 것은 숙박이나 음식점업 등 서비스업(71.9%)이다. 전국 평균(59.8%)을 크게 웃돈다. ‘강릉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카페 아니면 공무원’이라는 자조가 우연이 아니다. 기자와 연락이 닿은 비수도권 거주자 중 일부는 “서울로 갈 방법을 찾고 있다”는 말로 인터뷰를 거절했다.
취업 상황에서도 불균형은 드러난다. 비수도권 거주자들의 경우 공무원이거나 공공기관, 공기업에서 일하는 사람이 6명(전 직장까지 포함하면 7명)으로 약 40%를 차지했다. 수도권 거주자 16명 중 3명만이 공무원·공기업 직원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압도적인 비율이다. 수도권 거주자 16명의 일은 영화 마케터, 배우, 게임 그래픽 디자이너, 자산운용사 직원, IT 서비스 기획자, 미디어 콘텐츠 운영자, 간호사, 교사 등 다채롭다. 강릉에 내려가면 같은 일을 지속할 수 없거나 임금 수준을 유지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의외로 귀향 의지가 강한 쪽은 결혼 후 육아를 하는 이들이었다. 차경은씨(가명)는 서울에 사는 6년차 주부로 네 살 아들을 키우고 있다. 서울에서 대학을 나와 서울 출신의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그런 그가 요즘 고민하는 점은 멀리 사는 가족의 도움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안정적인 일자리만 있다면 강릉 이주도 고려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또한 임시방편이다. “아이가 어려서 향후 몇년 정도는 괜찮겠지만, 중학생 이상 되면 원하는 교육을 강릉에서 받기가 힘들지 않겠어요. 그때는 서울로 돌아와야죠.”


서울이라는 무지개
“Oh, I’m an alien. I’m a legal alien(오 나는 이방인, 합법적 이방인이죠).”(스팅, ‘잉글리시 맨 인 뉴욕’)
스팅의 노래 가사처럼 서울에 얼마나 머물렀건, 서울살이에 얼마나 익숙해졌건 강릉 소녀들은 스스로를 이방인이라 느낀다. 박소흔씨는 이방인으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했다. “ ‘누구네 집 딸’이 아니라 온전히 나로 살 수 있는 홀가분함이 좋아요. 서울의 그런 면들이 나를 더 성장하도록 했고요.”
하지만 ‘뚝방에서 잠자리를 잡던’ 추억이나 지쳤을 때 돌아갈 곳이 있다는 사실은 서울살이를 견뎌내도록 하는 동력이자 ‘서울내기’들에겐 없는 뒷배다. 노년에는 강릉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강릉 소녀들은 서울이 뭐냐는 물음에 ‘잡을 수 없는 무지개’ ‘애증’ ‘기회의 땅’ ‘나를 성장시킨 곳’ ‘미래’라고 했다. 서울에 대한 양가감정이다. 놓쳐선 안 될 메시지가 한 가지 더 있다. 서울이 제공하는 성장, 미래, 기회와 기꺼이 맞바꿀 무언가가 지방에 없는 한 이들의 귀향은 없을 거라는 점이다.
설레며 대관령 넘던 여고동창들 “서울? 잡기 힘든 무지개”
설레며 대관령 넘던 여고동창들 “서울? 잡기 힘든 무지개”특별취재팀
배문규·최민지(스포트라이트부)
박채영·문광호(사회부)

 

 

 

수도권 아니면 버티기 힘든 구조…“학교 간 벽 허물고 뭉쳐야”
최민지 기자입력 : 2021.10.12 06:00 수정 : 2021.10.12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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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엔딩’이 시작됐다

지난달 8일 강원 태백시 A대학 운동장의 물웅덩이에 적막한 캠퍼스의 모습이 비치고 있다.   이준헌 기자 heon@kyunghyang.com

 

 



과 하나만 남거나 정원 못 채워 총장 사퇴…지방대란 꽃이 진다
지난달 8일 강원 태백시의 A대학 캠퍼스. 코로나19 상황을 감안해도 믿기 어려울 만큼 적막했다. 점심시간을 알리는 찬송가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교직원의 것으로 보이는 자동차 한두 대만 오갈 뿐 학생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옥외 계단의 틈새마다 잡초가 무성했다. ‘관광관’ 건물 입구에는 2019년 11월 열린 카지노학과의 ‘글로벌 딜러를 향한 카지노 하반기 시연회’ 현수막이 그대로 걸려 있었다. 문이 닫힌 교내 편의점에도 2019년 연말 콘서트 티켓 증정 행사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이곳 시간은 2019년 이후 멈춘 듯 보였다.

