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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정당_리더십/새정당의 기초 강화

정태인 <녹색혁명>에 대한 비판

by 원시 2011. 7. 31.


원시

http://www.newjinbo.org/xe/1940722009.03.08 02:33:52555

Re: 녹색 "혁명가" 없는 "녹색혁명" [5] 원시 2009-03-07


제가 질문을 드리는 것이 잘 전달되지 않은 모양입니다. 아래 글 첫 단락을 읽고, "이게 무슨 말인지?" 그런 의문들이 많이 들었습니다. 정태인님이 "녹색혁명 선언"을 하게 된 어떤 배경설명이라고 할까요? 그런 것이 없어서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듭니다.


정태인님 글 :파란색

질문 및 비판: 검정색



정태인/ 녹색혁명당 선언 2


첫째, 마르크스 경제학은 적절하게 녹색을 다루지 못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자본주의 초기에 살았던 마르크스는 기본적으로 생산력이 자연을 변형시키는 인간의 능력에 따라 거의 자동적으로 발전하며,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윤의 추구로 인해 비약적으로 발전한다고 정당하게 가정합니다. 


[의견] 제 생각은 정태인님이 "마르크스 경제학은 적절하게 녹색을 다루지 못할 가능성이 있습니다"라고 쓰면, 아니 당연히 의문이 듭니다.  마르크스 경제학 어느 부분인지, 어느 연구가인지, 아니면 어떤 실천 집단이 "녹색 (환경/생태 주제들)"을 적절하게 다루지 못했을까? 이런 자연스런 질문을 할 수 있지 않나요? 


맑스랑 이야기한 것을 맞춰볼 필요는 있다고 봅니다. 무슨 해석학하자는 것, 성경주석달자는 것은 아니지만요. 


"자본주의적 농업에서 일어나는 진보(발달)는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것뿐만 아니라, 땅 (토지)을 착취하는 기술과 방법의 진보를 의미한다. 주어진 시간에 토지의 비옥도를 증가시키는 것 (토지의 생산성 단위 증식)은 그 토지의 지속적인 산출능력/비옥도를 떨어뜨리는 것을 의미한다 (맑스/ 자본론 1권)"


그리고, 이미 알려져 있는 몇가지 생태/환경 운동들, 한국 뿐만 아니라, 해외 사례들을 보면, 오히려 맑스의 자본주의 비판과 생태 문제를 연결시키려는 운동들이 있었지 않습니까? 정태인님 같은 분은 당원들이나 독자들에게 자료나 정보는 제공해주는 게 옳다는 생각입니다. 


민노당, 진보신당의 경우를 보면, 막연하게 좌파 = 맑스주의 옹호, 사민주의자 = 맑스주의 비판, 당 바깥 맑스 연구가 = 민노당, 진보신당은 개량주의자들, 이런 단선적 등식들이 존재합니다. 합리적인 토론이나 정치적 실천들, 연대도 가로막고 있는 중요한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서울대 경제학과는 김수행 선생 이후, 후임 선생을 뽑지 않아서, 학생들이 아예 맑스 [자본론] 강의조차도 못듣고 있고, 석사 박사연구자들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진보정당에서 꼭 맑스 자본론을 공부하자 이건 아니지만, 비판적으로 극복하려고 해도 공부는 해야 할 것 같은데요. 


두번째 문장은, 맑스가 무엇을 왜 "정당하게 가정한다?"는 말이 뭔 말인지 이해가 안갑니다.   


마르크스가 주목한 것은 발전한 생산력이 기존의 생산관계와 부딪히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생산관계를 변혁하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 됩니다. 혁명이란 이 진리를 앞당기는 일일 뿐입니다. 


특히, 정태인님이 해석한 "혁명이란 이 진리를 앞당기는 일일 뿐입니다" 이 부분은, 맑스에 대한 몰이해 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해석들 하나를 절대적으로 맹신하고 있다고 봅니다. 형식(생산관계)과 내용(생산물)의 불일치나 모순이 생겨난다는 것은 다 동의할 수 있지만, "필연적으로 된다"는 말은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됩니다. 