 


“삭막하죠? 오늘 1만원도 못 팔았어요.” 대학 부근에 있는 영광문구사 주인 김미자씨(가명·63)가 힘없이 웃었다. 이미 땅거미가 진 시간이지만 하루 매상은 기자가 산 1800원짜리 수첩을 포함해 몇천원뿐이었다. 경북 영주 출신인 김씨는 40년 전 광산에 취업한 남편을 따라 태백으로 왔다. 4년 뒤 남편이 광산 일을 하다 다쳐 그만두면서 열게 된 문방구가 올해로 37년째다. 세월의 더께가 역력한 가게 천장에 장난감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요즘은 완구도 같이 팔아요. 문구만으로 안 되니까요.” 20년 전에 비해 매상은 10분의 1 수준이다. 온라인 상거래 규모가 커지며 자영업이 어려워진 건 흔한 일이지만 이 가게는 A대학 학생들이 줄어든 영향이 겹쳤다.

 


2010년대 유행한 노래 ‘벚꽃 엔딩’은 언제부턴가 지방대학의 미래를 가리키는 관용어로 쓰인다. 벚꽃이 빨리 피는, 즉 수도권에서 먼 대학부터 ‘진다’는 뜻이다. 2021년은 ‘벚꽃 엔딩’을 실감케 한 해였다. 신입생 정원 미달의 책임을 지고 대학 총장이 물러나는 초유의 사태로 위기감이 증폭됐다. 일부 사립대에선 재정악화에서 비롯된 학내 분규가 잇따랐다. 여론은 지방대 위기에 관심이 적다. 어차피 우후죽순 난립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고, 문제의 상당 부분은 지방대 구성원들이 자초한 일로 간주되는 분위기다. 하지만 지방대 위기의 책임을 오로지 지방대에만 돌릴 수 있을까.
수도권 아니면 버티기 힘든 구조…“학교 간 벽 허물고 뭉쳐야”

 


태백에서 벌어진 일
태백 A대학 한때 학생 1200명
강원랜드 덕에 카지노학과 인기
수도권에 동일 학과가 생기면서
경쟁력 잃고 간호학과만 남아
직격탄 맞은 상인들은 한숨만

A대학은 1995년 개교했다. 폐광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해 2000년 내국인 카지노인 강원랜드가 인근 정선군에 들어서면서 대학은 지역민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카지노학과의 인기가 고공행진했고, 호텔관광과와 골프레저과 등 관광 관련 14개 학과에 학생 수도 1200명(2000년대 초반)까지 불어났다.

 

 


하지만 올해 이 대학에 남은 것은 간호학과 1개(정원 98명)뿐이다. 신입생 모집이 어려운 호텔카지노관광과 등 6개 학과를 지난해 폐지하면서 ‘관광대학’ 교명이 무색해졌다. 이 대학 관계자는 “강원랜드가 고용이 안정된 공기업이라 신입사원 모집규모가 작은 데다 수도권 대학에 카지노학과가 잇따라 생기면서 경쟁력을 잃었다”고 말했다. 현재 등록학생 수는 600명을 밑돈다. 설상가상 코로나19로 대면수업이 사실상 중단되면서 외지 출신 학생들도 떠나갔다.
학생 감소는 대학가 상권을 직격했다. 대학 앞에서 호프집을 운영하는 B씨는 매출이 5년 전의 30%대로 줄었다고 했다. 태백에서 20년 넘게 택시를 몬 이모씨(50대)는 예전엔 하루 스무 번씩 손님을 태우고 오갔던 A대학을 지금은 1주일에 한 번 정도 간다고 한다.

 


수도권 아니면 버티기 힘든 구조…“학교 간 벽 허물고 뭉쳐야”

 


2학기 개강 3주차를 맞은 지난달 8일 강원 태백시 A대학 캠퍼스. 건물에 설치된 안내판이 녹슬어 있고 건물 여러 곳의 출입구에 자물쇠가 채워져 있다. 이준헌 기자



총장 사퇴로 번진 충원 미달
지난 3월 김상호 대구대 총장이 신입생 모집 실패에 따른 책임을 지고 사의를 표했다.
김 총장의 사례는 벼랑 끝에 몰린 지방대학들의 위기에 실감을 불어넣었다. 지난 7월에는 강원 원주의 상지대 정대화 총장이 같은 이유로 물러났다. 신입생 충원율이 80%를 밑돈 원광대에서는 ‘총장이 사퇴하라’는 요구가 터져나왔다. 세 곳 모두 유서 깊은 지역 사학이다. 위기는 학내 구성원 간 갈등으로도 번졌다. 부산 신라대는 재정난을 이유로 청소용역 업체와 계약을 해지했다가 청소노동자들의 장기농성 사태를 빚었다. 지방대학 위기가 계속되는 한 언제 어디서든 불거질 수 있는 일들이다.

 


신입생 충원율은 지방대의 위기를 대표하는 지표다. 2021년 전체 331개 대학(전문대 포함)의 신입생 미충원 인원은 4만586명으로 모집 인원(47만3189명)의 8.6%였고, 미충원 인원의 75%가 비수도권에서 발생했다. 

 

미충원율은 비수도권 10.8%, 수도권 5.3%로 지방대가 두 배가량 높았다. 신입생 미등록 상위 5개 지역은 경북(2981명), 부산(2145명), 경남(1981명), 강원(1732명), 전북(1647명)으로 모두 비수도권이다. 대입정보포털 ‘어디가’에 따르면 올해 지방거점 국립대 9개 학교 정시합격선(백분위 점수 기준) 평균은 70.1점으로 지난해(76.3점)보다 6.2점 하락했다.

 

 예전이라면 지거국을 택했을 지역 인재들이 수도권으로 올라가고 그보다 낮은 성적의 학생들이 빈자리를 채우면서 벌어진 현상이다. 1980년대 부산대는 학력고사 커트라인이 연세대, 고려대와 엇비슷할 정도로 지역 인재들이 몰렸다. 하지만 1980년대 중반 부산 기반의 재계 7위 국제그룹이 해체되고 지역경제가 위축되자 ‘인서울’ 분위기가 강해지면서 대학 위상이 하락했다. 

 

온 국민이 ‘서연고’로 시작되는 10여개 대학 서열을 구구단처럼 외지만, 그 안에 서울 바깥 대학은 포함되지 않는다.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초집중’이다. ‘노벨상의 산실’ 교토대학을 비롯해 비수도권에 도쿄권 못지않은 대학들이 다수 포진한 일본과도 대조된다.


수도권 아니면 버티기 힘든 구조…“학교 간 벽 허물고 뭉쳐야”


대학 주변과 시내 번화가 일대 빈 상가들엔 임대광고 현수막과 안내문이 붙어 있다. 이준헌 기자

‘벚꽃’이 질 수밖에 없는 구조
대학 설립 자유화로 정원에 거품
정부 지원은 수도권 대학에 편중
등록금 동결로 지방 사립대 ‘허덕’
평가 미달 땐 부실 대학 낙인까지

 



지방대의 위기에는 학령인구 감소와 정책의 누적된 실패에 불균형 발전, 수도권 대학 편중 지원 등 다양한 요인이 중첩돼 있다. 김영삼 정부 당시인 1995년 도입된 대학설립 자유화(대학설립 준칙주의)로 대학 정원에 거품이 끼기 시작했다. 이미 장기적으로 학령인구 감소가 예견되던 시점인데도 ‘학생의 선택을 못 받는 학교는 저절로 도태될 것’이라는 시장논리로 대학 정책을 짠 것이 화근이었다. 7년 만에 대학 정원은 32%가 늘었다. 통계청에 따르면 올해 45만6000명인 만 18세 학령인구는 2024년 43만명, 2035년 37만명, 2040년에는 현재의 61%인 28만명으로 줄어들 것으로 전망된다. 현재의 대학 정원이 유지된다면 2040년에는 수도권 대학과 지역거점 국립대만을 채울 수 있다.