사회과학이나 인문학에서 "진리" 개념은 서로 다를 수 있지만, "진리"라는 말은 이런 맥락에서 사용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맑스에 대한 이해는, 소련 과학아카데미에서 국정 교과서로 출간한 "사적 유물론" "변증법적 유물론 DIA-MAT" ( 4종 세트인, 정치경제학 + 과학적 사회주의) 에서 맑스에 대한 아주 거칠게 조야하게 설명해놓은 것을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굳이 맑스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세계사, 인류사에서 정치 혁명은 "생산관계"만을 매개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런 사유 방식을 경제주의적 결정론이라고 합니다. 정태인님의 맑스에 대한 이해, 특히 맑스가 혁명은 자본주의적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으로 필연적으로 도래한다는, 기계적인 단순도식 "역사적 유물론"입니다.  



마르크스의 이런 사고는 노동자 중심성으로 이어집니다. 군대와 같이 대규모로 규율을 갖추게 되는 집단이 대공장 노동자입니다. 많은 나라의 초기 근대화 과정을 군대가 쿠데타로 시작하는 것처럼 사회주의도 대공장 노동자가 주도하게 된다는 거죠. 레닌의 ‘한 공장 사회주의’는 이런 사고의 기계적 확장입니다. 자본주의의 사회화는 거대한 공장으로 그려지고 단지 소유만 바꾸면 되는 겁니다.

 

이런 사고의 오류는 “낭만적 사회주의에서 과학적 사회주의로”라는 말로 집약됩니다. 공동체 민주주의는 낡은 것으로 치부되고 오로지 굴뚝산업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만이 진보로 생각하게 되는 겁니다. 민주노총이 사실상 대공장 노동자의 소시민적 이기주의(사교육과 아파트를 위한 잔업과 임금 상승)에 지배되는 현실에 과학적 사회주의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다만 자산버블 경제의 든든한 공범일 뿐입니다. (정태인)



맑스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1871 파리꼼뮨에서 나온 정치적 경험들 (그 내용들은 현재 진보신당에서 말하는 민주주의 내용정도나 정책수준과 유사)인데, 그게 레닌의 "사회주의"나 "신경제"와 비슷한 것인지? 의문이 듭니다. 차이점 동일한 점들을 구별하지 않고, 막연하게 맑스의 사고의 확장이 레닌이다 (?) 이것이 소련 과학아카데미 연구원들이 스탈린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Marx-Leninism"이라고 하이픈으로 연결시킨 사고 방식입니다. 1968년 8월 체코 프라하에서 "제국주의적 맑스-레닌주의"를 비판하고,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외치게 된 철학적 배경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민주노총을 비판하는 방식과 "맑스의 정치학"을 연결시키면서, 그래서 맑스 경제학이 녹색 문제를 다루지 못한다. 이런 실천적 귀결을 내리는 것은 설득력이 결여되어 있다고 봅니다. 


1) 현재 민주노총은, 그리고 과거 민주노총은 공식적으로 맑스나 맑스주의를 정치행위의 지침으로 삼은 바가 없습니다. 안기부,국정원 눈에야 다 똑같은 빨갱이로 보이겠만요. 


2) 민주노총 비판은 여러가지 각도에서 (정치행위, 조합내 민주주의, 세대간 교체, 한국 산업 구성, 해외 자본의 공격, 주체적으로 리더쉽 등) 행해져야지, "낭만적 사회주의에서 과학적 사회주의" =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와 동일시하면서, 1871년 파리꼼뮨 경험을 2009년 한국 민주노총 경험와 연결시키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고 봅니다. 


3) 민주노총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원들이지, 변혁이나 진보정치나 좌파사상가 집단이나 정치적 결사체가아닙니다. 민주노총은 미국의 AFL-CIO, 혹은 Change to Win 과 같은 형식의 노동조합원들입니다. 물론 한국 민주노총이 정치 행위나 총파업 선언 빈도가 높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정치결사체나 정당은 아닙니다. 


저는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경제적인 이해관계 (직장 해고 반대, 임금 인상 투쟁, 작업장 환경 개선 등), 즉 조합주의적 투쟁을 하는 것 자체를 문제시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민주노총과 정치정당, 진보정당은 구별되어야 하니까요. 그러한 구별도 못하고, 민노당 시절, 민노총 특정 정파들이 비민주적으로 "민노총"의 이름으로 민노당을 정치적 장악하려고 했다는 게 문제점입니다.


단순히 민노총의 정치적 오류를, 맑스의 "과학적 사회주의"에서 찾는 것이 얼마나 시대착오적인가는, 아마 맑스가 한국 민노총을 보면, 기가 막혀서 턱이 빠졌을 것입니다. 정태인님이 정의하고 있는 공동체 민주주의 개념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1871년 빠리꼼뮨의 직접 민주주의 실천이나 1980년 광주 공동체와 크게 달라보이지 않습니다. PT독재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잘못된 개념 대비를 했습니다. 공동체적 민주주의와 PT독재가 상치된다? PT독재가 스탈린 통치와 같은 것입니까?  