 


사립대 비율이 전체의 85%에 달하는 현실에서 대학 등록금을 13년간 동결한 것은 지방대학들의 존립기반을 약화시켰다. 웬만한 지방 사립대들은 등록금 수입 대부분으로 인건비와 운영비 대기에도 빠듯한 실정이다. 3년마다 실시되는 교육부의 대학평가에서 취업률, 재정확보율 등 평가기준에 미달하면 지원이 끊기고 학생 모집도 어려워진다. ‘부실대학’ 낙인은 덤이다. 지난 4월 교육부가 발표한 재정지원제한대학 18개 학교 중 14곳이 비수도권 대학이었다. 돈 없는 대학은 이 서바이벌 게임에서 버틸 수 없다. “학교 역량과 무관하게 돈이 없으면 정량 지표를 맞출 수 없는 구조입니다. 돈 있는 대학은 자기 돈 털어가며 버틸 수 있어요. 버티다 죽는 대학이 생기면 경쟁자가 줄어드니 살아남을 수 있는 거죠.”(박용국 영산대 부장)

 


그럼에도 정부의 지원은 수도권 대학에 편중됐다. 2014~2018년 서울대·고려대·연세대 3개 대학에 대한 국가 지원금이 전체 고등교육재정의 10%인 6조5600억원에 달한다는 사실이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밝혀졌다. 학생 1인당 지원 금액은 서울대가 평균 2900만원, 연세대 700만원, 고려대 650만원이다. 나머지 전국 대학생 1인당 평균 지원 금액은 464만원으로 서울대의 6분의 1 수준이다. 몇년 새 한국 사회의 최대 가치로 떠오른 ‘공정’에 어긋나는 사례이지만 ‘학벌지상주의’ 한국 사회에서는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강원 태백시 A대학의 한 건물 구내 복도가 지난달 8일 불이 꺼진 채 어둠에 휩싸여 있다. 이준헌 기자 heon@kyunghyang.com

지방대학들이 위기에 빠지자 교수들의 수도권 지향도 뚜렷해졌다. 지역 연구과제 대신 ‘전국권 과제’로 성과를 쌓은 뒤 수도권 대학으로 이동하는 교수들이 늘어나면서 교수진 확보가 더 어려워졌고, 대학 경쟁력을 추가로 약화시키고 있다. 한 비수도권 대학 관계자는 “수도권 대학의 교수들에게 초빙 제의를 하면 ‘집을 줄 수 있냐’부터 물어본다. 수도권 대학에서 받는 급여보다 더 주겠다고 해야 올까 말까 한다”고 말했다.

 


정부가 2016~2018년 구조조정으로 줄인 대학 정원 5만여명 중 75%가 비수도권 대학이었다. 지방대학들은 비상이 걸렸다. 인문·예술계 학과를 통폐합 및 폐지하고 취업에 유리한 학과를 신설하거나, 인지도를 높이려고 학교 이름을 바꾸는 대학도 있었다. 비수도권 대학들이 교육부 평가를 통과하기 위해 수억원씩 들여 컨설팅을 의뢰하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충남지역 사립대 교수였던 C씨는 “재학생 충원율 같은 지표들은 어쩔 수 없더라도 대학발전계획 등 ‘정성평가’를 잘 받기 위해 컨설팅을 의뢰하는 일이 일반적인 현상”이라고 했다.

 


하지만 여론은 온정적이지 않다.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 되겠느냐’는 식이다. 지방대가 ‘지잡대’로 불리는 사이 지방대와 지방대 학생들의 박탈감은 날로 커진다. 출신 대학이 인격과 동일시되고, 정부마저 “학력 차별은 합리적”(교육부의 ‘차별금지법’에 대한 검토 의견)이라고 공언하는 것이 현실이다(교육부는 비판이 거세지자 지난 7월 입장을 철회했다).

 


지방대, 어떻게 풀어야 하나
정부, ‘시장논리 따른 퇴출’ 방점
대학 정원감축 비수도권이 75%
대학선 학과 신설·교명 변경 등
교육부 평가 통과 위해 ‘발버둥’

정부 정책은 경쟁력 없는 대학은 퇴출하도록 하는 데 방점이 찍혀 있다. 하지만 지방대학 정책을 시장논리로만 접근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입시에 성공하지 못한 지방의 학생들이 대학에서 성장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고, 지방대학들이 그 기회를 열어주고 있는 것이다. 지방대학의 가장 큰 잘못은 ‘지방에 있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대학 자체가 지역경제에 미치는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한국지역경제학회의 2017년 연구에 따르면 지방거점 국립대인 전북대가 전북 경제에 미치는 생산 및 취업유발효과는 각각 4760억원과 5096명으로 추산됐다. 서남대와 한중대 폐교로 전북 남원과 강원 동해의 지역경제에 끼친 충격도 상당했다. 지역사회가 받을 심리적 타격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A대학이 태백시에서 유발하는 경제효과는 연간 35억원(강릉원주대 미래정책연구원 추계) 남짓하지만 태백시로서는 태백 유일의 대학의 쇠락에 손을 놓을 수 없는 처지다. 태백 경제를 떠받쳐온 장성광업소가 이르면 2024년 완전히 문을 닫기 때문이다. 장성광업소 폐광 시 지역경제 피해 규모는 2359억원으로 지역내총생산(GRDP)의 25%에 달한다. 지역사회에서는 ‘뭐라도 남아 있어야 한다’는 절박감이 크다.

 


우선 재정위기에 대한 처방으로 등록금 동결 상태를 유지하는 대신 대학에 대한 운영비 지원을 늘려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정대화 전 상지대 총장은 “등록금을 올릴 수 없는 상황임을 감안하면 국공립, 사립 구분 없이 대학당 30억~40억원 정도의 경상비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학령인구 감소에 따른 정원 감축이 불가피한 만큼 등록금 수입 감소분에 대응하는 지원을 함으로써 대학 운영의 투명성과 공공성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좀 더 장기적으로는 지역거점 대학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인 투자가 필요하다는 제안도 나온다. 마강래 중앙대 교수는 “서울 주요 대학을 지방으로 옮기자는 주장은 지거국을 하나 더 만드는 결과일 뿐”이라며 “현존하는 지역거점 대학에 제대로 투자하고 기업과의 연계 프로그램을 강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지방대 위기의 근저에는 수십년째 가속화돼온 ‘수도권 집중’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는 전문가가 적지 않다. 조옥경 교육개발원 고등교육정책실장은 “흔히 지방대의 위기를 대학 내부의 문제라고 여기지만 외적인 요인이 더 크다. 경제·문화·사회적 자본이 수도권으로 몰리면서 학생들이 수도권 대학을 가게 된 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말했다. 임은희 대학교육연구소 연구원은 “균형발전이라는 큰 그림 속의 다른 의제들과 정밀하게 연계된 다층적인 해법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자치단체-대학-기업의 연계 움직임

 


교수들마저 ‘수도권 지향’ 뚜렷
결국 학교 경쟁력 약화 악순환

지자체·대학·기업의 ‘해법’ 고민
울산·경남 지역혁신플랫폼 사업
핵심 분야 선정, 인재 양성·공급



수도권 집중 흐름을 끊어내야 지방대의 위기도 풀 수 있다는 인식하에 광역자치단체들이 지역의 대학, 기업들과 협력해 해법을 모색하는 움직임이 최근 들어 나타나고 있다. 비수도권 자치단체들이 ‘수도권 일극체제’에 대응하기 위해 추진하는 ‘메가시티 구상’의 한 축인 지역혁신플랫폼(RIS)이 한 예다. RIS는 지자체와 지역대학·기업·연구기관 등이 협력해 지역 핵심 분야를 선정하고 지역 인재를 양성·공급하는 사업이다. 지역 사정에 맞게 교육체계를 개편해 인재를 키우고, 기술 개발로 경쟁력을 높임으로써 청년들의 이탈 행렬을 막자는 취지다.