4) 자산버블 공범은 대한민국 성인남녀 전부가 아닐까요? 정태인님처럼 설명하면요. 


자산버블 공범 (박정희 정권 강남 영동 개발부터, 노무현 정권의 버블 세븐, 이명박 정권에 이르기까지)들의 우선 순위를 정하면, 민주노총 조합원들은 금.은. 동메달...바깥 영역에 있지않을까 합니다. 70년대 복부인들이 금메달인데, 요새는 그 순위에서 많이 밀려났다고 합니다.


노동자계급 = 윤리적 실천적 정치적으로 좌파사상으로 무장된 집단으로 "가정"하는 것, 그리고 노동조합 자체가 혁명적이라고 잘못 가정하고, 과잉 기대를 한 것은 아닌가? 그런 생각도 들고, 이런 가정에서 민노총을 비판하는 것은 썩 공정하지는 않다고 봅니다. 


물론 저도 민노총 비판할 때, 한국 노동자 계급의식 문제를 지적할 때, "노동자들의 재테크" 방식을 구체적으로 연구해야 해서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5) 그리고 조금 더 나아가서 말씀드리면,


민노총의 정치적 실패는 심각합니다. 그러나, 정말 한국에서 조중동, 문화일보에서 말하는 "민주노총 = 귀족노동자" 비난에 대해서는,


아니 한국에서 노동자들, 굴뚝 노동자들이, 자동차 타고 자가용 몰고 주말에 드라이브하고 돌아다니면 안됩니까? 울산 대기업 노동자들이 주말이면 골프치는 분들도 있다고 합니다. 그거 욕해야 합니까? 조, 중, 동, 문화일본, 한나라당, 민주당 국회의원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아니 무슨 혁명주의적 공산주의자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노동자들은 죽을 때까지, 하루 10시간씩 일해야 하고, 골프치면 안됩니까? 소주만 까고, 와인 마시면 와인잔 부셔집니까? 


민주노총이 비정규직 노동자와 연대활동을 잘 하지 못하고, 노동자 - 노동자대 갈등을 부추긴 지배계급들의 책략에 놀아난 점은 비판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자가용 몰고 다닌다, 아파트 평수가 30평이 넘는 집에서 산다, 연봉이 얼마다 이런 식으로 "귀족 노동자"라고 비난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 운동 목표는 노동자들의 삶을 상향으로 끌어올리는 것이지, 다 같이 못살자식이 되어서는 안되니까요. 


환경운동연합 수장들이 환경운동 한다는 대의를 놓고, 대기업으로부터 찬조금 받고 활동하고, 검찰 조사받고 그런다고 해서, 생태-환경 문제가 한국에서 정치운동으로 발전되어야 할 주제가 되지 못한다. "생태적 삶의 질서"는 그냥 "낭만적 생태주의"였다. 이렇게 논리적으로 비약시킬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더 중요해진 것은 발전된 생산력이 자연의 한계를 돌파한다는 사실입니다. 기후온난화에 의한 지구의 파멸은 그 첫 번째이자 거의 마지막 증거입니다. 생산관계와 자연의 한계는 결코 동일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좁은 의미의 생산관계를 변혁하는 것, 즉 생산수단이 생산자의 소유로 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생산수단의 추상화인 자본보다 더 중요하고 절박한 것은 삶의 최종 수단인 자연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혁명 후의 노동자 국가가 녹색 실천을 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만, 그 때의 노동자계급은 전지전능의 어떤 기계로 상정된 허구일 뿐, 현실의 노동자가 아닙니다. 적어도 공장의 규율이 삶을 포괄하는 생명의 문제를 알려주지는 않습니다. (정태인)


(질문) "생산수단의 추상화인 자본보다 더 중요하고 절박한 것은 삶의 최종 수단인 자연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여러번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무슨 의미인지요? 


정태인님의 위와 같은  진단은 이론적으로도, 그리고 실천적으로 전혀 타당성이 없습니다. 한국 타이어 노동자들에게 질문해보면 "공장의 규율" 속에 "생태의 가치들"이 얼마나 녹아들어야 하는가를 몸으로 느끼고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회주의 운동, 혹은 어떤 노동자들의 정치 운동이 "생산수단의 사회화"에 그치는 그런 운동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사회주의 운동은 적어도, 그게 사민주의건, 사회복지 체제 지향이건, "작업장이라는 삶의 공간" 그리고 노동자의 생명과 자아실현을 목표로 한다고 봅니다. 