 


시행 2년째인 동남권의 울산·경남 RIS는 스마트제조엔지니어링과 스마트제조ICT, 스마트공동체 등 3개 핵심 분야를 선정했다. 경남도와 울산시, 17개 지역대학, 49개 지역혁신기관이 참여한다. RIS의 핵심인 공유형 대학모델(USG)에는 17개교 학생 300명이 참여하고 있다. 지역의 대학들이 기업들과 협력해 개발한 커리큘럼을 이수(복수전공)한 뒤 인턴십 등을 거쳐 취업할 수 있다. 학교 간 장벽을 넘어 뭉쳐야만 문제를 풀 수 있다는 자각이 협업을 가능케 한 것이다.
학생들의 반응은 긍정적이다. USG 융합전공으로 E-모빌리티(전력이동장치)를 택한 창원대 전자공학과 김덕환씨(23)는 수도권으로 취업하려던 생각이 바뀌고 있다고 했다. 전기차 소프트웨어 기술자를 꿈꾸는 김씨는 “USG가 지자체-학생 간 연결에 적극적이고 지원도 폭넓게 해주고 있어 경남에서 연구원으로 남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USG에서 스마트기계설계를 전공하는 이건탁씨(23·창원대 기계공학)도 “실무에 도움 되는 심화학습을 할 수 있어 취업에 유리할 것 같다”고 했다. 김해 출신인 그 역시 수도권 대신 경남 취업을 고려 중이다.

 


USG에 참가하는 교수들에 대한 지원도 강화되고 있다. 지난 8월까지 울산·경남RIS 총괄센터장을 맡았던 이은진 경남대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교수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이 지역(대학)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진다는 점”이라며 “신임 교수 40명에 대해 연구용 시설과 장비 구입에 쓸 수 있도록 1인당 2억원씩 지원했다”고 말했다.

 


RIS는 다양한 주체가 참여하기 때문에 이해관계가 엇갈리기도 한다. 일부 사립대에서는 RIS가 지방거점 국립대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비판도 나온다. 한 사립대 교수는 “공동입학·공동학위수여제 등 이 한계를 극복할 제도 없이는 협력의 틀이 커지기 어렵다”고 말했다.

 


RIS의 성패를 예단하긴 어렵다. 다만 확실한 것은 수도권 집중이라는 거대한 물살을 지방대학들이 홀로 헤쳐나가기 쉽지 않다는 점이다. 지방대학들의 ‘뭉치기 전략’에 눈길이 쏠리는 이유다.



기울어진 운동장 텅빈 시골 학교 운동장을 쓰러질듯 아찔하게 기울여 찍은 사진. 날로 심해지는 수도권 대 지방의 교육 격차를 연상케 한다. ⓒ이제석 광고연구소

 




※‘이제석광고연구소’가 경향신문 창간 기획 ‘절반의 한국’과 함께 합니다. 연구소가 제작한 공익광고가 기획 기사의 메시지를 한층 선명하게 할 것입니다.


■특별취재팀 배문규·최민지(스포트라이트부) 박채영·문광호(사회부)

 

 

 

 

 

“서울은 ‘나쁜 심장’ 같아요, 순환이 안 되잖아요”
최민지·강한들·김혜리·민서영·이홍근 기자입력 : 2021.10.08 06:00 

 



“서울은 ‘나쁜 심장’ 같아요, 순환이 안 되잖아요”사진 크게보기
인생을 ‘100m 달리기’에 빗대면
지방선 25m 뒤에서 출발하는 격
보고 듣는 것·만나는 사람도 차이
기회 얻으려면 서울살이 비용 내야



100m 달리기에서 누군가의 출발선이 당신보다 25m 앞에 그어져 있다면 어떤 기분일까.