현재 우리 실정은, 케인지안 사회복지 국가 경험이나, 복지제도망 불충분합니다. 실은 독일의 라디컬한 녹색당의 출현은 이러한 서독 사회복지국가체제 비판으로부터 나온 것인데, 우리 출발과는 많이 다르다고 봅니다.  독일 녹색당 초창기는 그 사회복지체제를 비판하면서, 맑스가 말한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맑스는 자연을 일방적으로 착취하고 변형할 대상으로만 보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신체적 정신적 사람과 자연은 서로 얽히고 얽혀 있고,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라고 했습니다) 


생태운동가들의 이론적 원류는 굳이 맑스가 아니어도 됩니다. 아마도 현장에 가보면 대다수가 종교(기독교, 천주교, 불교, 원불교, 천도교 등)인들이 많을 것이고, 그들이 "과학적 사회주의"를 비판하면서 생태운동에 뛰어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민노총 비판을 맑스주의에서 찾는 것은 연목구어입니다. 


민노총 비판한다고 해서 비정규직 운동 해법이 바로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안타깝게도 민노총 위기를 이야기해도 공론화되지 못하고 4-5년 방기한 것, 그것은 꼭 민노총 NL 간부들 잘못만은 아닙니다. 


아울러, 공부하고 책읽고 다른나라에 가보는 것은, 한국에서처럼 "공부 = 경쟁"삼아 하는 것과는 성질이 다릅니다. 공부는 그냥 늘 자기가 좋아서 해야 하는 것이고, 진보정치하는 사람들은 정치목표를 달성코저 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정태인님이 "녹색혁명당 선언"이라고  썼기 때문에, 당원들이나 다른 시민들도 조금 더 명료하게 그 선언 내용을 알아야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팬들이 똑똑해지고 보는 안목이 높아지고, 눈높이가 올라가게 하는 게 정태인 선생님의 역할이라고 봅니다. 정태인님 글이 애매하거나, 모르거나, 또 의견이나 해석이 다를 수 있는 것이니까요.  


당연히 MB가 녹색경제성장 정책을 들고 나왔으니까, 진보정치하는 사람들도 그보다 더 나은 대안들을 연구하고 공부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 수준이 저차원이건, 고차원이건, 일단 당안에 있으면, 서로 협력해서 머리를 모아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당바깥에 한국인이건 외국인이건 우리보다 고민이 더 깊거나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배우고 토론을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봅니다. 


저는 이 녹색경제성장/ 이데올로기나 정책을 담당할 만큼 전문가가 아닙니다. 그리고, 정태인님과 인용경쟁을 할 생각도 없습니다. 적은 희망사항은, 다른 당원들 중에 필요한 정보가 되면 좋을 것입니다. 삶의 맥락에서 보자면, 학계나 좌파, 정치권이 아무래도 서구유럽, 미국 중심이다보니까, 좌파나 우파나 굉장히 그 사람들에 의존적이고, 권위에 기대는 것 같은데요. 제 경험상, 우리 문제 (Korea question)는 우리가 해결할 수 밖에 없습니다. 민족주의 애국주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우리 연구자들이 스스로 "학파"나 "연구자 팀"을 만들지 않으면 해결불가능하다고 봅니다. 지금이 무슨 모스크바 대학에 가서 유학하는 박헌영시절도 아니고, 조선공산당이 코멘테른 승인받기 재롱떨기 그런 시대는 아니라고 봅니다. 


혹시 오해할까 말씀드립니다. 제가 과거에 읽은 책들이나 대화한 사람들을 언급한 이유는, 어떤 권위에 호소하는 게 아닙니다. 정태인님과 비교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우리 문제를 해결하는데, 이견이 있더라도 정태인님과 이야기하는 게 더 중요하고 낫기 때문입니다.  경쟁은 나중에 달나라 좌파 월드컵에서 유니폼 번호 13번 달고 해볼까합니다.  나머지 주제들은, 틈틈히 더 생각해보겠습니다.


다른 당원들도 생각을 보태주시고, 위에 서술한 내용들 많이 비판해주십시오. 그리고 정태인님은 다른 자료들이나 책들을 많이 소개해주시기 바랍니다. 위에 제가 쓴 내용은, 정태인님 글 [이해 불가] 부분도 있고, 제 의견도 넣었습니다. 많은 비판 지적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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