 

‘25m.’ ‘인생을 100m 달리기로 비유할 때 서울 출신의 출발선은 몇m 앞에 있다고 생각하나’에 지방 청년들이 내놓은 답이다. 이 간격은 평생 따라잡지 못할 만큼 아득해 보이거나, 기를 쓰면 닿을 듯 말 듯한 ‘희망고문’이었다. 이 차이를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경향신문은 지난달 1~12일 만 19~39세의 비수도권 출신 청년 123명(비수도권 거주 68명, 수도권 거주 55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들이 쏟아낸 이야기는 ‘기회의 격차’라는 말로 집약할 수 있다.

 


■돈을 밟고 서야 잡을 수 있는 서울의 ‘기회’

 


“수도권에서 태어난 것만으로 이미 출발점이 달라요. 누릴 수 있는 ‘문화자본’과 ‘인간자본’에서 차이가 크니까요. 서울 출신들은 금수저, 은수저에 버금가는 ‘서울수저’ 아닌가요.” 부산에서 교사로 일하는 황경림씨(26)가 말했다. 충북의 대학을 나와 임용고시라는 바늘구멍을 통과했지만, 그에게도 서울 거주자가 누리는 특권은 커 보였다. 충남의 한 소도시 출신 통역사 이모씨(27)는 인터뷰 도중 ‘기회’라는 말을 자주 했다. 통역사가 필요한 행사들의 절대다수는 수도권, 그중에서도 서울시내 몇 곳에 몰려 있어, 고향에 머물며 통역일은 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통역은 서울에서 ‘스탠바이’하고 있어야 기회를 잡는 경우가 많아요.”

 


전북 남원에서 공중보건의로 일하는 공모씨(28)는 “그냥 흘려보내는 시간에도 높은 수준의 뭔가에 노출돼 있다는 게 서울살이의 가장 큰 특권”이라고 말했다. 대도시에서 보고 듣는 것, 만나는 사람 모두 개인의 성장을 자극한다는 의미다. 부산 출신으로 제주에서 공기업에 다니는 A씨(26)도 “실제로 뭘 얻진 않더라도 얻을 가능성을 얻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기회를 얻는 데는 돈이 든다. ‘입경(入京) 비용’이 얼마인지에 대해 월세(서울시내 원룸 기준), 생활비를 합해 100만원(월평균)을 최소 기준으로 꼽았다. 보증금을 합하면 1000만~2000만원이 추가된다. 상경한 청년들은 돈 문제 해결을 가장 힘겨워했다.

 


서울의 게임회사에 다니는 이다은씨(23·부산)는 “고향에 있는 대학에 다녔더라면 집 한 채는 샀을 것”이라는 말을 버릇처럼 되뇐다. 강원 태백 출신으로 서울에 사는 취업준비생 공모씨(29)는 “서울살이는 돈을 밟고 서 있는 기분”이라고 했다.
지방 출신이고, 지방에서 살기에 겪는 설움도 적잖이 있다. 대구에서 나고 자라 서울 취업을 준비 중인 곽미경씨(27)는 지난해 코로나19 사태 초기 대구에 쏟아진 비난을 잊을 수 없다. 대구지역 신천지교회를 중심으로 감염병이 확산하자 대구·경북은 아예 ‘혐오의 대상’이 되다시피 했다. “수도권 확진자 비율이 압도적이지만 아무도 수도권을 탓하지 않잖아요. 결국 지방에 대한 차별적 시선 때문인 것 아닌가요?”

 


수도권 중심사고는 일상도 불편하게 한다. 코로나19로 고향 대구에 머물며 경기도의 한 대학에 다니는 홍모씨(23)는 조별 과제를 할 때마다 기분이 좋지 않다. “조별 과제에 10명이 모일 때가 있었는데 3명만 서울, 나머지는 전국 각지에 있었어요. 그런데도 당연하다는 듯 서울에서 모임을 잡아요. 중간인 대전에서 만나도 되는데 거절하더라고요.”

 


사회 참여 기회에서 격차를 느낀다는 이도 있었다. 차민구씨(27·울산)는 “(이명박 정부 초기) 광화문은 전쟁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거기 가야 대한민국 정치에 참여한다는 느낌이 들 텐데 울산에 있느라 그러지 못했다”고 말했다. 지방의 목소리는 주목받지 못하는 “고요 속 의 외침”(김재민·25·충주)일 뿐이다.

 


청년들은 미디어의 수도권 편향이 지방 거주자의 박탈감을 키운다고 했다. 미디어 속 배경과 기준은 수도권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강현우씨(21·강원 양구)는 “우리 동네 거리 두기 단계는 몰라도 서울이 몇 단계인지는 꿰고 있다. 언론이나 포털 사이트의 기준이 늘 서울이니 싫어도 자연스럽게 외워진다”고 했다. ‘여의도 면적 몇 배’로 넓이를 표현하거나, 비수도권 이슈를 다룰 때 농어촌 풍경을 등장시키는 ‘타자(他者)화’와 ‘오리엔탈리즘’에서 언론이 벗어나야 한다고 했다.

 


■좋든 싫든 거쳐야 하는 ‘플랫폼 서울’


청년들이 수도권으로 몰리는 것은 수도권이 ‘플랫폼’이나 포털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서울이 싫더라도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가야 한다. 새로운 아이디어와 사업은 이 인적 자본에서 탄생한다. 하버드대 에드워드 글레이저 교수도 <도시의 승리>에서 서울의 성공 요인으로 전국에서 몰린 ‘인적 자본’을 꼽았다.

 


고향 부산에서 프리랜서로 영상 업무를 하는 안모씨(25)는 대학 시절을 보낸 서울을 이렇게 표현했다. “비서울 인프라(지방 청년)들이 서울에 모여 서울의 가치를 높여주는 게 아닐까 싶었어요.” 가수 겸 작곡가로 세종에 거주 중인 최도원씨(23)는 서울을 사람들이 몰리는 카페에 비유했다. 두 사람은 모두 조만간 서울로 올라갈 생각이다.

 


강릉·고창 출신 여고 동창생 19명의 생생하고 자세한 이야기는 인터랙티브 <지방 소녀들은 어디로>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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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나쁜 심장’

 


청년들은 서울 입성을 성공이나 주류 사회 진입으로 여겼다. 대구 출신으로 서울의 대학을 졸업한 뒤 전남 나주의 공기업에 다니는 B씨(26)는 “서울로 올라가야 ‘그들의 리그’에 낄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최종 면접 전날 울었다고 했다. “붙고 싶은데 안 붙고 싶었어요. 붙으면 여기(나주)서 살아야 하니까요.”

 


서울만이 주류라는 감각은 지방 거주를 ‘낙오’나 ‘실패’로 여기도록 한다. 서울의 대학으로 진학했거나 서울 진학·취업 등을 목표로 삼다 유턴한 이들에게서 이런 경향이 두드러졌다. “금의환향이 아니라 실패해서 돌아가는 느낌”(김모씨·30·울산), “실패한 짝사랑”(권모씨·24·강릉).

 


황경림씨는 서울을 ‘나쁜 심장’이라고 표현했다. 자원을 빨아들이기만 할 뿐 지방과 나누지 않기 때문이다. “심장이 펌프질을 해 피를 온몸에 내보내야 하는데 머금고만 있는 것 같아요. 순환이 안 되니 지방 발전은 더디죠.”

 


나고 자라며 고향의 쇠락을 지켜봐 온 청년들은 수도권 집중이 더 이상 지속돼선 안 된다고 했다. 공공기관 이전, 일자리 창출, 기업의 지역 이전, 미디어의 지역 보도 강화 등을 주문했다. ‘이미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체념하는 이들도 상당수였다. “(불균형) 개선은 이미 불가능하다” “안타깝지만 내가 맞추는 수밖에 없다”(이효연·22·대구).

 


고향의 지속 가능성을 비관하는 청년들도 많았다. “이미 죽은 도시”(창원), “누가 거기(통영) 살고 싶겠냐”는 자조가 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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